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14.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0, лл.54~59.
올해 7월 14일에 보낸 제24호 보고에서, 저는 각하께 아산 근처에서 일본 전함이 청국 운송선과 전함을 갑작스럽게 공격한 것에 대해서 보고했습니다. 프랑스 포함 ‘옹(Lion)’과 독일 함선 ‘일티스(Iltis)’에 의해서 ‘카오민(Као-мин)’호 주변과 인근 섬에서 구조된 수십 명의 증언, 그리고 유일하게 구조된 유럽 사람이자 전 독일 군사 기술자인 폰 하넥켄(фон-Ханнекен)의 증언 덕분에 비극적인 참사가 자세하게 해명될 수 있었습니다.
저의 7월 13일자 제22호 보고를 통해서 각하께 알려 드린 것처럼, 청국정부는 조선에서 일본의 군사력이 계속해서 증강되는 것을 파악하고 아산 근처에 수천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자신의 군대를 강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처음에 기선을 통해서 조선에 수송될 병사는 청국의 강력한 함대와 더불어 파견되도록 제안되었습니다. 하지만 리훙장은 함대의 파견이 불러일으키게 될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에 함대 파견을 취소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병사를 수송하는 기선은 동시에 출발하지 못하고 충분한 시간 간격을 두면서 한 대씩 출항하였습니다. 7월 10/22일 타쿠(Таку)에서 출항한 첫 번째 기선 두 척은 무사히 아산만에 도착했고, 아산만에 정박해서 약 2,500명의 군대를 하선시키고 청국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했습니다. 두 척의 배가 출발한 뒤 7월 11/23일 영국 기선 ‘카오민’은 1,200명의 병사와 12문의 대포를 싣고 타쿠를 출발했습니다.
7월 13/25일 오전 조선 군도에 다가가던 ‘카오민’은 갑자기 ‘쇼파이울(Шо-пай-уль)’ 섬 근처에서 거대한 일본 전함의 뒤를 따라 섬 뒤쪽으로부터 추가로 네 척의 전함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강력한 함대로부터 어떤 적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던 ‘카오민’ 호의 선장은 조용하게 항해를 계속하였고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일본 전함도 선장에게 인사의 깃발로 답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 전함이(나중에 일본 순양함 ‘나니바[Нанива]’로 알려짐) ‘카오민’ 호로 되돌아와서 두 발의 공포탄을 발사하더니 “닻을 내리고 지시를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이 지시를 즉각 이행하자 일본 순양함으로부터 두 명의 일본 장교가 탄 한 척의 범선이 기선으로 다가왔습니다. 일본 장교는 배의 문서를 훑어보고 선장에게 일본 전함을 따라오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범선이 기선을 떠나자마자 청국 군대의 책임자와 장교는 당시 상황에서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여기에서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절대로 일본 함선을 따라가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선장에게 표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선장은 다시 한 번 일본 장교에게 범선을 타고 기선으로 와줄 것을 요구하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선장은 일본 장교에게 상황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난 뒤, 청국 병사가 타쿠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즉 그들의 요구를 설명하면서, 그가 아는 한, 청국과 일본 사이에 선전포고가 되지 않았으며, 어쨌든 평화 시기에 타쿠에서 출항했다고 말입니다. 일본 장교는 자기네 함장의 판단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끝마치며 재차 기선을 떠났습니다. 일본 장교가 일본 전함에 도달하자 일본전함은 선장과 ‘카오민’의 승무원들에게 즉시 기선을 포기하라는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흥분한 청국 군인을 보면서 이러한 지시를 이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기선의 선장은 두 개의 해결책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기선을 가까운 섬에 댄다면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기선에 탄 사람들의 다수는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다른 하나는 닻을 내리고 일어나는 일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몇 분 동안 심사숙고한 선장은 일본인이 법적으로 영국 깃발 아래 항해하고 있는 영국 기선을 사격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 후자를 고수하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에 일본 전함은 신호를 보내면서 점점 더 기선 가까이 다가와 100사젠도 안 되는 거리에 멈추었고, 그 뒤를 따라 차례차례로 6개의 포문을 열어 일제사격을 가했으며, 그 순간에 기선으로 어뢰가 발사되었습니다. 끔찍한 폭발이 이어졌고 ‘카오민’은 석탄과 파편 더미를 뒤집어썼습니다. 기선의 선미가 가라앉기 시작했고, 일본 전함으로부터 대포 포격이 계속되면서 포탄 가운데 하나가 배의 기관에 명중했습니다. 승무원과 군인들의 일부는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고 가까운 섬에 도달하기 위해서 헤엄쳤습니다. 군인 중에 일부는 구명 범선을 이용했으나 대다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선에 남아 일본 전함의 포격에 맞서 대응 사격을 했습니다. 사람들을 구하려는 것을 발견한 일본 병사는 전함 장루에 놓여있던 기관총을 발사했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을 사살하도록 병력을 태운 범선을 띄웠습니다. 이 비인간적인 행위로 인해 족히 백 명의 불행한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죽음을 피해 섬에 도달할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부상을 당했고, 해안으로부터 1마일 가량 떨어진 곳까지 헤엄치다가 섬의 험준한 절벽에 매달릴 힘이 없어서 죽어갔습니다. 약 40명의 사람들이 가라앉는 배에서 돛의 삭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20시간 후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제물포에서 지푸(芝罘)로 가던 프랑스 포함 ‘리옹’에 의해서 구조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구조된 사람들의 수는 200명에 달합니다. 이들은 동정심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의 섬에서 6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소형 고기잡이 범선을 타고 제물포로 출발한 독일 기술자인 폰 하넥켄에 의해서 이들의 소식이 제물포에 알려졌습니다. 폰 하넥켄은 제물포에서 독일의 포함 ‘일티스’를 발견했고, 이 배는 신속히 섬으로 떠나 이들을 구조하여 지푸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제가 지나치게 자세히 설명한 것 같습니다. 일본 전함의 승무원은 외모가 세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야만적이고 잔인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야만적인 폭력은, 제가 아는 한, 전투 행위와 국제 관계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것입니다.
7월 13/25일에 일본 함대는 조선 해안을 항해하던 세 척의 청국 배를 공격했습니다. 이 중 거대한 전함 ‘치유안(Ци-юань)’은 계속 전투를 수행한 후에 심각한 파손을 당했지만 웨이하이웨이(衛海衛/Вей-хай-вей) 항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트사오키앙(Тсао-кианг)’과 ‘쿠앙기(Куанг-ий)’라고 불리는 두 척의 배는 전혀 전투 의사가 없는 가운데 훨씬 더 슬픈 운명을 맞았습니다. ‘트사오키앙’ 호는 포로로 붙잡혀 전원이 일본으로 보내진 것이 확실하고, ‘쿠앙기’ 호는 조선 근해에서 침몰했습니다. 이 후자의 사건에 대해서 지금까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존경과 충성을 보냅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15.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0, лл.60~61об.
우리 정부가 북부 항구의 최고 책임자로부터 받은 전신을 보내드립니다. 이 전신에 따르면 조선을 출발해 입항한 독일 상인들은 도중에 영국기를 달고 검은색으로 재 도색된 일본 함선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는 이 전함을 식별할 수 있도록 전함의 외해 출항에 관한 정보를 극동 지방에 있는 모든 외국 공사들에게 알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일본의 전투 행위는 이미 국제법을 위반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에 따르면 위장을 위한 최고의 간교는 영국 깃발이었습니다. 그들의 은밀한 간교를 볼 때 그들이 증거인멸을 위해 다른 나라의 깃발로 은폐하지 않으리라고 보증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분함대의 최고책임자와 다른 해군에게 전신을 보내어 만약 전함이 북쪽이나 남쪽 바다에서 혹은 푸찬(Фу-цзяна) 이나 광뚱(Гуандуан) 항으로 떠날 경우 상기한 항구의 총독은 처음에 그 배의 이름, 깃발의 형태, 돛대, 파이프의 색, 배 전체의 색조에 관해 보고해야만 하며, 출발할 때에도 상기한 지역의 관세 책임자는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동시에 식별을 할 수 있도록 위의 사항에 대해 보고하라고 지시해주실 것을 청원합니다. 만약 배가 사전에 이런 식으로 구별되지 않아서 그 당시에 진실과 기만을 구분하기 어렵다면 해로운 결과를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상선이 항구에 들어올 경우, 총독은 전함을 상선과 구분하기 위해 신속하게 세관에 출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위를 위해 채택된 이러한 조치들을 정부가 승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각하께 보고 드리며 각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16.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0, лл.74~77об.
티르토프 각하 외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귀하
이곳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기함 ‘엘자(Elza)’가 출발하면서 각하께 청국과 조선의 최근 국내 정세에 관한 보고서를 보내드립니다. 최근에 일본과 청국의 전투가 상대적으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본은 텐진 근처에 신속하게 상륙한 이후 베이징으로 이동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지만, 모든 상황을 고려해볼 때, 일본이 이러한 계획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자신의 음모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베이징에 접근시키기 위해서 베이징 분지의 침수가 끝나는 우기를 지금까지 기다려왔습니다. 이 때문에 베이징에서도 텐진에서처럼 민중들이 대단히 흥분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상륙은 심각한 소요와 무질서를 낳을 것이고, 유럽 사람들도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페이오(Пейхо)’강 유역에 외국 전함이 출현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프랑스 함선 ‘리옹’과 영국의 스쿠너 ‘린넷(Linnet)’, 독일의 함선 ‘울프(Wolf)’가 현재 텐진에 정박해있고, 이 세 척 모두 겨울 내내 텐진에 정박할 예정입니다. 8월 14일 지푸에 도착한 우리의 선박 ‘시부츠’는 제가 텐진으로 돌아가려는 9월 초까지 정박할 계획입니다. 그 이유는 텐진의 우기에서 걸렸던 저의 열병 때문입니다. 텐진에 있을 때 저는 연료 보급을 위해서 지푸에 왔다가 다시 제물포로 떠날 우리의 함선 ‘꼬레예쯔’의 정박지에 갔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함선 ‘시부츠’를 제외하고 지푸에 정박해 있는 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독일 선박 ‘일티스’, 스페인 순양함 ‘돈 후안 드 안스트리(Don Juan de Anstri)’, 상당한 규모의 영국 함대가 플리멘틀(Фримэнтл) 장군의 지휘 아래 정박해 있습니다. 영국 함대는 두 척의 장갑 순양함 ‘센추리온(Centurion)’과 ‘언던티드(Undaunted)’, 두 척의 2등급 순양함 ‘머큐리(Mercury)’와 ‘세븐(Severn)’, 두 척의 1등급 포함 ‘피그미(Pigmy)’, ‘레드폴(Redpole)’, 연락선 ‘알라크리티(Alacrity)’, 수뢰정 ‘아처(Archer)’ 등 입니다. 지푸의 해군 장군 플리멘틀의 견해에 따르면, 영국의 함대가 현재 교전 양측의 동태를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시기라고 합니다. 그는 거의 매일 영국의 함대 가운데 몇 척을 조선 해안과 페스카도로(Печилийский) 해협으로 보내서, 일본과 청국 함선들의 동태를 끊임없이 추적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곳에서 광범하게 퍼진 소문, 심지어 종종 청국의 공식 출처에서 나온 사실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부 영국의 함대로부터 나온 것과 다양한 다른 출처의 정보들을 통해서 현재 판단할 수 있는 공통의 전망은 다음과 같습니다. 양측 적대국의 육군 병력은 평양에서 가까운 조선의 북부에 위치해있으며, 지금까지 양국은 작은 전투만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적어도 3만명 이상의 일본인이 집결하였고 청국 병력의 규모도 일본병력과 유사하기 때문에 소강상태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공통된 견해에 따르면 결정적인 전투가 조만간 전개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해군에 대해서 알려드리면, 최근까지 육군에 비해서 해군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청국의 북양 함대는 웨이하이웨이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양 함대가 공해상에서 일본 함대와 맞닥뜨리면 도망칠 것이라 예상됩니다. 일본 함대는 예전에 자주 웨이하이웨이와 뤼순(Порт-Артур)에 정박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청국 연해에 등장한 일본 함대를 살펴보면 예전과 달리 그들의 진용이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어제 장군의 명령을 받아 조선의 남해안을 순찰한 영국 함선 ‘알라크리티’가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상당한 수의 일본 함대가 한반도의 남단 끝 지점에 있는 ‘노틸러스(Nautilus Bay)’ 만과 ‘인살트(Insalt)’ 군도 사이에 있는 두 개의 섬에 집결하였다고 합니다. ‘알라크리티’ 호 함장의 말에 따르면 이 항구의 출구에는 기뢰가 부설되어 있으며 해안에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는데, 섬 내부에는 석탄 언덕과 군수 물품이 구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이 정보가 정확하다면 일본인이 한반도 남단의 섬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되었든 우리에게도 영국 측에게도 유일한 정보일 것입니다. 저는 일본의 조선 남부 섬에 대한 점령설을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그 이유는 각하가 현재 제물포에 있는 우리 전함 중 하나에게 정확한 사실 파악을 위해서 파견 명령을 지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향후 모든 유리한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서 각하가 조선과 청국의 전투 지역에 있는 육군과 해군의 전투 상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저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바라옵건대 현재의 문제에 관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하께서 가지고 계신 정보를 저에게 통지하는 것도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존경과 충성을 표합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17.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0, лл.79~80об.
티르토프 각하 태평양 함대 사령관 각하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귀하
제가 순양함 ‘보브르’의 함장으로부터 받은 올해 7월 30일자 제641호 문서와 외무대신 각하로부터 받은 봉인된 암호전문을 각하께 보내드립니다.
저의 제2국에 명령을 윤허해 주신 것에 대해 각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달 4일 경 제물포에 ‘보브르’호가 도착한 시간 즈음에 ‘커레예츠’가 닻을 올리고 보급품을 보충하기 위해 지푸로 출발했음을 추가로 알려드립니다. 어제 제가 해군 중령으로부터 받은 보고에 따르면 순양함은 14일에 제물포 항에 돌아올 것이라 합니다.
일본인들이 아산에서 거둔 작은 승리와 기선 ‘코우신(Коу-син)’과 관련된 사건 이후에 일본과 중국 군대 사이에는 어떤 전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이 싸우게 되는 끔찍한 상황은, 이들 사이에 아직 평화가 존재하고 있지만, 전쟁으로 나타나게 될 이후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의 군대는 수적으로 15,000명에 달하고, 조선 평안도의 북서 지방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던 분견대는 이동해 이미 대동강(혹은 평양강) 남쪽에 도달했습니다만 최근의 소식으로 판단해 보건대 다시 강의 오른편 연안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의 주력군은 한강을 따라 보급을 해가며 서울 북쪽으로 45베르스타를 지나 임진강 연안을 따라 배치돼 있습니다. 이 작전 기지는 이 물길을 따라 보급품과 식량을 제물포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선두 부대는 북쪽으로 움직이면서 중국의 군대와 소규모 전투를 해왔고, 평양에 있던 조선 분견대들과의 작은 전투 끝에 임진강 방향으로 퇴각한 상태입니다. 이 지역에 있는 일본 군인들의 수는 약 35,000명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예전처럼 서울에서는 17명의 조선인 고관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일본인들이 강요한 개혁의 도입에 관해 심의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소규모 정당의 활동가(파르티잔)들이 일본 군대의 존재 덕택에 이 심의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나라에는 완전히 무정부상태가 만연해 있고, 조선 민중이 일본에 대해 점점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격노와 혐오감을 볼 때, 심의된 개혁을 습득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들어 조선인의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조선인을 경계해야 할 만큼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일본과의 불행한 사태가 분명히 발생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존경과 충성을 표합니다.
베베르(Вебер)
대원군은 일본신문들에서 확신하고 있듯이 섭정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18.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0, лл.83~83об.
태평양 함대 사령관 귀하
보고서
우리 군사 대표자인 보각(Богак) 대령이 히로시마 시로부터 받은 전신을 각하께 보내드립니다. 제가 받은 전문의 원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15일 평양 근처에 주둔한 일본 군대는 격렬한 전투 후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그 지역을 장악했으며, 수많은 중국인들이 살해되었고, 그들의 장군 (Tso-pao-kues)를 비롯한 많은 중국인들이 사로잡혀 엄청난 양의 군수품과 식량이 일본인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약 20,000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모두 죽고, 오직 한 두 무리만이 일본의 경계 구역을 넘어 도망쳤다. 일본은 총 11명의 장교와 260명을 잃었다.” 서명:모우라토 이 카미오(총참모본부 부본부장, 전 중국 주재 일본 군사 대표/Mourato u. Kamio)
이렇게 조선에 주둔한 중국 군사력은 파괴되었습니다. 일본은 만주에서 전쟁을 위해 대대적인 준비를 하고 있고 제가 이미 각하께 보고했듯이, 동절기 주둔을 위해 조선으로 식량, 동절기 의복, 막사 같은 군수품 수송을 위해 많은 쿨리(막노동자들)와 짐마차들을 대거 보냈습니다.
슈반크(Шванк)
대위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19.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0, лл.85~86об.
태평양 함대 사령관 귀하
보고서
저는 해군참모본부 부총장으로부터 받은 전신에서 “어디에서 군사활동 지역에 관한 소식을 보다 신속히 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도쿄를 추천합니다. 그 이유는 이곳으로 군사활동에 관한 모든 정보가 집중된 다음에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곳에 도착한 이래 아직 일본과 청국 사이에 단 한 번의 전투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청국의 함선은 수치스럽게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어떤 손실도 없이 조선에 상륙 부대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현재 평양 아래쪽에 모여 있는 청국 군대의 궤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1과 ½ 사단 규모의 일본 군대가 청국 군대를 세 방면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즉 첫째 부대는 원산 방면, 둘째 부대는 황주(Hwan-ju)방면, 셋째 부대는 충화(Chung-wa)방면입니다. 둘째와 셋째 부대는 이미 어제 대동강을 건너 이동하고 있었던 청국 군대와 교전을 벌였습니다. 청국 군대는 일본에 의해서 격퇴 되었습니다. 오늘 또는 내일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질 예정입니다. 일본군대의 향후 이동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그들은 진군을 준비할 것입니다. 한 장군이 오늘 연병장에서 2천명의 노동자를 시찰했습니다. 이들 노동자는 2인 1조로 군대의 보급을 위해서 작은 짐수레를 끌고 있었습니다.
벌써 한 달 넘게 함대에서는 단 한 번의 사격도 없었습니다. 신문의 특파원들은 모두 뤼순과 웨이하이웨이 항에 대해서 일본이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함대는 배의 교통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폰 하넥켄(фон-Ганнекен) 장군이 웨이하이웨이 항의 총독이자, 팅(Ting) 제독의 부관으로 지명되었다는 뉴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청국 신문의 소식에 의하면 5-6명의 미국인이 청국 함대에 근무하기 위해서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제 청국 함선이 은폐지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는 영국 해군제독이 웨이하이웨이 항에서 오전 4시경 일본 해군제독에게 인사의 예포를 쏘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영국제독이 일본 배에 가까이 있었던 청국 기선의 주의를 끌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완전히 입증되었습니다. 저는 일본 외무부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일본 해양부의 공식 보고서를 받았다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도쿄에서 청국과 일본 주재 러시아 군사요원인 보각(Вогак) 대령을 만났습니다. 그날 그는 일본 군대의 이동을 따라서 떠났습니다.
여기에 각하께 일본과 영국 사이에 체결된 교역과 항해에 관한 조약을 첨부합니다. 이 조약은 향후 5년간 효력을 발휘합니다(21조를 보십시오). 영국은 20조에서 자국 영사의 사법권을 포기합니다.
슈반크(Шванк)
대위
각하의 명령을 받은 함대가 석탄 및 다른 보급품을 제공받을 때 일본의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지금 받았습니다. 석탄만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나가사키에 있는 메스(Месс) 시에서는 1,000톤을 보급 받을 수 있고, 납품업자에 따르면 요코하마는 석탄보급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20.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0, лл.117~118.
태평양 함대 사령관 귀하
일본 전함의 활동과 보급품 운송에 관한 몇 가지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함선을 파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되는 평양, 뤼순(Порт Артур) 항, 지푸 항을 거쳐서 어제 저녁 도착한 포함 ‘코레예츠’의 항해 사령관은 저에게 해양부 장관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오라는 제물포로부터 오늘 접수한 전신에 대해서 보고했습니다. 배를 출발시키면서 저는 먼저 각하께 상륙 부대의 최고 지휘관 스무드니츠키(Смудницкий) 대위 및 다른 장교들이 보여주었듯이 ‘코레예츠’와 함께 맡겨진 상륙 임무가 잘 수행된 것에 대해 극도의 만족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와 더불어 저는 상기한 임무를 수행하고 그의 항해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를 작성한 것에 대해서 게닌수(Генинсу) 중령의 역량을 이 자리를 빌려 표현하고자 합니다. 항해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 그는 직접 각하께 보고서를 작성할 것입니다.
대포의 포성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훨씬 더 북쪽까지 울렸고, 전투 지역은 중국 본토로 옮겨갔습니다. 일본인들은 뤼순 항을 공격하려는 목적으로 엘리오트(Эллиот) 섬 북쪽의 어딘가에 상륙했으나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았고, 일본 총독이 오늘 저녁에 퍼뜨린 뉴스에 따르면, 이 항구는 현재 이미 그들의 수중에 장악된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에서 우리의 처지는 결코 위험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조선인들이 선포한 개혁은 거의 시행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질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고, 나라에는 무정부상태가 초래되었으며, 폭도들이 도처에서 동학비(東學匪/Тунхаби)를 따르고 있습니다. 일본인들과 조선인 가운데 일본 숭배자들에 반대하는 공공연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그들은 힘이 없기 때문에 현재 살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제 저녁 서울에서는 조선-일본 정당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인 김학우가 살해당했는데, 이것이 정치적 범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므로 제물포에 있는 전함이 더 오래 머무를 필요가 있으며 첩보 업무를 위한 상륙부대가 필요합니다.
대리공사
베베르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21.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0, лл.120~124об.
기밀
첨부문서 3부
티르토프 각하외 2명
3명 이외에는 기밀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귀하
기선 ‘블라디미르’ 호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출발하려는 상황에 따라 저는 서둘러서 각하께 최근 전투 내용을 보고합니다.
일본 군대가 평양에서 거둔 결정적인 승리 때문에 일본은 모든 조선의 영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타루토우(Та-лу-тоу) 섬 근처에서의 중요한 해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청국 함대의 완전한 궤멸로 끝나지 않았지만, 청국의 해군 활동력을 오랫동안 위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육전과 해전의 승리 때문에 일본이 신속히 전투 활동을 청국 영토로 옮겨 베이징으로 진입할 목적으로 페스카도로 군도(Печелийский остров) 서쪽 해안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위의 전투를 수행한지 거의 한 달이 흘러갔고 지금까지 일본 측에서는 새로운 결정적인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전함과 보급선은 몇 번인가 웨이하이웨이, 다롄(Талянван), 뤼순 항과 심지어 먀오타오(Мяо-тао) 섬 서쪽 지역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규모 활동은 어떤 실질적인 결과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곳에서 들은 소문에 의하면 일본 전함과 보급선 대다수가 압록강(Ялу) 하구에 가까운 조선 해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기습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징표라고 주장합니다.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일본이 겨울에 전투를 수행하면 페스카도로 군도(Печелийский остров)가 부분적으로 동결됨으로써 일본군대에게 어려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을 격퇴할 수 있는 청국정부의 힘이 극도로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다음해 가을 베이징으로 군대를 진격할 것 같습니다. 최정예 청국 군대가 조선에서의 초기 전투에 파병되었는데, 평양 근처의 전투에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청국의 현재 군대 상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일본군대가 칠리 해안에 상륙해 베이징으로 이동할 경우 청국 내륙 지방에서 동원될 수 있는 병사는 대략 13만 5천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들 청국 병사 중 상당수가 무질서한 무리(강도 또는 부랑자)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청국정부는 이들 전부를 전투지역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쓸모없는 화승총, 창, 활, 소총으로 무장한 군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청국정부가 소유하고 있다는 거대한 현대식 무기 창고가 대부분 오직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현재 해외에서 무기를 밀수입하는 방법이 남아있지만 최근에는 거의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이런 와중에 텐진을 방문했을 때, 저는 그곳에서 청국 주민과 외국인 사이에서처럼, 주민과 지배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강력한 적대감을 알아챘습니다. 텐진의 상황처럼 베이징에서도 다가오는 겨울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할 것입니다. 굶주리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규율부재가 문제입니다. 이러한 규율부재는 평화로운 청국 주민과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피하기 어려운 위험 요소입니다. 만약 일본이 청국으로 진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북부 항구가 결빙되면 남부 항구에서 수도로 가는 쌀 수송로가 완전히 차단될 것입니다. 쌀의 부족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만약 청국정부가 훨씬 더 많은 양의 쌀을 조달하기 위해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병사들 사이에서, 다음에는 베이징과 텐진의 굶주린 주민들 사이에서 강력한 봉기가 일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부녀자를 포함한 모든 유럽 사람이 베이징에서 떠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텐진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자국 전함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정도 신변의 보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 전함의 체류가 틀림없이 지금까지 이 도시의 평온을 유지하게 해준 요인이었습니다. 앞으로도 포함이 동절기 내내 텐진에 남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저는 텐진에 이틀 이상 머무르지 않고 베이징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 이유는 수도의 정세를 신속히 파악하고, 청국에 남아있는 외국인에 대한 조치를 위해서 다른 외국공사와 함께 상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저는 극동 지방의 군사·정치적 사건을 추적하기 위해서 가장 유리한 위치인 텐진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입니다. 만약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곳에서 동절기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육군 또는 해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에 대해서 저는 각하께 전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저는 각하께 은밀한 출처에서 나온 매우 흥미로운 부록 3건을 이 편지에 첨부합니다. 여기에는 9월 5/17일 해전에 대한 자세한 보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3건 가운데 앞의 2건은 이미 ‘카오민’ 호 사건에 관해서 전 독일 장교인 폰 하넥켄이 전투가 있은 후 몇 주 동안 청국 해안경비대 책임자에게 보낸 공식 보고서입니다. 그는 청국 해군 장성 틴(Тин)이 부상을 당하자 전투 시에 청국 전함을 적극적으로 지휘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 문건은 베이징 주재 독일 대사관 서기관(그는 독일 군사요원입니다)인 남작 슈테른부르크(Барона Штернбург)의 답장입니다. 비록 이 정보가 그 출처를 볼 때 다소 편파적이긴 하지만, 슈테른부르크는 전투 직후 직접 뤼순 항에 있는 독일 순양함 ‘일티스’를 방문해서 현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상기한 문건들을 극도의 보안 속에 각하께 전해드리며 상기한 문건의 출처와 그것의 유지에 관해 보안을 지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를 빌려 존경과 충성을 보냅니다.
추신:시간이 충분하지 못함으로 인해 폰 하넥켄의 답신 번역본을 동시에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작 슈테른부르크(Барона Штернбург)의 답신만 첨부될 것입니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22.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0, лл.131~135об.
태평양 분견대 총사령관 귀하
최근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몇 가지 정황, 서울에 있는 일본 군대의 출현과 동태에 관한 정보를 보내드립니다.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듯이 올 봄 조선 전라도 지방의 주민들 일부가 압제적이고 탐욕스러운 지방 관리에 반대해서 봉기했습니다.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서 조선정부는 처음에 지방 순검에게 반란자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1,000명의 순검들은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지식이 미천한 5,000명의 반란자(동학군-역자 주)는 이들 순검을 쉽게 격파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직후 조선정부는 봉기 지역으로 1,500명의 훈련받은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들 또한 반란자를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조선정부는 청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2,000명의 군대가 청국에서 파병되어 아산시 근처에 상륙했습니다. 그러나 이 군대는 반란자들과 전투를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반란자는 몇 번의 전투에서 조선정부의 병력을 물리쳤지만, 청국 군대가 조선에 파병된 사실을 알게 된 후 해산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조선 외무부는 조선주재 외국 공사들에게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공식적으로 알렸습니다.
청국 군대의 조선파병을 파악한 일본정부는 이러한 경우에는(그들과 청국 정부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 협약을 기반으로) 자신의 군대도 서울에 파병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6월 29/7월 11일에 전 일본 공사 오토리(Отори, 大鳥圭介)를 제물포 항에 있던 300명의 해군과 4문의 대포를 상기한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3일 후에 제물포로 돌아와 일본이 보낸 800~1,000명으로 구성된 보병 대대로 교체되었습니다. 군대를 파병하는 목적에 대한 나의 질문에 대해서 오토리는 일본군대는 일본 공관과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파병되었다고 그럴듯하게(그의 표현에 따르면) 설명하였습니다. 7월 6/18일 저는 일본 공사로부터 제물포에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3,000명의 일본 군대가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 군대는 7월 9/21일까지 추가로 제물포와 서울에 도착해서 8,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주재 외국공사 단장은 우리에게 무질서의 종결을 알려주었습니다. 서울의 주민들이 불안해하고, 민중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많은 사람이 수도에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을 파악한 조선 주재 외국공사 단장은 7월 12/24일에 다시 한 번 외국 정부들에게 고종의 공식적인 지시를 다음과 같이 알렸습니다. 조선 남쪽에서 폭동의 중지 및 서울과 다른 지방에서 무질서의 발발 가능성을 보면서, 청국과 일본 사이의 협약에 따라서 조선에 주둔한 외국 군대의 철수를 기대합니다. 조선 국왕은 현재 상태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외국 열강의 협력을 희망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지체 없이 전신으로 이러한 내용을 우리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동시에 이에 관해서 저는 미국, 프랑스, 영국의 공사와 함께 청국과 일본 공사에게 단체로 통보했습니다. 이러한 단체 활동에 나중에 독일 대표도 참가하였습니다. 오토리 공사는 자신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아무 답변도 우리에게 줄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청국은 일본 군대가 철수한다면 그날로 자국 군대를 철수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사이에 일본은 제물포와 서울에 계속해서 군대를 충원하였습니다. 현재 수도인 서울에 3천명의 병사가 증강되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만명에서 1만 2천명에 달합니다. 이들 병력에는 30~40개의 대포 및 속사포가 있습니다. 물론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수치는 결코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일본 군대는 서울과 제물포 사이에 상당히 넓게 분포해 있고, 야영지가 별로 없으며, 대부분의 병사가 개별 민가에 퍼져서 숙박하고 있습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위에서 제가 쓴 군대 인원의 수치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울은 남쪽과 남서 방면으로부터 일본 군대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모든 봉우리들에는 초병이 서 있고 이 가운데 가장 큰 봉우리인 두 개의 지점에는 저녁마다 포성 신호가 교환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이 서울을 포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저는 ‘코레예츠’ 함장에게 측량을 위해서 장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며칠 후 해군대위 레베데프(Лебедев)는 서울 주변을 여러 차례 승마를 통해서 정찰하면서 저에게 친절하게 보고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해군대위 레베데프는 객관적으로 상기한 것들을 확인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이것 이외에도 서울로부터 약 4베르스타 정도 떨어진 평원에 48마리의 기마 포병이 6문의 대포와 포수를 가지고 숙영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여기저기에 보병 숙영지가 있는데, 그곳에 있는 참모본부가 야전 교신을 통해서 서울에 있는 일본 공사관과 공조한다고 합니다.
강가를 따라 제물포까지 이동하는 3척의 작은 일본기선 중 단 한 척도 개인적인 짐이나 승객을 실어 나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기선이 일본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레베데프 중령은 자신의 포수 가운데 한 명으로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정부가 최정예 군대를 조선에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의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은 청국이 조선정부에게 새로운 간섭을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압력을 수행한 것입니다. 일본은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언제든 청국 군대와 함께 철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세 번째 날 저녁에 조선 주재 외국 공사가 고종으로부터 ‘비밀’ 전문을 받았습니다. 전문에 따르면 고종은 신속히 일본 군대가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오토리 공사는 지금까지 군대철수를 거절했으며, 고종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본이 행정, 교육, 사법, 군대, 재정 등의 모든 개혁을 직접 추진하겠다고 합니다. 고종은 계속해서 저항했습니다. 이러한 저항은 자국의 군사력 및 열강의 지지 등이 담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현재 일본 공사와의 회담을 위해서 조선정부는 ‘소위’ 특별 대사를 임명했으나, 제가 보기에는 결과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이러합니다. 만약 유럽 열강들 가운데 하나가 조선을 도우러 오지 않는다면, 몇 차례에 걸쳐 조선과 일본의 회담이 진행된다 할지라도 조만간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청국이 조선에 군대를 보냈지만 청국정부도 사태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청국은 조선에서 이미 자신의 가족을 고향으로 보내고 있고 남아있는 청국인도 이러한 조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절반 가량이 수도를 떠났습니다. 물가는 비정상적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유럽인의 거주지는 곧 하나의 안전구역으로 제한될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서 중요한 일이 발생한다면 지체없이 이에 대해서 각하께 전신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공사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24. РГАВМФ, ф.650, оп.1, д.111, лл.41
태평양 함대 사령관께
남우수리 국경군사위원이 5월 7일 제268호 보고서로 저에게 전하기를, 가슈케비치 만에 항구를 여는 문제가 가능할 것 같다고 합니다.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그곳에 들어오고 나가는 물건들을 놓아두기 위한 창고와 다른 건물들을 지으려고 건축자재들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각하께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군주지사, 소장
운테르베르게르
부서장 ________________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29. РГАВМФ, ф.909, оп.1, д.62, лл.4~7
해군대장 공작 각하께
사본
태평양과 중국해 함대장 각하의 지시로 폐하께 보고 드립니다. 5월 17/29일 정오에 제가 지휘하고 있는 코르벳함의 닻을 올리고 하코다테 항을 출발하여 24-25일 밤 한반도의 남해안에 있는 부산항(영국 지도에는 ‘추산(Чусан)’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에 도착해서, 커다란 정박항에서 밤을 보내고 동이 틀 무렵 해만의 깊은 곳으로 이동하여 바로 일본군 정박항 반대편에 닻을 내렸습니다. 저는 영국인 함장 보르드의 함대가 만든 훌륭한 지도를 사용했습니다. 이 정박항에 오후 4시까지 머물면서 저는 이 해만에 그 어떤 다른 국가도 정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노젓는 배로 해안 전체를 돌았지만 그 어떤 흔적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본인들과도 조선인들과도 직접 교류를 가졌습니다.
