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 60주년 관광을 마치며
1964년 3월초에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약학과에 입학을 한다.
조선반도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한민족을 말살시키던 일제 강점기 시절이다.
왜놈들이 세운 절간 터전이다. 이곳에 DB중고등학교를 창립한 것이다.
교정 안에 있는 동굴속에 해골들도 수없이 발견되기도 한다.
아마도 한민족을 살해하고 묻었던 곳이리다.
서울에 있는 중학교 입시에 1차 2차 모두 불합격이다.
한달여 후에 아버지에 이끌려 DB중학교에 들어선다.
입학시험은 커녕 무조건 합격이라고 한다.
지금은 중부시장 자리이다. 가마니를 깔고 서너평 되는 판잣집이다.
이곳에서 부모님 형제자매 모두 여섯식구의 보금자리(?)이다.
1951년 14후퇴 피난 나온지 5년인가 6년이 지난 때이다.
DB라는 학교는 최하급(最下級)으로 똥통같은 곳일 게다.
대한민국에서 최상위권인 S공대를 두번이나 낙방을 한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이 갈곳은 어디이더냐. 대학이고 뭐고 삶 자체를 포기할 뿐이다.
앞이 안보일 정도로 눈보라가 엄청 퍼붓고 있다. 발길은 한강이다.
" 어서 들어오너라 " 파아란 물결이 손짓이라도 하는 모습이다.
한강 난간으로 오른다.
" 정나마 ~ 야 ~ 네레 어드메 있는건가. 배가 고프겠구나 야 ~ " 애절한 오마니의 한마디이다.
정신이 버쩍든다. 돌아설 밖에 어쩔 수 없다.
" 정남아 ~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이 서울 공대보다 훨씬 좋은 곳이야," 몇번씩 누님의 부탁이다.
성대약대 입학시험 때이다. 경쟁률이 15대 1이나 된다.
" 이게 뭐야, 여기도 또 낙방이란 말인가 "
합격자 발표날이다. 평생 처음 오마니가 함께 하신다.
이름을 확인하노라 수 많은 사람들이 엉켜 있다. 비집고 들어간다.
" 四三三 崔正南 " 합격이다.
" 오 마 니 ~ 내레 붙었수다래 ~ " 그렇게 환한 내 오마니의 모습 처음이다.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듯 입학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고교동문도 없고 오롯이 이 잘난 녀석뿐이 아닐까.
약학이란 무엇이며 공부에는 관심도 없고 강건너 주마등이리다.
6.3 데모에 휩쓸려 서대문 큰 집에도 며칠 관람(?)도 한다.
입학 1964년부터 약사국가고사 치르기 전까지는 공부란 단어가 싫고 잊고 있다.
루비콘강의 뗏목 위에 주저앉은 처량함이 아닐까.
내 오마니의 환한 모습이 가슴을 흔들곤 한다, 이곳에서 포기는 없다.
루비콘강을 헤엄쳐 되돌아온다.
약사고시 공부를 두어달만에 합격의 영광(?)을 가슴에 품는 순간이다.
입학 회갑일이 지난 오늘도 병원 약제실 근무약사로 출근하고 있는 무무의 일상이다.
무무는 누구를 뜻하며 어느 누구 인간을 말하는가.
무무라는 단어가 가슴에 박히는 세월이 있다. 1990년대 후반일게다.
DB고교동기생의 등산대장을 자처하며 나선다. 그때 등산회의 참석인원은 20여명 전후이리라.
20여년 이상 한반도 유명산은 물론이고 제주도부터 38선 이남까지 산세는 거의 훑는다.
등산회원들은 오롯이 제대로된 등산로가 선택 기준이다.
등산대장이라는 명물아닌 맹물같은 녀석은 어떨까.
길도 없고 길이 아닌 곳을 홀로 헤매는 것이 습관화 되기도 한다.
언제이던가 어느 험준한 산을 오르내릴 때이다.
" 등산로 없음 " 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 미친 놈들아 ~ 등산로 없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
" 없으면 돌아가던가 비켜가면 등산로가 되는 것이 아니냐 ~ ~ ~ " 거친 숨소리만이 산골짜기를 흔들고 있다.
지쳐버린 몸둥아리를 하늘같이 치솟은 바위 위에 걸터 앉는다.
" 不路有 無路無 "라는 글귀가 머리속을 환히 비춰주고 있다.
한 마디로 " 아닌 길은 있어도 없는 길은 없다 "가 아닌가.
수년간 길을 잃고 헤매고 나뒹글며 터득한 산행의 정답이리라.
순간적으로 무로무(無路無)에서 무무(無無)가 아호(雅號)로 탄생하는 명작명(名作名)이기도 하다.
순간의 선택이 숙명적인 운명을 바꾸는 찰나이기도 하는 선물이 분명하다.
입학한 세월이 60년 하고도 2개월 그리고 20여일이 흐른 오늘이다.
2024년 5월21일(화)부터 23일까지 남해안을 순회 관광하는 날이다.
엄밀히 따지면 60주년인 이순(耳順) 육순(六旬)이기도 하다.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환갑(還甲), 회갑(回甲)이라고 함이 좋을게다.
입학 60주년이든 입학 회갑, 환갑이든 편한대로 부르리라.
만물(萬物)의 우두머리인 인간들의 나이를 들여다 본다.
60세를 듣는대로 이해한다는 이순(耳順), 육순(六旬)이라고도 한다.
61세는 만60세로 환갑(還甲), 회갑(回甲) 즉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되돌아왔음을 의미한다.
70세 고희(古稀)는 예로부터 드물다는 뜻이다. 사람의 나이 일흔 살 또는 일흔 살이 되는 때를 뜻한다.
당나라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요즘은 별 의미가 없으리다.
77세를 희수(喜壽), 80세는 팔순(八旬) ,산수(傘壽)라고도 부른다.
산수라는 표현은 일본 쪽발이들이 만든 단어이다. 팔순(八旬)이라는 한국식 단어를 사용함이 타당하다 할게다.
