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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李炯基.1933.6.6∼2005.2.2)
대학 재학 중부터 언론계에 투신, 근 30년간 종사했으며, [연합신문], [서울신문] 기자, [대한일보] 정치부장 및 문화부장을 거쳐 [국제신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다가 1980년 언론계 통폐합으로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부산산업대 교수, 동국대 국문과 교수 역임. 1949년 16세의 중학생으로 [문예(文藝)]지에 시 <비오는 날> 외 2편이 추천되어 시단에 등단, 중후한 시들과 예리한 시론을 발표, <적막강산(寂寞江山)> <꿈꾸는 한발(旱魃)> <보물섬의 지도> <그해 겨울의 눈>의 시집과 <감성의 논리> <한국 문학의 반성> <시와 언어> 등의 비평집 등 10여 권의 저서를 냈다. 한국문학가협회상(1959), 문교부문예상(1966), 한국시인협회상(1976), 한국문학작가상(1982), 부산시문화상(1983), 윤동주문학상(1985), 대한민국문학상(1990),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1), 공초문학상(1993), 대산문학상(1994), 대한민국문학상(1995), 예술원상(1999), 은관문화훈장(2002), 서울사랑시민상(2003) 등 수상. 【작품세계】 첫 시집과 제2시집 사시의 변모가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그의 시는 초기시가 리리시즘에 의거한 미적인 감각 위주의 서정시로서, 전통적ㆍ서정적ㆍ유미적(唯美的)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음에 반해 후기시는 즉물적(卽物的)이며 날카로운 감각과 격정(激情)을 산문시적인 가락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의 근본적인 방법론은 ‘영감불신(靈感不信)’이며, ‘쓰려고 해서 쓰는 것’이 아닌 ‘일부러 쓰는 것’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평론에서도 드러나는데, <문학의 기능에 관한 반성>, <실험과 수수(守舊)> 등의 평론을 중심으로 하여 시의 난해성(難解性)과 모호성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고 있으며, 1960년대의 순수ㆍ참여 논쟁에서는 예술가의 개성적 자유를 옹호, 순수문학의 예술지상주의적(藝術至上主義的) 경향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비평 활동은 학리적(學理的) 근거나 사상적(思想的) 배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 인상주의적(印象主義的) 또는 창조적 비평 계열에 속한다고 평가된다. 17세에 [문예]지에 추천을 완료했다는 이 시인의 조숙성(早熟性)은 자랑의 대상도, 비난의 대상도 될 수 없는 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조숙성이 곧 천재성(天才性)이라는 등식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채 시를 써 온 시인의 하나이다. 그러한 그의 기본적인 태도는 인생의 진실이나 삶의 고뇌 따위의 현실적 문제를 외면하고(외면함이 아니라 그럴 겨를이 없는 것, 그것이 조숙의 운명이자 저주이다) 오직 절묘하고도 날카로운 감각적 직관력에 의해 절륜의 경지를 개척한 이단적인 것으로 보이며, 그런 면에서 당 나라 때 시인 이하(李賀) 또는 키이츠와 대비될 수도 있다. - 김윤식 : <한국 현대문학 명작사전>(일지사.982)
첫 시집과 제2시집 사이의 변모가 매우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그의 시는 초기시가 리리시즘에 의거한 미적 감각 위주의 서정시로서 전통적, 서정적, 유미적 경향이라고 한다면 후기시는 즉물적이며 날카로운 감각과 격정을 산문시적인 가락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의 근본은 ‘영감(靈感) 불신’이며 ‘쓰려고 해서 쓰는 것’이 아닌 ‘일부러 쓰는 것’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시의 난해성과 모호성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고 있으며, 60년대의 순수․참여 논쟁에서는 예술가의 개성적 자유를 옹호, 순수문학의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강조했다. ▶초기시 : 순수 서정 표현 - <적막강산>으로 대변되는 자연친화의 순수 서정시 - 삶과 인생을 긍정하고 자연 섭리에 순응하는 수용(受容)의 미학 - 순수 서정, 낭만주의, 감성적, 동양적, 노년기 ▶후기시 : 즉물적, 날카로운 감각, 격정적 표현 - <돌베게의 시> 이후 <꿈꾸는 한발>까지 질적 대전환 - 맑고 투명한 시어가 음산, 암울한 어둠의 시어로 바뀜 - 데카당스(decadence, 퇴폐), 상징주의, 지성적, 서양적, 청년기 - 자연과의 심한 단절, 불화현상 그의 문학적 도정은 대체로 3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1950년대로서, 이 기간 그는 청록파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 생활의 애환이 깃든 서정시를 썼는데, <귀로(歸路)> <비> <눈오는 밤에> <그대> 등이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 첫 시집 <적막강산>(1963)에 수록되어 있다. 제2기는 1960년대로서, 이때의 그는 거의 시를 쓰지 않고 평론쪽에 기울어졌는데, 세스토프, 오스카 와일드, 코바야시(小林秀雄) 등의 영향을 받은 그는 반합리주의(反合理主義)ㆍ반역사주의(反歷史主義)ㆍ예술지상주의의 입장에서 문학의 공리성을 배격하고 예술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그는 간간이 쓴 시를 묶어 제2시집 <돌베개의 시>(1971)를 내놓았다. 여기에는 원시적인 생명을 이미지스트의 수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모색이 나타나 있다. 제3기는 1970년대로서, 여기서 그는 시의 확고한 방향을 잡는다. 전통적ㆍ주정적(主情的) 미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충격의 미학’ 또는 ‘파괴의 미학’의 구축이 그것이다. 상식적 세계나 정상적 질서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일종의 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문학을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은 유독성(有毒性)의 문학이라고 규정하는데, 이것은 반합리주의ㆍ반역사주의ㆍ예술지상주의를 밀고 나간 그가 당연히 이룰 수 있었던 입장이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 <엑스레이 사진> <루시의 죽음> <식인종의 이빨> 등이 있다. (전봉건) 【경력】 ▶1956년 연합신문ㆍ동양통신ㆍ서울신문 기자(∼1961) ▶1961년 대한일보 정치ㆍ문화부장 ▶1965년 국제신보 논설위원 ▶1974년 동 편집국장 ▶1974년 [월간문학] 주간 ▶1975년 [국제신보] 논설위원 ▶1978년 [국제신문] 편집국장 ▶1979년 동 이사 ▶1980년 동 서울지사장 ▶1981년 부산산업대 전임강사 ▶1983년 동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1987년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1990년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1991년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1998) ▶1994년 한국시인협회장(∼1996) ▶1999년 동국대 명예교수 【평론】<상식적 문학론(1): 요즘 소설은 재미가 없다>(현대문학.1962.6) <상식적 문학론>(현대문학.1962.7) <상식적 문학론(3): ‘인생이라는 추상(抽象)’의 함정>(현대문학.1962.9) <상식적 문학론(4): 현대의 우상(偶像)>(현대문학.1962.10) <상식적 문학론(5): 박목월과 문학방귀설>(현대문학.1962.11) <상식적 문학론(6): 대중문학과 순수문학>(현대문학.1963.1) <정실비평론(情實批評論)>(신사조 13.1963.2) <상식적 문학론(完): 장님의 영광>(현대문학.1963.2) <문단 인상파론>(현대문학.1963.5) <우정 있는 반환: 연막비평(煙幕批評)의 정체>(현대문학.1963.8) <문학의 기능에 대한 반성>(현대문학.1964.2) <문덕수(文德守)의 인간과 문학>(현대문학.1964.4) <현대작가론: 김동리론: ‘등신불’을 중심으로>(문학춘추.1964.5) <박목월(朴木月)의 면모(面貌)>(문학춘추.1964.7) <전통이란 무엇인가>(현대문학.1964.8) <유치환론(柳致環論)>(문학춘추.1965.2) <전기작가(傳記作家)의 가능성>(현대문학.1965.4) <주류(主流)의 