신선한 식량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이곳에 오면서 저는 양측으로부터 최고의 환대를 받았으며 그 짧은 시간 내에 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받았습니다. 저는 일본총독에게 갔다가 예전에 쓰시마에서 잘 알고 지낸 히로타 토메나쇼를 만났습니다. 그는 심지어 제가 쓰시마 섬에 체류하던 기간에 같이 코르벳함에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사전에 통보를 하고 아침 9시에 그를 방문했고 환대를 받았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매우 많았고 그 사이에 저는 이곳에 유럽 선박이 온 적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선해안 근방에 유럽인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없는지를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보르드 함장이 왔던 1860년 이후에는 아무도 부산에 오지 않았다고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만약 유럽인들이 조선의 육지를 방문했다면 토착민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히로타는 자신의 작고 소박한 소유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저에게 싸주었고 다른 것들은 조선인들에게 통보를 했습니다. 조선 관리들은 자신들도 코르벳함을 방문하려 한다고 일본 총독에게 전했습니다.
일본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저는 약속된 시간, 즉 낮 1시에 총독도 코르벳함에 같이 오라고 초대를 했지만 그는 병후라 몸이 안 좋다고 거절했습니다. 1시부터 4시까지 조선인 촌장들이 많은 수의 일행을 거느리고 저에게 왔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 감탄을 했고 매우 친절했으며 우리에게 가져다 준 채소들에 대한 대가로 돈을 주려했지만 절대로 받지 않았습니다. 조선 남쪽에서 유명한 호랑이 가죽을 준비할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다시 오라고 초청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가능한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저는 심지어 그들을 코르벳함에 태우고 만을 따라 돌았고 그런 다음 그들은 아주 멀리 사라질 때까지 속이 비치는 커다란 모자와 부채를 흔들었습니다. 그들 중 반수는 일본말을 잘하는 편이었고 한 명은 일본사람처럼 말을 잘했습니다. 그래서 설명하기가 매우 쉬웠는데 그들이 저에게 다른 배가 왔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1859년에 한 번, 1860년에 두 번 왔었는데 못마땅한 듯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이 항해를 하면서 노끈에 단 무언가를 물에 던졌고 해안가를 걸으면서 모두 채찍을 튀기며 다녀서 사람들이 맞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의심할 바 없이 측량을 하던 보르드 함대였을 것입니다. 대화는 모두 매우 희극적이었습니다. 가장 나이든 관리가 우리의 공손한 요청과 더불어 러시아인에 대한 진실된 애정을 표하고, 우리 항로에 자신들의 땅이 놓여있기 때문에 신선한 식량을 가지러 이곳을 방문해주기를 바란다는 이야기와, 또한 영국인들이 했던 것과 같은 행동들을 우리들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특히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채찍을 사람들 쪽으로 휘두르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내용의 장황한 연설을 했습니다.
약 150년전, 조선과 일본의 전쟁 이후, 일본은 군인 200명의 수비대와 하인, 그리고 상인 몇 명을 부산 만에 보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던 쓰시마 공작을 통해서 조선과 교역할 것을 조약으로 정했습니다. 조선의 주요 수출품목은 순도가 낮은 금과 은, 호랑이 가죽, 소의 가죽과 뿔, 돌투성이 쓰시마에 필요한 식량용 쌀이었으며, 쓰시마 인들은 조선에 비단 직물과 붉은 동을 공급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그리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들은 경치가 좋긴 하지만 흙벽으로 둘러싸인 둘레가 반 베르스타가 안 되는 장소에 갇혀 있고 그곳을 나올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돛단배를 위한 작은 제방이 있기는 하지만 군사적인 방어시설은 전혀 없습니다. 조선인들은 활과 도끼 이외의 무기는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일본법으로 조선인에게 절대로 판매하지 못하게 되어있는 일본식 검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잔잔한 바람에 항해를 한 후 5월 30일 밤 2시 상하이 항에, 출항 준비를 마치고 오늘 우편물을 싣고 하코다테로 출발하는 쾌속범선 ‘라즈보이닉(Разбойник)’ 호 근처에 순조롭게 닻을 내렸습니다. 저는 영국장군 호프와 만났고 프랑스 장군 프로테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정찰을 하던 중에 폭도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콜레라와 천연두가 한 달 정도 전에 도시에서 발생했고 비록 지금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군대와 함대에서는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여 더운 날씨가 잦아들 때까지 당분간 폭도들에 대한 공격행동은 연기되었다고 했습니다. 폭도들이 상하이로 공격행동을 하는 것은 이곳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폭도들에게 강탈당한 불쌍한 중국인들이 상하이로 들어오는 숫자는 여름동안 500,000명에 달하고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없이 길에서 지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질병이 확산되는 원인이었고, 호프 장군은 이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실행했습니다.
이에 황제폐하께 보고 드리는 바입니다.
서명:추진식 코르벳함‘포사드닉(Посадник)’호의
함장
, 전속부관
비리레프
사본과 동일:범선 함장, 장군의 부관, 해군중위 아르세네프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30. РГАВМФ, ф.1335, оп.1, д.3, лл.1~3
1등 순양함 '아드미랄 코르닐로프' 함장께
키타예프
중위
보고서
가슈케비치 만의 해안선을 따라 요새가 있는지 조사하라는 각하의 구두 지시를 수행하면서 저는 서쪽 정박항의 만으로부터 바센스키 곶까지 가슈케비치 만의 동쪽 절반을 돌았고 요새는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상세지도 제316호(1887년 시부츠 호가 기록한 가슈케비치 만 지도)에는 해안선에 위치해 있는 조선마을이 몇 개만 나와 있어서 붉은 잉크로 보충한 지도에 새로 발견한 마을들이 있는 곳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이 이외에도 붉은 잉크로 제316호에 없던 바위들과 작은 만들에서 찾은 2개의 수심도 표시했습니다. 제316호 지도에 나와 있는 호코르포클라(Хокорпокла) 호수와 바다를 연결하는 지류는 이 시기에는 없었습니다. 이상의 사실을 각하께 보고 드립니다.
키타예프
중위
№ 27
1894년 5월 27일
가슈케비치 만 동쪽 절반 지도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2. РГАВМФ, ф.9, оп.1, д.5, лл.78~82
주거 공간이 협소하고, 춥고 습한 기후 속에서 순항에 매우 적합하지 못한 생활 조건입니다.
제물포(Чемульпо) 주둔선단
본인의 금번 보고서 시작 부분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전함 ‘그레먀쉬(Гремящий)’호가 제물포 항에 정박해 있었으며 이곳에서 8월 15일까지 체류했습니다. 교련과 훈련은 약 9주 동안 계속된 장마 기간 동안 기후조건이 허락할 경우, 선상에서 가능한 한 연간 프로그램에 따라 실행되었습니다. 강우와 함께 높은 외기 온도에서 처음으로 짙은 안개가 관측된 것은 6월 14일이며, 청명하고 건조한 날은 8월 2일에 처음으로 관측되었습니다. 이후 변덕스러웠던 기후는 10일이 더 지난 다음에야 안정되었습니다. 6월 10일 전함은 외해로 출항하여 2차 예비사격 및 야간 예비사격을 실행했으며, 11일 정박지로 귀항했습니다.
한국에 관해 보고를 드리면, 러시아의 군사 교관단과 고문을 해임함에 따라 한국정부는 이전과 같이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 처해있습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들을 민감하게 예의주시하였으나, 다른 이익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던 서구 열강과 미국은 일시적으로 한국문제로부터 후퇴하는 듯이 보였으며, 제물포 정박지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분함대를 대신하여 한 척의 전함만을 정박시켰습니다. 서울의 정치적 삶은 해외 열강 대표들의 자질구레한 음모들로 변질되었으나, 상기와 같은 모든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일본은 재차 개항된 항구에서 토지를 매입하고, 천연자원의 채굴이권을 획득하며, 자신의 생산물로 한국을 점령하면서 식민지화를 추진함으로써, 서서히 그러나 꾸준하게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6월 30일 서울에서는 현재의 황제를 폐위하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그의 둘째 아들을 즉위시키려는 음모가 확인되었습니다. 모반자들은 체포되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사형에 처해지고, 일부는 유배되었으나, 3명은 일본으로 도피했는데,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8월 10일 상선을 이용하여 이토(Ито) 후작이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방문 목적은 일본 무역회사들의 요청에 따라 중국과 한국의 시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방한에 맞춰 한국 정부가 상당한 수의 탄창식 소총을 일본에 예약했다는 소문이 신문지상에 떠돌고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이번 방문이 그리 평화적인 것만은 아니며, 다른 목적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는 일본조계지로 변질된 제물포에서는 성대한 환영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도시는 깃발과 푸른 나무로 꾸며졌으며, 이토가 거주하는 호텔은 다른 방문객을 받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은 개항장인 진남포(Цинампо)와 목포(Мокпо)에 재차 영사관 부지를 조차했으며, 그리고 대리공사의 요청과 본인의 허가에 따라 보트 편으로 목포를 방문한 러시아 장교는 영사관 부지를 측량했습니다.
상기 장교는 귀한 직후 목포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부지 대금을 한국 정부에게 일시불로 지급한 것 외에도 매년 조계지 관할부서에 100 평방미터 당 2 달러를 지불해야합니다. 이렇게 지불된 금액은 도시정비에 지출될 것입니다. 조계지 관할부서는 영사, 현지 감리(관찰사), 그리고 외국인 거주자 중에서 선출된 이들로서 구성됩니다.
현존 법규에 따르면 실제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즉 일본인 영사를 제외한 타국 영사는 아직 주차(駐箚)하고 있지 않으며, 관리註 001는 목포에서 30 마일 떨어진 주도註 002에 거주 중입니다. 외국인은 1,100명의 일본인과 무역회사의 대표로서 계속해서 출장을 다니는 한 명의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포항은 모든 부지를 매입한 일본인의 수중에 실질적으로 장악되어 있으며, 일본인들은 도시를 건설한 뒤 일본인 공사가 그 도시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모든 영구 개항장에서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8월 6일 대리공사는 왕복문서를 통하여 내무대신으로부터 “양력 8월 1일 일본전함 4호의 사양(Cа-ян)도 내항과 관련하여 본 전함의 함장은 내항 원인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그곳에 부대장이 기다라고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조회를 통보받았습니다.
우리 대리공사는 이런 사실을 통보하면서 목포와 사양도에 무슨 일이 있는지 다녀올 것을 요청했습니다.
한국 내무대신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사양도는 전라도 돌산군에 속해 있으며 목포 연안으로부터 직선거리로 140리(4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도에는 그 섬이 존재하지 않지만, 대흑산군도(Mackau group)에 속하는 섬들 중 하나로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함의 함장께서는 “서둘러 목포로 향할 것”이라는 대리공사의 전문을 수신한 8월 9일에 본인에게 전문을 발송하면서 정찰대를 파송할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원정은 유보되었습니다.
본 문제와 관련하여 부수적으로 말씀드리면,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에 정박 중인 우리 전함이 일본과 어떤 오해가 발생했을 경우 어떤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음을 설명 드렸습니다.
함장은 대리공사의 왕복문서를 수령한 후, 본인에게 즉시 전문을 발송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전신소는 훼손되어(이것이 한국 전신소의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일본 전신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암호로 전문을 보냈으며, 전문 검토는 가장 면밀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감독관은 전문을 건넨 후,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하여 일본인 전신소에서 알파벳을 한 글자씩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나 전문은 완전히 뒤엉킨 상태로 발송되었습니다. 이에 함장은 그런 행위를 의도적인 것으로 판단하셨습니다. 우리 공사관원들 역시 함장의 의심이 근거 있는 견해로 밝혔습니다. ‘그레먀쉬’호와의 교대를 위해 본인이 파선한 ‘시부츠(Сивуч)’호가 8월 13일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그레먀쉬’호는 주둔 업무를 인계한 후 동월 15일 나가사키로 출항했습니다(부록 XLVI).
‘시부츠’호의 함장은 제물포에 도착함과 동시에 서울로 항하여 대리공사를 알현했습니다. 그와 동행했던 함선 군의관이 공사관 수비대인 카자크들을 진료한 바, 그들 중 절반은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거주환경으로 인하여 전신에 습진에 걸려 있었습니다. 군의관의 군사보고서 사본은(원본은 여기에 동봉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부대 지휘관 볼코프(Волков) 소장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볼코프는 광둥반도(Квантунский полуостров)에 배치된 부대 중에서 서울로 파병된 카자크의 경리 및 전투부대에 대한 전적인 지휘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8월 20일 조선왕조 개국 506주년 기념식과 한국의 독립선포 2주년 기념식이 거행 되었습니다.
대리공사와 본인은 본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토(伊藤博文) 후작 역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토 후작은 8월 18일에 서울에서 제물포로 출발할 계획이었으나, 4일 더 이곳의 호텔에 머무르면서 22일자 즈푸행 선편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8월 29일 한국 황제의 생신을 맞아 함장은 장교 1명을 동반하여 황제를 알현했습니다. 우리 영사관원들은 프랑스 영사관원들과 함께 입궐했습니다. 서울주차 일본대리공사는 공사관 관원 및 서울에 주둔 중인 군부대의 장교들을 수행원으로 삼아 입궐했습니다.
서울을 처음 방문한 함장은 궁궐의 도처에서 확인된 불결함과 무질서는 물론, 외국 공사들과 외교부 관원들이 동시에 국왕을 알현하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상기에 언급된 모반의 음모로 인해 신뢰할 수 있는 경호를 황제에게 제공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군대는 한국식 규율 때문에 러시아 군사 교관단이 출국하자 실로 순식간에 원래의 상태로 회귀해 버렸습니다.
8월 19일 서울에 경찰학교를 설립할 것이며, 그들 중에서 선발된 40명이 황제의 개인경호에 투입될 것이라는 소식이 서울의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본 학교의 교관은 일본인으로 예정되었으며, 이토 후작이 본 계획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본 계획은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미국인 그레이트 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에게 다양한 국적에서 40명을 선발하여 경호원을 조직하라는 임무가 하달되었습니다.
인성이 실로 의심스러운 그레이트 하우스는 서로 다른 어중이떠중이들 중에서 결국 40명을 선발했으나, 우리 함장이 우연히 일부 구성원을 목격한 바에 따르면, 그들 중에는 전직 요리사였던 프랑스인도 한 명 끼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구성원은 상선의 선원들로서 국적 불분명자들이며, 그 중 두 명은 리바바註 003 출신의 러시아 공민입니다. 한 사람은 에르네스트 레들리흐(Эрнест Редлих)라는 이름을 가진 소시민이며, 다른 한 사람은 러시아 장교와의 만남이 그 자신에게 달갑지 않았던 듯 주도면밀하게 회피하다가 서둘러 연안에 상륙했습니다.
후일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열강 대표들의 항의를 고려하여 상기의 잡다한 사람들로 구성된 부대를 황제의 친위대로 전환시키려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부록 XLVII).
9월 3일 상기 전함은 본인의 전훈에 따라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Дмитрий Донской)’호와 수뢰정들을 영접하기 위해 부산을 향해 출항함으로써, 제물포는 당분간 주둔 선단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즈푸
산둥 반도(Шандунский полуостров)의 상황과 관련하여, 즈푸의 정박지를 임시 차용 중인 전함들로부터 접수한 정보는 현재의 사건에 대해 보다 생생하고 현재적인 것으로서, 이전의 분함대 항해기록에서 본인이 보고 드렸습니다.
註 0011) 한국의 관리-역자 주.註 0022) 나주로 추정됨-역자 주.註 0033) Либава:서울주차 초대 러시아대리공사 베베르가 출생한 도시-역자 주.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3. РГАВМФ, ф.9, оп.1, д.6, лл.46/58об.~59об./61~62об.
…
12월 5일 한국 북부의 삼림자원을 기록하기 위한 장비를 갖춘 러시아 탐사대(민간)가 제물포에 내항했습니다. 본 탐사대원 중에는 외과의사 아키예프(Акиев)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자상한 도움을 받아 환자에게 깁스를 해주었습니다.
상기 탐사대는 이미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완수한 상태에서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주차 러시아대리공사가 본 탐사대원들을 가장 근접한 러시아 ______ 항구로 급파하기 위해 저에게 _______ 이용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본인은 우리의 군사 교관단과 재정고문이 한국으로부터 철수한 이후, 그곳에서 진정되고 있었던 혼란에 관하여 보고서에서 이미 언급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 어떤 다른 영향력이 형성되지 않았으며, 외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황제는 자신의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일본 한 국가만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눈에 덜 띄는 수단을 선택했습니다. 즉 일본은 한국의 황제와 대신들을 노골적으로 조정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으나, 한국의 산업을 점령하고 천연자원을 착취하면서 한국을 서서히 자신의 식민지로 변화시키려고 은밀하게 활동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다른 사안에 관심을 돌리고 있던 기타 열강들은 서울에 주차 중인 자국 대표의 이름으로 현 시점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구축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이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는 영향력을 구축하려는 다른 국가의 의도를 방해하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국 수도에서의 정치적 삶은 수없이 많은 사소한 음모가 얽혀 있는 형태이며, 이들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황제의 정부는 완전한 와해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근 일주일마다 바뀌는 대신과 고관들은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전혀 무력한 상태이며, 정부 체제에 대한 신뢰가 미약하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앞선 보고서에서 수차례에 걸쳐 언급한 바 있는 ‘독립협회’註 004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손상되었습니다. 10월 22일 뤼순으로부터 정박지로 향하여 24일 제물포에 내항한 전함 ‘시부츠’호는 그곳에서 단 한 척의 전함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11월 7일이 되어서야 일본전함 ‘초카이(Чокай)’호가 내항했으며,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순양함 ‘헤르미오네(Hermione)’호가 ‘초카이’호와 합류했습니다. 영국 순양함이 내항한 이유는 서울에서의 혼란이 심해지고 있음을 고려하여, 외국 공사관의 보호를 위해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것입니다. 언제나처럼 혼란은 새로운 대신들을 임명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독립협회의 회원들에 의해서 발생했으나, 외국의 외교대표들이 국왕 알현을 요청하며, 폭동을 중단시킬 수 있는 방책의 입안을 원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순양함 ‘헤르미오네’호는 영국 공사관의 보호를 위해 해병대원 6명을 파견했으며, 18일에 도착한 ‘이피게니아(Iphigenia)’호는 경비대로 16명의 추가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상기 언급된 국왕의 알현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둘러 호출된 함장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1월 14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황제는 ‘독립협회’에 대응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하기로 마침내 결정했으나, 그의 훈령은 날을 거듭할수록 거리낌이 없어져, 군사력을 고려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장 근접한 시골마을로부터 짐꾼들을 호출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협회 회원들을 해산시켰습니다. 이런 대응책은 인명 피해를 야기했으나,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약탈과 알려지지 않은 고관의 저택들이 파괴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예정되었던 알현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여행을 위험하게 만들었던 광포한 짐꾼들이 수도에서 물러난 뒤 함장은 제물포로 귀환했습니다. 순양함 ‘이피게니아’호는 정박지에 약 10일간 머무른 후 서울이 상대적으로 안정이 정착되자 웨이하이(Вей-ха-вей, 威海)로 귀항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평안도의 주도인 평양의 항구는 진남포(鎭南浦)입니다.
목포와 마산포에 대해서는 본인이 이미 수차례에 걸쳐 보고서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분함대 소속으로 상기 항구를 내항했던 각 전함의 함장들이 보고한 것에 비해 공사관의 정보에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함의 제물포 정박에 관한 자세한 소식과 개항장에 관한 정보는 첨부된 함장 보고서에 기술되어 있습니다(부록 ⅩⅩⅨ ).
상기에 언급된 바와 같이, 전함 ‘보브르(Бобр)’호는 제물포 주둔지를 향해 12월 12일 뤼순을 출항했습니다. 계획대로 14일에 도착하여, 전함을 기다리고 있던 공사관 연구생 슈테인(Штейн)을 승선시킨 후, 함장은 기동을 위해 목포로 출항했습니다. 목포에 정박 중이던 12월 15일부터 19일까지 부지 공매가 이루어졌습니다. 구매를 담당하고 있었던 슈테인과 함께 함장 역시 공매에 동참했습니다. 함장의 보고에 따르면 목포에서 상기 공매를 통해 15,369평방미터의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그중 75평방미터는 연안지대이며, 이 연안지대와 직접적으로 접해있는 연안지대 60평방미터를 포함해서 총 3,706평방미터의 다른 부지에 대한 고시를 행했습니다. 공매가 이루어지기 전에 영사관용 부지로 19,301평방미터를 매입했습니다. 그 외에 고하도(高下島)에 등유창고건설용으로 5,000평방미터의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슈테인 외에 공매입찰에 일본 영사, 약간 명의 일본인, 그리고 한 명의 중국인이 참석했습니다. 함장의 평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매우 친절하게 행동했으며, 슈테인이 흥정 중인 부지를 가로채지 않았습니다.
현재 목포에 체류 중인 유럽인은 아일랜드인 세관장인 아머(Armour)와 프랑스 신부 단 두 명에 불과합니다.
전함이 목포에 도착한 첫 날 한국 관찰사와 일본 공사가 방문했으며, 처음 회의 때에는 11발, 두 번째 회의 당시에는 7발의 예포를 쏘았습니다.
12월 20일 전함은 제물포로 회항하여 주둔했습니다.
함장은 서울을 방문하여 대리공사를 알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함장은 서울에 혼란이 있었으며, 거리는 경계병의 보호를 받았으나, 이제는 진정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황제는 대사면을 단행했으나,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은 사면을 불신하여, 본 협의 막후 조정자들인 미국인과 일본인들에게 피신해 있습니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4. РГАВМФ, ф.9, оп.1, д.22, лл.1∼13об.
제물포시와 조선 전국의 기후 및 위생 조건에 관한 일부 의견
러시아 해병대가 서울에 상주하고 있으며, 제물포를 비롯한 다른 여러 항구에 러시아 전함이 지속적으로 정박 중임에 따라 조선의 항구 중 한 곳에 소규모 의무실 형태의 위생 시설을 개소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향후에는 나가사키에 있는 의무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이에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 가장 근접해 있음으로써 그 중요도가 해마다 점증하고 있으며 또한 가장 활기에 찬 제물포가 그 후보지로 선정되었습니다. 올해 이미 서울과 제물포를 연결하는 철도가 부설되고 있습니다. 위생 시설 부지는 제물포로 향하는 항로에 위치한 도서 중 한 곳인 월미도에 이미 확보된 상태입니다. 현재 이곳 월미도에는 저탄소가 건설되었으며, 선착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비록 최근 들어 제물포 항의 상주 계류지에서 간혹 위장병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 원인 역시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점만 제외하면, 극동의 다른 항구에 비해 제물포에서의 발병률이 매우 낮다는 현실이 위에 열거된 사항 외에도 월미도를 후보지로 선택한 주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제물포 계류지의 위생 조건이 양호하다는 것에 의심할 바가 없는 이유는 일본이나 중국의 항구와는 달리 제물포에는 성병이 존재하지 않아서 대원들이 감염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기와 같은 사실과는 별개로 이곳에서의 발병률이 낮은 이유는 무엇보다 이 지역의 전반적인 기후 및 위생 조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병원 부지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거론되는 사안은 당연히 기후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조선과 제물포시의 기후에 관한 의견은 사람들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놀랄만한 일은 아닌 것이, 기후와 관련된 논의가 겨우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기상관측을 실시한 다음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후는 과학적 방법에 의거하여 다양한 기상 관측을 실행했을 경우에만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를 불문하고 10월과 11월에 일본의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12월과 1월에 제물포를 방문하게 될 경우, 당연히 ‘기후’가 형편없이 혹독하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특히 선박에서 체류 중인 상황 하에서는 거주 공간의 적정 온도에 대한 견해가 완벽하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조선에서 정박하다가 봄에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게 될 경우, 조선에서 겪었던 조용하고 맑은 날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회상하게 될 것입니다.
제물포에 정박하는 것은 실로 반길만한 사실이 아니며,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리 해군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선 앵커를 내릴 수 있는 해역이 정박지의 연안으로부터 너무나 먼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며, 현격한 조수 간만의 차이로 인해 연안과의 연락 또한 쉽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연안에는 오락시설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모든 사실들이 합쳐져서 썩 좋지 못한 주관적 느낌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런 부정적 느낌의 원흉이 바로 ‘기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물포시에서 기상 관측을 수행하여, 충분히 광범위하면서도 엄격하게 과학적인 자료들을 관리하고 있으며, 이를 러시아와 독일의 출판물註 005에 게재했습니다. 상기의 최신 자료들과 1896년 우리 전함에서 실시한 관측 자료들에 기초하여 함대 의무관인 8등관 알렉산드롭스키(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는 실로 면밀하면서도 간략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제물포 항의 기후 일람표를 작성했습니다. 본인은 상기와 같은 자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위 출판물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의무관 알렉산드롭스키의 일지와 작업물들을 제시할 것이며,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제물포 항의 기후에 관해 각자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렉산드롭스키가 추출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가장 간략한 형태로 아래와 같이 게재합니다.
1월:
·가장 추운 달.
·5년간 1월의 평균 기온:-3.3℃(이 기온은 대략 3월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기온인 -5℃와 같다)
·5년 동안 최고 기온:+8.7℃(1888년)
·5년 동안 최저 기온:-15.7℃
이러한 추위는 그러나 예외적이다.
·평균 습도 80%
·주로 북풍과 북서풍이 불며(42%), 풍속은 5~7발註 006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3번)
·무풍상태:13%, 평균 풍속:2.2발
·평균 기압:767.8
·1889년을 제외하고 1월의 강수량은 별로 많지 않았으며(눈:1~3회, 비:1~3회) 대체로 맑은 날씨가 더러 있었다.
2월:
·봄이 시작되며 추운 날씨가 휠씬 적다.
·5년 간의 평균 기온:-0.7℃(이 기온은 3월 말과 4월 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평균 기온인 +2.0℃에 상당한다)
·5년 동안 최고 기온:+13.3℃
·5년 동안 최저 기온:-15.0℃
·평균 습도:79.4%, 평균 구름:4.4
·눈:2~3회, 비:1~3회, 안개:1~4회
·주로 북서풍, 서북서풍, 서풍이 불며(58%), 퐁속은 5~7발의 세기를 나타낸다(4회).
·무풍상태:18%, 평균 풍속:2.5발
·평균 기압:767.3
3월:
·중순경에는 추위가 완전히 가신다.
·5년 동안의 평균 기온:+4.8℃(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4월 후반기 및 5월 전반기의 기온과 같다)
·5년 동안 최고 기온:+18.8℃
·5년 동안 최저 기온:-6.2℃
·평균 습도:73%, 평균 구름:5.5
·눈:0~2회, 비:1~5회, 안개:1~5회
·주로 북서풍과 서풍이 불고 풍속 5~6발이 되는 때가 2회, 남서풍이 시작되며 풍속이 4발 정도 된다.
·무풍상태 9%, 평균 풍속:2.0 발
·평균 기압:765.5
4월:
·추위는 없다.
·5년 동안 평균 기온:+9.5℃(대략 5월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평균 기온인 +9.0℃와 비슷하다)
·5년 동안 최고 기온:+23.1℃
·5년 동안 최저 기온:+0.1℃
·평균 습도:79.471%, 평균 구름:5.8
·비:4~10회, 안개:7~10회
·주로 서풍과 동풍이 불며 풍속 5~6발인 때가 2회, 북풍과 남서풍이 약하게 분다.
·무풍상태:25%, 평균 풍속:2.0발
·평균 기압:761.7
5월:
·따뜻한 날씨를 보인다.
·5년 동안 평균 기온:+15.4℃ (상트 페테르부르크 6월의 평균 기온인 +15℃와 유사)
·5년 동안 최고 기온:+29.9℃
·5년 동안 최저 기온:+4.3℃
·평균 구름:6.3
·비:4~3회, 안개:4~11회
·주로 서풍, 남서풍, 남풍이 불고 풍속 6~9발까지 된다(3회).
·무풍상태:11%, 평균 풍속:2.4발
·평균 기압:758.8
6월:
·기온이 점점 상승하며 비가 자주 내린다.
·5년 동안 평균 기온:+20.0℃
·5년 동안 최고 기온:+33.8℃
·5년 동안 최저 기온:+12.0℃
·습도:82%
·평균 구름:7.4
·비:3~8회, 안개:2~8회, 비와 구름:3~13회
·주로 서풍과 남서풍이 불고 풍속은 5~7발까지 된다(5회).
·무풍상태:33%, 평균 풍속:2.0발
·평균 기압:753.3
7월:
·8월처럼 더운 날씨를 보이고 짧은 시간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많이 온다.
·5년 동안 평균 기온:+23.4℃
·5년 동안 최고 기온:+33.8℃
·5년 동안 최저 기온:+11.6℃
·평균 습도:84%, 평균 구름:7.2
·비:3~13회, 안개와 비:4~11회, 안개:0~9회
·주로 남서풍, 남동풍이 불며 풍속은 최고 5~7발까지 된다(5회).
·무풍상태:25%, 평균 풍속:2.4발
·평균 기압:755.4
8월:
·가장 더운 달이다. 안개는 드물고 소나기가 자주 온다.
·5년 동안 평균 기온:+25.5℃
·5년 동안 최고 기온:+35.7℃
·5년 동안 최저 기온:+15.5℃
·평균 습도:81.6%, 평균 구름:6.7
·비:6~12회, 안개:1~6회
·주로 남서풍(42%)과 북동풍(17%)이 불며 풍속 4~5발까지 된다. 남동풍(9%)도 약하게 분다.
·무풍상태:16%, 평균 풍속:2.1발
·평균 기압:755.9
9월:
·10월과 마찬가지로 가장 날씨가 좋은 달이다.
·5년 동안 평균 기온:+21.0℃(최고기온과 최저기온은 알렉산드롭스키 박사의 보고에 나타나 있지 않다.)
·1891년 서울에서는 +29.9℃와 +10.0℃
·평균 습도:76%, 평균 구름:5.4
·비와 안개는 극히 드물다.
·주오 부는 바람은 없으며 사방에서 약한 바람이 분다(풍속 4발이 되는 경우는 1회뿐이었다).
·무풍상태:16%, 평균 풍속:2.4발
·평균 기압:759.1
10월:
·10월에 대한 자료는 알렉산드롭스키 박사의 보고에 없다. 이것은 제물포에서 40베르스타 떨어져 있는 서울에서 1891년 관측된 자료로 어느 정도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평균 기온 +15.2℃
·최고 기온:+26.6℃
·최저 기온:+2.5℃
·평균 습도:61%, 평균 구름:3.0
·비:1회, 안개는 없음.
·주로 북동풍, 서풍, 북서풍이 불며 바람은 약하다(풍속 4발 이하).
·무풍상태:33%
·평균 기압:760.3, 제물포의 평균 기압:약 765.3
11월:
·맑고 좋은 날씨를 보인다. 이 달 말에는 첫 영하의 날씨가 나타난다(1~5회).
·5년 동안 평균 기온:+7.9℃
·5년 동안 최고 기온:+20.6℃
·5년 동안 최저 기온:-10.3℃
·평균 습도:76.1%, 평균 구름:5.7
·비:2~6회, 눈:0~2회, 안개:1~4회
·주로 북풍, 북서풍, 남풍, 남동풍이 불며 풍속은 6~8발까지 된다.
·무풍상태:16%, 평균 풍속:2.5발
·평균 기압:767.6
12월:
·영하와 영상의 날씨가 번갈아 나타난다.
·5년 동안 평균 기온:+1.5℃
·5년 동안 최고 기온:+11.8℃
·5년 동안 최저 기온:-13.5℃
·평균 습도:76%, 평균 구름:5.6
·비:6회, 눈:1회, 안개:1~4회
·주로 북서풍, 북동풍, 북풍이 불고 풍속은 5~7발까지 된다(4회).
·무풍상태:6%, 평균 풍속:2.6발
·평균 압력:767.5
겨울(12월, 1월, 2월)의 평균 기온:-0.8℃
봄(3월, 4월, 5월)의 평균 기온:+9.9℃
여름(6월, 7월, 8월)의 평균 기온:+23.0℃
가을(9월, 10월, 11월)의 평균 기온:+14.5℃
※ 5년간의 연평균 기온:+11.9℃
이와 같이 가장 객관적인 형태로써 지난 5~6년 동안 수집된, 엄격한 과학적 자료에 기초하여 판단할 때, 우리는 제물포의 기후가 인간 생활에 그 어떤 기후보다 가장 적절한 온대성 기후에 속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제물포 시의 연평균 기온은 유럽의 다음과 같은 국가들, 즉 프랑스 중부, 남 스위스 및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크리미아와 카프카스 지역 등과 일치합니다.
군의관 알렉산드롭스키는 자신의 작업을 종결짓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에 도달했습니다.
“전반적으로 겨울이 온화한 편입니다. 영하 12도나 영하 15도의 기온은 드물게 나타나며,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눈보라와 차가운 바람 역시 간혹 일어나는 현상이어서 대부분의 경우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씨입니다. 겨울철의 대체적인 풍향은 북풍, 북서풍, 북서서풍입니다. 3월부터 풍향이 북쪽과 북서쪽에서 남쪽과 남서쪽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기온은 서서히 상승하지만, 그와 함께 안개가 끼기 시작합니다. 안개가 가장 심한 것은 6월과 7월이며, 9월에 들어서야 완전히 사라집니다. 비록 기온이 높아 덥다고 하지만 남쪽과 남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온도가 떨어집니다. 9월과 10월의 날씨가 가장 좋으며 급격한 기후변화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註 007 1896년은 예년과는 달리 온화한 기온에 무풍상태를 보였습니다. 대체로 맑은 날씨였으나, 안개로 인해 5월부터 구름의 양이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만약 제물포 또는 조선의 다른 지역(부산, 원산, 서울)에서 장기간 거주한 사람들에게 기후에 관해 물어본다면, 예외 없이 한 가지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후는 훌륭합니다. 더 좋길 바랄 수가 없을 정도죠.” 이런 의견들은 계속되는 맑고 조용한 날씨와 전반적으로 자신의 느낌이 좋았다는 점에 기초한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영하의 날씨로 내려가는 겨울을 ‘신선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라는 조선의 명칭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이 명칭은 아침뿐만이 아니라 종종 하루의 나머지 시간과도 연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1888년 7월, 8월, 10월, 그리고 11월, 1889년 2월, 3월, 그리고 4월 제물포와 서울에, 마지막으로 1896년 가을과 1897년 봄 조선의 여러 항구에 잠시 동안 머무른 적이 있는 본인의 직접 경험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11월에 영하 7도 기온과 3월에 전함의 갑판을 뒤덮는 폭설이 내렸다는 사실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기후에 관한 한 상기와 같은 긍정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바입니다.