88세는 미수(米壽)로 여든여덟 살을 이르는 말,
99세는 백수(白壽)로 일백 백(百)에서 하나(一)을 뺀 백수(白壽)이다.
100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99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100세 이상은 상수(上壽)로 인간 수명중에 상급(上級),
120세를 천수(天壽)로 하늘에 오르는 타고난 수명(壽命)이다.
몇년을 살든 인류가 살고얐는 지구의 둘레는 과연 얼마일까.
정확한 수치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40,075 Km 정도이라네요.
지구가 태양을 1회 공전하는 시간은 365.25일이라 한다. 대략 1년 정도이다.
공전하는 속도 시속은 107,000Km이라고 한다. 1회 공전하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107,000 Km /시간 X 24시간 /일 X 365.25일 /년 = 937,962,000 Km 이다.
80년을 살아온 팔순(八旬)인 나이 우리들은 지구와 함께 움직인 거리는 몇 Km인가.
937,962,000Km / 년 X 80년 = 75,036,960,000Km가 아닌가. 750억Km가 넘는 거리이다.
사람마다 하루에 걷는 걸음수도 다를 게다.
나 자신을 생각해 보자. 하루에 25,000보를 걷는다고 가정을 한다.
보통 1Km를 걷는 걸음수는 우리 연세에는 1,450보 정도로 잡아본다.
하루에 걷는 거리는 25,000보 ÷ 1,450보/Km =약 17.24Km이다.
1년에는 17.24Km/일 ×365일/년 = 6292.6Km를 걷고
6292.6Km × 80년=503,408Km를 80년 동안에 걸은 거리이다.
지구가 1년에 태양을 1회 공전하는 거리는 75,036,960,000 Km이다.
무무는 1년에 6292.6Km를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 둘레 40,075Km를 자신이 걷는다면 40,075 ÷ 6292.6/년 = 약 6.368년이다.
지구가 1년에 1회 태양을 공전한 거리를 내 자신이 걸으면 몇년이 걸릴까.
75,036,960,000 Km ÷ 6292.6 Km/년 = 11,924,635년이 걸리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접고 하루종일 걷기로 도전한다면 위의 수치는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계산도 복잡하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바보 아니면 멍청둥이가 아니랴.
환갑날 아침 일찍 환갑을 맞는 사람은 사당에 들어가 조상의 신위에 환갑을 맞은 것을 고한다.
환갑상은 성대하게 차리며 하객들이 볼 수 있는 앞쪽에 여러 음식을 올리곤 한다.
상 앞에 환갑 맞는 사람이 앉는다. 맏아들, 둘째 아들, 맏딸, 둘째 딸의 순으로 부부가 나란히 선다.
잔을 올리고 남자는 재배(再拜)를 여자는 4배하여 헌수(獻壽)를 한다.
헌수(獻壽)란 환갑잔치에서 오래 살기를 비는 뜻으로 주인공에게 술잔을 드림을 뜻한다.
오늘날은 다같이 재배하거나 1배만 한다. 그 다음은 차례로 잔을 올린다.
어머니의 환갑이라도 아버지에게 먼저 잔을 올린다.
부모 중에 한 분만 살아 있다면 1잔만 올린다.
악공(樂工)과 기생을 불러 풍악을 하고 권주가(勸酒歌)를 부르는 등 매우 성대하게 치른다
환갑잔치는 예전에 우리들 부모님 시절 이전까지는 거창하게 치루어졌을 게다.
가족뿐 아니라 일가친척 동네 사람들도 모두 참석을 했으리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차츰 환갑 칠순 팔순의 의미가 없는 모양이다.
우리들의 세대부터는 회갑도 칠순도 팔순도 별로 관심이 없지 않은가.
가족끼리만 모여서 간단히 회식하면 전부일 따름이다.
자녀들로부터 두툼한 축하금을 받지만 그것도 전부 아내의 몫이리다.
1988년도에 성균관대학교 졸업 20주년 축하모임을 갖는다.
장소는 서울 강남구 라마다르네쌍스호텔에서 개최를 한다.
부부동반으로 10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동기들도 몇명 참석이다.
좌석이 꽉 차고 빈자리도 없다. 그 당시 회장은 무무이며 총무는 박병구이다.
이날 사회자는 유명한 코메디안이다. 계속 자신의 얘기만 주절이는 코메디안을 끌어내린다.
동기중에 한명을 다시 사회자로 진행이다.
내 아내도 모처럼 처음 부부동반에 함께 한 것이다.
회장으로 동기들을 일일이 찾아가며 술잔을 주고 받는다. 잠시 후에 아내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거나해진 남편 모습이 보기도 싫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동기들과 졸업후에 부부동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총무이던 병구는 지금 어드메에 어떤 모습인가.
2년 6개월전부터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을 오가며 넋을 놓고 있다.
요즘은 경기도 하남인가 하는 요양병원에서 눈만 뜨고 있다고 한다.
답답하고 안타까움으로 방법이 없다
하루 빨리 동기들 곁으로 회귀하기를 기원할 뿐이다.
한동안 지지부진한 동기회이다.
홍구 병구 길군 정남 네명의 합의로 2018년부터 매월 세번째 토요일 정기월례회가 새 출발이다.
성대약대 입학60주년 기념회비를 매월 갹출을 한다.
동기들의 정성으로 2024년 5월 21일(화)부터 23일(목)까지 입학60주년기념 남해안 관광이다.
기껏해야 전부 10여명 정도 되리라 생각을 한다. KOMERICAN 3명의 동기들이 합류를 하겠단다.
그것도 태평양 너울를 헤엄이라도 쳐서라도 참석한단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여객기 비용만으로도 얼마이던가.
뉴욕(LA)에서 대충 짐작으로 왕복 300 몇십만원일테고 시간도 30여시간은 소요되리다.
한정숙 이종환 이주혁이 바로 주인공이다. 너무 반갑고 신기하고 고마울뿐이다.
또 오랫만이고 그립고 보고픈 두명의 여성동기들이 있다.
