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궁인,사마달] 천무혈하록 天武血河錄(3권) 21. 출룡(出龍)

[⊙햇살⊙]

천무혈하록 제3권 
검궁인·사마달 공저



21장 출룡(出龍)


①

능운도장의 안색이 일변했다.
'무량수불! 저 시주가 대체 어쩌려고......?'
그가 이처럼 걱정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명오귀의 무공은 당금 무림에서 절정급에 속했다. 각 개인의 무공도 그렇지만 특히 그들의 합공은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어 받아낼만한 고수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영호걸의 신위는 미리 보아서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상으로 보아 염려를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 무모한 용기로 인해 다치지는 않을른지.......'
이때, 남명오귀가 일제히 공세를 떨쳐냈다.
"미친 애송이놈! 받아랏--!"
그들은 어느 틈엔가 무기를 내던진 채 육장(肉掌)으로 몰아쳐 오고 있었다. 다섯 명의 합격인지라 내공의 우위를 자신했던 것이다.
쉬이익! 쉬쉭! 
과연 그들 오 인이 쏟아내는 장세는 어마어마했다. 흡사 태풍과도 같은 경력이 일대 회오리를 이루며 영호걸을 덮쳐왔다.
'웃!'
영호걸은 순간적으로 전신을 조여드는 듯한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그는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전신에 공력을 끌어 올려 태극환허장법을 시전했다.
슈우욱--!
찰나지간, 사위가 어두컴컴해졌다. 그것은 영호걸의 장영이 무수히 불어나 일시적으로 태양빛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발출된 장력이 남명오귀의 장세와 충돌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쾅! 콰르르릉--!
경천동지할 폭음이 무당산역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 격돌의 반탄력으로 인해 영호걸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놀라는 빛이 은은하게 떠올랐다. 
'왜 남명오귀의 합공이 왜 유명한지 이제야 알겠군.'
반면에 남명오귀는 하나같이 만면에 수치감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기대대로라면 영호걸은 이 일장의 충돌로 인해 마땅히 피떡이 되어 나뒹굴어야 했다. 그런데 여전히 멀쩡한 얼굴로 자신들과 팽팽하게 대치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남명오귀는 저마다 이를 악물어야 했다.
'괴물같은 놈!'
동시에 그들은 또 다시 쌍장을 뻗어냈다.
쉬익! 쉬쉬쉭--!
파공성을 귀에 접한 영호걸도 재빨리 쌍장을 휘둘렀다.
슈우욱--! 콰콰쾅--!
이번에도 역시 영호걸은 강력한 반탄력에 의해 몇 걸음 물러나야 했다. 그러기를 약 칠, 팔 초 가량.......
"흐흐... 마지막이닷!"
남명오귀의 신형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울러 그들은 허공에 뜬 자세 그대로 영호걸을 향해 쌍장을 내리 찍었다.
슈우우욱--!
가공할 장세가 영호걸의 정수리로 퍼부어졌다.
"아! 위험......!"
능운도장 등은 보다 못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영준하고 의기가 높았던 한 청년이 뇌수가 터져 죽는 장면을 도저히 그대로 바라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영호걸의 눈이 번쩍 이채를 발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명공살강!"
그의 전신에서 짙은 청색의 기류가 발산되어 사방으로 뻗쳤다. 아울러 그것은 남명오귀의 강맹한 장력과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현상이 도래했다. 영호걸을 덮쳐오던 무시무시한 장세가 거짓말처럼 소리도 없이 스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흡사 폐부가 찢겨 나가는 듯한 비명성이었다.
"으헉! 크으으윽--!"
중인들은 대경실색 했다.
"아! 저럴 수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란 그야말로 환상과도 같았다. 남명오귀의 신형이 허공에서 잠시 멈칫거리더니 믿을 수 없게도 스르르 분말로 화해 흩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명공살강의 놀라운 위력이었다. 능운도장 등은 아예 넋을 잃은 듯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영호걸조차도 이런 결과에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의 몸이 일순 가벼운 전율을 보인 것도 이때문이었다. 
