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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게시판 스크랩 천재들의 연인 루 살로메
째루 추천 0 조회 199 15.12.04 11: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과 사랑, 삶 모두를 껴안고 살다간 여인  

                                 루 살로메 

 

            

 

니체와 릴케의 연인, 예술가의 창작혼을 자극하는 영혼의 뮤즈, 화려한 남성 편력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루 살로메는 이런 모습이다. 그러나 이는 그녀의 한 면일 뿐 전부가 아니다.
루 살로메는 소설과 문학평론을 여러 편 남긴 작가이고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정신분석가로 활약한 인물이다.


 

                                 

본명은 루이즈 폰 살로메. 루이즈 폰 살로메는 1861년 2월 12일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장군 구스타프 폰 살로메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살로메 장군은 독일인의 후예였고, 어머니는 독일과 덴마크 혈통을 이어받은 부유한 제당업자의 딸이었다.

 

 

                         

 


루이즈는 짜르의 겨울궁전 맞은편에 자리 잡은 장군 참모부 관사에서 동화 속 공주처럼 화려하고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페테르스부르크 뒷골목에 가난과 질병, 무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린 루이즈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신’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므로 ‘신’이란 존재가 어린 마음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첫 저서가 《신을 에워싼 투쟁》인 것은 이런 성장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루이즈의 생애 첫 전환점은 17살 때 찾아왔다. 페테르스부르크 주재 네덜란드 대사관 루터교 목사 헨드릭 길로트를 만난 것이다.  루이즈는 길로트 목사에게 종교, 철학, 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문학을 배웠고 길로트의 설교문을 대신 쓸 만큼 지식을 쌓았다. 어느새 루이즈를 사랑하게 된 길로트 목사는 루이즈에게 청혼했다.


길로트를 숭배하던 루이즈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길로트는 루이즈와 나이가 비슷한 딸을 둔 기혼 남성이었다.
정신적 사랑과 육신의 사랑 간의 괴리, 갈등이 이때부터 루이즈의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루이즈는 길로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길로트는 견진성사를 해 주며 루이즈를 루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그녀는 루라는 이름을 쓴다. 첫사랑 길로트가 지어 준 이름 루.


 

                 

                                                루 살로메, 파올 레, 니체


 

 

루 살로메는 러시아를 떠나 스위스 유학길에 올랐다. 취리히 대학은 유럽에서 최초로 여학생 입학을 허락한 대학이다.
루는 여기서 비교종교학, 신학, 예술사, 철학을 공부했다. 이 무렵 철학도 파울 레와 그의 친구 니체를 만난다.
루의 지성과 아름다움에 매료된 니체는 청혼했지만 루는 거절했다.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 니체와 파울 레
둘 다 친구로 사귀고 싶다면서.

열정으로 다가갔던 니체는 루와 헤어진 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탈고했다.
니체의 초인 사상을 대표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탄생하는 데 루가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니체의 말을 들어 보자. 

니체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 한 대목이다.

 

                             

 


“이제까지 그 아가씨처럼 재능 있고 사색 깊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삼십 분만 함께 있으면
서로 크게 얻는 점이 있으므로 둘 다 행복해집니다. 이 마지막 1년에 내 최대 저작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루가 남긴 실연의 상처가 없었다면 <짜라투스트라는....>이 탄생할 수 없었다는 니체의 주장이다.


 

루는 베를린의 지식인 모임에 드나들며 독서와 토론에 열중했다. 모임에서 루는 언제나 유일한 여성이었다. 
큰 키에 날씬한 몸매, 약간 튀어나온 넓은 이마, 기이하리만큼 빛나는 깊은 눈은 루의 지식에 대한 열정을 더욱
돋보이게 했으며 남을 의식하지 않는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22살이 된 루는 첫 소설을 발표했다. 제목은 《신을 에워싼 투쟁》. 신앙과 이성 간의 오랜 갈등을 과감히 다뤘다는 호평이 쏟아졌다. 그 무렵, 루는 갑자기 결혼했다. 당대에 내로라하는 젊은 지성인들을 매료시켰으면서도 그들의 청혼을 모두 거절하던 루였기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상대는 베를린 동양어연구소의 페르시아어, 터키어 교수 칼 안드레아스.  41살인 칼 안드레아스는 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자 칼로 자기 가슴을 찔렀고, 놀란 루는 결혼을 승낙하고 만 것이다.
두 사람은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루는 이혼을 원했으나 안드레아스는 거절했다.

