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9강) 지금부터 10년 후의 나를 가정하고, 그때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또는 그쯤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구체적으로 써보자. 잘 생각이 안나면 옛날 이야기 식으로 써보자.
십년 후 나에게.
앤아, 안녕?
44세의 앤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잘 지내고 있니? 혹시 네가 다소 훌륭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너를 무한대로 사랑해. 잘나가지 못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이 편지를 발견하거든 너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느끼면서 꼭 읽어줬으면 좋겠어. 34세의 너는 정말 멋있었어. 진정으로 독립을 한 시기이기도 했지. 내가 누군지 알게 된 때이기도 해. 기억나? 바야흐로 직장 11년차때야. 경력 10년이 넘어가면 사람이 아주 괜찮아지지. 아직도 젊지만 노련함과 중후함 또한 느껴지지. 또한 노력하는 태도는 칭찬해줘야 할 정도야. 40대에도 넌 여전히 분주하고 열심히 살고 있을 거야. 넌 한 시도 가만히 있지를 안잖니. 44세라면 결혼해서 남편이랑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려나? 식모처럼 일하느라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는지도 모르지. 갱년기 우울증이 빨리 찾아왔을까? 아니야.. 늦게 결혼을 했을 테니까 그럴 겨를조차 없을 거야. 늦게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인격이 충분히 성숙한 이후에 자식을 키울 수 있고, 40대 초반인데도 신혼쯤 되는 거잖아. 물론, 결혼이 대수는 아니야. 네 인생의 목표는 해운대처럼 멋진 바닷가에서 텃밭을 일구며 노년을 보내는 거잖아. 집을 아름답게 고치고 꾸미면서, 여행도 많이 하고 말이야.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까지 하기란 힘들 거야. 그건 아마 60세부터 꿈꿔볼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지금도 힘든 시기겠지? 빠듯하게 지내면서 돈을 모으고 있을 거야. 44세부터 펑펑 쓸 수 있게 되기란 쉽지 않지. 오히려 34세의 내가 펑펑 쓰고 있지. 부모님 집 신세를 지면서 번 돈은 혼자서 독식하면서 말이야. 부럽지? 뭐라고??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다고? 충분히 혼자 지내봤다고? 뭐 그래. 넌 결혼이 늦었으니, 애가 있다면 이제 초등학생 갓 들어간 자녀를 두었겠다. 앗! 혹시 솔로라면 그것도 괜찮아! 그렇다면 직장을 그만두고 네가 벌인 사업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겠지. 넌 돈 버는 걸 참 좋아했어.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독립과 노후자금 준비를 위해서 지금 고분분투 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34세때부터 고민했으니 지금쯤이면 정말 근사해져 있을 거야.
하하! 정말로 10년 후에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신선하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를 곱씹는 일이 네 취미가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또 모르지. 중년이 되면 달라질 수도 있을 거야. 10년전 처녀시절, 그것도 노처녀 시절은 잘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너를 위해 더욱 심혈을 기울여 이 글을 써봐야 겠어. 중년의 삶의 핵심 줄기를 이때 다 만들었거든. 아무튼 말이야 스스로의 기록을 남길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어. 하지만 생각할수록 정말 멋진 일이야. 이렇게 훌륭한 기회가 주어졌으니, 최선을 다해 너의 30대의 정 가운데가 어땠는지에 대해 낱낱이 묘사해 주도록 할게. 준비 됐어?