아무튼 그가 보인 가공할 신위는 즉각적인 효력을 나타냈다. 
"가, 가자!"
졸지에 우두머리를 잃게 된 청의대한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일거에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 버렸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무당산역은 다시 이전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이로 인해 정신을 수습하게 된 능운도장이 영호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합장배례했다.
"무량수불... 감사하오이다, 시주." 
오랫동안 속(俗)을 잊고 살아와 유난히 청정한 자존심으로 무장되어 있는 능운도장이었다. 그가 이렇듯 누구에게 허리를 굽히는 일이란 웬만해서는 흔치 않은 현상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이제 약관에 이른 청년으로서 세속의 연배로 따지자면 고작해야 그의 증손자뻘 밖에 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능운도장의 음성은 격동으로 인해 다소 떨려 나왔다. 
"시주 덕분에 본파는 위기를 넘겼소이다. 빈도가 무능하여 자칫 조사전의 위명에 먹칠을 하고 천추의 한을 남길 뻔 했거늘......."
영호걸은 정중히 포권하며 답했다.
"별 말씀을... 너무 그러시면 소생이 되려 민망합니다."
그의 겸양은 능운도장의 심중에 또 한 번의 파동을 선사했다. 무공은 둘째 치고 평생 도에 전념해온 이 노도장은 아무래도 인간에 대한 판단 기준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능운도장은 가공할 무위를 보여 주던 영호걸보다 일개 청년으로 돌아와 마주 허리를 숙이는 그가 더 마음에 들었다. 비로소 대기(大器)를 인정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으음, 이 청년이야말로 도탄에 빠진 무림을 구해 낼 재목이다. 난세에 한 가닥 서광이 비치는 것 같구나. 이런 기재가 받쳐 주는 한 무림의 앞날은 건재하리라.'
능운도장이 이처럼 감탄해마지 않을 때였다. 산 아래 쪽에서 장청미와 송학도장의 모습이 보였다. 이어 그들은 나는 듯이 격전이 마무리 지어진 현장으로 올라왔다.
장청미가 주위를 훑어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끔찍하군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던 모양인데......."
도처에 널린 주검들이 그녀로 하여금 은은히 구토가 일게 만든 것이었다. 무공은 열심히 익혔으되 태어나서 줄곧 잠룡도에서만 지내오던 그녀는 아직 이런 상황에 익숙치가 않았다. 
영호걸이 그런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 무림을 질타할 여협(女俠)처럼 굴더니, 그 가상하던 용기는 다 어디로 갔지?"
"그, 그거야......."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며 곁에 있던 송학도장이 빙그레 웃었다. 왜냐하면 그만이 이 자리에서 영호걸의 말뜻을 알아 듣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송학도장은 능운도장의 앞에 가 합장했다.
"장문사존께 아룁니다."
그는 무당산 밖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소상하게 보고했다. 물론 그 내용이란 영호걸의 무용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송학도장의 얘기가 끝나자 능운도장은 새삼 영호걸을 돌아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역시 감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정녕 어찌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시주의 은혜가 안팎으로 두루 미쳤으니......."
영호걸은 담담히 대꾸했다.
"은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소생은 단지 무림의 동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소생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초지일관하는 그의 인품은 능운도장과 송학도장을 동시에 감복시켰다. 그러다 문득 능운도장이 생각난 듯 말했다.
"허어! 이것 참, 빈도가 오늘은 연신 실책만 범하고 있구려. 귀빈을 이렇게 오랫동안 밖에 세워 두다니......."
그는 송학도장에게 주변 정리를 당부한 후 몸을 돌렸다. 
"자, 이곳은 어수선하니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앞장선 그의 발걸음은 역대에 걸쳐 무당 장문인의 거처인 상청관(上淸觀)으로 향하고 있었다.


