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膠州灣(교주만) ]
요약 중국 산둥[山東] 반도 남쪽 연안, 황해로 이어진 만. 만구(灣口)에는 동쪽에 라오산[嶗山], 서쪽에 링산[靈山령산] 등 2곶(串)이 돌출하여 만구의 너비가 30∼44 km로 좁고, 만 안은 두루주머니처럼 넓어 천연의 양항(良港)을 이룬다. 따라서 독일·러시아 등이 일찍이 이곳을 노렸으며, 1898년 독일과 청(淸)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독일에 99년 동안의 조차권이 부여되었다.
그 후 독일은 이곳에 동양 함대의 기지를 설치하고 배후지에는 자오지[膠濟교제]철도를 부설하였으며 어촌인 칭다오[靑島청도]를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시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으나 1922년 중국에 반환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오저우만 [膠州灣(교주만)]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해안선 약220km 동서25남북 32 만입구3km 수심평균7 최대64m (중국지식백과)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21.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61/69∼76об.
1895년 8월 7일
블라디보스톡
№ 470
수신:태평양연합함대 사령관 각하
탐사보고서
저는 제물포와 서울을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일본은 자국의 영향력으로 조선을 복속시키려 합니다. 조선을 위해서 청국과 전쟁을 일으켰다고 밝혔지만 사실 일본은 정치적인 계산속에서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기고 있습니다. 즉 상당한 인구와 노동력을 갖고 있는 일본은 항상 조선을 태평양에서 자신의 식민지와 영토 확장의 목적으로 보았습니다.
현재 조선을 점유하려는 자국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서 일본은 상공업의 진흥 등 간접적인 지배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조선내각에서 고문관으로 활동하는 50명의 청국인 관료를 교체하려고 합니다. 또한 일본은 모든 조선의 개항지에서 자국의 이주민을 보호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8,000명 이상 입니다. 최근 정보에 따르면 일본인이 원산에는 대략 1500명, 부산에는 4,395명, 제물포에는 2,504명, 서울에는 대략 200명, 평양에는 대략 50~60명 정도입니다. 또한 일본은 4,000명의 군대까지 보유하고 있어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충분합니다. 일본 정부는 전략적 요충지인 제물포에서 호텔, 석탄저장소, 군대 교통로 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제물포와 서울에서 청국인들을 추방시키면서 일본 상인들로 채우고 있으며 부산과 원산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은 평양 인근의 강가에 전쟁을 대비한 상륙 장소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평양은 아직 외국인에게 개항이 되지 않는 장소입니다. 군대와 상업 강화를 위한 포석의 일환으로 일본군대는 평양 인근에 2,000명의 군대를 집결시키려고 합니다. 일본 이주민과 일본 군대를 평양 인근에 배치하려는 계획이 실현된다면 일본 정부는 유사시 평양에서 제물포와 서울에 신속히 군대를 파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일본은 군사와 상업 목적을 위해서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조선에 대한 모든 열강의 간섭은 일본과의 마찰을 불러올 것입니다. 현재 유럽은 선교를 제외하고 조선에서 커다란 상업적인 이익이 없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유럽 열강의 모든 외교적인 행동은 적당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울과 제물포에서의 저의 짧은 체류는 조선의 국내 질서 및 조선 백성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선이 근본적으로 가난하고 배타적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구체제인 조선의 질서에 대해서 덧붙인다면, 조선은 주변 강대국과의 복잡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군대와 상공업 등이 취약합니다. 조선이 여전히 구체제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속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쟁을 결심했습니다.
저는 조선 국왕을 알현했고 이 자리에서 조선 국왕은 러시아 황제와의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밝혔고 조선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러시아 정부와의 협력을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7월 20일:저희는 즈푸에 정박하였고 여기서 ‘보브르’호와 순양함 ‘자비야카’호를 보았습니다. 저는 ‘자비야카’호의 승무원에게 제물포에서 온 전보를 전달했습니다.
7월 31일:저희는 원산항을 조사하기 위해서 출항했습니다. 하루 반나절이 걸려서야 저희는 원산항 주변의 교주(Киау-Чау) 만에 정박하였습니다.
8월 2일:저희는 섬을 살펴보려는 목적으로 거문도 항구에 접근하여 정박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군함도 없었습니다. 단지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가 거문도로부터 일본을 가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일본 기선이 출항할 때 저희는 거문도항 정박 중에 영국함대로부터 받은 예포를 쏘았습니다.
8월 4일:함대 사령관의 순양함이 원산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 기선회사인 ‘니폰 유센 가이샤(Nippon Yusen Kaisha)’에 소속된 상선 단 한척만이 정박하였습니다. 이 상선은 조선과 일본의 항구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사이를 순회합니다.
다음날 저는 원산항에 있는 일본 거주민을 볼 수 있도록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원산항 주변에 있는 지형과 환경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원산항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편리하고 유익합니다.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대략 1,500명입니다. 만의 연안을 따라 돌면 거기에는 적지 않는 집들이 있습니다. 원산항은 상업적 항구로서 충분히 수송선박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일본 거주지에는 우체국, 전신국, 일본은행 지부, 150명의 수비대 등이 존재합니다. 일본영사는 정원을 포함한 유럽 건축양식인 2층 집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원산은 조선 행정 구역상 매우 중요한 지방 행정소재지입니다.
저는 원산에서 러시아 해양대신 사무대리 각하에게 도착 전보를 보낼 수 있는가를 문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관리는 7월 6일부터 전신선이 폭풍으로 두절되었다고 밝히면서 저의 제안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일본 관리는 개인적인 전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하였습니다. 조선의 전신선은 일본 정부의 수중에 있으며 러시아로 보내는 유일한 전신도 일본 소유의 전선을 통해서 서울, 부산, 일본,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포시에트, 원산, 서울을 거치는 러시아의 전신선이 필수적으로 설치되어야 합니다.
8월 6일 오전 8시에 원산을 조사하기 위해서 정박한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Владимир Мономах)’호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출항하였고 12시간 후인 8월 7일 5시에 도착하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톡까지의 항해는 좋은 기후 덕분에 순항하였습니다. 항해 중 2~4발의 북풍이 부는 가운데 잠시 비가 내렸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기 위해서 즈푸로부터 출항한 순양함의 함대사령관을 만났습니다. 또한 ‘보브르’호 소속 감찰관인 대위 리차고프(Рычагов)는 집안일 때문에 2주간 휴가를 떠날 예정입니다.
각하께 이하의 내용을 동봉하여 제출합니다.
1) 1895년 7월 17일 순양함 ‘크레이세르’호 사령관의 보고서
2) 최근 전투와 관련된 청국의 손실 도표
3)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호 장교가 작성한 제물포 항구 개관
4)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호 항해 지출과 관련된 도표
해군 중장 _____________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53.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72, лл.192об.∼196
계정서: 현금과 신용장에 의거하여 수령하지 않은 액수
1896년 3월 2일
현금의 형태 | 액 수 | 설 명 |
1) 현금:일본화로 2) 신용장과 어음에 의거하여 수령하지 않고 남아있는 액수 № 79의 신용장 ……. 어음 ………………... | 1619 엔 7984 파운드 13 __ 1 __ | |
검사관. 트렌토비우스 중위 |
설명:2월 4일 오후 2시 10분 태평양 분함대 하급항법사 추르킨 해군소장의 신호에 따라 2급 순양함 ‘크레이세르’와 동시에 나가사키 정박장에서 닻을 올리고 기관 3개를 가동하여 지정된 대로 부산으로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출발한 후 이어서 영국 순양함 ‘Rainbow’도 나가사키를 떠났습니다. 저녁 9시에 군도에서 나와서 쓰시마 섬으로부터 서쪽으로 항로를 잡았습니다. 이때 영국순양함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밤 2시 30분에 쓰시마 섬 남쪽 끝을 가로방향으로 통과하고 2월 5일 아침 10시 15분 평균속도 7.65노트로 20시간 153마일을 항해하여 부산에 닻을 내렸습니다. 최고의 기상조건 하에서 이동은 진행되었습니다. 9마일의 동반 해류를 만났습니다.
보조탄환 사격과 증기단정에서 어뢰투척과 같은 전투준비훈련에 집중하면서 부산 정박장에 2월 17일까지 머물렀습니다. 어뢰투척에는 모든 함대 장교들이 순차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정박하는 동안 한국의 군수와 세관장 헌트(Hunt)가 서로 방문을 교환했습니다. 정박하고 있는 동안 정박장은 상당히 활발한 상태였습니다. 일본 수송선과 우편증기선들이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귀하께서 보내신 전보에 따라 2월 17일 오후 3시 15분 닻을 올리고 3개 기관을 가동하여 라자레프 항으로 출발했습니다. 항로는 한국해안 주위로 정했습니다. 2월 18일 밤 2시 45분 장기곶(클로나르 곶 мыс Клонара)註 070을 지나 정오에 해류가 없어 해를 기준으로 위치를 측정했습니다. 2월 19일 아침 3시 학용단(페시추로프 곶 мыс Пещурова)을 옆으로 지나 평균속도 시속 7.37노트로 43시간 317마일을 항해하여 아침 10시 15분에 원산만의 라자레프 항에 닻을 내렸습니다. 이동은 좋은 기상조건 하에 진행되었습니다. 크류드네르 (Крюднер) 곶註 071부터 북쪽으로는 해안선이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습니다.
원산에서 참모부 대위 소코브닌(Соковнин)과 조수인 쿠지민니(Кузьминый) 중위 그리고 대오 전체를 만났습니다. 즉시 귀하의 전신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한국 내부 폭동 때문에 소코브닌 대위는 서울을 통과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몇 달간 원산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현재 폭동에 대한 그 어떤 긍정적인 이야기도 불가능합니다. 소문에 따르면 계속해서 잠잠한가하면 다시 더 크게 일어나곤 한다는 것입니다. 2월 22일 한국경찰들은 일본 군인들과 함께 폭동의 주모자를 검거했습니다. 엄씨 성을 가진 상당히 부유한 원산의 상인으로 그날 딸들을 만나기 위해 원산에 왔었다고 합니다. 현재 그는 한국감옥에 있고 며칠 내로 서울로 호송될 것입니다.
전신선이 손상되어 원산 도착을 귀하께 보고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인 2월 20일 선박에 소코브닌 대위를 싣고 아침 9시에 신포 항으로 출발했습니다. 평균속도 9.33노트로 7시간 30분 동안 70마일을 항해하고 오후 4시 30분 섬의 통로를 따라서 항구로 들어가 코르닐로프 만에 닻을 내렸습니다. 저의 질문에 대한 주민들의 대답은 1885년 클리퍼선 ‘크레이세르’의 지휘관이었던 해군중령 오스톨로포브이(Остолоповый)가 올린 보고서와 일치합니다.(수로학에 대한 기록, 1888년, 제1호, 3~6쪽)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겨울에는 북서풍, 여름에는 북동풍이 붑니다. 현재 신포항은 2주마다 원산과 증기선이 왕래한다고 합니다. 우리 선박이 도착하던 날 신포에 작은 한국 증기선이 서있었습니다. 때로 일본군함들이 드나들곤 합니다.
2월 22일 7시 10분 4개 기관을 가동하고 라자레프 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번에는 장교들이 항구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도록 서쪽 통로로 나왔습니다. 11시에 관이 새서 4번째 기관을 껐습니다. 소코브닌 대위의 요청으로 원산 만에 정박하기 전 라자레프 항에 들렀습니다. 전망대 곶(옵세르바치야мыс Обсервации)註 072 뒤로 통과하여 배를 돌려 다시 나왔습니다. 평균속도 8.68노트로 9시간 30분 82마일 항해하여 오후 4시 40분 원산에 정박했습니다.
라자레프 만과 원산만은 현재 결빙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원산만은 원래 몇 백 피트에 이르는 전체 지역에서 해안가 얕은 곳들만 얼어붙을 뿐이고 혹한의 겨울에만 얼음이 도시에서 갈마각(무라비요프 곶 мыс Муравьева)까지 뻗어나와 소도, 국도까지 항구의 남쪽부분을 덮습니다. 세관 정박소와 정박지는 그 어느 때도 결빙 걱정이 없습니다. 라자레프 항의 해만은 만으로 흘러내리는 강과 북쪽 지역이 비교적 얕고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는 위치 덕분에, 한국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약간 더 얼어붙지만 얼음은 두께가 얇아서 한국배가 다니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북풍이 때때로 이 얼음들을 영흥만으로 이동시키지만 얼마되지 않아 서풍이 바다로 밀어냅니다. 올 겨울에는 가장 온도가 낮았습니다. 북서풍이 강할 때 영하 15°입니다. 겨울에 심한 남서풍은 때때로 북동풍이 됩니다. 상인인 셰벨료프 요원과 그레이(Грей)가 관측한 자료 즉, 신력으로 11월 1일부터 2월 29일까지 원산의 기상관찰 결과를 같이 올립니다.
2월 27일 오후 1시 30분 3개 기관의 증기를 올리고 부산으로 출발했습니다. 항로는 한국해안선을 따라가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2월 28일 정오에 태양을 중심으로 위치측정을 했는데 배가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습니다. 저녁 9시 장기곶을 옆으로 지났고 2월 29일 아침 8시 30분에 부산에 닻을 내렸습니다. 평균속도 시속 7.56마일로 43시간 이동했습니다. 기상조건은 항해에 최적이었습니다. 정박장에 들어서면서 부산에서 출항하고 있는 2급 순양함 ‘크레이세르’와 만났습니다. ‘오트바즈니’호의 지휘관을 통해 나가사키로가라는 각하의 지시를 전달받고 3월 1일 오후 2시 15분 3개 기관을 가동하여 출항했습니다. 닻을 올리기 전 의사인 8등 문관 노비코프와 중국인 통역자를 승선시켰습니다. 밤 11시 30분 쓰시마 섬의 남단을 옆으로 지나 3월 2일 아침 5시 30분에 코시키시마(Koshiki-Sima)로 들어갔습니다. 평균속도 7.56노트로 22시간 30분 170마일 항해하여 낮 12시 45분에 나가사키에 닻을 내렸습니다. 역류는 7마일이었습니다. 이동하는 내내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 삼각돛을 사용했습니다.
장교들과 승무원들의 건강은 매우 양호합니다.
해군중령 _________
註 07070) 영일만에 있는 장기곶. 18세기 라페루즈의 지도에도 Cape Clonard라고 나와 있다-역자 주.註 07171) 지명 추적 불가. 평해만 위쪽. 구산항 근처-역자 주.註 07272) 지명 추적 불가. 송전만 내의 가래구미리 근처-역자 주.
◆ 원산
한반도(韓半島)의 주산맥은 동해안(東海岸) 가까이에 위치. 그리고 이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두 개의 아치모양을 한
만(灣)이 형성되어있었는데, 그곳은 브로우톤만(永興灣영흥만)근처에서부터 이어져 일본해(日本海)로 돌출해 있었다.
(러시아인 베벨리은 1889년 )
원산항은 조선의 동해안에서 부산과 블라드보스토크 중간쯤에 위치해 있으며 북위 41도 근처
(앵거스 헤밀튼―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 보고서)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91. РГАВМФ, ф.417, оп.1, д.924, лл.230∼239
원산시는 원산만의 남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만의 여러 장소에 산재해 있는 일부 부락을 제외하고는 연안에서 조선 부락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조선 부락에 살고 있는 주민은 15,000명 정도이며, 조선정부의 토지를 봉록으로 하여 생활하고 있는 지사(知事)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원산시의 일본인 구역 뒤쪽의 산 위에 일본 관청이 있는데, 행정 관료들이 많고 그들 중에는 영어를 구사하는 이도 있습니다. 본 도시의 한 복판과 가장 동쪽 부분은 가장 큰 일본 조계지로서, 일본 주민이 약 1,000명을 헤아립니다. 모든 건축물은 몇 개의 거리를 따라 일본식으로 지어져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일본 영사는 유럽식으로 지어진 대형 복층건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구역 맞은편 연안 지역은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폭넓은 안벽(岸壁)을 형성하고 있어 심지어 톱니바퀴를 이용한다 할지라도 접안이 불가능합니다. 해안의 남쪽 끝부분은 어느 정도 수심이 있지만, 증기보트는 접안할 수 없고 단지 노를 젓는 보트만이 접근할 수 있는, 크지 않은 방파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두의 선박 수용소에는 세관용 가건물들이 있으며 그 근처에 조선 세관이 있습니다. 이곳의 관세법은 중국과 동일합니다.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면 지붕이 씌어져 있고 격납고가 갖춰져 있으면서 약 500톤 정도 수용 능력을 지닌 일본정부 소유의 석탄저장고가 있습니다. 그 부근 50사젠 정도에 건축이 시작되지 않은 공간이 존재합니다. 일본인 구역의 이 석탄저장고는 바다와 경계를 접하고 있습니다. 안쪽으로는 길에 의해 구분되는 크지 않은 평야가 있으며, 그 평야 뒤편 산에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셰벨료프 사(Шевелёв и ко.)에게 배정되어 있는 구역이 연안을 따라서 있습니다. 이 구역의 제공 조건은 중국에 제시된 조건과 동일합니다. 구역의 넓이는 연안을 따라 35보, 수직으로 66보이며, 셰벨료프 사가 훌륭한 창고 두 동을 건설했습니다. 세벨료프 사에게 배정된 전체 구역은 원산시에 위치한 중국인 구역 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깊이를 더 늘리기는 힘들 듯 합니다. 이 구역의 지형이 평탄하고 바위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부터의 접근이 불가능하여, 바지선을 접안시키려면 최소한 10사젠 정도 길이의 접안 시설을 따로 축조해야 합니다.
중국 조계지에는 15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건물이 30동을 채 넘지 않습니다만, 거주민 수가 꾸준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거리를 따라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남쪽 방면에 위치한 산 위에 새로운 가옥을 건축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이곳에 자국 영사를 주차시키고 있지만, 유럽 조계지에는 조선 세관에서 근무하는 4명을 제외하고는 셰벨료프 선사의 대표인 그레이(Грей) 씨와 미국 선교사 다섯 가정뿐입니다. 이 가정 중에는 영국인 가정이 2개 있으며, 1명의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가 있습니다.
원산의 주 수출품은 사금으로서 매년 250-300만 달러 정도가 주로 중국으로 반출되어 왔으나, 얼마 전부터는 일본으로도 수출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막대한 양의 가죽, 털이 있는 개의 가죽, 대두(大豆) 등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밀가루와 교환되고 있으며, 생선은 비료와 맞바꾸는 물물교환 형태로 교역되고 있습니다. 조선 내륙으로 식료품을 조달하는 지역이 부산인데, 막대한 양의 생선이 그곳으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세관장의 말에 따르면 얼마 전 원산으로부터 매우 근접한 곳에 2개의 은광과 양질의 석탄광산이 개발되어 채굴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수입품에는 원산뿐만이 아니라, 조선 북부 전체 주민을 위한 공산품, 소금 그리고 등유(러시아산 포함) 등이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블라디보스톡과의 연락 업무는 일본정부와 러시아의 셰벨료프 선사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고 있는 일본 유센가이샤(遊船會社류선회사) 소속의 기선에 의해 독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선의 소형기선 2척은 연안무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시내에는 2개의 일본은행 지점이 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기선을 타고 도착한 16,000명의 부대원, 200문의 산악포 그리고 4,000명의 쿨리들이 모든 종류의 필수품과 말을 이끌고 원산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향했습니다. 부대원은 정원 50명 이하로 승선할 수 있는 보트를 이용하여 상륙했습니다. 이 모든 배들에는 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현재는 운하에 계류 중입니다. 제가 본 가장 높은 번호가 32번이었던 만큼, 보트의 총 수가 30척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 외에도 어선 또한 상륙에 이용되었습니다. 해안 근처의 수심이 깊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상륙이 보다 용이하도록 일본인 구역에 각각 10피트 길이의 나무 접안 시설 2개가 축조되어 있습니다.
