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혹성, 베이징
사스 확산으로 시민 불안감 극한에 달해… 사재기·유언비어·격리로부터의 탈출 등 대혼란
베이징에선 지금 공포영화가 상영 중이다. 베이징 시민 전체와 외국인들이 주인공이다. 보이지 않는 괴물 ‘사스 바이러스’가 출현해 베이징을 집어삼키고 있다. 지독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던 시민들은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유행한 공상과학(SF) 공포영화 <혹성탈출>을 보고 있는 듯하다.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엔 연일 고향으로 돌아가는 학생들과 외지인들이 줄을 잇고, 베이징 수도공항에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외국인들이 밀려들고 있다. 4월20일 베이징시가 사스와의 ‘전면전’을 시작하면서부터 환자들이 날마다 100여명씩 불어나고 있다. 4월24일 베이징의 사스환자가 700여명을 넘었다. 사스의심환자는 800여명을 웃돈다. 그동안 사스환자의 수를 속여왔다는 국제적 비난을 받은 중국 정부가 4월20일
국민에게 정보를 공개했지만, 베이징 시민들은 여전히 불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 발표 수에 곱하기 2, 곱하기 4를 해야 정확한 수일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집단 출국과 귀향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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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난 4월25일 베이징대학 인민병원에 격리된 사스의심환자들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중국 정부의 강제 격리는 또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AP연합)
개혁·개방 이후 대외적 이미지를
중시한 중국 정부는 중국이 세계적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신용사회’가 돼야 한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지난해 대입시험에서는 ‘신용’에 대한 논술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사스 공포는 정부의 노력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지난해 11월 최초로 발견된 사스환자에 대해 미온적 대처를 하고, 지난 2월 광저우의 사스 공황사태를 방치한 결과가 중국의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중국인들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중국 지도자가 재앙을 불러온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허베이성에서 온 장아무개(30)씨는 “장쩌민이 주석이 되자 중국에
홍수와 가뭄이 들더니, 후진타오는 전염병 재앙을 몰고왔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는 중국 언론은 결코 국민의 속내를 드러내주지 못한다.
요즘 대다수 일간지 머리기사는 사스 이야기로 도배되지만, 어느 신문이나 정부의 발표를 똑같이 베끼고 있다. 베이징 시민들의 불안감이나 정부에 대한 불신을 보도하는
언론은 찾아볼 수 없다. ‘CCTV를 보는 것보다 택시기사의 말을 믿으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래서 중국 사회는 ‘유언비어 통신’이 난무한다.
4월23일 베이징 시내의 사스환자 지정병원은 환자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환자들을 베이징 외곽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환자 1명이 탈출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두려움을
느낀 많은 시민들이 칩거에 들어가기도 했다. 또 내몽골에서 오던 기차에서 사스의심환자 4명이 격리 조치에 두려움을 느껴 베이징 외곽에서 기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
도망쳤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런 소문과 함께 기차 운행이 중단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외지인들이 서둘러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또 세계보건기구(WHO)가 중국 지역으로의 여행을 금지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곧 공항이 폐쇄될 것이라는 극단적 소문까지 돌자 외국인들의 집단 출국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이런 흉흉한 소문은 시민들의 ‘사재기’로 이어졌다. 사스환자가 탈출했다는 소문이
나자 식료품과 위생용품 사재기를 시작한 것이다. 슈퍼마켓마다 잔뜩 쌓인 휴지·라면·달걀 등이 동이 났다. 중국 라면보다 값이 비싸 늘 진열대에 수북이 쌓여 있던 ‘신라면’조차 찾아볼 수 없다. 식초와 소독약, 반란건, 예방 탕약 등이 동이 난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앞다퉈 예방약이라 알려진 ‘반란건’, ‘중약’ 등을 찾아보지만 속수무책이다. 소독하려고 해도 소독약을 구할 수 없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런 와중에 또 가짜 반란건, 가짜 탕약, 불량 마스크가 등장해 한몫을 챙기려는 사기꾼이 판을 친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예방만이 살길이라고 해놓고
예방책을 마련할 수 없으니 일단 챙기고 보자는 심리가 사재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병원에 가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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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베이징 수도공항에서 마스크를 쓴 채 수속을 밟고 있는 승객들.