만일 우리가 조선인들의 현재 건강상태에 관심을 가져보면, 이렇게 좋은 기후 조건 하에서도 그 특성이나 수에 있어서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질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인들은 꾸준히 병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기후가 이런 병마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보건 대책과 의료 구호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조선인들 스스로의 불결함에서 거의 절대적으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야스트레보프(И. В. Ястребов) 박사의 논문 「조선의 의학과 의사에 관한 약술」을 참조하시오). 누군가 조선의 도시와 촌락을 여름철에 방문하게 된다면, 그는 가정집과 길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악취와 쓰레기에 경악할 것이며, 어떻게 사람들이 이런 환경 속에 살면서 번식할 수 있는지 놀랄 일만 남을 것입니다.註 008 조선인들은 겨울이 되면 균등한 난방이 보장되지 못한, 더럽고 답답한 초가집에서 신선한 공기를 자주 접하지 못하는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절기에 더 자주 병마를 경험하게 됩니다. 조선에서는 현재 열병이 상당히 확산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말라리아는 봄과 여름의 지나치게 높은 기온,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이 벼의 경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말라리아를 퇴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서울에 체류 중인 유럽인 의사들 중 한 명에 따르면, 그와 그의 가족 모두가 저지대에 위치한 조선식 가옥에서 거주할 당시 심한 말라리아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는 말라리아를 완전히 퇴치하기 위해서 동네 옆의 언덕 위에 유럽식으로 새로이 건설된 주거지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조선의 도시와 촌락(수도인 서울 역시 분지에 위치해 있습니다)들이 저지대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거지 근처에 물이 고여 있어서, 말 그대로 세균의 온상이 되고 있는 작은 웅덩이들을 목격했습니다. 그에 더하여 재래식 화장실로부터 거리로 직접 흘러나온 오수가 그 웅덩이 안으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한편 각 도시에서는 그 오수들이 복개되지 않은 이랑 같은 곳으로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인이 조선에서 장티푸스를 발견한 사실 역시 놀랄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아마도 음료수를 통해서도 접촉성 전염병이 우리의 몸속으로 침투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간단한 연구의 결과 조선인들이 통상 ‘염병’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열병(야스트레보프(И. В. Ястребов) 박사의 논문 「조선의 의학과 의사에 관한 약술」을 참조)이 존재합니다. 본 열병과 관련된 대다수 유럽인 의사들의 견해는 상이합니다만 병의 특성에 대한 설명(발병 9일째에 심각한 위험이 도래하며 환자는 땀을 많이 흘린다)에 기초하여 판단할 때, 재귀열註 009 또는 그것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서울에 체류 중인 의사 중 한 명은 환자의 혈액으로부터 재귀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스피로헤타 세균을 발견했다고 본인에게 단언했습니다. 환자를 잘 간호해주고 올바른 치료법을 사용하면 사망률은 높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그 어떤 치료법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병이 발생하면 공포에 질려 환자들을 종종 길거리로 내놓습니다. 이에 환자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면서 당연히 사망률이 증가하게 됩니다. 향후 본 질병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극히 요구되는 바입니다.
지저분하고 불결한 거주 환경으로 인하여 의심할 바 없이 전염병으로 보이는 폐병 또한 조선인들 사이에 폭넓게 확산되어 있습니다. 제물포와 서울에 거주 중인 일본인들이 가벼운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일본 남부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조선의 기후가 일본 이주민들에게는 정말로 혹독한 것입니다. 그들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상기와 같은 이유로써 설명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본인은 폐결핵에 걸린 일본인 한 명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거의 전 세계에서 자신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으나 그 모든 행동이 무익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자신이 찾아 헤매던 장소가 서울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결핵에도 불구하고 이곳 서울에서 쾌적함을 느끼며 만 9년을 거주했습니다.
조선에는 위장병과 내장 질환 역시 극도로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인들은 자신의 이웃인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과는 달리 음식이 매우 초라하며, 폭음폭식에 비견될 만큼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있습니다(야스트레보프의 논문 “조선의 의학과 의사에 관한 약술”을 참조).
또한 음식의 질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기 때문에 단순 이질에서부터 전염성 이질에 이르기까지 소화기계통의 질병이 불가피하게 발병하고 있으며, 게다가 조선인들은 음주 역시 마다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조선인들이 심한 근육 류머티즘에서부터 가장 심각한 형태의 관절 류머티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류머티즘을 심하게 앓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현상은 (방바닥으로부터 열이 제공되어) 균등하지 못한 난방 시스템 그리고 부분 부분이 종이로 만들어져 파손되기 쉬운 벽으로 구성된 비효율적인 주거 형태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방문 초기에 조선식 가옥에서 생활해야만 했던 (우리의 대리공사 베베르를 포함하여) 유럽인들은 유럽식 가옥을 완공하거나 유럽식 가옥으로 완전히 이사하기 전까지는 류머티즘으로 매우 고생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가옥에 입주한 다음에야 류머티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난방이 고르지 못한 공간에서 앓게 되는 계속된 감기로 인하여 특히 겨울철에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기관지염이 자주 목격됩니다.
기후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몇 가지 형태의 질병에 대해 부가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조선인들 중에서는 탈장이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유럽인 의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한 시간 내내 아무 하는 일 없이 엄청난 양의 담배를 피우면서 웅크린 자세로 앉아 있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하는데, 매우 적절한 진단으로 보입니다.
우두 예방접종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상기 언급한 바와 같은 열악한 위생 조건으로 인하여 주민들 사이에서는 천연두가 계속해서 창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연두를 겪지 않은 조선인들을 만난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입니다. 이 병은 매우 고통스러우며, 종종 집단 발병의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따라서 천연두에 옮은 가족은 주변 공기를 악취로 오염시킴으로써 심지어 집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이며,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환자가 있는 집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야스트레보프의 논문 「조선의 의학과 의사에 관한 약술」 167쪽을 참조).
상기와 같은 환경 속에서 발병하기 쉽고 전염력도 강한 병이 하나 더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매독입니다. 유럽적 의미를 갖는 매음굴에서의 매춘은 제물포에만 존재하며, 서울에서도 존재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매음굴이 없는 결과 첩을 두는 제도가 확산되어 있으며, 비싼 가격에 자신의 첩을 단기간 대여해 주는 거래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재혼이 금지된 과부들 역시 매춘에 종사합니다. 당연히 이 모든 매춘 행위는 의학적 통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독이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과 간혹 대규모 전염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 모두가 그리 놀랄만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질병을 거론하는 것이 애초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는 다양한 질병이 자주 발생하는 원인은 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결한 위생 조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던 만큼, 이상으로 조선에서의 질병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야스트레보프 박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전반적으로 매우 불결하여 물을 만지려하지 않으며 좀처럼 씻지도 않는다. 목욕탕을 들른다거나 욕조를 이용하는 방법도 모른다. 아침에 구리로 만든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비누도 없이 자기 얼굴에 물을 조금 적시는 것조차 매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씻는 행위일 뿐이다. 조선에서는 심지어 고관대작마저도 비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조선의 국왕과 대신들조차 비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우리 공사관에 체류 중일 당시에 확신하게 되었다. 여름철 혹서기가 시작되면 조선인들은 아주 간혹 강이나 바다에서 목욕을 하지만, 청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더위를 쫓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다음과 같은 엄격한 전통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여자들은 1년 중 단 3회만 목욕할 수 있다!”(야스트레보프의 논문 「조선의 의학과 의사에 관한 약술」 168쪽을 참조)
우리들이 놀란 것은 상기와 같이 열악한 생활환경 하에서도 조선인들이 상대적으로 건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쾌적한 기후, 즉 다름 아니라 봄과 가을에 지속되는 건조한 기간과 모든 병원균을 파괴하는 ‘추운’ 겨울 덕분인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후와 질병의 확산 간에 연관이 없다는 다른 증거는 이미 상기에 언급된 바와 같습니다. 즉 보다 양호한 위생 조건을 갖춘 곳에서 거주하고 있는 모든 유럽인들은 아픈 경우가 거의 없으며, 항상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럽인들의 자녀들 또한 잘 성장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유행병에도 잘 걸리지 않아서, 성홍열과 홍역은 극히 드물게 나타나며, 그 증상 또한 가볍습니다. 1897년 봄철의 예와 같이 어린이들이 간혹 유행성 기관지염에 걸린 적이 있긴 하지만, 더 이상의 나쁜 결과 없이 매우 빠른 속도로 완쾌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제물포의 기후가 병원註 010 건설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근거를 전혀 확인할 수 없음은 물론, 오히려 이곳의 기후가 보건소 건설에 유익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월미도가 건설 예정지로 선택된 것은 인적이 드문 곳이기 때문이며, 그 외에도 몇 가지 사안이 더 고려되면 훌륭한 선택일 것입니다. 즉 병원의 위치를 높은 산의 남쪽 경사면에 잡음으로써 동절기의 북풍과 북서풍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받을 수 있게 해야만 합니다. 둘째, 월미도에는 논이 없는 만큼 말라리아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남방 지역에 위치한 모든 나라들의 천재(天災)라 할 수 있는 모기가 월미도에는 없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모기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성가신 존재인 만큼 환자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기장은 불가피하게도 환자를 둘러싼 공기의 온도를 상승시켜주며, 결국 그런 현상은 환자에게 더욱 열악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연안과의 통신이 반드시 일 년 중 한시라도 자유로워야만 합니다. 간조 시에 드러나는 방대한 규모의 해저면에서 발생하는 악취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조 시에도 악취가 느껴지지 않으며, 현재까지 해저 하상토註 011에서 발견된 병원균은 전혀 없습니다. 바닷물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강력한 살균 용액입니다. 담수에서 발생한 모든 병원균이 염수에서는 빠른 속도로 파괴됩니다.
의무실은 막사형태로 건설하는 것이 손쉬울 듯합니다. 이것은 제물포에 영사관 설립이 확고해지고 그로 인하여 보다 견고한 병원의 건설이 불가피해질 것인가라는 문제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註 012 현재로서는 수년에 걸쳐 검증되고, 특히 동절기에 막대한 편의를 제공해 주며, 오바마(Обама) 및 운젠(Унзен)과의 인접지일 뿐만 아니라, 장교를 비롯하여 우리 태평양 함대의 함대원들이 애용하고 있는 나가사키 야전병원에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97년 7월
운젠(Унзен)
註 0055) "Annulen _____ Hidrographie ______ Maritimen Meteorogie 1891”과 “_________”.註 0066) ball-바람의 세기를 측정하는 단위.
註 0077) 이런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조선의 지리적 위치는 한편으로는 혹독한 영하의 날씨를 가져다주는 거대한 대륙의 부속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태평양의 난류에 이웃해 있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어서,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겨울에는 급격한 기후 변화가 나타납니다. 비록 조선이 몬순기후대에 위치해 있어서 겨울철에 북쪽과 북동쪽으로부터 그리고 일반적 몬순현상과는 달리 북서쪽으로부터 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여름에는 남쪽과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며, 그에 더해 풍향의 모든 변화는 대기 중에서 습도, 온도, 구름의 양,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의 급격한 변화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부산은 대양성 기후입니다. 따라서 습도는 더 높은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기온은 안정적입니다(최저 기온과 최고 기온의 연교차는 33.2℃입니다. 월 평균기온이 영하 0℃이하로 내려가는 적이 없으며, 1월에도 영상 5.2℃입니다. 제물포와 원산의 기후는 보다 대륙성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겨울철에 춥지만 보다 건조하고 더 맑으면서 조용한 날들이 많습니다(최저 기온과 최고 기온의 연교차는 제물포가 48.6℃이며 원산이 48.2℃입니다)-원문의 주.
註 0088) 당시 러시아인들 중 일부는 인간에게 사용할 수 없는 이런 식의 단어를 선택하여 인종 차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역자 주.註 0099) 회귀열이라고도 함-역자 주.註 01010) 서두에서는 의무실 형태의 위생 시설이라는 단어에서 시작했으나 결론에서는 병원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타남-역자 주.註 01111) 갯벌-역자 주.註 01212) 상기와 같은 논의에도 불구하고-역자 주.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6. РГАВМФ, ф.9, оп.1, д.31, лл.98∼120
서울
4월 3/15일 발송
기밀
수신:총참모부
№1.
1896년 12월 1일
상신
본인은 지금 발송하고자 하는 첫 번째 보고서를 통해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올바로 평가하려면, 반드시 인지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현 정세에 관한 전반적 성격을 간단하게 서술하고자 합니다. 그에 앞서 유감스럽지만 현재까지 공식적인 출처에서 나온 어떠한 정보도 이용할 수가 없었던 관계로 아래에 기술하는 모든 것은 부분적인 관찰의 결과이거나, 저보다 한국에 더욱 정통한 이들과의 대화에서 얻은 것, 또는 일부 토착관리들과 친교를 통해 획득된 사실들이라는 점을 말씀드려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본인은 여기에 제시된 기초 자료들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는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상기에 열거된 관점들 중 ______이나 다른 것을 변화시킬 수도 있음이 전적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현 시점에서 한국은 평온한 듯 보입니다. 백성들의 동요가 점차 진정되면서 정부는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방랑자나 강도들로 구성된 집단을 ______, 하지만 국가 혼란 시기의 여파로 인해, 아직도 지방에서는 군인들의 약탈 등이 남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외견상 정치적 문제들은 그럭저럭 정리되었으나 중요한 내부적 상황은 아직 전환기적 특성을 갖고 있으며, 질서 역시 과거의 상태와 다를 바 없음에 반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없는 한국인이 정치문제에 참여하는 것 ______한, 현재의 상황은 향후 상당기간 동안 한국 정부를 위해 여러 가지 곤란함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모든 전문가들은 한국의 이런 평온함이 아직까지는 충분히 지속될 수 있을 정도는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금의 상황은 모든 ______을 위해 매우 유리한 토대를 제공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곳 생활을 예의주시하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한국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지배적 ______을 강화하며, 나약한 국왕의 의지에 따라 ______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한국 내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입수된 자료에 기초하여 가능한 한, 한국의 백성들과 보수(보수-민족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더 옳다고 보이는) 정파를 포함하는 행정 당국 사이의 주요 흐름과 공감이 형성되고 있는 부분의 윤곽을 그려보기 위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이 속해있는 본 정파의 과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본 정파는 모든 급진적 개혁을 거부한 채 국가 안정의 달성, 민족적인 구습과 제도에 의거한 통치, ______ 경제적 부담의 경감 및 관리들의 수탈 금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판단하기에는 상기의 것들이 합일된 국가적 소망의 표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관파천 이전, 원하지 않았던 일본의 … 계몽활동을 타파하고 순수한 민족적 정책에 의거한 지배를 기대하고 있었던 백성들은 아관파천이 자신의 소망을 실현시켜 줄 담보물이라고 판단하여, 한국 국왕의 이어를 매우 환영했었습니다. 하지만 근 일 년에 걸친 경험이 자신들의 기대를 전적으로 정당화시켜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진보주의적 테러註 018는 중단된 것이 사실이지만, 전통적 관습과 사라진 ______ 삶이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간에서 말하듯, 고인이 된 왕비와 민씨 일가들이 군림하던 당시에 제정된 과중한 세금을 경감해주기 위해 현재까지 적지 않은 것이 이루어졌음이 사실입니다. 여하튼 그런 이유에서 ______ 국왕의 환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장기간 체류 중인 것과 관련하여 불만이 커지고 있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에서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민족적 긍지 그 하나가 한국인을 위해 심각한 ______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가 경청할 수 있었던 다양한 의견들 중에서 가장 적절해 보이는 설명은, 정책적 측면에서 한국 정부의 여러 가지 실수에 대한 책임이 외국인의 영향력에 있다고 보고 있으며, 또한 일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______의 예에 따라 개혁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백성들이 한국 내정의 ______에 대한 외세의 간섭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이들의 이런 목소리 뒤에는 우리나라 외교대표가 한국 국왕을 상대로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들의 간계를 꾸미고 또 여러 가지 파렴치한 일들을 획책함에 있어 방해가 된다는 점을 부담스럽게 느낀 많은 궁정 대신들의 무리가 숨어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여하튼 현재 내정이 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이 민중의 ______ 자산의 ______가 된 것은 확실합니다.
한국 국왕의 환궁을 주청하기 위해 지방에서 대표단이 상경하거나 상소가 올라온 적이 수차례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공사관으로부터 국왕을 납치하여 강제로 환궁시킨 후, 심지어 필요하다면 국왕 폐하의 경호를 일본 경비대에게 맡기려는 모의가 서울의 장군들과 문관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을 정도로, 환궁을 위한 선동책이 발전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본인이 그것을 밝혀냈다는 것은 전문으로 ______)은 ____ 보고서에서 언급될 것입니다. 물론 정부는 백성의 압박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국왕 역시 이미 수차례에 걸쳐 환궁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매번 ______ 칙령에서는 일시적으로 환궁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이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국왕은 아마도 최근 몇 년간의 사건들에 대해 ______한 바, 그것은 무엇보다도 단순히 자신의 안전과 러시아 국기 아래서 보장된 평온한 삶을 떠나기로 결정하지 못하여 하루하루 환궁의 시기를 늦추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환궁을 늦추는 이유로서 거론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처음에는 서울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점, 다음에는 옛 궁의 모습과 관련된 기억의 ______ 점, 그리고 러시아공사관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유럽인 구역에 새로운 궁궐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는 점, 나중에는 복상기간 등등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모든 핑계가 대부분 그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도시는 평온하며, 궁궐은 환궁이 가능하도록 충분히 준비되었고 마침내 복상기간 역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궁궐에 안치되어 있었던 왕비의 유골을 매장하는 사안이었습니다. 한국 국왕은 우리 해군의 호위 하에 매 2~3일 마다 그곳을 방문하여 고인의 영혼에게 성대한 제물을 바치고 있었는데, 왕비의 장례식을 방해하는 요인으로는 고인의 고귀한 지체에 걸맞는 장지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며, 또한 웅장한 능(陵)의 ______ 축조를 위한 장인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제례청의 많은 관리들이 전국으로 파견되었으나 왕비의 능에 적합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는 똑같은 결과를 갖고 돌아온 지도 이미 반년이 다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 전 특별관리가 전통적인 황릉 건립 장소를 알아보기 위해 상하이로 파견되었습니다. 왕비를 기리는 데 특별히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의 견해에 따르면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喪), _______ 정립되지 않은 국가의 지위, 그에 반해 국가 재정에 대한 _____하는 값비싼 제물 등은 ________입니다.
바로 이것이 민족적 보수 정파의 우두머리들이 다음의 세 가지 즉, 1)왕비의 장례 2)탈상 3)국왕의 환궁 등을 자신들의 직접적 정치적 강령으로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은 민족적 보수 정파의 지도자이자 국왕의 부친인 대원군은 일본인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경력에 손상을 입혔습니다. 이런 방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현재 한국의 총리註 019이자 얼마 전 소집된 의정부 의정 김병시일 것입니다. 김병시는 아마도 특별할 것 없는 ______ 정치인일 수도 있으나, 순수한 민족의식에 있어서는 청렴결백한 애국심으로 강한 힘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요즘 한국의 귀족들 중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나무랄 데 없는 깨끗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가 예상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만약 국정에 참여할 경우 이성의 ____________을 진정시킬 뿐만 아니라, 국왕 역시 진실로 그의 조언을 매우 소중히 여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김병시는 현 상황하에서 정무에 관여하는 것을 전적으로 거절했으며, 민족적 정치 강령의 수용을 무조건적 요구로 내세웠습니다. 각하께서도 이미 확인하셨듯이 이 강령 중 하나는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국왕의 조속한 환궁입니다. 국왕이 원칙적으로는 자기 신하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환궁을 연기하려 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합니다만, 완고한 노인은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고 사임을 요청하였습니다. 국왕이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업무 수행을 거절한 채, 만약 제가 틀리지 않는다면, 최근 2~3개월 동안 자신의 깊은 병을 이유삼아 연이어 13번에 걸쳐 사임을 청했습니다. 김병시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그의 병환이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여하튼 제가 아는 한, 우리 공사관은 최근까지도 이러한 사임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 사임이라는 것이 젊은 관리의 임명과 관련된 사소한 이견에서 비롯된 것들이며, 국왕이 김병시에게 양보하면, 그는 이런 양보에 대한 응답으로 바로 그 다음날 시위하듯 사직서를 제출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소한 불화가 아니라 훨씬 본질적인 사안이 그의 입각 가능성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의 관보에 게재된 김병시의 상소문 중 하나가 이런 사실과 관련된 흥미로운 공식문서로서, 본 상소문에는 김병시의 주된 요구가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다음의 문구가 게재되어 있습니다. “국왕폐하의 칙서에서는 곧 환궁과 왕비의 장례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의 실행을 모두가 밤낮으로 학수고대하고 있으나, 이 문제에 있어 백성과 관리들 사이에 어떠한 불일치가 있습니다. 물론 민족적 보수 정파가 무엇에 호감을 보이고 있는지, 또는 마찬가지로 외견상의 정치적 부분에 있어 한국 백성의 압도적 다수가 무엇에 호감을 표명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이것을 밝혀낼 수 있는 문서적 증거 전체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만, 서울과 한국 북부지방의 백성들의 삶에 대한 개인적인 식견에 기초하여 추측한다면, 지금까지 유일하게 변함없이 한국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 있는 것은, 어찌되었든, 중국의 문화를 모태로 하여 백성들이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인 문화를 보유하고 있으며, 종교처럼 ______된 조상에 대한 제사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유럽의 그것과는 달리 백성들 삶에서 확고부동하게 기반을 잡았음은 물론 전통 숭배를 아는 민족입니다. 백성들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이 겪고 있는 현금의 모든 어려움은 나라가 폐쇄적이고 은둔적인 생활에서 분리되어, 문화적으로 이방인 세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야기된 것이며, 따라서 중국에 종속되어 있던 시대가 최근 반세기 동안의 역사에 있어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현재 이러한 공감대가 한국인들의 은밀한 마음 한 구석 어딘가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도 이런 마음이 때때로 놀랄 만한 힘을 갖고 외부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상기와 같은 경우는 매우 특징적이라 하겠습니다. 올해 9월 이곳에서는 한국과 몇몇 외국과의 관계를 고찰한, 짧으면서도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한글문장으로 쓰인 소책자가 등장했습니다. 우리가 그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장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본 책자는 “유학균註 020 또는 유생의 길고 넓은 안내서”라고 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편찬자는 신기선註 021입니다. “청 제국-중화는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가!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부강한 나라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은 중국에서 나왔다. 유럽은 이 유일하고도 진정한 문명의 중심과는 매우 거리가 멀고, 러시아, 터키,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민족은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______ 이나 금수에 가까우며, 말하는 소리는 닭 울음소리 같다. 야만적인 접촉을 통해 세계를 오염시키면서 전파되고 있는 예배교라 이름 지어진 교의 즉, 기독교는 미국 프로테스탄트의 설교라는 형태로 자신을 과장하고 있다.” 본 책자의 저자는 기독교에 반대하며 통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대한 이야기로 대중을 혹세무민하면서, 조상숭배를 파괴하고 하늘과 땅이 선물한 것에 제사지내는 것을 금한다. 이런 모든 이야기는 혼란스러운 상상이 지어낸 헛소리로 논쟁할 가치가 없다.” 이런 식의 문장이 현 시기의 한국인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것에 더해, 백성들을 위해 학교에 배급하려는 차원에서 학부대신이 작성하고, 학부의 자금으로 본 가철본을 출판하려 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습니다. 그 부적절한 결론을 묵과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중국문화가 오래전 역사 속에 묻힌 시기부터 현재까지 아시아의 이곳에서 자신의 세뇌와 광기를 아직도 이만큼이나 보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본의 아니게 경탄하게 되며, ______ 전쟁뿐만이 아닌, 유럽문명의 혜택으로도 이런 마력을 뒤엎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서는 “유학균”이라는 책자와 그 저자에게 닥쳐온 운명을 서술해 보면 꽤나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이 소책자의 출현은 미국 대신들의 유력한 일파로서 한국에 체류 중인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분노의 집회’가 조직되었으며, 결국 그 집회의 결의에 의거하여 미국인들은 적대적인 학부대신을 퇴직시킬 수 있었습니다. 국왕은 신기선을 면직시켰으나, 그의 면직에 관한 칙령은 장관의 행동에 대해 책망으로도 그리고 그 반대인 격려로도 이해될 수 있을 만큼 어중간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어서 유럽 식민주의의 입장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호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백성의 견해는 ______ ______ 이미 충분히 밝혀졌습니다. 국왕이 공사관으로 피신한 이후, 현재 반동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영향력은 공적인 영역 이외의 분야에서도 실로 거대해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을 그들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과는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이미 언급했듯이, 중국은 한국 민족의 모든 내면적 세계에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양의 정신적 지주로 되어 있으며, 러시아는 강대하고 우호적이며, 눈에 보이는 적들로부터 한국을 보호해 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방인이며 야만적인 세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모든 외적인 문제는 물론, 문화적으로 빈곤한 한국의 내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강력합니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보기에 아직까지는 현 상황이 우리가 이런 표면적 보호자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허락할 것 같지 않습니다. 현재까지는 한국 내부에서 우리의 위치와 우리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이 그 어떤 적대적 영향력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았으나, 얼마 전부터 표출되고 있는 반응은 말하자면, 국왕과 그의 고문들의 일부 정책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아마도 어떤 명령에 따른 것인 듯) 러시아 영향력으로 인해 그런 정책이 수립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바로 그런 점에서 국내 내정에 대한 모종의 간섭이자 전통적 관습에 대한 훼손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제가 한국에 대해 아는 한, 앞으로 예상 가능한 한국의 분위기를 평가함에 있어서, 이 민족 고유의 관점을 절대적으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한국 백성이 유일하고도 민족적으로 성스럽게 여기는 것은 실로 매우 불명확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서 구습에 따르는 소박하고 이상향적인 삶, 다른 산악 민족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모델인 자유와 명예의 존중,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과 애국심 등등의 것입니다. 이런 관념은 실로 토착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본인의 견해로는, 최근 강요된 외형적 자주성이 현재와 같은 곤란의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보다 귀중하고 ______ 조용한, 그리고 폐쇄적인 국내적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 외형적 자주성이라는 선을 헛된 것으로 보아, 그것을 그렇게 손쉽게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에 삶에 대한 한국 민중의 식견으로 결론 내리자면, 예를 들면 보호 관계를 통해 보다 견고하고 결정적인 러시아 영향력을 확립한다는 것은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백성들로부터 반대를 ______ 않을 듯 하며, 심지어 어떠한 영토적 또는 금전적인 희생과 결부된다 할지라도, 내적 삶에 대한 전적인 불간섭과 예로부터 내려오는 통치 방식, 그리고 전통 관습 등등의 보존이 반드시 보장될 때에야, 1894년까지 존재했던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확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토착민들이 예상하고 있는 바와 같이 ______의 보장은 10~15년간 ______을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야 한국인들은 점차 새로운 조건에 익숙해지면서 자기 보호자의 비 계산적이고 활동적인 ______를 평가할 것이며, 걱정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새로운 자기 조국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직접적인 정부 개혁이라는 방법으로 국가를 개편하는 것으로 방향을 맞춤으로써 옛 통치 기구들의 외형적 체제 및 세기에 걸친 삶의 외형적 조건들을 자극하게 될 경우, 그 개혁이 전적으로 사심이 없는 선의의 다양한 활동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해서 냉담하게 반응할 것이며, 새로운 _______도 발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역사에서 살아있는 실례가 이러한 결론을 증명해 주고 있는바, 일본 정부가 ______된 것은 한국에서 군사적 점령을 시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 조직 및 내부적 삶을 개혁하려 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습니다.
제가 현재 입수할 수 있는 정보와 관찰에 기초하여 백성들의 분위기에 관해 보고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가톨릭의 뮈텔 주교가 상례적인 지방순회를 갔다가 이곳으로 잠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는 호감이 가는 친절한 노인으로 근 25년간 계속해서 이곳 한국에서 살고 있으며, 한국어를 토착민처럼 구사하는 이로서, 한국의 여론 및 분위기와 관련된 모든 문제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로부터 이번 여행에서 얻은 인상에 관해 몇 가지 정보를 얻고자 하는데, 그 결과를 참모본부에 반드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다른 정파의 활동에 대한 고찰을 언급하겠습니다. 이 정파는 스스로를 민족적 ______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그 과제는 국민 다수의 의견과는 전혀 거리가 있는, 말하자면 친미 정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러시아는 청일전쟁 전까지 한국에서 수동적 위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한국에서 미국 세력의 강화가 영국, 독일, 일본의 간계(奸計)에 대항하여 유리한 평형추를 형성할 것으로 판단했으며, 그것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 어떠한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더불어 미국인들의 유연함은 ______ 이곳에서 매우 확고한 영향력을 형성함에 따라, 한국에서 우리의 이익을 고려할 때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를 의심해야 하는 수준까지 도달했습니다. 미국의 자유로운 토양에서 매우 풍성하게 성장하여, 다양한 종파를 가진, 다수의 프로테스탄트 선교회는 미국의 공식 공사관 이상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______이 되었습니다. 이 선교회의 대표들은 아르메니아에도 자신의 조직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아시아 관련 최신 자료집 중 한 곳에서는 위험스러운 반정부적 선전이 묘사되었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의 특성에 대해 다소 자세히 기술하겠습니다. 이들 모두는 부족함이 없고 잘 차려입은, 다양한 진보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로, 자신의 가족과 함께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한국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이곳에서 그들의 생활은 부유한 앵글로-아메리칸 사회의 일반적인 삶과 같은 것으로서, 어떤 희생적이거나 금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적이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위선이 스포츠, ______, 상이한 모임들, 특히 정치적 선전과 같은 다양한 오락 활동에 몰두하는 그들의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진지한 활동은 역사, 언어 등 한국을 연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으며, 선교사들의 연구는 영자 특별 간행지인 «The Korean Repository»에 게재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연구가 그리 중요한 것은 못되지만, 다소나마 흥미로운 기사를 자주 제공합니다. 그들의 ______ 복무의 결과에 대해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대체로 보잘 것이 없어서, 지금까지 모든 프로테스탄트 종파의 한국인 기독교도를 다 합쳐도 2천명을 넘지 않습니다. 프랑스 가톨릭 신도가 이미 3만이라는 대단한 수치에 도달했으며, 프랑스 선교사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에 비해 절반이나 적음은 물론, 그들의 급료 역시 월 15~20프랑에 불과하여 미국이나 영국인 선교사의 재정상황과 비교해서 빈곤하다 할 정도로 가톨릭의 자금이 보잘 것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차이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들은 일반적이고 기독교적인 학교(평균 학생 수가 500명이 넘습니다)를 한국에 건립했으며, 백성들에게 의료 원조를 제공 중입니다. 또한 유럽 및 한국식 인쇄소를 설립했으며, 마침내는 자신의 정치적 클럽을 결성한 후, 한국인들 사이에도 동일한 클럽을 조직했습니다. 이와 같이 프로테스탄트들의 활동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대체로 계몽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만약 모든 제도와 모든 배움 그리고 그들의 모든 활동 방향이 협소하게 미국적 정신에 맞춰 깊이 함몰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만약 백성들에게 유용한 지식을 갖고 그들이 자신들의 규범과 미국식 정치의 ______을 한국인들에게 꾸준히 접목시키려 들지 않았다면, 당연히 상기와 같은 사업에서 영미 선교사들은 전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한국인들에게 의회권을 가르치는 것이나, 미합중국만이 올바르게 조직된 유일한 국가라는 점, 한국의 ______ 약함과 가난은 대중의 정치적 자각이 부족함과 동시에 정부의 불법적인 행동에 반대하여 저항하지 않은 결과이며, 정권의 독재에 끝없이 복종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끈질기게 지적한 사실들을 ______ 했다면 ______. 이런 식으로 저자의 성향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는 모든 문구들은 전부 얼마 전 한국에서 개신교도들에 의해 창간된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이라는 영어 및 한글신문으로부터 제가 인용한 것입니다. 이 염가신문은(연 1루블 50코페이카) 공식적으로는 미국으로 귀화한 한국인으로 현재 필립 제이슨이라 불리는 자가 발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제팬 데일리 메일(Japan Daily Mail)»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밝혀진 바와 같이, 상기 신문은 한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발행되는 것으로, 발행인들의 변명적 항의에도 불구하고 제이슨이 신문을 편집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충분히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간략하게나마 현재까지의 제이슨 일대기를 여기서 살펴보는 것은 이곳에 있는 한국-미국 그룹의 성격 묘사하는데 유익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의 본명은 서재필로,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궁내부에서 자신의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884년 서재필은 개혁세력으로 익히 알려진 박영효, 김옥균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 해 실패로 돌아간 정부 전복에 참여했습니다. 이에 역모를 계획한 모든 이들은 언제든지 한국의 정치범들을 환대하는 일본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서재필은 2년 동안 도쿄에서 일본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회 병원의 사환으로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의학을 약간 익힌 후, 마침내 스스로 진료를 할 수 있는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84년의 역모자들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위험한 이웃(일본을 말함-역자 주)에 있는 그들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옥균은 도쿄註 022에서 한국인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박영효에 대한 암살기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서재필에게는 대신의 직책을 제의함으로써 그를 미국에서 유인해내려 했으나, 조심성이 많았던 서재필은 한국 정부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서재필은 미합중국에 귀화하게 된 작년에서야, 미합중국 시민이라는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자격으로 한국에 재등장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 있는 한 유럽대표의 도움으로 급료 3천 5백에, 한국 농상공부의 고문직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서는 명백하게 법률의 보호 밖에 있는 형사범죄자로 기억되고 있는 서재필, 또는 Philip Jason은 이제 중요한 사회적 인물로 진보-애국적 정파의 수뇌부 역할에서 중요한 사회 활동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그들의 관점을 대변하는 무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각각 영어와 한국어로 된 동일한 내용의 텍스트 두 개를 병치해서 간행되고, 한국어 텍스트에는 쉬운 한자가 섞여 있으나, 무지한 일반대중도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모두가 아는 한글 자모로 발행됩니다. 그 나름대로 한국에서는 새로울지 몰라도, 게재된 기사들이 전부 저급하고 진부한 자유주의 이론들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확실히 식자층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정부 활동에 대해서도 다양한 비난을 가능하게 합니다. 며칠 전, 새로운 법부대신의 임명(세간에서는 러시아 외교대표의 동의를 구하여 이루어졌다고 합니다)이 «독립신문»의 기사거리가 되었습니다. 본 기사에서는 법부대신에게는 착복, 강탈, 그리고 살인 혐의가 있으며, 처음에는 자신의 비서를 살해하고 그 다음에는 부득이하게 22명의 희생자를 더 살해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독립신문»의 전형적 기사이기도 하지만, 현 정부 관료들의 특성(유감스럽게도 기사의 실질적 신빙성을 부정할 수가 없는 연고로)으로서 본인이 신문에서 스크랩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서재필은 왕과 백성들의 공감을 얻고 있지는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성향의 기사들이 매일 모두가 접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발간됨으로써 다소 바람직하지 못한 사고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아니더라도 매우 미약한 정부의 권위는 물론 러시아에 대한 감정, 현재 정부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백성의 모든 ______ 마저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미국대표는 한국에 선교사로 있었던 사람으로서 자국민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업무의 진행에 있어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는 공사관 비서인 알렌註 023입니다. 한국의 고위지배층 사이에서 그의 입지는 상당히 대단합니다. 이에 베베르는 한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실추될 경우, 알렌의 목소리가 한국의 모든 일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기에 언급된 한국인들의 특성에서 보이듯 계몽적 활동을 펼치는 선교사들과 서재필은 백성들 사이에서 전혀 인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얼마 전에는 동학봉기의 이유 중 하나로도 작용 하는 등, 확실히 미국적 성향은 국왕 개인에게도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 선교사들은 국왕의 권력을 헌법으로 제한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그리고 신의정부註 024와 최고 지배층 내에서 다수의 강력한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9명의 대신 중에서 4명이 미국식 입헌군주제를 확실히 지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 5명의 차관 역시 거기에 속해 있습니다. 또한 서재필을 포함한 일부 부처의 미국인 고문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브라운을 비롯하여 영국 선교사 집단이 가담한 미국 선교사 단체는 현재 ‘영어권 파벌(English language faction)’이라는 것을 구성하여 어느 정도 단결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만큼, 그 세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력은 얼마 전 학부대신의 파면에서 명백한 힘을 발휘했으며, 유럽에서는 아직 잘 알져지지 않았을지 모르나, 일본 언론과 일본 내 영국 언론은 이미 그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에 더해 양자 모두註 025는 미국인들의 활동과 연합할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가 위험하다는 것을 공론화시킴으로써 ‘영어권 파벌’과 투쟁하려 하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은 최근 한국인들 사이에서 ‘독립협회(Independent Club)’라는 명칭의 정치 협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협회의 의제는, 본 협회에서 발간한 한국어 월간지 첫 호에 잘 나타나 있듯, 독립이라는 이념 하에서의 국민교육, 진보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애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단지 입헌군주제에 대한 선전일 따름입니다. 왕은 협회의 설립에 대해 보다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언제나처럼 자신의 불만을 확실히 표현하기를 주저하여 세자에게 협회가 필요로 하는 자금 1천 달러를 내어주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현재 협회는 이미 한국인 2천명에, 극단적으로 미국주의를 지지자하는 이들로서, 특히 외부대신 이완용, 안경수 장군(협회 대표), 서재필 등 정부 고위 인사들을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백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 확실한 만큼, 입헌군주제에 대한 호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기로 결정한 협회는 한국 자유의 ______를 축하한다는 구실로 진보적인 대중적 애국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고안해내고 있습니다. 그 예로 얼마 전에는 과거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______ 길에 위치한 오래된 문註 026을 헐고 그 자리에서 ‘독립문(Арка независимости)’ 기공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행사는 미국인 선교사의 공개적인 기도로 시작이 되었고, 다음에는 일련의 정치적 연설과 본 행사를 위해 작곡된 자유주의적이면서 애국적인 국가 등이 이어졌습니다.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이 의식은 전반적으로 특이해서, 러시아는 물론 프랑스 외교대표도 이 행사에 참석하여 축하할 수 없었으며, 영국대표와 독일대표는 연설이 시작되자마자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단지 일본공사 가토만이 의식의 거행을 위해 참석 중인 일본인들을 축하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가토는 한국의 독립에 대해 한국인들은 다름 아닌 일본의 노력에 고마워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미묘하게 비꼬는 투의 축사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활동을 파악해 보면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모든 다양한 방법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선교사 집단의 세력은 아르메니아에서의 그것처럼, 대중 계몽을 구실로 백성들에게 정치적 선동을 가르침으로써 러시아가 지지하는 현존 질서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고 있는 만큼, 한국의 국가적 이상에서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직접적인 이익 및 극동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위해서도 해롭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이 한국의 운명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지는 물론 예측하기 어렵습니다만, 이것으로 인해 최소한 가까운 미래에, 이미 일본이 경험했던 즉, 자유주의적 개혁과 정파 간의 투쟁이라는 토양 속에서 자라났던 위험 요소가 한국에서도 조성될 것입니다. 시모노세키에서 그와 유사한 것이 있었던 바와 같이, 이런 위험 요소는 자기 지도자에 대한 음모라는 치욕적인 범죄로써 자기 자신을 과시한 장사(soshi/соши)들의 이름으로 행해졌으며, 시간이 흐르면 이곳 한국에서도 일본인들을 포함한 모든 정치선동자들의 손에 위험한 무기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언제나 태평양 연안 국가들 문제에 있어 불간섭의 원칙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요한 이유로 아르메니아의 예보다는 더 미국의 이해관계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가능한 모든 정치적 결과를 연구한 전문가가 아닌 만큼, 순수하게 군사적 관점에서만 언급하겠습니다. 우리가 한국을 점령하여 여기에 보호 관계를 형성해야 할 경우, 현재와 같은 성향의 미국 선교 활동이 한국에서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소 근시일 동안, 우리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한국에서의 미국 영향력을 고려해야만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게다가 미국인들에게는 선교의 방향이 빗나가게 될 경우에는 이를 알려주는 교시가 존재합니다.