두 사람은 타협점을 찾았다.  루에게 아무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로.


루는 마리라는 하녀를 고용하여 안드레아스의 실제 아내 노릇을 하게 했다.
마리는 아이를 둘 낳았는데, 하나는 어려서 죽고 살아남은 딸 마리헨은 루와 퍽 가까이 지냈다. 루는 죽을 때
마리헨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 루와 안드레아스의 결혼은 43년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루는 언제든 자유롭게 여행하고 사람들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글을 썼다.


소설 《롬》, 《낯선 땅에서》, 《페니취카》, 《인간의 후예들》, 《중간 지대에서》,  비평서 《헨릭 입센의 여자들 모습》, 《니체의 편지》, 그 밖에 에세이와 논문, 서평 50여 편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니체의 편지》는

니체 사상 연구에  꼭 필요한 비평서로 꼽힌다. 루의 소설은 자전적 색채가 매우 짙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루가 르네 마리아 릴케와 만난 것은 1897년, 루의 나이 36살 때다.  그때 릴케는 22살인 무명 시인.

릴케는 루에게 열렬히 구애했다.  처음엔 경계하던 루도 젊은 시인의 정열에 차츰 감동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당신의 아내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당신은 첫 실재였으며  당신을 통해 육체와 인간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었으며,  생명 그 자체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면서 한 말

‘당신만이 진실입니다’ 하는 바로 그 말을 나도 그대로 당신에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루는 회고록에 이렇게 쓰고 있다.  르네라는 필명이 여자 같다고 루가 놀리자, 릴케는 즉시 ‘라이너’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우리가 아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릴케는 루와 이별한 뒤,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하여 딸 루트를 낳았지만 1년이 채 못 가 파국을 맞고 만다.
1926년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린 상처가 파상풍으로 번져 세상을 떠났다. 죽어 가는 침상에서 릴케가 찾은 사람은
바로 루였다.


 

                                         릴케와 루 살로메


 

“루는 모든 걸 압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마 루는 위안을 줄 수 있을 꺼얘요”

루는 릴케 일생의 불안의 깊은 이유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정신 분석가인 루 는 이렇게 썼다.

<자신의 자아속에 자기자신의 性이 생겨나기 이전의 사춘기 소년들에게서 사람들은 때때로 꿈의 불안들과 뒤섞여
있는 고통과 박해의 감정들을 만나게 된다.
또 창작욕이 강한 사람들은 에로틱한 사랑의 동반자가 되는데서는 확고한 존재의 안정감과 행복감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들의 생명력은 '현실 속의 동반자'가 아니라 '작품속의 동반자'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루의 궁극적 관심은 ‘생의 근원’이었다. 루는 문학에서 충분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의문, 길로트와 한 사랑이 심어 준 육체와 정신의 괴리란 의문을  풀어 줄 답을 찾고 싶었다.
이 생각은 프로이트를 만나 그 제자가 됨으로써 실현된다. 루는 정신분석에서 삶의 목표를 발견했다.
그때 루의 나이 50살. 루는 성 본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한 욕구라고 생각했다. 성적 사랑과 예술적 창조, 종교적 열정은 생명력의 서로 다른 측면이라고.

 

                      

                                               지그문트 프로이드

루는 정신분석가로 일하는 한편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악마와 할머니》라는 7장짜리 시극을 쓴 것도 이즈음 일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정신분석의 ‘산문가’라면, 루는 정신분석의 ‘시인’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프로이드는  말했다.

 

 "그녀는 두려움을 느낄만한 지성을 갖추고 있어요." 


루 살로메가 추구한 것은 자아였다.  루는 관습과 도덕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아에 몰두했다.

그랬기에 루의 사랑법은 동시대 여성들과 아주 달랐다.  남성들은 루의 폭넓은 지식, 작가로서 지닌 재능에 우선 놀라고 이어  그녀의 육신이 내뿜는 매력에 정신없이 사로잡혔다. 