상륙 당시 부대의 숙영과 분견대 구성이 대부분은 개활지에서 이루어졌으며, 짐을 나르는 도로를 따라 일대는 서울로 나머지는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각 분견대 마다 일정 수의 쿨리들을 동반하고 있으며, 그들 외에도 도로를 개보수하기 위하여 일당 2달러의 가격으로 다수의 조선인들을 고용했습니다. 일본군이 원산과 그 근교에서 2,000두에 달하는 가축을 구매함에 따라, 그 전에는 두 당 35달러 또는 그것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그 가격이 50달러까지 상승했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으로부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전체 일본 육군은 베이징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여 이미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압록강변에 있는 안주(Anchiu), 하잔(Hazan) 그리고 의주(Ai-chin)를 점령했으며, 더 북쪽까지도 진군했었으나 후방과의 단절을 두려워하여 회군했다고 합니다. 평양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그 날, 승전보가 이곳에도 알려졌으며 이에 일본군들은 요란하게 축하했습니다.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원산을 통한 군수품 수송을 중단하고, 필요한 모든 물품은 기선을 이용하여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 하구에 위치한 철도(鐵島)로 수송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철도로 5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추가 파병할 것이라 합니다. 최근 일본 기선이 지역수비대의 형태로 잔류하고 있던 2명의 장교와 병사 200명의 부대 및 50명의 쿨리를 운송했으며, 9월 16/28일 남아있던 예비품들을 싣고 해로를 이용하여 철도로 향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중국 군대는 의주의 북쪽에 위치한 창민이라는 곳에 집결해 있다고 합니다.
평양에서의 일본 측 소식에 따르면 일본군은 다수의 대포, 소총 그리고 군용 물품을 제외하고도 2백만 달러어치가 넘는 금괴와 은괴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고 합니다. 원산에는 일본 적십자가 지속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병원을 제외하고도 두 개의 병원을 더 건설할 것이라고 했으나, 부상자들을 모두 일본으로 후송하고 있기 때문에 계획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원산은 현재 이전과 같은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아서 가정에서 조선인들을 만나볼 수 있으며, 길거리에서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무리들 속에서 일본인들을 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피난 갔던 조선인들이 산에서 내려와 복귀했으며 논에서 가을걷이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작황이 특별히 좋고 성공적으로 추수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덕분에 조선인 스스로도 배고픔을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내항했을 때 협조한 조선인들에게 복수가 있을 것이라고 벌써부터 위협함에 따라 중국인이 특별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런 중국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일본군은 원산으로 퇴각할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여자와 아이들은 산속에 마련된 임시 거처에 남아 있습니다. 원산 시내는 얼마 전 군대가 지나갔었다는 점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단지 중국인 구역의 건물들만이 폐쇄된 상태이며, 중국 글씨가 적혀 있는 두 장의 종이 띠가 십자가 모양으로 문 위에 붙어 있습니다. 뒤뜰로 돌아가 보면 일부 장소에서 망가진 쪽문과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적 학살이나 파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다른 곳으로 피신할 당시 불필요한 가재도구들을 남겨둔 것으로 보입니다.
경비대가 도착한 현재 밤낮으로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경비대가 도착하기 이전까지의 순찰 병력은 일본 영사의 지휘를 받는 순사 10명에 불과했을 따름입니다. 경비대 병사들은 좋은 제복을 갖추고 있습니다. 일부는 세운 깃에 6번을, 다른 이들은 9번을 새겨 넣었으며, 일본 건물들에 병사(兵舍)를 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각 병사들에게 일급 2센트를 지불하고 있으며, 식비로 4센트가 추가 지급됩니다. 이곳에 있는 쿨리들은 충분한 크기의 창고 내부에 마련된 판자 침상에 거주하면서 따뜻한 이불을 공급받았으며, 모두가 요코하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건강한 병사들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임명된 조선 관헌인 지사는 서울의 훈령에 따라 활동하고 있으나, 외견상으로는 전적으로 일본인의 영향력 하에 복속된 듯합니다. 중국 측에 조금 더 가까웠던 주민들 역시 이제는 일본인들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있다는 것을 수차례에 걸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주된 원인은 대규모의 군대이며, 그에 더해 일본이 승전국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관대하고 신속하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 것도 한 원인입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어떤 강압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 중국인들의 강압과 야만적 행위는 더 형편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조선인은 자신이 일본인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본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슬픔에 잠겨 저에게 개인적으로 실토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을 특별히 증오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평양의 모든 조선인들조차 그들을 달리 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분견대와 함께 도착한 50명의 쿨리 외에 조선에 온 다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으며, 쿨리의 행동에 대한 특별한 불만은 듣지 못했습니다. 과연 저녁마다 쿨리들이 일본인 공동묘지 뒤편의 산에 올라가 노래를 부를까요. 오히려 그 반대로 본인이 듣기로는 쿨리들 역시 군인들과 똑같이 매일 밤 점호를 받으며, 특별 허가를 얻어야만 숙소로부터 외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의 경비대는 매일 훈련을 받고 있으며, 순찰이 그 누구를 구속하지도 않아서 누가 어디로든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비대가 부산에도 역시 배치되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평양에 남은 병력은 총 25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생존 중인 중국 함대가 위치한 장소는 알져지지 않았습니다. 일본 함대기를 게양한 함선은 크기에 상관없이 적과 조우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조선 전체를 돌아서 항해할 수 있다고 일본인들이 언급하고 있는 만큼, 사람들은 중국 함대가 남쪽으로 도피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원산과 그 변두리는 물론 조선 그 어디에도 중국인들이 없습니다. 그들 모두는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피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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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중령 ___________________
韓國近代史資料集成 11권 11권 프랑스외무부문서 1 1854~1899 > 기록과 문서 아시아 1854~1889 한국 권 55 > 【6】 라자레프항에 대한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 기사 동봉
【6】 라자레프항에 대한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 기사 동봉
상하이주재 프랑스 총영사관
상하이,
1881년 3월 21일
정치국
라자레프항
장관 각하,
상하이의 한 신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는 이달 18일자 호에서 조선의 가장 넓은 항구들 중의 한 곳인 라자레프항의 상황과 러시아 정부가 이 지점을 중요한 해군 초계경비수역으로 만들려는 계획에 대해 보도하였습니다. 이 기사가 각하께서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 보여, 이 이유로, 동봉한 번역문을 보내드립니다.
장관 각하, 본인이 각하의 아주 겸손하고 순종하는 관리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깊은 존경심의 확약을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베. 가리에
파리의 외무부 장관 바르텔레미 생-힐레르 각하께,
1881년 3월 21일 전보 첨부문서(정치국)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에 보도된 기사
상하이, 1881년 3월 18일
우리는 지난 12일자 호에서 요코하마의 「재팬 헤랄드」에 근거하여 도쿄의 현지 신문에 게재되었던 두 개의 기사를 다시 실었습니다. 두 개의 기사는 라자레프항에 대한 러시아의 의도에 관한 것으로, 그 크고 장대한 항구는 태평양 연안 조선 반도의 북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항구는 가장 혹심한 겨울에도 열려있으며, 막대한 이점을 지니고 있다. 이 곳은 해양 강국의 강력한 해군 기지가 되기에 적합합니다. 실상 아시아 지역에서는 민□□ 정부안의 남광 항구만이 그 항구에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라자레프항의 입항은 용이합니다만 아마도 포병중대에 의해 역시 쉽게 방어될 것입니다. 암초와 높은 지형은 포대의 저사각 발포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구가 협소해서 어뢰는 모든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주변 지역은 높고 안전합니다. 어량이 풍부한 강은 만으로 흘러듭니다. 항구의 장점으로는, 요새·습선거·건선거·해군 공창·제조 작업장·상점·병영들을 세우는데 수적으로나 면적으로나 공간이 확보되므로 크롱스타트의 거대한 토목 공사를 능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아주 풍부한 건축 석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뒤와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시에 석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주산맥의 울창한 숲이 가까이 있고, 접근하기 쉬어서 선박 건조에 적합한 떡갈나무, 전나무, 느릅나무, 소나무, 물푸레나무, 낙엽송 등과 대들보 및 돛대에 좋은 소나무 등 수령 120년에서 200년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목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항구에서 러시아의 모든 해군함대가 전투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모두 채비를 하고 전쟁 신호를 기다릴 것입니다. 신호를 받자마자 함대들은 어느 계절이든 상관없이 중국 연안 쪽 태평양으로나 혹은 □□ 일본에 대항하여 작전을 벌이기 위해 이 요새에서 발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이 무장한 순양함이 35일 내지 40일에 필요한 석탄을 적재할 수 있음으로써 대담한 러시아 함장은 상선들에 크나큰 손실을 입힐 수 있을 것이며, 인도양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점령에는 아주 중요한 결과가 뒤따를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러시아는 태평양에서 한 개의 해군 공창을 가질 것이며, 그것은 이 초기가설계획에 매우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세 강대국 즉 중국, 일본 또는 영국에 대항하는 작전 기지로서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항구의 적용성은 모든 관점에서 완벽합니다. 이 항구를 취득하고 관리하는 러시아의 권리에 관해서는,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조선 정부에 대해 다소간 근거 있는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국은 조선 왕국을 위해 무력으로 개입할 의향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럴 입장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점령은 중국인에게 좋지 않은 징조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따라 판단하건대, 중국은 아마 장래 중국 측에 야기될 수 있는 염려스러운 부분은 침묵으로 감내할 것입니다. 만일 도쿄와 베이징간에 방금 재발된 갈등이 예상대로 전쟁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중국 정부는, 보상으로 있음직한 일인 러시아의 개입을 두려워할 것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이러한 밀착 상태가 걱정스러울 것입니다. 이제부터 일본은 매우 일시적인 방식으로 밖에는 쓰시마의 전진기지를 점령하지 못할 것이며, 그리고 충분한 준비기간이 지나면, 홋카이도는 이로부터 위협을 받을 것이며, 사할린 섬이 그러하였듯이 강탈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이 일본 내각을 불안하게 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이미 수없이 난관에 부딪쳤던 한 국가의 혼란과 곤경에 틀림없이 무거운 짐을 더해줄 것입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8. РГАВМФ, ф.26, оп.1, д.6, лл.3об.~5о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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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조선 보호에 관한 문제는 서울에서 12월 혼란(갑신정변-역자 주)이 발생한 이후, 배상금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조선의 사절단이 이곳 도쿄에 도착했을 당시에 대두되었습니다. 두 번째 특사는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oellendorff)였습니다. 그는 텐진주재 독일 영사관의 서기였으며, 자신의 상관이 사망한 이후 영사로 임명되지 못한 채 독일 근무에 배정되었습니다. 리훙장이 그를 초빙한 직후, 조선은 세관을 중국식으로 설립하기 위해 리훙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리훙장은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소개해 주었습니다. 묄렌도르프는 리훙장에게서 받던 것보다 적은 급료에도 불구하고 조선으로 향하였으며, 청렴결백하게 근무에 임했습니다. 모든 세관 직원들의 급료는 세수입에서 지불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묄렌도르프는 각국의 엽기주의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규정대로 급료를 지불했으며, 그러다보니 간혹 자신의 지분이 남아있지 않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의 청렴결백함에 국왕의 마음이 끌린 것으로 보입니다. 국왕은 그에게 조선에 있는 1개 군 전체를 할당해 주었으며(독일인은 바보가 아닙니다), 바로 그 군에 운코프스키(Унковский/영일) 만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신문에서는 우리가 제주도를 점령하려 한다는 투로 논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금광을 채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이 독일인은 제주도가 우리의 수중에 장악되면 그 일부를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이미 요구했습니다. 묄렌도르프는 지푸의 크로운(Кроун)과 우리의 순진한 청국주차 무관 슈네우르(Шнеур)를 만났습니다. 묄렌도르프는 겨울철에 동결되는 원산 대신에 부동항인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외부로 노출된)영일만을 조선이 양보할 것이라고 제시하면서, 처음에는 러시아가 그곳에 (경공업)공장을 건설했다가 나중에 점유할 것을 권했습니다. 도쿄 체류 당시 묄렌도르프는 자신의 제안에 대해 페테르부르크로부터 소식이 없었는지 다비도프에게 문의한 후 동일한 제안을 재차 반복했습니다. 이에 다비도프는 누구의 명의로 제안된 것인지를 문서 형태로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묄렌도르프는 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불꽃 사이에 위치한 조선 국왕이 러시아의 보호를 원하며, 그 대가로서 상기 지역을 적절한 때에 양보하겠다는 것을 문서로 작성했습니다.
▷▶ 진출 과정도 모피를 제공하는 담비와 해달의 서식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경향을 보인다. 중앙아시아로의 진출도 부동항 때문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과 그 국가들을 병합하기 위함이었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해서 아프간과 이란, 인도로 진출하려 했다. 아시아로의 진출 또한, 부동항 때문이 아니라 대중 무역과 중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럽 방면으로의 진출은 유럽의 강대국들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한 완충지대를 보유하기 위함이었다. 드넓은 북유럽 평원은 국경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천혜의 자연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러시아가 한반도에 부동항을 얻으려 침략한다는 식의 설명이 많았으나 러시아는 고종이 영흥만 조차를 공짜로 해주고 보호령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가 번복 했음에도 크게 반발하지도 않았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얻자마자 1861년 쓰시마 점령을 시도했지만 영국에 의해 저지되고 나서도 일본과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얼어붙는 겨울철에는 나가사키 항구에서 월동을 보낼정도.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나 무르만스크보다 안정적인 부동항과 항로를 확보 하려면 캄차카 반도 혹은 쿠릴 열도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다. 안정적으로 대양으로 나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데 이는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대형 군함이 안정적으로 대양으로 나가는 법은 무르만스크로 북유럽을 돌아 대서양으로 가거나, 쿠릴 열도와 캄차카 반도로 태평양으로 나가는 법밖엔 없다.다만, 해당 지역도 블라디보스토크보다 훨씬 위에 자리잡은 데서 알게 되듯 완전한 부동항은 아니다. 대한민국에 소재한 모든 항구는 부동항이다(인용 위키백과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0. РГАВМФ, ф.240, оп.1, д.6, лл.9об.~13
포시에트(Посьет) 만부터 가슈케비치(Гошкевич) 만까지의 해안
1860년 4월 (노를 젓는-역자 주)소형 보트로 조사
포시에트 만부터 부타코프(Бутаков) 절벽까지의 해안선은 전반적으로 바위가 많고 삼림이 없으며 척박합니다. 전체 해안선을 따라 마을이나 미역을 채취하며 이동 생활하는 중국인들의 천막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중국인들은 장기간에 걸쳐 이동 생활합니다. 따라서 천막 안에는 부인들, 아이들, 식기류, 닭 그리고 이따금 돼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안 살림이 갖춰져 있습니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가족 모두와 가재도구 그리고 생산물 등 모든 것을 선적할 수 있는 대형 돛단배도 구비하고 있습니다. 해안지역 주민들은 주로 수수와 미역, 바다표범을 주식으로 합니다. 진미에 속하는 바다표범을 잡으면 특별히 반죽에 넣어 요리합니다. 유목민들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만(灣)에 있는 큰 마을에서 수수와 소금을 구합니다. 반면 그 마을 주민들은 가장 근접한 도시에서 식량을 조달합니다. 본 해안선의 해변은 소형 보트를 이용해도 암초에 걸릴 만큼 수심이 낮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서 접안해야 합니다.
부타코프 절벽으로부터 두만강 하구까지의 해안은 사질의 낮은 해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큰 파도가 부단히 밀려오기 때문에 소형 보트로 접안해도 손상을 입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해안에 거주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전 해안에 걸쳐 천막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백사장의 해변에서 내륙 방향으로 약 5~7 사젠(러시아의 거리단위. 1 사젠은 2.143미터-역자 주) 내륙 방향으로 들어가면 갯벌로 된 작은 호수가 있으며, 갈대가 자라는 장소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호수에 고인 물은 늪에 있는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두만강의 하구는 매우 넓으면서 유속이 빠르며,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어우러져 높은 파도를 형성합니다. 따라서 노를 저어 흐름을 거슬러 역행하려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결국 강으로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지도에 표시된 두만강 하구와 부타코프 절벽 사이에 위치한 해안선의 방향이 제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 같습니다. 실제 해안선은 보다 둥근 형태를 띠면서 바다 쪽으로 더 돌출되어 있습니다.
시스드로(Сисдро) 반도의 작은 만에는 아주 큰 조선인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에는 개간된 밭이 많고 축산의 규모도 큽니다. 우리 보트 쪽으로 모여든 군중들로 보아 어림잡아도 주민의 수가 200명은 넘을 것 같았습니다.
시스드로 만의 수심은 깊어서 마을 맞은편에 대형 프리깃 함이 닻을 내릴 수 있는 양호한 정박지를 갖추고 있으며, 프리깃 함으로부터 소형 보트를 진수시켜 두만강을 따라 역항하면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을의 주민은 조선인들로 어떤 폭력도 보여주지 않았으며, 무기를 소지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소형 보트가 만 안쪽으로 진입하자,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나팔과 북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소란스러워졌을 따름 이었습니다. 만의 왼쪽 해안에서 시작되는 마을은 해안 전체에 걸쳐 있습니다. 만 안쪽 깊숙한 곳에는 가옥들이 구릉을 따라 위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해안에는 큰 배와 작은 배가 많이 있었습니다.
시스드로 곶 뒤에서부터 가슈케비치(조선과 러시아의 국경지대 소재-역자 주) 만이 시작됩니다. 곶에서부터 가슈케비치 만의 정상에 이르는 지역에는 가옥이 없습니다. 갯벌로 된 호수가 있는 정상에는 큰 마을이 협곡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본 마을의 주민들은 저는 물론, 선원들이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으며, 겨우 첫 번째 집까지만 가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요청을 무시하는 것이 쓸데없는 정신 나간 짓이라 판단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우리가 죽(쌀이나 보리를 우유와 함께 끓이는 것-역자 주)을 끓이려고 자리 잡은 곳까지 거리낌 없이 다가왔습니다. 성인들은 참수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제가 주는 그 어떤 선물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아이들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조그만 러시아 동전이나 설탕, 차 등을 기꺼이 받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입은 낡고 헤진 옷을 사람들에게 가리키며 면직물 한 조각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이 선물을 안 받으려고 수선을 떨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한 조각을 받게 하려고 손짓발짓으로 설득했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주민들은 총기 사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의 진술에 따르면, 멀지 않은 산에 큰 참나무와 느릅나무 숲이 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마을 옆의 해안에서 참나무 널빤지를 보았습니다. 두께 7인치에 길이가 2 사젠 되는 것이었는데 차곡차곡 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재를 팔려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있을 때도 황소가 끄는 이륜마차에 쌀과 수수 포대, 긴 나무를 실어서 마을로 운반해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추울 때면 주민들은 개의 가죽을 털이 바깥으로 나오게 해서 외투로 입고 다닙니다.
갯벌로 된 호수에서 남쪽으로 난 해안은 두만강 근처처럼 사질이고 그 뒤편으로 또 다른 갯벌 호수가 있습니다. 가슈케비치 만의 남쪽 부분에는 암초가 많아 정박하기에 적합지 않습니다.