다음으로는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현재까지 일본인 문제에 대해 그렇게 다룬 것과 같이, 이 문제는 연구하기 매우 어려운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이 모든 업무와 관련하여 무덤처럼 침묵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에서의 특수한 상황들로 인해 그들은 당연히 모든 부분에서 특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받지 않은 계몽자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적 태도가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음에 의심할 바 없지만, 현재, 특히 서울에서 그런 적대적 태도가 점진적이면서도, 매우 완연하게 감소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실히 목격할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유리한 의미에서 반동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친일파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이미 상당한 다수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앙과 지방 행정부의 거의 모든 개인 구성원을 경질하여 그 자리에 자신의 동조자들을 임명하였으며, 새로운 직위까지 만들었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 8도의 옛 영토체계가 폐지되고 그 대신 25개의 현으로 새로이 나라를 구획했습니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이런 일본의 주구들은 자신의 관직을 잃었으며, 관직 임명과 관련하여 “뒤에서 힘써 주는 것”으로 뇌물을 수수하는 행위도 할 수 없게 되면서, 이제는 자신의 가족 및 하인들과 함께 실총(失寵)하여 빈곤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비롯한 모든 동양에서는 시골의 촌장에 이르기 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특히 자기 주변 인물을 실탄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측근으로 방대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한 가지 상황만으로도 자신의 외국 보호자가 권좌에 복귀함으로써 더 좋은 시기가 오기를 ______ 기대하는, 상당수의 한국인 집단이 형성되고 있음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인들이 각 지방에서 지속적으로 정주함에 따라 그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근무에 따른 이익, 재산상의 이익, 무역에 의한 이익, 그리고 가족적인 이익으로 연결되었으며, 최근에는 다른 분야 즉, 정치적 사건에도 동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 사이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상당 정도까지 밀접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일정한 대가를 제공하면 일본인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백성 계층이, 유감스럽지만, 최근 들어 한국에서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추가로 고려한다면, 일본인들은 자신의 절대적 영향력이 쇠락한 후에도 항상 한국인들 중에서 일정 수 이상의 공모자와 일정 수준 이상의 호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소위 친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고정 인원은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로 인해, 국왕이 세운 현재의 체제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며, 국왕에 의해 국내에 확고한 질서가 확립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자들로서 그 수가 매우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공사관은 한국의 현 상황과 관련하여서도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지 않는, 이른바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중요한 지역에 배치된 ______ 일본 경비대라는 물리적 힘과 눈에 띄게 약해진 일본에 대한 한국 백성들의 적대적인 태도 등은 현재 일본인에게 매우 유리한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지금 일본의 지지자들은 현 체재와 갈등을 빚고 있는 다른 정파들 즉, 입헌주의 친미파와 민족주의적 보수파를 손에 넣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왕을 러시아공사관에서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구한국파의 일부가 현재 일본공사관과 관계를 맺고 있음이 확실하며, 왕의 호위를 일본경비병에게 넘기겠다는 제의마저 했지만, 이번에는 일본공사가 정부 전복 음모에 절대 가담하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한국의 전(前) 섭정, 대원군이 특히 대중을 선동함에 있어 일본인들의 매우 중요한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금되어 있고 모든 권위가 매우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내에서 상당한 정신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백성들과 위정자 계층 내에서도 대원군의 요원들은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백성들의 눈에는 상당한 인물로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서울에서의 모든 백성 운동을 수습할 수 있는 일본수비대의 존재는, 비록 그 운동이 한국 정규군에 의해서도 진압될 수 있는 정도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일본공사가 유리한 요구를 강청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력한 군사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현저하게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은 아관파천으로 민족의식이 부각되고 증대됨으로써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순수한 우연적 반동 현상으로서, 아직까지는 백성들 사이에서는 확고히 뿌리 내리지 못한 상태일 것으로 판단하는 바입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의 사이에서 실로 힘들었던 기억들을 많이 갖고 있으며, 일본의 개혁활동으로 성립된 모든 체제와 백성 다수의 공감대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다시금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새로이 시도한다면, 한국에서 그들의 권위는 종국적 쇠락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화적 수단을 이용한 일본의 영향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정부註 027는 예전에나 지금이나 염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종적 유사성이 정부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인의 삶의 기반을 형성하는 것들은 고전적인 중국 문명의 영향 하에 위치한 것으로써, 세계관을 형성하는 주요 기반, 문자 등등에서 한국인과 공통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일본공사관은 서울에 두 개의 국립 일본어 학교를 개교하도록 한국 정부에 강청했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인들 스스로 한국인들을 위한 사립학교를 더 설립했으며, 바로 이곳 서울에서 일본영사가 검열하는 한국어와 일본어 혼용 신문을 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정책의 성과는 현재까지 미미하며, 일본인들이 달성하려고 했던 문명화된 유럽 민족과 같은 종류의 영향력은 아직 극도로 미약합니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은 적대적인 유럽문명보다 한국인들에게 훨씬 더 확고한 동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화적인 방법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전통적이고 민족적이면서도 아시아 전역에 보급된 중국적인 문화 기반을 경시함에 따라서 많은 것을 잃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유럽문명을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된 양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오래 전 다수의 한국 젊은이들이 일본의 다양한 교육 시설에서 연수했던 것이 훨씬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었으나, 유럽문명이 확연하게 일본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한 한국 정부가 학생들을 본국으로 소환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러한 요구에 거부하고 일본 공민권을 받아, 언제나 일본의 환대를 받는 한국인 정치적 망명자들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스스로를 “한국 학생 클럽”이라고 명명한 이 단체의 회원은 약 200명에 달합니다. 그들은 도쿄에서 자신들의 특별한 정치저널을 발간하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자유로운 일본의 환경에서 조국의 개혁 필요성을 선전하며, 지하인쇄물의 형태로 한국에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이 정치적 망명자이고 백성의 공감을 얻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그들이 일본인들의 수하로서 한국에서의 문화적 선동을 위한 직접적인 무기로는 봉사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그들과 공감하고 있는 서재필과 그들을 예리하게 감시하고 있는 경찰청을 제외하고는, 현재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들의 정치적 활동에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신의 정보들은 전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사실, 즉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교역량 또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현재 교역액은 1백만 달러를 간신히 상회하는 정도여서, 일본상인을 한국에서의 교역독점 판매자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총 교역액에서도 중국에 뒤지고 있습니다. 최근 그들의 사업은 점차 악화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서울 내 소형 상점들 중에서 ______, 현재 상점들은 폐점하여 사업을 중단하였으며 이미 ____________.
이렇듯, 전체적으로 저는 다시 한 번,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하여 일본공사관의 ______ 수완 덕택에 병력이 주둔함으로써 군사적 우월권이나마 예외적으로 고수하고 있으나, 최근 서울에서 일본 영향력의 현저한 강화는 전적으로 우연한 것이며, 그런 현상은 상술한 바와 같이 정부의 애매모호한 지위와 백성들의 전반적인 불만에 기인한 것이라고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의 일본 영향력 강화와 관련하여 많은 전문가들이 제시한 의견에 따르면, 최소한 가까운 미래에 일본의 영향력은 그것을 강화시킨 원인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백성의 불만이 작년 10월과 같은 격렬함에 도달함에 따라 일본인들에게 다시 한 번 어떠한 쿠데타를 수행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 예측은 매우 어려우며 저 또한 이런 저런 결론의 가능성을 논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서울에 있는(12월 현재) 일본인의 총 인구수는 1,620명을 상회하며, 제물포에는 4,050명입니다. 두 도시 모두를 합하면 일본인은 총 5,500명이 넘습니다. 군대를 제외한 부산, 평양, 원산, 그리고 다른 지역의 인구분포에 관한 자료가 한국의 중앙기관이 보유하지 못한 상태여서 아직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서울과 제물포의 일본인들은 유럽 이주민들이 중국에서 향유하는 것과 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한 채, 특정 구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보병 2개 중대와 전신업무를 위한 공병대 및 대포 몇 문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수비대는 서울 시내의 한국인 빈민가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보다 위생적인 막사를 건축하길 원했던 군 당국의 청원은 한국에서의 철군 가능성으로 인해 참모본부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주둔지에서 외출이 허가되는 관계로 거리에서는 그들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제물포에는 20명의 병사가 체재하는 작은 임시 막사만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한국에 배치된 일본군에 관한 순수하게 군사적인 정보는 그 문제의 중요성을 고려한 일본 측이 극도로 조심하면서 완고하게 비밀을 유지함에 따라 지금까지도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필요한 모든 자료들을 수집하는 즉시 상세하게 특별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이런 조심성과 비밀스러움을 극복하려면 그들과의 보다 밀접한 친교가 필요합니다만, 당연히 시간이 요구됩니다.
현재 고려해야만 하는 주변 환경과 영향력을 우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한국에서 러시아의 세력에 동조하는 이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서술하겠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현재의 정부와 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만, 스스로 러시아의 친구라고 호칭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한국의 고위층에 의해 둘러싸인 국왕이 친러 세력의 가장 중심이며, 국왕의 몇 안 되는 개인적 친구들, 그리고 서거한 왕비와 친분이 두터운 이들 또한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중요한 협조자가 어떤 이들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의 국왕 이희(李熙)는 1852년 6월 25일 선대왕이었던 철종의 남동생이자 친부인 대원군의 집에서 출생했습니다. 당시에는 김씨 일족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 대표자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김병시로써 왕국이 그들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원군은 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고로 아무런 직책도 맡지 못한 채 매우 빈한하게 생활했습니다. 철종이 고관 박영효에게 출가한 딸 하나만 남기고 사망하자, 여계로는 왕위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법에 따라 왕위계승자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 문제로 다양한 궁정 세력들 간에 격렬한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왕의 조카들 중에서 선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 때 왕비의 세력은 대원군의 큰아들이 아니라 작은아들을 후계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시키려 했습니다. 젊은 왕자는 당시 12세로 고위 관료들이 이하응의 차남에게 왕위계승자로 임명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이희를 방문했을 때,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길거리에서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1년 뒤 왕위에 즉위했으나 모든 정사는 과부가 된 왕대비가 관할했습니다. 그러나 왕대비는 곧 자신의 권력을 한국의 섭정으로 공식 임명된 대원군에게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냉혹하고 엄격한 성격의 이 노인은 옛 것에 대한 맹목적인 광신도로, 한국 사관의 표현에 따르면, 기이한 철의 손과 돌의 심장으로 통치했고 그의 치세는 가톨릭 선교사들과 토착민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 일본군함에 대한 포격 등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왕이 16세가 되어, 혼사 문제가 부각되자, 새로운 왕비 일족이 국정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반드시 장악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이 문제는 다시금 많은 음모를 야기했습니다. 긴 싸움 뒤에, 대원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민씨 가문 출신인 왕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자신의 가문 중에서 어린 처자를 왕비로 간택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곧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여자였던 자신의 아내에게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대원군의 세력은 쇠락을 거듭했으며, 이후 한국의 모든 국내 역사는 민씨 가문을 대표하는 야심찬 왕비와 막강한 전(前) 섭정 대원군 사이의 끊이지 않는 권력투쟁으로 그려집니다. 유혈사건들로 가득했던 이 투쟁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왕비의 비극적 죽음과 대원군의 유폐로 막을 내렸습니다.
예스러운 중국적 분위기의 고전 교육을 받은 국왕의 정서와 왕비의 정서는 자연스럽게 한국 봉건주의로 기울어 있었던 만큼, 한국 궁궐에서의 중국 영향력은 점차 막강해져 갔습니다. 불만세력은 이것을 이용해 1882년 중국의 영향력과 함께 민씨 가문의 통치를 뒤엎고 앞에서 언급된 바 있는, 철종의 사위 박영효를 왕위에 올리려는 음모가 꾸며졌습니다. 정부 전복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왕은 잠깐 동안 반역자들에게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의 목전에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살해당했으며 국왕 자신은 오로지 기지와 침착함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왕비는 피신하여 근 1년 동안 지방 어딘가에서 은신해 있었습니다.
이후의 10년은 이미 왕비의 무절제한 통치 시기로서, 왕비는 자신의 낭비벽, 끝없는 세금, 그리고 또한 백성들을 수탈하는 민씨 가문 구성원에 대한 노골적인 비호로 봉기를 야기했으며, 이 봉기가 이웃 국가들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후일 청일전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부인의 조언에 따라 왕은 러시아대표의 조언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고도 없이 중국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고, 그 뒤를 따라 일본도 파병했습니다. 이러한 행보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1894년 7월에 왕궁이 일본군 분견대의 습격을 받은 것과 일본의 공사가 왕의 처소에 나타나 왕권을 제한하고 왕비의 국정참여를 제한하는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국왕은 칙령에 서명하고, 제정된 헌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세력의 동조자가 된 왕비가 지닌 영향력은 국왕이 지닌 일본에 대한 공포를 능가했습니다. 국왕이 일본 세력을 한국에서 제거하려는 몇 가지 조치를 내리자, 미우라註 028 후작은 자신의 ______ 그리고 가장 완강한 정적과 끝을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궁궐이 다시 한 번 폭풍에 휘말리면서 왕비는 왕의 목전이다 싶은 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국왕과 세자는 능욕을 당했으며, 불시에 침입한 일본 장사 무리에게 살해당할 수 있는 위험에 여러 차례 처했습니다. 이후 궁궐은 일본경비대에 의해 포위되었으며, 국왕의 동의 없이 대원군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의 포로가 된 국왕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자유와 이전의 왕권을 되찾기 전까지 단 일분도 자객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희는 유년 시절부터 끊이지 않는 음모와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으며, 그는 언제나 유혈 서사시 안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인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명의로 한국의 일시적인 통치자들의 의지를 재가해주면서 그 유혈 서사시에서 언제나 수동적인 방관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최근 반세기 동안의 한국 역사에서 발생한 사건을 짧게 열거해 보았습니다. 그것들은 다소간 국왕 개인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 모든 유혈사태가 왕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면서 국왕은 극도로 소심해졌습니다. 왕이 러시아라는 강력한 보호자 아래 있는 지금조차도, 그는 우연히 도시에서 울리는 총소리에 매번 놀라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있었던 일본중대의 축일에, 그는 실로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했으며, 모든 한국인 경찰과 러시아 상륙 부대가 진땀을 빼도록 만들었습니다. 눈에 띄게 건강을 회복하고 생기를 찾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조차도 그는 일본초병들의 감시 하에 있었던 때를 잊지 못한 채, 매일 밤 암살자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물론, 현재까지도 매일 밤 꿈을 꾸면서 밤을 새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동틀 녘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있습니다. 현재 국왕은 개인과 국가에 대한 모든 생각을 개인의 안전에 몰두하고 있을 만큼, 본인 개인의 안전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국왕의 성격은 매우 수줍음을 타며,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모든 어려움에 깊은 동정심을 나타내고 모두에게 진심으로 선의를 갖고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유교적 관습의 이행에 매우 충실하여 언제나 격식을 따집니다. 업무를 떠나서 보면 왕은 언제나 진실로 매혹적인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업무상의 그는 약하고 불안정하며, 스스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없어서 자신과 정 반대가 된다 할지라도, 강력하고 집요한 인성을 가진 이들의 영향력에는 쉽게 굴복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______ 문제에 있어서만, 그는 가장 이상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바, 바로 왕비의 암살자들에 대한 복수입니다. 아마도 국왕 스스로 자신의 유약한 성격을 알고 있는 듯 보입니다. 즉 그는 모든 면에서 지지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에서 조차 그는 자신이 선택한 고문 중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적 정치의 ______ 전통 속에서 교육받은 국왕은 고문의 조언을 항상 사적인 통로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확인하려고 애씁니다. 일례로, 현재 러시아대표는 그 절대적 위치로 인해 당연히 여타 고문 중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며, 외견상 국왕은 국내외적 업무에서의 지배권을 그에게 전부 이양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현재도 다른 인물들, 예를 들면 알렌, 브라운, 다양한 미국인 선교사들, 심지어 우리 공사관의 하급 관리들의 충고를 은밀하게 요구하여 베베르(К. И. Вебер)의 조언을 확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3자들의 영향력에 근거하여 정부의 중요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국내 통치 문제에 있어서 아마도 국왕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듯하고, 또 아무것도 잊지 않은 듯합니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겪은 모든 힘든 경험으로부터 일본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심만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쿠데타의 시도, 왕비 암살, 대원군의 두 번째 섭정 등과 같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 사건들이 자신의 연약한 통치, 왕비의 낭비벽, 민씨 가문과 양반 전체의 무절제한 지배, 그 결과로서 증대된 대원군의 영향력, 그리고 이런 모든 사실에 의해 극단에까지 치달은 백성들의 감정 등이 적들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왕 자신은 자유를 느끼는 반면, 일본의 테러가 과거의 사실이 되어버린 현재, 한국의 국가 체제는 점차 과거의 형태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즉 양반들이 점차적으로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면서 서서히 목청을 높이기 시작하고 있으며, 민씨 가문은 대신 및 의정부 요원 등과 같은 국가 핵심 요직을 차지하여 이미 5개의 직책이 민씨에 의해 점유되어 있는 현실 등등이 그런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경험상,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브라운은 국왕의 공식적인 하명에도 불구하고 궁정에 할당된 50만원 이상은 제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지출규모의 증액을 감히 요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왕은 과거를 회상하며 사적인 방법으로 자금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비밀리에 뒷거래를 통한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이 국왕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백성들은 러시아 공사관의 사무실과 현재 국왕의 내각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런 내각에서 여러 고관들과 관찰사들에게 서신을 발송하여 국왕께서 그 돈과 다른 돈 모두를 기꺼이 선물로 받아들이실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국왕의 희망은 참고사항이 될 것이며, 이에 관찰사들은 지출된 자금을 10배로 보충하기 위한 독려를 지고한 국왕으로부터 받은 것이 됩니다. 이 자금의 대부분은 고인이 된 왕비 제사와 그녀의 신분에 맞는 능을 축조하기 위한 장소 물색에 지출되고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상당히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행정부에서도 뇌물수수와 매관매직 시스템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일례를 들면, 얼마 전 국왕이 가장 신뢰하는 박정양은 이런 시스템을 지나치게 악용하다가 자신의 관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매관매직 및 뇌물수수와 관련된 관리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상소가 국왕에게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실주의와 뇌물 시스템이 궁정 도처에 관례화된 현재, 그 문제와 투쟁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왕을 둘러싸고 있는 수행원들은 대부분 얼마 전까지 실총(失寵)해 있다가 행운의 여신의 미소를 누리고 있는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호감 및 러시아 공사관과의 친밀함을 이용하여 왕을 감탄시키거나, 여러 가지 소문, 예를 들면 새로운 공사가 부임하면 러시아의 대 한국 정책 방향이 변화될 수도 있다는 식의 소문이나 그와 유사한 소문을 가지고 국왕을 겁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야에 있어 실제로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은, 학식도 부족하고 그저 그런 한국 사람에 불과하지만, 아관파천 계획을 수립할 당시 왕의 신뢰를 받은 자로서, 현재는 학부협판에 임명된 김註 029 시종(侍從)입니다. 김 시종이 러시아 공사관의 통역인 관계로 그를 통하면 국왕의 전적인 총애를 받을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사실로 인해 자연스럽게 대신이나 국왕과 매우 친밀한 다른 이들의 질투를 받고 있습니다. 모든 궁정 고관은 국가의 어려운 처지는 망각한 채, 서로 간계를 꾸미고 국왕에 대한 영향력을 차지하려고 암투 중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무질서와 자신들의 파렴치한 착취에 따른 책임을 러시아의 영향력에 전가하면서, 국왕과 정부의 내정 활동이 러시아대표의 압력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백성들 사이에 퍼뜨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스스로 러시아 친구라고 자칭하는 이들의 현실입니다. 국왕은 선량하지만 개성이 전혀 없고 겁이 많은 인물입니다. 개인적인 감정에서 그가 러시아에 호감을 갖고 있고 감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과거나 현재 모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그런 감정에서 과연 확고하게 형성된 정치적 신념을 확인할 수 있을지 의문이며, 만약 상황이 달리 전개되었다면 전혀 다른 경향의 정책을 취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한국의 국왕은 현재의 러시아를 위해 진실하고 강력하긴 하지만, 신뢰할 만한 동조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인물들은 차치하고, 한국에서 러시아파라고 불리는 나머지 구성원들 중에서도, 최소한 고위층 간에 형성된 그들 간의 복잡한 상호관계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제가 갖고 있는 인상으로는 그들 모두를 협잡꾼들이라고 밖에는 달리 특징지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평판을 중시하는 김병시 같은 인물들은 이들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이 협잡꾼들의 파렴치한 활동은 현재 한국에서 형성된 러시아 영향력에 대한 태도에서 확연하게 구별되는 일부 환멸의 감정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한국을 포함해서 아시아 역내의 고위 지배층들은 파렴치함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한국에는 우리가 더욱 신뢰할 수 있는 다른 동조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농사를 짓는 평화적 성격의 현지 주민 모두입니다. 제 개인은 물론 최근 한국을 여행했던 모든 러시아인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우리에게 항상 견고하고도 진정한 호감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한국의 내부 상황에 대한 보고를 이와 같이 마무리하면서 저는 이 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평온을 되찾지 못한 채, 매우 소란스러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재차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와도 말할 수 있는 것은–농민에서부터 장관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불확실하고 어려운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며, 실로 머지 않는 장래에 내부의 무질서 또는 외부로부터의 노골적인 간섭과 같은 형태로 위기가 닥칠 것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불만이 매우 깊숙한 곳까지 퍼져 있으며, 아마도 큰 사건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백성들은 무소불위의 양반과 과중한 세금, 정치적 무질서, 그리고 점증적으로 한국인 삶에 침투하고 있는 외국의 영향력에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 양반과 외국의 영향력에 의해 자신의 직위에서 배제된 지배계층과 궁정에 있는 왕비 일족 모두는 내정에 대한 외국대표의 영향력은 물론, 자신이 행사하는 배타적 영향력에 대한 외국대표의 영향력을 번거로운 중압감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본인이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들 중 일부는 온고의 정신으로 결사함으로써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일부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키고자 합니다. 국왕 그 자신은 아직까지도 궁으로 거처를 옮길 만큼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국내 사정의 안정화가 너무 늦게 진행되고 있으며, 브라운의 재정적 후견 역시 거북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로 인해 자신의 상황을 불만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도처에 발화 물질들이 너무나 많이 쌓이고 있습니다. 더욱이 일본은 이러한 정세를 주의 깊게 감시하면서, 언제든지 이 발화물질에 기름을 끼얹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확고해진 러시아의 영향력을 동요시키거나 러시아가 한국에서 순수하게 군사적인 어려움에 빠지도록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시기에 의도적으로 사태를 복잡하게 조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 이런 상황은 더욱 위험합니다. 수많은 도적들이 국내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지방으로부터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으며, 이 무리들이 상호 연락을 취하기 시작하여, 이전의 동학과 같이 의병조직을 창설할 것이라는 말이 이따금씩 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 지도자들이 무엇을 자신의 정치적 과제로 삼았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검증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제가 지방으로부터 보고받은 소식들 중, 실로 경고적인 상황 하나를 보고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 지방의 농민들은 여름에 혼란이 발생하게 되면 투자한 노동력에 비례하는 수입을 보장할 수 없는 만큼, 봄철에 자신의 밭에 파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예견할 수 없는 중요 사태가 장래 전개될 가능성은 물론, 한국 문제의 현재적 국면의 발전 가능성을 은폐하고 있는 현재 한국의 국내 사정을 절대 종국적인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장래와 러시아의 본질적인 극동지역 군사 과제는 가장 밀접한 형태로 연관되어 있는 만큼, 향후 한국 문제의 전개 가능성을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개인적 견해는 물론 다수 한국인의 견해 역시 그러한데, 즉 한국의 문제는 러시아의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간섭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현재의 한국은 과거로 회귀할 수도 없거니와 과거처럼 조용하고 잊어진 상태로 아시아의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것도 불가능 합니다. 한국은 세계무대에 편입되었습니다. 세계무대에는 복잡한 군사적, 통상적, 그리고 정치적 이익이 실타래처럼 엉키기 시작했으며, 아시아의 태평양 연안도 벌써 여기에 연루되었습니다. 그 동안 한국은 중국에 비해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한국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내부 문제를 조정할 수 없는 상태라서 외부로부터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한국 내에서의 현재와 같은 지배적 지위를 포기할 경우, 심각하게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며, 아마도 내분이 발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대외적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어 우리에게 적대적인 여러 세력들이 강화되면서 서유럽과 일본무역이 한국의 시장을 점령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일본이나 중국에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예속될 것입니다. 결국 불가피하게도 이런 상황은 태평양 연안에서 우리의 긴요한 이익을 수호하고 정치적 세력균형을 복구하기 위해 적극적인 군사개입을 필요불가결하게 만들 것입니다. 다른 면에서 독립국 한국의 문제를 계속해서 비밀리에 지도할 경우 현 체제가 강화되고, 현 지배 계급이 러시아라는 이름 속에 자신을 은폐시킨 상태에서 과거처럼 나라를 박해하고 착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호적이며 또한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자인 한국의 백성 전체로부터 저항을 초래할 것입니다. 근시일 내에 누군가가 한국의 국가체제를 실질적이고도 근본적으로 개선하게 될 것임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뿐이 아니라 일 년 간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러시아가 실질적인 한국 통치에 대한 무거운 도덕적 책임감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 함께, 우리가 다양한 적대적 현상들과 투쟁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특권을 이용하지 않으면, 사안의 본질 상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을 수 없는 제삼자의 영향력이 동시에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는 조만간에 러시아 인민들의 경작지가 되어야만 하는 이 평야에서 그 잡초들이 어떻게 번성하는지를 수동적으로 지켜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토착 귀족들의 음모와 함께 이런 적대적 요소들은 백성들의 증가하는 불만에 기초하여 여러 가지 곤란한 상항을 창출해 내거나, 아니면 우리의 보호를 받고 있는 현 체제에 대응하여 모종의 무질서를 의도적으로 야기하려고 노력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우리의 군사적 개입으로 이어질 것이나, 그 때의 조건註 030은 주민들과의 우의적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군사적 상황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 군사적 입장에서 우리는 한국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한국이 어느 나라이건 간에 이웃 열강의 권력범위로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결론에 도달함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한 가지 뿐입니다. 즉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조만간에 이 나라를 점령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지 않을 경우 독립된 한국을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는 차후 언제든지 군사적 점령이 뒤따르는 미봉책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약 국가의 점령 또는 임시 방책으로서 노골적인 보호관계의 설정이 현 시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된다면 미리 곤경에 대비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군은 적대적인 타국의 영향력이 강화되거나 백성들의 우발적인 동요에 둔감해질 수도 있으므로, 한국 내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이용하여 이러한 불가피한 사태로부터 안전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보장이 어떤 것이어야만 하며, 어떤 방법으로 그 보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제 관할 이외의 문제입니다. 본인은 다만 군사적으로 러시아의 특수한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그런 보장이 필요불가결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선에서 논의를 한정지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언급하자면, 현대적 조직하에서 한국군을 훈련시키는 일과 심지어 한국에 대한 재정적 원조, 그에 더해 국왕의 개인적 호감 같은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 모두는, 그 자체로서는 한국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을 보장해 주는 중요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최근의 역사적 실례가 증명하듯이, 백성들이 일본의 무한한 지배를 와해시키려는 봉기가 며칠 동안 발생했을 때 우리 군사 교관단의 업무와 재정적 원조가 이 사태를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註 01818) 일본이 추진했던 개혁정책을 이렇게 표현했음-역자 주.註 01919) 좌의정-역자 주.註 02020) 儒學均-역자 주.註 02121) 원문에는 산긴순(Сан-Кин-Сун)이라고 나와 있으나 당시의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잘못된 표현인 듯. 이후 신기선으로 표기한다-역자 주.註 02222) ‘상하이’의 오기-역자 주.註 02323) 알렌(Allen Herace Newton). 한국명 안연(安連)-역자 주.註 02424) 아관파천 이후의-역자 주.註 02525) 일본 언론과 일본 내의 영국 언론-역자 주.註 02626) 영은문-역자 주.註 02727) 일본 정부-역자 주.註 02828)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역자 주.註 02929) 김홍륙(金鴻陸)을 말함-역자 주.註 03030) 지금 같은-역자 주.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9. РГАВМФ, ф.9, оп.1, д.31, лл.130∼146об.
