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아멘! 주 예수여, 오십시오.—계시록 22:20. 1000년이 끝나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완전한 상태일 것입니다. 그 누구도 더는 아담에게 물려받은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5:12) 아담의 죄가 가져온 저주는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땅에 있는 사람들은 1000년이 끝날 때 완전한 사람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계시록 20:5) 우리는 예수께서 그분의 충절을 꺾으려는 사탄의 시도를 물리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충실을 유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완전한 사람들을 시험할 기회를 갖게 될 때 그들도 모두 기꺼이 충실을 유지할 것입니까? 1000년이 끝나고 사탄이 무저갱에서 풀려나면 각자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0:7) 그 최종 시험에서 충실함을 증명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로마 8:21) 반역하는 자들은 영원히 멸망될 것입니다.—계시록 20:8-10. 「파22.05」 19면 18-19항 |
아멘! 주 예수여, 오십시오. Amen. Even so, come, Lord Jesus.—계시록 22:20. Barnes' Notes on the Bible Amen - A word of solemn affirmation or assent. See the notes on Matthew 6:13. Here it is to be regarded as the expression of John, signifying his solemn and cheerful assent to what the Saviour had said, that he would come quickly. It is the utterance of a strong desire that it might be so. He longed for his appearing. Even so - These, too, are the words of John, and are a response to what the Saviour had just said. In the original, it is a response in the same language which the Saviour had used, and the beauty of the passage is marred by the translation "Even so." The original is, "He which testifieth to these things saith, Yea - ναὶ nai - I come quickly. Amen. Yea - ναὶ nai - come, Lord Jesus." It is the utterance of desire in the precise language which the Saviour had used - heart responding to heart. Come, Lord Jesus - That is, as here intended, "Come in the manner and for the objects referred to in this book." The language, however, is expressive of the feeling of piety in a more extended sense, and may be used to denote a desire that the Lord Jesus would come in any and every manner; that he would come to impart to us the tokens of his presence; that he would come to bless his truth and to revive his work in the churches; that he would come to convert sinners, and to build up his people in holiness; that he would come to sustain us in affliction, and to defend us in temptation; that he would come to put a period to idolatry, superstition, and error, and to extend the knowledge of his truth in the world; that he would come to set up his kingdom on the earth, and to rule in the hearts of people; that he would come to receive us to his presence, and to gather his redeemed people into his everlasting kingdom. It was appropriate to the aged John, suffering exile in a lonely island, to pray that the Lord Jesus would speedily come to take him to himself; and there could have been no more suitable close of this marvelous book than the utterance of such a desire. And it is appropriate for us as we finish its contemplation, disclosing so much of the glories of the heavenly world, and the blessedness of the redeemed in their final state, when we think of the earth, with its sorrows, trials, and cares, to respond to the prayer, and to say, "Come, Lord Jesus, come quickly." For that glorious coming of the Son of God, when he shall gather his redeemed people to himself, may all who read these notes be finally prepared. Amen. 반스의 성경 주석 아멘 - 엄숙하게 긍정하거나 동의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6:13의 주석을 참고하세요. 여기서는 구세주가 빨리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엄숙하고 쾌활한 동의를 나타내는 요한의 표현으로 간주되어야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그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갈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것 역시 요한이 한 말이며, 구세주께서 방금 하신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원문에서는 구세주께서 사용하셨던 동일한 언어로 된 응답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번역으로 인해 이 구절의 아름다움이 손상되었습니다. 원문은 "이 일을 증거하는 자가 이르되, 예 - ναὶ 나이 - 내가 속히 오리라. 아멘. 예 - ναὶ 나이 - 주 예수여, 오십시오." 이것은 구세주께서 사용하셨던 정확한 언어, 즉 마음에 마음이 반응하는 정확한 언어로 소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 여기서 의도한 대로 "이 기록에 언급된 방식과 대상을 위해 오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보다 확장된 의미의 경건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주 예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 즉 그분의 임재의 표징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의 진리를 축복하고 교회에서 그의 사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오실 것; 죄인을 회심시키고 그의 백성을 거룩하게 세우기 위해 오실 것; 고난 중에 우리를 지탱하고 시험에서 우리를 변호하기 위해 오실 것; 우상 숭배와 미신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오실 것 등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세상에 넓히기 위해, 그분이 이 땅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우리를 그분의 면전으로 영접하고 구속받은 백성들을 그분의 영원한 왕국으로 모으기 위해 오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외로운 섬에서 유배되어 고통받는 노년의 요한이 주 예수께서 속히 오셔서 자신을 데려가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적절했으며, 그러한 소망의 표현보다 이 놀라운 책을 마무리하는 데 더 적합한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 세계의 영광과 구속받은 자들의 마지막 상태의 축복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내며 묵상을 마칠 때, 슬픔과 시련과 염려가 있는 땅을 생각할 때,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 예수여, 속히 오소서"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오셔서 구속받은 백성을 자신에게로 모으실 그 날을 위해,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마침내 준비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예수의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확신을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확신을 갖게하기 위해 증폭된 이야기들이다. 즉, 영상이나 소리를 멀리까지 전달하기 위해서는 디지탈 증폭과정을 거쳐야 우리의 안방에까지 전달될 수 있는 것과 일반이다. 따라서 그의 부활은 영의 부활이므로 인간이나 사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세계에 존재하여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영이신 하느님이 존재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마 18:20)"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올 것이라는 생각은 고대인들의 신화적인 사고방식일 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의 다시 오심은 그가 부활되어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한 방식이 될 것이다. 즉 예수가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강한 확신을 줄 것이다. 그러한 확신이 그들 공동체에 작용하여 먼저 자그마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예수는 그들 가운데 다시 오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과연 하나님과 같은 영적 존재자로 부활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추리의 문제이며 더욱이 그러한 존재자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우리의 육안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올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과는 동떨어진 생각이다. 비록 현실적 사실이 아니다 하더라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어야 예지체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예지체도 가능하지 않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본다면, 그 구름을, 인간과 같은 무게가 있는 것이 위에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는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구름을 타고 오리라는 기록은 고대 그리스도인들의 신화적 희망인 것이지 문자적이거나 은유적 해석을 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추구하던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질 수 있다. 비록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찌라도 행복과 생명을 원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바라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
질문:
1. 예수의 부활과 재림은 자연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