국내에 있으나 여러가지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어 몇년간 뜸하던 여성들이다.
그녀들 이름은 김계주 김양자 두명이다. 함께 한단다.
수년전부터 남편이 건강악화로 시름에 젖은 생활이다. 최근에 부군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신 것이다.
얼마나 애처럽고 슬픈 이별인가. 양자님의 남편으로 서울의대 출신 의사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온 몸을 다 주어도 아까울 게 없는 존재가 무엇이던가.
한마디로 자신이 낳고 기른 아들 딸 자녀이리라.
맏딸내미가 몇달전에 하늘로 솟은 것이다. 바로 계주 동기생의 맏딸이다.
일본에서 대학원도 마친 딸이다. 항상 밝고 적극적인 자녀이다.
방법은 무엇인가. 그저 받아들임이 아닌가.
종환이는 그의 평생 삶의 동반자이며 첫 사랑 첫 여인인 하나뿐인 아내이다.
2024년 3월 20일 붙잡지도 막지도 못하고 영원한 석별의 종을 맞은 것이다.
그의 아내는 경기여고를 졸업한 수재이고 성대약대 12회 동기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은 똑똑하고 어여쁜 김공자이다.
우리들의 동기들의 곁을 떠난 동기생들도 있다.
그들의 이름을 거론해 보면 어떨까. 최근에 홀연히 떠난 오승홍이다.
이번 입학60주년 기념 관광에도 합류한다며 회비도 보낸 동기이다.
그의 아내에게 회비를 반환하려 했으나 돌아온 답은 " NO THANK YOU "이다.
정낙소, 이효령, 유경한, 신충웅, 계충의, 나의 재학시절 실습 파트너인 김영한이다.
그 이외에도 몇명이 더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위에 거명한 동기 여러분께 무어라 드릴 말씀도 없다.
그저 머나먼 그곳에서나마 건강하고 편안한 영원한 새 삶이기를 기원드린다.
서울 수서역에서 5월21일 오전 9시 열차인 SRT 특실을 예약이다.
출발하는 좌석의 숫자는 14명이다.
동기들에게는 오전 8시 29분까지 수서역 매표소 대합실에서 만나기로 한다.
총무인 무무도 그전에 도착이다. " 아직 아무도 없지 않을까 "혼자만의 생각이다.
동기들 모두가 벌써 대합실과 열차 타는 곳에도 있다.
그중에 한 여성이 낮에 익기도 하지만 누구이던가.
" 혹시 ~ 동기생 한 ~정 ~ ~ ~ " " 그래 내가 한정숙이야 ~ " 말이 끝나기도전에 대답이다.
" 아니 ~ 어찌 체중이 많이 줄었구나, 당뇨병이라도 문제가 있는가 "`
반갑기도 보고픈 한정숙이다. 역시 그런 문제가 있단다.
그녀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자. 약간 통통하면서도 활달한 여학생 숫처녀이다.
성균관대학교 신문 발간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경기여고 출신이 아니던가.
60여년이 흐른 오늘은 어떤가. 어깨도 약간 꺼부정하고 걸음걸이도 시원치 않다.
여타 동기들도 마찬가지의 세월이 아닌가.
파아랗던 은행닢이 누렇게 낙엽으로 떨어진다.
오가는 행인들의 발밑에 짓이겨지기도 한다.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이다.
저 머나 먼 하늘 위를 스쳐지나고 있는 구름이기도 하다.
인간백세여몽중(人間百歲如夢中)이란 한 마디가 실감이 난다.
누가 누구를 탓하리까.
출발 20여분 전에 일일히 거명을 하며 특실에 배치를 한다.
오전 9시에 부산역으로 출발이다. 2시간 10분 후 11시 10분에 도착이다.
부산역에는 전세로 2박3일 대절한 28인승 우등 고속버스가 대기중이다.
부산역 구내에 부산의 여행 가이드인 강주수 이명언이도 기다린다.
삼천포에는 시의원도 몇번 의장 감사도 거치고 고문으로 거물급 인사인 김태웅 동기이다.
지금도 그곳에서 삼일 온누리약국을 개설코 있는 현직 약사이다.
진도에는 그 곳의 매력에 푹 젖어있는 동백섬의 주인이자 관리인인 박 영동기이다.
진도에서 펜션업소 10여개 이상 경영하던 것을 모두 타인에게 대여를 한다.
이곳중에 하나를 동기들 숙박장소로 추천한 박 영이다.
1964년 3월 입학동기이나 1학년 2학기에 군복무가 우선이다.
같은 실험 PLATE에 함께 하던 녀석이 그의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이란다.
졸업은 1972년도라고 한다. 아내는 그곳에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약사라고 한다.
남해안 관광여행에 관여한 동기들 인원은 18명이다. 십여명도 아니될줄 알았는데 예상외이다.
참석 인원을 거명해도 좋지 않은가. 한정숙, 이종환, 이주혁, 김계주, 김양자, 강주수, 이명언, 김태웅,
박 영, 김병선, 김두원, 이성연, 임재명, 조홍구, 차기봉, 차낙규, 최정남등이다.
"아 ~ 차 아 암 ~ " 규상이도 이번 관광에 합류하겠딘다.
임규상은 수년간 동기회 두문불출이다. 자신과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 때문이라고 한다.
이 나이 요즘 세월에 너와 나는 어찌 되었든 동기동창이다.
끊을래야 끊을 수도 잊을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불가항력의 관계이다.
누가 누구를 탓하며 무슨 이유 변명이 자존심이 필요한가.
만나면 마시고 웃고 떠들고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아니랴.
부산역에 11시10분 정시에 도착이다. 잊은 물건없이 다시 확인을 한다.
주수 명언이가 환한 모습으로 동기들을 끌어안고 반기고 있다.
부산갈매기 주수 명언이 두마리가 동기들이 도착하자 마자 점심식사를 하잔다.
" 점심은 오후 1시경이 지나야 하면 좋을거다 " 한 마디로 거절이다.