서울주차 무관
1897년 5월 25일/6월 6일
№ 33
서울(한국)
수신:참모본부
상신
한국 국왕의 환궁 이후 한국의 정세
본인의 2월 2일자 마지막 상신과 3월 6일자 제13호 보고서에서 본인은 한국 국왕의 환궁에 대해 보고를 드렸으며, 금번에 발생한 사건을 직접 관찰한 이로서 이번 사실이 보수적 과두 정파의 승리라는 의미를 가지며, 우리의 이익을 위해 상서로울 수 없다는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의 정치에 있어서 환궁 이후부터 이루어진 모든 것들의 전반적인 의미는 안타깝게도 외견상 저의 관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한국이 어려웠던 시기에 제공했던 보호 역시 조금씩 잊혀 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국왕의 환궁 이후, 첫번째 왕명은 김병시를 제1대신註 033에 임명한 것이었습니다. 김병시에 관해서는 본인의 첫 번째 보고서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김병시는 아무런 주저 없이 제안된 직책을 수락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2월 13/25일 러시아 공관에서 실로 흥미로운 문서 즉, 한국 국왕의 뜻을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설명한 포고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본 포고문에서 한국 국왕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1년 전 우리가 궁궐을 떠난 이후, 국가 대사가 쇠락으로 치달았으며, 우리가 외국 공관에 체류하는 것과 관련하여 백성들 사이에서는 두려움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이런 상황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대신들의 권고에 따라 우리는 경운궁으로 환궁했으니, 이에 백성들은 마음을 놓아야 할 것이다. 국가 대사가 걱정스런 상황에 처한 것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서투른 국정운영에서 기인한다.” 이후에는 ‘국가라는 배’가 질서를 회복할 수 있도록 새로이 노력할 것을 내각과 백성들에게 하명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식으로 국왕 스스로 본인을 자책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지난 1년간의 국정 쇠락을 지적하는 것은 그 근거가 더욱 희박합니다. 비록 현재라는 시점이 비교 자체를 불리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일본의 군사 독재가 횡횡하고 내부질서의 완전한 교란과 내전 등으로 거의 무정부적 상태였던 작년의 암울했던 시기를 현재 한국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상기 포고문에서 언급된 사실이 근거 없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내각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기의 문서를 국왕에게 제출하여 서명하도록 한 것은 정파 투쟁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당 부분 설명됩니다. 백성들이 국왕께서 우리 공사관에 체류하시는 것에 대해 심하게 불안해했다는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국왕의 환궁 이전에 불안과 불만이 실로 강하여, 어떤 복잡한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불만은 귀족들 사이에서만 압도적이었을 뿐입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질서 교란의 책임이 교묘하게 외국인 고문에게 전가되어졌으나, 백성들이 더 걱정했던 것은 귀족들 스스로에 의해 형성된 무질서의 결과였습니다. 여하튼 본인이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고자 하는 본 문서는 최소한 이곳 한국에서 조성된 상황을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 정부는 국왕의 환궁이 어떤 위험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이며, 이제는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다양한 불법적인 것들과의 투쟁을 전개하여 질서의 확립 즉, 기이한 민족적 관습, 법률, 그리고 과거의 통치 형태를 확립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어조를 보였습니다. 실제적으로 이런 모든 애국적 과제의 내용을 보다 더 단순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외국의 압력註 034은 기존의 유럽식 지배를 의미하며, 반면 구 법률 복구의 우선적 사항은 과거부터 귀족이 행사하던 무제한적인 전반적 통치권의 복구라는 것입니다.
재차 말씀드리자면, 상기와 같은 사실들이 한국 국왕의 환궁 이후 한국 정부가 견지한 전반적인 정치적 색채입니다. 현재 밝혀진 바와 같이, 여러 고관들(지금 유럽으로 파견된 민영환을 포함하여)의 교사를 받아, 국왕의 환궁을 성공시킨 조종자들은 투쟁 중에도 한동안 부단히 국왕에게 상소를 올렸으며, 아관파천에 동조한 이들을 처벌하고, 모든 새로운 법률 규정을 폐지하며 외국 병사들을 추방할 것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이런 움직임이 진정되었으며, 자유로운 한국 정부는 자신의 임무 수행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제1대신 김병시의 첫 번째 명령은 궁중 예법을 전통적 의미에 입각하여 엄격하게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백성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양반 존경에 관한 법률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환궁 이후 한국 정부의 최초 활동 당시 공식적인 명령 공표가 바로 이 단계에서 중단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부 국내적 문제들을 포함하여, 제1대신이 과거의 명칭에 따르면 이른바 좌의정이라는 직책이 예전에 행사했던 모든 권리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취하면서 제1대신과 국왕 사이에 불화가 재차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이전 보고서에서 이미 보고 드린 바와 같이, 국왕께서는 우리 공관에 거처하실 때에도 왕실의 세비를 확대하기 위해 이미 다양한 개인적 수단에 의존했으며, 현재는 거리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보다 쉽게 그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미 양력 3월 2일에 국왕은 대신에게 알리지 않고 각 도에 3명-또 다른 설에 의하면 8명-의 무소불위의 전권특사를 파견하여 감영의 업무를 검열하도록 했습니다. 이어 얼마 있지 않아 백성들과 감영으로부터 금전을 강탈하기 위해 특사들이 직권을 악용하고 있다는 상소가 전국에서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드는 차원에서 우리가 이곳 신문에서 확인한 악의적 행위들을 보고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한 곳에서 특사가 상인에게 특별 세금을 부과했으며, 다른 곳에서는 직위 매수대금을 노리고 관헌을 경질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한 가족이 지닌 토지 매매를 강요하여 그 돈으로 그 가족 중에서 체포된 사람의 방면 대금을 지불토록 하는 등 여러 악행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국왕이 전적으로 탐욕스러운 것은 아니며, 금전적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돈을 거둬들이는 수전노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왕비의 장례식 때문입니다. 장대한 장례의식을 위해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축조해야 한다는 숙제는 최근 들어 일종의 망상처럼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미 7만註 035을 지출했으며, 또 행렬을 위해 필요한 인원과 필마를 자연스럽게 공급하는 대신, 각 대신들로부터 자금을 모금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에게는 아직도 충분치 않은가 봅니다.
자금을 확충하기 위한 국왕의 이런 방책에 대해 대부분의 대신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본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완고한 김병시는 국왕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비밀 특사들의 소환은 물론, 계속적인 거래註 036의 원인이 되고 있는 관헌들의 잦은 재임명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청했다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항간에 떠도는 말에는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는 바와 같이, 상기의 일이 있은 얼마 후, 김병시는 모든 이들에게 잘 알려지게 된, 상당히 비판적 형태의 상소를 통해 항의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국왕이 인망 있는 대신들을 냉담하게 대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수리되지는 않았으나, 김병시는 지체 없이 자신의 사임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제1대신은 한국의 재정비에 관한 문제 많은 계획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순수하게 형식적으로 업무 수행에 임했을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 민족 정파의 자치에서 나타나는 전적인 특징이지만, 단기간 동안에 발생한 기억할만한 사건들입니다. 왜냐하면 불과 2주 정도 경과한 이후부터 국왕과 그의 모든 대신들은 처음으로 발생한 대외 정치적 문제에 직면하여 전적으로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으며, 그때부터 재차 이곳의 모든 대표들에게 권고와 지도를 부탁하면서 황망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황망함의 원인은 영사관 경비를 위해 11명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영국 해병대가 상륙한 것이었으며, 특별한 것이 있다면 러일 협약의 내용이 발표된 것입니다.
양력 3월 14일 일본 대리공사는 모스크바 의정서와 한성각서가 발표된 직후 그 사본을 한국의 내각에 송부했습니다. 어떤 조건 하에서 그 조약들이 체결되었는지에 관해서 망각한 듯이 보이는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전횡적 행동을 예방하는 쪽으로 배려한 것이 명확하게 본 조약의 본질적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를 삼간 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국의 독립을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았다는 점, 일본 경비대의 한국 주둔 합법화, 일부 국내 문제와 관련하여 국왕이 동의한 것을 폐기했다는 점 등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심지어 일본 공사관 측이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설명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극도로 흥분했으며, 그에 더해 한국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외교문서에 대한 답변이 필요했고, 상기 협정의 내용과 연관성을 부정해야하는 곤란함에 봉착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당연히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은 바,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만약 이에 동의할 경우 일본 수비대의 한국 체류 및 여타 유리하지 못한 조건들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난점을 고려하여 국왕께서는 문제 해결을 의정부로 이양했습니다. 이에 의정부는 엄중한 비밀 속에 회의를 진행하여, 대신들은 심지어 자신의 견해를 구두로 표현하지도 않은 채, 글로 서로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국에 체류 중인 모든 외교대표들로부터 의견을 구한 후, 상기 회의 및 논쟁과 권고의 결과로서 외무대신 명의의 외교문서를 다음과 같이 작성했습니다. “본인은 귀하의 통보에 대해 진심어린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금번 두 개의 협약 체결에 참석하지 않은 만큼, 본 협약의 결정에 의해 자주 국가로서의 한국 정부가 갖는 행동의 자유는 제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야만 할 것입니다.”
며칠 후, 서울주차 러시아 외교대표가 상기 협약의 본문을 한국 측에 전달하자, 한국 정부는 상기와 같은 답변서를 우리 대표에게 제시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건대, 이런 현재의 행위들 속에서 한국이 상기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협약을 완전히 이해했을 경우 곤란해질 수도 있는 일부 문제들을, 비록 상당한 한계를 지닌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여하튼 한국 국왕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에게는 오히려 유리하다고 판단됩니다.
재차 한국의 국내 문제를 언급하겠습니다. 우리는 한국 국왕과 김병시의 합의가 매우 단기간 동안 밖에 지속되지 못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순수하게 전통적 의미에서 국가를 재건하기로 결정한 이 강직한 노인은 그 어떤 새로운 입법에도 반대하였고 뇌물수수와 매관매직 등의 철폐를 요구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국왕에게 부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물론, 통상적으로 제 1대신에 대항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수많은 궁정 귀족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궁정 귀족들 중, 그 누구도 구속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조건들을 내세운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국왕은 재차 내각을 이끌 지도자 없이 혼자 남는 상황에 처했으며,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도당이 버티고 서있는 자유주의 정파의 영향력에 점차적으로 종속되고 있음이 확인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진보주의자들의 정치적 프로그램은 이곳 한국의 양반들에게는 많은 면에 있어서 매혹적으로 보였습니다. 본 프로그램에 따르면, 한국 국내의 모든 불행은 오로지 악법에서 근원하는 것이며, 외국의 제도를 채용하여 그런 악법을 개선해야만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인들은 사소한 인간적인 결함에 대해 미국인들이 상당히 관대하게 대하고 있으며, 그들과 원만한 타협점을 생각해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김병시의 민족적 정책에 관심이 식은 이후부터, 한국 국왕은 이렇게 단순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던 상기의 프로그램을 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3월 중순 한국 국왕은 내각을 소집하여 국가 법률이 완전하지 못함을 고려하여 새롭고 실질적인 법령집을 작성할 수 있도록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하명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는 더 이상 통치상의 사소한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을 대신들의 권위에 전적으로 일임하겠음을 국왕 스스로 약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3월 20일 국왕의 이런 발언이 칙령으로 반포되었으며, 모든 대신들과 브라운,註 037 그리고 제이슨註 038을 포함한 4명의 외국인 고문이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원장에 김병시가 임명되었습니다. 한편 김병시는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위원회 업무에 참석하기를 전적으로 거부하면서 국왕에게 특별 상소를 올렸습니다. 저는 한국의 국내 사정을 설명하는 동시에, 한국의 정계에서 한동안 눈에 띄는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이는 김병시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 특징을 살피는 의미에서, 상기 서신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이 보고서에서 인용하고자 합니다.
김병시의 상소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왕국의 법률을 정비하기 전까지 국왕의 비밀 특사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각도를 순찰하며, 지방관헌들이 백성들의 이익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있는가를 살펴서 정부에 비밀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비밀 특사들이 더 이상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현재 폐하께서 재차 3명의 특사를 파견하셨으나, 그들이 악행을 일삼고 있다 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그들의 만행으로 인해 극도로 격분해 있으며, 조만간 정부에 반대하는 폭동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항간에 떠돌고 있습니다. 이들 특사들은 백성들을 진정시키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갖은 행동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폐하께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에 소신은 지체 없이 그들을 소환하여 그 행위를 낱낱이 밝힐 수 있도록 하명해 주실 것을 폐하께 애원하오니, 통촉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2. 만약 특별 교육을 받지 않은 이라면, 그 누구도 장교가 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최근 많은 장교들이 자기의 직책에서 파면되었으며, 그들을 대신하여 다른 이들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새로이 임명된 이들은 군사 훈련을 이수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장교에 임명된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이미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만큼, 그들 또한 새로이 임명될 이들보다는 더욱 쓸모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에 폐하께 간청하오니, 앞으로는 중요한 이유에서가 아니라면 더 이상 장교들을 교체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3. 관리를 임명하는 데 일정한 기틀이 잡혀 있지 않다면 그 정부는 더 이상 자신의 가치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 3개월 동안만 하더라도, 비밀회의에 생긴 하나의 공석에 매일 같이 3회에 걸쳐 새로운 사람이 임명됨으로써 국가는 능욕을 당하고 있사옵니다.
4. 땅과 바다에는 도적과 해적의 무리들이 들끓고 있는 것이 현재 국가의 상황입니다. 소인이 감히 청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지속적으로 국가를 순찰하도록 병부대신에게 하명하시어 백성들을 보호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본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병시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칭병한 후, 고향으로 낙향했습니다. 이에 한국 국왕은 그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하명했을 정도로 처음에는 매우 진노했다 합니다.
처음에는 위원회의 대표가 없었던 관계로 위원회 업무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영어로 진행되는 회의에 참석하여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 위원의 숫자가 계속해서 많아지면서 위원회 업무가 장애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견상으로 볼 때, 서재필과 브라운 및 다른 고문들은 한국 국법의 개정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우스꽝스런 역할에 모욕을 느낀 한국인 위원들은 하나 둘씩 사의를 표명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들 모두가 사직하면서 위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원회는 창설 1개월 만에 그 존재가 무의미해지면서 업무를 폐쇄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국왕은 이런 결정에도 한동안 평온해 보였습니다. 세간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4월 초순 경 국왕은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청국 및 한국주차 겸임공사 맥도날드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맥도날드는 국왕에게 무엇인가 정확한 것을 권고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 프랑스의 외교대표 콜랭 드 플랑시註 039 씨를 비밀회의에 초청했습니다. 이 마지막 회의는 다음의 점을 고려할 때, 특별한 흥미를 끄는 것입니다. 즉 당시 한국을 두고 서로 투쟁하고 있었던 다양한 세력들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프랑스에게 고문과 군사 교관단의 파견을 요청해야 한다는 소문이 서울에서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플랑시 본인이 저에게 직접 언급한 바에 따르면, 초청 의사는 공사관의 통역을 통해서 그에게 전달되었으며, 초청 가능성에 관해 토론하고 싶어 했던 한국 국왕의 희망에 의해 직접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상기 소문은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국왕은 알현의 장소에서 초청 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프랑스 외교대표 역시 매우 암울한 형태로 표현했던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만 언급하셨다고 합니다. 이 초청 건이 통역관 개인의 주도에 의한 것이라는 식의 설정은 우리 공사관이 확보하고 있는 모든 정보와도 전반적으로 일치합니다. 즉 자신의 생각을 통역하기 위해서 종종 시간을 허비하는 이곳 한국인 통역관들이 애용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영향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인하기 힘들지만, 알현 당시 모든 한국인들은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대신 프랑스 신부가 통역을 담당했다고 하는 점에서 그런 제안이 일부는 신빙성을 갖기도 합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프랑스 대리공사가 한국의 위험한 상황을 지적했으며, 러시아의 전례에 따르도록 권고했다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반드시 조심해야만 하는 사항에 착안한 플랑시가 초청문제를 언급함에 있어서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않도록 충고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기와 같은 상황은 물론, 그런 설정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나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곳 한국에서 자국 외교대표의 정치적 보호를 받고 있는 한국인 가톨릭 신자를 이미 3만 명 이상 보유하고 있으며, 그에 더하여 향후 건설될 철도와 광산 등 일정한 자국만의 이익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상기와 같은 설이 최소한 어느 정도 이상의 개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당연히 프랑스는 한국에서 타국의 절대적 영향력이 신장되는 것에 대응하여 은밀한 방법으로 투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본 사건 이후에도 프랑스 군사 교관단의 초빙계획이 마련되었으며, 재정적 이유로 인해 한국의 국왕이 거절했다는 식의 소문이 한동안 돌았으나, 곧 그런 소문은 모두 잠잠해졌습니다. 비록 한국의 양반들 중에 많은 이들이 프랑스인이건, 독일인이건 아니면 이탈리아인이건 간에 외국인이라면 그 어느 누구이든 모두가 다 자신들의 통상적인 돈벌이 수단註 040을 포기하도록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상황을 즉시 정리할 수 있는 마술과 같은 방법을 고안해내지 않겠느냐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 소문이 어떤 실질적인 결과에 도달하지는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런 모든 동인들이 러시아 군사 교관단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인 귀족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을 상당 정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작성된 계획에 관여한 것과 한국 정부가 제시한 모든 본질적인 한계에 대해 전신으로 참모본부에 보고를 드렸습니다. 이에 저는 본 보고서를 통해서 상기 문제의 해결을 가능하게 했던 상항을 규명해 보고자 합니다. 사전 검토 작업 당시 이미 한국인들이 다양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사소하지만, 곤란한 상황을 만들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건대, 한국인들이 취한 반대 입장의 본질적인 원동력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한국에서는 결속되어 있고 규율이 잡혀 있으면서도 오직 국왕 한 명에게 귀속된 세력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애석하게도 군부의 재정이 적자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한국인 고관들의 판단을 경청한다 할지라도, 상당 정도는 다른 동인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일본인들의 대응책에 대한 두려움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 더해, 우리 영향력의 강화를 또한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처음에는 한국인들의 이의가 아직 이론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가,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지고 선택된 조항들을 승인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했을 때, 한국 귀족들은 물론 외국인들로부터의 강력한 선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이들이 상당한 인원에 달하는 러시아 장교들을 초청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가상적 위험을 국왕에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외국인들은 ‘역사적’ 실례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불가리아에 대해 언급하면서, 불가리아로 초빙된 러시아 군사교관들이 처음에는 군사교육에 종사했으나, 종국에 가서는 자신들이 훈련시킨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국왕을 체포하여 압송한 후, 불가리아를 러시아에 종속시켰다고 국왕에게 고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 교관단 업무에 참석한 인사들에게 협박편지를 보냈으며, 일본군 경비대 내에서 소요가 일고 있는 중이며, 한국 국왕이 새로운 러시아 교관단을 영입할 경우 일본군이 궁궐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는 식의 유언비어도 유포되었습니다. 이런 형식의 수단들이 여론은 물론, 우유부단한 의정부 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보다 노골적인 묘사들이 이어졌습니다. 일본공사는 특별 알현의 자리에서 러시아 군사 교관단 계획이 모스크바 의정서의 위반임을 지적한 후, 동시에 군사들의 불만을 구실로 삼아 한국 국왕에게 자신의 항의를 표명했습니다. 이에 본인은 서울주차 일본공사 가토註 041가 행한 성명의 내용을 단편적인 소문들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이 보고서에서 복구하고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소문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본 공사의 요청에 의해 관계자 이외의 모든 이들이 본 알현 석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대화는 일본인 통역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이후에 미국 공사관과 영국 영사관 측이 본 계획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으며, 마지막에는 브라운도 자신의 반대의사를 밝혔습니다. 강력한 한국 귀족이 은밀한 적대감을 품고 있는 상황 하에서 이 모든 것들이 유약하면서 언제나 우유부단하고 항상 겁에 질려 있는 국왕에게 어떤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을 것인지는 쉽게 예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인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의정부에 교관단 계획안 전체를 공개적으로 제출하는 것을 자제했다가 일정한 시간을 기다린 후, 한국 국왕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거하여 상기 계획을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더 유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상당히 수정된 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안타깝습니다만, 그런 사실은 현재 한국 내에서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는 군사-정책적 영향력이 견고하지 못하며,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동맹자인 한국 국왕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비중 있는 증거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을 내리지 않을 경우, 한국인 스스로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제기되었고, 국왕 스스로도 그것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서 러시아 정부의 동의하에 의도적으로 제기된 문제가 어떻게 한국 귀족들의 공허한 선동과 일본군 2개 중대의 폭동에 대한 공포의 결과로서 의정부 내에서 단 한 명의 지지도 받지 못했는지를 설명하기 힘들어집니다. 그에 더해서 더욱 본질적인 것은 의정부의 결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국왕이 상기와 같은 경우에 다수의 의견을 승인하고, 단지 통상적인 미봉책의 형식으로 21명의 추가 교관단 초빙에 동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해석 역시 곤란하게 됩니다. 현재 밝혀진 일본, 영국, 그리고 미국 요원들의 견고한 공동 행동은 실로 유익한 사실입니다. 영국인들의 특성을 새삼 규정할 필요 없이 미국만을 언급할 경우, 이러한 상황은 최소한 미국인들이 한국에서 더 이상 중립적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상황 하에서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적대적인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 정부의 자주적 통치 기간은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했으며, 첫 번째 대외정책 상의 문제와 직면하면서 망연자실함과 조언을 요청하는 소동이 보편적 현상인 양 발생했습니다. 결국 짧았던 자주적 통치 기간 이후에 유일하고도 전적으로 자주적인 명령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은 양반들의 전통적 우월권과 양반 계층이 백성들로부터 특별한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권리에 대한 주장에 불과했습니다. 더구나 군사 교관단 계획이 일본에서 매체들에 의해 광범위한 형태로 알려지면서 형성된 일본 여론에 관한 정보가 전달되기 시작하자 한국 정부의 이런 망연자실함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신문 기사의 전반적인 의견은 단지 몇 개의 단어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한국에서 군사 교관단이 업무를 지속하는 것은 의정서의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즉 일본인들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재정을 파탄시킬 것이라는 점과 모스크바 의정서에 기초한 상호주의적 행동의 원칙에 대한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일본인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런 대규모의 군사 교관단은 오직 정치적 의미를 지닐 뿐이며, 소규모의 한국군 부대를 교육하기에는 이해관계 그 자체를 따져도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일본 군대는 겨우 10명의 유럽 군사 교관단에 의해 교육을 받았다는 식입니다.
본인은 동의를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기와 같은 두 가지의 논증을 언급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즉 마지막 지적의 경우, 만약 그것이 신빙성 있는 사실이라면, 한국에서의 군사 교관단 업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일본 언론이 완전히 무지에 기초해서 기사를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인들이 유럽의 군사교관 없이, 겨우 외형적인 전열 교육만을 필요로 했던, 이른바 이미 준비된 육군을 지닌 항상 호전적이고 애국적인 민족들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일본인들 역시 군사 업무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에 더해 애국심이나 왕권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것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은 우스울 정도로 겁이 많은 한국인들과 같았습니다. 그들 역시 병사의 훈련부터 시작했던 만큼, 강력한 요원들이 없었으면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이와 같이 일본군 병사들의 군사 교육 조건과 부대 창설을 비교해 보면 한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에 대해 달리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일본 신문들의 평가와 관련하여 본인은 이 신문들이 기사가 발행된 초기에는 외견상 일부 우유부단한 면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한국 의정부의 결정이 알려진 이후에야 그들의 논조가 보다 더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즉 페테르부르크는 물론 서울 또한 단호한 설명을 해야 하며, 러시아 정부 측으로부터의 보장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식으로 서술하다가, 마침내는 러시아가 한국 주차 일본 공사의 항의에 직면하자, 한국 국왕이 직접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조직을 목적으로 하는 장교단의 임명을 포기하기로 양보했다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게재했습니다. 이번과 유사한 경우에 영국 잡지의 기사 난을 채웠을 것으로 보이는 그 어떤 악의적 비난이나 이치에 닿지 않는 비방이 모든 일본의 신문 기사들은 물론, 그것을 복제하여 게재한 영국과 일본의 출판물들에서조차 단 한 차례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러 저러한 거짓 이외에, 러시아 정부 그 자체는 이 일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모든 계획은 한국인의 주도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의 정치적 행보가 갖는 특징이라는 점을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신문 기사들 중에서도 특히 일본인들의 항의에 직면한 러시아가 양보했다는 소식은 러시아의 대 한국 보호관계 설정에 대한 신뢰를 전복시켜 실로 불리한 인상을 한국에 심어주었습니다. 마치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음으로 교관단 계획을 거부해야 한다는 조언을 정당화 시켜 주었습니다. 게다가 5월 초, 의정서의 텍스트 중에서 발표된 것은 합의 본 내용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본 의정서의 부가조항에서는 한국에 대해 이익을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열강들註 042 사이에 한국의 분할이 규정되었는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이 판단하건대, 이런 소문 역시 우리가 변호했다는 것註 043을 불신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에서 유포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유사한 규명되지 않은 모든 소문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소식註 044 역시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으며,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한 모든 비밀스런 경로를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었습니다. 모스크바 의정서의 비밀 조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일부 일본 신문은 물론 이곳 한국의 «독립신문»에도 게재되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오쿠마註 045 백작은 공식적인 의회 연설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여하튼 그 목적은 달성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모든 터무니없는 소문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국왕과 정부는 더욱 심하게 당혹해 했으며, 러시아와 일본 간의 비밀 협약 내용을 문의하기 위하여 자국 요원들이 각국 공사관을 방문하도록 하명했습니다. 궁정 귀족의 대부분이 소속된 것으로 보이는, 귀족들의 일파는 마침내 국왕의 공황상태를 이용하여, 러시아 군사 교관단이 위험하다는 내용의 모든 가능한 중상모략과 한국에서 외국의 모든 영향력을 타파해야 한다는 새로운 상소로 국왕에게 겁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양력 5월 초부터 야음을 이용하여 협박성 격문이 각 도시에 게시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취한 모든 행동을 선행으로 치부하고 있는 이 격문들은 현재 한국의 모든 불행은 배신자들이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의 우정을 외면하도록 만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도록 강요한 것 등등의 결과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본 격문의 결론 부분에서는 정해진 어떤 날에 이 배신자들은 죽음에 처해질 것이니 백성들은 놀라지 말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언어나 한자의 독특성에 기초하여 따져보면, 본 격문은 한국인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본인註 046이 판단하기에는 궁정과 가까운 인물 중의 그 누구일 수도 있으며, 국왕의 공포를 극대화시키고 왕비 민씨의 장례를 재차 연기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장례식을 연기하는 문제는 고인의 유골 보호에 배치된 이들, 왕비의 묘비를 건설하기 위한 다양한 업무와 연관된 이들, 장례절차의 조직에 종사하는 이들 등, 이 모든 업무와 관련된 모든 관원들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과 많은 점에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기와 같이 언급된 모든 상황들은 한국 국왕과 정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막연한 공포심이 백성들에게서도 유발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데사 군관구에서 선포된 동원령에 관한 로이터註 047의 전문과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분함대 정기소집 등이 이곳 한국의 각지에서 강력한 소요를 불러일으키면서 쌀 1말의 가격이 12센트에서 16센트로 급등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공포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형성했다고 해도 그것을 증명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는 러시아와 일본 양국이 한국의 영토에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하는 반면, 다른 일부는 한국을 평화적으로 분할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서울에 상주하고 있는 일본 경비대라는 실존적 위협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공포심은 상기와 같이 한국 백성들의 복잡한 마음속에서 지배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본인의 견해로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곧 한국의 불행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곤란한 상황에서도 한국의 국왕은 자신과 친근한 이들에게도, 자신의 새로운 군대에게도, 심지어 러시아의 정신적 보호관계라는 힘에도 의존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언급하듯이, 서울에 주둔 중인 일본 경비대와 동일한 수의 러시아 부대 파견을 요청해야한다는 생각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한국 국왕은 곧바로 우유부단해지기 시작했으며, 지금 현재까지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국왕이 러시아 대표와 가진 회담 결과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해병부대를 육군 2개 중대와 교체하는 것은 최근의 사태들로 인하여 눈에 띄게 실추된 한국에서의 우리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의 업무 정비를 위해서도 매우 소망스러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현재의 조건 하에서 육군의 파병만이 한국 내에서 평온과 질서를 복구하고, 한국인들의 모든 자제와 상식을 무시한 채, 가능하게도 보이는 일본인들의 침략을 악용하여 공포를 맹목적으로 과장하고 있는 한국인과 외국인 활동가들의 중요한 선동 방법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재 중요한 사태로 발전할 수 있는 직접적인 문제들이 예견되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나, 한국의 입장이나 분위기가 극도로 긴장된 상태라는 점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민감한 상황과 더불어, 정부 내에서는 물론 백성들 사이에서도 전반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불만이 지배하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가장 어이없는 원인으로 인해 전혀 뜻밖의 그런 사태註 048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소규모의 러시아 부대는 한국인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필요한 요원의 조직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공포심으로 인하여 양력 5월 _일에는 사망한 왕비 민씨의 장례를 8월 7일까지 연기한다는 왕명이 포고되었습니다.
국왕의 여러 고문들은 이런 소요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일부 문제들을 제기하려고 서둘렀습니다. 예를 들어 브라운은 일본 및 영국 공사관의 동의를 구한 후에 목포와 평양에 위치한 진남포의 개항을 건의했으며, 한국에서의 재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들의 계획에 충실했던 미국인들 또한 다수의 백성들과 협력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강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보통교육과 정치 분야에서 영향력을 제고하려는 의도에서 백성의 계몽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개항 문제와 관련하여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거론되었던 것입니다. 현재는 브라운의 주도 하에 그 계획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비록 현재까지는 무역 형태와 관련하여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 등의 동맹국들이 일정한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 할지라도, 이 계획에는 자국의 무역과 한국에서의 새로운 시장 개방이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상기 3개국 외교대표들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에 브라운과 영국인들은 상기 두개의 항구에서의 무역 개방을 단순히 허락하는 선에서 이 문제를 조건 짓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특별 의정서 형태로 규정짓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러시아의 외교대표가 영국의 관점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현재로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본 계획을 방해하거나 중단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본 사안이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상기의 두 개 항구를 개항한다고 해도, 우리는 향후 상당 기간 동안 실오라기 하나 수출하지 않을 것임에 반해, 서유럽인과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개항은 곧 그들의 무역 및 정치적 영향력이 유입되는 새로운 창구가 될 것이며, 우리에게 적대적인 영향력 밑으로 복속되는 길을 향하여 한국이 새로운 한 걸음을 더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베리아 철도가 이곳註 049의 주요 경쟁자들과의 관계에서 확연히 동등한 무역적 지위를 제공할 수 없는 기간 동안에도 한국을 미래의 시장으로서 보호한다는 것은 러시아의 이익을 고려해볼 때 유익하지 못함이 명백합니다. 여하튼 이 문제는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한 채 해결될 것임을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얼마 전 영국 공사관의 서기관, 브라운의 세관원, 그리고 수 명의 한국인 관헌들이 두 항구를 시찰했으며, 현재 브라운은 그 결과 보고서를 가지고 국왕을 알현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현재도 논의되고 있는 중입니다.
다음에는 학교와 관련하여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5월 1/13일 제가 참모본부에 제출한 예산안 복사본을 보면, 한국 정부는 이미 두 개의 영어 학교를 보유하고 있으며, 비록 극동에서는 영어가 다른 외국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보급되었다 할지라도, 다른 외국어 학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재정이 본 영어 학교에 지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한국에서는 두 개의 영어 학교면 충분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강청에 이기지 못한 한국 정부는 세 번째 영어 학교를 개교하기로 결정했으며, 한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인 목사 벤커가 그 학교의 교장 직을 맡기로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세 번째 학교는 보다 새롭고 더 넓은 부지에 건립될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 본 학교에는 한국의 양반 중 친미주의자 자녀들이 정식 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으며, 둘째, 학교에서의 교육과정은 장래 한국 백성들을 위한 선생을 전문적으로 준비하고, 한국의 지방 학교에서 발생한 결원을 보충하는 것에 맞추어졌습니다. 이 계획은 브라운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는 본 학교의 건립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이미 표명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지어 한국 국왕의 직접적인 왕명으로도 쉽게 달성하기 힘든 승리를 그들이 쟁취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다른 선교사인 헐버트註 050가 학부(學部) 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 대한 교육권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려는 이런 교묘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체적인 결과가 금방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활발하게 선전 활동에 치중했으나, 현재까지도 백성들은 미국인들에 대해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있으며, 이미 제가 보고를 드린 바와 같이 한국인 귀족들 중에서만 친미주의자들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징적이고 새로운 선전방법으로서, 최근 이곳 영어 학교가 한국인 학생들을 각 도시에 의도적으로 파견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영어 학교는 기독교 설교라는 구실 하에 공개적으로 백성들을 모아 정치적인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반적으로 주민들은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본인이 전적으로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이런 사실은 불과 얼마 전에 밝혀졌습니다. 저는 상기의 파견된 한국인이 작성한 연설문 중 하나의 내용을 보유하고 있는데, 번역을 마치는 즉시 참모본부에 부가적으로 제출하겠습니다. 개별적인 징조로서 지적해야만 할 것은 워싱턴 정부가 한국에서의 최근 굵직한 정치적 사건 속에서 미국의 선교사들이나 한국의 미국 공사관이 언급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결국 명령서를 하달하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미국 국민들이 정치적 선동에 절대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심지어 한국의 현 상황과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이런 명령을 위반하여 위험이 발생할 경우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위협적인 사항도 명기되었습니다. 본 명령서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예견하기는 힘들지만, 한국에서 발간되는 미국 신문 기사들은 최근 들어 확연히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철도 부설 문제에 관한 현재적 상황을 본 보고서에서 기술하고자 합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까지 두 개의 철도 부설 이권이 제공되었습니다. 그 하나인 ‘제물포-서울’ 노선은 미국인 모르스註 051에게 허여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서울-평양’ 노선으로서 프랑스인 그릴註 052에게 허여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자본가 집단이 요청하고 있는 ‘서울-부산’ 노선의 허여와 관련하여 문제 해결을 현 시점까지 성공적으로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연기할 수 있었던 방법 중의 하나는, 한국 정부가 작년 11월에 칙령을 발포하여, 향후 1년간 외국인들에게는 절대 이권을 허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모르스는 일 년 이내에 공사에 착공한다는 조건으로 작년 7월에 이권을 획득한 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회사 대표들이 재정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그에 더하여 공공문제가 첨예해짐에 따라 자본가들이 매우 신중을 기하게 되면서 모르스는 미국에서 필요한 주주를 확보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결국 모르스는 일본인들에게 호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외견 상, 일본에서는 그의 제안에 대해 자본가는 물론, 정부 측으로부터의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정부 기구를 대변하고 있는 «이오무리(Иомури) 신문»註 053의 작년 10월 7/19일자에는 ‘부산-서울’ 노선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 중인 회사는 ‘서울-제물포’ 노선의 부설에도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며, 오쿠마 백작에게 지원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르스의 협의가 실제로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미국인 언론의 논박에도 불구하고, 일본 자금의 상당 부분이 이 회사에 투자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저는 일본의 자본 참여가 전체 자본의 8/20 정도에 해당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일본인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보는 검증되어야하며, 본인은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만 그런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이 경우 이권은 법률적으로 아직 모르스의 소유이며, 3월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제물포까지의 거리는 40베르스타 입니다. 남쪽에서 한강 연안 방면으로 점차 낮아지는 형태를 가진 높은 산들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형이 경사지고 고르지 않습니다. 한강은 도로 쪽에서 흘러 나갑니다. 고지대는 전답과 드물게 보이는 숲으로 덮여 있으며, 저지대는 늪과 물에 잠긴 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출판된 자료에 따르면 굴착 공사 및 제방 축조와 같은 토지 작업을 상당 수준에서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기저부에는 진흙 작업을 해야 합니다.
