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수는 우리를 볼 때마다 젊어져서 돌아온다.
색깔이 수시로 변하는 선글라시스와 옆으로 주름 진 잠바, 그리고 꼭 끼는 바지와 함께.
상대방에게 보내는 웃는 모습도 다정하게 느껴진다.
그 옛날 재학시절에 나와 함께 하숙을 했던 이야기부터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보따리 풀 듯 쏟아냈다.
군시절 유도교관과 특히 막내로 자라 아버지가 그리웠던 그에게 나손 김동욱박사가 외국갔다왔다고 손수 망고과일을 들고
종수의 집을 방문했을때는 마치 아버지를 만나는 느낌이었단다.(처음 망고의 맛을 알았다.)
그 당시 지도교수가 망고를 들고 제자집을 방문했다면 가히 혁신인데, 그만큼 종수가 나손선생님에게 더욱 잘 했을테지.
아님 그보다 더한 일거리가 있었던지(?). 그 시절에 지도교수의 권위는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리는 없었을 텐데..
그의 영원한 스승, 1990년 돌아가신 나손 김동욱박사(묘소 홍성)와의 인연, 학문뿐만아니라 교수부임, 그리고 부동산까지 전수 받아
풍요로움을 누리고 사는 종수, 아주 오래전 국어과모임을 했을 때 서초동 종수집에 들러 아침을 먹었던 생각도 난다.
정월부터 6월까지는 말레이지아 날씨가 40도의 무더위라 그 시기를 피해서 오는 7월15일에 다시 말레이지아로 떠난다.
골프까지 잘 적응해서 부부가 함께외국에서 산다는 것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을 텐데,
더욱이 남편의 취향을 따라 함께 골프를 한다는 것이 보통일은 아닐텐데, 사모님의 무운을 기원한다.
요즘 의사들의 실력이 예전과 달리 대단해져서 백내장 수술 정도는 30분만에 했다고 우리에게도 권유를 한다.
그 누가 이러한 종수를 70대로 보겠는가?
70대가 70대로 보여야 정상인데 그 70대가 70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이건 틀림없이 확실하게 비정상이다.
앞으로 10년 후, 종수를 비롯한 우리 곰나루 회원들은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자못 궁금할 따름인져. 혹 그 때까지 살아있기나 할까?
이번 모임에 참여해준 김정헌, 정헌이를 보면 바른 생각과 바른 생활이 떠오르고, 또한 연수의 달인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바바리코트와 구두를 신고 나타난 정헌이는 충남 공주시 유구읍 탑곡리 천방산아래 탑산에서 8남매의 맏이로 살아왔단다.
정헌이 남동생은 모교 체육과 김정수 교수로 지난 해 정년을 했다.
특히 아버님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던데 (95세로 생존), 부모가 돌아가신 친구들이 들었을 때는
이 또한 행복한 비명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박사 학위 후에 또 석사 학위에 도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헌이는 박사하나, 석사가 세개나 된단다.
김정헌이 있어 특히 이번 모임이 더욱 즐거웠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모두 함께 즐거워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여기에 소식을 올린다.
만권당형이 어머니(97세, 김을순여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번 모임에 앞서 형 집을 먼저 방문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내가 여기를 방문한 것이 육근철의 넉줄시 모임때문에 2월 초라고 기억이 되는데,
내가 방문하고 곧바로 자당님이 이 곳으로 오신 모양이다. 한달이 되었다니.
역시 만권당형도 맏이었는데, 우리부모세대에서는 여자보다는 남자, 남자 중에서도 맏이에 대한 생각은 끔찍할 정도이다.
자당님이라고 다르겠는가? 그 동안 얼마나 맏이가 그리웠을까.
70대의 맏이와 90대의 노모가 이제 한 지붕밑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이 아니 즐겁지 아니한가?
모자가 서로 만나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옆에서 보는 나까지도 이렇게 크나큰 선물을 안고 가는 것 같으니,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러다가 졸지에 내가 군자가 되어 버렸네, 이거 참 민망하네. 이 또한 널리 혜량한 마음으로 보아주소서~.