②

별실(別室).
이곳은 무당 장문인의 청수(淸修)를 지키는 상청관 내에서도 특별한 빈객들을 맞기 위해 따로 마련된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집기 등을 위시하여 전체적으로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단향목으로 짜여진 낮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가운데 두고 능운도장과 영호걸이 마주앉아 있었다.
그윽한 향차(香茶)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를 더욱 청정하게 가다듬어 주었다. 능운도장이 찻잔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실례지만 소협의 사문은 어떻게 되시오?"
영호걸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잠시 능운도장을 응시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대답을 대신한 듯 품 속에서 금필을 꺼내 보였다.
그것을 본 능운도장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천절금혼필!"
그는 흡사 신음처럼 부르짖더니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소협은 천유자 모용시주의 고제자(高弟子)셨소?"
영호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무량수불...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소협의 기도가 남다르다 싶더니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구려."
능운도장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녕 본파는 귀문(貴門)의 신세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이대에 걸쳐 같은 인연으로 만나게 되다니......."
영호걸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천절금혼필을 바라보는 능운도장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이어 그는 깊은 감회가 깃든 어투로 한 가지 일화를 들려 주었다.
"지금부터 육십 년 전의 일이었소. 당시 빈도는 진령산 부근에서 수행 중이었는데, 모종의 사건을 만나 사경에 이르게 되었소이다. 그때에 빈도를 구해 주신 분이 바로 천유자 모용황 시주였소."
"아! 그런 일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영호걸의 말에 능운도장은 의미 깊은 웃음을 보였다.
"빈도가 알기로도 그 분 선배는 결코 공을 자랑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육십 년이 지난 오늘, 그 분의 제자인 소협을 만났더니 역시 그 맥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구려."
영호걸은 그와 마주 웃으며 천절금혼필을 도로 품 속에 넣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사부님의 인격을 흉내내 보고자 노력은 하나 아직 멀었지요."
능운도장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겸손의 말씀을......."
이어 영호걸은 안색을 달리 하더니 입술을 떼었다.
"감히 장문인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무량수불... 무엇입니까? 소협."
영호걸은 표정을 굳힌 채 사뭇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문도장께서는 혹 천성보주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아! 천성대제 유화성 시주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능운도장은 반문하고는 그리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그 분 시주는 무림에서 일성(一聖)으로 일컬어지는 만큼 대단한 영웅이오. 하지만 그 분의 협명이 강호를 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도는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소이다."
그는 말을 해 놓고 나서 문득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데 소협은 따로 묻는 의도라도 있으신지......?"
"실은 그렇습니다."
영호걸은 침중한 기색이 되어 말을 이어갔다.
"소생이 지금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디 놀라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그는 무거운 어조로 지난 날의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서두는 자신이 천유자 모용황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는데, 이는 능운도장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
영호걸의 얘기는 근 한 시진에 걸쳐 진행되었고, 최근의 일에서 끝을 맺었다. 그의 얘기가 진행되는 동안 능운도장의 표정 변화가 어떠했는지는 필설로 형용키가 힘들 정도였다.
한 젊은 영웅의 이면사(裏面史), 그 중에서도 특히 천성보에 잠입했을 때의 사건들은 그를 더 없는 충격으로 몰고 갔다. 
급기야 무당산에서 도를 닦으며 세사(世事)에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던 이 노도장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그의 심정은 경악을 지나쳐 그야말로 절망에 이르고 있었다.
"무량수불... 어찌 이런 사태가......!"
능운도장은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도저히 영호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만일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향후로 무림의 안녕은 과연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영호걸이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쓰게 웃었다.
"아마도 제 말씀을 수용하기가 힘드실 것입니다. 소생도 직접 보고 겪기 전에는 그랬으니까요."
능운도장은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무량수불... 대체 어찌 하면 좋겠소? 다른 사람도 아닌 천성보주가 만사교와 연수하고 있다면 이는 무림 전체가 만사교의 만행에 동조하는 격이 되거늘......."
영호걸 역시도 낮게 신음을 발했다.
"소생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 면입니다. 제 자신도 천성보주가 인의대협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 그리고 그의 현재 위치가 정파무림의 정신적 지주라는 사실이 가장 장애가 되었었습니다." 
능운도장은 잠시 말조차 잊은 듯 잔뜩 굳어져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호걸의 말을 의심하거나 회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성대제 유화성이 당금 무림에서 가장 숭앙받는 인물인 것은 사실이나 그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반면에 자신이 만난 천유자 모용황, 또 그 제자인 청년은 도무지 의혹의 여지가 없는 인품의 소유자들이었다. 게다가 어떤 단체를 이끄는 것이 아니므로 특별히 이권을 추구할 이유가 없다는 면에서 신뢰는 더욱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실상 천무문이 단맥(單脈)으로 이어져 내려온 이유도 여기에서 찾으면 틀리지 않았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무공을 발전시키는 것과 협행(俠行)에만 뜻을 두었던 인물들이 바로 천무문의 역대 장문인들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능운도장은 한 가지 안(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무량수불... 소협, 그렇다면 이 일은 구파일방(九派一幇)에 알려 빨리 뿌리 뽑는 게 낫지 않을까요? 천하의 정파무림 동도들에게 알려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을 보는 것이......."
영호걸의 차분한 음성이 그의 말을 끊었다.