조건이 이렇다보니, 홍수로부터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대책을 수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제물포에서 시작된 공사는 약 7~8베르스타 정도 진행되었으며, 일부 서로 분리된 구역에서는 굴착 공사와 제방 축조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일부 작업 구간에서는 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무개화차를 이용하여 인부들에게 자재를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름 우기가 곧 시작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은 아직까지 진척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서 심각하게 손상될 수도 있을 것 같으며, 일부 구간에서는 기존에 작업해 놓은 것들이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현재까지 공사가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태라서, 미국식의 추진력과는 거리가 멉니다.
프랑스 회사의 ‘서울-평양’ 노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 노선의 공기는 3년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회사는 철도 부설 공사를 반드시 시작했어야 합니다. 그릴은 지난 해 가을 한국에 체류하면서 ‘서울-목포’ 구간의 이권 역시 획득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중간에 막히는 곳 없이 만주국경에서부터 시작하여 한반도의 남쪽 끝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을 부설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릴은 이 두 번째 이권을 거절한 채, 그을음과 연기가 심한 일본석탄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탄층을 보유하고 있는 평양의 석탄광산채굴권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 프랑스인은 광산채굴권 획득에서 실패를 경험했으며, 이후 자신의 본국인 프랑스로 출국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현재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알려진 바 없습니다. 한국주차 프랑스 외교대표로부터 들은 말에 의거하여 판단해 보면 현재 조건 하에서는 회사가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제가 보기에 이곳 극동지역에서 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와 우리 러시아 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어떤 상황이 형성될 것인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기서 반드시 첨언해야 할 것은 한국 정부가 이권을 수여받은 이들에게 러시아식 광궤를 채택하도록 의무조건을 제시하게 만듦으로써, 편리하게 한국 철도와 러시아 철도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통신망이 부재함에 따라 본 보고서의 발송이 지체되었습니다만, 그 덕택에 본인이 최근의 사건을 간략하게나마 설명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 한국 국왕의 심기는 어느 정도 안정된 듯 보입니다. 상소하던 이들은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침묵하면서,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이런 상황은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한국 국왕의 환궁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선동이 정부의 승인을 받는 방식으로써 억제될 수도 있었음을 다시 한 번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인 귀족들 중에서 ……….
註 03333) 의정부 의정(議政府 議政)을 말함-역자 주.註 03434) 한국인들이 말하는 ‘외국의 압력’을 뜻함-역자 주.註 03535) 화폐의 단위가 없음-역자 주.註 03636) 여기서의 거래는 ‘관직의 거래’를 뜻함-역자 주.註 03737) 재무 고문이었던 John Mcleavy Brown을 말함. 한국명 백탁안(柏卓安)-역자 주.註 03838) 서재필(徐載弼)을 말함. 그의 영어식 이름 Philip Jason의 러시아식 표기. 이하 서재필로 표기함-역자 주.註 03939) Colin de Plancy-역자 주.註 04040) 양반들이 백성들을 상대로 자행하던 각종 비리와 착취를 의미함-역자 주.註 04141)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역자 주.註 04242) 러시아와 일본-역자 주.註 04343) 한국의 이익을 변호했다는 의미로-역자 주.註 04444)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한국 분할에 관한 합의-역자 주 .註 04545)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역자 주.註 04646) 본 격문의 작성자-역자 주.註 04747) 로이터(Reuter) 통신사를 말함-역자 주.註 04848) 일본에 의한 무력 침략-역자 주.註 04949) 극동-역자 주.註 05050)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한국명 할보(轄甫)를 말함-역자 주.註 05151) 모르스(James R. Morse)-역자 주.註 05252) 피브-릴(Fives Lille) 상사의 대표 그릴(Grille)-역자 주.註 05353)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됨-역자 주.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12. РГАВМФ, ф.9, оп.1, д.108, лл. 144∼149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두바소프(Федор Васильевич Дубасов) 각하
온화한 기후가 시작된 점을 고려할 때, 조속한 시일 내에 올 여름기간 동안 예정된 육상 작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러한 작업을 계획하기 위해 여쭈어 보고자 하는 점은, 귀하께서 서울에 체류하시는 동안 언급하고자 원하셨던 사항인 바 즉, 현재 상황에서 이전처럼 마산포의 실지답사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계시는가의 문제입니다. 이에 각하의 답변을 부탁드리오니 거절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부산을 방문해야 한다는 본인의 견해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만약 현재 조건이 분함대 전함 중 한 척을 체계적 업무 수행에 배분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된다면, 극단의 조치로서 제가 귀하의 관심에 응답하는 자료들을 개괄적으로 수집하여 발송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그에 상응하는 훈령을 저에게 하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본인의 최근 전문 보고서 사본을 귀하께 상신해 드리며, «독립신문»의 일부 호수를 동봉하겠습니다. 귀하께서는 본 신문을 통해 최근 서울에서 급작스럽게 발생한 유감스런 위기의 연속적 전개과정을 추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더하여 저는 우리 공사관이 판단하는 것 보다 더 낙관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예상치 못했던 상황으로 인하여 일이 복잡해지지만 않는다면, 조만간에 불가피하게 한국에서의 러시아 권위를 훼손시킬 궁궐 내 통역관(협잡꾼) 일파를 물리치는 것과 동시에 러시아의 영향력에 도움이 될 보수 운동이 실로 가능해 보입니다. 한국인들의 호감을 더 사고 있으면서, 국가 재정에 대한 유럽인 통제의 부재를 주장하고 있는 ‘독립협회’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른 시일 내에 “종말을 고할 것”으로 보이며, 그럼 어쩔 수 없이 타협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황제 및 황제와 밀접한 고문들 스스로가 세금 증액, 특별 감독관의 파견, 관찰사의 잦은 교체 및 기타 일상적인 방법으로 불가피한 재정 적자를 충당하려 할 경우, 향후에 분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최근의 경우 현재 예상되는 연이은 두 번의 흉작으로 1894년과 같은 민중의 불만 폭발이 불가피해 보이며, 그것은 외국인들의 간섭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러시아에게 적당하지 못한 시기에 한국의 모든 문제가 노골적으로 제기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석탄 공급 문제로 분함대가 겪고 있는 곤란한 상황과 관련하여, 저희 귀에도 들리는 소문에 따라 귀하께 다음의 사실을 보고 드립니다. 즉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평양에 구매자를 찾지 못한 상당한 양의 석탄이 축적되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이것이 분함대에 소용이 있다면, 이 문제를 보다 정학하게 밝혀낼 수 있으며, 만약 필요하다면 평양을 직접 방문하여 진남포까지 배송해 주는 조건으로 석탄을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산 석탄의 특성에 관해서 본인이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그 석탄이 단지 _______전혀 연기가 나지 않으며 열량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염이 적은 정교한 기관(汽罐)에는 일본 석탄과 절반의 비율로 섞어서 사용해야 합니다. 평양에서의 가격은 약 7-8달러 정도입니다.
사본
페테르부르크-총참모부
대원군이 사망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개항장에서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는 부지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독립협회의 새로운 반러시아 탄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보고서에서 자세하게 언급한 바 있는, 러시아 공사관의 통역관이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음모는 분명 정치적 성격의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영국함대는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했습니다.
2월 14/26№11
스트렐비츠키
기밀
사본
페테르부르크-총참모부
독립협회는 부산에서 일부 구역을 러시아에게 양보하는 것과 공채 금액을 은행에 이체하는 것 그리고 군사 교관단 계약기간을 연장하려는 것 등에 대한 해명서의 제출을 정부 측에 요구하면서 선동을 중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외무부와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면서, 러시아에 대한 양보 쪽으로 기울어 있는 내각은 집단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공사관 통역관 김註 054을 습격한 사건에 대한 조사는 의도적으로 지연되고 있습니다. 황제는 황태자 중에서 본 사건과 내밀하게 연관되었다는 혐의를 사고 있는 한 명의 황태자가 체포됨에 따라 괴로워하다가, 경무총장을 재판하라고 하명하였으며, 이에 경무총장은 도주하여 공사관에 은신했습니다. 2월 21일에는 관직의 매도는 물론 여타의 직권남용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통역관 김의 사건을 무효로 하는 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주민회의 소집을 탄원하는 내용의 방이 나붙었습니다. 서울 시내에는 감정의 절제 및 질서 유지를 준수한 다수의 군중이 수일 동안 집합했으나, 일부 러시아 통역관들을 알아차린 군중들은 돌을 던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공사관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해병대가 강화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러시아 공사는 향후에도 계속해서 러시아 군사 교관단과 재정고문의 봉사를 받고자 원하고 있는지에 대해 한국정부에 문의했습니다. 3월 2일 백성들과 독립협회 그리고 완전히 노쇠한 통치자들의 새로운 탄원서에 굴복한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제공해준 원조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으나, 향후에는 외국의 지도를 받고 싶지 않다는 답을 전달해왔습니다. 페테르부르크로부터 훈령이 전달되기 전까지 알렉세예프, 장교들은 자신의 직무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러시아에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한국 수도의 분위기는 자신의 사적인 영향력과 황제와의 친근감을 이용하여 직권을 남용한 한국인 러시아 통역관 일파에 대한 분노심을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교묘하게 이용한 외국인 대표들과 한국인 고관대작들의 선동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공사관은 한국의 남쪽을 일본인에게 양보하는 대신 한국의 북부를 점령하는 방식으로 한국을 억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이런 분할은 단 한 곳의 부동항도 존재하지 않는 가장 빈약한 지역만을 러시아에게 제공하는 것이며, 동시에 한반도의 남쪽에서 가치 있는 전략적 해상 지점인 대한해협 그리고 한국에서 보다 풍요로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3월 5/17일, №14
스트렐비츠키
註 05454) 김홍륙(金鴻陸)-역자 주.
▷▶현 한반도는 전체가다 부동항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13. РГАВМФ, ф.9, оп.1, д.117, лл.56об.~57об.
암초가 없고 편안하여 심지어 야간에도 바다와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지닌 은폐된 장소가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바람에도 수뢰정이나 수뢰순양함과 같이 크지 않은 종류의 전함들을 편리하게 은폐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해협에 강한 해류가 존재할 때, 상당한 수준에서는 함정의 은폐에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순양함 ‘자비야카(Забияка)’호와 포함 ‘시부츠(Сивуч)’호는 11월 15일 오후 2시 목포항에 진입했으며, 동일한 명칭을 지닌 부락의 맞은편에 정박했습니다. 이곳은 만조 시 높이가 22피트(6.7m)에 달하며, 조류가 강하여 6노트가 넘고, 큰 소용돌이가 있습니다. 빈 공지는 거주 지역의 위생적 조건에 적합하지 않으며, 여름에는 안개가 짙고 겨울에는 차가운 북풍이 불어옵니다. 식량이 풍부하지 못하며 담수도 부족합니다. 안개가 짙을 때는 바다와의 교통이 불가능합니다. 순양함 ‘자비야카’호와 포함 ‘시부츠’호 함장의 견해에 따르면, 이상과 같은 조건들을 고려해 볼 때 이곳 항구는 전함의 정박에 적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목포항에는 세 개의 입구가 있습니다. 주입구는 남쪽입구로서 폭은 3카벨토프註 055에 달하며, 출입구에서의 조류 속도는 6노트에 달합니다. 다른 출입구는 북서쪽 항로로서, 9피트(2.7m) 높이의 사주가 있어서 오직 작은 전함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중앙의 출입구는 그 폭이 너무나 협소합니다. 목포로 향하는 정기항로에는 일본과 한국의 기선이 취항하고 있습니다. 세관에서 근무하는 두 명의 유럽인을 제외한 목포 거주 외국인은 모두 일본인입니다. 영국의 한국 남해안지도 제913호와 일치하는 일본 지도에서는 일본인들 역시 목포항과 주변 암초절벽을 상대로 유사한 측량을 실시했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부과된 임무를 완수한 순양함 ‘자비야카’호와 포함 ‘시부츠’호는 11월 18일 목포를 출항하여 익일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이동 항해는 풍속 4-6급에 달하는 북서풍이 부는 조건에서 이행되었습니다. 11월 21일 ‘셰벨료프 회사(Шевелев и Ко)’ 소속으로서 부산, 원산, 제물포, 그리고 나가사키와 즈푸 등을 기항하며,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해 구간의 급행항로를 운항하고 있는 기선 ‘바이칼(Байкал)’호가 제물포에 입항했습니다. 분함대가 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는 동안 일부 ___________.
註 05555) Кабельтов는 닻줄의 길이 단위, 약 0.3해리, 100발=185.2미터-역자 주.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21.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61/69∼76об.
1895년 8월 7일
블라디보스톡
№ 470
수신:태평양연합함대 사령관 각하
탐사보고서
저는 제물포와 서울을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일본은 자국의 영향력으로 조선을 복속시키려 합니다. 조선을 위해서 청국과 전쟁을 일으켰다고 밝혔지만 사실 일본은 정치적인 계산속에서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기고 있습니다. 즉 상당한 인구와 노동력을 갖고 있는 일본은 항상 조선을 태평양에서 자신의 식민지와 영토 확장의 목적으로 보았습니다.
현재 조선을 점유하려는 자국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서 일본은 상공업의 진흥 등 간접적인 지배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조선내각에서 고문관으로 활동하는 50명의 청국인 관료를 교체하려고 합니다. 또한 일본은 모든 조선의 개항지에서 자국의 이주민을 보호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8,000명 이상 입니다. 최근 정보에 따르면 일본인이 원산에는 대략 1500명, 부산에는 4,395명, 제물포에는 2,504명, 서울에는 대략 200명, 평양에는 대략 50~60명 정도입니다. 또한 일본은 4,000명의 군대까지 보유하고 있어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충분합니다. 일본 정부는 전략적 요충지인 제물포에서 호텔, 석탄저장소, 군대 교통로 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제물포와 서울에서 청국인들을 추방시키면서 일본 상인들로 채우고 있으며 부산과 원산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은 평양 인근의 강가에 전쟁을 대비한 상륙 장소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평양은 아직 외국인에게 개항이 되지 않는 장소입니다. 군대와 상업 강화를 위한 포석의 일환으로 일본군대는 평양 인근에 2,000명의 군대를 집결시키려고 합니다. 일본 이주민과 일본 군대를 평양 인근에 배치하려는 계획이 실현된다면 일본 정부는 유사시 평양에서 제물포와 서울에 신속히 군대를 파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일본은 군사와 상업 목적을 위해서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조선에 대한 모든 열강의 간섭은 일본과의 마찰을 불러올 것입니다. 현재 유럽은 선교를 제외하고 조선에서 커다란 상업적인 이익이 없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유럽 열강의 모든 외교적인 행동은 적당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울과 제물포에서의 저의 짧은 체류는 조선의 국내 질서 및 조선 백성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선이 근본적으로 가난하고 배타적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구체제인 조선의 질서에 대해서 덧붙인다면, 조선은 주변 강대국과의 복잡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군대와 상공업 등이 취약합니다. 조선이 여전히 구체제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속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쟁을 결심했습니다.
저는 조선 국왕을 알현했고 이 자리에서 조선 국왕은 러시아 황제와의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밝혔고 조선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러시아 정부와의 협력을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7월 20일:저희는 즈푸에 정박하였고 여기서 ‘보브르’호와 순양함 ‘자비야카’호를 보았습니다. 저는 ‘자비야카’호의 승무원에게 제물포에서 온 전보를 전달했습니다.
7월 31일:저희는 원산항을 조사하기 위해서 출항했습니다. 하루 반나절이 걸려서야 저희는 원산항 주변의 교주(Киау-Чау) 만에 정박하였습니다.
8월 2일:저희는 섬을 살펴보려는 목적으로 거문도 항구에 접근하여 정박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군함도 없었습니다. 단지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가 거문도로부터 일본을 가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일본 기선이 출항할 때 저희는 거문도항 정박 중에 영국함대로부터 받은 예포를 쏘았습니다.
8월 4일:함대 사령관의 순양함이 원산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 기선회사인 ‘니폰 유센 가이샤(Nippon Yusen Kaisha)’에 소속된 상선 단 한척만이 정박하였습니다. 이 상선은 조선과 일본의 항구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사이를 순회합니다.
다음날 저는 원산항에 있는 일본 거주민을 볼 수 있도록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원산항 주변에 있는 지형과 환경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원산항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편리하고 유익합니다.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대략 1,500명입니다. 만의 연안을 따라 돌면 거기에는 적지 않는 집들이 있습니다. 원산항은 상업적 항구로서 충분히 수송선박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일본 거주지에는 우체국, 전신국, 일본은행 지부, 150명의 수비대 등이 존재합니다. 일본영사는 정원을 포함한 유럽 건축양식인 2층 집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원산은 조선 행정 구역상 매우 중요한 지방 행정소재지입니다.
저는 원산에서 러시아 해양대신 사무대리 각하에게 도착 전보를 보낼 수 있는가를 문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관리는 7월 6일부터 전신선이 폭풍으로 두절되었다고 밝히면서 저의 제안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일본 관리는 개인적인 전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하였습니다. 조선의 전신선은 일본 정부의 수중에 있으며 러시아로 보내는 유일한 전신도 일본 소유의 전선을 통해서 서울, 부산, 일본,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포시에트, 원산, 서울을 거치는 러시아의 전신선이 필수적으로 설치되어야 합니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31.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394∼395об.
№1180
1896년 6월 13일
해군참모본부 해군 학술부
1896년 6월 14일
№41
해양부 대신 치하체프 각하
군부대신을 대신하여 육군대장 오브루체프(Обручев)는 존경하는 니콜라이 마트베예비치 치하체프 각하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의 사본을 보냅니다. 전보 제556호는 1896년 6월 9-11일 육군중장 그로데코프(Гродеков)가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냈던 것인데, 이것은 대령 카르네예브이(Карнеевый)가 조선의 남부 항구를 정찰한 내용과 관련된 것입니다.
13일자 지도를 해군참모본부로 ____________,
해군소장 알렉세예프는 공사와 협의하여 ____________.
육군중장 그로데코프가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전보의 사본, 1896년 6월 9~11일, № 556, 하바롭스크
대령 카르네예브이는 조선의 남부 항구인 마산포와 목포를 조사했습니다. 40베르스타인 목포는 아직 외국인에게 개항되지 않았습니다. 서쪽으로 부산이 있고 창원과 인접한 마산포는 매우 길게 뻗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산포는 해안에 접근하기 편리하며 러시아 해군의 방어를 위해서 매우 적합합니다. 러시아가 마산포를 소유하면 쓰시마 섬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마산포 항의 점유는 마산포 인근 지역을 소유하는 효과가 있으며, 목포 지역에서 러시아 해군의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러시아 해군은 마산포에 대한 조사를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목포에 도착한 대령 카르네예브이는 일본 해군이 목포로부터 출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일본인은 육지와 인근 섬을 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코하마에 있는 소코브닌(Соковнин)은 영국 해군이 거문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서명:육군중장 그로데코프(Гродеков)
확인:대령 예프트코긴(Евткогин)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34.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563/575∼578
수신:해군참모본부 소속 해군학술부
1896년 12월 10일
№1613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의 탐사보고서
1896년 7월 21일
№1359
대공 해군대장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각하
조선에 도착.
1896년 6월 29일 제물포에 선박 ‘만주르’가 도착했고, 7월 3일 제물포에 ‘오트바즈니’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두 선박은 각각 무장을 한 30명의 상륙 부대를 파견했습니다. 수비를 위한 상륙 부대는 대리공사 베베르의 동의하에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가 파견한 상륙 부대로 교체되었습니다.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7월 11일 상륙 부대의 교체를 완료하고 제물포에서 출항했습니다. 제물포를 떠난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좋은 날씨 덕분에 순항을 할 수 있었고, 7월 16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습니다.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제물포에서 대략 70일 정도 정박했습니다. 제물포에서 정박하는 동안에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포함 사격 등 적절한 훈련을 수행했으며, 서울의 강이 지나가는 제물포부터 마포까지 측량을 실행했습니다. 제물포 및 조선의 다른 항구에 정박했던 함장들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최근 2달 동안 조선은 안정을 찾았습니다. 단지 부산 인근의 남부 지방인 경주에서 일본인 어부가 살해되었습니다.
서울과 부산 사이에 설치된 전신선이 상당 기간 불통되었지만 최근 일본수비대의 보호 하에 전신선이 복구되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에 조선에 진주한 일본 수비대는 지난 5월에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군대로 교체되었습니다. 또한 부산과 제물포 구간의 일본 교통로는 여전히 유효하며, 일본의 모든 화물이 원활하게 수송되고 있습니다.
조선의 국왕이 언제 자신의 궁궐로 환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에 주둔한 러시아 상륙 부대가 계속 러시아공사관을 수비해야 하며 적어도 이번 겨울까지는 계속 주둔할 예정입니다. 상륙 부대의 주둔과 관련하여 저는 상륙 부대를 위한 편리한 장소를 건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작년 겨울 상륙 부대는 최대 135명까지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번 보고서에서도 상륙 부대의 거주지 개선을 위해서 서울에 적절한 장소를 물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저는 겨울을 대비한 임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만약 상륙 부대가 150명을 초과한다면, 러시아공사관 주변의 조선 가옥을 이용하여 이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거주지를 마련해야할 것입니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35.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602∼603
블라디보스톡의 6월 여름 날씨로 인해 함대에서는 위장병이 발생되었습니다. 저는 함대에서 위장병 발병을 막기 위해서 강력한 예방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제물포 항에 정박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출항했습니다. 5월 25일과 26일 이틀 사이에 35명의 수병이 발병했고, 6월 2일과 5일 사이, 그리고 6월 16일과 19일 사이 유사한 질병이 또다시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6월에만 151명이 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2~3일 동안 설사를 동반하기도 합니다. 순양함 군의관의 보고서에 따라서 질병의 전염을 막기 위해서 모든 조치가 이뤄졌습니다. 즉 먹는 음식을 상세히 조사하였고 마시는 음료만 사용하였으며 상인이 순양함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제물포 및 중국과 일본 항구에서 무더운 시기에 비와 안개가 시작될 때 또는 습도가 86%에서 100% 사이일 경우에 이 질병은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 장교와 수병의 위장병 발생 원인은 나쁜 기후 환경에 있습니다. 더욱이 조만간 열대야의 더위가 순양함의 선원에게 닥칠 것입니다. 특히 선박 ‘코레예츠’호도 이미 오래전부터 항해를 수행했기 때문에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해군소장 __________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36.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1, л.141а∼141п
1896년 11월 14일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의 서한
№ 2143
해양부 관리국이 작성한 조선에 대한 보고
1월 24일 정박지 나가사키
기밀
파벨 페트로비치(Павел Петрович) 귀하
저는 10월 16일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조선의 주요 항구를 둘러보았고 우리 대사와 만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원산, 부산과 제물포에서 제가 목격한 모든 것에 근거하여 각하께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신속하게 보고 드립니다:나라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고,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는 현저히 좋아졌습니다. 예전 오만불손함과 험악함은 훨씬 더 누그러진 듯합니다. 또한 이들 항구에 거주하는 일본 주민의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제물포에서는 통상관계의 발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향을 촉진시킨 주요 요인은 제물포와 서울간 철도 부설 문제가 해결된 데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철도부설 노선의 탐사는 끝이 났고, 내년부터 미국 회사가 공사에 착수하여 18개월 만에 철도 부설을 마칠 예정인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노선이 총 40베르스타일 뿐만 아니라 별다른 어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프랑스 기술자들에게 허가된 ‘서울-평양’ 노선의 정류장 또한 제물포의 발전, 그리고 앞으로 제물포가 상업적 기능으로 발전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입니다. 제가 방문한 시기부터 서울은 도시의 질서가 잡히고 눈에 띄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안정 회복, 왕권 강화, 재정 체계 확립은 아관파천 시기부터 조선에서의 여러 사건 진행 과정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빚어낸 결과임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베베르 공사가 차분하지만 순리를 따라 행동했고, 국가와 국민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특히 왕이 그를 각별하고도 깊이 신뢰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확신하게 된 계기는 제가 서울을 세 번째 방문하던 중 왕을 알현할 때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조선이 겪어 온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공사에 대한 신뢰를 직접 표현했습니다. 왕이 러시아황제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 서한이 있습니다. 마지막 방문에서 베베르를 서울에서 소환하려는 소문에 대해 왕이 충심을 담은 이 서한을 러시아황제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슬픈 일이며, 만약 이것이 불가피하다면 왕은 베베르를 다시 초청할 것을 허락해 줄 것을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서울에서 베베르 공사를 대신하게 될 새 인물은 누가 되더라도 이미 우리가 이룬 모든 일을 지원하고 지속하는데 있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지원하고 있는 일부 당의 동요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조선에서 점하고 있는 입지에 일정 정도 유리한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나 신임 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점은 이것이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조선과 같은 나라에서 국내 정치 상황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로 점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미 타전했던 바와 같이 연해주 참모본부 푸탸타 대령의 요청으로 동부 전열 대대의 위관 2명, 의사, 최하급 관리 12명, 하사관 10명을 조선 대사관측과 함께 ‘그레먀쉬’호를 통해 제물포로 수송했습니다. 푸탸타는 미래의 한국군과 여타 관리들을 훈련시키는 교관대장입니다. 교관들이 부여받은 최초의 군사임무는 총 800명으로 선발된 왕의 친위대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우리 교관들의 지도를 받으며 연병장에서 교육 받는 군대를 보았습니다. 지시는 러시아어로 실시되었고 수비대의 규범도 러시아어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교육을 시작한 쪽이 군사부처가 아니라 해양부라는 점을 꼭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코르닐로프’호에서 온 흐멜레프 중위가 조선에서 최초의 러시아 교관인데 올 2월부터 이미 조선군을 교육하기 시작했고, 명령어와 수비규범을 번역했으며, 궁정 근위 대대 내 장교 후보로 선발된 청년들의 교육도 시작했습니다. 궁정 근위대대의 교육 달성 정도에 따라서 우리 공관에서 신축 중인 궁으로 왕이 처소를 옮기는 일이 결정됩니다. 3월 초, 푸탸타 대령은 이 대대가 믿음직스럽게 임무에 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기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장교 교관 중 한 명인 아포날레프(Афоналев) 중위가 궁정 근위대 훈련을 담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하사관 교관이 현지 장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중대를 지휘하게 될 것입니다. 7월부터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의 상륙 부대를 소함정 두 척의 혼성 보초병으로 대체해 주기를 바라는 저의 요청에 공사가 동의했습니다. 그렇지만 11월부터는 다시 일등 함대를 주둔지로 보내주시기를 요청드리는 바, 이에 대해서는 제가 각하께 전신으로 보고 드렸던 것에 보충합니다. 대형 함대를 제물포에 주둔시켜야 할 필요성은 두 가지 원인에서 기인합니다:첫째, 동절기에 초소의 수를 늘려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보초병이 최대 90명 필요합니다. 둘째, 서울에서 우리의 입지를 위해서는 주둔지에 외국 함선들보다 약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서울을 방문하는 기간에 제물포에는 영국의 순양함 ‘이모탤리티’호와 소함정 ‘래틀러(Rattler)’, 미국 순양함 ‘보스턴(Boston)’호가 정박해 있었습니다. ‘나히모프’호를 제물포에 정박해둔 저는 공관에서 초소에서 돌아온 즉시 소함정 ‘코레예츠’호에게 목포로 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또한 제물포항 주변을 탐사하면서 지도에 조차 나와 있지 않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해상 항로를 조사하는 ‘만주르(Манджур)’호에게 업무를 계속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목포에 대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때까지 보고를 미루고 있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측면을 고려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과장된 면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목포가 가지고 있는 장점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실 올해까지 해군 장교 중 단 한 명도 그곳에 가 보지 않았습니다. 단지 카르나예프 대장만이 올 4월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행하면서 육지만을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따라서 바다와 관련해서도 어떤 이용 가능한 결정적인 측면이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조선의 해안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한 보다 적합한 초소를 결정하는 문제는 법적 허가를 필요로 하는 것임으로 사전에 보다 정확하고도 상세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필요에 따라 수집한 정보를 분함대 항해나 함선의 개별 파견 시에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잘 알려진 목적에 부응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중요한 몇몇 지점들을 가능한 한 세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서울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조선에서 권력과 의미를 상실한 일본이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일각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자기 과신입니다. 저는 지금 일본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기회를 엿보다가 조선의 내정 간섭을 위한 좋은 여건이 마련되면 곧바로 개입하려는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야마가타(Ямагата) 장군의 참여 하에 조선과 우리 사이에 체결한 협약이 발효하면 일본은 항상 그러한 간섭의 빌미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비교적 평온한 (조선) 국내 상황과 우리가 최고 지배권을 지닌 상황을 마치 조선에서 정치적 우발 사건과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는 안정적인 체계가 굳건히 정립되었다고 봐서는 안 됩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자신들의 이권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해군력 증강을 일본정부의 주요 사안으로 설정했습니다. 푸탸타 대령 외에도 서울에는 참보본부 대령 스트렐비츠키가 군사 요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항해도 작성 업무와 현재 인원이 400명 이하인 일본군을 감시하는 임무를 동시에 부여받았습니다. 일본군은 부산항과 서울에 주둔해 있습니다. 일본군 대표들과의 대화중에 간파해야 할 것은 그들의 직접적인 임무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 내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에 대한 추측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행동을 먼 미래의 것으로 여기면서, 그럼에도 이에 대해 알리고 제 의견을 말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선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일본을 공공연히 배척하여 이 나라에 적지 않은 위험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령 조선 내에서 예기치 못한 일들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그럴 경우 해군부처의 상호 논의가 당연히 불가피할 것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결정되어야 한다면 조선에 주둔해 있는 군대 철수에 대해 가장 중요하고도 책임 있는 역할을 해군이 담당해야 합니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38.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1, лл.192∼194об.
9월 23일 바람은 북서풍으로 바뀌면서 잦아들기 시작했고 그 다음날 아침 7시 부산으로 출발했습니다. 원산에 1급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남겨두고, 특별훈령에 따라 정오가 지난 후 라자레프 항註 063으로 가서 측량과 수심 측정 작업을 시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895년 12월 4일 전(前) 연합함대 사령관께 올린 보고서 제1002호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라자레프 항은 그 지정학적 위치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이 지점에 대한 정확한 지도가 부재하며 현재 보유하고 있는 지도들은 잘못되어있어 이 넓은 만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근거하여, 그리고 그 보고서에 제가 서술했던 이유들로 저는 지금 정확한 측량을 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판단 하에 11월 20일까지 ‘드미트리 돈스코이’호 함장이 라자레프 항에 남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신포(셰스타코프) 항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두 차례의 방문 후 블라디보스톡과 한국 동해안 전체에서 이 항구가 가지는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저의 의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895년 12월 4일 보고서 제1002호에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이 항구는 여러 척의 선박을 수용할 수 있으며 마양도(곤차로프 섬)의 해안선이 거의 수직에 가까울 만큼 가파르기 때문에 바다 쪽으로부터의 방어가 용이한 편입니다. 6 1/2에서 12사젠 정도로 수심이 일정하여 항구 진입이 용이하고 빠른 흐름도 없습니다. 관망대 곶註 064 근처의 작은 방파제는 파도로부터 항구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육지 쪽으로부터도 막힌 지역이라 방어에 유리합니다. 중앙수로관리국 지도 제428호를 보면, 양화만(모노마흐 만) 깊은 곳에 마을 두 개가 표시되어 있는 서쪽 연안에는 길이 약 1.5마일 정도의 골짜기가 위치하며, 항구에 접한 모든 지역이 바로 해안으로 떨어지는 가파른 산이 많은 3열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심부는 정상의 높이가 870피트에 이르며 해안선 부근에서는 80-100피트까지 떨어집니다. 지맥들은 크지 않은 계곡으로 나누어집니다. 옐킨 곶註 065 쪽부터 지역은 거의 같고 단지 지맥만 조금 낮습니다. 만약 산줄기부터 앞서 말씀드린 계곡까지 차지한다면 적은 상당한 군사력과 많은 준비작업을 한 이후 정박장과 항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보실스키(Новосильский) 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정박장은 동쪽보다는 방어에 취약한 편이지만 동쪽을 방어할 때에는 양화만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양화만은 북풍을 막아주는 크고 편리한 정박장입니다.
신포 항의 양측 면에는 원산과 서울로 향하는 괜찮은 도로가 두 개 있습니다. 이 도로는 짐을 실은 짐승들이나 수레가 다니기에 적당하지만 넓지는 않습니다.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정상 가운데를 관통하는 다른 도로들은 없습니다. 작은 오솔길들은 매우 가파르며 좁은 협곡을 지나갑니다. 이런 길들은 짐을 실은 짐승만 지나갈 수 있으며 그마저도 매우 어렵습니다. 상당히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신포 항 마을 주민들은 블라디보스톡과 잦은 교류를 하고 있으며 러시아인에게 매우 우호적입니다.