34세때의 너는 말이야, 미술을 전공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어. 상대를 가거나 어학을 전공해서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으로 갔으면 좋았을걸 하고 늘 후회했었잖아? 부모님이 푸념처럼 ‘미대를 보내서 애를 망쳤다.’는 얘기를 하시기도 했지.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미대에 들어간 건 인생 전체를 놓고 본다면 축복이야. 사소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버릇처럼 미(美)를 탐하는 건 다른 불필요한 일들로 소모전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지. 살구색과 홍시색의 엄청난 차이에 감탄할 줄도 알고 말이야. 남의 것을 빼앗을 궁리를 하거나 시기심에 눈이 멀기 보다는 항상 모든지 내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살았잖아. 참 잘한 일이야. 제작자의 마인드를 지니고 산다는 건 참 좋아. 어떻게 하면 좀더 편리하게 바꿀까 디자인을 이렇게? 저렇게? 의뢰자를 놀래켜 주고싶은 충동이 일지. 색깔이나 모양을 바꿔보고 구조를 바꿔보지. 이리저리 틀어보고 아예 정돈 기준 자체를 바꾸기도 해. 좀 더 간편하게는 안되나? 좀 더 예쁘게, 좀 더 세련되게 안되나? 분위기를 바꿔볼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하루가 홀딱 가버리지. 다른 것은 생각할 조차도 없어. 그리고 완성품을 짠하고 상대방에게 안겨줄 때의 기쁨이란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로 크지. 인정받는 기분도 들고. 천 번의 붓질이라는 말이 있잖아. 끝도 없이 할 수 있지. 남의 흉을 볼 시간조차 없어지는 거야. 고정관념이 없어진 점도 미술이 준 큰 선물이지. 다소 생각이 괴짜스러워 진 건 있지만 말이야. 틀에 박힌 것, 이미 나온 것, 진부한 생각은 디자인의 적이잖니. 넌 일찍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게 된 거지. 보통 사람에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건 큰 스트레스래. 하지만 너는 그걸 오히려 즐기잖니? 급변하는 세상에서 이것만한 선물도 없는 것 같아. 뭔가가 바뀔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자주 있을 테니까. 너는 아직도 시멘트같이 뇌가 굳어있지 않을 거야. 박진영이나 양현석 뮤직 프로듀서처럼, 또 피카소처럼 100살까지 늘 어린아이와 같은 감성을 잃지 않기로 다짐했잖아. 그러니 지금도 그렇게 노력을 하고 있겠지? 여전히 동물과 어린이를 사랑하면서 말이야.
작년이랑 올 해에는 솔로로 지내면서 굉장히 잘한 일들이 몇 가지가 있어. 그것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해. 결혼을 꼭 서둘러야 되는 것인 줄 알고 허둥대던 것도 과감히 멈췄어. 세상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거지. 이 시기에 너는 진정한 의미의 독립된 자아로 완벽하게 거듭났어. 단지 마음가짐을 말했을 뿐이야.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고. 이런 상태로 무엇을 했는지 하나씩 말해 줄 건데, 44세의 네 시선으로 보면 또 뭔가 감회가 다를 거야. 과거를 참고로 또 다른 멋진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몰라. 그렇지?
첫째는, 부모와 결별했어. 기억나? 아버지가 증여세 없이 돈을 물려준다고 네 명의로 주식계좌를 개설했던 것 말이야. 차도 사달라고 했더니 사준다고 하셨었지. 무작정 아무하고나 결혼하려고 했을 때도 전세금도 내주려고 하셨었어. 이때는 참 어이없기도 했어. 부모님께 의존적인 부분이 많았지. 심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캥거루 족이었어. 엄청난 부자도 아니었지만, 어떤 이들은 나를 시기하기도 했어. 하지만 이게 생각만큼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네 자신이 너무나 잘 알 거야. 너는 일평생 반항 한 번을 못 해봤잖니. 늘 부모 앞에서 주눅이 들었어.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지.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거야. 하지만 사실이지. 어떤 면에서는 나는 가정교육을 잘 받은 거야. 