하지만 정작 루 자신은 ‘정신의 일치’를 사랑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여겼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감각적인 사랑에서 정신적 유대를 이룰 수는 없다. 그러나 정신적 흥분에서  육체적 사랑에 이르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신이 일치하면 육체 관계가 가능하지만 육체 관계로부터 정신의 일치로 나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루의 남성 편력은 이런 그녀의 사랑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루는 일과 사랑을 마음껏 누렸다. 그 대신 비싼 대가를 치렀다.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는 손가락질, 아이를 유산하는 아픔, 생활을 위해 쉴 새 없이 글을 쓰는 고단함…….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아마 외로움 아니었을까?


완전한 홀로 서기의 외로움.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루 살로메처럼 기존 도덕과 관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이
자아를 추구하는 여성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했다.  구시대 유산을 거부한 이들은 남성의 전유물이던 학문 세계에 뛰어들거나, 타고난 재능을 살려 예술가가 되거나 했다.


결혼과 관계없는 자유로운 연애는 이들이 기존 관습, 도덕 질서에 던지는 도전장과 같았다.  그러고 보면 루와 안드레아스의 야릇한 결혼 생활은 루가 당시의 완강한 관습과 도덕 질서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신의 길을 추구하기 위한 한 가지 타협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루 살로메는 기존 여성상을 과감히 깨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여성상을 창조해 내진 못했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회 개혁운동이나 여성운동에 특별한 관심이 있거나, 귀족 아닌 서민들의 삶에 눈 돌려 그들을 이해하려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생애 말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그녀에겐 걱정거리였을 뿐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였고 ‘자기’로 대표되는 추상적인 ‘인간’이었다.


루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잘라 냈다. 뒤이어 안드레아스가 세상을 떠났다.  루는 하인베르크의 집에 머무르면서 회고록 《생애의 회고》를 집필했다. 이것이 그녀가 쓴 마지막 책이다.

 

                

 



 

1937년 1월, 히틀러의 마력이 독일을 휩쓸고 있을 때, 루는 숨을 거두었다. 화장해서 정원에 뿌려 달라는 그녀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 법률에 사람 재를 뿌리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의 유골을 담은 단지는 괴팅겐 시립 묘지에 있는 남편 안드레아스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생전에 자유로이
떠돌다가도 남편에게 돌아가곤 한 루,  죽어서도 역시 남편 곁으로 돌아갔다. 

 

살로메는 릴케가 클라라라는 여인과 결혼하고, 자기가 버린 레 마저 산에서 추락사하자 무척 상심하여 심장 질환을 얻게 된다. 

옛 애인인 의사 피넬레스로부터 치료를 받으면서 두 사람의 애정 관계가 회복되어 아기를 갖게 된 사연은 기가 막히다.


아빠가 될 꿈에 부푼 피넬레스의 청혼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남편과  이혼할 뜻이 없음을 밝힌 살로메의 심리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이는 유산이 되고, 피넬레스는 고개를 흔들며 떠난 뒤 평생 독신으로 살아갔다.
루 살로메는 남편이 죽은 7년 뒤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새로운 젊은 애인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의 연인으로서 사랑만 받다 간 비결이 과연 미모에만 있었을까.

릴케와 주고받은 편지 외에 '작품으로 본 프리드리히 니체', '프로이트에게 보내는 감사문', '회고록' 등의 그녀의 책에는 활달하면서도 대범한 그녀의 마음이잘 담겨 있다고 한다.

 

                 

 

 

그녀의 이지적인 용모에서 풍겨나오는 오묘한 매력은 늘 주위에 정신적,육체적 동반자를 불러 모았는데, 내로라하는 천재들 역시 그 마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루는 21세 때 니체를 만나 그의 절망적인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36세 때는 연하의 릴케를 통해 진정한 낭만을
향유했으며, 50세 때부터는 프로이트와 애정 어린 우정을 지속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의식세계에 직접 파고드는 비범한 능력을 가졌던 그녀는, 사랑이 폭풍우 같은 열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며, 인생의 즐거움과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낙천가였다.
루는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음에도 결코 그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았었다.

 


남자들이 원하는 것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의 유일한 주인인 신께서 요구하는 것을 하세요.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던 그녀는 존경받는 작가였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갖춘 완벽한 인간이었으며, 남성이나 가족의 굴레에 연연하지 않은 데다, 온전히 자신의 창작활동을 통해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지위를 확보했다.
자유로운 영혼에 걸맞은 자유로운 현실까지 쟁취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19세기 말이라는 역사의 격동기에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한 자유인으로 루를 평가하는 이유다.  

                                                   ㅡ  프랑스와즈 지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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