흐린 날씨와 안개로 인해 가슈케비치 만에 더 오랫동안 머물면서 정보 수집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중위 ______
1860년 12월
‘보예보다’ 코르벳함이 일본해에서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1. РГАВМФ, ф.296, оп.1, д.75, лл.219~223
1854년 8월 26일 황제폐하로부터 수령
해양부 대신께
시종무관장 해군중장
푸탸틴
보고서
2월 27일 마닐라 발 우편으로 각하께 상주한 보고서 №194와 같이, 저는 동월(同月) 27일 분함대 소속의 함선 4 척 모두와 함께 마닐라의 정박지를 출항하여 임페라토르스카야(Императорская) 만을 향해 위도 49도 3분에 위치한 타타르스키(Татарский) 해협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본인은 분함대 중 세 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즉 수송선 ‘멘쉬코프 공후(Князь Меншиков)’ 호는 상하이에 기항하여 그곳 우체국에서 제 앞으로 발송된 문서들을 수거한 후, 우리 목적지로 향하는 노선에 위치한 한반도 근처의 거문도에서 쾌속전함 ‘팔라다(Палада)’ 호와 합류할 것. 스쿠너 범선 ‘보스톡(Восток)’ 호는 류쿠열도에 있는 나파키아네 항구에 기항하여 그곳에 석탄저장고를 보유하고 있는 페리(Mathew G. Perry) 분함대의 일본 내 활동을 알아 본 후 거문도로 향할 것. 군함 ‘올리부차(Оливуца)’ 호는 혹시 상부로부터 다른 지시 사항이 네벨스키(Невельский) 대령에게 하달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곧바로 타타르 해협으로 향할 것 등이었으며, 만약 지시 사항이 없을 경우 군함 ‘올리부차’는 캄차카로 향하도록 하명했습니다.
쾌속군함 ‘팔라다’의 중앙 마스트 돛과 앞 돛대의 큰 돛에 문제가 있고 현재의 상황 하에서는 수리를 위해 상하이나 홍콩으로 향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적이 드문 항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바부얀 군도에 속하는 카미구인 섬의 피오크빈토 항을 선택했습니다. 이 열대 토양을 뒤덮고 있는 나무들 중에서 필요한 것을 베어 마스크와 돛을 모두 수리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 섬에 열흘간 체류하면서 자세한 조선 지도를 작성했습니다.
거문도에서 스쿠너 ‘보스톡’ 호 및 수송선 ‘멘쉬코프 공작’ 호와 합류한 저는 일본과의 업무를 촉진시키고자 나가사키로 향했습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후, 그곳 현 지사에게 편지를 전달하여, 에도 주재 전권이 사할린에서 접견할 기간을 그 편지에 명시할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했고 3일째 되는 날 식량을 실은 후 ‘보스톡’ 호만 남겨두고 대한해협으로 출항했습니다. ‘보스톡’ 호의 사령관에게는 매우 조심스럽게 상하이 방면으로 향하여 양트세키양으로 입항한 후 장교 한 명을 중국 배에 태워 보내 러시아 요원과 미국 무역상 케닝엄 씨에게 유럽의 상황을 알아보라고 하명했습니다. 그 이유는 연락선이 전달해 준 전쟁에 관한 소식을 제가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송선 ‘멘쉬코프 공작’ 호 편으로 쾌속전함에 배당된 식량을 미리 발송했습니다. 그 외에도 식량 창고를 조속하게 건설하고 해안가에 건빵을 구울 화덕을 신속하게 제작할 수 있도록 장교를 포함한 병사 수 명을 임페라토르스키 만으로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마닐라에서 건빵을 만들 시간이 없어서 건빵 대신에 밀가루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의거해 판단해보면 우리는 4월에 타타르 해협에서 빙하와 짙은 안개를 만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본인은 그런 점을 고려하여 일본해를 따라 계속 항해하는 것이 무익한 만큼, 그 시간을 이용하여 아직 답사한 적 없는 한반도 연안을 조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저의 판단이 애초의 기대에 걸맞는 성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순풍은 우리가 한반도 동해안의 남동쪽 끝에서부터 만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두만강까지 그리고 만주연안을 따라 몇 십 마일 더 먼 곳에 이르기까지, 전 지역을 조사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작업 중에 우리는 위도 39도 19분에서 넓고 훌륭한 만을 발견했으며, 이에 제가 이미 고인이 되신 라자레프(Лазарев) 대장님을 위해 그분의 존함을 따 그 만을 라자레프라고 명명했습니다. 저희가 둘러본 곳의 모든 지도와 기록들을 폐하께 가능한 한 빨리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한반도 연안의 측량 조사 말고도 조만간 가능한 기회에 러시아에 인접한 이 국가의 정부에 서한을 발송하여, 우리 선박들을 우호적으로 맞아줄 것을 요청해 보는 것은 어떨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지금 바로 외무부에 보고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항만에서 3일 동안 체류하는 동안의 정황이 비록 경미하게 끝났다고는 할지라도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제 전함이 자주 방문하고 양자 간의 우호적이고 원활한 교제가 있은 이후에도 조선인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무리를 지어 덤벼들고, 장교들과 선원들이 접안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조선인 무리가 압박을 가해오고 돌멩이까지 던져 세 사람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상황에서 우리 장교와 선원들은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사냥용 산탄이긴 했지만 그래도 장전된 소총으로 4발을 발사하자 그들의 공격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후 마을의 지도자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공격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여기서는 그들의 거친 기질과 함께 민중들의 수준이 낮다는 점을 추가적으로 보고 드리는 바입니다.
한 곳의 항만에 더 들른 후, 우리는 하루 내내 안개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닻을 올리라고 내린 명령을 안개 때문에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날이 개었고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있길 바라며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만을 따라 거슬러 올라갈 때 돌연히 안개가 짙어지면서 가장 가까운 만이 가려진데다가, 수심 8사젠에서 전함을 선회하는 순간 암초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항로를 잃지 않고 암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시간 만에 물이 새어들어 수위가 1인치나 더 높아 졌으나 3일이 지나자 예전의 상태로 복구되었습니다. 심한 손상은 아니었습니다. 날씨가 좋았던 첫 날에는 잠수 도구를 이용하여 그곳의 수중 지형을 조사했습니다.
동월 17일 타타르 해협으로 진입할 때 위도 44도 지점에서 상하이에서 회항 중이던 ‘보스톡’ 호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데카스튜슈만에 러시아 함대들을 집합시키라는 각하의 명령이 담긴 1월 16/23일자 부본을 기쁘게 전달 받았습니다. 동시에 저는 신문에서 프랑스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면적은 2,321.512km²로 한국 최대 규모의 국립공원이다.[1]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진도군, 완도군, 고흥군을 거쳐 여수시까지 이어진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4. РГАВМФ, ф.410, оп.2, д.3088, лл.4~7
사본
베이징 1869년 5월 10일
A.M. 고르차코프 대공 각하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귀하
작년 9월 4일 제31호 왕복문서에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소문이 남 우수리 변강에 널리 퍼졌다는 동시베리아 총독의 통보를 접한 육군 소장 블랑갈리(Блангали)는 그것의 진실 여부를 밝히고자, 자신의 지휘 하에 배속된 포함에 조선의 서해안을 정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아시아국 책임자에게 통보했습니다.
본 명령에 따라 스크루 추진식 ‘소볼’ 호는 지난 4월 상하이에서 텐진으로 향하는 도중에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항해했고, 텐진에 도착한 함장은 저에게 자신의 항해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했습니다.
해군 대위 우소프(Усов)의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조선의 서해안을 따라 형성된 모든 군도들을 통과했는데 그 어디에서도 외국군에 의한 점령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위치한 곳을 산정할 수 있는 상세하고 정확한 해안지도를 보유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는 강화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간략한 지급공보를 발송하여 ‘소볼’ 호가 조선에서 겪은 사건에 대해 각하께 자세하게 보고 드려야만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소볼’ 호는 4월 14일 다도해에 진입했습니다. 강화도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함장은 조그만 섬 근처에 정박했습니다. 이곳에 보관 중인 1866년 프랑스 탐사대의 지도에 나와 있는 정보에 따르면 작은 운하 일 브와시(Ile Boisee)라는 작은 수로에 의해 두 섬이 나뉘며 강화도 남쪽 약 6마일 거리에 있습니다. 군함에서 관찰했을 때, 그 섬에 있는 산의 뒤편 거의 은폐된 곳에 포문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있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다음날 장교들이 함선을 출발하여 관측을 위해 가까운 해안에 상륙했는데, 이곳에서 주민들로부터 매우 우호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표시를 해가며 러시아 일행이 자신들의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고, 동시에 우리 함선을 방문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4월 17일 아침 말초프 소위는 해병 한 명과 함께 간조 때 얕은 여울에 나타나는 새를 사냥하기 위해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보트를 함선으로 되돌려 보낸 후 그들은 썰물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로부터 1.5 베르스타 거리에 위치한 성으로부터 약 50명가량의 조선병사들이 50보 전방까지 접근하여 소총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우소프 대위는 그 즉시 무장한 단정을 해안으로 급파하는 것과 동시에 사격 중인 조선군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군은 보트가 연안에 접근하자 자신들이 있던 산에서 내려와 함대기가 게양된 구명보트에 사격을 가했습니다. 함포로 원형포탄을 발사하자 조선군은 도주하여 연안의 절벽 뒤로 도피한 후, 포탄이 작렬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구명정을 향해 계속해서 사격을 가했습니다. 말초프 소위와 해병은 조선군의 계속된 소총 사격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군함으로 돌아왔습니다. ‘소볼’ 호의 함장은 자신의 보고에서 함포사격으로 조선군 중 부상자나 전사자가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말초프 소위를 소총으로 가격하려 했던 조선군 병사 한 명이 말초프가 발사한 산탄총에 무릎부상을 입었다는 것만이 명백할 뿐입니다.
불손한 공격과 아군 함대기를 모욕한 사건에 대해 조선인들을 응징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우소프 대위는 함선 내 장교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요새를 포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후 2시 해안으로부터 6/10 해리의 거리에서 함포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다양한 포탄을 60발 이상 발사했습니다. 요새 양쪽에 위치한 마을에는 피해가 없었습니다. 요새가 지나치게 산에 가려져 있어 우리 포격으로 요새가 입은 피해를 정확히 판단하기에는 곤란했다고 합니다만, 요새 내의 건물들이 불에 탄 것은 명백했다고 합니다. 요새로부터 대응포격은 없었습니다. 오후 4시 우소프는 해협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다수의 중국 범선들이 야음을 이용하여 급습할 수도 있는 만큼, 밤까지 그곳에 정박해 있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닻을 올리고 연안을 빠져나왔습니다. 다음날 그는 텐진을 향해 출항했으며 항해 도중 지푸에 기항 했습니다.
그런데 우소프 대위는 육군 소장 블랑갈리의 훈령을 정확하게 이행하지 못했다고 저에게 보고했습니다. 블랑갈리의 명령은 가능하면 조선의 해역에서 정박하지 말고, 현지 주민과 접촉을 피하며, 만약 주민과의 접촉이 불가피할 경우 가장 평화적인 호의를 보여주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소프는 야간에 낯설은 해역에서 암초 사이를 항해하는 것과 관측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박이 불가피했다고 저에게 설명했습니다.
이 사건은 특히나 통탄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인들은 다른 외국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과 적대감을 더 강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스러운 것은 그런 적대적 불신감과는 반대로 그들에게 가까운 이웃으로서 우리의 우정 어린 감정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조선정부에 서한을 발송하여 조선해안에 접근한 우리의 포함은 추호도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장래에도 조선인이 금번 사태처럼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함선으로부터의 그 어떤 위험도 두려워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정부에 확인시켜 주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제 그 서한은 이곳에서 중국정부의 중재를 통해 조선으로 발송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조선의 항구 중 한 곳으로 ‘소볼’ 호를 다시 파견하는 것은 새로운 충돌을 수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꼭 고려해야 할 것은 상기 서한이 상당히 우호적인 어조로 표현되지 않을 경우 조선인들의 답변이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며, 그러면 그 자체로써 쓸데없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 서한이 중국정부의 중재를 통해 전달된다 하더라도 조선인들로부터 만족스럽지 않은 답변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한 중국정부의 중재를 통해 이루어질 경우, 본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널리 알려질 수도 있습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동시베리아 총독 각하께 발송한 왕복문서에서 저는 노브고로드스키(Новгородский) 만에 있는 우리의 국경관청을 통해서 조선정부와 교섭하는 것이 더욱 편리할 것 같다는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제가 중국의 대신들과 본 사건에 대해서 나눈 대화 속에서 얻게 된 인상에 따르면 본인이 제시한 행동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저는 중국인들에게 중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역시 조선의 완전성 유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가 매우 위험한 결과로서 조선정부를 위협할 수도 있음을 직접적으로 표명한 후, ‘소볼’ 호의 사건 발생에 관해서 조선정부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도록 권고해 줄 것을 중국 대신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대신들은 조선정부를 계몽시키려 하지 않고 있으며, 조선에게 권고하는 것에서 최소한의 이익을 기대할 수도 없다고 제게 답변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인이 중국정부의 권고에 대해서도 그리고 서구열강의 친선 성명에 대해서도 귀를 닫을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대신들은 저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즉 (만약 우리가 권고를 한다면-역자 주)조선인은 중국인 또한 외국인과 공동으로 조선을 예속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의심할 것이니, 우리의 권고가 어떤 소용이 있겠는가? 외국인들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 조선정부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다. 따라서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제가 부탁하는 것을 조선정부에 전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중국 대신들이 이렇게 회피하는 근본 이유는 중국의 속국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에 대해 그들의 정부가 충분한 권위를 발휘하고 있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갖고 있는 영향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실제로 밝혀지는 것을 피하고 싶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한편 중국 대신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외국인들을 위해 감사하는 마음에서 권고를 했을 때, 조선인들의 눈에 저속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두려워하고 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이곳의 대신들이 제 소망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열정적으로 이행해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명:
뷰초프(Е.К.Бюцов)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30. РГАВМФ, ф.410, оп.2, д.4122, лл.24~25
저는 어제 일본 해양부 장관인 가와무라 해군중장으로부터 조선인들의 적대적 행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된 바, 그 내용을 포함하여 본 보고서를 상신합니다.
금년 7월 11/23 저녁 5시 경, 100명 정도의 조선인 무리가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을 습격했습니다. 전(前) 페테르부르크 주재 일본대리공사였던 하나부사의 공사관에 있던 30명 가량의 일본인은 정부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저녁 7시까지 공사관을 방어했으나, 화재가 발생하자 원하던 원치 않던 무기를 쥔 채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으며, 조선인들에게 추격당하면서도 방어와 보호를 받으려 왕궁까지 도주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궁에서는 그들을 들여보내지 않았고 도와주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일본인들은 인천 쪽 해안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밤새 16마일을 걸어가 아침 무렵 휴식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후, 일부 병력을 할당하여 운반선을 찾도록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재차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약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바다로 나갔다가 영국 포함 ‘Flying Fish’호를 만난 후, 사정하여 나가사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공사 발신의 지급(至急)공보를 접수한 일본정부는, 조선정부에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해군소장의 지휘 하에 함기를 보유한 ‘콩고’호 및 순양함과 포함 각 2척으로 구성된 분함대를 즉시 조선으로 파견했습니다.
금일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세력이 왕비의 가족을 체포하기 위해 궁궐을 습격했다고 합니다. 왕은 탈출에 성공했으나, 폭도들은 왕의 일족들이 사는 궁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현 국왕이 선왕의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였던 연고로 정권은 왕의 친부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새로이 선택된 백성들의 지도자는 외국인의 적으로 유명한 자이기 때문에 무정부세력들에 의해 선택된 것입니다.
분견함대 사령관 슈펠트가 체결한 조약을 미국정부가 비준하지 않은 만큼, 프랑스 역시 조선인들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추측컨대 영국 또한 중국 및 일본해 분함대 사령관인 해군중장 윌즈가 체결한 조약에 만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해군대위 모르돕스키
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32. РГАВМФ, ф.410, оп.2, д.4122, лл.32~33
베이징 1882년 8월 6/18일
니콜라이 카를로비치 각하
지난 7월 28일자 전보에서 영광스럽게도 각하에게 이곳 정부가 서울에서 백성들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한 이후 조선 국왕이 요청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드렸습니다.
청의 대신들은 오늘 대화중에 제가 조선의 사건을 언급하자, 그에 대해 설명하기를 서울에서 온 초기의 소식에 따르면 그곳에서 일어난 움직임은 오직 일본인들에게 집중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요는 다른 성격을 띠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후의 궁을 습격하였고, 왕의 권력은 전(前) 섭정자(양자로 간 현재의 국왕을 그 자신의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에 의해 탈취되었으며, 역시 그에 의해 왕비와 왕의 주요 고문들이 독살되었습니다.
대신들은 이어 말하기를 청 조정은 황제의 책봉을 받은 왕에게서 정권을 탈취한 모반을 보면서도, 종속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조용히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전복된 정권과 파괴된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조치를 취하는 것은 청 조정의 의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3,000명 가량의 부대가 조선으로 출발해 8월 30일 인천에 상륙하였습니다.
대신들의 말에 따르면, 바로 그날 같은 곳에 일본 공사와 1,200명의 호위대가 상륙했다고 합니다.
상을 당해 휴가 중이던 북양대신 리훙장은 급히 텐진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외국 열강들 중에서 인천으로 전함을 출항시킨 나라는 아직까지는 미합중국뿐이라고 합니다.
심심한 존경과 충심을 담아
서명:
뷰초프
확인:해군대위 모르돕스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34. РГАВМФ, ф.410, оп.2, д.4122, лл.36~36об.
8월 18/30일 서울 주재 일본 공사는 조선의 전권대표와 소도시 제물포(사이부추코)에서(인천항 근처의) 다음의 조항을 포함하는 조약에 조인했습니다.
1. 조선국 정부는 20일 내에 일본 공사관 습격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한다.
2. 일본국의 관리들은 폭도들에 대한 재판에 배심판사로서 참가한다.
3. 조선국 정부는 5년 내에 일본국에 50,000 엔(엔은 멕시코 달러와 동등함)을 지불한다.
4. 일본국 공사관의 안전 보장을 위해 일본국 부대가 서울에 주둔하고, 병사(兵舍) 건축과 보수비용은 조선국 정부가 부담한다.
5. 조선국 정부는 도쿄에 조선국 왕이 일본국 황제에게 자필로 쓴 사과서와 함께 특사를 파송한다.
6. 일본인들에게 개항장 근방 50리(조선 마일)까지는 허용되며, 이 거리는 2년 후 100리까지로 확대된다.
7. 소도시 호칸친(Хоканчин, 양화진)을 일본인들에게 개방한다.
8. 일본국 공사와 영사, 그리고 공사관과 영사관에서 근무하는 관리들도 조선국 예조에서 발행한 통행증을 소지하고 국내를 여행할 권리를 갖는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45. РГАВМФ, ф.410, оп.2, д.4122, лл.99~102об.
비밀
이반 셰스타코프 각하
이반 알렉세예비치 귀하
아시아국 국장을 통해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발생한 사태에 관하여 조회할 것을 이미 각하께서 윤허하셨습니다.