전통적 지향(志向): 광복 20년의 시>(현대문학.1965.4) <작가의 성실성: 문학과 현실>(사상계.1965.10) <월평(月評): 세 작품의 콘트라스트>(현대문학.1966.2) <월평(月評): 긴장감의 미학>(현대문학.1966.3) <월평(月評): 한국이라는 나라>(현대문학.1966.4) <월평(月評): 고독의 추적(追跡)>(현대문학.1966.5) <‘여자’와 ‘양복비자’: 이달의 화제>(현대문학.1966.6) <한 작가의 운명의 별: 나의 처녀작과 그 주변>(사상계.1967.1) <한정독자(限定讀者)의 불행: 이달의 화제>(현대문학.1967.4) <실험과 수구(守舊)와: 이달의 화제>(현대문학.1967.5) <‘석노인(石老人)’의 워밍업: 이달의 화제>(현대문학.1967.6) <식기(食器)를 아끼는 자 인생을 아낀다: 식기문화론>(女像.1967.7) <김동인론(金東仁論)>(예술원논문집 6.1967.9) <이중(二重) 메커니즘의 비극: 이달의 화제>(현대문학.1968.5) <두 육순(六旬) 시인의 시집: 이달의 화제>(현대문학.1968.6) <신시(新詩) 60년의 부삼(腑瞰)>(월간문학.1968.11) <신문학과 외래사조의 문제>(京大文學 3.1968.11) <주제란 무엇인가: 소설의 방법>(월간문학.1969.2) <김동인론: 고전의 재평가, 작가의 재발견>(월간문학.1969.6) <가수(假睡)ㆍ옹고집편>(월간문학.1969.9) <도전과 변모: 작단(作壇) 69년 개관>(월간문학.1970.1) <한국문학 속의 영웅과 범부(凡夫): 영웅이 범부로 전락(轉落)하는 소설의 숙명>(세대 82.1970.5) <외래사조의 정착문제: 해방 25년 문학의 제양상(諸樣相)>(월간문학.1970.8) <예술과 발표기관>(예술계 4.1970.10) <민족문학이냐 좋은 문학이냐: 민족문학 논의>(월간문학.1970.10) <곡(哭) 최계락(崔啓洛)>(현대시학.1970.10) <현대문학과 성(性)과 외설의 문제: 한국문학에 나타난 성관(性觀)>(월간문학.1971.2) <이중적 의식구조의 특성>(지성.1971.11) <난해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현대시의 과제>(현대시학.1972.1) <시인의 눈: 오규원시집 ‘분명한 사건’ 서평>(현대시학.1972.5) <민족문학이냐 좋은 문학이냐>(상황 3.1972.6) <춘원연구의 재검토: 춘원비판의 재비판>(문학사상 1.1972.10) <놓친 고기론: 나도향의 문장>(문학사상 9.1973.6) <악마의 무기 그 모순: 시의 방법론이란 무엇인가>(심상.1973.11) <새로운 질량의 상상적 공간: 김요섭 저 빛과의 관계(서평)>(현대시학.1973.11) <과거의 정리와 미래에의 도전: 김윤식ㆍ김현 저 한국문학사(서평)>(문학과지성 15.1974.2) <은유와 언어의 창조: 현대시와 메타포>(심상 6.1974.3) <20년대 서정의 결정(結晶), 만해(萬海)ㆍ소월(素月)ㆍ상화(尙火):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심상 7.1974.4) <먼저 언어화(言語化)의 능력을>(문예진흥.1982.11) <한국현대시사(韓國現代詩史)의 기점 재검토>(부산산업대논문집.1983.3) <문화예술의 보급을 위한 제언>(부산문예 2.1983.12) <독자성의 추구: 부산문화의 견인차 부산문학>(문예진흥.1984.3) <시련을 이겨간 시의 잠재력>(문예진흥 100.1985.8) <소멸의 미학: ‘태양의 건너마을’ 홍윤숙 저 서평>(현대문학 398.1988.2) <50년대 후반기의 시: 전후(戰後) 한국의 명시>(현대시학 229.1988.4) <이장희론(李章熙論)>(건국대학원논문집 27.1988.7) <이장희론(李章熙論)>(시문학 211.1989.2) <오상순의 시와 공사상>(한국문학연구 12.1989.12) <상식의 잣대를 버린 후 얻는 신세계: 시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사상 205.1989.11) <인습적 시각과 상상적 시각: 시 어떻게 쓸 것인가(3)>(문학사상 206.1989.12) <시를 쓰는 세 단계: 종자 얻기와 키우고 싹 틔우기>(문학사상 208.1990.2) <저주받은 시인들의 복권>(현대시.1990.3) <이미지라는 표현 장치: 시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사상 209.1990.3) <시각적 이미지의 이모저모: 시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사상 210.1990.4) <시인은 소리도 만들어낸다>(문학사상 211.1990.5) <시와 문학의 특권적 표현 영역>(문학사상 212.1990.6) <비유의 원리와 직유의 표현 효과: 시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사상 213.1990.7) <만물에 마음 주는 의인법: 시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사상 215.1990.9) <아이러니와 역설: 시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사상 217.1990.11) <아마추어리즘의 홍수 속에서: 1990년대의 한국시>(현대시.1990.12) <행과 연의 구분: 시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사상 219.1991.1) <소재와 주제: 시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사상 220.1991.2) <내가 시를 쓰는 과정>(현대시.1991.8) <시란 무엇인가: 시 그 문학의 원형>(현대시.1991.11) <고향, 전통 그리고 조국: 송수권론>(문학사상 229.1991.11) <조연현 문학의 감성의 논리>(현대문학 443.1991.11) <시란 무엇인가(5): 시의 장르적 특성>(현대시.1992.1) <시란 무엇인가(6): 시와 언어>(현대시.1992.2) <언어를 초월하려는 언어: 시란 무엇인가>(현대시.1992.5) <시와 이미지>(현대시.1992.7) <현대시와 선시>(현대문학 4522.1992.8) <이미지의 종류>(현대시.1992.8) <시란 무엇인가: 비유를 알아보자>(현대시.1992.9) <산업사회의 도전과 한국시의 응전>(시문학 256.1992.11) <조연현(趙演鉉)의 감성논리(感性論理): 그의 비평(批評)과 에세이의 상관관계>(한국문학연구 15.1992.12) <공초(空超)의 시와 공사상(空思想)>(시문학 264.1993.7) 【시】<비 오는 날>(문예.1949.12) <코스모스>(문예.1950.4) <강가에서>(문예.1950.6) <신인(新人)의 위치>(문예.1953.2) <눈 오는 밤에>(문예.1953.9) <들길>(전선문학 7.1953.12) <귀로(歸路)>(문예.1954.1) <종전차(終電車)>(현대문학.1955.4) <비>(문학예술.1955.7) <불행>(현대문학.1955.10) <뻐꾸기>(현대문학.1956.10) <봄>(사상계.1956.11) <노년환각(老年幻覺)>(문학예술.1956.12) <하늘만한 안경>(현대문학.1957.1) <연도(連禱)>(현대문학.1957.3) <근작삼편(近作三篇)>(현대문학.1957.7) <창(窓)>(현대문학.1958.6) <한일초(閑日抄)>(사상계.1958.10) <송가(頌歌)>(현대문학.1958.12) <창(窓) 3>(현대문학.1960.3) <봄비>(현대문학.1960.7) <산(山)>(현대문학.1962.4)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詩人)>(현대문학.1962.4) <무슨 짐작 있어>(신동아 14.1965.10) <감기: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신동아 44.1968.4) <위약(違約)>(사상계.1968.5) <소묘(素描)>(현대문학.1968.8) <봄밤의 귀뚜리>(현대문학.1971.2) <하운>(현대문학.1971.2) <해바라기>(월간문학.1972.2) <해바라기 환상>(월간중앙 53.1972.8) <엑스레이 사진>(현대시학.1972.10) <나의 하루>(시문학 25.1973.8) <랑겔한스섬의 가문날의 꿈>(심상 21.1975.6) <고전적(古典的) 기도(祈禱)>(문학사상 37.1975.10) <손가락>(현대시학 81.1975.12) <바다의 내력>(월간문학 88.1976.6) <면도>(한국문학 34.1976.8) <간반(肝斑): 만하(萬夏)에게>(문학사상 49.1976.10) 【시집】<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1955.이상로(李相魯), 김관식(金冠植)과의 공동시집) <적막강산(寂寞江山)>(첫시집.모음출판사.1963) <돌베개 된 시>(시인협회.1970) <돌베개의 시>(문원사.1971) <꿈꾸는 한발(旱魃)>(창원사.1976) <풍선심장(風船心臟)>(문학예술사.1981) <그 해 겨울의 눈>(고려원.1985) <오늘의 내 몫은 우수한 짐>(문학사상사.1986) <보물섬의 지도>(서문당.1986) <심야의 일기예보>(문학아카데미.1990) <별이 물 되어 흐르고>(미래사.1991) <쭉지 않는 도시>(고려원.1994) <절벽>(문학세계사.1998) <존재하지 않는 나무>(고려원.2000) 【시선집】<그해 겨울의 눈>(고려원.1985) <자하산 청노루>(문학세계사.1986) <별이 물 되어 흐르고>(미래사.1991) <죽지 않는 도시>(고려원.1994) 【수상집】<서서 흐르는 강물>(휘경출판사.1979) <바람으로 만든 조약돌>(어문각.1986) <부처님의 아흔아홉 가지 말씀>(시공사1991) 【평론집】<감성(感性)의 논리>(문학과지성사.1976) <한국문학의 반성>(백미사.1980) <시와 언어>(문학과지성사.1983) 【저서】<20세기의 내막>(공저.