"장문도장,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이 일은 절대로 성급하게 처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는 의아해 하는 능운도장에게 담담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안타깝게도 당금 무림은 정파의 기운이 쇠해 있습니다. 만사교가 그토록 횡행하는 것도, 천성보가 무림의 중추역을 해온 것도 따지고 보면 이때문입니다. 정통의 무맥(武脈)인 구파일방이 건재했더라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능운도장은 비로소 통탄해마지 않았다.
"무량수불... 소협의 말이 맞소이다. 우리 구파일방이 무사안일에 빠져 있었던 탓에 사태가 이 지경이 되어 버렸소."
이어 그는 한 가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물었다.
"그럼 소협의 의중은......?" 
"천성보주의 음모는 당연히 분쇄되어야 하나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 섣불리 터뜨렸다가는 오히려 유화성의 역공작에 말려들 공산이 큽니다. 그가 수십 년을 두고 천하인들의 이목을 속여 왔을 정도로 영민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능운도장은 신음을 발하더니 재촉하듯 말했다.
"그래서, 어찌 하면 좋겠소이까? 소협."
영호걸은 신중하게 말했다.
"우선 구파일방이 단결하여 힘을 비축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 가운데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가 유화성의 음모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야만 합니다."
"으음......."
능운도장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그는 영호걸의 조리있는 언변과 냉철한 판단에 그야말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내 눈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이 분 소협은 경륜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대세를 읽는 안목이 정확하며, 나이답지 않게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능력까지도 탁월하다.'
이른바 장강의 흐름도 세월의 변화에 따라 그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고 했던가? 능운도장은 그 속언을 새삼 실감하는 한편, 마주 하고 있는 청년을 눈이 부신 듯이 바라 보았다.
그를 향해 이번에는 영호걸이 물었다.
"참, 장문인께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흐음?"
"천성대제 유화성은 지난 수십 년간 무림에서 어떤 류(類)의 무공을 사용해 왔습니까?"
능운도장은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것 참! 지금 생각해 보니 우습기만 하구려. 빈도조차도 유보주의 무공내력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영호걸은 얼굴을 굳혔다.
"정말 철저하군요. 그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신의 내력을 드러내지 않고도 그토록 많은 정파무림인들의 신임을 얻을 수가 있었다니, 그가 아니고서야 대체 누가 또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능운도장도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수불... 듣고 보니 그렇구려. 빈도도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의 명성만 믿었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도 못했소이다." 
영호걸과 능운도장.
두 사람은 이어 여러가지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낸 후.
영호걸은 무당을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장문인, 소생은 이제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능운도장은 대뜸 섭섭한 기색을 보였다.
"아니, 벌써 가시려 하다니......?"
영호걸은 미소를 지었다.
"소생에게는 처리해야 할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제껏 잠잠히 있었던 것만 해도 무던한 인내가 필요했었지요."
"무량수불... 이해하오."
능운도장은 태도를 바꾸어 고개를 크게 끄덕여 줌으로써 잠룡(潛龍)의 용트림에 대한 갈채를 대신했다. 그는 진심이 담긴 기원도 잊지 않았다. 
"부디 어떤 일이든 뜻하는 대로 성취하기 바라오, 소협."
"감사합니다."
능운도장은 그래 놓고도 뭔가 아쉬웠던지 다시 말했다.
"승소협, 아니 영호소협. 소림(少林)의 장문인인 자운대사(紫雲大師)는 빈도와 각별히 마음을 터놓는 사이요. 혹시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가 상의해도 좋소. 내 미리 연락해 두리다."
그의 후의는 영호걸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파 무림의 양대 산맥인 무당과 소림이 위호해 준다면 소생, 천하의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소협, 그리고......."
영호걸은 빙그레 웃었다.
"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능운도장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품 속에서 푸른 빛을 띤 하나의 옥병을 꺼내 내밀었다.
"이것은 빈도가 천산(天山)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우연히 얻게 된 물건이오. 영청석유(靈淸石乳)지요. 소협이 베푼 은혜에 비하면 너무도 미흡하나 성의로 알고 받아 주시오."
영호걸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장문인, 은혜라는 말씀도 민망하거니와 소생에게 어찌 영청석유같은 천하의 기물(奇物)을 내놓으십니까? 소생은 앞서의 호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청컨대 도로 거두어 주십시오."
능운도장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소협, 달리 생각하지 말고 빈도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신세를 갚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빈도가 어찌 편하게 앉아 있을 수가 있겠소? 아마도 훗날 모용시주를 뵐 낯이 없어지게 될 것이외다. 또한 귀한 물건일수록 가치있게 쓰여야 되는 법, 무당산에 틀어 박혀 있는 빈도보다는 강호에 나가 활동을 벌이는 소협이 취해야 마땅하오." 
그의 완곡한 어조는 거절할 어떤 명분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영호걸도 그 말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후배, 감사히 받겠습니다."
"무량수불... 감사는 오히려 빈도가 해야지요." 
능운도장의 미소와 더불어 두 사람은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장청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했다.
"이젠 쌍두회담(雙頭會談)이 끝났나요?"
그녀의 입답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주변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영호걸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후후... 그래, 혼자 대기하고 있느라 지루하지는 않았느냐?"
"설마요? 두 분의 비중으로 미루어 틀림없이 중대사를 논의하셨을텐데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나이에 비해 사려가 깊은 것도 여전했다. 물론 그녀 특유의 치기도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곱게 찌푸리며 덧붙였다.
"전 앞으로도 두 분 틈에 끼이는 것은 사양할 작정이에요. 가뜩이나 머리도 나쁜데, 골치까지 아픈 것은 딱 질색이거든요?"
"하하하하......."
영호걸은 크게 웃은 후, 능운도장에게 포권을 했다.
"장문인,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능운도장도 합장했다.
"무량수불...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소, 소협."