그것만 빼고는 부산가이드 니들 뜻대로 해라고 일임이다.
우선 영도다리로 향한다. 평생 영도다리는 잊을 수가 없다.
마음의 상처이자 이북고향이 생각나곤 하는 곳이다.
" 금순아 ~ 어데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 영도다리 난간 위에 ~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 ~ " 1951년 1월4일 1.4후퇴로 이북 고향을 등진다.
3일후면 1주일후에는 아니면 한달후에는 반드시 고향땅으로 돌아간다는 풍문뿐이다.
아무 것도 없이 맨손으로 고향에 계신 할머님을 홀로 두고 떠난 것이다.
지금 세월이 73년이 흐른 요즘이다. 가슴에 맺힌 절절한 사연도 실감이 나지도 않고 지워지고 있는 오늘이다.
50살이 되는 자녀들도 손주들은 더 더욱 이북 고향은 관심밖이다.
"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무엇을 먹고 살건가, 고향땅을 찾기나 할건가 "
해마다 명절이면 대성통곡을 하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오마니 아버지 부모님도 저 멀고 머언 하늘로 떠나신지도 50년이 훌쩍 넘은 것이다.
답답한 마음은 접을 밖에 방법이 없다.
영도다리 근처의 롯데몰 옥상으로 오른다.
국제여객터미널과 영도다리 부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걸어서 남포동을 스치고 자갈치시장에 있는 횟집으로 들어선다.
푸짐한 회와 온갖 부식 반찬들이 식탁에 가득이다.
주고받는 오가는 술잔속에는 동기회 사랑의 이슬이 맺힌다.
회식비 550,000정도로 주수와 명언이가 분담이다.
송도케이블카, 용궁구름다리, 태종대 등등을 거친다.
해운대 숙소인 송도탕(송도각) 도착이다. 짐을 풀고 저녁은 유명한 해운대 우육(牛肉)불고기집이다.
저녁을 마치고 해운대 백사장으로 직행이다.
밤 하늘에 깜빡이는 별들과 바다의 야경(夜景)이 새롭기도 하다.
하얀 물거품을 품고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바다 물결이다.
바다 저 멀리에는 많은 선박들의 불빛이 아롱아롱 거리고 있다.
근처에는 103층이나 되는 아파트가 시선을 끈다.
바닷물에 밀려서 주차장이 물바다가 되기도 했단다.
서울에도 기껏 높아야 45층 정도이다.
103층에 인간들이 주거지로 살고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어찔 어찔하다.
인구는 세계에서 출산율이 0.76인가 가장 낮은 대한민국이다.
3~40년 후에는 주거지의 20% 이상은 빈집으로 전락하리라 믿는다.
그래도 자꾸 아파트도 상가도 신축하는 방망이 소리가 귀찮을 정도이다.
2~30대 젊은이들이 결혼은 뒷전이다.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에 빠져 헤매고 있다.
이 모습이 진정 청소년들의 미래이며 대한민국 국가의 주인공이련가.
앞날이 걱정뿐으로 노객의 마음을 추수릴 수도 없다.
개새끼들을 비좁은 아파트에서 한 마리뿐이 아니고 두세마리 큰 놈들도 기르고 있다.
밤이면 개짖는 소리에 화들짝 놀래기도 한다. 똥 싸고 오줌싸는 똥개들을 품에 안고 기른다.
아침마다 한강가로 들어선다. 여기 저기에 개들을 끌고 안고 다니고 있다.
노인네들도 가끔 보인다. 거개가 젊은 청소년 소녀 젊은이들이다.
학교도 출근도 아니하고 결혼은 더욱 요원한 모습이다.
이런 인간들도 똥개에 불과하리다. 개인 주택 마당이 있으면 얼마든지 찬성이다.
언제이던가. " 정나마 야~ 네래 정말로 갈꺼가 " 오마니 한마디이다.
미국 이민의 계획을 접을 밖에. 제약업계 근무도 접는다.
주택도 동생에게 물려준 상황이다.
중구 필동에 전세로 살며 청계천4가에 약국개업을 하고 있을 때이다.
거리상으로도 3Km 정도는 되리라.
자녀들이 3살 다섯살때로 생각되고 있다.
어느 날 4~5Kg쯤 되는 개를 안고 아들 딸이 약국으로 들어선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다.
" 아니 ~ 얘들이 도대체 ~~~ " 아내가 화들짝 놀랜다.
" 엄 마 ! 멍진이도 우리 가족이야 ~ " 할 말이 없다.
개인주택 2층 양옥집에 살때가 생각난다. 자녀들이 초등학교 초년생 때일 게다.
" 멍진이 또진이 " 암놈 숫놈의 이름이다. 이 녀석들이 새끼를 네마리를 낳는다.
초등생 아들 딸이 강아지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우선 녀석들에게 거침없이 던져주기도 한다.
일기장에 그런 내용을 아들이 쓴 것이다.
" 어머님 ~ 강아지 한 마리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담임선생님의 부탁이다.
시골에 시어머님 홀로 사시느라 외로워서 보내주려고 한다고,
흔쾌히 보내준 아내이다. " 엄 ~ 마 ~ ~ ~ 강아지 한 마리 어디 갔어 , 응 "라는 아들녀석이다.
아내는 사실대로 얘기할 밖에 어쩌나.
" 강아지 돌려주세요 " 다음 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에게 거듭 울며 재촉하는 아들이다.
" 얘야 ~ 지니야 ~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니께서 ~ ~ ~ ' " 안돼요, 꼭 돌려주세요 "
담임선생님 말씀에도 거절코 마이동풍이다. 선생님도 두손 두발 들수 밖에 없다.
" 여보 ! 야는 하고픈거는 꼭 해야되는 아이니까네 ~ 어떻게든 해줍시다래 "
수업료가 없으니 휴학하라는 아버지 말씀에 오마니가 하신 말씀이다.
1964년도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이다. 나딩굴며 울며 보채기를 몇번이던가.