현대문화사.1965) <북한의 현대문학>(고려원.1990) <현대시 창작교실>(문학사상사.1991) <불교문학이란 무엇인가>(동화출판공사.1991) <현대시 창작교실: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문학사상사.1991) <현대인이 읽는 사기(史記)>(서당.1991) <시란 무엇인가>(한국문연.1993) <박목월(朴木月)>(문학세계사.1993) -------------------------------------------------------- 우리나라 최연소 등단 시인 이형기 진주 출신 이형기(李炯基.1933~2005) 시인은 진주 촉석루 건너편 망경동에서 살았다. 진주중안초등학교(경남·부산 최초의 초등학교)를 나오고 진주농림학교를 다녔다. 대학은 동국대학교 철학과로 갔는데 "시를 쓰자면 종교나 철학쪽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하고 종종 말했었다. 이형기는 1949년 농림학교 재학시절 제1회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나가 당당 장원으로 입상했다. 이때 차상에는 시조를 쓴 박재삼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장원한 것은 그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한 줄이다. 그런데 이 무렵 만16세의 나이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학잡지 '문예'에 시 <비오는 날> 외 2편이 서정주의 추천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에 속한다. 아동문학을 제외한 성인 문학계 데뷔 절차에서 16세의 까까머리 학생이 출현한 것은 이형기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시가 우수하여 뽑아 놓았더니 인사하러 왔는데 까까머리라 황당했다는 심사위원 서정주의 회고담이 인상적이다. 서정주는 시를 뽑았지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고 웃어 넘겼는데 정작 경남의 어디에선가 어떤 분은 "무슨 문예지가 그래 애숭이를 신인으로 뽑는가? 권위에 문제가 있어"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대학시절 한두 번 이형기 시인을 만났었다(그 이후 물론 서울이나 진주에서 여러번 만났지만)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의 5월 문학의 밤 프로그램을 들고 선배인 이형기 시인의 언론사(아마도 국제신문 서울 편집국인 듯)를 찾아간 것이다. 행사진행 지도교수가 [현대문학]의 주간으로 있던 조연현 교수였으므로 당시 초대된 외부 문인들은 하나같이 '반드시'참석하겠노라고 확답해 주었는데 이형기 시인도 "조선생 말씀하신대로 하겠다"고 짧게 말했다. 이형기 시인이 [문예]지에 추천을 받아 서울에 올라갔을 때 적당히 거처할 곳이 없는 것을 안 조연현 교수가 자기 집에 있게 하고 후에 자기 질녀에게 이형기를 소개하여 결혼하게 했었다. 그렇기에 이형기의 입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겠다."는 말이 쉽게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가 '65년도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그해에 한국문인협회에 입회했는데 가을 세미나에 갔을 때 이형기와 박재삼을 만날 수 있었다. 이형기와의 두 번째 만남이고 박재삼과는 첫 번째 만남이었다. 수유리에서 세미나(세미나가 아니라 술 마시는 대회)를 마치고 오는 길에 대부분의 문인들이 삼삼오오로 종묘로 들어가 담소하거나 남은 술을 마셨다. 종묘로 들어서면서 이형기 시인은 박재삼 시인을 보고 강희근과 시가 같으니까 잘해 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자기는 초기의 서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고 박재삼은 초지일관 서정시니까 이번에 신문에 당선된 강희근의 작품이 정통 서정시이므로 교감을 잘해 보라는 것이었으리라. 이형기는 후기시들이 우리나라 본격비평에 의해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작품은 초기에 쓴 서정시 <낙화>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화> 전문 -
이형기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유달리 강했다. 필자와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다른 주변 시인들을 만났을 때도 예의 그 자부심은 송곳이 푸대를 뚫고 나오듯이 노출되곤 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서 최고의 일이 시 쓰는 일이지…"라고 시작되는 시인 일등주의 선언을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허영자 시인에 의하면 우리 문단에서 이형기와 같은 일등주의에 젖어 살았던 시인으로 김종문과 김구용, 이형기를 떠올리며 이들의 작품들을 되새겨 보곤 했다고 필자에게 술회한 적이 있다. 이형기는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를 때 좀 젊었을 때는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가.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 기둥을 얼싸 안고…"로 시작했고 좀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비오는 네 거리에 비오는 네 거리에 우산을 마주잡고…"로 시작했다. 어느쪽이든지 늘어지거나 청승맞은 데가 없지 않다. 필자의 귀에는 노래를 자기식으로 희롱할 뿐이지 노래로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는 없는 것으로 들렸다. 그런데 문제는 노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자리 어느 순간을 디카로 찍듯이 찍어서 고정시키면 다음과 같다. "비오는 네거리에 비오는 네거리에 우산을 마주잡고… 지금 누군가가 내게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한 사람을 들어라 하면, 하면 나는 아무래도 이 이형기밖에는 없다고 말할 것이야. 비오는 네 거리에 비오는 네 거리에 우산을 마주잡고…" 노래 속에 신파조 대사가 들어가는 이른바 액자형 '가요 꽁트'를 묘출하는 것이다. 그 뒤로부터 필자는 비가 오거나 심히 무료하거나 하면 "비오는 네거리에 비오는 네거리에 우산을 마주잡고 ...지금 누군가가 내게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한 사람을 들어라 하면, 하면 나는 아무래도 이 강희근 밖에는 없다고 말할 것이야"하고 중얼거리며 이쯤에서 대사를 중단하고 만다. 멋적기 때문이다. 술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의 이형기식 '가요 꽁트'는 불발이거나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남이 흉내내기가 절대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형기의 일등주의 내지 자부감 발현의 다른 이야기 한 토막이다. 이형기가 K신문사 편집국장일 때(논설실장일 수도) 그신문의 사주(社主) 측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하게 되었는데 그 그룹의 계열사 직원들이 이 선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때였다. 물론 그 후보는 내리닫이 J지역구에서 계속 당선되어온 터여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형기 시인이 느닷없이 J시에 나타난 것이다. 필자와 김석규, 이월수, 박재두(작고) 네 시인이 달려나와 횟집에서 반가운 인사, 그 다음에 술잔이 오고 갔다. 그날은 '비오는 네거리'는 부르지 않고 시 이야기와 술 이야기만 했다. 이형기는 "오늘은 내가 산다"라는 말만 하고 그 뒷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후배시인들의 말을 들어주기로 작정하고 귀향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여 주거나 간간히 짧게 토를 달 뿐이었다. 그러나 필자와 달려나와 참석했던 시인들은 침묵의 행간을 읽고 있었다. 행간에 일등주의와 자존심이 찍혀 있다는 것과 사주와 편집권과의 갈등 한 줄기가 눌어붙어 있다는 것, 귀향도 언제나 같은 귀향일 수 없다는 것 등의 의미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누가 먼저였던지는 모르나 이형기의 <무슨 짐작 있어>를 외고 있었다.
무슨 짐작 있어 흔들리는 나뭇가지 바람은 이제사 눈을 뜨네. 밤이 오기 전 희부연 한때를 그 속에 떠오르는 아낙네들 하얀 얼굴.