③

멀리로 한 계곡(溪谷)이 보였다. 
그 양 옆으로는 깎아 지른 듯한 천애(天涯)의 절벽이 한껏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모양도 그렇지만 그 높이만도 무려 수백 장에 달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어지럼증을 유발시킬 정도였다.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림(樹林)이 빽빽하게 우거진 숲을 지나쳐야 했는데, 인적이 닿지 않아서인지 계곡이고 숲이고 모두 짙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간혹 들리는 소리라야 근처를 지나치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전부였다.
그런데 숲을 헤치며 황량한 계곡 쪽으로 향하는 두 개의 인영이 있었다.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유유히 수림 사이를 지나치고 있는 일남일녀(一男一女), 그들은 바로 영호걸과 장청미였다.
장청미가 주위를 돌아 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오라버니, 대체 왜 우리가 여기로 왔죠? 분명 이유가 있으니 이 깊은 곳까지 오게 되었을텐데......?"
영호걸은 씨익 웃었다.
"물론이다. 여하한 행위라도 이유는 다 있게 마련이니까."
장청미도 그를 따라 생긋 웃어 보였다.
"이제부턴 그 이유를 제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오라버니."
"하긴 말해주지 않으면 손톱을 세우고 덤빌지도 모르니......."
영호걸은 짐짓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빙궁(氷宮)에서의 일들이었다.
잠시 후.
얘기가 끝나자 장청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흡사 농담처럼 시작되었던 그의 말이 듣고 보니 그녀에게는 너무도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놀라워요. 인세에서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정청미는 그에 덧붙여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좌우간 오라버니를 따라다니다 보니까 별별 일을 다 겪게 되는군요. 저는 지금 정신이 멍할 지경이에요."
영호걸은 그녀를 향해 야릇한 웃음을 발했다.
"후후... 어디 그 뿐인 줄 아느냐? 광대무변한 중원천지에는 그보다 더욱 괴이한 일들이 존재하지. 괴이지(怪異誌)라는 책에도 보면 온갖 희한한 내용들이 다 수록되어 있는데,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전부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럼 괴이지에는 만년빙한로에 대해서도 씌여 있었나요?"
"그렇단다. 당시에는 나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었는데, 후에야 그 기록들이 상황과 연결이 되더구나." 
영호걸은 꽤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만년빙한로의 한정(寒精)을 육십 년간 흡입하면 그 사람은 천하의 어떤 보검(寶劍)에도 베이지 않으며, 수화(水火)가 침입하지 못하는 불사신(不死身)이 되지. 더구나 빙강(氷 )을 자동적으로 터득하게 되어 그들이 휘두르는 공력에 스쳤다간 웬만한 고수들도 그 자리에서 온 몸이 얼음덩어리로 화하고 만다."
"아! 굉장하군요." 
장청미의 감탄하는 얼굴을 보며 영호걸은 미간을 좁혔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럼......?"
"그 대법을 연성하는 자는 필히 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즉 희대의 마인(魔人)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셈이지."
그의 심각한 어투에 장청미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오라버니는 무엇이 걱정이죠? 그 당시에 분명히 만년빙한로를 부수었다고 하셨잖아요."
영호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맞다. 하지만 그 뒤의 일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단다."
그는 우울한 표정이 되어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있었다.
"과연 그 관 속의 여인들이 이후로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았던 여인은 눈빛이 몽롱하고 신지가 바르지 않았지. 가신(家臣)인 듯한 그 노파는 나로 인해 대법이 실패했다며 길길이 뛰었는데, 그들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 
"어머, 오라버니는! 그녀들의 악랄한 대법을 중단시키는 것은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 아니었나요?"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할 일만은 아니다."
장정미가 고운 아미를 치켜 들었다.
"그건 또 왜죠?"
"청미, 너도 한 번 생각해 보아라. 그녀들은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육십 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바쳤다. 노파 스스로도 피맺힌 원한이 있다고 부르짖었고......." 
장청미가 괴상한 표정이 되어 따지듯 물었다.
"그렇다면 오라버니께서는 대법을 망쳐 놓은 대가로 그들의 원한을 대신 갚아 주기라도 할 작정이신가요?"