그 아들의 아들도 지애비를 꼭 닮은 꼴이 아닌가..
피는 속일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유전자이려나.
이 순간이 없었으면 내 삶은 어떤 모습일런지 생각키도 싫다.
추억이 추억을 낳고 새록새록 새롭기도 하다.
어제도 오늘도 침대 위에 모셔둔 영정 사진을 바라볼 때 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살아 생존에 부모님께 비행기는 커녕 용돈 한푼 쥐여드리지 못한 불효식일 뿐이다.
5월 22일 아침을 미포복국할매집에서 식사를 한다.
아침 8시 30분경에 삼천포 김태웅 동기에게 버스로 이동이다. 삼천포 경찰차가 앞에서 안내를 한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에 유람선을 1시간 반 정도 승선한다.
태웅이는 건강이 좋지않아 어지럽기도 하여 승선은 불가하단다. 체중도 많이 빠진 것이다.
일렁이는 다도해 파도에 유람선 승선은 얼마만인가. 난생 처음이렸다.
태웅이 자택도 경유하여 단체사진도 몇컷 찍는다. 아내도 친절하게 맞이 한다.
점심식대가 88만으로 푸짐한 점심뿐 아니라 일일이 동기들에게 선물을 한 팩씩이다.
팩속에는 일상에 필요한 의약품과 " 삼천포 예찬 "이라는 수필 한편도 있다.
고맙고 반가울 뿐이다. 오후 네시 조금 넘어 다시 버스에 오른다.
진도에 박 영 동기가 저녁은 진도가 아닌 목포 북항에서 베푼단다.
아마도 수시로 들리는 단골식당인 모양이다.
17명의 식탁이 신선한 회를 비롯하여 갖가지 곁들인 반찬이 넘쳐난다.
식대는 660,000원으로 특별히 김병선이 전액 희사를 한다.
밤 11시경에 진도 숙박지인 진도펜션골드마운틴하우스로 올라선다.
1층 2층으로 각자 취향대로 침실을 잡는다.
앞에는 바닷가 물결이 밤새껏 쉬지 않고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다.
아마도 처음 접하는 동기들을 환영하고 있는 사랑의 찬가이리라.
진도에는 생애 첫 방문이고 숙박이다.
진도군(珍島郡)은 전라남도 서남부 진도와 부속 섬을 관할하는 군(群)이다.
진도는 대한민국에서 세번째로 큰 섬이다. 45개 유인도를 포함하여 256개 섬으로 되어있다.
팽목항에는 세월호 참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곳이다,
202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부터 10년이 흘렀다.
2014년 4월15일 오후 9시 세월호가 인천에서 제주도를 향해 출발이다.
탑승자는 제주도 수학여행을 가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
교사 14명 인솔자 1명이며 일반탑승객 74명이다.
화물기사 33명 승무원 29명등 모두 476명이다.
4월 16일 오전 8시49분 전남 진도군 앞바다 조류가 거센 맹골수도에서 급격하게 침몰이다.
" 가만히 기다려라 "는 선장님(?)의 개짖는 소리에 그저 배와 함께 침몰이다.
" 엄마 ~ 아빠 ~ 죄송해요 ~ ~ 어~ 어 ~ 엄 ~ 마 아 ~ ~ ~ " 한마디 인사도 없다.
그대로 컴컴한 바다속이 학생들에게 마지막 행선지이다.
승객들을 버리고 이● # 이라는 선장등 선원 15명이다.
먼저 뛰쳐나온 선장인지 개장인지 된장인지 하는 인간도 아닌 무슨 동물이더냐.
사람도 아닌 어쩌면 개새끼보다도 못한 똥개녀석이 아닌가.
젖은 지폐를 말리노라 정신이 없다. 학생들은 뒷전으로 몇푼 돈이 우선이다.
희생자는 295명, 실종자는 9명이다.
세월호는 199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건조돼 18년 이상 운항한 것이다.
이것을 2012년에 일본에서 수입된 중고품 선박이다.
제대로 선체복원을 부실하게 한 것도 큰 원인이기도 하리다.
세월호 선체 인양작업은 2017년 4월11일 참사 1,089일만에 목포신항 부두로 올라온다.
세월인지 네월인가 10년이 훌쩍 흐른 오늘이디. 위대하신 대통령도 세분이나 스쳐지나고 있다.
그 누구도 참사 발생원인도 책임소재 진상도 제재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게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인가. 나만을 위한 나라이던가.
답답한 마음을 추스리며 사고 현장인 팽목항을 향하려 한다.
하얀 장미꽃 한송이라도 명복을 빌고 싶었으나 시간관계로 포기할 밖에 방법이 없다.
다음날 5월23일 마지막 날 아침이다.
박 영동기가 안내하는 식당으로 아침 허전한 뱃속을 채운다. 식사비는 박 영동기 몫이란다.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으로 들어선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찰산(485m)을 지붕으로 사방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곳이다.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었다고 붙여진 것이다.
첨찰산은 바위산으로 백제시대로 추정대는 산성(山城)이 있다. 조선시대 설치한 봉수대 유적도 있다.
산 밑에 운림산방이 있다. 1981년 명승 제 80호로 지정된다.
조선후기 서화 예술가 소치 허련(小痴許鍊)이 말년에 고향으로 귀향이다.
이곳에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이다.
화실 안에는 허 씨 집안 3대의 그림이 복제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새로 지어진 소치기념관에는 운림산방 3대의 작품과 수석 도자기등이 전시되어 있다.
" ㄷ "자 기와집인 운림산방 본채와 초가로 된 사랑채도 있다.
신축된 유물보존각등 건물과 연못이 있다.
오각으로 만들어진 연못에는 흰 수련꽃이 피어 있다.
가운데는 직경 6m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에는 배롱나무도 있는 곳이다.
운림산방은 분위기 전체가 조선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차분한 느낌도 든다.
진도대교를 건너서 대교 밑으로 내려선다. 명량대첩지인 울돌목이다.
명량해전(鳴梁海戰)은 어떤 곳인가.