이형기 시인이 본격적으로 시를 쓰면서 시적 전환을 보인 때가 1960년대이다. 이 시기에 그는 평론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현대문학'을 통해 L 비평가와 논전을 벌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64년이던가, 필자가 대학시절 동국문학회 시화전이 구내 오솔길에서 열렸는데 어떤 중량감 있는 여자분이 학교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동문 선배 코너에서 이형기 시인의 시화 작품을 보더니 놀라는 눈치를 보이며 "이형기 시인이 이 학교 출신이냐?"고 물었다. 필자가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시를 꼼꼼히 읽어보다가 돌아갔다. 돌아간 뒤 선배 이우석 시인에게 "저 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유명한 여류 시사평론가 정충량씨라고 답해 주었다. 그 무렵 논전으로 장안의 시선을 모으고 있던 이형기에 대한 관심이 이런 형태로도 드러나고 있구나 하고 잘난 선배를 둔 것에 한껏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 번은 미당 서정주 선생댁에서 몇 사람이 몰려가 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김현승 시인이 화제가 되었다. 미당은, "김현승은 꼬장꼬장한 사람이야. 소정의감(小正義感)에 불타는 사람이야. 그러다가 대정의(大正義)를 못보는 편협에 빠지기도 해. 문협에서 전국 순회 문예강좌에 대해 '왜 맨날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 조지훈인가? 이형기, 문덕수 같은 후배들도 좀 보내면 되지 않겠나...' 하고 딴지를 건단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지역사정과 문단사정이 겹쳐 있단 말이야. 그걸 못보는 사람이야. 아니 이형기, 문덕수를 챙긴다면 내가 더 챙길 사람들이 아닌가?" 1960년대 시단은 현실파로 김수영, 예술파로 김춘수가 대립각을 세우면서 전개되는데 이들과 같은 반열에 서는 시인들로 이형기, 문덕수, 박재삼이 죽순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60년대 사화집' 동인이 우수 시인들을 중심으로 시단 권력을 형성해 갈 때였다. 제주대학에서 홍익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서울로 갓올라온 문덕수와 이형기 등이 황금찬, 성춘복, 유경환, 박재릉, 최원 등 20여명 시인들을 규합하여 '시단(詩壇)' 동인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때 이형기는 동화통신 정치부에 있다가 서울신문 정치부로 옮겼다가 다시 대한일보 문화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정치부에 염증을 느낀 이형기가 대한일보 문화부장으로 옮기면서 필생의 숙원인 칼라 있는 시인, 의식 있는 시인으로의 대감행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셈이었다. 이형기는 시에도 지성의 날카로움을 획득하면서 전천후 비평가로서의 칼날도 번뜩이며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다정다감했다. 부드러우면서 안으로는 지적인 기둥을 확고히 세워갔다. 당시 이형기는 MBC 보도제작부에 근무했던 후배시인 최원과 가까이 지내며 매주 산행을 즐겼다. 최원은 1936년 원산 출생으로 6·25때 월남하여 마산에 정착해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나오고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효종대왕릉 망두석>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는 '일요일 그 아침에'가 있고 MBC에 입사하여 보도제작부장, 마산 MBC 상무 등을 지냈다. 뒤이어 진해 에브랜드 사장, 경남매일 사장을 거쳤다. 성격이 호방하고 의리에 강하여 그의 곁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이형기는 대한일보 안에 산악회가 결성되어 있었지만 주로 최원과 산행을 했다. 문화부에 거느리고 있던 이종석 기자를 대동할 때도 있었다. 북악산, 도봉산, 관악산은 물론이고 경기도 일대의 산과 강화도 마니산에까지 섭렵을 했다. 이형기는 이 산행으로 유약한 서정의 언덕을 뛰어넘고 인간의 존재와 부조리와 실패하게 되어 있는 삶의 질곡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형기가 문덕수와 더불어 [시단] 동인을 만들고 최원과 함께 산행을 하던 그 무렵이었다. 이형기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박종화 혼자 오래 한다는 데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국문인협회 총회가 열렸을 때 이형기는 그동안 이사회에서 간선으로 뽑던 이사장을 총회 직선으로 뽑는다는 정관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안을 '시단'동인이 중심이 되어 전격 통과시켰다. 이것은 문협의 관례로 보나 문단 선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보나 하나의 쿠데타에 속하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문단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평론가 조연현은 이 일련의 사태를 뒤늦게 알고는 노발대발했다. 조연현은 생존 문인 선배 중에서 박종화를 깍듯이 예우해 오고 있었다. 그런 터에 문단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형기 등의 신진 세력의 동향에 대해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연현은 먼저 문덕수를 부르고 그 다음 최원을 불러 정관 개정은 평화스런 문단을 표로써 좌우하는 좋지 못한 풍토를 조성할 수 있으므로 이를 원상대로 회복시키라고 지시했다. 문덕수는 어쩔 수 없이 조연현의 말에 따라 총회를 다시 소집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과정에서 이형기와 문덕수는 견해를 달리하는 편에 서고 말았다. 총회가 다시 소집되지는 않았고 다음 총회에서 이형기 등이 밀었던 김동리가 직선 이사장이 되었다. 나중에 있었던 일이지만 직선(直選)은 직선의 논리에 따라 동료를 떼어놓고 우정을 짓밟는 쪽으로 전개가 되었다. 김동리 이사장이 임기를 마쳤지만 중임을 하고자 했을 때 이번에는 조연현의 도전을 받았다. 김동리와 조연현이 어떤 사이인가. 광복 이후 난마와 같이 얽혀 있던 문단에서 청년문학가협회를 같이 만들고 우익 진영의 향도로서 이와 잇몸과 같은 관계로 이론을 개발하면서 최전선의 동지로 살았던 것이다. 어느새 이들은 한국문단의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지만 선거로 맞서는 , 서로가 서로를 표로써 제압해야 되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문단은 순식간에 김동리파와 조연현파로 나뉘었다. 이때부터 필자도 한 표를 행사하는 문협회원으로서 따질 것도 없이 조연현 지지의 쪽에 서게 되었다. 대학의 은사이자 문단의 초년병을 [현대문학]에 무시로 발표케 해 주시는 든든한 후견인 조연현 선생이 아니던가. 이때 이형기는 적어도 조연현 편은 아니었다. 뭔가 조연현과 서먹한 거리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선거는 사람을 이렇게 어정쩡하게 하거나 서로 얼굴 쳐다보기 민망한 관계로 만들어놓는 것이었다. 당시 김동리 지지자들은 노대가나 중진들 쪽에서 많았고 조연현 지지자들은 응집력이 강한 젊은 작가들 쪽에서 더 많았다. 일차 투표에서 득표수가 백중하게 나왔다. 단상에서 단하에서 조연현은 이 시간 담배 다섯 갑을 내리 태웠다는 것 아닌가. 2차 투표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노쇠한 중진들은 다 집으로 갔고 젊은 작가들은 조연현을 외치며 똘똘 뭉쳐서 유감없이 투표를 했다. 어쩌다 필자 옆에 있던 소설가 이문구(당시 김동리 이사장 아래 '월간문학'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가 "강형, 내 모가지 떼러 왔지?"하는 것이었다. 그 즈음 이 이문구가 하동 옥종에서 청운의 뜻을 품고 단신 상경을 해 월간문학 주변을 맴도는 정규화를 보고 "형씨는 어디서 왔소?" 물었고, 정규화는 하동에서 온 촌놈입니다 했을 때 "시는 진주에 있는 강희근이한테 배우면 되지, 상경은 무슨 상경"했다는 말을 후에 진주에 온 정규화가 필자에게 일러준 일이 있었다. 투표 결과는 조연현의 득표수가 게임도 되지 않게 앞서 버렸다. 젊은 작가들은 적어도 문인협회가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다 높은 수월성을 가지게 될 것이란 믿음으로 환호했다. 조연현은 당선의 말에서 문인들의 친목과 역량제고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했다. 뒷풀이를 위해 문인들은 삼삼오오 갈라져 선술집으로 갔는데 필자가 참여한 뒷풀이에서 어떤 소설가(김동리쪽)는 "예이 거지 같은 놈들!" 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이형기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형기는 진주 중안초등학교를 나와서 진주농림학교로 진학했다. 초등 동기로는 강동호 교수(작고, 전경상대학교 법대 학장)가 꼽히는데 이형기와 강동호는 초등 재학 내내 책벌레라 불릴 정도로 명작 읽기에 빠져 있었다. 강동호 교수가 법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이나 교양에 유달리 강했던 일이나 이형기가 시인 일반의 수준을 웃도는 이론이나 문학적 교양을 섭렵해 있었던 일은 다 초등학교 시절에서 비롯된 독서지향의 생활 태도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농림학교 시절 친구로는 경상대학교 빈영호 초대 직선총장을 들 수 있다. 필자는 강동호 교수, 빈영호 교수(당시 학생처장)와 이형기 시인이 만나는 자리에 합석한 일이 있다. 그때 빈 교수는, "자네, 이 사람, 학교 다닐 때 몸이 아주 약했었는데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가?"하고 이형기에게 물었다. \"하, 골골할 정도는 아니야… 자네 아다시피 그때 기계체조에 매달렸었지. 뭐 특별히 다른 운동을 해볼 것도 없고 해서 평행봉 같은 것을 열심히 했었지." 그 자리에서 이형기는 빈 교수에게 "좀 프랙티컬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하고 말했었는데, 그 자리를 파한 뒤의 필자의 머리에 와 닿았던 그 프랙티컬한 것은 신문사 통폐합 이후 교수직으로의 전환에 관한 건이 아니었나 싶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언론사 통폐합을 시행했을 때 진주에 있는 경남일보가 마산의 경남매일에, 부산에 있는 국제신문이 부산일보에 통폐합이 되었었다. 국제신문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번갈아 맡고 있었던 이형기는 이 사태로 막 직장을 잃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후 이형기는 부산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발령이 났었고, 몇 년 후에는 정년을 하게 된 서정주의 자리, 곧 동국대학교로 옮겨 앉게 되었었다. 대충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진주 문인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남명문학상\'을 제정했었다. 부산교통 조옥환 사장을 이월수와 함께 찾아가서 남명문학상 제정의 취지를 설명하고 상금 출연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때는 필자와 조옥환 사장은 구면이었다. 필자가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남명학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 조사장은 남명학연구원을 고려대학교 김충렬 교수의 협조를 얻어 이미 개설해 놓고 있던 터였다. 일본과 대만의 교수들이 참가한 학술회의는 국내 연구진들이 총망라된 맘모스 회의였고 이 회의 역시 조사장의 지원을 파격적으로 얻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사장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시상금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다. 