금번 사태와 관련하여 저희가 접수한 정보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금번 사태의 원인은 국왕에 대한 불만이 작용하여 궁정 공격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입니다. 본 공격으로 수 명의 조선 고관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국왕은 개인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수백 명으로 구성된 일본군 호위대에 대한 명령권을 갖고 있었던 일본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일본인의 간섭은 서울 주재 청국 수비대와의 무력충돌을 야기했으며 패배한 일본인들은 제물포로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조선인들이 자신의 국왕에 대해 갖는 불만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정보가 없으나, 몇 가지 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국왕의 혁신정책 및 서구열강과의 근린정책으로서 그런 상황의 형성은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일파가 조선 내에서 형성되는 것에 부응하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상기 언급된 사태의 결과, 현 국왕의 고문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독일 출신의 유명한 묄렌도르프는 나가사키 주재 러시아 영사에게 서둘러 특사를 파견하여,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제물포로 수 척의 러시아 전함과 200명의 수병을 서울로 파병하여 자신을 보호해 주고, 동시에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설정해 달라는 조선 국왕의 요청을 러시아제국 정부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63. РГАВМФ, ф.417, оп.1, д.257, лл.57~79
4월 29일
오후 1시 무렵에 예게르만 육군중위와 함께 해안으로 갔던 통역사가 모선으로 귀환해 함흥 목사가 이 선박을 방문하기를 원하면서 소형선박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음을 전하였습니다. 목사를 태워오도록 구명보트를 보냈으며, 오후 2시 30분에 그가 이 보트를 타고 우리 배를 방문하였습니다. 목사는 선실로 들어와 저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왜 수심을 재고 태양을 관찰하는가?”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조선의 연안은 지도에 올바로 표시되어있지 않다.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선박이 쉽게 파손될 수 있다. 특히 조선이 교역을 위해 항구를 개항할 경우 더 그러하다. 따라서 수심을 재고 해안을 촬영하는 것이다.” 그러자 목사는 우리가 함흥과 교역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조선인이 희망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만약 희망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함흥 부근에 만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상선들의 빈번한 방문은 생각할 수 없다.” 이어 목사가 “어디에서 왔는가, 몇 명의 승무원이 있는가” 등의 일상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는 선실에 30여분 동안 머물렀는데, 우리가 와인이나 단 음식을 대접하려 하자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단지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에는 동의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목사에게 저희 배를 보여주었습니다. 배에서 내리면서 그는 저를 도시로 초청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양이 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초청에 감사해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만약 이 배가 다시 한 번 도시 부근을 들른다면 그 때 도시를 반드시 방문하겠다.”
함흥은 500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도시는 골짜기의 평평한 저지대에 사각형으로 건설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주변에는 흙과 돌로 만들어진 성벽이 둘러쳐져 있는데, 이 벽은 석회로 착색되어 있기 때문에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잘 보입니다. 벽의 높이는 약 40피트(12미터)입니다. 가옥의 대다수가 동일한 골짜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가옥은 일반적인 조선식 유형으로 건축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벽돌로 지어져 있지만, 대다수의 가옥은 짚으로 덮여 있습니다. 도시 내부와 그 인근에 8,000동의 가옥이 있는데, 이 모두는 우리 배로 왔던 목사가 관할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 도시에는 북부지방을 총괄하는 관찰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조선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도시에 1,8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농업, 축산업, 어가공업 및 미역 채취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매년 함흥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톡으로 300~400마리의 가축을 몰고 가 판매하곤 했으나, 금년에는 가축 질병으로 인해 주민들이 많은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는 가축을 판매한 돈으로 드렐 직물, 붉은 무명 직물, 거친 옥양목, 캘리크 옥양목 등의 물품을 구입해가지고 돌아옵니다. 구입한 물품 중 일부는 커다란 조선 선박을 통해, 그리고 일부는 해안을 따라 짐짝으로 운반해 옵니다. 비단제품과 같이 주민들에게 필수적인 일부 품목의 경우는 서울에서, 그리고 일부는 훈춘에서 들여옵니다. 훈춘까지는 10~15일이 소요됩니다. 서울까지는 20~25일이 소요됩니다. 우리 배를 방문한 조선인들 중에는 블라디보스톡에 체류한 경험이 있거나 러시아어를 매우 잘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도시 근교의 북쪽에 솟아있는 곶(저희가 이미 천문학적 측량을 마친 지역입니다)에는 옛 성벽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성벽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 벽 역시 도시의 성벽과 마찬가지로 흰색을 띠고 있습니다. 도시의 전면이나 그 주변에는 만이 전혀 없습니다. 해안은 남북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그곳에는 항상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습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64. РГАВМФ, ф.417, оп.1, д.257, лл.94~126об.
태평양분함대 사령관 대리께
【첨부】
두만강 하구 부근의 해안과 벨라야 스칼라(Белая Скала) 섬들이 보였습니다. 가슈케비치 만은 입구의 너비가 위선 상으로는 약 8.5 마일이고 자오선 상으로는 4.5마일입니다. 전함 ‘팔라다(Паллада)’ 호가 작성한 지도에서 볼 수 있는 만의 북쪽 절반은 너비가 몇 걸음 정도 되는 낮은 모래 구릉으로 분리되어 실질적으로는 호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역이 매우 낮기 때문에 남풍이 계속 부는 경우 가슈케비치 만의 수면 높이가 보통 때와 비교할 때 수 피트 정도 높아집니다. 조선인들의 말에 의하면 호수는 바다와 통해 있어 물맛이 짜다고 합니다. 가슈케비치 만은 4개의 인접한 작은 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배가 5월 24일에 닻을 내렸던 첫 번째 만 혹은 동쪽 만은 남남동풍에서 남풍을 거쳐 서남서풍에 이르는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두 번째 만은 동남동풍에서 남풍을 거쳐 남서풍에 이르는 바람에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만은 동풍에서 남풍에 이르는 바람에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두만강과 그 하구에 대한 측량을 실시하고 가슈케비치 만과 두만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세밀하게 조사하라는 지시만을 내렸습니다. 1880년에 군대의 지형측량관들이 강안에 대해서는 매우 세밀하게 촬영을 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강안에 대한 촬영은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오후 12시 45분 단정들은 두만강 하구에 도착하였습니다. ........ 거친 옥양목을 싣고 쿠첸푸(Кученфу)까지 갑니다. 그와 같은 하천용 평저선은 지난해에는 10차례 운행되었지만, 올해는 2차례만 운행되었습니다. 쿠첸푸에서는 물물교역이 이루어지는데 거친 옥양목 1필이 보리 7~8푸드와 교환되고 있으며, 이렇게 교환된 보리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운송됩니다.
두만강의 러시아 강안에는 경흥, 투렌(Турен), 경원에 살다 이주한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촌락들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자레치예(Заречье)와 볼쇼예 셀로(Большое Село)입니다. 두만강 주변에는 모두 180동의 농가가 있습니다. 우리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은 매우 정력적입니다. 카자코프(Казаков) 곶부터 우리 국경까지 조선 연안의 거의 모든 촌락들을 방문하면서 저는 그와 같이 정력적인 사람들을 본 바가 없습니다. 가장 빈곤한 농가의 경우에도 조선에서 본 가옥들에 비해 규모가 최소한 2배 이상 컸습니다. 여기 거주하는 조선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농가들은 많은 수의 가축을 기르고 있는데, 이 가축들은 블라디보스톡으로 반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수, 보리, 옥수수, 메밀 등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귀리는 작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거의 재배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확량은 보통 아래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수 1말로 풍년에는 90말을 수확한다.
수수 1말로 흉년에는 40~45말을 수확한다.
보리 1말로 풍년에는 15말을 수확한다.
보리 1말로 흉년에는 7~8말을 수확한다.
귀리 1말로 풍년에는 10말을 수확한다.
귀리 1말로 흉년에는 5~6말을 수확한다.
우리쪽 강변에는 러시아 시민권을 보유하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촌락들 외에도 조선 국적의 조선인들 60명 정도가 경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동풍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어떠한 통로도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강으로 들어갈지는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북쪽에서 연안을 따라 항해하고 있는 조선의 평저선을 발견하고 강으로 들어가는 항로에 대해 질문하기 위하여 그 배로 접근하였습니다. 이 평저선은 강 하구 부근에서 얀코프스키(Янковский) 씨가 채광한 철광석을 싣고 강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6인용 소형함정이 동력선을 위한 예비석탄을 과도하게 적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반 이상의 석탄을 강 하구의 사주로 향하고 있던 이 평저선에 옮겨 실었습니다. 이 평저선은 물론 앞서 가면서 우리 단정들을 견인하였습니다. 동력선은 때때로 동력을 멈추면서 평저선의 뒤를 따랐으며, 6인용 소형선박은 얕은 여울에 근접하여 약간 왼쪽에서 측량을 하면서 따라갔습니다. 해안과 해안을 따라 0.25발 정도 거리에 나 있는 얕은 여울 사이, 즉 북쪽의 좌측 해안을 따라 물길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남쪽 우측 해안을 따라 있던 물길은 3년 전에 이미 완전히 막혀버렸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항로를 확정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구 부근의 강변이 유사(流砂)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 물길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강한 비가 내려서 강의 수심이 깊어지거나 강한 동풍이 불 경우 수시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물길의 변화로 인하여 지난해에 강을 따라 항해하던 조선의 평저선이 침몰하였습니다. 그 결과 배에 타고 있던 17명의 조선인들 중 15명이 익사하였습니다. 수심이 가장 얕은 사주는 깊이가 5피트였습니다. 사주를 통한 통행은 서풍이 불거나 혹은 바람이 없는 상태에서 바다에 동풍에 의한 높은 파도가 일지 않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흘수가 얕은 조선의 평저선들도 통행이 불가능합니다. 오후 1시 15분에 강으로 들어섰습니다. 동력선이 다른 단정들을 견인하였습니다. 측량을 하면서 강을 따라 상류를 향해 항해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물길이 두만강의 우리 쪽 강변을 따라 수심이 24~8피트까지 변화하면서 차카세미(Цакасеми) 촌까지 이어집니다. 차카세미 촌부터 첫 번째의 큰 섬까지 약 5베르스타(미터법 시행 이전 러시아의 거리 단위로 1 베르스타는 1.067 km임-역자 주)의 거리에는 물길이 강의 우측 변을 따라 나 있습니다. 이곳의 수심은 5~24피트입니다. 가파른 곶들 부근에는 수심이 깊습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물의 흐름이 3~4노트에 달합니다. 첫 번째 큰 섬에서 물길은 동쪽 방면을 따라 이어지는데, 수심이 급격히 얕아져서 3피트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서 동력선이 통로를 알아내기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얕은 여울에 올라앉았습니다. 동력선의 측량기는 수심이 2피트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물길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강을 항해하는데 있어 가장 힘든 구간입니다. 이후 물길은 강의 중앙부를 따라 수심 7~12피트로 이어집니다. 섬에서 북쪽으로 2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선 측 곶의 반대편의 경우 수심이 4~6사젠으로 밝혀졌습니다. 오후 7시에 포드고르나야(Подгорная) 촌의 반대편에 멈춰 섰습니다. 이 촌락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촌락은 하구로부터 러시아 측 강안의 첫 번째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촌락 위쪽으로 약 1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구분하는 국경표식이 있습니다. 촌락에는 우수리 기병중대 소속의 코사크인 6명이 서있었습니다.
5월 31일에는 아침부터 9시간 동안 짙은 안개가 끼어있었습니다. 흘수가 깊기 때문에 촌락 부근의 모래톱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 동력선은 남겨둔 채 6인용 소형선박과 일본제 소형선박을 타고 측량을 실시하면서 강의 상류로 올라갔습니다. 포드고르나야 촌에서부터 물길은 처음에는 조선 쪽 강안으로 뻗어 있다가 그곳에서부터 국경표식이 있는 구릉 방향으로 장소를 바꿉니다. 1861년 지도에서는 이곳을 무너진 여울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 여울의 남동쪽 부분에서 크지 않은 샘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물길은 1.5베르스타 동안 강의 중간으로 뻗어 있다가 그 후 강의 우안으로 이동합니다. 이 구간의 수심은 4~12피트입니다. 물은 매우 빠른 속도로 흘러 최소한 3노트는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포드고르나야 촌에서 5베르스타 떨어진 상류의 산 부근 조선쪽 강안의 수심은 22피트에 이릅니다. 이 산에서 상류로 1베르스타 떨어진 곳에서는 두만강으로 흘러들어오는 크지 않은 하천인 쿠린가이(Курингай)가 두만강으로 흘러들어옵니다. 이 하천은 소폰크(Сопонг) 호수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오후 12시 30분 이 하천으로 들어섰습니다. 하천의 폭은 10사젠이었고 수심은 약 6피트였습니다. 친자니(Цинзани) 부근의 하천을 가로지르는 교량 근처에서 멈춰 섰습니다. 계속 단정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교량이 배의 통과를 방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해빙기와 큰 비가 와서 두만강의 수심의 높아질 경우에는 두만강의 유속이 하천의 유속보다 빨라지기 때문에 물이 쿠린가이로부터 소폰크 호수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이 호수의 길이는 약 4베르스타입니다. 쿠린가이의 수원(水源)으로부터 남쪽으로 3베르스타 떨어진 지점부터 동쪽 강안에서 산지가 끝이 나고 소풍 호수를 호코르푼가(Хокорпунга) 호수와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너비 1.5~2베르스타의 소택지가 시작됩니다. 호코르푼가 호수는 가슈케비치 만에 접해 있으며, 만과는 평평한 저지대의 모래 턱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 큰 홍수가 발생하면 두만강의 물이 소폰크 호수를 지나 저지대를 침수시키면서 호코르푼가 호수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럴 경우 매우 많은 물고기도 같이 흘러들어갑니다. 이로 인하여 6월 5일에는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호코르푼가 호수의 얕은 물에서 손으로 직접 물고기(황어)를 퍼 올렸습니다. 가슈케비치 만에서 호수들과 저지대를 거쳐 친자니 촌까지의 총거리는 약 15베르스타이며, 제가 보기에 만약 운하에 흘수가 얕은 선박들만을 통행시킬 목적이라면, 이 지역에 운하를 부설하는데 전혀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2개 호수의 대체적인 수심은 5피트 정도입니다. 일본에서 만든 지도들에는 두만강이 2개의 하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주민들에게 과거의 강이 현재는 호수가 있는 지역으로 흘렀는지의 여부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말이나 어떤 증거가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친자니 주민 중 한 명(과거에는 관원이었고 현재는 아동들을 가르치고 있음)이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 잘 안다고 하면서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약 400년 전에 두만강은 실제로는 2개의 지류를 이루면서 바다로 흘러들어갔으며, 이 당시 강의 이름은 코가이(Когай)였다. 강의 두 번째 지류는 현재의 엑스페디치야(Экспедиция) 만(포시에트)으로 나 있었으며, 두만강은 가슈케비치 만으로는 단 한 번도 흐른 적이 없다.”
오후 2시 강의 동쪽 강안을 따라 측량을 실시하면서 하류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오후 3시 30분에 크라스노예 셀로(Красное село)에 도착하였습니다. 같은 날 야간에 군대 지형측량관과 하급관료 집단이 크라스노예 셀로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은 국경표식 주변 지역에 대해 정밀촬영을 할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측량기사로부터 1880년과 1884년에 측량기사들이 두만강을 촬영한 적이 있으며, 첫 번째로 촬영한 사진은 이미 출간까지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촬영들은 강의 다양한 수면 높이에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사진들을 통해 섬들의 크기와 거리 차이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지역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큰 비가 내리면 예외 없이 강의 물길이 바뀌며, 새로운 섬들과 모래톱들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6월 1일 아침부터 비가 거세게 내렸습니다. 오전 9시 30분 무렵 비가 조금 잦아들었습니다. 동력선의 증기기관을 작동시킨 후 정오에 강을 따라 하류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항해에는 조선인이면서 크라스노예 셀로 촌장 비서인 이바나킨(Иванакин)이 물길을 알려주고자 수로안내인 자격으로 동승하였습니다. 오후 12시 45분 큰 배의 수로 안내 경험이 없던 수로 안내인이 적시에 항로를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동력선이 큰 섬 중앙부의 반대편에 있는 1피트 깊이의 암초로 밀려가게 되었습니다. 배 뒤편의 강물이 반대로 흐르면서 선박을 심하게 기울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승무원들은 선박이 전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배의 한쪽 갑판에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력선의 펌프와 급수 및 배수용 판에 모래가 들어왔기 때문에 기관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6인용 소형선박과 일본제 소형선박의 도움으로 동력선을 큰 섬의 연안으로부터 수심이 보다 깊은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동력선의 기관을 점검하고 수리한 후 재차 기관을 작동시켜 오후 3시에 섬의 연안을 따라 하류 방향으로 항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6인용 소형선박은 측량을 하면서 앞장서서 항해하였습니다. 오후 4시 동력선이 또 다시 얕은 여울을 만났습니다. 선박이 여울에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승무원들이 모두 배에서 하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후 5시 두만강 하구에서 2.5베르스타 떨어져 있는 조선인 촌락 차카세미(Цакасеми)(우리 측 강안)에 도착하였습니다. 파도가 거칠었기 때문에 바다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차카세미에서 당직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은 가옥에서 쉬었습니다. 왜냐하면 끊이지 않고 내린 비로 모두가 다 젖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6월 2일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었습니다. 파도도 매우 높았습니다. 파도소리가 촌락에서도 잘 들렸습니다.
6월 3일 아침부터 비가 강하게 내렸습니다. 기관을 작동시킨 후 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최저로 하면서 하구 쪽으로 나갔습니다. 오전 9시 30분 하구에 도달하였습니다. 높은 파도로 인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차카세미로 돌아갔습니다. 오후 12시 30분 조선인을 통해 가슈케비치 만에 정박해 있는 모선에 서한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답신은 5시 45분에 받았습니다. 촌락 맞은편에는 정규 선착장이 있습니다.
6월 4일 비가 그치고 파도소리도 어느 정도 작아졌습니다. 오전 8시 30분에 하구로 나왔습니다. 하구 부근에서 우리를 강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준 조선의 평저선과 조우하였습니다. 그 배는 물을 퍼내고 있었습니다. 그 배는 바다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파도로 인해 얕은 여울로 밀려갔고, 두 번째 파도로 인해 배의 절반 정도에 물이 들어찼습니다. 강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시도도 실패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노 2개를 잃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조선인들은 우리에게 파도가 높기 때문에 바다로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제가 강변에 거주하는 주민들로부터 수집한 두만강과 그 주변에 대한 정보를 첨부합니다. 강의 수량은 내리는 비의 양에 따라 결정됩니다. 봄 시기에 해빙으로 인하여 강이 범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수면이 약간 높아질 뿐입니다. 선박이 항행할 수 있는 거리는 약 100베르스타입니다. 중국의 도시인 훈춘에서 조금 더 위쪽까지라고 보면 됩니다. 흘수가 1.5피트인 특별한 하천용 평저선과 매우 큰 조선제 해상용 평저선이 조선 농촌들과 도시들 간의 화물수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블라디보스톡에서 해상용 평저선이 화물과 승객(특히 장비와 식량을 공급받는 노동자들)을 태우고 통행하고 있습니다. 신고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노동을 하는 전 기간에 걸쳐 매달 7.5루블과 수수 4말(수수 1말은 약 1.30루블입니다)을 납부해야 합니다. 열정의 정도에 대해 말하자면, 이곳에서는 단 한 명의 노동자도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돈을 더 버는 쪽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곳 조선인들은 러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조선의 동해안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보다도 더 러시아어를 모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국경 인근의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자주 들르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러시아인들과 보다 많은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영토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많은 부분은 조선의 보다 내지로부터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정교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조선인들은 항상 이에 대해 아직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는 동일한 대답을 하곤 합니다.
조선의 동해안 인근에서 작업을 수행하던 전 기간에 걸쳐 지역주민들은 해안을 방문하는 우리의 장교와 승무원들을 항상 우호적으로 대하였으며, 우리가 요구하는 모든 정보를 기꺼이 알려주었습니다. 한 촌락에서는 주민들이 러시아가 조선의 해안에 군사기지들을 만들기를 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조선인들 사이에 돌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사실인지를 물었습니다. 또한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매우 기뻐할 것이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조선 동해안을 촬영하는데 거의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안개로 인해 작업이 그다지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이 안개는 산들의 높이를 산정하는 작업에도 방해가 되었습니다.