10월 24일 아침 7시 함대는 원산을 떠났고 다음날 저녁 5시 반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작년 11월 이 항구에 제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본 거주민들이 많이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올해 한국은 전국적으로 풍년이 들어 쌀과 수수의 일본수출에 관한 통상교류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예전처럼 전신선을 보호하고 도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100명의 일본군 중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註 06363) 1854년 팔라다호가 작성한 지도에서는 라자레프(Лазарев)가 송전만이었다. 그런데 이후 1900년까지 러시아의 한국 동해안 탐사 기록들에서는 송전만 뿐 아니라 영흥만 전체를 지칭하기도 한다-역자 주.註 06464) 압세르바티야(러:Обсервация, 영:observation)는 19세기 러시아 지도에서 송전만 내 가래구미리 근처의 곶(북위 39도 19.12, 동경 127도32.48)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현재 러시아 지도의 모내론 섬에도 같은 이름의 곶이 있다. 여기서는 신포 육태동리에서 마양도쪽으로 돌출한 곶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역자 주.註 06565) Елкин:함경남도 홍원 근처-역자 주.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39.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1, лл.198∼201об.
9월에 ‘만주르(Манджур)’호로…….
저는 서울에서 위병대를 시찰하여 완전한 상태임을 확인했고, 대리대사의 말에 따르면 그 역시 공사관 경비근무의 철저함과 관리들의 태도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고 합니다. 위병대장은 한국 왕의 요청에 따라 예전처럼 흐멜레프(Хмелев) 중위가 맡고 있으며 단지 교관부대와 사관학교 훈련은 현재 올해 10월 서울에 도착한 총참모부 푸탸타 대령이 관할하고 있습니다.
상륙 부대용 건물은 재건축 이후 상당히 향상되었고 하급관리들은 겨울에도 따뜻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으며, 부대 교육을 수행할 때도 사용할 수 있는 식당이 생겼습니다. 그밖에 작은 진료소도 세웠는데 별도의 건물에 침상 세 개와 군의관 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짓는데 해군성 지도부에서 허가를 내린 천 달러 가량의 비용이 지출되었습니다. 우리 교관들이 서울에 도착한 이후로는 새 궁전의 경비와 우리 공사관에서 새 궁전으로 한국의 왕이 이동하는 데 경호를 담당할 800명의 한국군 대대 구성에 착수했습니다. 푸탸타 대령의 제안으로 저는 이 대대가 자세 훈련을 하는 것을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무기를 가지고 최종 훈련에 임하는 것은 내년 초여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는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에서 온 기계설계자 레므뇨브이(Ремневый)가 담당하고 있는 병기고도 둘러보았는데 그는 탄피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이 병기고는 무기를 수리하거나 소형 야전포를 생산하는 소규모 작업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을 겁니다.
올해 초 설립된 러시아 학교는, 정부의 변혁이 일어나고 왕이 우리 공사관으로 이전한 후, 이 학교를 담당하고 있는 퇴역한 포병장교 비류코프(Бирюков) 대위의 활동과 능력 덕분에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학생은 30명에 2개 학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확인한 바로는 8달의 교육에도 불구하고 고학년 학생 중 몇 명은 받아쓰기도 잘하고 말도 상당히 정확하게 구사합니다.
한국의 내정에 대한 일본의 압도적 영향을 제거하면서 많은 긍정적 변화들이 생겼습니다. 비록 다른 곳은 아직도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지만 서울에도, 그리고 제가 다녔던 주요 항구들인 제물포와 부산, 원산에도 교역이 활발해지고 상업회사들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미국인들의 ‘서울-인천’ 구간 철도 건설과 프랑스인들의 ‘서울-평양’ 구간 철도 건설 허가 역시 나라의 부강과 재정상태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사건들이라는 데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한국의 내부 사정도 이런 방향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정부권력은 상당히 강화되고 나라의 안정도 복구되었습니다. 이것이 장래 얼마나 계속될지는 서울에서 우리의 정치적 영향력이 계속 발전되고 보존되는가에 상당부분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저는 이전처럼 국왕폐하를 알현하고 각별한 관심을 받았으며, 폐하로부터 경호를 위해 서울에 와 있는 해군들의 활동에 대한 최고의 찬사와 사의를 들었습니다.
해양대신의 뒤이은 허가에 준하여 월미도 해안에 있는 우리 조차지에 1,000톤을 수용하는 석탄저장고가 축조되었습니다. 긴즈부르그 상업회사는 자체 자본으로 석조토대의 튼튼한 창고를 지었습니다. 선박에 석탄을 선적하거나 훈련이나 목표사격을 하러 섬으로 오는 사람들을 하선시킬 때 정박소는 매우 필요합니다. 이 정박소를 짓는 것은 38피트(11.5m)에 이르는 밀물 하에서 대규모 작업을 해야 하며 소요 비용도 많이 듭니다.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는 방법은-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47.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1, лл.522∼524об.
…… 상륙 부대 건물 건축은 대리공사가 담당하고 있고, 그는 이에 대해 작년에 상부에 보고한 바 있습니다.
한국군 대대의 훈련과 사격연습을 직접 보았는데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무기를 다루는 방법과 대열에서 바른 동작과 정확성, 연대 사격 결과는 사병들과 교관들이 이 일에 애정을 가지고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었고 특별히 격려할 만 했습니다. 대대는 외형상으로도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 장교들의 말에 따르면 아직 화력무기를 다루는 면에서 부족함이 있지만, 한국군들은 이제 자신의 임무를 완전히 숙지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모든 구호는 러시아어이며 장교들 가운데는 러시아 국적자와 저의 함대 통역관으로 일했던 한국인 두 명이 있습니다.
탄환 공장과 병기고는 퇴역한 기계기술자인 레므뇨프의 지휘 하에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이미 모든 기계들이 작동 중에 있고 버단註 068 탄환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러시아학교는 제가 방문하여 확인한 바, 퇴역한 육군 대위 비류코프의 적극적인 운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학생들의 숫자도 작년 10월 1일에 다니던 30명이 아니라 48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우리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이 학교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 정부의 금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일 년 전 빈약한 재원 하에서 설립된 러시아학교가 그 지위에서 더욱 합당한 자리를 찾게 하고, 미국의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들 즉, 재정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고 있는 학교들의 상황에 조금이라도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최초의 정교회를 서울에 창설하고 정교의 포교와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러시아어를 보급하고 기술을 가르치고 러시아와 접하게 할 적기가 왔다는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군대와 학교를 이용하여 한국에서 우리의 지위를 점진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으며, 한국인들의 교육을 통해 일본과 미국의 영향력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귀족 자제들을 중심으로 한국 젊은이들을 러시아로 유학 보내는 것 역시 커다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당연히 모든 비용은 우리정부가 지불해야 하며, 한국의 재정 상태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한국정부와의 협정에 준하여 군대 조직을 위해 21명의 교관을 더 파견해야 합니다. 장교 4명중 한명은 사관학교 책임자가 되어야 하며, 군악대장 1명, 하사관 10명, 군의관 2명, 군악대 3명, 그리고 기술기사 1명입니다. 협정의 조건을 보면 이후 우리 교관들의 파견은 한국정부의 재정에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4월 30일 제물포로 돌아왔고 대리공사인 4등 문관 베베르가 함대에서 이틀을 보내면서 저와 함께 왔습니다.
제물포에 정박한 마지막 기간들은 월미도에 있는 조차지를 둘러보고, 제가 받은 해양부 책임자의 지시문에 따라 진척시켜야 하는 건설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정박소는 주둔 선박들의 자원으로 계속 건설하고 있으며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지만 완공을 위해서는 약간의 비용 할당이 더 필요합니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48.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1, лл.662∼663об.
거문도는 좋은 항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롭게 진입하려면 마치 바다에서처럼 때때로 배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이외에도 산에서 불어오는 돌풍이 얼마나 심한지 사람들이 서있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정박장은 다양한 훈련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장애물 없이 길게 뻗어 있지만, 해안 상륙 작전을 수행할 만한 공간과 도로는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 이외에도 정박장에는 규모가 큰 한국인 마을이 있는데 식량은 전혀 없습니다. 어렵게 그리고 비싼 가격에 몇 십 개의 계란을 구했습니다.
정박장을 따라 일본인들이 타고 있는 단정 몇 개가 보였고, 섬들에 마을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바람이 강하여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53.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72, лл.192об.∼196
계정서: 현금과 신용장에 의거하여 수령하지 않은 액수
1896년 3월 2일
부산 정박장에 2월 17일까지 머물렀습니다.
귀하께서 보내신 전보에 따라 2월 17일 오후 3시 15분 닻을 올리고 3개 기관을 가동하여 라자레프 항으로 출발했습니다. 항로는 한국해안 주위로 정했습니다. 2월 18일 밤 2시 45분 장기곶(클로나르 곶 мыс Клонара)註 070을 지나 정오에 해류가 없어 해를 기준으로 위치를 측정했습니다. 2월 19일 아침 3시 학용단(페시추로프 곶 мыс Пещурова)을 옆으로 지나 평균속도 시속 7.37노트로 43시간 317마일을 항해하여 아침 10시 15분에 원산만의 라자레프 항에 닻을 내렸습니다. 이동은 좋은 기상조건 하에 진행되었습니다. 크류드네르 (Крюднер) 곶註 071부터 북쪽으로는 해안선이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습니다.
원산에서 참모부 대위 소코브닌(Соковнин)과 조수인 쿠지민니(Кузьминый) 중위 그리고 대오 전체를 만났습니다. 즉시 귀하의 전신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한국 내부 폭동 때문에 소코브닌 대위는 서울을 통과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몇 달간 원산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현재 폭동에 대한 그 어떤 긍정적인 이야기도 불가능합니다. 소문에 따르면 계속해서 잠잠한가하면 다시 더 크게 일어나곤 한다는 것입니다. 2월 22일 한국경찰들은 일본 군인들과 함께 폭동의 주모자를 검거했습니다. 엄씨 성을 가진 상당히 부유한 원산의 상인으로 그날 딸들을 만나기 위해 원산에 왔었다고 합니다. 현재 그는 한국감옥에 있고 며칠 내로 서울로 호송될 것입니다.
다음 날인 2월 20일 선박에 소코브닌 대위를 싣고 아침 9시에 신포 항으로 출발했습니다. 평균속도 9.33노트로 7시간 30분 동안 70마일을 항해하고 오후 4시 30분 섬의 통로를 따라서 항구로 들어가 코르닐로프 만에 닻을 내렸습니다. 저의 질문에 대한 주민들의 대답은 1885년 클리퍼선 ‘크레이세르’의 지휘관이었던 해군중령 오스톨로포브이(Остолоповый)가 올린 보고서와 일치합니다.(수로학에 대한 기록, 1888년, 제1호, 3~6쪽)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겨울에는 북서풍, 여름에는 북동풍이 붑니다. 현재 신포항은 2주마다 원산과 증기선이 왕래한다고 합니다. 우리 선박이 도착하던 날 신포에 작은 한국 증기선이 서있었습니다. 때로 일본군함들이 드나들곤 합니다.
2월 22일 7시 10분 4개 기관을 가동하고 라자레프 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번에는 장교들이 항구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도록 서쪽 통로로 나왔습니다. 소코브닌 대위의 요청으로 원산 만에 정박하기 전 라자레프 항에 들렀습니다. 전망대 곶(옵세르바치야мыс Обсервации)註 072 뒤로 통과하여 배를 돌려 다시 나왔습니다. 평균속도 8.68노트로 9시간 30분 82마일 항해하여 오후 4시 40분 원산에 정박했습니다.
라자레프 만과 원산만은 현재 결빙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원산만은 원래 몇 백 피트에 이르는 전체 지역에서 해안가 얕은 곳들만 얼어붙을 뿐이고 혹한의 겨울에만 얼음이 도시에서 갈마각(무라비요프 곶 мыс Муравьева)까지 뻗어나와 소도, 국도까지 항구의 남쪽부분을 덮습니다. 세관 정박소와 정박지는 그 어느 때도 결빙 걱정이 없습니다. 라자레프 항의 해만은 만으로 흘러내리는 강과 북쪽 지역이 비교적 얕고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는 위치 덕분에, 한국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약간 더 얼어붙지만 얼음은 두께가 얇아서 한국배가 다니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북풍이 때때로 이 얼음들을 영흥만으로 이동시키지만 얼마되지 않아 서풍이 바다로 밀어냅니다. 올 겨울에는 가장 온도가 낮았습니다. 북서풍이 강할 때 영하 15°입니다. 겨울에 심한 남서풍은 때때로 북동풍이 됩니다. 상인인 셰벨료프 요원과 그레이(Грей)가 관측한 자료 즉, 신력으로 11월 1일부터 2월 29일까지 원산의 기상관찰 결과를 같이 올립니다.
2월 27일 오후 1시 30분 3개 기관의 증기를 올리고 부산으로 출발했습니다. 항로는 한국해안선을 따라가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2월 28일 저녁 9시 장기곶을 옆으로 지났고 2월 29일 아침 8시 30분에 부산에 닻을 내렸습니다. 평균속도 시속 7.56마일로 43시간 이동했습니다. 기상조건은 항해에 최적이었습니다.
해군중령 _________
註 07070) 영일만에 있는 장기곶. 18세기 라페루즈의 지도에도 Cape Clonard라고 나와 있다-역자 주.註 07171) 지명 추적 불가. 평해만 위쪽. 구산항 근처-역자 주.註 07272) 지명 추적 불가. 송전만 내의 가래구미리 근처-역자 주.
첨부문서 7
해양포함 ‘코레예츠’호 지휘관
1896년 6월 29일
№ 672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 각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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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참모부 대위 소코브닌의 탐사단이 원산에서 서울로 왔습니다. 탐사단은 그 외에도 장교 1명, 카자크인 4명, 두 명의 통역자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탐사도중 화약무기를 가진 폭도들을 만났고 폭도들은 이들을 일본인으로 오해했다고 합니다.
탐사단은 위험한 상황이 닥칠까봐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원산에서는 일본인들과 본격적인 전투가 몇 차례 벌여졌습니다. 당연히 한국인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3월 24일 밤 2시경 서울주재 우리 공사관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공사관 부엌에 붙어있는 경찰서로 쓰던 한국 가옥에 불이 났습니다. 집은 잿더미가 되었고 불은 공사관 지붕으로 넘어오려고 했지만 다행히 우리 승무원들의 민첩한 작업 덕분에 불은 옮아 붙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모든 한국경찰들은 도주했습니다.
왕과 후계자는 매우 놀랐습니다. 화재를 진압하면서 우리 선원 중 한명이 지붕에서 떨어져 복부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왕은 우리 승무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상으로 담배, 호두 등등을 주었습니다.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소코브닌 대위 탐사단의 일부가 쿠지민니 중위의 지도하에 3월 28일 서울과 제물포간 측량을 위해 출발했습니다. 이들은 3일 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4월 4일 저녁 미하일로프(Михайлов) 중위가 카자크 2명, 통역자를 대동하고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할 때 이들은 마치 갓난아기처럼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짐과 식량 전체와 말 몇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미하일로프는 그가 소속되어 있던 탐사단의 카르네예브이 대령과 함께 서울에서 전주까지 갔다고 말했습니다. 전주에서 탐사단은 2개조로 나뉘었고 미하일로프와 카르네예브이는 각자 다른 길로 부산으로 갔다고 합니다.
아니(Ани)註 075 시서 그는 약 1,500명의 폭도들과 마주쳤고 이들은 그를 둘러싸고 돌을 던졌습니다.
이때 미하일로프는 카자크들에게 사격을 명령했고 3-4명의 한국인을 사살했습니다.
사격은 한국인들을 동요하게 만들었습니다. 미하일로프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돈과 공책 외에 모든 짐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다행히 곧 어두워져서 그가 숨을 수 있었습니다.
4월 22일에 모든 주범(主帆)을 달고 각하의 전보에 따라, 공사관에서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진 참모본부 카르네예브이 대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서울에서 목포항으로 떠날 차비를 했습니다.
4월 23일 각하께서 함선을 방문하셔서 이 기간 동안 진행했던 모든 수로 조사 작업을 점검하셨습니다.
註 07575) 지명 추적 불가. 『1885-1896년 한국 여행기들』(По Корее. Путешествия 1885∼1896 гг.(Составление, предисловие и примечания Г. Д. Тягай). -М.: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1958)에 나온 카르네예브이 대령의 기록을 보면 미하일로프 중위는 3월 19일 전주를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던 중 4-5일째 되던 날 폭도들과 마주쳤다고 나와 있다-역자 주.
보고 №14
복사 №239
한국의 군도: 관매도(Nimrod Island), 워싱톤항만(Washington Harbour), 진도군도, 마산포(Mesani-po)만과 진해(Anguk)만
포함 ‘보브르’호의 함장 해군중령 알렉산드롭스키(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1895년 9월 25일자 보고서에서 발췌
7월 31일 오전 10시 30분경 수위계를 사용하여 남쪽 섬의 북쪽 만에 도착했습니다. 만으로 진입하면서 수심측정기를 투척하자 수심 20사젠을 가리켰습니다. 이 이외에도 소용돌이를 동반한 상당히 빠른 해류로 인해 함정을 해안 방면으로 강하게 미는 힘이 발생하여, 기관 두 개를 다른 방향으로 최대 속력을 주고 방향타를 지그재그로 작동함으로써 힘들게 원하는 항로를 잡았습니다. 상기와 같은 조건에서는 정박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만을 벗어나려고 기관을 최고 추력으로 가동시켰습니다. 상기의 만 북쪽은 산으로 가려 있었으며, 해안을 따라 한국의 촌락들이 보였습니다. 만에서 빠져나오면서 관매도(Nimrod Island)에 있는 초도포(Murray Sound)로 향했습니다. 신이이도(Craig Harriet group)을 남쪽으로부터 회항하면서, 이 섬들과 리라섬(Lyra Island) 사이의 협곡으로 진입했습니다. 저녁 6시에 관매도에 형성된 만의 북서 방면에 정박했습니다. 수심은 6사젠 이었으며, 해저면은 진흙으로 된 하상토였습니다. 만은 모든 방면의 풍향에 노출되어 있으며, 외해로부터 만을 향해 높은 파도가 밀고 들어와 정박에 불편했습니다.
8월 1일 한국군도 중 남쪽 수역 즉, 진도 방면을 조사하기 위해 출항했습니다. 오전 6시 45분 버지니(Virginie) 섬과 동일한 경도에 접근할 즈음, 강우를 동반한 강력한 돌풍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순식간에 군도 전체가 안개에 가리었으며, 그 즉시 정 동쪽 방면으로 회항하여 항해를 지속했습니다. 돌풍이 멈추기를 기다리면서 5마일을 항해하다가 안개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다시 선회하여 정 서쪽 방면으로 향했습니다. 곧 강우가 멈추고 군도가 시야에 들어와서 최대 항해속도로 목적지를 향해 운항했습니다. 버지니섬 북쪽 끝을 향하여 수로지도에 나온 방향을 따라 항해했습니다. 11시 15분 ‘Green channel’에 진입하여 중간 속도로 감속한 후 섬 사이를 항해했습니다. 섬들 사이에 형성된 진출입로 중 일부는 상당히 협소했습니다. 수로지도에는 이곳에서는 가능한 한 수심측정기를 자주 투척하면서 중간 속도로 항해하라는 충고가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섬들의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하얀색 점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각 섬의 정상에는 그곳에서 수로조사 작업을 실행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흰색과 붉은색으로 된 기가 게양된 깃대와 표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2시 15분 목적지인 워싱톤 항만에 도착하여, 진도만의 북서쪽에 있는 입구로부터 1마일 떨어진 진도 연안 밑에 정박했습니다. 수심은 7.5사젠 이었으며 해저면은 진흙으로 된 하상토였습니다.
워싱톤 항만은 진도의 북서쪽 부분으로서 모든 방향이 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데, 이 섬들이 워싱톤 항만이라고 불리는 군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정박장은 상당한 규모이며, 바람과 파도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에 강력한 북풍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안전한 정박장을 선박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정박장의 평균 수심은 8-7사젠 입니다. 최대 수심은 일부 장소에서 25사젠에 달합니다. 해안선으로부터 10사젠 거리까지의 연안 수심이 매우 깊어서 6-8사젠에 달합니다. 진도에서 정박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8사젠 깊이입니다. 정박장에서 수심이 가장 얕은 곳은 5-6사젠 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본인의 견해로는 24-25피트 흘수를 지닌 대형 장갑순양함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전함에게는 본 정박장이 매우 유용하고 매우 편리합니다. 보다 정확한 측량을 실시하면 수심이 5사젠 보다 더 얕은 곳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이미 관측과 측정을 수행했으며, 일본 선박들이 본섬을 기항하고 있고, 일본과 통상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제물포나 남서쪽의 다른 여러 항구에서 출항하는 일본 기선의 노선이 섬들 사이에 위치한 본 정박장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일본인들은 벌써 이 지역에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1845년 ‘Flying Fish’호를 비롯하여 영국인들은 이곳의 지형과 ‘Notch’ 군도 사이에 형성된 진출입로를 이미 조사했으며, 이곳은 대형선박들이 편리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곳입니다.
진도
본섬은 그 부속 도서들과 함께 하나의 완전한 행정구역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이산(Ли-и шан) 군수의 관할 하에 있습니다. 군수는 섬 북서부에 있는 협소하고 길게 형성된 만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진도시에 거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섬에는 산이 많고 산맥들이 사방으로 얽혀있습니다. 산에는 초목이 매우 적습니다. 산의 남쪽 중턱에는 키 작은 나무들로 형성된 숲이 약간 있으며 마을과 경작지가 있습니다. 섬의 북서부에 위치한 만 이외에도, 남동 지역에 금찬도(Кым-чан-до)라는 이름의 만이 하나 더 존재합니다. 본 명칭은 만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을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진도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파악하게 된 사실은, 하구가 상당히 넓지만 상류로 올라갈수록 협소하고 긴, 작은 지류들이 여러 방향으로 나뉘다가, 결국은 섬과 동일한 명칭을 보유한 진도라는 중심 도시로 연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완전한 만조 때와 완전한 간조 때 모두 이 지류를 통해 운행했습니다. 만조와 간조시 해안선의 형태가 천차만별로 변합니다. 간조 시에는 폭이 20사젠에 불과한 상당히 좁은 지류가 형성되지만, 그 지류의 가운데를 따라 항해하면 진도읍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간조시 해류는 지류를 향해 급경사를 형성하는 산 중턱에서 최소한 반마일이나 뒤로 물러납니다. 산의 중턱으로부터 지류 사이에 형성된 공간은 축축하고 질척거리며, 전혀 통행이 불가능한 갯벌로 뒤덮여 있지만, 한국인들은 해삼이나 여러 종류의 조개들을 채취하기 위하여 갯벌을 파헤칩니다. 지류에도 다수의 식용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만조 시에는 드러나 있던 지류의 모든 부분들이 완전히 바닷물에 잠깁니다. 여울에서의 수심은 2.5피트에 불과하기 때문에 증기보트는 전혀 통행할 수 없습니다. 가장 하구에 있는 지류의 수심은 눈에 띄게 깊어지며(15피트에 달함), 수원지로 향할수록 수심이 얕아집니다(2.5-3피트까지 줄어듦). 저는 진도읍에서 늦은 시간에 귀항하면서 미리 표시해둔 항로표식과 주요 지점들을 따라 운항하면서 속도를 조절해야만 했습니다. 온통 물에 덮인 전방의 넓은 수역은 간조 시에도 좁은 지류를 형성하지만, 중형선박은 그 지류 안에서 선회하기 어렵습니다. 간조 시에 드러나는 엄청난 크기의 질척한 여울로 인해 간조시에는 해안에 접안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진도의 둘레는 약 70베르스타이며, 폭은 약 30베르스타 입니다. 섬의 길이는 폭보다 조금 더 넓습니다. 섬들은 산악 지형이며 그 산맥에는 중심축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북풍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계곡과 산악의 남측 경사면에서만 마을과 경작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진도에는 북풍이 심한 것이 명백합니다. 섬의 주민은 한국인이며 극히 소수의 일본인도 있습니다. 주민 수는 10,000명에 달하며, 주업은 농업과 어업입니다. 섬 주변에는 어류가 매우 풍부한데, 진도와 부산 간의 통신과 교역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수출에 종사합니다. 한국인들은 자기 소유의 농지를 경작하고 있지만, 결코 주도면밀한 농경이라고는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토양이 비옥해서 수확이 좋을 뿐입니다. 조, 수수, 보리, 옥수수, 쌀, 배추와 고구마를 파종합니다. 한국인들의 가금류 중 대표적인 것은 황소입니다. 한국에는 말이 매우 귀해서 황소가 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이외에도 돼지, 닭 등이 있는데, 이상의 것이 한국인들의 빈약한 살림살이 전부입니다. 워싱톤 해협(Washington Strait)의 연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어류 수출 역시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진도읍에서 우리는 황소 및 약간의 암탉과 영계를 구입했습니다. 우리의 함선을 방문한 군수는 흔쾌히 상기의 정보들을 저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군수는 상기의 사실들 이외에도 황소 10마리와 약간의 가금류 그리고 채소를 즉시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산에서 만을 향해 흐르는 개천의 수는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수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담수를 공급받는 것이 상당히 힘듭니다. 진도산으로부터 15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양질의 대형 우물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나 도로가 전혀 부설되어 있지 않은 결과, 담수 공급이 상당히 곤란합니다. 일본인들은 관측과 측정을 실행하고 주민들과 무역을 하기 위해 진도를 상당히 자주 방문하고 있습니다. 진도에 있는 만의 북서쪽과 금찬도 만에 세 척의 일본 선박이 상당히 오랜 기간 정박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진행이 러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우리의 바텐더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함 또는 단순한 교통선 등의 왕래 사실과 관련된 정보를 한국인들로부터 입수하기가 곤란했습니다. 진도에는 일본인들의 창고가 전혀 없었으며, 전신선도 없었습니다. 우편연락은 부산으로부터 왕래하는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으나 시기가 매우 불규칙적입니다. 군수는 자신의 보고서와 서류들을 급사를 통해 발송하고 있으며, 급사는 한국식 돛단배를 이용하여 제물포까지 항해한 후, 그곳에서 서울로 향합니다. 제가 군수에게 만의 개괄도면을 보여주자, 그는 다음 방문에서 진도 및 진도에 속한 섬들이 나온 지도를 가져와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진도의 기후는 혹독하지 않을 것이며, 동절기에는 연안에만 결빙되고, 만의 중간과 워싱톤 항구는 얇고 작은 형태로 결빙되어 떠다니는 얼음조각들로 가득하지만, 함선에는 위험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군수는 대규모의 관리와 군사들을 대동하는 과대한 행렬을 이끌고 저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는 상당히 수수하게 보여주었으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고, 실로 만족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사소한 선물을 몇 개 증정하자, 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서 다음날 가금류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진도에 정박하고 있는 동안 선임항법사의 지휘 하에 장교들이 만에 대한 조사를 실행했습니다. 비록 양지는 32도, 음지는 25도에 달할 정도로 기온이 무덥기는 했지만 작업을 수행하는 동안 날씨는 순조로웠습니다. 작업을 완료한 후, 명령에 따라 진도의 남쪽 측면을 따라 부산으로 출항했습니다. 금찬도라는 명칭을 지닌 만의 남동쪽을 통과할 무렵 섬들 사이에서 강한 소용돌이와 조우함에 따라 운항 속도가 2.5노트까지 떨어졌으며, 이 좁은 해협을 벗어나기 전까지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이후 거문도가 북쪽 방면으로 오게 항로를 잡았습니다. 8월 12일 밤 거문도 항과 동일한 경도 상에서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북동풍과 조우했습니다. 바람은 계속해서 강해졌으며 선수에 대형 파도가 치고 들어왔습니다. 이에 거문도 항에 입항하여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거문도에 입항하면서 정박장에 정박 중인 여러 척의 일본 증기선을 목격했습니다. 항구에 진입하여 북동 연안에 정박했습니다. 수심은 5,5사젠 이었으며, 해저면은 진흙 하상토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 증기선들은 군수물자 수송선용 기를 게양하고 있었으며, 그 사이에 일본 군기를 게양한 준설선 한 대가 있었습니다. 준설선은 바닥이 접히는 바지선을 예인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내항했습니다. 증기선들의 명칭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해위를 출항하여 이에도시마(Iedo-Sima)행 선박 ‘Bankoku maru’호, 이에도시마행 선박 ‘Iasonoura maru’호, 뤼순항에서 이에도시마행 선박 ‘Ise-maru’호입니다. 오후 1시 정박장에 일본 증기선 ‘Itoni maru’호가 도착했습니다. 본 증기선의 갑판에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커다란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뤼순항을 출항하여 이에도시마로 항해하는 중이었습니다. 모든 선박들은 암초 절벽을 따라 항해하다가 강풍을 피하기 위해 거문도에 입항했습니다. 본 증기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일본함대 출신입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식량을 적재한 후 오후 2시에 출항했습니다. 정박장을 벗어나서 가덕서도(Douglas Inlet)에 진입했습니다. 운항 내내 안개와 강우를 동반한 북동풍이 강력하게 불었습니다. 마산포라는 이름의 작은 도시가 있는 만으로 진입하면서 잔잔한 물결의 바다를 만날 수 있었으며, 날씨도 맑아졌습니다. 마산포 만은 모든 방향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었으며, 수심도 깊고, 부동항일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날 한국의 기를 게양한 소규모의 증기선이 내항했는데, 부산과 다른 항구들 간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선이었습니다. 마산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한국의 관헌들이 방문하여, 우리에게 어디서 왔는지, 장기간 정박할 예정인가 등을 질문했습니다. 식량과 관련하여 우리가 질문을 던지자, 이곳에서는 황소와 채소 등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8월 15일 오전 6시 30분 마산포를 출항하여 진해만으로 향했습니다. 진해만은 매우 작았으며, 보호될 수 있는 상태이고註 077 마산포 만으로 가는 상당히 좁은 항로가 있습니다. 진해만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식량은 상당히 빈약하여 신선한 식품이 거의 없었습니다. 2시간 정도를 정박한 후 닻을 올리고 외해로 출항하여 가덕서도(Douglas Inlet) 사이를 통과하여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입니다.
확인:검찰관 해군특무상사 _____________
註 07777) 외해의 공격으로부터-역자 주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96. РГАВМФ, ф.417, оп.1, д.2006, лл.47∼48об
해양부 대신
해군총참모본부
1899년 9월 25일
№ 2312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람즈도르프(В. Н. Ламздорф) 각하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인 길테브란트(Гильтебрандт) 해군중장이 비밀전문 제127호의 사본을 보내면서, 이 전문에서는 현재까지 러시아와 일본 간의 한국 분할 추측에 대한 소문과 함께 일본이 부속 도서를 포함한 한반도의 남쪽 지방을 점유한다는 내용을 알려왔습니다.
정치적 측면에서 이러한 추측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만약 한국 분할이 실제로 고려되고 있고 분할이 실행된다면, 이는 극동 지역의 중대한 역사적 운명을 지울 수 있는 사실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는 러시아의 이익과는 부합되지 않을뿐더러 현재의 불안정한 한국 정세나 한일관계보다 더 위험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점을 각하께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도 주지하다시피 얼마 전에 있었던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선박들을 위해 온화한 기후적 환경을 갖춘 안전한 항구를 만들려는 우리의 확고한 노력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데 있어 우리는 오호츠크(Охотск), 페트로파블롭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 니콜라옙스크(Николаевск), 블라디보스톡(Владивосток)에서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1881년 중국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장애는 한국 동해안의 보다 남쪽에 기지를 가져야 할 불가피성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거점으로는 신포 항이 고려되었습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이 원인이 된 극동지역의 복잡한 양상은 우리 함대에게 남한의 거점이 갖는 중요성의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러한 거점들은 명백해졌습니다. 다도해이면서 제반 시설을 갖춘 근거지로서 뤼순항(Порт Артура)은 우리 함대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겠지만, 만약 한국이 분할된다면 우리 태평양 분함대의 해상 활동에 제약을 받을 것이며, 이 항구는 흑해보다 입지가 더 나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평양의 우리 군사력은 분할될 것이며, 함대의 일부는 블라디보스톡에 묶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적은 한국의 남동해안(부산 혹은 거제도 부근)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대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발해만(Печилийский залив)에 깊숙이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뤼순항은 시베리아철도의 종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뤼순항은 극동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우리 함대의 주요 근거지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의 의도대로 한국의 분할 점령이 이루어져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 한국을 단절시킨다면 뤼순항은 의심할 여지없이 블라디보스톡과 주요 작전지역으로부터 단절될 것이며, 뤼순항은 단지 시베리아철도의 강화된 거점, 북경과의 관계에서 전략적 거점으로의 의미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극동 지역에서 우리가 보다 광범위한 임무를 수행하려면 태평양 분함대를 증강시키고 전시에 작전 재량권을 함대에게 보장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뤼순항과 블라디보스톡 간의 관계를 더욱더 강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은 우리 함대가 한반도 남해안에 강력한 기지를 가지고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해안 어딘가를 점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대한해협을 장악할 경우에만 충족할 수 있습니다.
대한해협에서 가장 편리한 기지는 거제도입니다. 그곳은 장래에 벌어질 전쟁의 전구에서 가깝고, 대규모 함대의 정박이 가능하고 바다로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한 지역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일본 뿐 아니라 여타 해양강국들도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 번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국이 현재의 상항을 유지하도록 보호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보다 더 실익이며, 또한 어떤 경우에도 일본이나 다른 강대국들이 도서를 포함한 한국의 남쪽 지방을 점유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깊은 존경과 충심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서명:티르토프(Тыртов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101. РГАВМФ, ф.417, оп.1, д.2006, л.168об.
사본
№ 2
서울 공사관
협약서
아래 서명한 러시아 황제의 서울주차 대리공사와 조선 황제의 외무부 장관은 최근 개항된 항구 마산포 근처의 도서 지역 거제도에 관해서 널리 퍼져있는 소문으로 인해 차후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돌발적인 사건의 예방을 고려하여 다음을 약정한다.
러시아 정부는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 또는 국민들이나 상공업 회사들을 위해서 어떠한 양도나 소유 재산의 양보, 거제도의 토지나 그 맞은편 해변, 마산포 항구의 경계 구역 그리고 모든 주변 도서 지역에 있는 어떠한 토지의 대여를 요구하지 않기로 약조한다. 동일하게 조선 정부도 언제 어떤 구실로도 다른 외국 정부들이나 그 국민, 상공업 회사들에게 어떠한 양도나 소유 재산의 양보, 거제도의 토지나 그 맞은편 해변, 마산포 항구의 경계 구역 그리고 모든 주변 도서 지역에 있는 어떠한 토지의 대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무를 진다.
1900년 3월 17일, 그리고 조선력으로는 광무 4년 3월 30일.