대천에 오니 그야말로 고즈녁하다. 찬 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길거리이고 백사장이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갑내형이 갑자기 맨발로 백사장을 달리더니 물 속에 발을 담그고 나오면서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야단이다.
저 사진을 보니 그옛날 신입생 무렵에 무슨 일인가 모르지만 복산춘에서 우리 모두가 회식할 때,
갑내형이 양 소매를 걷어올리고 따라하라고 하더니만 "우리는 젊다" 라고 크게 선창을 하고 우리가 후창을 한 기억이 새롭다.
지금이라고 그 도전과 기백이 변할 줄이 있겠는가.
종수는 열대지방에 살더니만 추우니까 아예 식당으로 가자고 난리이고,
바로 머드광장에 자리하고 있는 '명가'로 가 '횟집 정담'을 나누었다.(맨 위 사진)
대천에서 1박, 아침 해장국을 먹고 찾아온 곳이 예산에 있는 수덕사다.
51년전 우리가 국어교육과에 입학하고나서 처음으로 간 곳이 수덕사이기 때문에 여기로 가자는데 다들 공감을 했다.
무료입장이라고 갑내형은 미안해 한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보다 더한 전쟁과 가난을 극복하고 힘차게 살아온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덕숭산 남쪽에 자리한 수덕사는 1500여년전 백제 위덕왕 재위 때 지어진 것이라고 추정한다.
편액이 소전 손재형(1903~1981)님이 1967년에 쓴 작품으로 해서, 전서, 행서가 두루두루 보인다.
요즘 미세먼지 난리인데 여기야말로 청정도량이니 보는 것마다 경치 아름답고 마음껏 심호흡을 하며 답사했다.
날씨도 화창한데, 가는 길에 커피& 숲이 보인다(커피&숖이 아니다).
아마도 숲을 좋아하거나 숲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커피숖을 하는 모양이다.(절에서 한단다.)
전통차인 대추차와 오미자차를 주문했는데, 정헌이가 쏘았다. 왜?
어제저녁 갑내정호완, 월산임윤수, 균재박종수와 같이 호를 모두 가지고 있는데, 아뿔사 정헌이만 없다는 것이 아닌가?
이를 지나칠 리 없는 갑내형이 정헌이가 꿈에 할머니의 모습을 선명하게 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夢村(꿈몽, 마을촌)이라 지어주었다. 이에 그 화답으로 몽촌이가 전통차를 사 대접한 것이다.
그 전에 동록이형이 매촌이라 호를 지었을 때와 과정이 같다.
무슨 자일까?
어떻게 읽을까?
원담이라 읽는다. 아래 "담"자의 한자가 틀렸다.(원담대선사 탑)
여기가 수덕사대웅전, 맞배지붕이다. 고려 충렬왕 때 건립, 혜현스님이 법화경을 강론하신 곳.
우리 모두 들어가 합장을 했다. 다들 무엇을 기원했을까?
대웅전 앞 넓은 장소는 우리가 찾아왔을 때는 좁았었는데 큰 소나무 밑둥이 덮힐 만큼 흙을 돋우어 쌓아 올려
넓은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스님들의 법화경 강론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수덕사하면 가장 궁금해 했던 미스테리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가 단체사진을 찍었던 곳이 어디인가?
모두 추측한 결과 대번에 알아냈다.우리 신입생들이 사진을 찍었던 곳이 여기 백련당이었다. 51년 전에는 마루에 올라가
찍었는데 지금은 아니 아니되오~
마루가 아닌 그 앞에서 찰칵~. 그 때 인솔교수 유당 임헌도선생님이 비구니들이 참선을 하고 있는 곳에서 새파랗게 젊은 신입생들이
소리소리지르고 게다가 토바꼬 입에 물고 야생마같이 날뛰었으니 얼마나 난감해 하셨을까?
유당선생님은 1920년 생이시니 우리 인솔하던 그 때 나이 48세, 글쎄 산전수전 겪으셨으니 태연하셨을까?