볼틴(Болтин) 곶에서 두만강 하구까지의 해안에는 만족할만한 만이 전혀 없습니다. 즉 모든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지역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은신처로 활용할 수 있는 만으로는 시부츠 만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만은 자오선을 따라 직선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만 출입구의 너비는 6발입니다. 제가 이미 앞에서 보고 드린 바와 같이, 이 만은 남남동풍과 남남서풍 사이의 바람을 제외한 모든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만 내부에 많은 배들을 정박시킬 수 있습니다
조선의 모든 해안에는 산림이 없기 때문에 이 만에서의 어떠한 작전에 있어서도, 특히 진지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이와 같은 상황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이 만의 북쪽으로는 안나(Анна) 만이 있습니다. 제가 이미 보고 드린 바와 같이 이 만은 모든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지만, 만 내부의 파도가 상당히 크고 정박에 불편이 있습니다
전쟁 시 강력한 은신처로 활용할 수 있는 장소로 코르닐로프(Корнилов) 만이라고 명명된 지역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 만은 그 크기로 인하여 방어를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요구됩니다. 제 견해로는 가슈케비치 만의 경우 수뢰와 진지를 이용하여 방어하기에 상당한 장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이 지나치게 넓고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안 쪽으로는 조금밖에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장소들은 은신처로서는 적합합니다만, 그곳들에 항구를 건설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만 내부에 파도가 많이 치며 필수적인 건설자재를 공급하는 삼림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위에 언급한 만과 작은 만들 외에도 해양용 수뢰정들의 은거지로 기능할 수 있고, 그곳으로부터 수뢰정들이 부근을 지나는 적 함정들에 대한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많은 수의 작은 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작은 만들에는 담수(淡水)가 보유되어 있으며, 연료를 운반할 수 있는 정박장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7월 2일 오전 6시 20분 북동쪽 11.5도 방향에 캐슬(Castle) 암초가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오전 7시 35분 거문도(Гамильтон)의 서쪽 끝부분의 방위를 북서쪽 50도로 측정한 후 항로를 북서쪽 45.5도로 잡았습니다. 오전 9시 거문도 항의 수심이 10.5사젠인 모래와 진흙이 섞여있는 바닥에 닻을 내렸습니다. 만의 해안을 관찰하고 그곳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내도록 무라비요프와 비테 해군중위를 파견하였습니다. 정오 무렵에 두 장교가 귀환하여 해안을 관찰한 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섬에는 기상대 건물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이 섬에 설치되었던 포대의 잔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섬의 서쪽 해안에는 구텔레프(Гутелев) 섬에서 기상대 건물로 연결되는 전신선이 바다로부터 뻗어 있다고 합니다. 전신선은 땅에 묻혀 있었는데, 장교들이 일본어와 영어를 조금 알고 있는 친절한 조선인 덕분에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4월에 6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중국 분함대가 거문도를 방문하여 약 5주일 동안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고 합니다. 정박 기간 동안 중국인들은 그들이 곧 돌아와서 병사들을 위한 병영을 건설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1주일 전에는 영국 군함 3척이 거문도 항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들은 영국군 묘지를 방문하기 위해 왔었다고 합니다. 그 군함들은 항구에 2일간 정박해 있었다고 합니다.
투코도(Тукодо) 섬 서남방의 곶으로부터 뻗어있는 얕은 여울은 영국인들이 부설한 크고 붉은 부표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소도(Содо) 섬의 동쪽 해안에는 2개의 큰 점이 석회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이 점들의 조합선(照合線)은 항구로 들어오거나 붉은 부표로 둘러싸여있는 얕은 여울을 통과하는데 이용됩니다. 선박이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바다는 조용했던 반면 산으로부터 남서풍에서 북서풍 사이의 돌풍이 불어왔습니다. 이와 같이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거문도 항에서의 정박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서울 주재 대리공사로부터 서울을 방문하라는 초청장을 접수한 후 저는 7월 8일 오후 10시에 일행과 함께 중국제 가마들을 타고 서울로 향하였습니다. 도로에서 12시간을 보냈습니다. 베베르 4등 문관은 이미 며칠 전에 (조선 - 역자 첨가) 국왕이 배가 도착했는지를 문의하였으며, 배가 제물포에 입항한 소식을 국왕이 들었을 때 함장과 장교들이 그를 접견했으면 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고 전하였습니다.
7월 14일 오후 6시 저는 4명의 장교들과 함께 궁궐에서 조선 국왕을 접견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접견 당시 국왕은 러시아 선박이 방문한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배가 제물포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국왕은 우리 배가 조선의 동해안을 촬영하고 측량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국왕은 저에게 그 작업의 결과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대화는 조선인 통역인 드미트리 베레샤긴(Дмитрий Верещагин)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블라디보스톡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으며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서울에 체재하는 동안 저는 우리 대리공사의 조언에 따라 국왕의 조카인 민씨 왕자(민영익을 말함-역자 주)를 만났습니다. 그는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제물포에 정박해 있는 동안 대리공사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4등 문관 베베르는 러시아 선박이 제물포에 정박해 있는 동안에는 서울에 살고 있는 유럽 사람들에게 어떠한 위험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조선인들은 매우 온순합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모든 간책을 동원하여 조선인들을 정부와 유럽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러시아 사람들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조선인들로 하여금 자주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조선정부가 무엇인가 개혁조치를 취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경우 중국인들은 다양한 거짓된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자극하곤 합니다. 일례로 지난해 범선 ‘크레이세르(Крейсер)’ 호가 조선 동해안을 측량하였을 때 중국 신문이 이에 대하여 기사를 게재하였습니다. 그 기사에는 조선 동해안 부근에 3개의 돛대를 단 러시아 군함이 위치해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어로는 ‘조선 동해안 부근에 러시아 군함 1척과 군함 3척이 더 위치해 있다’고 번역되었습니다. 물론 중국인들은 이 4척의 함정이 원산항을 점령하고자 왔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을 퍼뜨리는 데는 영국 공사도 일조를 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서울의 주민들을 매우 격분시켰으며, 그로 인해 당시에 매일같이 혁명이 예견되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제물포에는 6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중국 분함대가 머물러 있었으며, 서울 주재 중국 공사는 우리 대리공사를 포함한 모든 유럽 사람들에게 어떤 위험이 발생할 경우 모두가 어떠한 위험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제물포에 분함대가 정박해 있는 것을 알면서 감히 자신의 집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중국 공사가 심지어는 국왕에게까지 유사한 제안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배가 제물포에 입항하기 이전에 국왕이 좌의정을 교체하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좌의정이 중국 공사의 영향을 받으면서 행동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이 국왕의 의도를 알아냈을 때, 그들은 “국왕이 외국인들에게 조선을 팔아먹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국의 안녕을 염원하는 좌의정을 교체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을 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문으로 인해 당시에는 국왕이 좌의정의 교체를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교체는 그 후 수일이 지난 후 우리 배가 도착하였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좌의정은 먼 오지로 유형 보내졌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현재 조선은 평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제가 앞서 보고 드린 바와 같이 중국인들이 항상 정부와 유럽 사람들에게 반발하도록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고, 이로 인해 유럽 사람들은 오늘이 아니면 내일은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7월 16일 4등 문관 베베르가 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였습니다. “민씨 왕자가 러시아로 가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중국 공사가 왕자의 의도를 알아챈다면 그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이 여행을 무산시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자가 대리공사를 찾아와 자신을 시부츠 함을 이용하여 지푸까지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거기부터 그는 우편함을 타고 계속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여행은 중국인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예기치 못하게 이루어져야 하였습니다. 저는 이 여행과 관련하여 제물포에서 폐하께 전문을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송신기가 고장나 있어서 전보를 발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7월 16일에 조선 주재 러시아제국 공사관으로부터 민씨 왕자와 그 수행원을 지푸까지 데리고 가라는 제안서 제78호를 받고는, 그와 그를 수행하는 조선인 3명이 배에 승선한 직후인 7월 19일 오전 6시에 지푸로 항해하기 위해 닻을 올렸습니다. 오후 12시 30분 페리(Ferieres) 군도를 지난 후 산둥(Шантун) 곶에서 북쪽으로 5마일 되는 지점에서 항로를 북서쪽 62도로 변경하였습니다. 7월 20일 오전 4시 산둥 등대 방향인 남서쪽 70도로 항로를 전환하였습니다. 오전 7시 30분 우리 배에서 2마일 떨어진 지점을 6척으로 구성된 중국 분함대가 지나쳐 갔습니다. 6척 가운데 3척은 원재형 선박이었고, 나머지 3척은 독일에서 건조된 순양함 형태에 속한 선박으로, 돛대와 함께 신속성을 더하기 위한 장루(墻樓)를 달고 있었습니다. 분함대는 항적을 따라 항해하였으며,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베이-하-베이(Вей-ха-вей) 항에서 온 것으로 판단됩니다. 기함 깃발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전 11시 45분 지푸 항에 안전하게 도착하여 수심 4.5사젠 깊이의 바닥에 닻을 내렸습니다. 우리 공사인 페르규손(Фергюсон) 씨에게 민씨 왕자를 어디에 머무르게 할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우리 배로 오도록 청하고, 그를 위해 보트를 보냈습니다. 공사는 현재 지푸에는 그를 상하이로 보낼 수 있는 영국 우편선이 없기 때문에 그의 동의하에 임시로 지푸에 있는 호텔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공사는 왕자를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해안으로 갔습니다. 오후 4시 30분 민씨 왕자가 해안으로 나갔습니다. 장교가 그를 호텔까지 수행하였으며, 그는 우편선이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왕자의 개인적인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예포 예식은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28세로 영어를 매우 절도 있게 구사합니다. 그는 1885년에 8개월 동안 홍콩에 체류하면서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웠습니다. 이번에 그는 두 번째 유럽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1886년에 유럽을 방문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을 통해 유럽을 다녀왔습니다. 그는 뉴욕에서 유럽으로 갔습니다. 당시 그는 미국 군함 트렌튼(Trenton) 호를 타고 이동하였습니다. 그는 중국어도 자유롭게 구사합니다. 1884년 말부터 1885년 초까지 있었던 조선의 무질서(갑신정변을 의미함 - 역자 주) 당시 그는 죽음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그는 어떤 우연성의 덕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28군데에 상처가 났었습니다. 제가 이미 보고 드린 바와 같이 그는 러시아에 대해 전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저에게 수차례에 걸쳐 “조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이 조선을 장악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배의 지푸 체류에 대해서는 전보를 통해 폐하께 보고 드렸습니다.
7월 23일 오전 5시 45분 닻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오후 1시 제물포의 수심 9사젠 깊이의 진흙 바닥에 닻을 내렸습니다. 정박지에는 일본 범선 레이키 칸(Leiki-kan) 호와 미국 군함 에섹스(Essex) 호가 정박해 있었습니다. 오후 5시 대리공사 4등 문관 베베르가 배를 방문하여 7월 25일까지 배에 머물렀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민씨 왕자의 여행이 중국인들에게 좋지 않은 기분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특히 그들은 처음에는 왕자가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리 배가 제물포에 정박해 있는 동안 매우 더운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기온이 25.5도에 이르렀으며___, 습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기온은 매우 높은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승무원들은 하루에 세 차례씩 물을 뒤집어썼습니다. 2.5노트에 달하는 빠른 유속과 때때로 모습을 보이는 상어 때문에 뱃전에서의 수영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제물포에서 식료품은 물론 여타 물품들을 예비로 보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은 모든 것들을 충분히 구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선한 식료품으로는 육류(질은 매우 낮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가축들만 도축하기 때문입니다), 빵, 닭과 계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어류도 판매하지만 매우 드물게 나옵니다. 제물포에 오랜 기간 머물러야 하는 선박의 경우 나가사키에서 가축을 보충한 후 제물포로 오는 동안 인근의 섬들 중 한 곳에 내려놓으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제물포에서 석탄은 판매되지 않고 있습니다.
8월 15일 정오 보브르(Бобр) 호가 나가사키로 들어왔습니다. 그 배로부터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 대리의 8월 9일자 지시서한 제486호를 수교하였습니다. 이 지시 서한에 따라 차이코프스키 중령에게 제물포 정박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페리(Ferieres) 제도에서 제물포까지의 항해를 위한 최신지도를 전달하였습니다. 보브르 호는 이 지도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하 관련 문서 누락]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69. РГАВМФ, ф.417, оп.1, д.312, лл.7~11об.
조선 문제에 대해 리훙장에게 해명하기 위해 텐진에 다녀왔던 베이징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의 첫 번째 임무는 리훙장이 조선과의 관계에서 극단적이고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여, 우리를 가장 심각한 상황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8등 문관 라디젠스키는 리훙장과 회담을 지속하면서 러시아에게 앙심을 품은 국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의 외교관들은 중국만이 갖고 있는 의혹을 이용하여, 우리가 조선을 상대로 위험한 침략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 중국의 고관 및 베이징정부를 통해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 대리공사는 리훙장에게 러시아제국의 통치자들이 그렇게 행할 위험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리훙장의 중재로 중국 조정과 대신들이 한·러밀약 사건을 빌미로 조선국왕을 폐위시키려는 것을 단념하도록 만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습니다.
우리의 대표들에게는 참으로 기쁘게도 베이징에 있는 최고권자들이 평정을 되찾았으며 리훙장은 수차에 걸쳐 8등 문관 라디젠스키에게 중국정부의 심심한 감사표시를 우리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조선에 대한 전망을 설명할 수 있도록 텐진에 방문해 줄 것을 라디젠스키에게 허락했습니다.
조선을 점령하고 민비 일족을 바오딘푸(Бао-дин-фу)로 유형 보내라는 유지를 중국황제로부터 라디젠스키가 접수한 우리의 정보가 틀림없음을 확인한 후, 리훙장은 우리 대리공사에게 조선왕조의 군사적 점령을 예방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가해지는 적대적 영향력에 맞서 대응해야 했던 투쟁에 대해 자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베이징정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에 과도하게 고무되었고, 경험 없는 고문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조선을 중국황제의 통치영역에서 분리되지 않은 일부로 보고 있으며, 다른 외국의 능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날카로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극단적인 조치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리훙장의 말에 따르면, 그는 중국황제의 직접 명령 외에도 일부 외국대표들의 조선에 대한 제안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합니다. 즉,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는 그에게 영국의 협력을 이용하여 즉각 조선을 점령함으로써 그곳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영원히 제거하라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정부는 도쿄 주재 중국공사를 통해 장래의 오해를 제거하고, 중국과 일본의 평화로운 관계에 위협이 되는 조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이 북부, 일본이 남부를 갖도록 한반도를 우호적으로 분할할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8등 문관 라디젠스키는 리훙장과의 대화중에, 만약 우리의 고유한 이익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조선을 점령하거나 조선의 독립성을 빼앗을 의향이 없지만, 동시에 그 어떤 열강일지라도 서울에서 절대적 우월권을 확보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평화를 해치는 요소인 만큼 우리가 우려해 온 바,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리훙장은 조선 문제에 대한 러시아정부의 신중한 관점을 미루어 판단해 보건대, 한반도에서 적극적인 조치를 중단하고, 이 문제에 대한 러시아와 베이징정부의 관점을 중재하기 위해 언제나 특별히 배려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문제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과 베이징정부가 그것에 재차 집착하고 리훙장 그 자신도 두 번씩이나 억제하기에는 벅찰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여, 조선과의 관계에서 양국 정부가 지켜야만 하는 규칙을 규정하는 성문화된 협약이 보다 좋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외무부의 훈령에 의거하여 대리공사는 상기의 문서를 작성하는 것에 대해 리훙장에게 동의를 표하도록 했으며, 수정안에 대한 오랜 회담 이후, 동일한 문서를 교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 문서에 따르면 러시아와 중국 모두 조선의 현 상태를 유지하고 그 영토를 점령해서는 안 되는 의무를 동일하게 지고 있습니다.
이 문서의 안은 여기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리훙장의 통보에 따르면 협약안에 대해 베이징 중국황제는 조·중간의 종속관계와 중국이 조선에 대해 갖는 특별한 책임관계가 언급되길 원한다는 의사를 표현했다고 합니다.
중국황제의 상기와 같은 소망에 대해 러시아의 견해를 질의하여, 문서의 글귀에 대한 어떠한 수정도 허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접수한 후, 8등 문관 라디젠스키는 리훙장에게 만약 중국정부가 중국정부의 새로운 요구를 양보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두로서 동의하는 선에서 제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대리공사가 리훙장과 가까운 인물로부터 알아낸 바에 따르면, 베이징정부가 조선 문제에 대한 리훙장 자신의 판단을 완전히 승인해주도록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심지어는 만약 조선 문제에 대해 자신에게 완전한 재량권이 위임되지 않는다면 모든 직책에서 사임할 작정이라고 했습니다.
8등 문관 라디젠스키가 텐진을 출발하기 전, 리훙장은 협약의 자구를 절대 바꾸지 않을 것과 현재는 비록 구두상이지만, 그들 간에 존재하는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국 대리공사의 생각에 따르면, 리훙장과의 만남은 조선에 대한 중국인의 시각을 보여주며, 그런 만큼 우리는 조선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솔직하게 표명하고, 극동에서 우리의 점령계획에 대해 베이징정부를 안심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88. РГАВМФ, ф.417, оп.1, д.382, лл.3~8об.
3월 18일 2시 30분경 ‘보브르’호와 함께 제물포 항에 닻을 내렸습니다. 쾌속선 ‘나예즈닉’호는 다음날 오후 5시 경 도착하였습니다.
항구에서는 상시적인 정박선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일본 소형 코르벳 ‘바조(Bajo)’호, 미국 기선 ‘팔로스(Palos)’호, 중국 증기선 ‘하이안(Hai-an)’호.
우리 대리공사가 마중나와서 기다리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고로 저는 서울을 방문하고자 하는 저의 바램을 그에게 전보로 알리고, 길이 엇갈리지 않도록 마중 나오지 말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다음날 오전 7시경 소형구축함의 장교들에게 강을 따라 출발하도록 지시하고, 저는 참모들 및 소형구축함 ‘드미트리 돈스코이’와 포함 ‘보브르’의 함장들과 함께 해안에서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이 강의 지도는 그 제작에 관한 기록과 함께 제가 수로측량 관리본부로 송부할 것입니다.
제물포와 조선의 수도 사이에 비록 최근에 길이 생기기는 했지만 비포장도로이며 저지대 논으로 끊어지곤 해서 걷거나 말을 타야만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나마도 현재 논들이 물로 차있기 때문에 길이 매우 나빠 우리 기마대처럼 항상 무사히 건널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번 여정에서 끔찍한 오두막들로 이루어진 많은 마을들과 마주쳤는데, 겨울에 영하 18도까지, 때로는 더한 추위에서 어떻게 그 곳에서 살 수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인들의 주택은 수도의 대규모 주택 지역 조차도 예외 없이, 창문도 없이 거리에 지어져 있습니다:유리 대신 종이로 된 그들의 창은 마당으로 향해 있습니다. 모든 가족이 잠을 자는 돌로 된 바닥 아래 만들어진 특수한 아궁이를 통해, 하나의 작은 부분에서 집 전체에 난방을 공급합니다.
조선인들은 대부분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체격이 좋으나, 무뚝뚝하여 일본인들처럼 상냥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경우, 우리는 입에 긴 담뱃대를 문 노파들을 제외하곤 그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녁 6시가 조금 지나서 저는 우리 공사관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우리 대리공사의 조언에 따라 저는 함대 참모장을 외국대표들과 국왕의 고문인 미국인 데니에게 공식방문 하도록 보내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후에 저를 방문하였습니다.