조선 선조 30년(1597)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水軍)이 명량에서 적을 쳐부순 싸움이다.
10여척의 전선(戰船)으로 왜놈들 함대 133척을 맞아 싸운다.
이놈들의 배 31척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둔다.
울돌목 바닷물 기슭에 이순신장군이 보인다. 군복도 철모도 아닌 일반인들이 입는 복장으로 서있다.
손에는 무슨 책을 갖고 있는 모습인데 무엇일까. 무척 궁금하지 않으신가.
아마도 부산 갈매기는 당구책일 터이다.
JLPT N1 한권으로 왜놈들의 언어를 끝내는 학습지가 아닐까.
상대를 알아야 무엇이든 이길 수 있으니까. 이순신의 머릿 속은 복잡키도 했으리라.
또 다시 침범할 때는 무조건 단칼에 일본열도를 휩쓸어 버릴 다짐일지도 모른다.
바닷물이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파도가 왜놈들과 싸우다 스러져간 군졸들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순신장군의 가슴 속엔 피눈물이 넘치고 있다.
" 나라를 지키려다 순국(殉國)한 군졸들이여 !
너희들의 희생을 지켜주지도 못한 이몸을 절대 용서치 마라 "
먼저 간 병졸들의 명복을 빌고있는 애처로운 애조사(哀弔辭)이리라.
울돌목 주차장에 있는 버스에 올라 목포 북항으로 향한다.
북항에서 무조건 케이블카에 올라 고하도로 향한다.
고하도 전망대는 이충무공이 명량대첩에서 승리 후 전열을 가다듬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하도에 13척의 판옥선 모형을 격자형으로 쌓아 올린 전망대다.
고하도에 아름다운 해상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다.
1층은 휴게공간, 2~5층은 전망대 및 목포 관광을 소개하는 전시공간이다.
1597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7일까지 주둔한 고하도이다.
"서북풍을 막음 직하고 전선을 감추기에 아주 적합하다.
섬 안을 둘러보니 지형이 대단히 좋으므로 머물 것을 작정했다"고 난중일기에 고하도를 기록하고 있다.
107일간을 고하도에 머물며 53척의 배를 건조하고 수군을 2천 명으로 늘린다.
수군재건의 토대를 마련하여 왜란을 끝내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용이 하늘로 오르기 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용오름’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하도 용오름길은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이순신장군이 걸어온 역사현장을 간단히 정리를 해본다.
1545년 4월 28일 새벽에 서울 마르내골(건청동: 안형동)에서 태어난다.
10세 전후에 아산 백암리 외가로 이사한다. 22세에 본격적으로 무예를 시작이다.
23세에 장남을 낳고 27세에 차남, 33세에 3남을 가슴에 품는다.
그 이후로 47세까지는 우여곡절의 길을 걷는다.
48세인 1592년 4월12일 거북선을 완성이다. 그 다음날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5월부터 옥포. 합포해전, 사천해전에 거북선 첫 출전,
6월에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이때 어깨에 총탄을 맞는다.
7월에 한산도해전, 견내량해전, 안골포해전, 9월 부산포해전으로 적선 130여척 격파를 한다.
1593년 49세에 2월 옹포해전, 7월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다.
1594년 50세 3월 당항포해전, 9월 장문포해전, 10월 영등포해전과 장문포해전
1597년 3월 서울로 잡혀가 감옥에, 4월 감옥에서 나온다.
9월 명량해전 1598년 54세 2월 수군진영을 고금도로 옮긴다.
3월 고금도에 침입한 왜선을 격멸한다. 12월 16일 새벽 노량. 관음포해전에서 전사한다.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명량대첩(鳴梁大捷),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海戰)인
노량대첩(露梁大捷)이 바로 이순신이 거둔 3대 대첩인 것이다.
"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即生 必生即死) " 명량해전 시작전에 군졸들에게 부르짖으신 경고가 아닌가.
" 내가 죽은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 " 사망은 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서 끝까지 눈을 부라리며 부르짖은 말씀이다.
오늘도 서울 광화문 세종로 한복판에 눈을 부릅뜨고 남쪽을 응시하고 계신다.
남해안에서 또 다시 왜군녀석들이 침범하면 어떨까.
단칼에 일본열도를 쓸어버릴 것이라는 다짐에 다짐이 아닐까.
그 당시 사용턴 장검을 들고 철모 철갑의 군복을 영원히 함께 하시고 계신다.
목포 시내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 고하도는 유달산(높은 산) 아래 있는
섬이라 하여 고하도(高下島)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羅州牧)에 속했는데 비문에는 고화도(高和島), 난중일기에는 보화도(寶花島)라고 표기했다, 그밖에 고하도(高霞島), 칼섬이라고도 불리는데 목포사람들은 친근하게 용섬이라 부른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2019년도 개통이다.
북항에서 승차하여 유달산스테이션을 경유하여 고하도스테이션에 도착한다
거리는 약 3.23Km이며 왕복운행시간은 약 40여분이 걸린다.
객실 정원은 10명으로 일반캐빈 왕복 어른은 24,000원 크리스탈 캐빈은 왕복 29,000원이다.
크리스탈캐빈으로 할 것을 서두르노라 일반캐빈이다.
크리스탈캐빈에 오르면 발밑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유리발판이다.
고하도로 향할 때 허공에 뜬 느낌이다.
발아래 일렁이는 파도속으로 빨려드는 쩌릿 쩌릿한 기분은 당해본 당사자만 알리라.
고하도에 내리자 곧 북항으로 향하는 케이블카에 오른다.
오후 1시에 목포의 민어맛집거리의 식당을 예약한 것이다.
용오름길 왕복 산책은 커녕 20여분이면 오를 전망대도 생략할 밖에.
목포의 가이드는 차기봉이다. 이곳을 떠나온지도 몇십이 지난 오늘이다.
맛집은 커녕 졸업한 목포고등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 밖이 아닐까.
일가친척에게 묻고 물어서 예약한 민어거리의 맛집 식당이다.