고압적인 부모님 아래서 숨소리도 못 내고 지낸 것을 보면 받은 만큼 분명히 치러야 할 대가라는 게 있는 거지.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걸 잘 알게 되었으니 그 공부 하나는 참 잘 한거야. 아무튼 이러한 스트레스를 근본적으로 끊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 사실 난 늘 너무 부담스러웠어. 남들처럼 시집장가를 빨리 못 가는 것도 면목이 없었지. 죄스러울 이유도 아닌데 억울한 일이기도 해. 나에게 투자한 것 대비 모든 것을 보상해 줄 멋진 사위를 제때 데려오지 않아서 화가 나신 거였을까? 키우느라고 등골이 휘었는데 독립하지 못하고 여태 집에 있어서 그랬던 걸까? 하지만 남에게 보여주려고 사는 인생도 아닌데 내 입장에서는 한편으론 부모님의 이러한 태도가 이해가 가지를 않았어. 내가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야. 넌 항상 남들보다 두 세배를 생각하고 노력하려 했었잖니. 아무튼 집에서 나는 단 한 순간도 편안한 적이 없었어. 이제까지 부모에게서 받은 혜택에는 감사하지만 공짜로 받는 것을 되갚아야 한다는 부담이 엄청났지. 내 삶은 보여 주기용 장식품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 성적이 됐든, 직장이 됐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자랑거리가 없으면 안되었지. 어쩌면 부모님도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었는지도 몰라. 무서운 척 대단한 척 하는 겉모습과 다르게 말이야. 만약 그렇다면 매우 안쓰러운 일이지. 난 주식 계좌를 폐쇄해버렸어. 주식에 관해 하나도 몰랐어. 그냥 오프라인 매장에 찾아가서 내가 본인이고, 없애달라고 했지. 1억에 가까운 돈이 들어있었어. 금방 끝났지. 절차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어. 폐쇄 직전에 아버지께 문자를 드렸더니 즉시 돈을 본인 계좌로 다 옮기셨지. 나라고 왜 아깝지 않았겠어. 하지만 고민하기까지가 어려웠지 주식을 없애버린 순간, 그 홀가분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어. 구치소에서 출소한 사람처럼 눈물이 다 났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었어. 자동차 구입도 취소하고 부모님께 이제부터는 내 인생에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요청 드렸지. 집도 결혼도 내가 알아서 한다고 말이야. 물론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한 불효야. 나도 알지. 하지만 더 이상은 비위를 맞출 수 없었어. 여기까지가 나의 최선이었지. 누가 내 위에서 군림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어. 밖에서 일어나는 갑을관계 보다도 가정에서 이렇다는 건 훨씬 고통스러운 일이야. 30년간 그렇게 살아왔지만 죽어있었다는 기분마저 들어. 어쨌든 싸움 끝에 나는 진짜로 내가 원하는걸 현실화 시켰어. 부모님은 이후 그 어떤 참견도 하지 못하셨어. 사실 이게 더 정상적인 모습인지도 몰라. 탯줄이 이제서야 잘라진 거야. 진작에 이랬어야 했지. 나는 이 부분에 대해 확신할 수 있어. 그 이후 어머니가 지어 준 네 별명 기억나? “문간방 새댁”. 집에서 완전히 나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갑자기 그건 불가능했어. 결혼 전까지만 조용히 데리고 있어만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이후에 효도하리라 다짐했지. 물론 처음엔 전혀 조용하지 않았어. 급기야 당장 네 능력으로 집에서 나가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스스로도 참으로 한심했지. 11년씩 회사를 다니고도 나는 돈이 없었거든. 자주 옮겨대서 퇴직금도 없었지. 말 그대로 거지가 됐어. 이걸 읽고 있는 44세의 너는 어리석다고 펄펄 뛸지도 몰라. 하지만 그거 알아? 난 이 사건으로 드디어 숨통이라는 걸 텄어. 내 몸에 피가 돌고 있고, 신경과 감각이 살아있음을 이 때 느낄 수 있었다고. 감당하지 못할 짐을 지고 있다가 드디어 떨어뜨린 거지. 암세포를 도려낸거지. 나는 늘 최선을 다해왔어. 그걸 알아주지 않는 부모에겐 나도 결별을 선언할 수 밖에. 원수지자는 건 아니야. 더 이상의 비판을 듣지 않겠다 뭐 그런 의도지.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무한의 자유를 얻었어.