이 문학상의 심사를 필자는 이형기에게 맡겼다. 그는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수상자를 결정해 주곤 했다. 이때 이형기가 진주에 왔을 것인데, 어느 초밥집이었던 듯하다. 최용호 이월수 김석규 박재두 필자 등이 한 자리를 하고 술잔을 나누는데 이형기의 빈 잔이 이월수에게로 향했다. 그때 이형기는 이월수를 빤히 쳐다보고 \"왜 이월수씨는 시집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요? 고향에 사는 시인들이 많은 것도 아닌데, 성의를 성의로 받아 줄 수 없는가, 이 말이요.\" 이월수는 잠시 홍당무가 되면서 "저는 책을 못 받았습니다. 웬만하면 분실이 되지 않는데… 이상하네."하고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필자에게도 해당되는 질타였다. 그 무렵 필자도 이형기 시집을 차곡차곡 받아 쌓고는 답 한 줄 써 보내지 않았던 터였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니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도 이하동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데 이형기는 왜 여류시인 이월수를 표적으로 삼았던 것일까? 그 자리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필자를 표적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인데도 전혀 필자의 안면으로는 시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였던 것일까. 국제신문에서 이형기와 같이 근무했던 김규태 시인은 이형기의 술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센 편은 아니었고, 따라서 주사도 없었지요. 다만 술이 좀 되면 '진주라 천리길'을 잘 불렀어요. 고향을 생각하듯 지긋이 눈을 감고 '내 어이 왔던고'를 '내 어찌 떠났던고'로 개사한 것처럼 그렇게 들리도록 노래했지요." 그리고 "성격이 겉으로는 매우 오만해 보여도 자기 과오가 분명하다 싶을 때는 깨끗이 사과하는 그런 태도를 보였어요. 그는 재벌을 아주 싫어했고, 신문이나 문화가 돈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곤 했지요"라는 말을 보탰다. 필자가 본 이형기는 성격이 깔끔했다. 자기 생각을 감추어 두는 편이 아니라 즉석에서 드러내 보이는 편이었다. 이월수에게 질타했던 '책 보내준 데 대한 무답신' 건도 그런 것이었다. 필자에게는 또 다른 형태로 그의 즉반응이 있었음을 기록해 둘 수 있겠다. 1984년쯤이던가, 필자는 한국시에서 참여파 시인으로 우상화되고 있었던 김수영의 시를 분석하여 한 편의 논문으로 쓰고자 했었다. 이 의도에는 평소 김수영의 시가 필자의 안목에 들어오지 않았던 데 대한 불만이 깔려 있었으리라. 이 논문의 내용을 진주 어느 다방에서 이형기에게 소상히 신나게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이형기는 "그건 형식론자의 주장이야. 시는 형식 이상의 것이야"하고 잘라 주었다. 필자는 순간 기분이 심히 잡쳐 들었다. 필자가 말했던 \'김수영 시 연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김수영 시중에 의외로 실패작이 많았다. 둘째, 대체로 시의 말이 시인의 태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세째, 시를 논의한 글들이 작품 자체를 보는 쪽보다는 시인의 시론에 끌려가는 쪽이 많았다. 넷째, 시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시를 완성된 한 편, 곧 유기체로 보는 데 소홀했던 듯했다. 이런 전제 아래 김수영의 시를 '되는 시와 안 되는 시'로 가르고, 시의 틀에 '맴도는 말'과 '할말'의 되풀이 구조가 있음을 밝혀낸 것이라고, 그것이 김수영 시의 비밀이요 정체라고 그렇게 조목조목 설명했던 것이다. 이형기는 이쯤에서 화를 버럭 내면서 "그것은 형식론자의 주장이야. 시는 형식 그 위에 있단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황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는 형식 위에 있지만 형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요, 라고 말하려다 말을 입에서 끄집어내지 않았다. 선배의 충고를 두고두고 새기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이것이 필자에게는 시에 대한 선입견 지우기에 있어 남다른 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 선배가 이 강희근을 아직도 직업교수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구나."하는 섭섭함은 좀체 가시지가 않았었다. 그런데 얼마 뒤 홍익대학교 문덕수 교수가 진주에 왔을 때 필자가 예의 김수영론을 넌지시 띄워 보았더니 "그것 참 들을 만하네. 나도 김수영 시에 대해 불만이 많은데 어디가 무엇 때문에 그런지 꼭 집어내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논문 한 번 봤으면 해요"하는 것이었다. 사실 김수영 비판은 아직도 거의 금기사항이 되어있다. 작년이던가, 서울대학교 오세영 교수가 김수영 시 비판을 어디다 했는데 비평가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박종한 축구에만 벌떼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머리 아프다, 이형기로 돌아오자. 이형기의 시 <연애편지>부분을 옮겨 본다.
이쪽도 혼자 저쪽도 혼자 실은 저쪽한테 묻지도 않고 이쪽이 혼자 또박 또박 제깍 제깍 밤을 새우는 지금도 창밖에는 답장 없는 스산한 찬바람 낙엽이 굴고 있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그래야만 애가 타서 또 쓸 밖에 없는 편지는 역시 연애편지가 제일이다 월간 [현대시] 1993년 6월호는 <이형기 선생 문우 회고담> 특집을 실었다. 그때 집필한 사람은 박재삼, 강계순, 김종해, 강우식, 박제천 등의 시인들이었다. 여기 실린 내용들을 발췌하여 재구성해 볼까 한다. 6ㆍ25가 나기 전인 1948년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중학생]이라는 잡지가 나왔었다. 그 잡지는 10호 정도 나오고는 흐지부지 끊겼다. 그만큼 책이 안 팔리는 어려운 시대에 나왔던 것이다. [중학생]은 소설가 방기환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낸 것이었다. 그 잡지의 3호에는 전국 중학생의 응모시들이 2페이지에 걸쳐 실렸다. 전국에서 뽑힌 작품들 가운데 이형기의 <달밤>이 있었는데 중학생이 쓴 솜씨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는 평을 들었다.
비인 거리마다 달빛 서러운 개구리 무논에서 한밤을 울어 - 顯考學生府君神位 잔 대신 고향의 얘기를 권하니까 향목 피우며 피우며 호박꽃초롱 앞세우고 가소서 편히 쉬소서.
이형기 본인도 마음에 들었던지 이 작품을 그의 첫 시집 '적막강산'에 실었었다. 그 '중학생'에 박재삼의 시와, 송영택의 시가 함께 실렸다. 이 세 사람의 인연은 그때로부터 시작되었다. 뒤에 다 문단에 나왔고 개천예술제에서는 제 1회 장원 이형기, 차상 박재삼, 제 2회 장원 송영택으로 개천예술제 입상군(入賞群)을 이룬 것이었다. 백일장의 제목으로 시는 ‘만추’, 시조는 ‘촉석루’가 제시되었다. 이때는 통합 시상을 했는데 시, 시조 구별도 없었고 중고등 대학부도 나뉘어 있지 않았다. 이형기의 장원작은 자료로 찾아지지 않고 있다. 진주문인협회에서 1980년 발간한 입상집 '꽃불 수놓은 하늘'에는 2회 장원작인 송영택의 ‘남강을 보며’부터 실리기 시작한다. 참고로 송영택의 장원작을 보자.
남강을 보며
한결 푸른 논개의 마음이 삼백년 예대로 흐른다
촉석루 자취 없는 옛자리에 서면 파르르 하늘이 질리는 것
님을 기대려 님을 기대려 애타던 내 마음이
오늘 진양성 다 허물은 폐허에 경건히 들국화를 피운다
매우 소박한 시다. 이때는 송영택의 주소가 부산시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등학교 재학시절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송영택 시인은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나왔고 릴케의 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를 번역한 것이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한동안 실려 있기도 했다. 어쨌거나 제 1회 때 장원한 이형기와 차상한 박재삼은 입상자 방이 붙었던 그날 저녁 진주극장에서 경연했던 연극 프로그램 사이에 입상작 낭송이 있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 진주농림학교 학생과 삼천포고등학교 학생의 반가운 악수였던 것이고 이 악수가 한국문단에서의 상호 부상(浮上)을 예약해 두는 것이기도 했다. 박재삼은 이 악수 이후 1949년 11월호 '문예'잡지를 서점에서 사서 보고는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이형기의 시 ‘비오는 날’이 추천작품으로 실려 있어서였다. 무슨 변고 같은, 무슨 꿈결 같은 기적이 흐르는 체험이었다는 것이다. 중학생이 이 나라의 기성시인의 반열에 들어가다니, 어째 이런 일이 있을까, 가슴 가누기 힘들었다는 것 아닌가. 1952년 수도가 부산에 옮겨와 있을 때였다. 이형기는 그때 '민주여론'이라는 주간지 기자를 하고 있었다. 박재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무작정 부산으로 갔는데 이형기는 박재삼에게 작은 일거리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희망'이라는 잡지에 김말봉이 소설 ‘파도에 부치는 노래’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소설을 다시 베껴 적는 일이었다. 그때는 복사기도 없는 시절이어서 일일히 육필로 베껴 쓸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이형기와 박재삼은 또 주례와 혼주라는 입장에서의 인연을 맺었다. 박재삼의 큰 딸이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박재삼이 대한일보 기자를 하고 있을 때 고혈압으로 쓰러져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이형기는 즉각 박재삼 돕기운동을 펼쳤다. 문인들에게 호소했던 일이라 큰 돈이 모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형기는 그 돈을 박재삼 몰래 그의 아내에게 전달했다. 후일 박재삼의 아내는 "당신은 이형기씨의 은혜를 평생 잊어서는 안돼요"하고 남편에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형기가 술친구로 만났던 여류시인에 강계순이 있다. 강계순에 비해 이형기는 나이로는 4년 연장이고 문단 데뷔로는 10년 선배다. 요즘처럼 시인들이 한 해에 수십 명 수백 명씩 쏟아져 나오는 때가 아니라서 당시의 시인들은 모처럼 만나게 되면 10년지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강계순은 "우리는 술 마시다 만났고 술 마시면서 만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만나면 계속 마시게 될 것이다"라 말한다. "그는 또 보통보다는 좀 큰 키에 한 번도 비대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길고 휘청한 허리와 약간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는 지쳐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한 걸음걸이로 어찌 보면 좀 지치고 쇠약한 노인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다닌다"고 지적한다. 이형기는 술을 마셔도 꼭 소주만 마시는데 마셨다 하면 언제나 '인생은 길을 묻는 지친 나그네'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형기가 이 노래를 부를때마다 강계순은 이형기의 시 <랑겔한스섬의 가문 날의 꿈>을 떠올린다는 것이었다.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섬.
