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로 망명한 건 영생을 버리는 결단
장대높이뛰기는 달에 걸렸다
백만 년이 백 년으로 줄었다는 통지문을 찢는다
나무에서 거낸 유월의 입술을 마셔본다
수명을 늘려주는 비법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불면증을 폭식한 햇살을 쫒아내다
붉은 사막이 자라는 걸 지켜본다
나를 도는 자전법이 유행인 듯
백 년을 즐기는 비결은 가까운 사람을 잘 살피는 것
장미꽃이 울타리를 잡고 춤을 춘다
헐값에 처분된 노을을 사다 바게트에 발라 한입 먹어본다
디지털 하늘에서 어둠이 소낙비로 쏟아진다
내 왼쪽 눈에 둥지를 튼 붉은머리오목눈이
선반에 진열해놓은 기타를 왼손으로 바꾸고 외출한다
열린 문 지나가면 어디론가 전송되는 나의 문체
지구살이는 굳은 표정이 필요하다
몬스테라를 사서 넓은 잎에 물수제비호수를 키우기로 한다
몇 개의 운석에 숨긴 직녀성운이 샛별 옆에서 덜컹거린다
급하게 도망치다 은하에 던진 유인 비행선이 연결을 끊는다
자정이 빛의 속도로 달려간다
은하철도
소행성의 마찰음, 얼굴을 가린 안드로메다는 18번째 건설한 인간의 이주처, 중량을 가득 담아 힘겹게 굴러가는 눈동자가 파란색 지붕처럼 눈에 띄는 저들은 어디서 온 행성인가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분주하게 떠다니는 무수한 주문들 컵을 들면 내 눈앞에 행성 하나 멈춰 선다 기울어서 시공을 초월해 버린 액자 속 압화처럼 날아다니는 불사의 씨앗들, 반품요청 지난 플랫폼에서 출발하는 은하3구역 빗방울처럼 굴러갑니다 안드로메다는 무작정이고 무정차입니다
생체 멸실 훼손기에 접어든 승객들로 만원이다 소유권자의 포장지가 훼손된 승객, 상품 가치가 상실된 애정행각 불가 승객, 광활한 우주에서 바라보면 까마득한 하늘 가운데 소실점 반품 딱지 붙어 있다 유통기한 경과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술잔 가득 검은 빛으로 고여 있다 한입에 털어넣듯 달려간다 중력렌즈를 통과하면 혈관을 데우는 불사 유사 제품이 되는 줄도 모르고
동네슈퍼에 널린 3천 원짜리 과자봉지처럼 뿌옇게 흐려진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유성우 속에 섞여 있다 은하의 중력장 속에서 25시 소비자가 있고 복제가 무한 가능한 상품들이 시간 밖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떨어져 나온 한 개의 행성이 각질처럼 깨어날 시간을 가늠하고 있다 적절하게 식은 몸속 불병자리는 목이 마르다
공간을 접은 웜홀, 리벳 구멍 같은 별들이 박혀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자의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빅뱅 이후 2999년 12월에 도착하기 3개월 전 숙련된 보법으로 한 인간이 걸어간다 단추를 마저 잠그면 완성되는 옷차림으로 되살아난 클론이 퍼즐 카논처럼 은하를 흘러내린다
새처럼 날듯이 걷고 싶은 내 귓속에 중력을 숨겨 두겠다 몸속에 서식하게 될 반딧불이 스스로 빛을 내는 바이칼 호수에 거대한 물항아리 입 모양으로 전갈자리가 놓인다 무중력을 견뎌낼 새로운 살갗은 태양풍에도 견딜 수 있다며 이마를 쪼며 일천 년을 울었다는 천둥을 불러 등대 성운을 관통한 별빛으로 지은 아이를 내려놓는다 키만 좀 더 크면 머나면 미래로 데려다 줄 클론이 될 거라며
젊은 천문학도는 언제부터 외계인을 관찰했을까 하필 지금 달이 지고 있다 달은 양떼 목장에서 세상을 별들의 무덤으로 만들고 사람처럼 창문을 두드린다 두르려야 자라는 손바닥을 가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별 무리를 양 떼처럼 몰고 가는 이를 불러 세운다 발걸음을 멈춘 사람의 마음속에 거주하는 별을 모는 복동의 구부러진 목청이 낡은 객차처럼 길게 울곤 하였는데
하필 그때 페가수스, 그 눈 속에 영생을 묻고 온 어린 말을 나는 보았지 새벽달이 천 리를 달린 말 편자처럼 닳아 봄을 다 비행해야 하는 내 운명, 내 집 화단에는 식물군들이 밤이 되면 몸을 둥글게 마는 벌레의 울음으로 채워지고 남쪽으로 난 하늘문이 덜컹거렸지
바람이 분다 길쭉한 입술을 가진 사람이 볼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눈빛 삼파장에서 꺼낸 긴 칼 가진 계절과 악수를 한다 나뭇잎에 스친 손끝마다 회전하는 물무늬가 얕게 패여 지금부터 인간은 슬픔지대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온 어린 왕자가 붉거나 흰 장미 한 다발 누구에겐가 건네는
그림이 삐뚤삐뚤 그려져 있는 슬픔을 알 때쯤 봄은 발굽열차를 장만하는 꿈이 되어 떠납니다 누가 품었었는지 별이 밤새도록 껌뻑이고 빛을 숭배하는 키 작은 에메랄드 지구인은 밤하늘을 걷는 것 같다고 합니다 발밑에는 별 부딪는 소리 줄어들지 않고
권기만/ 경북 봉화 출생. 2012년 《시산맥》 등단. 시집 『발 달린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