공식 직함이 ‘내부협판 및 외교 고문(vice president of the house office and director of foreign affairs)’인 미국인 데니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별개로, 중국의 대리공사를 제외한 다른 대표들로부터 대단한 존경과 호감을 받고 있습니다.
데니는 그가 중국의 이익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직예성(Пе-Чели)의 지방총독 리훙장의 추천에 의해 이 자리에 임명되었으나, 리훙장과 같이 그렇게 명민한 자도 계산착오를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국 대표 및 데니와의 회견 시, 그들은 베베르와 함께 행동하며 조선에서 중국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중국대표는 국왕에 대해 모든 기회를 노려 간계를 꾸미며, 궁궐 바로 앞까지 가마를 타고 오는 등, 여러 번 궁중예법을 어겼다고 합니다. 이 3인의 성공은 그 중에서도 중국인들의 바램에 상충하는, 미국과 유럽으로의 조선사절단 파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전체적으로, 저는 베베르가 국왕의 커다란 영향력과 명령을 이용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리공사를 통해 제출한 국왕폐하를 배알하고 싶다는 제 신청서의 결과, 국왕께서는 제게 날짜를 3월 22일 오후 2시로 지정해 주셨습니다.
지정된 시간에 저는 5등 문관 베베르와 제 참모, 소형구축함 ‘드미트리 돈스코이’, 쾌속선 ‘나예즈닉’, 포함 ‘보브르’의 함장들과 몇 명의 장교들을 동행하여 가마를 타고 궁정에 도착하였습니다.
궐내로는 가마를 타고 들어가지 않는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저희는 입구에서 멈춰 섰는데, 그 곳에서 궁정관리 중 한 명이 저희를 맞아 부대가 배치된 몇 개의 마당을 지나 안내하였습니다. 접견실로 들어가, 조선의 외부와 내부 대신들과 국왕 고문, 다른 고관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궁정관리 중 한 명에 의해 국왕폐하께서 저희를 기다리고 계신 홀로 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 홀은 장식품과 가구가 전혀 없는 매우 큰 방으로, 바닥은 인피(靭皮)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 있었으며 뒤쪽 벽에는 작은 책상이 있었는데, 그 뒤편에 왕이 계셨습니다. 국왕폐하께서는 어깨와 가슴에 조선의 문장이 금색으로 수놓아진, 일본 옷과 흡사한 붉은 비단옷을 입고 계셨으며 그 양 옆에는 큰 칼을 손에 든 무장들이 서 있었습니다.
30분가량 계속된 알현 시간동안 국왕께서는 통역관을 통해 저의 조선방문으로 인해 매우 기쁘시다고 표현하셨고 황제폐하께 러시아 군함 중 한 대가 가능한 한 일년내내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었으면 한다는 부탁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폐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해군대장에게 부탁하건대, 러시아제국 황제폐하께 베베르를 보내주신 데 대해 짐의 감사를 전해주기 바란다. 그는 짐과 조선에 선의를 갖고 있는 자로, 짐은 항상 그의 의견을 경청하노라.”
국왕폐하께 하직인사를 드릴 때, 저희는 태자께 소개되었습니다.
국왕폐하께서는 제게도 저와 동행한 자들에게도 매우 좋은 인상을 주셨습니다. 그의 지혜로운 눈매와 친절해 보이는 외모는 그에게 호감을 갖게 하며, 우리와 미국의 대표들의 말에 따르면, 국왕은 조선의 이익을 유럽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15세의 태자는 창백하고 허약하며 대체로 병약한 청년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졌습니다. 조선의 진보에 반대하는 세력은 그의 건강에 영향을 주어서 그가 업무를 멀리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으로 국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만 9세일 때 결혼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서로 소개 후, 국왕폐하께서는 저희에게 자신의 호의를 보여주시려 만찬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공주들 중 한 명과 국왕 고문, 대신들과 모든 외국대표들이 배석하였습니다. 만찬 중에는 춤을 추는 가수들에 더해 18명의 조선악사들로 이루어진 궁중악단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악기들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피리와 플루트, 그리고 중국식 바이올린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악상에는 가락이 있었고 전체적으로 조선 음악은 일본처럼 귀를 찌르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 행사가 끝난 후 돌아왔을 때, 우리 공사관에는 국왕과 태자께서 보내신 선물들이 실린 들것이 이미 와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저와 저하고 동행했던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국왕께서는 명부를 보내달라고 하셔서 우리가 제물포에 정박해 있는 동안 서울을 방문했던 모든 장교들을 위해서도 선물을 하사하셨습니다. 선물은 특산물인 부드러운 비단과 대나무 통, 인피 돗자리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제게는 다른 것들 외에 두 장의 호랑이 가죽이 하사되었습니다.
그 지역 관습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겨, 저는 자신과 장교들이 그것들(선물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드리며, 저의 처리를 황제폐하의 재량에 경의를 표하오며 맡기는 바입니다.
제가 서울에 머무르는 4일 동안 우리 대리공사의 협소한 숙소에도 불구하고, 저와 장교들은 5등 문관 베베르와 그의 가족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공사관에 매입된 지역은 서울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중요한 광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숙소는 몇 채의 작은 조선가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집들은 대부분 단순한 핀으로도 꿰뚫려 쉽게 구멍이 나는 종이 벽을 갖고 있는데 가구만이 이 집이 유럽인 소유라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겨울에는 영하 15도에서 2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에, 다른 계절에는 계속 습한 데다 의사도 전혀 없는 곳에서 그러한 오두막에서 사는 것은 유럽인 가족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국왕폐하를 알현한 다음날, 3월 23일 아침 7시경 저는 구축함을 방문하도록 초대한 베베르 및 그의 가족을 동행하여 제물포로 떠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그 수로를 아무도 지키지 않는 강을 따라 증기선에 연결한 돛이 달린 일본 연안무역선을 타고 왔습니다. 일본 상선은 그들이 평저선으로 우리의 증기선보다 흘수선이 낮기 때문에, 예방차원에서 빙용되었습니다. 서울을 떠나고 한 시간 후 증기선은 얕은 여울에 닿아, 만조 시까지 그곳에 정선해 두었습니다. 일본상선은 돛을 달고 항해를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그 후 제물포로부터 4시간 거리에서 저희는 약속한 대로 두 번째 증기선을 만나서 그것에 견인되어 저녁 9시 반경 구축함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 날, 3월 24일 오후 2시경 우리 대리공사가 구축함을 떠날 때 규정에 따라 예포를 발사한 뒤 닻을 거두어, 25일 1시 40분경 지푸(Чифу)항에 닻을 내렸습니다.
원본과 동일:
해군 최고 사령부 사령관, 해군소장 티르토프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90. РГАВМФ, ф.417, оп.1, д.538, лл.151∼161
1891년 2월 5일
주:2월 1일과 5월 1일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의 명령에 의거하여, 수로 안내인을 승선시키고 4개의 증기기관을 작동하여 탐사 목적으로 상하이를 향해 출항했습니다. 오후 2시 45분 민(Мин) 강의 내부 사주(砂州)를 통과하면서 수로 안내인을 하선시킨 후, 네베-초스크(Неве-чоск)와 화이트 도그즈(White Dogs) 암초 사이를 지나 바다로 향했습니다.
오후 7시 30분 앨리게이터(Alligator) 암초의 옆을 지나서, 주(主) 나침반의 035번 방향으로 항로를 잡았습니다. 동해로 출항하면서 4-5바르 정도의 속도로 불어오는 몬순풍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항로가 해안으로부터 30마일의 거리를 두고 연안을 따라서 형성되었습니다.
2월 3일 오전 6시 30분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하이샨(Hieshan) 섬을 목격하고 그 뒤를 이어 추산(Chusan) 다도해의 다른 섬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새들(Saddle) 군도를 북쪽으로부터 우회한 후 오후 11시 30분에 얀트시-키안(Янтси-киань) 강의 내부 사주 근처에서 정박한 상태로 수로 안내인을 기다렸습니다.
2월 4일 오전 7시 출항했습니다. 수로 안내인의 인솔 하에 부중(Вузунгь) 강으로 입항하여 오후 5시 30분 상하이에서 두 개의 앵커를 내려서 계류했습니다. 이곳에서 영국의 포함 ‘지네트(Jinnet)’ 호, 중국의 순양함 ‘키옹씽(Kiong thing)’ 호, ‘화우-타이(Whau-tai)’ 호 그리고 ‘카이-치(Kai-chi)’ 호 등과 만났습니다.
증기기관을 작동시켜 푸조우(福州)에서 상하이까지의 495.75마일 거리를 평균 시속 7노트로 70시간 30분 동안 운항했습니다.
여기에 푸조우로부터 상하이까지의 항해지도를 같이 제출합니다.
대령
지도:원문서 153쪽에 있음
1891년 2월 1일-4일 쾌속범선 지기트호의 푸조우에서 상하이까지의 항해
1등급 순양함 ‘아드미랄 코르닐로프(Адмирал Корнилов)’ 호의 함장
1896년 1월 제물포, №95.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00.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1, лл.4~27
태평양 연합함대 사령관 각하
1895년 12월 4일
№1002
탐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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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는 서쪽에서부터 군도(群島)로 전부 둘러싸여 있으며 많은 해협과 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 중 한 곳에서 저는 정박 중인 ‘크레이세르’ 호를 만났는데, 그 곳은 지도에 거제도의 본토로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예정된 측도와 측량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 상술한 계획을 부득이 보다 일찍 다소 변경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북쪽 지역이라도 확실히 마무리하기 위해 협로에서 북쪽 지역으로 측도와 측량을 집중적으로 실행했습니다. 만일 금후 각하의 허락이 있으시다면, 측도를 남쪽까지 범위를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고려하여 ‘자비야카’ 호에게 ‘크레이세르’ 호의 작업에 합류하도록 지시하고 동시에, 저 자신은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호가 그에게 맡겨진 측도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서 12월 2일까지 계속 체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신포 항은 본토와 본래 정박항이었던 마양도 사이의 해협으로, 언급된 해협과 섬으로 세 개의 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 중 코르닐로프 만은 길이가 1.5마일, 나히모프는 3/4마일, 그리고 이스토민은 길이 1/2 마일입니다. 네 번째인 부타코프 만은 섬 서편에 있는 항구 내부에 위치해 있고, 깊이가 얕으므로 포함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 외에도 신포 마을 부근에 깊숙이 들어가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깊이가 고르기 때문에 북풍이 불 때 좋은 정박지를 제공해 주는 만이 본토로 움푹 들어가 있습니다.
항구 동쪽에서는 곶들 -페렐레쉬나와 베리흐- 사이에 본토로 3½마일 들어가 있어서 북풍이 불 때 매우 좋은 정박지를 제공해주는 훌륭한 만이 위치해 있습니다. 해군 최고 사령부 간행물에 게재된 마양도 관련 기록에는 이 만에 대해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겨울에 우세한 북풍은 해안의 모양에 따라 이미 북풍으로 방향이 바뀌어서 정박장에 도달하여 바로 마양도에서 이 물결의 영향력 밖에 있는 만들의 정박장에서도 매우 매섭게 치는 물결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한 결론은 제가 신포 항에 도착한 날 확인되었습니다. 바다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 때, 바람은 해협 쪽으로 가까워지면서 정박장에 물결을 치게 한 후 해안의 모양에 따라 북쪽을 향해 끝나곤 했습니다.
해협과 만의 면적은 그 해안의 수심이 남다르며 면적을 추르킨 곶과 에게르텔드 곶을 연결시키는 선까지 포함시킨다면, 329카벨토프(1카벨토프=219.5미터), 즉 졸로토이 록(Золотой Рог)보다 6배 넓은 면적이 됩니다. 그리하여 첨부된 도안(첨부 3)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신포 항에는 흘수 28피트까지의 함선을 아주 많이 수용할 수 있습니다.
산지가 많은 마양도의 최고위 지점은 510피트에 달하며 모든 면이 극히 차단된 지형으로 나타나고 해안가에서 고지는 상륙정의 상륙에 적잖이 난관이 될 만큼 가파르게 내려갑니다. 섬 서부는 동부보다 더 높아서 이스토민 만과 나히모프 만은 코르닐로프 만보다 적의 포격으로부터 방어하기가 더 수월합니다. 그 외에도 코르닐로프 만에는 도안 A와 B에 나타난 두 곳의 저지가 있어, 이곳을 통해 바다로부터의 지원사격조차도 명중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섬의 차단된 지형으로 인해 상점과 다른 건축물들을 세울 평지는 매우 적습니다. 본토 측에서는 높은 산들이 곁에 매우 작은 골짜기들만 남기고 거의 해안까지 뻗어 있습니다. 항구의 결빙에 관해서 지역의 조선인들은 통역을 통한 질문에 정박장에는(해협의) 얼음이 얼지 않으며 겨울 내내 항구는 열려 있다고 하나같이 단언했습니다. 눈은 가장 추운 달에만(12월과 1월) 내리지만 오랫동안 남아있습니다. 전체적인 기후는 확실히 블라디보스톡보다 온화한데, 예를 들자면 11월 7일 두 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온이 나타났습니다:
블라디보스톡 | 신 포 항 | |||
9일 아침 | NN | -3 | NN | +4 |
정오 | Д | -2 1/2 | N | +3 |
오후 3시 | N/2 | +2 | N | +5 |
무풍상태 | -1 1/2 | Д | +4 | |
자정 | Д | -3 1/2 | Д | +2 |
항구의 해안선 길이는 옐킨(Елкин) 곶에서 베리흐(Верих) 곶까지를 11¼마일로, 항구의 자연적인 해안선 경계를 이루는 본토의 산맥 길이는 16마일로 계산해야 합니다. 마양도의 해안선 길이는 3¾마일입니다. 섬과 마찬가지로 본토의 골짜기들도 벼와 수수가 잘 경작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마을 신포(Шинпо)는 본토에 위치해 있으며 300채의 농가를 갖고 있고 다음으로 각각의 만에는 100에서 200채의 농가로 된 마을이 위치해 있습니다. 가을에는 신포 항에 일본인 어부들이 와서 자신을 고용한 신포의 조선인 가정에 머무릅니다. 때로는 일본 상인들도 항구를 방문해, ‘자비야카’ 호 함장의 보고서(첨부 1)에 나타나 있듯 자신의 상품들을 갖고 국내로 들어갑니다.
원산의 해안에 대해서는 나히모프 반도(Нахимов, 지금의 호도반도를 의미함-역자 주)로 이루어진 동부해안은 산이 많기는 하나, 본토와 몇 개의 구릉들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 뒤에는 충분히 깊이 파인 단 하나의 만도 없으며, 모든 해안이 해수면으로부터 엄청난 높이로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본토 서부 해안에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두 개의 만이 있는데, 첫 번째는 코니칼(Коникал) 곶에서 북쪽에 있으며 넓기는 하나 바다로부터 호도 반도가 충분히 방어해 주고 있지 못합니다. 원산 북서부에 있는 두 번째는 그 깊이가 고르지 않고 얕으며, 금야강(Дунган)이 하상으로부터 진흙을 끌어와 넓은 여울을 형성하여 필시 지속적으로 만을 메우게 될 것입니다.
원산 항이라고 불리는 브로우톤(Броутон) 해협의 남쪽 연안은 거주와 교역을 목적으로 이 지역을 선택했던 일본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의 금년 8월 7일자 제470호 보고서에서 원산 방문으로 이 항구에 일본정부 소유의 약 500톤을 저장할 수 있는 석탄창고가 있다는 점을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부산과 비교해 보았을 때, 원산은 부대를 위한 신선한 식료품 구입에 있어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육류의 질과 가격은 더 좋고 저렴하며, 빵 또한 대량(1일당 300파운드까지) 마련할 수 있습니다.
지리적 측면에 관한 라자레프의 탐사는 저의 8월 7일자 제470호 보고서에서 보고 드렸듯이 결코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기상관측은 원산의 지방 세관에 의해 실시되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충분하지 않아, 예를 들어 결빙시기에 대한 관측은 얼음의 두께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톡과의 인접성을 고려하면 전략적 상업적 관계에서 그만큼 중요한 이 만은, 라자레프가 위치한 브로우톤 만처럼 측도와 측량을 보충하여 자세한 지역도(圖)를 작성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같은 정도로, 비록 2년 동안이라 할지라도 기상관측을 시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1854년 소형구축함 ‘팔라다’ 호의 단편적인 지리적 작업이 완성될 것이며,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올해 8월부터 원산에서의 기상관측 관리는 기선회사 셰벨료프 사(社)의 대리인인 그레이가 담당하게 되었으며 전함 ‘만주’ 호의 함장은 각하의 허락에 따라 그에게 기압계, 온도계, 그리고 관측내용을 기록할 노트를 제공했습니다. 그레이는 결빙기 얼음의 두께 관측 또한 실시하고 있습니다. 세관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만에서 결빙은 엄동(嚴冬)에만 일어나며 항해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얇다고 합니다. 일본유선회사(日本遊船會社/Nippon Yusen Kaisha)의 기선들은 일 년 내내 운항을 중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됩니다.
입수된 원산의 몇몇 기온자료에 따르면, 가장 극심한 추위는 2월에 나타나 기온이 때로는 영하 9도까지 내려가지만, 같은 달 같은 시기에 최고 기온은 영상 10도 이기도 합니다. 원산에서 이미 몇 년간 거주하였으며 신뢰할 만한 이의 보고를 심사숙고하건대, 원산의 기후는 블라디보스톡보다 더 고르고 온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안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며, 바다에서는 보다 자주 볼 수 있으나 해안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작년 원산에서는 안개 낀 날이 3일 이하로, 이틀은 4월에, 하루는 8월에 관측되었습니다. 정해진 우기(雨期)는 없지만 최대 강수량은 7월에 내립니다.
부산항은 데예르(Деер) 섬과 본토로부터 2마일 길이로 바다로 뻗어있는 이름 없는 반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데예르(Деер) 섬은 항구의 수역을 세 부분으로-동쪽과 서쪽의 바깥쪽, 그리고 안쪽 정박장-나눕니다. 동쪽 정박장은 5½에서 9사젠의 고른 깊이를 갖고 있으며 지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입구 쪽에만 드러나 있는 일본 들보가 3½사젠 깊이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함(旗艦)의 탐사에 따르면, 이것은 들보가 아니라 끝이 날카로운 돌로 드러났습니다. 조선인 어부들이 남쪽에 다량의 그물을 펼쳐놓기 때문에 이 정박장에서 함선들은 조합선에서 북쪽에 닻을 내리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서쪽 정박장 또한 모든 등급의 함선에게 편리한 정박지이지만, 부산에서 나가사키로 가는 수중 전신 케이블이 가운데로 지나고 있어서 그 케이블 가까이에서는 닻을 내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안쪽 정박장은 흘수 28피트의 함선을 4대까지 수용할 수 있지만, 거의 한 가운데 무엇으로도 둘러싸이지 않은 암초가 3¾사젠 깊이로 위치하고 있어서 그러한 함선들이 지나갈 때에는 보트를 이 암초로 보내야만 합니다.
안쪽 정박장으로의 다른 입구는 본토와 데예르(Деер) 섬의 북단(北端) 사이에 있으나, 지도에 따르면 흘수 10~11피트 이하의 함선들만이 통과할 수 있습니다.
정박장들은 동쪽과 남쪽에 열려있는데 북서풍과 북풍이 우세한 겨울철에 함선들이 정박하기에 매우 좋습니다. 제가 부산에 도착했을 당시 바다의 북쪽으로부터 폭풍이 강하게 불어, 함장의 명령에 따라 나가사키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던 기선 ‘바이칼’ 호는 도중에 부산에 들러야만 했습니다. 같은 시기 정박장을 형성하고 있는 반도가 산이 많은 지형으로 바람으로부터 좋은 방어막이 되어주기 때문에 기함(旗艦)은 동쪽 정박장에 닻을 내렸고, 돌풍을 동반한 3바르의 강한 바람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정박장까지 파도는 와 닿았습니다. 안쪽 정박장에 닻을 내렸던 ‘자비야카’ 호 함장의 보고에 따르면, 그 때 돌풍을 동반한 강한 바람이 불었고 그와 비슷한 정도로 파도가 정박장까지 쳤다고 합니다.