이제는 돌아가신 지가 꽤나 오래 되었으니. 당시 우리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히 천방지축의 아이콘이었다.(나도 포함)
수덕사 주지스님으로부터 수덕사의 역사를 들었는데, 종정과 종무원장을 선출하되 수덕에서 종정을 뽑았다면
종무원장은 범어에서 나오도록 하여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수덕여관은 비구니들이 머물던 절집이었는데, 만공스님이 불사를 크게 일으키면서 전국각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자
비구니들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일제강점기에는 절 손님을 맞는 객사가 되었단다.
1933년 김원주(1896~1971)라는 신세대 여성이 찾아와 '신여자'창간과 자유연애론 주장, 실제로 이혼 재혼을 거듭하다
불교에 귀의하였으니, 이 여성이 곧 필명을 법명으로 바꾼 김일엽스님이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가 68년인데 71년에 입적하셨으니,
우리 방문 후 3년만에 돌아가신 것이다. 일엽스님이 거처하던 환희대도 둘러보았다.나혜석도 행려병자로 1948년 생을 마감한다.
해강 김규진의 제자인 고암 이응노(1919~1989)화백도 신여성 나혜석에게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배우고 나서
일본유학을 떠났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한 고암이 매물로 나온 객사를 사들여 거처와 작업실 겸한 여관으로 꾸민 것이 수덕여관이다.
고암은 1958년 다시 파리로 떠나면서 부인 박귀희를 버리고 제자(박인경)와 함께 파리로 가 결혼하였으며.파리에서 명성을 날렸으나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무기징역선고 투옥되었고, 1970년 사면되자 다시 파리로 돌아가 다시 돌아오지않았다.
고암의 부인 박귀희는 배신을 당하고도 여관운영으로 번 돈을 파리로 보내 뒷바라지 했고, 동백림사건으로 출옥한 고암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지만 고암은 파리로 떠나고 박귀희는 한많은 세상 2001년 세상을 떠난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2007년 가을, 수덕여관의 복원기념식이 있었는데 화백의 작품과 개인소장 작품도 그 모습을 공개했었다.(암각화 유명)
이 때 참석한 사람은 조강지처 박귀희가 아니라 파리에서 결혼한 박인경이 참석하였단다.
우리들의 두 번째 미스테리? 우리가 수덕사를 방문했을 때 일엽스님이 계셨던 곳은 어디이었을까?
이 것도 주지스님을 통하여 알아냈다, 바로 "환희대"라는 곳이다. 우리는 여기도 찾아가 보았다. 아! 여기에서 일엽스님이~
2009년 예산군이 4억원에 사들여 해체복원한 뒤 충남 도기념물로 지정하였다.
때마침 고암미술관을 개관하여 여기저기 둘러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이중섭이 즐겨 그렸던 "두 아이와 물고기"를 본 뜬 듯한 석상이다.
수덕사를 떠나며 갑내형이 모두에게 연꽃선물을 해 주었다.
우리집 거실에 놓았는데 가운데 부엉이 두마리 아래밑에 있는 것이다.
아래 왼쪽에서 두번째 연꽃은 가족여행 중 선운사에서 사온 것이다.
수덕사에 얽혀 있는 세 여인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수덕사에서 삶을 마감한 김일엽 스님,
만공스님의 사랑을 받지못하고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
고암이 나를 두번이나 버리고 떠나갔지만 역시 못잊어하다 삶을 마감한 박귀희.
아아 진정한 삶은 과연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수덕사를 공유한 이 세 사람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올바른 것일까?라는 화두를 깊게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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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보고
- 잔액 : '(17,000)
- 총잔액 : 전잔액(200,790)- 잔액(17,000)=217,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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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월산은 문필가가 분명하이. 글이 편안하고 즐겁게 읽히니, 그 솜씨가 부렵구려. 이제 수필집 한 권 내봄직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이 글들을 보니 같이 동행하지 못하게 되서 미안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