영호걸은 눈을 들어 계곡을 응시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작정이다. 협의지로를 걷는 것도 좋다만 원한이나 쌓고 다닌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장청미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혹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물론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노파에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만큼 내 무학 수위도 높아 졌으니 부딪쳐 볼만은 하지."
영호걸의 말은 여기에서 마무리가 지어졌다. 그러나 그의 심중 깊은 곳에는 쏟아내지 않은 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때 그 노파가 현노적이라 지칭한 인물은 분명 사백이신 현천수 노선배셨다. 그렇다면 대체 빙궁과 사백과는 어떤 불미스러운 연관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눈살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그 분은 사부와는 동문(同門)이면서도 어찌 하여 행적이 서로 다른 것일까? 사부의 행도에는 곳곳마다 존경의 소리가 드높거늘, 그 분은 정반대이지 않은가?'
영호걸은 곧 고개를 가로젓기도 했다.
'속단은 금물이다. 단 한 가지 사건을 놓고 만나 보지도 못한 사백의 인격을 판단할 수는 없지. 더구나 그 내막도 잘 알지 못하는 판국에 경솔하게 단정짓지는 말자.'
그 사이, 그들 두 사람은 어느덧 숲을 거의 빠져 나와 계곡의 입구를 눈 앞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머? 오빠, 저기 좀 보세요."
장청미가 한 곳을 가리켰고, 영호걸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계곡에 면해 있는 누런 황토가 조금씩 위로 들썩이는 장면이었다. 
"흐음?"
영호걸의 눈에 가벼운 이채가 스쳤다. 
곧이어 지면이 위로 치솟더니 하나의 구멍이 생겼다. 동시에 그 구멍에서는 검은 물체가 불쑥 튀어 올라왔다. 그것은 바로 지면 밖으로 상체를 반쯤 드러내고 있는 한 인물이었다.
"악! 귀, 귀신......."
장청미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기겁을 하여 몸을 움츠렸다. 영호걸이 껄껄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다. 저 자는 틀림없는 인간이니까. 그것은 내가 보장하지."
말을 마친 그는 지하에서 출현한 자를 향해 씨익 웃었다.
"흑전서(黑田鼠) 오랍격! 다시 만나게 되었군."
그는 장청미에게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청미, 너는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아마도 이제부터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친 영호걸의 안면이 기이하게 몇 번을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삽시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승풍이라는 가공의 인물로서 활동하던 때의 모습이었다. 
"아?"
영호걸은 얼떨떨해 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발길을 옮겼다.
한편.
막 지면으로 나선 흑전서 오랍격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인영을 보자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닫고는 정상적인 기색으로 돌아왔다.
"쳇! 당신이었구려?"
"후후... 왜, 반갑지 않은가? 난 무척 반가운데."
흑전서 오랍격은 자르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반가울 이유가 없지 않소? 특히 당신의 그 능글능글한 얼굴을 보면 나는 밥맛이 떨어지오." 
영호걸은 짐짓 정색을 했다.
"또 혼나고 싶은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시끄럽소! 난 지금 당신과 그런 농담이나 주고 받을 처지가 아니오. 실례이오만 그만 가겠소."
흑전서 오랍격은 말을 마치자 즉시 뚫고 나왔던 구멍 속으로 도로 뛰어 들려 했다. 그 광경에 영호걸은 대소했다.
"하하하...그렇게는 안 되지!"
그의 우수가 순간적으로 오랍격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휘익!
오랍격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간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영호걸이 재빨리 그의 몸을 낚아채 집어 던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컥!"
오랍격은 비명과 더불어 그대로 내동댕이 쳐지고 말았다. 영호걸은 아연실색 했다. 설마 하니 무공 수준이 만만치 않은 오랍격이 그렇게 무력하게 나가 떨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봐! 어린 친구."
영호걸은 재빨리 오랍격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그의 눈에 오랍격의 복면이 피로 축축히 젖어드는 광경이 보였다.
"맙소사!"
영호걸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그 정도의 충격으로는 도저히 이런 꼴이 될 리가 없었으므로. 
"아니? 안보던 사이에 무공을 폐지 당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곧 정신이 퍼뜩 들었다. 비로소 생각이 범위를 넓혀가 사태의 추이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 내가 실수했구나. 앞서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영호걸은 그제서야 처지 운운하던 오랍격의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다급히 오랍격의 복면을 벗겼다.
금발에 유난히 깨끗한 피부를 가진 이국(異國) 소년, 그 얼굴은 틀림없는 오랍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입가에 선혈을 흘려내고 있었다.
영호걸은 즉시 오랍격의 맥을 잡아 보았다. 