러시아 제국 대리공사 /서명/ А. 파블로프 印 | 조선 국왕의 외무대신 /서명/ 박재순 印 |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102. РГАВМФ, ф.417, оп.1, д.2006, лл.169∼170об.
사본
№ 2
서울 공사관
협약서
아래 서명한 러시아 황제의 서울주차 대리공사와 조선 국왕의 외무부 장관은 상대적으로 편리한 위치에 석탄 저장고, 진료소를 설치하는 문제와 러시아 태평양 분함대가 평화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요구되는 여러 시설들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를 마친 후 다음 사항을 약정한다.
Ⅰ. 조선 정부는 이 업무와 관련하여 러시아 정부에게 우호적인 상호 원조를 할 것이며, 마산포 항의 해변 구역에 위치한 적합한 토지를 양도하며 그리고 조차지 관리 권한을 러시아 정부에게 전적으로 위임한다.
Ⅱ. 언급된 토지의 정확한 위치와 그 경계는 기둥으로 명시될 것이고, 러시아 공사가 마산포 계획을 실행할 것이며, 이 업무를 위해 특별히 임명된 조선 정부 관리와 러시아 공사는 함께 의정서를 작성할 것이며 서명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언급한 조선 정부 관리는 오해의 여지를 기피하기 위해서 러시아 정부가 필요로 하는 토지의 소유권 이전을 총괄 보고서에서 표명한다.
Ⅲ. 만일 언급한 토지의 공간에 조선인 소유의 토지나 건축물이 발생할 경우, 해당 토지와 건물들은 조선 정부에 의해 구입되어야만 한다. 조선 정부는 토지가 러시아 정부로 양도되었을 때 그 토지의 전 소유자들이 소유지의 경계 밖으로 이주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
Ⅳ. 언급한 개인 소유의 토지와 건물의 구매 그리고 이 모든 소유권의 최종적인 전달은 상기 의정서에 마산포의 러시아 공사와 조선 정부 관리가 사인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로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국민에 대한 이주 기간은 러시아 공사와 위 관리의 동의를 따라 책정하게 될 것이나, 2개월을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Ⅴ. 지정된 개인 소유의 토지와 건물에 대한 구입과 묘지 이전에 따른 조선 정부의 모든 지출 그리고 조차지에 포함되는 관청 소유 토지에 대한 실 매매가는 러시아 정부가 조선 정부에게 배상할 것이며, 이것은 마지막 토지의 양도 처리와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배상금으로 주어지게 될 일차적 금액과 매년 토지세는 러시아 공사와 상기 조선 관리의 동의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Ⅵ. 러시아 정부가 당면하는 문제, 즉 러시아 함대 선박들의 하역 작업과 저장물들의 보관, 상품의 수입과 수출은 유효한 국제 조약의 상응하는 조항에 따라 적용될 것이다.
1900년 3월 17일, 조선력으로는 광무 3월 30일.
러시아 제국 대리공사 /서명/ А. 파블로프 印 | 조선 국왕의 외무대신 /서명/ 박재순 印 |
파벨 페트로비치 티르토프(Павел Петрович Тыртов) 각하
외무대신은 파벨 페트로비치(Павел Петрович) 각하께 존경을 표하면서, 현 5등 문관 이즈볼스키(Извольский)의 올해 6월 21일 비밀 전보 사본을 동봉하여 보내는드립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1901년 6월 23일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103. РГАВМФ, ф.417, оп.1, д.2011, лл.15∼20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 길테브란트(Гильтебрандт) 중장에게 보내는 훈령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라는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불러온 극동에서의 사건 진행 과정을 통해서 극동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모든 나라는 자신의 정책노선을 전면적으로 변경시켰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먼 미래에나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던 문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 중에는 태평양 연안에서 자신의 세력을 견고히 하고자 하는 주요 유럽 제국들의 목표가 확고히 설정되었다는 점이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1860년 중국과의 국제조약은 아무르강 연안 지방을 획득한 러시아 자체 뿐 아니라, 시베리아철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바다까지 보장되어 있는 출구를 가지지 못하고 있던 연안 지방의 발전에 있어서도 실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우리 정부는 시베리아철도를 바다까지 연결하기 위해 뤼순항과 다롄만을 포함한 광둥반도의 일부를 중국으로부터 할양받는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그 가운데 뤼순항은 우리 해군의 기지 역할을 하는 군사 항구로, 다롄만은 상업 항구로 만들자는 제안이 제기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즉 극동에서의 이와 같은 모든 사건들로 인해 우리 태평양 분함대의 임무는 전반적으로 변경되고 확대되었습니다. 현재 태평양 분함대는 황해 연안에서 우리가 새롭게 획득한 성과들을 모든 불의의 사태로부터 지켜내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최근 분함대는 이와 같이 확대된 역할 수행에 의거하여 기존의 편성에 한정시키지 않고 전력을 증강시켰으며, 해양부는 향후에도 분함대를 지속적으로 강화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태평양에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해야 하는 중요한 목적은 극동에 대한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원하고, 그곳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극동에서 광둥반도를 획득한 외에, 한국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약화된 중국을,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력을 급속하게 증강시키고 있는 일본을 곁에 두게 되었습니다. 각하께서도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정치적 혼란은 예기치 않게 발생하며, 어떠한 정책이건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군사력의 지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극동에서 태평양 분함대는 전쟁의 가장 초기에 가장 먼저 적과 맞서 싸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각하께서는 항상 이를 염두에 두셔야 하며,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그와 같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 항시적인 준비태세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고려하여 각하께서는 모든 함선이 전투에 필요한 보급품을 상시적으로 완벽하게 갖출 수 있도록 하고, 기관과 기계장비 그리고 함포와 수뢰장비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함선들의 물적 장비들이 완전무결한 상태로 유지 되도록 하는데 모든 배려를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우리의 이익을 보다 확장시킬 수 있고 적에게 보다 실질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지역들에서의 군사행동을 세밀하게 준비하고, 분함대 활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한편, 개별 승무원들이 필요한 만큼의 높은 지식수준과 경험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분함대가 수행해야 하는 군사행동을 위한 어떠한 확정된 전투행동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일 것입니다. 하지만 각하께서는 휘하의 분함대가, 예를 들어 영국과 연합한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와 같이, 장래에 보다 강력한 적함대와 충돌할 것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 분함대의 작전행동은 다음과 같은 2가지의 목적 달성에 우선적인 방향이 설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적 상륙 부대의 우리 해안 혹은 한국 해안 상륙을 저지한다.
2. 극동에서 영국과 영국 식민지들 사이의 상품교역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한다.
한국과 페칠리 만 그리고 우리의 연해주 지역 해안들에서 군사행동 영역에 포함될 가능성이 큰 다양한 연안과 내륙 지역들이 가지는 전략적 의미를 사전에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유형의 준비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본적인 해결도 없이 향후에 요구될 분함대의 작전행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군사작전계획을 합리적으로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분함대의 개별 구성원들을 다방면으로 활용하고, 지휘관과 장교들에게 장래 각하께 유용한 자산이 될 수도 있는 필요한 정보들을 수집하도록 체계적인 지시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위에 제기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함선들을 발진시킬 경우에는 함선들을 개별적으로 항해하도록 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각 항구에 분산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지나치게 오랜 기간 항구에 묶어두는 것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가능한 한 분함대는 완전편성 상태에서 항해하여야 합니다. 다만 2등급 함선의 경우에만 정박지 임무나 특별한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다소 오랜 기간에 걸쳐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유형의 사태가 발생할 지라도 블라디보스톡과 뤼순항에 위치한 우리의 공고한 항구들은 우리의 주요한 거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이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이웃일 뿐 아니라 군사행동의 가능성이 큰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할 경우, 이 나라의 항구들을 우리 함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장소로 활용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하여 해양부는 이미 마산포, 진남포, 성진포 등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한국의 항구들에 저탄소 건설을 위한 토지구역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분함대의 지휘를 시작하는 데 있어 이를 염두에 두시기 바라며, 이 항구들에 저탄소를 건설하는 데 대한 각하의 의견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분함대의 교육훈련은 체계적이고 엄격한 일관성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수행하셔야 합니다. 함포사격, 수뢰 부설 및 제거, 기동훈련, 합동항해 등이 분함대의 중요한 훈련과업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야를 불문하고 전시에 직면할 수 있는 진격대형과 전투대형 뿐 아니라 개별적 전술임무의 수행까지도 확실하게 준비시켜야 합니다. 기동훈련을 통해 소속 함선들에게 함대를 선도하는 쾌속선을 따라 항해하는 기술을 익히도록 해야 하며, 획득한 정보는 신호를 통해 기함에 신속하게 전달하는 연습 또한 시켜야 합니다. 닻을 올리거나 내리는 것은 엄정한 규칙에 따라 동시에 혹은 신호 등을 이용한 적절한 운용을 통해 실시하여야 합니다.
뤼순항에 겨울 동안 정박해 있는 것과 같이 분함대가 특정한 항구에 오랜 시간 머물러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각하께서는 확실한 기간을 정해, 예를 들어 2주일이나 3주일에 한차례씩 의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함선을 동반하고 외해로 나가 기동훈련을 실시해야 합니다. 훈련 시간이 단 몇 시간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급 기함이 개별적으로 항해에 나서게 될 경우에는 동 함선에도 그와 동일한 지시를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 경우 분함대는 광둥반도의 항구들, 그중에서도 특히 뤼순항에서 겨울을 지내야 합니다. 그곳에 정박하는 함선들 중 일부는 예비전력으로 편입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형 함선들의 연안 해역 진입이 불가능하고 뤼순항의 정박지가 외해에 지나치게 개방되어있기 때문에, 각하께서는 상황에 따라 선박들을 다롄만에 정박시켜도 무방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예기치 못한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면 승무원들에게 일정 시간의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겨울 기간에 1등급 함선 1척 혹은 2척을 일본의 항구로 파견할 수 있습니다.
각하께서 계획하고 계신 분함대 혹은 분함대 소속 일부 함선의 기동 전반이나, 개별 함선의 원격지 항구(예를 들어 홍콩이나 마닐라) 파견 등에 대해서는 각하께 필수적인 지시를 전달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감안해서 사전에 저희 부처에 통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분함대는 5월부터 11월까지의 여름 동안에는 선상훈련 실시 및 자체 결함의 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블라디보스톡으로의 기동 등을 위해 아무르강 연안 지역의 우리 항구에서 체류하여야 합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지휘관들에게 자체 결함을 시정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할 경우에는 모든 함정이 대열에서 한꺼번에 이탈함으로써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 출항하라는 첫 번째 지시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하께서는 동 시정작업의 전반적 과정을 세밀하게 조정해야 합니다.
현재와 같이 모든 함선의 결함을 여름기간 동안 한꺼번에 시정하기 위해 작업을 연기해서는 안 됩니다. 1년의 기간 속에서 동 시정작업을 보다 적절하게 배분하고, 일부 작업의 경우에는 뤼순항의 자재를 가지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결함 시정에 보다 효과적인 일련의 체제를 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외국 항구들에서의 함선 수리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양성의 특별승인을 받는 경우에만 허용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하께서는 분함대의 효율적인 전투임무 수행을 체계적으로 준비하는데 배전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각 병과별 훈련 목록을 작성하셔야 하며, 훈련이 확정된 전투훈련 프로그램에 따라 즉각적이고 바람직한 형태로 수행되도록 감독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근무 프로그램은 각 함선의 유형과 전투행동 시 예정된 임무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작성되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함선 유형별 훈련, 함포와 수뢰의 실제 사격훈련, 그리고 모든 병과의 하급 승무원들에 대한 훈련 등은 실재하는 지시와 훈령에 따라 수행되도록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교육훈련 수행에 있어 실제 전투상황과 유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범선이나 전마선을 구입하고, 동 선박들에 사격을 실시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분함대 함선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롤링과 피칭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기상상황에서도 전열을 유지하는 능력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침(Цим) 해군중위의 평판측기를 사용해 작성한 기존의 전술목록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함선이 실제상황에 필요한 기관능력을 완벽하게 보유하고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 해양기술위원회註 093의 훈령에 따라 매 6개월에 1차례씩 6시간 동안의 전속력 항진을 실시해야 합니다. 이에 더해 각하께서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실 경우에는 분함대 소속의 모든 함선으로 하여금 고속항진을 실시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해양기술위원회의 기술적 문제에 대한 특별훈령이 적용됩니다.
새로운 전자식 신호체계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함께 숫자가 아니라 스펠링을 통해 신호를 전달하는 수신호 체계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호체계를 장교들이나 신호수들 뿐 아니라 하사관들, 심지어는 모든 승무원에게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신호체계는 이미 영국함대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으며, 영국함대는 이를 통해 근거리에서의 대화와 지시 전달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신호전달의 신속성을 반드시 확보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항해를 실시할 경우 분함대에 새로운 항해신호와 조직체계를 적용해서 실험하신 후, 이에 대해 각하께서 내린 평가를 가능한 한 상세하게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시이건 전시이건 각하께서는 정치적 문제들에 있어서는 각하께서 임명한 분함대 소속의 하급 항법사와 함장들을 우리의 공사들과 전권을 지닌 외교요원들에 대한 규정, 그리고 해양법령의 규정에 의거하여 지휘하여야 합니다.
극동에서 발생한 사태들, 그중에서도 특히 해군력과 관련하여 이해관계가 발생하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추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수행하는데 있어 우리 공사관들로부터 얻는 정보들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외국 및 지역의 주요 신문들을 기록하고, 장교들로 하여금 번역이나 발췌하도록 하며, 보다 중요한 기사들에 대해서는 원본이나 사본을 해양총참모부로 발송하셔야 합니다.
외국인들과 접촉하는데 있어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에게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부여됩니다.
중국, 일본 및 한국정부 공식인사들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우호적인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극동 해역에서 활동하는 외국 제독들이나 분함대 지휘관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함선들이 외국의 항구를 방문하는 경우 지방정부 혹은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함대 함선들과의 충돌이나 오해의 여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방문, 예포의 발사, 항구 체류 등의 문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해양법령과 기존의 규정을 정확하게 준수해야 합니다.
어떠한 외국 선박이라도 뤼순항이나 다롄만,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게 될 경우, 각하 측과 정박장에 있는 분함대 선박들은 방문하는 외국 선박에 대해 적절한 관심과 환대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승무원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휴식을 제공해야 하며, 육류와 빵을 비롯한 신선한 식료품의 공급을 보장함으로써 그들이 건강을 보다 잘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비용으로 저장된 소금에 절인 고기를 유용하게 이용하기 위해 이를 이등분하거나 적당한 크기로 잘라 신선한 고기와 함께 활용하도록 하고, 소금에 절인 고기와 건빵이 장기간 사용되지 않도록 승무원들에게 건빵의 활용방법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각하께서는 매년 2월 1일까지 상세한 연차보고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이 보고서에는 전투행동을 위한 함대의 준비상황, 분함대의 항해와 항해를 통해 얻은 결과, 개별 구성원들의 훈련성과 제고와 전투장비 및 경험의 활용에 필수적인 모든 사안들에 대한 각하의 의견이 첨부되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사안이 언급되어 있는 보고서인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분함대의 활동과 각하의 제안 등을 담은 상세한 보고서를 최소한 3개월에 1차례씩 저에게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해양부에서 각하께 적시에 필요한 지시를 하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밀정보가 포함되어 있는 서한은 외국의 우편기관을 신뢰하지 말고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발송해야 합니다. 그러한 서한의 경우 우연히 러시아로 귀환하도록 되어있는 신뢰할 수 있는 장교나 지원함대 선박 혹은 시베리아를 통한 전신수단을 이용해 전달하고,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는 서한의 경우에는 특별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장교를 통해 보내시기 바랍니다.
항법장교들의 훈련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함대 소속의 모든 장교들에게 상급 항법사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도록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하급 장교들이 함포와 수뢰를 실질적으로 잘 다룰 수 있도록 하고, 기동과 공격임무를 수행하는 데 범선과 수뢰정에 배속되어 있는 동력보트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할 수 있도록 그들의 작전술과 용맹성을 고양시켜야 합니다.
하급 승무원들에 대한 훈련은 그들이 해양의 생활환경에 적응하고, 현대 해양환경에서 요구되는 임무를 체득할 수 있도록 철저하고 항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휘관들에게 하급 승무원들의 지적 수준 향상과 병과별 훈련 수행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말도록 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은 업무는 태평양 분함대에 이미 일정하게 규정된 형태로 확립되어 있으므로, 기존의 관행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시면 될 것입니다.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111. РГАВМФ, ф.574, оп.1, д.2, лл.146∼147об.
제물포, 일본해와 황해를 지나 사흘 동안 480마일(840베르스타)을 항해했습니다. 4시에 한나절 거리의 해상에서 영국 순양함 ‘나르시스’호가 내항하여 닻을 내리고 정박했습니다.
1896년 12월 13일 금요일 오전 7시
우리 순양함 ‘파먀티 아조프’호에서 상륙 부대가 왕궁 방위를 위해 서울로 파견되었는데, 인원은 86명입니다. 그곳은 전에 일본과 청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조선은 대륙에 연결되어 있고 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조선, 즉 육지를 점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와서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우리의 첫 부대가 ‘아드미랄 코르닐로프’호에서 내려 상륙했을 때 조선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부대가 상륙하자 왕과 왕비는 매우 기뻐했는데, 일본인들이 바로 당장 궁을 공격하여 제일 먼저 그들을 죽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데, 조선의 대신들이 이들을 일본인들에게 밀고했고 그날 저녁 왕의 전 일가는 이 벌어질 불행에 대해 아무 생각도 아무 예상도 못하고 식사 하는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일본 장교들이 식당으로 들이닥쳤고 심한 말을 하기 시작했으며, 놀란 왕의 일가 모두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공포에 떨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재빨리 이들을 포압하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도 왕비를 없애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왕비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친러정책을 취하고 친러파 대신들을 중용했기 때문에 왕비를 싫어했습니다. 왕이 완전히 자신들의 수중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들은 무기로 왕을 위협하여 다른 방으로 옮기게 하고, 세자도 그렇게 했습니다. 왕비를 이곳에서 죽이려 했으나 일이 뜻처럼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왕을 데리고 천천히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왕비는 다른 방으로 피신했습니다. 왕비가 피신한 방에는 거적(멍석)이 많이 놓여 있었는데, 그 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습니다. 왕비를 은신하게 한 것은 왕비가 총애했던 대신으로 왕비와 소통했던 친러파 인물 중 한 명 입니다. 그는 왕비를 숨겼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곳 문에 서서 손을 위로 들었는데, 아마도 이렇게 함으로써 왕비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왕을 데리고 그들이 있던 곳을 덮쳤지만, 왕비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왕비를 찾아 모든 방을 뒤지던 중, 이 대신이 양손을 위로 크게 벌리고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왕비가 여기에 숨어 있음을 알아챘습니다. 먼저 그를 죽였고, 다음으로 이 거적 밑에 숨은 왕비를 찾기 시작했는데, 군도로 거적을 찌르기 시작하자 왕비가 그 칼에 찔려서 참을 수 없는 중상을 입고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이를 듣고는 거적을 들춰내어 왕비를 찾아내 조롱하고는 마당으로 끌어냈습니다. 거적도 몇 개 끄집어내어 불을 붙였는데, 왕비를 그 속에 넣어 태웠습니다. 반면 왕은 이 시간을 이용해 생각을 고쳐 먹고 가마에 탔습니다. 이들에게는 가마에 태우고 가는 풍습이 있는데, 여기에는 딱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칸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왕이 가마 안에 타고 앞 쪽에 궁녀를 앉히고는 궁을 빠져나갔는데, 보초는 궁녀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왕은 곧장 러시아 공관을 향해 서둘러 갔고, 현재 그곳에서 왕을 보호 중입니다. 일본인들이 왕비를 시해하고 왕을 덮쳤을 때 왕은 이미 피신한 뒤였습니다. 소란을 일으킨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러시아 공관의 뜰로 몰려왔지만 거기에는 우리 해군부대가 다행스럽게도 이미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날 저녁 막 도착한 해군 병사들로 거의 60베르스타를 걸어와 모두 지쳐있었지만 말입니다.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은 왕을 내놓으라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소총을 들고 위협을 가하자 모두 물러나서 잠잠해졌지만 이날 밤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저는 두려웠고 대단히 겁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해군 병사들이 대단히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건 저는 우리 병사들을 굳게 믿었고,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행들이 앞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조선 서울 상륙 부대 담당 아멜레프 중위의 말.
해외사료총서 16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Ⅱ(1894~1899) > 113. РГАВМФ, ф.574, оп.1, д.3, лл.48∼50об.
정보조사서 № 13
사본 №4
순양함 ‘자비야카’호 함장 해군중령 키제베테르(Кизеветтер)의 보고서 발췌문:평양(Ping Yang)註 096강 진입로
1895년 7월 30일 동틀 무렵 편상도(Pen Sang do) 섬으로 다가갔고, 비와 안개 때문에 순위도 갑(Shoniudok kak)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코스를 남쪽으로 바꾸었습니다. 곧 남동 10° 방향으로 바위로 된 곶이 나타났고 그것이 바로 코스에서 6마일 거리의 순위도 갑이었습니다. 7시에 통로로 들어가 순위도 갑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북쪽 방향 1 3/4 노트의 해류가 있었고 곶으로 다가가면서 해류는 증가했습니다. 갑을 돌아보면서 해안선과 1마일 거리를 유지했고 갑을 선회하여 통과하면서 세기도(Sekitau)註 097로부터 반마일 거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곳의 해안선은 정 동쪽으로 뻗어 있고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관목들과 풀로 덮여 있습니다. 퇴적물은 희고 붉은 빛을 띠고 있습니다. 순위도 갑으로부터 약 3마일 거리에서 해안선은 북동쪽으로 돌아가게 되어있고 낮은 경작지로 바뀝니다. 그 다음 세기도 근처에서 해안은 사질로 바뀝니다. 해안선을 따라 모래 구릉들이 보이고 안쪽으로는 숲도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이곳은 숲이 적은 편입니다. 대도(Daitau)와 모아킨(Moakin) 섬의 표면 낮은 곳은 풀로 덮여 있으며, 세기도는 크지 않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기도를 지나면서 고린지기(Gorinchiki) 곶으로부터 1마일 거리로 항로를 잡았습니다. 고린지기 곶은 멀리서 보면 낮아 보이지만 곶으로부터 높은 산맥이 솟아 오릅니다. 이 곶에서 남쪽 2마일 뒤편으로 해안선은 다시 바뀌어 선홍색의 절벽이 많아집니다. 곶의 정상에는 사당인지 오래된 요새인지 구분할 수 없는 건물이 서있고 그 근처에 나무들이 모여 있습니다. 곶 옆에는 암석으로 된 작은 섬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위치한 북쪽의 높은 곶에는 기둥 모양의 바위가 있습니다. 고린지기 곶으로부터 고각(Гоакак) 곶, 또는 초도(Choda) 동쪽 정상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갑자기 해안선이 매우 낮아지고 낮은 절벽으로 된 곶들이 섬처럼 보였습니다.
이 코스를 따라 홍바구(Honbagu) 곶으로부터 서남서 방향으로 높이가 596피트이며 정상에 나무 몇 개가 매우 두드러지는 산이 이어집니다. 산의 오른쪽 경사를 따라 북동 41까지는 미치지 않습니다. 이 산은 남동으로부터 이곳까지 도달하는 높은 산맥의 끝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는 왼쪽으로 개별적인 구릉들만 있습니다. 이 산을 향해 소사기(Soshaki) 곶까지 방향을 잡고 초도 까지는 나가지 않았으며, 이때 홍바구 곶 근처의 구릉에서 방향을 잡았습니다. 붉은 색의 낮은 바위 리도(Ritau)가 소사기 곶에서 튀어나올 때 항해 표시 쪽으로 15피트를 갔습니다. 홍바구 곶 옆의 바위는 멀리 있는 요기섬(Iokisem)의 동쪽 끝과 닿아있습니다. 폭우가 내렸고 흐린 날씨가 해안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항해표시가 보이지 않아 더 갈 수가 없어 11사젠 깊이의 갯벌에 닻을 내렸습니다.
비가 그쳤고 오후 1시 닻을 올리고 항해표시를 따라 선회하여 레이세기(Reiseiki) 곶의 거뭇거뭇한 색의 낮은 바위로 갔습니다. 이 곶의 서쪽과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바위들은 만조에도 불구하고 부서지는 파도에 깨끗하게 씻겨진 상태였습니다. 와기소(Iwakisho) 바위는 시련을 겪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이세기 만에 있는 바위를 선회할 때 남쪽으로부터 오고, 북쪽방향에서 오면서 리도 바위는 혹각(Hokkak) 만과 열을 짓게 됩니다. 물결이 세서 바위의 위치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홍바구 만에서 반마일을 가서 가장 서쪽에 있는 레이세기와 열을 세우고, 이 표식에 따라 호카케이와사키(Hokakeiwasaki) 만이 센간(Sengan) 섬에서 나올 때까지 항해를 했고, 대청(Dauchen) 섬 아래 놓여 있는 섬들 중 마지막 섬으로부터 반마일 거리에서 코스를 잡았습니다. 이 섬들을 지나면서 남서 80 방향(영국 수로도와 일치) 선미 뒤쪽으로 섬들의 북쪽 끝이 오도록 코스를 변경했습니다. 이때 검은색 정사각형 모양의 지리섬(Chirisem)이 바로 앞에 다가왔습니다.
대청도의 섬들을 둘러볼 때 밀물시 북북동쪽과 때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물결을 따라가야 합니다. 한쪽 방향을 따라 조종하기가 용이하지 않아 이 항로에 (가까이 다가온) 항해표시를 보았습니다. 사래군(Charegunu) 마을과 산의 오른쪽 비탈 끝이 지리섬 바위보다 약간 높아야 했습니다. 서쪽으로부터 강한 파도가 밀려 온 뒤 썰물이 중간정도 빠졌을 때 북측 면을 따라 놓여 있는 암초들에서 물보라가 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표섬(Piosem)에 붙어있는 곶이 남동 58로 다가왔을 때, 그리고 해음섬(Heemsem)의 동쪽에 놓여 있는 곶 뒤로 들어갔을 때 그 붙어있는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이 통로를 조사하기 위해 다음날 저는 주항법사를 증기보트에 태워 보냈습니다. 주항법사는 이동하면서 급히 측량을 했는데 모두 수심이 깊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육지의 해안가 밑에서나 표섬 부근에서나 약한 소용돌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표섬을 지나면서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일본상선의 깃발을 보았습니다. 오온다구(O-on- da-gu)註 098 계류장 근처 구릉 위에서 지역을 살펴보기 위해 수심과 해저 모래의 질이 좋은 곳을 골라 닻을 내렸습니다. 일본인들은 식료품 창고(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나무로 엮고 짚으로 지붕을 덮은 커다란 창고 25개 가량이 가파른 곶 뒤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뒤로 만으로 나가는 바위들이 수심이 얕아 보였습니다. 해안을 따라 5개의 부두가 있고 그중 하나에는 수심측정대가 물이 적은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부두는 대나무와 다듬지 않은 돌을 쌓아 만들어 졌습니다. 구릉에 풀이 나있는 곳들에는 일본 집들이 몇 채 있었고 거기에 후방 군인이 살고 있습니다. 1개 중대가 100명인 병영들과 군인들의 막사, 식당과 부엌으로 쓰는 간이 천막, 우물이 거기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평양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군대로 식료품을 보급하는 중심적인 창고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진남포와 평양으로 이어지는 전신선이 있었고 평양 선은 서울과 제물포로 이어집니다.
부두 근처 해안에는 대나무가 많았습니다. 가파른 해만 아래 갑판과 기관실을 덮은 증기보트가 서있었습니다. 산을 돌자 2베르스타 거리에 집이 40채인 한국인 마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가축과 파, 가지, 고추 등의 채소를 기르고 있습니다. 주변을 따라 온통 마을들이 보였지만 규모는 5~10호 정도였습니다. 주민들은 곡물재배와 간간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식수는 우물에서 구합니다. 여기에 있는 강들은 모두 관개용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숲은 매우 드물고 잘 자라지 않은 상태입니다. 해안가에는 작은 개울들이 눈에 띄는데 물이 차고 솟아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7월 31일 아침 6시 강을 따라 올라가기 위해 닻을 올렸습니다. 느린 속도로 가면서 오른쪽 연안의 곶에 의지하여 측연을 던졌습니다. 리츠포 갑(Ritspo kak)과 이치주 갑(Ichiju kak)에서 이 표식들이 강을 건너지른 케이블이 놓인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남포(Chinnanpo) 마을을 지나가면서 군의소 막사 몇 개를 보았고 그런 다음 강에 만들어 놓은 석조 부두가 나타났습니다. 돛단배, 어업용 선박들 그리고 화물선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부두 뒤로 깨끗한 하얀 돛으로 만든 쌀 포대가 있는 식량창고가 보였습니다. 부두에는 풀숲으로 이어지는 철로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거기 레일이 쌓여 있는 선대가 몇 개 보였습니다. 그곳으로 장교를 보내서 제가 알게 된 사실은 전쟁 시기 철도가 평양과 그 이후까지 연결되었었고, 이 길을 따라 활동 중이었던 군대에 식량공급이 이루어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레일들은 일본으로 가는 선박으로 수송하기 위해 분해하여 선적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곳에는 100명의 군인들이 거주하고 있고 평양에는 창고에 200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한 달 후에는 모두 철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강을 따라 더 올라가 오온다구 마을까지 가서 깊이 12사젠에 모래 바닥을 찾아 닻을 내렸습니다. 혹시 돌투성이 바닥 밖에 없을지 몰라 저는 삭공에서 내리는 닻을 준비했습니다. 닻을 내릴 때 삭공에 15사젠의 로프를 가지고 있다가 재빨리 30사젠까지 내렸지만 순양함은 몇 사젠 가량 밀려났습니다. 보트를 내려 이 지역 한국인들의 위생 상태를 알아보라고 의사를 해안으로 보냈습니다. 의사가 돌아와서는 이곳에 콜레라가 극성이라고 전했습니다. 시급히 닻을 올리고 출발하려고 했을 때 연결간이 망가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닻을 내릴 때 바위에 부딪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을 따라 왔던 길로 되돌아가 오온다구 정박지에 닻을 내렸습니다. 오온다구에서 진남포까지는 해만을 따라 전체적으로 진입로의 넓이가 10마일(16km)이고 점차 1마일까지 줄어듭니다. 정박장은 겨울철만 아니면 대형선박이건 소형선박이건 상관없이 편리합니다. 유빙과 결빙으로 12월부터 3월까지 운항은 중단됩니다. 오온다구 정박지에 도착하여 군용선박들 중에서 일본교역회사 깃발을 단 증기선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 강의 표면을 따라 일본 소형 외륜선이 위생병과 쿨리들을 싣고 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해안으로부터 보트들이 왕래하기 시작했고 해양증기선으로 보트들이 짐을 든 일본인 쿨리들을 싣고 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증기선은 바다로 나갔고 그를 대신하여 다른 배가 왔습니다. 그 배는 일본 돛단배들이 해안가 창고에서 실어오는 식료품들을 싣고 있었습니다. 오온다구 근처에 정박하여 증기보트에 주항법사를 태워 평양강 북쪽 진입로를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8월 3일 물이 부족하여 평양강을 떠나 제물포로 가야 했습니다.
전에 알아두었던 항해표시를 이용하여 강으로부터 북쪽 통로로 나왔습니다. 닻을 올리면서 웃초라도(Uttchuratau)와 아래초라도(Arechuratau) 오른쪽 끝의 항해표시를 잡아야 합니다. 이때 아래초라도의 끝쪽에 매우 눈에 띄는 날카로운 바위가 보입니다. 지리섬이 아네이모토시마(Aneimotojima)의 북쪽 끝과 갈라질 때까지 이 항해 표시로 나가고, 표섬을 선미 뒤쪽으로 잡고 해음섬이 북쪽 장도(Chaantau)로부터 나타나기 전까지 북서 39로 옮겨야 합니다. 이때 해음섬의 남쪽 끝을 장도 섬의 북쪽 끝 항해 표시로 돌리고 아네이모토시마의 북쪽 끝이 남서 86에 오면 진입로로 항해합니다. 지리섬을 지나올 때 측연을 해보니 얕은 수심으로 6사젠 이였습니다. 강에서 나가기 위해 아네이모토시마 쪽으로 다가가면서 서쪽으로 돌렸습니다. 초도를 동쪽으로 하면서 센간 섬이 호카케이와사키 곶으로 다가갈 때까지 이 항로를 유지했습니다. 이때 센간 섬과 키타시마(Kitajima) 사이 중간에 이 곶이 위치했습니다. 홍바구 곶의 남쪽 끝 바위가 이 곶의 남쪽 끝에서 열릴 때 키타시마 섬 동쪽 끝으로 항해표시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초도에 있는 진선(Chinson) 마을의 봉우리 끝에서 소사기 곶이 나타날 때 세이도(Seitau)에서 1마일 거리로 항로를 잡았습니다. 토버스(Tobuse) 암초에서부터 대청섬 서쪽으로 수심이 얕은 곳이 펼쳐지고 아마도 지도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남서쪽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아네이모토시마로부터 항해표시를 센간 섬과 호카케이와사키 곶으로 돌리면 이미 이 항해표시에서 대부분 거리가 2카벨토프, 깊이가 7.5사젠 입니다. 대청섬은 이때 안개가 짙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왔던 길들은 모두 측연이 8사젠 이었습니다. 초도 남쪽 끝으로부터 고린지기 곶으로 다가가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운항했습니다. 육도(Rioktau)로부터 2마일을 간 후 초도의 고각 곶이 나타날 때까지 육도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을 뒤쪽 항해표시로 돌렸습니다. 그때 세이도의 서쪽 끝과 육도의 동쪽 끝을 일치하도록 항해표시를 돌리고 그런 다음 596피트 높이의 산이 북동 46으로 올 때 와기소 바위쪽으로 다가가도록 항해표시를 조절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고각 곶으로부터 홍바구 곶 동쪽으로 높이 330피트의 원추형 구릉이 나타났습니다. 와기소 바위를 조사할 만큼 날씨가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아 저는 출구로 향하여 저녁 5시에 순위도 곶의 수직방향 남동 31로 갔습니다. 1.5마일 거리에서 남서 65로 돌렸습니다.
8월 4일 낮 2시 40분. 제물포에 닻을 내렸습니다.
註 09696) 대동강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됨-역자 주.註 09797) 창린도로 추정-역자 주.註 09898) 와우도로 추정-역자 주.
인용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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