<홍범도 장군, 그는 누구인가?>
230901_제154차 최고위원회 회의
정청래 최고위원: 홍범도 장군, 그는 누구인가.
1868년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그 또한 머슴살이를 하다가 총을 잘 쏘는 명포수로 먼 거리에서 유리병의 입구를 통과해 병의 바닥을 관통시키는 실력을 갖춘 명포수로 유명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 후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총포기화류 단속으로 사냥을 그만두고, ‘이 총으로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라고 다짐하고 항일무장투쟁에 헌신,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가의 지도자요, 상징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최대 600명에서 700명 사이의 의병대를 이끌고 유격전을 벌였고, 이 시기 일본 헌병과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1908년 일제에 체포된 아내 이옥구 여사가 모진 고문으로 옥사했는데, 남편에게 귀순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내가 그런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대로 해라. 나는 죽어도 안 쓴다’라고 끝까지 버텼다고 합니다.
한 달 후 장남 홍양순도 함경북도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차남 홍용환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의병 활동을 활발히 펼치다가 결핵으로 병사했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1920년 홍장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이끌었고,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에 혁혁한 공헌을 했습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한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과 복수전을 기획했고,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피해 무장을 하고 소련의 스보보드니 자유시로 이동했습니다.
1,700여 명의 무장군인들이 들어오자 소련은 무기를 반납하라고 했고, 반납파와 반대파의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을 때 홍범도 장군은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무기 반납 반대파에 서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동분서주 수습하기에 힘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자유시 참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는 점입니다.
그 후 홍범도 장군은 조선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가 말년에 극장 수위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평생을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을 하신 독립운동가로, 영웅적인 삶을 사신 분입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 입국서에 보면 직업 항목에는 ‘의병’이라고 적었고, 목적과 희망 항목에는 ‘고려 독립’이라고 쓰인 서툰 글씨가 보입니다. 배움은 짧았지만, 독립의 정신과 기상은 드높은 ‘독립영웅’의 풍모를 갖췄습니다.
북한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봉오동 전투 때는 만 8세였고, 자유시 참변 때는 9세에 불과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북한 빨치산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해방되기 두 해 전 1943년에 작고했으니, 북한 정권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윤석열 정권의 논리대로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더 문제입니다. 남로당 전력이 있는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오히려 박정희 흉상 동상을 철거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빨치산은 파르티잔(partisan)의 가차음으로 비정규 게릴라 유격대의 뜻으로, 홍범도 장군과 북한 빨갱이와는 아무런 역사적 연관이 없습니다.
이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줄에 대한민국 독립군의 독립 영웅으로 있는 홍범도 장군을 홀대하고 능멸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을 이렇게 대접하면 안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 건국훈장을 받았고, 전두환 노태우도, 이명박 박근혜도 선양한 홍범도 장군을 폄훼하는 당신들은 어느 나라 정권이고 어느 나라 국민입니까?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은 결코 무심치 않을 것입니다.
각오하라 역사 패륜 정권,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홍범도 장군의 영면을 위해 저희 민주당이 국민과 함께 싸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