이형기는 이 시를 욀 때에 '허무자체'라고 강계순에게 이 시의 세계를 정의하면서 늘상 시는 비수를 갈듯이 쓴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한국시인협회 야유회에서 한껏 취해 있는 이형기를 보고 시인 이인수는 "형기,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아.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라구" 하면서 술잔을 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종해는 ‘시인 이형기의 주소’라는 시를 썼는데 이는 이형기 시를 설명하는 것으로 연구의 한 자료가 된다.
그가 머물고 있는 주소가 어딘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허무라 하기도 하고 유미적이라 하기도 하고 즉물적이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막강산이라 하기도 하지만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가 가진 예리함 그에게는 사물을 자르는 면도날이 있다 확실한 것은 그의 시에서 그으지는 면도날 검법이다 ...(줄임)... 미당의 깊이, 목월의 높이가 어우러진 그가 머물고 있는 주소가 어딘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쨋거나 김종해는 이형기의 주소를 "미당의 깊이 목월의 높이가 어우러진" 곳으로 판정하고 있다. 김종해는 고교 재학 때 개천예술제에 와서 차상에 입상했던 시인이다. 1980년대 초에 이형기는 한ㆍ중ㆍ일 아시아 시인회의 창립 발기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타이페이로 여행한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측 단장으로 김광립이 참가했고 참석 시인으로 허영자, 정진규, 김종해, 강우식 등이 참여했다. 타이페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형기 옆 자리에는 강우식이 앉았다. 강우식이 문학 이야기와 문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집어내려고 하는데 이형기는 가방 속에서 문고본 하나를 찾아내고는 독서삼매에 빠져 버렸다. 강우식은 하품을 몇 번 하다가 깊은 잠에 들어갔다. 잠에서 깨어나 옆으로 보는데 이형기는 여전히 문고본을 읽고 있었다. 강우식은 "책 읽고 있는 모습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겠는가?" 하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한국측 시인들은 그날 타이페이에 무사히 도착했고, 여장을 풀고 이곳저곳의 초청행사에 참석하기도 하며 며칠을 보낸 어느 날이었다. 이형기가 강우식에게 다가가 "강형, 자유시간도 좀 있는데 우리 서점 구경 안 갈래요?"하고 다그치더라는 것이다. 강우식은 그 말에 쾌히 승낙하고 타이페이 중심가에 있는 서점으로 동행했다. 그 서점에서 강우식은 갖고 싶었던 책 한 권을 들었는데 그 책은 <산해경(山海經)> 이었다. <산해경>은 중국 고대 전적중 가장 독특한 품격을 지닌 책으로 옛부터 '기서(奇書)'의 하나로 일컬어지던 책이었다. 이 책 속에는 중국의 고대지리, 역사, 신화, 민족, 동물, 식물, 광산, 의약, 종교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한자(漢字)로는 3만 1천여자밖에 쓰여져 있지 않는 작은 책이다. 강우식은 이 <산해경>을 이형기와 같이 사들고 나온다는 것이 흐뭇하고 뿌듯한 느낌이 더 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타이페이에서 귀국하는 길에 일행은 동경에서 2박할 예정으로 우에노공원 근처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다. 거기서 초저녁부터 문인들이 고스톱판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이 고스톱판은 여행 중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중화민국돈, 일본돈, 달러, 한국돈이 뒤섞일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환율대로 계산하여 판이 끝날 때마다 주고 받는 게임이 되었다. 그날 밤 강우식이 판돈을 싹쓸이 했고, 이형기를 비롯한 시인들은 수리치 잎사귀 씹는 맛을 다시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스톱으로 밤샘을 한 그 다음날 아침, 일행들은 동경시내 관광을 떠나고 강우식은 여관방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간다(神田) 고서점' 거리로 나갔다. 당시 강우식은 시인 이우석이 경영하던 '문학예술사'에 몸 담고 있던 때라 출판 자료를 찾아볼 심산이었다. 흔히들 '간다'를 고서점 거리라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딱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를 읽지 않은 일본의 전후세대가 없다 할 정도로 일본 젊은이들이 들어가 일하고 싶은 직장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와나미 서점'등 출판사들이 있고 대형서점들이 즐비한 동경의 명물 거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간다'의 대형서점 3층에서 강우식은 놀랍게도 이형기와 맞닥뜨린 것이다. 이형기는 동경의 시내 관광을 포기하고 책 관광을 온 것이었다. 오늘날 동경의 인구를 1천 2백만이라고들 한다. 1천 2백만의 거대한 도시에서 약속도 없이 아침에 헤어진 사람을 한 장소에서 만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우식은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참으로 당연한 일을 당연 밖에서 해석하고자 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강우식의 기억을 찾아가 보기로 하자. 1970년대 이후 강우식은 박재삼과 더불어 답십리에 살았는데 이런 저런 관계로 50년대 시인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신년 하례식 때면 문단의 어른이시던 서정주, 황순원, 선생댁에 세배를 우루루 몰려서 가는 것이 상례가 되었었다. 두 분 선생께 세배가 끝나면 그 다음 집합 장소는 이형기의 집이었다. 이형기의 일가 중에서 진주에 사는 사람은 사촌 형제가 세 사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 돌아간 이원부 시인을 제외하고 세 사람이다. 필자가 1968년 진주에 내려올 때 어디서 만났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형기 시인이 "진주에 가거든 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하고 있는 이창호 선생께 가서 인사를 드려요. 진주 유지니까, 많은 도움이 될 거요"하는 것이었다. 진주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자리잡은 필자는 동성동의 당시 MBC빌딩에 있었던 상공회의소 사무실을 찾았다. 이 국장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 국장은 젊을 때 시를 쓰는 시인이었지만 이때는 시 쓰기를 멈추고 있었다. 이형기는 그의 숙부인 이창호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많이 접하면서 교양을 쌓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창호는 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거쳐 경남일보 전무, 진주문화원장을 몇 임기 지냈다. 하얀 피부에 단정한 차림의 신사로 언제나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형기 시인의 일가 중에서는 필자로서는 고 이원부(李源夫)시인과의 인연이 크게 닿았다. 이원부는 이형기의 사촌 동생으로서 문산읍에 있는 '세화택시'의 전무였다. 당시 문산읍에 있던 진양고등학교 국어교사 김영화 시인(작고)의 소개로 이원부를 알게 되었는데, 이형기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지내게 되면서 의외에도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하루는 습작 뭉치를 들고 와서는 좀 살펴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깐깐한 성격답게 군말이나 수사적 비유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시였다. 어떤 격(格)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 무렵(80년대)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타의 시인들에 비겨 떨어지는 작품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필자가 주간으로 발행하던 [문예정신](발행인 최용호. 진주상호신용금고에서 출연)에 신인으로 데뷔를 시켰다. 그런 뒤 이원부는 묵묵히 작품을 썼고, 진주문인협회와 경남문인협회에 가입하여 회원으 로 성실히 활동을 했다.'세화택시'를 그만 두고 나서 그는 폐에 이상이 오고 점점 쇠약해 갔다. 마침 그가 천주교 신자로서 필자와 같은 교회(봉곡동 성당)에 다녔는데, 미사가 끝나면 근처 다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숨이 사위어 가는 것이 눈에 띄는 그의 그런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는 신을 이야기하고 시를 이야기하고, 시의 절정기에 있는 이형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원부(프란치스꼬)는 결국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천국에 갔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은 그가 남긴 시집 한 권 분량의 작품들이 다른 유품들과 함께 소실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형기는 동생을 바라보는 눈이 늘 대견하다는 듯이 "시 활동 잘해?" 라 말했고, 필자에게 "잘 챙겨 줘요"하고 당부하곤 했다. 이원부의 아랫동서인 송천종(경상대 시설과, 율리아노)은 "형님은 대쪽 성품에 지나치게 완고했고, 글만 쓰고 있었던 분"이라고 이원부의 단면을 회상했다. 그리고 "형님은 이형기 형을 집안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수시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형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월간 [현대시]의 원구식 주간은 "이형기 선생과는 만나면 술이었지요. 술 실력은 소주 3병 정도는 되었어요. 술 마실 때는 늘 친구같이 대해 주었기 때문에 속에 있는 말을 여과 없이 뱉어내기도 했어요." 