④

진단은 금방 나왔다.
'으음! 과연 이곳으로 오기 전, 누구에겐가 독수(毒手)를 입었었구나. 그 상태에서 집어 던져지자 기혈이 뒤집혀 버렸다.'
그는 절로 쓴 웃음이 나왔다.
"어리석은! 이런 아이에게 장난을 치려 했었다니......."
영호걸은 자조적인 중얼거림과 더불어 품 속을 뒤졌다. 곧 그의 손에는 능운도장에게서 받은 영청석유가 들려 나왔다. 
그는 오랍격의 입을 벌리고 그것을 두 방울 정도 흘려 넣어 주었다. 그런 다음, 양손을 헐떡이는 오랍격의 가슴에 대고는 최대한의 성의를 발휘해 진기를 불어 넣었다.
잠시 후.
핏기라곤 없었던 오랍격의 얼굴에 서서히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어 눈꺼풀이 무겁게 들리더니 그 특유의 푸른 동공을 보였다.
"다, 당신......."
오랍격의 눈에 원망이 담기는 것을 보며 영호걸은 안면을 일그러 뜨렸다. 변명을 즐기지 않는 그였으나 이때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얼굴을 붉힌 채 민망한 듯 말했다.
"네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따위 장난은 하지 않았을텐데....... 정말 미안하구나, 꼬마 친구."
이것은 정녕 영호걸답지 않은 실수였다. 반면에 오랍격은 상대에 대해 이전부터 야릇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금세 상황을 납득하고는 표정을 스르르 풀었다. 
이윽고 일어나기 위해 공력을 운기해 보던 오랍격은 깜짝 놀랐다. 상세가 말끔히 치유된 것은 물론 오히려 전보다 내력이 충만해진 것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나를 치료하셨소?"
영호걸은 여전히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는가? 지은 죄가 있으니 의당 그래야지."
"후후...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어요."
오랍격의 어조가 약간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큰 형님이라도 대하는 것 같은 투였다. 영호걸이 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오랍격, 그 독상(毒傷)은 대체 어찌 된 것인가?" 
오랍격은 그 말을 듣자 흡사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아! 나를 좀 도와 주세요. 누나가 아직 그 놈들에게......."
어지간히 다급했던지 그는 상황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영호걸이 그를 붙잡고 침착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자, 자... 흥분하지 말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차근차근 얘기해 보게. 그래야 도울 것이 아닌가?"
오랍격은 푸른 눈에 기어코 눈물을 담았다. 아울러 그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구 울부짖기 시작했다.
"누, 누나는 지금 혈영곡(血影谷)에 갇혀 있어요. 곡주(谷主) 혈영신사(血影神蛇)의 첫째 제자인 쌍두사(雙頭蛇)라는 놈에게 잡혔어요. 나는 누나를 구하려 땅 속으로 잠입했다가 그들에게 들켜서 이 꼴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왜 진즉 내게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고, 흑......!"
"크으! 일이 묘하게 꼬였었군."
영호걸은 부지중 묘한 신음성을 발했다.
어쨌든 혈영신사라면 무림십괴 중의 첫째인 인물이었다. 당금 무림에서 그가 지닌 무공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치 신비에 가려진 인물이라는 의미다.
다만 온갖 종류의 뱀들을 다루는데 재간을 보여 그 방면에서만은 가히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혈영신사라는 외호도 실은 이때문에 얻어진 것이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이곳이 혈영곡이었던 모양이구나."
영호걸은 새삼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가자. 네 누나에게로."
"그 말, 진심인가요?"
오랍격은 몹시도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세상에 남을 구하고자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는 그리 흔치 않았다. 더구나 중원에서 자신같은 이국인을 상대로는 더욱 그러 했으리라. 
반면에 영호걸은 그의 푸른 눈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와 닮은 눈을 가진 흑편복의 모습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것도 한 밤중, 숲 속에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그녀의 나신을.......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고소가 매달렸다.
'그때 허락도 없이 남의 벗은 몸을 훔쳐 보았으니, 이번에 톡톡히 그 빚을 갚아야겠군.'