어제까지 부산 삼천포 목포에서 연달아 횟집 회식이다.
생선회를 비롯하여 반찬들도 여러가지로 식탁을 가득이다.
오늘 또 목포에서 회를 접하니 질릴 수도 있으리라.
식당은 별로 넓지도 않다. 16명 동기들이 밀착해 앉는다.
민어회를 비롯하여 튀김 조림 기타 여러가지 곁들이는 것들로 여전히 그득하다.
민어는 여타 생선회와는 느낌이 다른 것인가 보다.
실컷 마시고 들이키고 내키며 먹고 일어선다.
서정식이가 지방 명문인 목포고 1년 후배이기도 하다.
두 동기들은 전교 1등으로 졸업한 수재들이란다.
DB고등학교 성적표와 비교하면 좋을텐데 마음만이 앞선다.
버스에 올라 유달산(228.3m)의 노적봉으로 향한다.
유달산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대반동·온금동·북교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그리 높지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층층기암과 절벽이 많아 호남의 개골(皆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유달산은 예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한다.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儒達亭) 건립을 논의를 한다.
그 때부터 산 이름도 작금의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
노령 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 끝에 자리한 산이다.
유달산 전체가 화강암이며 경사가 급하지만 일주도로를 따라 일부 완만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유달산의 대표 수종은 소나무(곰솔)이고 왕자귀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이 있다.
식생 구성으로 볼 때 인공 조림 수종을 제외하면 토양 조건은 척박한 편이다.
언제이던가 처음 유달산을 첫 접하는 때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유달산은 강원도 설악에 있는 울산바위를 축소해서 옮긴 모습이다.
그때부터 목포가 그립고 정이 들기 시작이다.
1970년대 중반에 미국 Upjohn제약사 근무할 때이다.
난생 처음 전라남도 광주에 영업소장으로 발령이다. 낮설고 물설은 전라도이다.
" 했당께, 했지라우 그렁게 말이요 잉 ~ " 듣기도 쳐다 보기도 싫은 전라도 토박이 사투리이다.
영업소장으로 광주 목포 여수 순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담당지역이다.
가끔 거래선을 영업담당 직원과 함께 하기도 한다.
목포이건 여수이던지 유달산 무등산 모두가 마음 밖이었다.
몇달이 흐르고 보니 그 말투가 거스르지도 않고 곳곳이 괜찮은 느낌이 되더라.
사무실이 충장로 1980년도 518민주회투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당시 그때 그곳에 있었으면 어떤 모습일까. 최루탄에 범벅으로 군졸들에게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노적봉(露積峯)은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 유달산 기슭에 있는 매우 큰 돌이다.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게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한 속임수이다.
산꼭대기와 큰 바위를 짚과 섶으로 둘러씌운 데서 생긴 이름이다.
유달산 곳곳에 이엉을 만들어 씌우느라 백성들이 넋이 나간 모양이다.
보리밥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끼 정도가 고작일 게다.
메말라 버린 엄마 젖가슴을 파고드는 갖난 애기이다. 젖 한방울도 없다.
계속 울어대다 지쳐 잠에 빠진다. 슬며시 다가와 애기를 가슴에 꼭 품어준다.
건너 편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순신장군이 아닌가.
오늘 동기들 몇명이 노적봉에 오른다. 조금 높은 곳에 이순신동상이 보인다.
아직도 예전처럼 노적봉을 바라보는 그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조금 내려오노라니 여자나무라는 팻말이 있다. 여자나무(?) 무슨 사연이 있을까.
그냥 스친다. 관심 밖이다.
서울 수락산에 오르면 바위 봉우리들이 수없이 많다.
여성바위 치마바위 남근바위 철모바위 기차바위 안꼬바위 탱크바위 곰바위 피아노바위 등등이다.
살아가노라면 자연생태계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존재는 무엇일까.
남정네들을 걷잡을 수없이 불끈 솟구치게 하는 바로 여성바위가 아닌가..
향기로운 샘물로 가득찬 여성의 중심부가 남성들을 유혹하는 순간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하늘로 뻗어있는 남근(男根)바위이다. 슬며시 찾아와 무작정 삽입이다.
흘러 넘치는 양수(陽水)와 음수(陰水)가 주위의 모든 바위를 마비시키고 있다.
유달산뿐 아니라 곳곳에 노적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들이 있다.
부산 봉화산(377m)에, 북한산에도 노적봉(715.5m), 대구의 진산(鎭山) 팔공산(1192.3m)에도
노적봉(891m)이 있다. 팔공산은 중악(中岳)·부악(父岳)·공산·동수산(桐藪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설악에 제1봉부터 7봉이 있으며 4봉을 노적봉(720m)이라 부른다.
바위를 맨손으로 기어오르기를 몇십번이더냐. 손바닥 지문이 모두 삭제된 것이다.
최근에는 쳐다만 보아도 쩌릿쩌릿 하다. 어찌 이런 바위들을 섭렵했을까.
역시 연세는 속일 수가 없나 보다.
주차장에 있는 버스에 다시 오른다.
목포 유달산의 마지막 코스가 동기들을 부르고 있다.
" 어서 오세요,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12회 동기생 여러분 !
제가 바로 " 목포의 눈물" 이난영입니다 ."
" 사공의 뱃노래 ~ 가물거리며
삼학 ~ 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 ~
부두의 새악시 ~ 아롱 젖은 옷 ~ 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 목포의 설움"
가슴을 파고드는 이별의 눈물이 애닲프고 서럽게도 목포시내를 휘젓고 있다.
이난영 ( 1916년 6월6일 ~ 1965년 4월11일 )은 일제 강점기에 전라남도 목포 출생이다.
본명은 이옥례(李玉禮)인데 호적에는 이옥순이다.
배우자는 김해송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가수겸 대중음악 작곡가이다.
6.25로 남편이 납북된다. 납북후에는 자식들과 조카를 혹독히 연습시킨다.
그들이 바로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이다.