그렇게 말한 원구식은 이형기와의 약속에 대해 들려주었다. "원형, 내 재산은 탈탈 털고 나면 3억 정도가 돼요. 1억은 딸 시집보내는 데 쓰고, 1억은 아내에게 주고, 남은 1억으로는 '이형기문학상'을 만들면 싶은데 그 일을 원형이 해 줘요"하더라는 것이다. 얼떨결에 "선생님 그렇게 하죠. 상을 제정해야 되지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지요."말하고 원구식이 이형기에게 약속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형기는 시간이 나면 월간 '현대시'에 들러 원구식 주간과 자주 술을 마셨다. 그러던 중에 '이형기 문학상' 제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급기야 원구식이 제정해 드리겠다고 구두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형기 시인이 별세한 뒤 부인 조은숙은 서재에 있던 일체의 책을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했고 책을 제외한 일체의 유품은 '현대시'에 보내 그 처리를 부탁했다. 이 유품은 한 대의 차량에 적재되어 북가좌동 현대시 사무실에 전달되었다. 유품 속에는 원고, 편지, 상패 등과 시인이 생전에 지니고 있었던 생활용품 등이 들어 있었다. 원구식은 이 유품이 가장 바람직한 자리에 전시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형기 선생은 한국시인협회 재건을 위해 특별히 힘을 많이 쓰신 분인데, 2년 임기 중 1년차를 보낸 뒤 쓰러지셨던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이 선생은 등산을 많이 했기 때문에 실질로는 몸의 근육질이 단단하여 장수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하여 생각보다 일찍 돌아간 것에 대해 허전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다음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오세영은 이형기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94년 3월 12일 이형기가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임원진을 구성한 내용을 보면 이 점이 드러난다. 평의원 (전임 회장)으로는 조병화, 김남조, 김춘수, 김종길, 홍윤숙, 김광림 등이 당연직이었고 심의위원장에 성찬경, 기획위원장에 박재삼, 상임위원장에 오세영 등의 이름이 보인다. 시인협회의 골격으로 보면 사두체제(四頭體制)다. 회장과 부회장격인 심의위원장, 기획위원장, 상임위원장이 그 사두(四頭)이다. 그런데 임원진에서 1950년대의 숲을 헤치고 1960년대 출신 시인인 오세영이 등장한 것을 눈여겨 볼 수 있다. 기라성같이 많은 60년대 출신 시인들 중에서 오세영을 왜 낙점했던 것일까? 이것은 물론 이형기와의 친소관계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던 60년대 출신들 가운데서는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세영은 이형기 회장에게 자기를 선임한 것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유로는 자기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 중에서 뽑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그 첫째였고 자기는 1995학년도부터 1년간 미국 버클리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 그 둘째였다. 이형기는 그럼 누구가 좋은지 추천해 보라고 말했는데 오세영은 T씨와 F씨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이형기는 "T씨는 시협에 대한 기여도가 없고 F씨는 문예지 주간을 임원으로 두지 않는 관례가 있어 안돼요. 오교수, 1년 후에 버클리대학에 가더라도 가는 그때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일단 상임위원장을 맡아 주는 것으로 해요"하면서 밀어부쳤다. 이형기가 대산문학상 제 1회 심사위원장이 되어 심사위원을 위촉할 때 그는 어김없이 심사위원으로 오세영을 위촉했다. 어떤 상이든지 1회 수상자의 면면이 그 상의 깊이나 격을 결정해 주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이형기와 오세영은 대산문학상 제1회 수상자의 잣대위에 고은(高銀)을 올렸다. 그러고 난 뒤 제2회 수상자로는 이형기가 뽑혔다. 재미 있는 일은 수상자 두 사람이 다 미당(未堂) 서정주의 천(薦)에 의해 문단에 데뷔했다는 것이다. 이 두 시인의 시는 한 분의 스승 밑에서 서로 다른 개성으로 달려가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형기가 도달했던 '허무'에 대해 이형기는 <나의 시, 나의 시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기억에 오른다. "허무는 나를 절망케 하지만 동시에 나를 꿈꾸게 한다. 허무는 별들이 거기서 죽고 거기서 태어나는 블랙홀이다. 허무는 은총이고 제기랄이다." 이형기의 동국대학교 제자 중에 시인, 평론가 허혜정이 있다. 허혜정은 1966년 진주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서울로 갔다. 허혜정의 할아버지는 산청출신으로 진주에서 교직생활을 했고 아버지 허천택 교수는 동국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정년을 했고 동 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허천택 교수의 진주고등학교 동기(26회)로는 허유(시인, 전 투자신탁 사장), 고영근(전 서울대 교수), 권해병(전 경북대 교수), 김영민(전 서울대 교수), 이동녕(전 서울대 교수), 오철한(전 서울대 교수), 박중경(전 진주중 총동창회장) 등의 면면을 들 수 있다.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진주 비봉산 아래 돌공장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은 변창희 선생(전 단성고 교장 당시 진주사범 국어교사)댁이었다. 안골목으로 들어가면 허혜정의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당시 허혜정의 아버지 허천택은 필자보다 5회나 선배가 되어 만날 수는 없었고 필자보다 두 해 아래였던 허혜정의 작은 아버지 허응택과는 친하게 지냈다. 어쨌거나 허혜정이 그 골목에서 세살까지 살았다 하니까 그 골목과 그 골목을 지나가던 그의 할아버지의 근엄했던 풍모가 잠시 떠올랐다. 인연의 고리는 이렇게 약간씩 비켜서는 것이면서도 어느 시간대에서는 하나의 물결에서 함께 뜨는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허혜정은 1994년 월간 '현대시'에 신인 평론으로 데뷔한 데 이어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었다. 이후 시도 쓰고 평론도 쓰는 2개 장르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형기가 부산 경성대학에서 동국대 교수로 전출해 갔을 때 허혜정은 학부 2학년 학생이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현대시를 전공하면서 이형기의 지도를 받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서도 지도교수는 이형기였다. 그런데 과정 중에 이형기가 정년을 맞이하게 되어 허혜정의 학위논문 지도교수가 공백이 되었다. 허혜정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정을 딱하게 여긴 홍신선(시인, 동국대 교수)교수가 주선을 하여 퇴임한 이형기를 허혜정의 지도교수로 그대로 유효하게 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정년한 교수를 학위논문 지도교수가 되게 한 경우는 이형기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허혜정은 "선생님은 연구실에서 늘 글을 쓰셨고, 문학청년 같은 패기를 잃지 않으셨어요. 댁으로 제자들이 몰려가면 밤 12시까지 술을 마셔도 짜증내지 않고 받아주셨지요. 병상에 있으신지 13년 동안에 많이 적막하셨고, 댁에 방문하면 휠체어에 앉아 계셨고 무릎에다 담요를 덮고 맞아 주셨어요. 대화는 언제나 세속적인 것은 피하셨고 문학 이야기만 진지하게 하셨지요." 허혜정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이형기의 대학 재임 중 이형기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허혜정이 유일하다는 데 있다. 허혜정의 논문은 <한국 근대 낭만주의 시와 불교적 정서 연구>인데 심사위원장에는 서울대 오세영 교수가 맡았다. 허혜정은 말했다. "선생님께서 쓰러지신 뒤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시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부축하여 동숭동 수여식장까지 갔지요. 선생님께서 빨리 회복이 되지 않아 1996년쯤일 거예요. 중국으로 치료를 위해 떠나셨는데 그날 공항은 참으로 매서운 추위로 꽁꽁 얼어붙을 때였어요. 추위와 눈물이 하나로 엉겨 떨어지지 않는… 중국에서 수개월 지난 뒤에 선생님은 시 한웅큼 써가지고 돌아오셨지요. 이때의 원고는 제가 정리하고 뒤에 실린 '아포리즘'도 발췌 정리하여 1997년 시집 '절벽'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형기는 생전의 최종 시집인 '절벽'이후에도 병상에서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적 투혼의 불사름이라 할까. 정리를 하면 한 권의 유고시집이 될 분량이라 한다. '절벽' 다음이니까 시집 이름은 '낙하 落下'가 어떨까. 월간 [현대시] 발행인 원구식 시인은 이형기에게 약속한 '이형기문학상' 제정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리에서 결심하고, 또 추진하게 되었다.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하 시사사라 줄여 부름)을 창간한 몇 년 뒤 '시사사' 임원회의(회장 고석종) 자리에서 원구식의 이형기와의 문학상 약속 이야기를 들은 임원들은 이 상의 추진체를 '시사사'로 한다는 것과 당장 2006년부터 시상한다는 데 전격 동의하였다. 그 회의의 시점이 2006년 2월 17일이었다. 이로부터 여러 차례 회의를 열어 진행 과정에 관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시상금과 부대 예산 마련을 위한 실현 가능한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형기문학상의 전말을 기록하는 무크지 [시인의 눈](제2집, 2006. 6. 20) 권두언인 <이형기문학상 제정에 붙여>의 한 대목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대단히 겸손한 마음으로 이형기문학상이 제정되었음을 세상에 알립니다. 이 문학상은 비평 부재의 시대에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는 시집들을 수십 명의 시인들이 직접 읽고 평가하는 획기적인 기획입니다. 