이때, 장청미가 자진하여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라버니, 그럼 어서 이곳을 떠나야죠?"
영민한 그녀는 오랍격을 응시하며 생긋 웃었다.
"파란 색의 눈, 그리고 금빛 머리칼....... 신비해요."
그러나 오랍격은 볼메인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그렇다고 무슨 동물인 양 그렇게 구경할 것까지는 없지 않소?"
"어머!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영호걸이 그들의 중재(?)에 나섰다.
"다들 그만해라. 지금은 그런 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청미에게는 내 설명해 주지. 오랍격은 중원인이 아니다. 잠룡도보다 훨씬 더 먼 이국(異國)에서 왔단다." 
"아!" 
장청미는 탄성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 담긴 호기심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심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파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 그럼 하늘에 뜬 태양도 파랗게 보일런지......?'
아무튼 그녀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고, 세 사람은 지체없이 오랍격의 안내로 문제의 계곡, 즉 혈영곡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대략 일각쯤 지났을까?
평탄하던 길이 불현듯 울퉁불퉁한 험로로 변했고, 크고 작은 바위들이 그들의 전진을 방해했다. 게다가 이곳부터는 아까의 숲보다 더욱 수림이 우거져 있어 햇빛마저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음침하고 으스스한 것이 금방이라도 뒤에서 뭔가 튀어나올 듯한 그런 분위기였다. 앞장 서 가던 오랍격이 발길을 멈추었다.
"이 숲에 매복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죠?"
영호걸은 불안해하는 오랍격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어린 친구,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웃음은 사람을 안도하게 해주는 기이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음성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복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오랍격은 눈에 일말의 경외감을 담은 채 그를 바라 보았다.
"이렇게 나무들이 울울창창하게 들어서 있는 가운데서도 사람의 기척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요?"
그 말에 장청미가 대신 대답했다.
"우리 오라버니는 필요하다면 아마도 여기 선 채로 그 나무들 중 강건한 것과 부실한 것까지도 구분해 내실 거예요."
그것은 영호걸의 무공 수위와 더불어 그가 소지하고 있는 의술까지도 한꺼번에 칭송하려는 의도였다. 오랍격도 이미 그에게서 내상을 치료 받았던지라 이의 없이 수긍을 보였다.
"하긴......."
영호걸이 그들 두 소년소녀를 향해 말했다.
"자! 그만 하고, 너희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장청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함께 들어 가겠어요."
"우리 누나의 일인데 나도 당연히......." 
오랍격의 말은 영호걸의 엄숙한 음성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부담가질 것 없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잘 듣거라. 이런 일은 용기만 가지고는 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상대는 일신에 별난 재간을 가지고 있어 멋모르고 상대했다간 되려 이쪽이 다친다."
장청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별난 재간이라니요? 그게 무엇이길래......?"
경험자(?)인 오랍격이 그 말을 받았다.
"뱀."
"꺄악!"
장청미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호걸이 짓궂게 씨익 웃으며 당부했다.
"염려 말아라. 이곳에는 최소한 그런 종류의 위험은 없을테니. 혹시 여하한 사태가 발생해도 그것은 두 사람의 무공 능력이면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 알았어요."
"자! 다녀 오겠으니, 필히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절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는 안된다. 알겠느냐?"
영호걸은 재차 다짐을 받은 후, 숲을 헤치며 몸을 날렸다. 무영비의 경공술을 시전하고 있는 그의 신형은 수림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 나가고 있었다.

[수퍼맨]

잼납니다

[덕산]

잘 보고 갑니다.

[얼음골]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