부산은 가장 오래된 일본인들의 거류지로 그들은 1443년에 이곳에 이주하였습니다. 일본인 부락 외에도 유럽인과 중국인 부락도 있지만 모든 교역은 일본인 손아귀에 있습니다. 일본인 거주민 수는 5,000명에 달하나 겨울철에는 이곳으로 15,000에 달하는 일본인 어부들이 와서 일부는 부산에, 일부는 해안 가까이에서 지냅니다. 각각의 일본 어선은 조선정부의 수익으로 1년에 3~10달러의 세금을 납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럽인 거주민은 총 14인으로, 그 중 5인은 세관에서 근무하고 8인은 공사이며 한 명은 ‘셰벨료프’ 사의 대리인직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인입니다. 전쟁 전에는(작년의) 중국인이 138명이었으나 현재는 몇 명에 불과합니다.
조선의 다른 개항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산에도 영국인 관리 하에 텐진에 있는 총책임자에게 종속된, 중국세관의 조직을 갖춘 세관이 있습니다. 그러한 체계는 전쟁 이후 세관 수입이 직접적으로 조선정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대로 존속되었습니다.
세관 보고서에 의하면 부산의 교역은 다음의 숫자들로 산정됩니다:수입 1,277,719달러, 수출 2,618,785달러. 주요 수입품목은 공산품, 장작, 목재, 성냥, 케로신, 견직물, 설탕 등입니다. 두류, 다음으로 쌀, 가축, 모피, 면화, 그리고 고래 기름 등이 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22척의 일본 함선이 조선 남해안에서 포경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매년 15마리에 달하는 고래를 포획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는 군대를 위한 신선한 식료품을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고기는 질이 나쁜데다 비싸고, 빵은 도시의 유일한 제빵소에서 하루에 총 250푼트만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데예르(Деер) 섬에 석탄창고를 건설하여, 그곳에 1,000톤에 달하는 석탄을 저장하고 있으며 개인 저장량은 없습니다. 부산과 다른 항구들 간의 기선 연락업무는 한 일본 회사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월 2회 정도 부산항에 들르는 셰벨료프사의 기선들을 제외하고는 부산에서 주 2회 일본 기선이 고베로 출발하고, 주 1회씩 나가사키와 제물포로 가며, 이렇게 기선들이 오가며 항구로 승객과 화물들이 도달합니다.
1890년 조선 기선회사가 설립되어 지금까지 조선 깃발 아래 존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 이후 일본인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회사의 기선들은 조선항구들을 따라 근해 항행 노선으로 운항하는데 원산, 부산, 마산포, 제물포를 들르고 기선들 중 흘수 5피트의 기선 한대는 부산에서 바다로 남서쪽으로 19마일 흘러가는 낙동강을 따라 왕래하고 강을 따라 위로 50마일 거리에 위치한 소도시 밀양으로 올라갑니다. 상품의 육로 이동시에 조선 관리들이 징수하는 무거운 환전세로 인해, 대부분이 위의 강을 따라 이동하므로, 그 강은 커다란 상업적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봄철에는 부산항으로 보통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고 더위는 5월부터 시작됩니다. 우기(雨期)는 6월 초부터 8월말까지 계속됩니다. 이때부터 화창하고 건조한 날씨가 시작됩니다. 1894년 첫 번째 서리는 12월 3일에 관측되었으며 부산의 최저기온은 영하 7.2도로 나타났고 때때로 적은 양의 눈이 내렸으나, 시간이 갈 수로 녹기도 하였으며 만의 해안가에 매우 얇은 얼음이 형성되었습니다. 안개는 원산에서처럼 매우 드물게 나타나며 대부분 해안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바다를 지나갑니다. 부산은 나가사키와 쓰시마 섬과 세즈롬(Сезлом)을 통과하는 전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전신은 우편과 마찬가지로 일본인 수중에 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500베르스타로 이 거리는 조선 파발꾼이 8일만에 갈 수 있습니다. 도로는 통과하기가 매우 어렵고 열악한데, 이것은 10월 말 여기서 서울로 출발한 최고사령부의 소코프닌 대위 탐사대가 밝혀내야 합니다.
거제도에 대한 개인적 탐사와 세 척의 함선에 의한 지금까지의 측도와 조사 작업에 기반하여 위의 섬은 서쪽과 남쪽에서 군도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로인해 본토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결론 내려야 합니다. 거제도를 서쪽에서 휘감고 있는 커다란 진해만은 거제도와 본토 사이의 주요 분수령 역할을 하며 동시에 대륙과 총 8마일 거리에 있는 거제도를 대륙에 종속시키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섬 서쪽에 있는 많은 수의 만들과 인접한 많은 섬들은 전략적인 면에서 거제도의 가치를 축소시키고, 그로 인해 거제도 만(Gulf)이라 불리며, 작년 ‘자비야카’ 호에 의해 탐사가 이루어진 섬 남쪽에 있는 넓은 만의 의미는 감소됩니다. 모든 동쪽 해안들 중에서 중앙 항만(Centre Harbour)이 폐쇄된 만을 제공하며, 상황에 따라 거제도의 나머지 만들과 정박장들에 비해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중앙 항만의 규모는 대규모 분함대 정박과 해양기지를 건설하기에는 너무 작습니다. 거기다 겨울철에 우세한, 폭풍을 동반하여 자주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이 만은 충분히 보호되지 않습니다.
저는 각하의 금년 10월 11일자 제11603호 명령에 따라 세밀한 보고서를, 측도와 측량 작업이 끝난 후 더 상세하고 확실한 정보들을 보충하여 거제도에 대한 더 신뢰할 수 있는 결론을 낼 수 있을 때 제출할 것입니다.
거제도의 조사와 관련하여 저는 그 깊은 곳에 조선 남부의 대규모 상업항들 중 하나인 마산포가 위치하고 있는 써 해리 파크스 사운드(Sir Harry Parkes Sound) 만(지도 제 1065호)을 방문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위의 항구는 거제도로부터 12마일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길이 8.5, 최대 폭 3마일에 5~7사젠의 고른 깊이를 갖고 있는 써 해리 파크스(Sir Harry Parkes) 만은 거제도의 정박장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닫혀있는 훌륭한 정박장들과 만을 제공합니다.
도시는 5,000명의 거주민을 갖고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경작된 넓은 분지 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해안의 도시 구역은 복잡한 암석 해안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물이 적을 때에도 커다란 정크선들이 기항할 수 있을 정도로 밖으로 나와 있는 세 개의 부두를 갖고 있습니다. 부두 근처에는 두 개의 저수지가 있으나 물이 적을 때에는 바싹 말라 있습니다.
마산포가 대외교역을 위해 개방될 때에는 부산보다 더 큰 중요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정박장은 더 넓고 방어가 더 잘되는 데다 서울과 낙동강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교역의 측면에서 부산에 비해 마산포가 더 우월합니다. 마산포로 연안 항해선들이 항해할 때 조선의 남쪽과 서쪽에서 암초절벽을 지날 수 있으나, 부산에서는 하구로 항해할 수밖에 없어 지역의 함선들이 겨울철에 곤란을 겪습니다.
5베르스타 거리에 조선 남부에서 서울로 가는 좋은 도로가 있기 때문에 마산포는 상업적 중요성 외에 다른 것도 갖고 있습니다. 이 도로는, 조선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거의 전 구간에 걸쳐 분지로 이어져 있고 단 두 곳에서만 낮은 산들과 산맥들을 지나야 한다고 합니다. 일본인 부대가 서울로의 보병 임무를 위해 이 도로를 이용했습니다. 그 외에도 남아있는 흔적들을 볼 때, 일본인들은 필시 마산포에 거점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그 부근에서 페스카도르 군도에서의 중국 함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자 조선과 만주로의 장거리 부대 파견은 이미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서울 도로를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시간 단축은 어느 정도 가능케 하였으나, 그것은 진해만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던 짐짝에나 적당한 것입니다. 날씨는 급격한 일교차를 보여서 오늘 낮에는 기온이 영상 2도로 떨어졌으나 밤에는 영하 3도까지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측량과 측도 작업은 거의 쉬지도 않고 실시되었고 장교들과 부대는 매우 열의를 갖고 작업하였음을 각하께 보고드릴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쓰시마 섬 동부 해안의 이치하라 만(Itsuhara Bay)은 군사적 측면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 외에도 자신의 규모만큼 바다로부터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대규모 함선들의 정박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만에는 요새가 없으며 도시 내에만 보병 대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상기 만을 통과해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전신 케이블이 지나가는데, 이에 대해서는 케이블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지점이 첨부된 도안 A에 나타나 있습니다. 식료품에 관해서는 충분한 양의 육류와 생선을 구할 수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을 떠나기에 앞서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호, ‘크레이세르’ 호, ‘자비야카’ 호를 위해 각하의 허락을 얻어 연해주 주정부의 중개로 조선어 통역관들을 채용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러시아인에, 러시아정교의 시혜를 입은 자들로 순양함에 임명된 자에게는 지폐로 30루블, 나머지에게는 25루블 또는 상응하는 달러로 함선의 현재 지점에 따라 지급하였습니다. 이러한 통역관들은 현재의 항해까지 지역민들과의 교류, 정보수집, 식량 구입에 매우 유용하였습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03. РГАВМФ, ф.574, оп.1, д.2, лл.170~170об.
11월 9일 아침 7시. 일요일
5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함대 전체가 아드미랄 치하체프(Адмирал Чихачев) 항을 출발하여 조선해안을 따라 거제도에 있는 아드미랄 알렉세예프(Адмирал Алексеев) 항으로 갔습니다.
오후 4시 25분 아드미랄 알렉세예프 항에 닻을 내렸습니다. 도중에 ‘시부츠’ 호가 우리를 따라와 함대로 합류했습니다. ‘시부츠’ 호는 부산에서 출발했고 함대가 쓸 경비를 가지고 왔습니다. 치하체프부터 알렉세예프 항 까지 이동하는데 9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70마일(122.5베르스타)을 항해했습니다. 알렉세예프 항을 둘러싼 지역은 매우 아름다웠고 만 전체를 들판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통영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조선인 마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모두 조선인이고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경작지에는 쌀과 보리, 그리고 옷을 만드는 목화만을 파종했고 무도 기르고 있습니다. 쌀은 연 1회 파종하고 보리는 연 2회 파종합니다. 가장 추운 달은 12월, 1월, 2월이며 65세 된 조선 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통역을 통해) 눈은 전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인은 태어나서 한 번도 눈을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얼음은 얼지만 매우 얇고 해안선 주변만 얼곤 합니다. 거제도에는 조선도시인 거제가 있고 군수(감사또/Kамсато)가 살며 책임조수(참부/цамбу)가 있어 마을들을 통솔하고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기타 질서를 관할합니다. 가축과 가금류는 비싸지 않은 가격에 살 수 있습니다. 황소는 16,000케시, 닭은 100케시, 달걀 100개에 400케시입니다. 동전을 케시라고 부르는데 500케시가 1달러(또는 1루블)입니다.
저녁 10시에 조선 군수(감사또)가 우리 순양함에 왔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행군을 준비했습니다.
▷▶ 한반도
통영기상대에 따르면, 거제지역에서 내린 눈으로 적설량이 많은 순서로 보면, 2001년 1월 13일 19.6㎝, 1996년 2월 17일 10.1㎝, 1982년 2월 4일 9.9㎝, 1994년 2월 11일 9.8㎝, 그리고 2006년 2월 6일 6.1㎝ 등이다.(인용 갤러리 번)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30.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375∼392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의 보고서 제342호의 부록
거제도는 조선반도 남동쪽 북위 34도 52분, 경도 128도 40분에 위치한 섬으로 블라디보스톡과 일본, 청국의 주요 항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항구 이름 | 거 리 | 항구 이름 | 거 리 |
블라디보스톡 | 540 마일 | 뤼순 | 570 마일 |
쓰시마섬 | 40 마일 | 제물포 | 420 마일 |
시모노세키 | 120 마일 | 부산 | 23 마일 |
나가사키 | 148 마일 | 울릉도 | 154 마일 |
대만 | 715 마일 | 원산항 | 340 마일 |
상하이 | 420 마일 | 홍콩 | 1130 마일 |
산둥 반도 | 480 마일 |
거제도의 동부 해안은 일본해로 둘러 싸여져 있으며 한반도 전체 지역 가운데 가장 동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여기에서부터 평양의 대동강까지 모두 남동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거제도의 서쪽 끝은 조선의 미래에 큰 의미를 갖는 더글러스 협만(Douglas Inlet)과 경계를 접하고 있습니다. 더글러스 협만에는 상당히 큰 상업적 기능을 가진 마산포가 위치해 있고, 낙동강이 이 만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조선의 주요 상업망인 더글러스 협만은 무수한 섬과 만으로 이루어진 많은 정박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제도(갈고도)의 서쪽에서부터 두 개의 큰 강구(江區) – 새드웰 만(Shad well Gulf)과 실비아 내만(Sylbia Basin)이 조선 반도로부터 분리되는데, 이 두 강구는 내로우 항로(Narrow Passage) 해협에서 합쳐집니다.
최초의 거제도 측량은 유명한 영국 수로학자 브로우튼(Broughton)이 1845년에 실시했습니다. 이후 영국 선박인 소함정 ‘실비아(Sylbia)’호, 순양함 ‘사파이어(Sapphire)’호가 브로우튼의 작업을 1887년까지 보강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들은 우연한 성격을 갖는 것이었으며 거제도에는 큰 가치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위의 측량에 의해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온 지역은 더글러스 협만의 동부해안 뿐입니다. 거제도의 서쪽 해안과 그 인접지역은 지도에서 완전히 부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때문에 지역의 실제적인 성격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1894년 12월에 거제도로 순양함 ‘자비야카’를 파견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순양함 ‘자비야카’는 갈고도 만(Gargodo Gulf)과 쿠엔카(Куэнька) 만의 표면측량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거제도의 두 번째 측량을 실시한 나라는 일본입니다. 일본은 수로연구에 적합한 특별 선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들은 거제도 자체뿐만 아니라 거제도에 인접한 모든 섬과 육지를 측량했습니다. 일본 해군성은 이를 통해 제작한 훌륭한 지도를 비밀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1895년 11월과 12월에 저의 지휘 하에 있는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와 ‘자비야카’, ‘크레이세르’에 의해 실비아 내만과 내로우 항로의 측량이 이루어졌습니다. 거제도 남쪽에 위치한 수많은 섬들로 인해 작업이 매우 복잡해졌고 일부만 측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제도는 자오선에 따라 길이 20마일, 최대 12 1/2마일의 폭을 가진 섬입니다. 가장 높은 산의 위치는 1,840피트이며, 섬의 동부해안은 서부보다 높습니다. 해안은 대부분 수심이 깊습니다.
거제도의 동부해안은 바다로부터 완전히 열려 있고 그 해안을 따라 많지 않은 섬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동부해안에 다소 폐쇄된 정박지를 가진 만은 중앙 항구(Centre Harbour) 입니다. 다른 만들은 바다로부터 열려 있지만 해상관계에서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거제도 남부지역은 그 성격이 완전히 바뀝니다. 서부해안에는 다양한 가치를 가진 많은 섬들이 위치해 있으며 이 섬들은 많은 해협을 형성합니다. 남부해안에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두 개의 작은 만을 가진 갈고도 만이 위치해 있습니다. 1894년 12월에 갈고도 만과 그에 인접한 작은 만을 순양함 ‘자비야카’가 탐사했습니다. 거제도 서부지역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도상에서 매우 부정확합니다. 갈고도 만으로부터 섀드웰 만 하구(河區)로 뱃길이 있는데, 이 외에도 갈고도 만은 바다로 나가는 고유의 출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만의 동부해안이 거제도를 구성하고 있고, 서부해안에는 육지가 있는데 지도에는 섬으로 잘못 나타나 있습니다. 좋은 정박지가 있는 새드웰 만의 남부지역에는 11개의 다양한 크기의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가 위치합니다.
실비아 내만과 연결되어 있고 육지로부터 거제도를 분리시키는 내로우 항로 해협은 폭이 최소 1 1/2카벨토프, 깊이는 최소 13피트 입니다. 따라서 이 해협은 배수량이 적은 배들만 접근이 용이합니다. 배의 크기는 7피트로 정해져 있습니다. 해협의 동부해안에는 고대 요새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이 요새는 당시에 내로우 항로 해협이 절벽에서 조선 반도로 나가는 출구로서의 전략적 의미를 가진 곳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실비아 내만은 넓은 수역을 갖고 있습니다. 그 남부지역에서 거제도까지 8개의 많은 섬들이 늘어져 있습니다.
지도상에 육지의 연속으로 보이는 거제도의 북서지역은 실제로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해협은 여기에 위치한 모든 만, 섬과 함께 아름다운 항구를 이룹니다. 이 항구는 순양함 ‘크레이세르’가 묘사한 것인데, 러시아 해양대신 ‘니콜라이 마트베예비치 치하체프’의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육지해안 실비아 내만은 북부지역에 커다란 만이 있으며, 이 만에 대한 연구는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시행했습니다. 이 만에는 10개의 섬이 있는데 지도상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남쪽으로 향하는 곳에 ‘자비야카’ 만이 있으며 육지에서 5마일 들어가 있습니다.
이상의 서술을 요약하면, 거제도는 동쪽으로 일본해와 경계해 있고 북쪽으로는 더글러스 협만, 서쪽과 남쪽으로부터 거제도에 이르는 곳에는 많은 섬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거제도는 1 1/2카벨토프 만큼의 해협에 의해 육지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거제도는 커다란 조선 반도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육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군도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 섬으로서의 가치와 이점을 상실했습니다.
거제도의 주민은 인구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추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 섬의 지사와 촌장은 인두세를 징수하는 각 마을의 양반 인원을 알고 있습니다. 마을과 양반의 수를 대비하여 대략 추정한 섬의 인구수는 2만 명을 넘지 않습니다. 해마다 동절기에는 많은 일본어부들이 이 섬에 옵니다. 일본어부들은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만에 있는 자신의 거룻배에서 생활하며, ‘미노노속(Миноносок)’ 만 근처에는 4채의 집에 임시로 거주하는 적은 수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잡은 물고기의 대부분을 쓰시마로 보내면 그곳에서 다시 일본 본토로 보냅니다. 조선인 마을은 대부분 해안선을 따라 섬 내륙에 위치해 있으며 2~4개를 넘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농사와 어업에 종사합니다. 반면 중앙 항구에서는 바다에서 소금을 채취합니다. 재배작물은 쌀, 보리, 면화, 무인데, 면화와 무는 밖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들의 수요에만 충당합니다. 목축은 하지 않지만 각 마을에 뿔이 있는 가축이 몇 마리씩 있습니다. 추측하면 신선한 고기가 필요한 경우에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마을에서는 수탉과 계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채소는 없는데, 그 이유는 주민들이 소량의 무만 재배하기 때문입니다. 구매를 위해서는 주민들이 사용하는 조선 돈을 소유해야 합니다. 달러는 섬의 북부에서만 마지못해 유통되고 내로우 항로에서 남부까지는 전혀 사용되지 않습니다.