둘째는, 최복현 선생님과 함께 하는 글쓰기 수업에 등록한 일이야. 참 잘한 일이지. 10주간 진행될 강의 계획서에 열거된 주옥 같은 과제명들을 좀 봐바. 이 주제들을 다 써낸다면 그 누구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다른 주제를 해도 될 것을 선생님은 이러한 주제들로 과제를 만드셨어. 마음이 따뜻하고 친절하신 선생님을 참으로 잘 만났지. 세상에 이런 분들이 많아지면 참 좋을 거야. 게다가 키가 크고 호리호리 하신데다 미남이시지. 난 독서클럽 디베이트 토론회에서 처음 뵙고 한 눈에 반해버렸어. 그리고 단박에 수강 신청을 해버렸지. 참여하는 동안은 몇 번이나 하늘에 감사드렸는지 몰라. 하늘이 아니라 사실은 선생님께 직접 감사를 드려야 할거야. 숙제 하나를 할 때마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 미쳐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시원하게 풀렸어. 삶의 질이 달라졌지. 표현력이 조금씩 느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 글로 쓰는 훈련을 하니까 입으로도 나오기 시작하더라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됐어. 글쓰기 행위는 암울한 시절에 한줄기 빛이 되었어. 명언 100구절을 읽는 것보다 글 한 줄을 토해내는 게 더 큰 도움이 되었어. 나는 그 동안 표현력도 떨어지고, 말 수도 없었어. 내 생각이 뭔지 기분이 어떤지도 잘 느끼지 못했었지. 그냥 머릿속이 억눌린 감정과 뒤얽힌 생각들로 꽉 막혀있었지. 겉으로 비춰지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도 잘 의식하지 못했어. 하지만 글쓰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을 하게 되었지. 전반적으로 말이야. 예를들면, 생각, 언행, 옷차림 등에 대해서도 말이야. 특히 감정에 복받쳐 날뛰거나, 폭력적이고 부정정인 생각에 치우치는 일들이 잦아들었어. 글쓰기는 단연 이런 것들을 해결하는 최고의 무기였지. 또, 평소에 어두워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이것마저도 고쳐졌어. 후련하게 털어놓아서인 이유도 있지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화가 난다고 거친 표현을 쓰는 것은 좋지 않아. 읽는 사람도 싫고, 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지. 정리해서 승화시켜서 써야해. 그러면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고 나 스스로에게도 보탬이 되지. 글을 쓰면서는 일상의 크고 작은 두려움도 없어졌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잖아. 글을 쓰려면 적(대상)도 알고 나(감정)도 알아야 해. A4 사이즈 전쟁터에서 나는 이 둘을 아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었어. 그리고 또 놀라웠어. 창피한 말들도 고통스러운 것도 뱉어놓으면 한결 가볍고 오히려 별 것이 아닌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지. 독서의 재미가 배가되기까지 했어. 작가의 숨결과 땀이 피부로 와서 느껴졌어. 작가가 되려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지 몰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속에 마치 들어갔다 나온 듯이 말을 할 줄 알아야해. 작가들은 분명이 사람성격에 대해서도 공부하는 것이 분명해. 영업사원들처럼 말이야. 나는 영업팀을 존경해. 스무살때부터 이제껏 동경해왔지.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어. 입담도 좋고 매너도 좋고 말이야. 하지만 작가도 마찬가지였어. 물론 약간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소설을 쓰려면 배경도 스터디 해야할거야. 대충 생각해도 할 일이 아주 많아 보여. 작업에 돌입하는 디자이너처럼, 작가도 이런 것들을 공부하기 바쁘니 시기질투 같은 소모적인 일에는 시간을 쓸 새가 없을 거야. 정말 멋있어. 이런 부지런하고 생산적인 삶이 참 가치 있게 느껴졌어. 글쓰기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그걸 깨닫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해. 이런 과정을 개설해준 카페에도 감사해. 나는 이 모든 것을 상업적인 학원이 아닌 따뜻한 독서클럽에서 너그러우신 선생님 밑에서 배우게 됐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 된 기분이야. 나도 나중에 이런 기획을 하는 사람 혹은 이런 선생님이 되고 싶어졌지. 내가 부지런히 노력해서 갖춘 능력이 많아진다면 나중에 이렇게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또 한 가지 잘한 일이 있는데, 호주에 출장을 간 일이야. 원래는 가지 못했을 수도 있던걸 부장님이 도와주셨지. 나는 쭈뼜댔지만 두고두고 생각해도 잘한 일이야. 다람쥐 쳇바퀴 같던 일상에 한 줄기 바람이 되었지. 때때로 늘 보던 사람과 환경을 벗어난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야. 난 이제부터 여행 매니아가 될지도 몰라. 아직도 즐거운 기억이 생생하지. 여행의 매력을 제대로 알았어. 이제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어딘가 갈거야. 호주에 간 것 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되었는데, 가서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 대기업에 거래처 담당자들과 교수, 박사들을 많이 만났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서 접해보게 되었어. 평소에 나는 참 대기업과 교수를 싫어했었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니 이 사람들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어. 생각도 남다르고 건전하고 고상했어. 긍정적이고 진취적이었지. 유머감각과 자신감을 겸비한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 조그만 우리 회사에는 쭈뼜거리는 사람이 많았는데 말이야. 질투와 콤플렉스로 눈을 반짝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말이야. 반면에 그 학회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감과 여유가 있었어. 당당하고 정직한 모습이 보기 좋았어. 나는 곧 그러한 사람들을 동경하게 되었지. 나는 이 조그만 회사 밖에도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됐어. 참으로 긍정적인 변화야. 호주를 다녀오면서 노년 계획이 하나 더 추가되었지. 여행을 많이 다니자. 이전에는 여행을 많이 다녔어도 시큰둥하기만 했었거든.