경상도의 남인수와 사랑이 싹트지만 남인수의 폐결핵으로 사랑은 얼마 가지못하고 1965년 서거한다..
자녀는 4남 3녀가 있다. 트로트가수로 대표곡은 " 목포의 눈물, 해조곡 ,목포는 항구다 "
나라를 강탈 당한 일본 식민지 시대이다. 입으로 제대로 말로 표현도 못한다.
쪽발이 놈들의 군화발에 짓이겨져 눈치만 본다.
이난영이가 부른 " 목포의 눈물 "을 들으면 애잔하고 애처로운 감정에 빠진다.
식민지시대의 슬픔을 쓸어주고 있는 말 못할 느낌이 아닌가.
아쉽게도 길을 잘못 들어 이난영의 노래비를 포기할 순간이다.
오후 4시 40분에 서울 수서역으로 향하는 SRT열차의 기적소리를 늦출 수는 없다.
서둘러 목포역으로 들어선다.
"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12회 동기생 여러분 !
입학60주년 기념으로 2박3일 부산, 삼천포, 진도, 목포를 순회하고 이제 떠나야 합니다.
이별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가슴을 메우곤 합니다.
헤여지면 또 다시 만남이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기대에 어긋나는 순간도 있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집행부의 한 사람 총무로서 사과를 드립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다음을 기약함도 좋으리라 생각코 있습니다.
특히나 멀고도 머어언 바다 건너 USA에서 찾아주신 한정숙, 이종환, 이주혁 세분 동기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나이다.
모쪼록 조국(祖國)인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떠나더라도 그곳에서도
항상 건강하고 행복이 가득한 나날이기를 기원합니다.
동기들의 만남은 삶의 샘물이며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이 과연 어드메입니까. 바로 그곳은 명륜동 캠퍼스이리다.
정문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지요.
이곳은 서울 문묘 일원이라고도 불립니다.
대성전은 1964년 사적 제 143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공자와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입네다.
그 바로 앞에는 학문을 공부하는 명륜당입니다.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은행나무 4그루도 있습니다.
5백여년 가까이 이곳 성균관을 지켜온 수호신(守護神)이 아닐까요.
천연기념물 59호로 1962년 12월 7일에 등록된 곳입니다.
새봄이 오면 연초록빛 은행닢이 캠퍼스에 숲을 이루고 있지요.
어느새 샛노오란 단풍으로 익어가고 있다.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샛노오란 단풍닢은 낙엽이 되어 명륜당을 가득 채웁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서울 단풍명소 BEST4에 이름이 오릅니다.
서울숲(서울숲역), 덕수궁(시청역), 명륜당(혜화역), 서울창포원(도봉산역) 네곳이 BEST4입니다.
재학시절에는 무심코 별 관심없이 스쳐지나 다니던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졸업 60주년 기념일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은 이곳을 출발하여 가일층 멋진 여행을 가슴에 담아 봅니다.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12회 동기생 여러분 !
오늘 입학60주년 관광을 마치면서 건의사항을 올립니다.
입학120주년이 오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건강해야 하겠습니다.
그때는 지구 자체가 오염으로 떠나야 할 세월이 올런지도 모릅니다.
오염시킨 주범은 너와 나 지구상의 인간들 모두가 아니겠습니까..
천체에서 지구는 첫 번째로 자연생태계가 소멸되고 쓰레기 적치장이 아닐까.
걱정도 되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할 고향이 아닙니까.
불행하게도 언젠가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곳을 떠나야만 할게다.
밤마다 뜬눈으로 설치곤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 어디로 가야 하나 구름같은 내 인생
바람이 부는대로 흘러가네
아 ~ 아 ~ 이것이 세상이란 말인가
어릴 때 보았던 그 모습이 아~니~야 ~
가슴 적시던 저 노을 빛이
오늘은 나를 울리네 어디로 가야 하나
구름같은 내 인생 바람이 부는대로 흘러가네 "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번쩍하는 환한 빛이 머리속을 스치고 있다.
인공위성을 대절하여 달나라(月國)에서 1년 365일 10년을 살아봅니다.
자동차도 버스가 아닌 열차도 없는 인공위성만이 교통 수단이 될것입니다.
탑승비용은 오늘 우리 동기들이 이용한 SRT 특실요금이면 충분하리라 봅니다.
그 다음부터는 화성(火星)인 화국(火國)에서 10년, 수성인 수국(水國)에서도 10년,
목성의 목국(木國), 금성의 금국(金國). 토성의 토국(土國)에서도 각각 10년씩을 지냅니다.
10년을 살리오까 ㅡ 100년을 살리까 ㅡ 천년 ㅡ 만년 ㅡ 억만년을 살리오.
마지막 국가는 태양인 일국(日國)의 불랙홀로 빨려 들어가서 영생(永生)을 누리는 곳입니다.
월국(月國) ~ 화국(火國) ~ 수국(水國) ~ 목국(木國) ~ 금국(金國) ~ 토국(土國)
최종정착지는 일국(日國)인 태양이 마지막 정착지가 될것입니다.
그날이 올때까지 매월 정기월례회에 참석하셔서 회비 2만원씩 납부도 부탁합니다.
함께 하실 동기들의 존함을 다시 한번 크게 불러 볼까합니다.
" 정숙아 ! 종환아 ! 주혁아 ! 계주야 ! 양자야 ! 주수야 ! 두원아 ! 병선아 ! 태웅아 !
박 영아 ! 명언아 ! 성연아 ! 규상아 ! 재명아 ! 홍구야 ! 기봉아 ! 낙규야 ! 정남아 ~ ~ ~ "
이번 입학60주년 기념관광에 어깨를 함께 어루고 이마를 맞댄 주인공들이 아니랴.
또 추가하실 동기들은 손을 번쩍 드세요. 기꺼이 맞이할 것입니다."
2024년 5월 23일 무 무 최 정 남
★ 아래에 동기들 모습이 담겨있다 ★
이곳에 동기들 모습이
♥(1)https://photos.app.goo.gl/xyuzqEFmXnVJjC7J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