섬의 식물은 매우 희귀하여 마을 근처에서나 아주 가끔 수목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산은 빽빽한 수풀과 관목으로 덮여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이 지역에서 수목이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는 모든 섬이 빽빽한 삼림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이 관목을 장작용으로 다 베어가서 현재는 수목이 드뭅니다. 섬에는 강이 없습니다. 염분이 없는 물[淡水]은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물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물의 수송을 위해서는 관의 설치가 필요합니다.
거제도는 거제도 만의 북서지역에 사는 지사가 다스립니다. 섬에는 도로가 없습니다. 모든 곳에 짐 나르기에 편리한 오솔길이 존재합니다.
거제도와 주변에 위치한 섬들, 육지에 닿아있는 해안은 주의 깊게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북동해안에 있는 중앙 항구(영국 순양함 사파이어 호가 기술한)는 육지로 1 1/2마일 들어가 있습니다. 또한 폭 4카벨토프의 출구가 있어 바다로부터 차단되지 않았습니다. 수량이 풍부하지도 않고 요새의 성격도 없는 만입니다. 커다란 배가 다니기에는 수역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깊이 28피트인 선박 4개 이상은 지날 수 없습니다. 만의 해안은 고지대와 저지대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설비를 갖추는데 편리하며, 바다와 육지의 방어요새를 설치하기에도 좋은 지형입니다. 만의 동부해안은 출구인 남쪽 곶으로부터 브로우톤 곶까지 좁아지며, 바다로부터 바깥쪽에 만이 형성되어 상륙하기에 매우 편리합니다. 만의 서쪽부터는 비교적 좁은 육지지대에 의해 실비아 내만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이 때문에 중앙 항구의 전략적 장점이 많이 감소됩니다. 출구로부터 남쪽으로 크지 않은 브로우톤 섬이 위치해 있습니다.
만의 지역 주민 규모가 큽니다.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풍요롭게 살며 가축과 가금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어업을 목적으로 이 만에 내항하는 것은 일본사람들 뿐 입니다. 군함이 가끔 들어오지만 어느 민족의 것인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제도 만은 섬의 남부해안에서 육지로 4마일 들어가 있습니다. 폭은 최대 2 1/4마일 입니다. 거제도 만과 많은 섬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 덕분에 이곳은 바람과 파도를 훌륭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섬 사이에 있는 두 개의 좁은 해협이 이 만으로 들어오는데, 이들 중 1/2마일의 가장 좁은 폭을 가진 동쪽의 것만 조사되었습니다. 이 해협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주변 지역의 섬들을 점령해야 합니다. 또한 방어를 위한 시설은 해협으로부터 7마일 떨어진 섬들의 가장 끝쪽에 설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접한 섬들 가운데 적당한 기지도 건설되어야 합니다.
해협에는 28피트까지 잠기는 배들이 접근할 수 있고, 폭 1 1/2카벨토프 공간의 깊이를 갖는 20척의 배들이 정박할 수 있습니다. 해협의 북쪽 지역에는 두 개의 만이 존재합니다.
이 해협에서 1등급 배까지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북쪽 해안이 가장 적합합니다. 북쪽 해안에 대해서 이미 1894년 순양함 ‘자비야카’호가 조사하여 보고했습니다. 해협의 연안은 고지대이지만 건물을 건축하기에는 유용한 지형입니다. 해협에는 이름이 없는 세 개의 섬이 존재합니다. 두 개의 작은 섬은 각각 4카벨토프와 1카벨토프 이고, 나머지 하나의 섬은 길이가 1 1/4 마일입니다. 강가부근에 위치하고 높은 산으로 구성된 세 개의 섬은 방어벽을 구축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해협 연안에는 8개의 마을이 있고 그 중 가장 큰 마을인 개조(Кеджо)에는 200여 세대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마을에 수령이 살고 있습니다. 개조의 거주민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전의 요새 흔적이 높은 구릉에 남아 있는 개조 마을 위쪽에 위치한 갈고도 만은 군사적인 의미를 갖는 장소로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요새의 벽은 돌로 쌓아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갈고도 만의 남쪽에 위치한 두 개의 작은 만은 배수량이 적은 배만 이용이 가능합니다.
거제도 섬의 북서쪽으로 실비아 내만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정박지는 아드미랄 치하체프(Адмирал Чихачев) 항입니다. 이 항구에는 내로우 항로와 인접한 쿠엔카(Куэнька) 만이 있습니다. 아드미랄 치하체프 항구는 5마일 정도의 순양함을 위한 해협, 그리고 전체 정박지로 구성되었습니다. 아드미랄 치하체프 항구는 닻을 내리기가 아주 적당하고 배수량이 큰 선박들의 접근이 용이합니다.
높은 봉우리로 구성된 섬들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매우 탁월합니다. 즉 겨울철 북서풍이 불 경우에 추위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선박이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남쪽지역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쪽지역은 항해를 위해서 필요한 25피트의 깊이를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드미랄 치하체프 섬과 그에 인접한 섬들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수심이 깊으며 강가 연안조차도 10~12피트의 깊이를 갖고 있습니다. 해협의 양쪽 강가에 많은 이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또한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넓고 깊은 정박지를 소유하고 있는 쿠엔카 만은 닻을 내리기에도 좋습니다. 그리고 섬이 움푹 들어가서 이 만은 거대한 함대가 정박하기에 편리합니다. 이 만은 갈고도 만으로부터 2 1/2마일 떨어져 있습니다.
대륙에 위치하고 있는 만들 중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해협은 주목됩니다. 이 해협은 4마일의 폭과 매우 깊은 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는 강가를 따라서 주민이 살고 있으며 북쪽지역에 커다란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이틀 동안 시장이 열리는데 각종 살아있는 모든 동물이 거래되며 품질 또한 우수합니다. ‘미노노속’ 만이 있는 이 해협의 북쪽 지역에는 8개의 섬이 있습니다. 이 섬들은 거대한 함대가 정박할 수 있는 좋은 지역입니다.
‘자비야카’ 만은 육지에서 5마일 나와 있는데 앞서 언급한 해협과 만처럼 수심이 매우 깊습니다. 이 만은 출구가 협소하고 높은 봉우리를 소유하고 있어서 외부로부터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합니다.
거제도의 전체적인 날씨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저는 거기서 6주간 정박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정확한 관측을 보고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거제도의 지리학적 상황을 고려하면 기온이 부산의 기후와 비슷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제도는 부산과 매우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근 관찰을 토대로 말씀드리면 거제도 섬은 온난한 지역의 기온입니다. 이 섬에서 가장 추운 달은 1월에서 2월 사이입니다. 특히 3달의 겨울 중 가장 낮은 온도는 밤에 영하 9도 입니다. 낮에 온도계가 영하 0도 이하로 심하게 내려가는 경우는 12월에는 2일, 1월에는 5일, 2월에는 8일이 있었습니다. 3월 달에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온난 기후라는 것은 함박눈이 내리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거제도는 겨울철에 대부분 선명한 날씨를 보이며 가끔씩 적지 않게 눈이 내립니다. 거제도의 겨울에는 한랭 기후를 보이는 북서풍이 붑니다. 12월에 거제도 실비아 내만에서 정박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호는 남쪽에서 바람이 불 때는 영상 5도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는데, 북서풍이 불자 날씨가 추워지면서 밤에는 영하 3도까지 떨어졌다고 보고했습니다.
거제도의 실비아 내만 지역보다도 동쪽 연안은 높은 봉우리와 좋은 기후를 갖고 있어서 방어를 위해서 매우 유리합니다. 겨울철 선박의 정박, 군사기지의 건설 등 가장 방어에 적합한 지역은 거제도의 서쪽 강가에 있는 크레이세르 해협, 아드미랄 치하체프 항구, 갈고도 만 등입니다.
거제도의 여름은 길며 6월에서 8월까지 장마가 계속됩니다. 몇 년 동안 관찰한 부산지역의 온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최저기온 | 최고기온 | |
1월 | –7,2° | +8,8° |
2월 | –9° | +9,6° |
3월 | –1,6° | +15,2° |
4월 | +7,2° | +16,8° |
5월 | +8,8° | +22° |
6월 | +12,8D° | +22° |
7월 | +15,2° | +24° |
8월(아주 더움) | +18,4° | +25,6° |
9월 | +14,5° | +24° |
10월 | +11,6° | +20° |
11월 | +6° | +14,4° |
12월 | –1,5° | +13,6° |
부산과 인접한 거제도 섬은 태풍 지역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태풍이 조선 남부에 도달할 때는 태풍의 소멸 시기입니다. 그래서 거제도 지역에 도달한 태풍은 약한 상태입니다.
상기 서술한 것을 종합해 보면, 거제도는 육지, 남쪽과 남서쪽 주변 섬들과 매우 인접해 있기 때문에, 섬이 위치적인 면에서는 본질적인 우월성이 없지만 섬에서 조선 반도를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거제도를 점령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때 러시아의 점령 지역은 단지 군도만이 아니라 더글러스 협만과 해리 파크스경 해협(Sir Harry Parkes Sound)을 포함하는 육지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지도참조).
이런 지역까지 점령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면, 거제도는 전략적인 중심 기지로 완벽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강력한 해군 기지 및 군사 항구를 만들기 위해서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인 마산포 도시 근처에 있는 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895년 12월 4일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 직함으로 보낸 저의 보고서 제1002호에서는 마산포의 항구 및 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습니다:
상업을 위해서 마산포 도시가 개항될 경우에는 부산의 경우보다 훨씬 더 큰 파장이 예상됩니다. 왜냐하면 마산포는 부산보다 서울과 낙동강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상업관계 측면에서도 부산보다 본질적인 우월성을 가지는데 이는 연안무역을 위해서 항해할 때 마산포는 조선 남서쪽의 암초를 지나갈 수 있는 첫 번째 항구입니다.
거제도와 마찬가지로 마산포의 항구와 만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마산포는 가장 근접한 이웃인 일본의 전략적인 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마산포는 쓰시마에서 30마일,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120마일, 사세보 군사항구로부터 140마일, 나가사키로부터 148마일 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거제도와 마산포 둘 중에서 하나를 점령하여 해군 기지를 건설하려면 대규모의 예산이 필요하지만 일본해군에 대한 방어를 확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충분한 해군력과 거대한 병기고를 마산포 항구 내부에 건설할 것을 제안합니다. 쓰시마의 전략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일본은 항상 거제도와 마산포 만에 건설된 시설을 위협할 것입니다. 군사적인 목적으로 거제도를 점령하려면 이곳에 충분한 수비대를 보유한 강력한 해군이 우선 조건입니다. 따라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태평양의 핵심 군사 항구이며 강력한 요새와 해군 병기고를 갖고 있는 블라디보스톡의 역할을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합니다. 남쪽지역에 두 번째 항구의 기능을 수행하고 부동항이자 석탄기지가 있는 새로운 항구를 건설해야 합니다. 태평양의 함대가 들어설 새로운 항구는 필연적으로 모든 군사 활동을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아드미랄 치하체프 항구 또는 마산포 만은 함정이 겨울에 도착할 수 있는 항구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핵심 문제가 제기됩니다. 즉 석탄보급과 식료품 수송의 문제입니다. 석탄보급의 문제에 대해서 저는 편리한 장소를 선택하여 석탄 창고를 건설할 것을 제안합니다. 식료품 수송의 문제에 대해서 저는 조선정부의 협력을 요구하거나 고베 또는 나가사키로부터 지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블라디보스톡 항구 및 청국과 일본에 있는 함대의 통신을 위한 우편과 전신 문제가 중요합니다. 만약 상해와 블라디보스톡을 연결하는 정기적인 기선이 만들어진다면, 이것은 단지 우편을 배달하는 것만 아니라 선박의 예비 지원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이미 부사령관 티르토프(Тыртов)는 1895년 12월 9일 정기적인 기선의 필요성에 대해서 제기하였습니다. 이런 정기적인 기선이 부재하기 때문에 현재 함대는 나가사키, 부산, 고베를 거치는 기선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함대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전신선입니다. 이 문제는 앞서의 문제보다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포시에트에서 원산, 서울, 마산포 등을 연결하는 전선의 설치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러한 전선의 설치가 어렵다면 상해와 블라디보스톡을 연결하는 해저 전선을 부설해야 합니다. 현재 부산에서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해저 전선이 존재합니다. 부산에서 쓰시마까지의 구역은 덴마크회사의 소유이고, 쓰시마에서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구역은 일본정부의 소유입니다. 현재 유럽에서 부산을 거쳐 조선에 오는 보고는 전보의 지연, 본문의 오류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기후적인 측면에서 거제도 섬은 부동항의 건설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동시에 거제도 섬은 군사항구 건설 용도로 편리하며 모든 함정이 닻을 내리기에 안정된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거제도 섬의 기후와 환경은 농사를 짓기에 아주 좋은 환경입니다. 동시에 거제도에 살게 될 이주민은 어업활동도 충분히 종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염분이 없는 물은 향후 상세한 조사를 통해서 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략적인 의미가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전략적인 의미에 대해서 저는 이미 러시아 정부의 정치적인 견해와 관련지어 심의될 주제라고 제기했습니다.
마산포 항의 문제에 대해서 제가 더 이상 그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베리아 철도의 레일을 따라 원산까지 이어지며 마산포는 거제도와의 통합을 위한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런 선을 구축하기 위해서 러시아는 현재 조선정부와 협의를 할 수 있고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확립을 위해서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부합니다. 섬들로 연결된 조선의 남부 군도는 해전이 발생할 때 함정을 숨기거나 함대를 집결시키기 위해서 매우 유리합니다. 따라서 조선 군도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위해서 태평양 함정을 파견해야합니다. 파견된 함정은 향후 반드시 이용될 비밀 지도의 작성을 위해서 촬영과 측량을 진행해야 합니다.
해군소장 ________
1896년 1월 21일
나가사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06. РГАВМФ, ф.574, оп.1, д.3, лл.28~29об.
정보조사서 № 5
가철본 №4
부산항
포함 '오트바즈니' 호 함장 해군중좌 로디오노프의 보고서 발췌본, 1895년 7월 29일, № 328
아침 11시 부산의 항해표시가 열렸고 저는 그 표식을 따라 내항으로 들어가 아침 11시 50분 6사젠 깊이에 닻을 내렸습니다.
‘오트바즈니’ 호처럼 굴곡이 적고 작은 배는 부산으로 들어가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표식들이 해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기준선에서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점만 빼면 말입니다. 예를 들면 굴곡이 25피트에 달하는 함선들은 부산으로 진입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습니다. 기준선은 4.5사젠의 구분심도에 따라 놓여있고 얼마 전 이곳에서 암초 두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하나는 깊이 18피트, 다른 하나는 깊이 24피트입니다. 이 두 번째 암초는 거의 기준선에 붙어 있어서 옆으로 지나가려고 들어가는 선박은 기준선으로부터 오른쪽으로 기울여야하고 이때 수로의 암초로부터 연결된 가까이 놓여있는 암초에 걸리거나, 또는 기준선으로부터 오른 편에 있는 수로의 암초 뒤에 있는 21피트 깊이의 여울에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물결이 높을 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선박은 정박항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정박항의 가장 큰 공간은 깊이가 4.5부터 3.5에 이르지만, 기준선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전체적으로 대형선박들이 들어갈 수 없고 정박항의 중간에 3사젠 깊이의 반점이 있어 굵직한 선박들이 정박항에 자리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일본인 거류지역 반대편에 있는 정박항의 가장 편리한 부분은 5-9사젠 깊이로, 예를 들면 순양함 ‘아드미랄 나히모프’ 모양의 간격이 1.5카벨토프인 대형선박 4척이 간신히 정박할 수 있는 크기입니다. 정박장에서 깊이가 더 얕은 다른 곳들에는 바다 밑바닥과 충돌의 위험 때문에 대형선박을 세울 수 없고 부산항은 남쪽으로부터 밀려오는 파도와 물결에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폭풍으로 닻에 의지해야하는 힘든 상황 하에서 부산항으로 진입했고,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정박항이 바람을 등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도가 심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왔던 날에는 북풍이 서늘해지기 시작했고, 기압계는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7월 12일 자정이 되자 기압계는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해 정오가 되자 29.49까지 떨어졌습니다. 동시에 바람은 강해져 북서쪽으로부터 10노트에 이르렀고 소나기를 동반했습니다.
배는 닻 하나를 수직으로 매단 채 한 개의 닻으로 멈춘 상태였습니다. 부산항에 저와 함께 서있던 2척의 증기선들은 일본거류지 옆에 있는 해만 깊숙히 정박해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마 표류하고 있었던 것 같았으며 작은 배 가까이에 닻 두 개로 서서 장소를 이동해야 했습니다.
석양이 질 무렵 폭풍은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바람은 북풍에서 남북풍으로 옮겨갔고 자정이 되자 완전히 잦아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폭풍은 중국해에 몰려온 태풍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런 폭풍이 남쪽에서 불어왔다면 부산항에 그렇게 평온하게 서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정박항의 불편함에 대해 하나 더 이야기할 것은, 전쟁 시기에 선박이 정박항의 가장 좋은 위치에 서있으면 열린 만 쪽으로부터, 그리고 낮은 북쪽 지역으로부터 적의 사격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에 따르면 부산의 일본거류지는 1393년 생겨났고, 유명한 조선 고관인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여 조선에 현재까지 존재하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왕은 쓰시마의 공작과 교역을 시작했고 그 이후로 부산에 일본거류지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일본거류지에는 일본인이 4,700명, 중국인이 300명에 이르고, 실제로 총독이라고 보아야 할 일본총영사의 통치 하에 있습니다. 비록 가장 하잘 것 없는 조선 관리 앞에서도 자신의 권력을 감추고 있지만 말입니다. 부산에는 소좌가 관할하는 400명의 수비대도 있습니다. 하급관리들은 개인주택을 세놓아 살고 있고 아마도 병영은 세우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이것이 최근의 전쟁이후 이미 몇 년간 상주하고 있는 수비대를 송환시키려는 일본인들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석탄에 관한 정보조사서를 만들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은 일본증기선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디어 아일랜드(Deer Island)(절영도-역자 주)에 상당히 큰 창고가 있으며 블라디보스톡에서 석탄으로 갚는 조건으로 이 회사는 저에게 석탄 20톤을 주는 데 동의했습니다.
담수와 신선한 식량은 일본인 공급자에게 다음과 같은 가격으로 얻었습니다.
물…………… 톤당 1달러 30센트
소고기……… 파운드당 15센트
빵…………… 파운드당 9센트
채소………… 파운드당 5센트
제가 부산에 정박하는 데 할애할 수 있었던 기간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어서 지역을 더욱 자세히 조사하여 이 항구에 대한 더 상세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짧은 정박기간에도 제가 판단한 바로는 부산이 적합한 군사 항구로서 관심을 기울일만한 점이 없다는 점을 폐하께 보고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태평양 서부의 항구들』이라는 책에 나온 정보와 저의 의견은 동일합니다. 이 책의 166쪽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습니다. “부산항은 바다로부터 조몬도(Чомондо)로 둘러싸인 만을 형성하고 있다. 만은 깊고 넓으며 평온하다.”
부산항은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충분한 수심을 가졌으나 4척 이상의 대형선박이 정박하기에는 협소하며, 진입이 불편하고, 파도나 물결이 있을 때 심도가 깊은 선박이 드나들 수 없는 결함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정박장에 서 있는 선박들이 적군함대로부터 사격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근본적인 결함입니다.
군사시설에 대한 저의 부족한 지식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부산의 요새는 절영도에 있는 축조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린 만을 형성하는 높이 솟아있는 곶들과 미그네트 헤드(Magnette Head) 곶, 케이프 영(Cape Young) 곶으로 요새를 옮겨 놓아야 하며 이것은 방어 거리를 지나치게 늘어나게 만들 것입니다.
확인:검열관 해군특무상사_________
인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