마지막으로는 성형을 결심한 건 잘한 일이었어. 동네 상가에서 운영하는 문신 샵에 간 것이 출발이었지. 사장인 듯 한 언니가 많은 조언을 해줬잖아. 언니도 결혼을 하지 않았었고, 이 문제로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되었지. 언니는 명품백을 살 돈으로 성형을 하라고 했어. 보석을 살 돈으로 예뻐지라고 했어. 예뻐지지 않고 명품백을 백날 들어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했지. 자기는 성형중독이라 올해 목표가 ‘성형 안하기’라는 말까지 하면서 우리는 웃고 떠들었어. 당시에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했었지만 언니에게 참 감사해. 결국 언니의 말을 듣게 되었지. 샅샅이 찾아본 결과, 병원을 하나 찾았지. 방송에도 출연하고 인터넷에도 많이 글이 올라와 있는 꽤 유명한 의사선생님이 계신 곳이었어. 이 분을 만난 건 잘한 일이야. 상담을 받자마자 3주동안 짝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었지. 선생님은 나에게 코를 해줬어. 자연스럽고 세련되보이는 여성스럽고 완벽한 코를. 값을 지불했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도 줬어. 코를 보고도 감동했지만 의사의 유쾌하고 재기 발랄한 모습은 내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었지. 이렇게 유쾌하고 밝은 표정을 가진 의사선생님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거든. 의사선생님들과 일해 본 적이 있는 나는 더욱 감동할 수밖에 없었어. 너무 놀라웠지. 상담 중엔 심지어 농담까지 했어. “자연스럽게 해줄까, 아님 조금 티나도 높게 예쁘게 해줄까?” 높으면 많이 부자연스럽냐고 묻는 나에게 또 한 번 “아니, 부자연스럽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하고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어. 너무 놀라웠어. 또 자신감 있는 모습에 신뢰가 갔어. 나는 당장 계약을 해버렸지. 완벽한 실력을 갖추고도 친절하고 재밌는 모습이 이상하게 끌렸어. 수술 당일 수술 후 주의할 점을 얘기하는 것도 매력적이었어. “딱 1주일만 고개를 숙이거나 하는 일을 주의해야해.” “그렇지 않으면 A/S를 해야 하니까.”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어. 말해주는 내용들도 머릿속에 쏙 들어왔어. 외모는 심지어 송승헌을 닮았었지! 미소는 백만불짜리였어. 침착한 눈빛은 또 어떻고. 나는 의사선생님이 계속 생각나서 자꾸 검색을 하게 됐어. 그리고 곧 알게 되었지. 이분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으면서도 얼마나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파인지. 수술 후 붕대를 풀고 코를 본 순간 나는 하늘에 날아갈 것처럼 행복했어. 선생님은 자신감 있는 태도만큼 수술 실력이 있었던 거야! 코가 정말로 예뻤지. 심지어 수술했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어. 선생님이 정말로 멋있게 느껴졌어. 장난스러우면서도 능력이 있을 수 있었던 거지. 나는 항상 오전에 병원 문 여는 시간에 맞추어서만 방문했는데, 그 때마다 선생님은 로비를 경쾌하게 걸으며 왔다갔다 하셨어. 미소를 띈 얼굴로 챠트를 보면서 마치 ‘오늘은 수술이 몇 개?’ 하고 속으로 읊조리는 것 같았지. 10년이 넘게 칼을 쥐고 지루한 수술을 반복하셨을 텐데 이런게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 어떻게 저런 유쾌함을 유지하는지 궁금해졌지. 수술을 예약하면서, ‘피를 많이 흘릴 거니까 생리 첫날은 수술이 안된다’는 말을 듣고 난 경악을 금치 못했어. 코 하나도 제대로 타고나지 못 한 게 한탄스러웠지. 코 마저도 순전히 내 노력으로 얻는구나 생각했어. 노력으로 얻은 거니까 더욱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의사선생님은 이런 피바다에서 헤엄지면서도 룰루랄라 콧노래로 하루를 시작했어. 나는 이런 이런 모습을 그저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어. 붓기가 가라앉고 점점 더 예뻐져가는 얼굴을 보면서 세상에는 멋진 사람이 정말 많구나 하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지. 탑클래스라는 건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이로써 롤 모델이 한 명 더 늘었어. 난 이 사람을 닮고 싶어 졌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외모를 가꾸는 데도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점이야. 예뻐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어.