올해 처음 시행되는 이 기획은 그 준비 기간이 짧아 미숙하고 분석 결과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시인의 눈'이 갖고 있는 뉴 프론티어 정신은 충분히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형기문학상이 기존의 문학상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게 기획되고 시상되는 것임을 매우 의욕적으로 밝히고 있다. 제1회 이형기문학상의 수상 대상 시집은 지난 1년간 출간된 시집들 중 격월간 시전문지 '시사사'의 한 코너인 <시집 속의 시 읽기>(2005년 3, 4호에서 2006년 1, 2호까지 1년분)에 수록되었던 53권의 시집이었다. '시사사'로 등단한 시인 20명이 53권의 시집을 모두 읽고,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예심의 단계를 거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나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집 50권을 구입하기 위해선 권당 6천원으로 잡으면 한 예심위원당 30만원이라는 돈이 들어가며 20명의 위원들이 구입할 시 600만원의 지출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시사사' 회원들이 힘을 모아 예심위원들에게 시집 구입비를 후원해 주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예심위원들은 3월 한달 동안 시집 53권을 모두 읽었고, 10점을 만점으로 한 점수표를 꼼꼼히 작성했던 것이다. 4월 10일경이 되어서야 점수표와 예심평이 나오게 되었는데 합산하여 상위 점수를 얻은 10권의 시집이 본심 대상으로 오르게 되었다. 10권은 다음과 같았다. 고영,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김기택, '소'/ 김명인, '파문'/ 김신용, '환상통'/ 맹문재, '책이 무거운 이유'/ 박진성, '목숨'/ 오세영,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소'/ 이재무, '푸른 고집'/ 천양희, '너무 많은 입'/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 '시사사'는 본심 심사위원으로 이승훈(한양대 교수), 강희근(경상대 교수), 원구식(현대시 발행인), 정과리(연세대 교수), 허혜정(동국대 교수)을 위촉하고 예심 채점표와 상기 10권의 시집 명단을 건넸다. 5월 3일 심사위원들은 '시사사' 사무실에 모여 열띤 토론 끝에 수상 대상자로 김명인(고려대 교수)시인을 최종 낙점했다. 수상 시집은 '파문'이었다. 제1회 이형기문학상은 이런 절차와 과정을 겪어 수상자가 결정이 된 것이다. 상을 주는 '시사사'나 상을 받는 수상자나 가장 공정하여 하늘처럼 떳떳했던 것이라 할 만했다. 본 연재 12회에 이형기의 제자 허혜정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썼었다. 이 내용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것을 허교수가 읽었다고, 감사하다고 어제 오후 전화를 해왔다. 전화 내용은 이렇다. "12회 연재분을 대량 복사해서 집안에 다 돌렸지요. 작은 할아버지도 보시고, 아버지 (허천택 전 동국대 부총장)도 보시고, 그리고 강선생님께서 아시는 저희 작은 아버지(허응택)도 보셨지요. 다들 진주와의 인연을 두고 깊은 감회에 젖으시더라구요. 작은 할아버지의 함자가 외자로 '명'자신데요, 경남일보에 한때 논설위원으로 계셨다고 하시더군요." 필자는 허교수의 작은 할아버지가 허명(許銘)선생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이분은 우리가 어릴 때 진주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분이지만 능력이나 지식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재라고 알려져 있었고 또 그 이야기가 아직 필자의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허혜정의 말에 따라 허명 선생이 경남일보에 언제 관여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경남일보 역사에 가장 밝은 장일영(전 편집부국장) 진주예술재단 부이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장부이사장은 "그 분은 1966년 3월부터 1969년 2월까지 경남일보 논설위원을 지냈습니다" 하고 명쾌히 밝혀 주었다. 그 다음으로 진주예술재단 최용호 이사장에게 이형기와 '허완-허천택-허혜정' 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최용호는 허씨 일문이 명문가라고 말하고 그 집안이 원래 산청 신안면과 신등면의 경계지점인 용흥리에 있었다고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 허혜정의 아버지 허천택 교수와 고모 허옥란에 대해 이야기했다. "허옥란은 진주 사범학고 다닐 때 진주시내 고등학생 문학 써클이었던 '청천' 동인으로 활동했어요, 서울로 가 교편생활을 하다가 일찍 그만 둔 걸로 기억되는데, 문재가 뛰어났었지만 졸업 후 글쓰기를 이어가지 못했어요." 필자는 허옥란의 이야기에 이르러서 진주시내 고등학생들이 문학 활동을 활발히 했던 시기는 1950년대 후반기라는 점에 유의하게 되었다. 촉석루도 타버리고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시기였으므로 오히려 청년 학생들이 문학에 열정을 쉽게 쏟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청천'과 '영화' 두 개의 동인회로 분화되어 있었지만 멤버는 무시로 넘나들었었다. 이 세대는 1940년대 말에서부터 1950년대 초반에 이르는 이형기 세대 내지 정서를 후속으로 따르는 부류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최용호가 기억해낸 '청천' 멤버들을 학교별로 보자. 진주고등학교 학생으로 서정훈(전 진주 시장), 유충림(전 중등 교장), 김호영(시인, 작고), 허일만, 강동주(시인), 조종명(시인), 고재곤(시인), 강영구(전 MBC 보도본부장) 등이었고 진주사범학교 학생으로 허옥란(허혜정의 고모), 황경자, 박재창(작고, 전 대아고 교사), 김인순, 김안자, 조오현, 박종술, 이문형, 정정자(전 검찰총장 정구영의 동생), 손상철(전 여의도고교 교장), 유부웅, 강남구(소설가) 등이었고, 진주농고 학생으로 최용호(전 진주 MBC 이사), 박형수(종화스님), 김용철, 김원조, 김판용(전 동명고) 등이었고, 진주여고 학생으로 김정희, 이월수(작고, 시인), 남혜자, 김명자(필명 지연, 현 한국여류 문학인회 회장), 강은옥 등이었다. 이들 문청(文靑)들은 이형기나 최계락 그리고 박재삼이라는 선배 문인들과 손이 닿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가까이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필자의 진주고등학교 동기 중에서는 김재섭이나 이구용이 이들 [청천]이나 [영화] 동인에 일찍이 턱걸이로 가담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숫기가 많아 이들 뒤꽁무니에 따라다닐 엄두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멤버들보다 3, 4년 후배류에 속하여서 마땅히 거리를 두고 있을 밖에 없었다. 최용호나 박재창, 서정훈, 허옥란이 그룹을 지어 다닐 무렵에 정재필이나 성종화, 강석호, 김영화, 손상철 등이 외곽으로 돌면서 진주 학생문단의 또 다른 자장(磁場)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의 이런 숙성한 풍토는 어디서 온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개천 예술제의 영향이다. 제1회 예술제의 수상자가 이형기, 박재삼이었고. 이를 따라서 진주의 문청들이 줄줄이 별처럼 솟아올랐던 것이다. 강희근(경상대 교수)[경남일보](2008. 1. 14∼4. 8) ------------------------------------- <아름다운 뒷모습 남기고…원로시인 이형기씨 별세> - [동아일보](2005. 2. 2)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 <낙화(落花)>로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 이형기(李炯基) 씨가 2일 오전 10시 20분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 1933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국대 문리대를 졸업한 뒤 동양통신 서울신문 대한일보 기자, 국제신문 편집국장, 동국대 교수,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고인은 16세 되던 1949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해 천재 시인으로 불렸으며, 이후 줄곧 시단의 중심적 위치를 지켜 왔다. 생전에 그는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시의 덫에 걸렸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정치부 기자 생활도 오래 하고 편집국장까지 지내면서 정계 진출의 유혹도 많이 받았지만, 그 ‘덫’ 때문에 늘 그런 대열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게 되었다”고 털어놨다. 시인과 정치가 모두 현실개조의 의욕을 갖고 있지만 뜯어고친 현실도 또다시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인의 삶은 정치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고인은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시집 <적막강산> <심야의 일기예보> <절벽> 비평집 <감성의 논리> <한국문학의 반생> 등 20여 권의 책을 냈다. 그의 시들은 <낙화>에서 보듯 아름답게 사라져가는 소멸의 미학을 특유의 반어법으로 표현해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사회학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득도하지 않기 위해 구도하고, 구원에 이르러 안주하지 않기 위해 구원을 갈구한다”고 했던 고인은 “변하고 소멸하는 것을 인정하고 처절히 절망한 후에야 인간에게 본질적 자유가 주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은 11년 전 뇌중풍으로 쓰러진 뒤에도 아내의 도움을 받아 구술 시작(詩作)을 했을 정도로 시혼(詩魂)을 불살랐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은숙씨(68)와 딸 여경 씨, 사위 김태윤 씨(한국와이어스 대리)가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는 4일 오전 9시 서울 도봉구 방학동성당에서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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