외국인들의 탈출 러시가 줄을 잇고
있다.(SYGMA)
소독약과 반란건이 동이 난 약국에서는 여전히 판매원들의 손길이 바쁘다. ‘소독약 있어요’라는 물음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약국 밖까지
늘어선 인파를 상대로 마스크를 파느라 열을 올리고 있다. 사스 위기로
전 산업이 마비된 상황에서 유독 제약업계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중국 정부는 사스 확산을 국민의 무지로 돌리는 측면이 있다. 전염병 환자 격리를 무시한 무지가 사스의 확대를 불러왔다고 보고 국민 의식을 계몽하는 활동에 나섰다. 학교·관공서·회사·아파트 단지에 4월 중순부터 벽보가 나붙고, 책자가 발간되면서
거대한 홍보활동이 시작됐다. 그러나 국민은 정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지하지 않다.
오히려 눈치가 빠르다고 할 수 있다.
홍콩·광저우·베이징 등 감염지역에서 초기 발생 환자들은 대다수가 의료진들이었다. 평소 중국의 일반 병원을 가보면 낙후된 의료시설은 물론 비위생적인 병원 내 환경에서도 안전불감증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감기환자를 진찰하면서도 마스크를 끼고
있는 의사는 거의 없다. 중국은 전염병 전문병원이 성마다 있을 정도로 전염병이 많은
곳이다. 그럼에도 의료진들이 가장 먼저 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은 의료체계의 허술함 외에는 다른 변명을 찾을 수 없다.
사스 상륙소식이 전해지면서 베이징 시민들 사이에선 ‘병원에 가면 죽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고열증세를 보여도 병원에 가기보다는 약국에서 해열제를 사다 먹거나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고 있다. 때문에 사스는 집안식구 전체를 감염시키기도 했다. 베이징에서 죽은 사스환자 대부분이 쓰러지고 나서야 병원에 옮겨졌다. 이들이 의료체계를 신뢰했다면 이상증세를 보였을 때 스스로 병원을 찾았을 것이다.
일단 감염환자는 격리시키고 보자는 정부의 태도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4월23일 중국 정부는 ‘전염병 방지법 제24, 25, 35조’에 따라 사스 감염환자·의심환자·감염자 발생 장소에 대해 철저한 격리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베이징에서 가장 위험지역으로 떠오른 중관춘(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림)과 차오양취의 한 지역은 유동인구가 급격히 줄었다. 사스환자가 다량으로 발생한 교통대학은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학생들도 외출을 금지당했다. 중의대와 연합대도 교문을 걸어 잠근 채
학생들의 외출을 금지했다.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 취급을 하고 있다는 비난이 터져나온다.
심지어 정부는 이 격리조치를 위반했을 경우 공안기관의 협조로 강제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일단 사스환자가 발생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잠정적 죄수가 돼야 하는 실정이다. 사스환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갇혀 있어야 하는 많은 비감염자들에게 격리에 따른 공포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비인간적 격리는 곧 ‘탈출’이란 행동으로 이어진다. 사스로 의심되는 환자들이 기차에서 탈출했다는 소문을 단순한 유언비어로 흘려버릴 수만은 없는 것이다.
허술한 의료체계와 관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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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군병원의 직원과 군인들이
방호복을 입고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SYGMA)
사스환자의 경우는 더하다. 의료진의 태도 어디에서도 인권존중 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베이징 서역에서
지난 4월 초 사스환자가 발생했을
때 응급차가 달려와 이 환자를 이불에 둘둘 말아서 차에 싣고 갔다. 또
이달 초 몇몇 병원은 세계보건기구
조사관의 조사를 피하기 위해 환자들을 봉고차에 실어 베이징 외곽을
‘드라이브’시키는 행태를 보였다. 격리병동에서 지내는 중증환자들의 실태는 처절하다. 이중유리에 갇혀 마스크를 쓴 채 고립된 생활을 해야만 한다. 가족들의 면회도
철저히 금지된다.
중국 정부는 뒤늦게 이런 격리 조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정부가 사스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선전만
요란할 뿐 시민들의 불안심리를 진정시키는 데 전혀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오랜 기간 버텨온 상명하달식 관료주의가 사스라는 복병을 만나 침몰하고 있는 순간이다.
베이징=황훈영 전문위원 kkccjjh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