44세 앤아, 이 글을 쓰면서 참 보람됨을 느껴. 내 안의 복잡하게 얽힌 문제가 풀어지는 기분이야. 또, 난 이 편지를 쓰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어. 노력한 만큼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해 볼 수 있었거든. 혹시 20대 때 생각나? 직장 4년~5년차쯤 되었을 때, 그 때 넌 28세~29세였어. 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덤볐던 일이 하나 있었지. 30세 전에 – 그러니까 딱 2년. 이 기간 동안 평균 3개월 단위로 직장을 바꿔댔지. 정말 힘들었어. 다니면서 면접을 보고, 그만두고, 새 직장의 새 사람들에 적응하고… 꼭두새벽부터 새벽까지 피곤이 가시지를 않았어. 이 과정을 10번 정도 했지. 앞으로 평생을 바쳐 일할 진정한 적성을 찾고자 하는 게 너의 목표였어. 가족과 불화가 잦았던 만큼 마음이 잘 통하는 직장동료를 찾고 싶은 소망도 있었지. 고독했던 너는 혼자서 나름의 논리를 세우고 행한 일이었지만, 상식적인 선에서는 쇼킹한 일일 수 있더라고. 하지만 앤아, 나는 너의 이런 행동력을 진심으로 장점이라고 말하고 싶어. 결국 그래서 찾아냈잖아. 이곳 드림 직장에서 심리적으로 갈수록 안정되고 있지. 한 때는 한군데서 오래 다닐걸 왜 이런 짓들을 했나 후회했었잖아. 몸 상태도 말이 아니었어. 탈진하기 일보직전이었지. 큰 소득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돌이켜보니 지금이 만족스럽고 옮기길 잘했잖아. 또 그런 소용돌이 같은 과정을 거치기를 참 잘했잖아. 여러 가지를 할 줄 아는 모습에 칭찬도 많이 받고, 사람 상대도 잘하게 되고 말이야. 또 현장 경험을 통해서 네 적성을 스스로 너무나도 확실히 알게 되었잖아. 앤아, 44세의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 20대때 30대를 준비했던 것처럼, 지금 내가 40대를 위해 고민하고 있으니까 조만간 좋은 플랜이 나올 거야. 44세의 앤아, 미래에서 혹시 보고 있다면 밤새 고민으로 뒤척이는 나를 응원해줘.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줘. 사랑해. 행복하길 바래.
2014년 2월 6일
34세의 앤이.
첫댓글 부모님에게서 독립한다 함은 많은 부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독립과 언행에 대한 책임을 포함한 자율적인 선택까지도~ 살짝 성형을 해서 자신감과 행복지수가 올라갔다면 잘 하셨어요.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내다볼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네요. 자신을 믿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40대 여인이 또 무엇인가를 하려고 눈을 반빡이고 있을거라는 ~!!!
글 잘 봤습니다. 10강 마무리 잘 하세요^^
어머! 예쁜글씨님, 덧글 언제 달아주셨어요?? ^^*~,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글쓰기 수업 너무 재미있어요. 진짜 도움이 많이 되어요. 카페가 정말 사랑스럽고 멋있어요. 예쁜글씨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 가득하세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