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촐하게 걷자 했으나 다정하게 걸었던 하루.
편안하게 걷자 했으나 강건하게 걸었던 시간.
봉화산둘레길과 동구릉은 즐거움이 점철된 길.
근 5년만에 찾은 봉화산둘레길.
진입로도 변한게 없는데, 걷는 사람들만 바뀐 현상.
담압(밟는 압력)으로 길은 예전보다 좀더 패인 듯.
곳곳의 안내사인은 새롭게 추가로 정비된 상황.
파랗게 물들 때면 더더욱 아름다울 그길.
오늘은 우리들이 꽃되어 환하게 그 길을 밝혔던 하루.
두엄의 향기로움 조차 봄을 부르는 신호로 이해하는 넓은 마음으로.
중복되어 어지러운 안내사인과 달리 가지런했던 둘레길.
여전히 갈피를 가장 못잡는 건 사람들의 마음.
가지런한 길 위에서 마음을 정돈하던 순간들.
땅에 내려 앉은 딱따구리는 쉬 보기 힘든 법.
나는 딱따구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시 나무과 각을 세워 자리를 잡은 딱따구리.
약사불을 주존불로 모신 법장사.
아파트를 병풍삼아 대웅전 날개를 펴고.
중생들의 마음 고치러 이 세상에 오신 약사불.
주리기 전에 배를 그득 채워주던 낙지와 잘 익은 반죽 덩어리.
65-1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만에 내려 500m 걸어 도착한 동구릉.
우리나라 최대의 왕묘역.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 40기 중 9기가 모셔진 곳.
해설사 안내시간은 10시 13시 15시.
우리는 자유롭게 걷기로 함.
동구릉 역사관을 잠시 들러 개괄적인 상황을 살펴봄.
동구릉은 무려 59만평에 일곱의 조선왕과 열의 왕비들이 잠든 곳.
조선의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길지라는 여주의 세종릉과
비교해 어디가 더 명당인지는 알 수 없는 일.
조촐했으나 다정했던 발걸음에 신이난 회원들.
가장 먼저 만난 수릉은 일찍 요절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후에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무덤. 남편은 일찍 요절하였으나 83세까지 장수하며,
풍양 조씨의 외척 세도정치를 이끌며, 순조의 안동 김씨와 라이벌 세도적치를 이끈 인물.
후에 흥선대원군이 된 이하응과 고종 즉위를 추진하여 수렴청정까지 하였으나 끝내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분.
골육상쟁의 비극이 잠든 곳을 찾은 가족들.
제5대 조선왕인 문종이 잠든 곳.
아들 단종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큰 한이 되었을 분.
왕이었던 아비가 아들을 지켜내지 못했던 그곳에는 많은 아비와 아들이 지나고.
동원이강릉으로 각기 다른 구릉에 자리잡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그 누구의 왕릉에서도 볼 수 없는 억새의 위엄을 가득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길 원했으나 홀로 쓸쓸히 묻혀 있는 분.
나라를 세워 500년을 지속했으나 누구나처럼 땅 속에서 긴 잠들기는 매한가지.
이성계 신도비와 황제 추존비.
황제추존비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등극하며,
자신의 황제 등극과 더불어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직계 5대조까지 황제로 추존했다는 증거 중의 하나.
조선에서 황제로 추존된 분은
1.태조 이성계 - 나라를 세움.
2.효장세자, 추존하여 진종(사도세자의 형) - 정조 이산의 양아버지.
3.사도세자, 추존하여 장조 - 정조 이산의 친아버지
4.정조이산 - 황제로 추존.
5.순조 - 황제로 추존
6.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 고종은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름.
7..헌종 - 황제로 추존
8.철종 - 황제로 추존
실제 황위에 올랐던 황제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이로써 우리나라의 황제는 추존황제 포함 총 열.
정다운 길에서는 정다운 모습이 더욱 정다움.
이순신을 시기하기 전에 파격적인 승진인사를 단행하여 조선을 구했다는
특이한 평가를 최근에 받은 선조의 목릉.
32세에 뒤늦게 무과에 합격한 이순신. 그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에 발령받아 국경에 근무.
육군생활만 하던 이순신은 44세에 정읍현감 종6품에 등극.
이후로 선조는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종3품 함경도 첨사로 보내려했으나
조종대신들의 지나친 승진이라는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함.
그러나 임진왜란 1년 전에 진도군수(종4품)이던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정3품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시켜서 발령내림. 이때도 얼마전까지 종 6품이던 인물을 당상관에 제수하는 것은
지나친 특혜라며 신하들이 극구 만류함. 선조는 이번에는 뜻을 굽히지 않고 인사를 단행함.
그렇게 조선은 나라를 구할 동아줄 하나를 얻음.
그 외에도 이순신이 부친 별세로 벼슬을 내놓고, 삼년상을 고향에서 치르는 동안
선조는 '언제 상복을 벗느냐?"며 벼슬을 내리기 위해 여러번 사람을 보내 물었다고 함.
탈상을 한 직후에 이순신에게 무려 10단계가 넘는 엄청난 초고속 승진을 시켜
종4품 조산보(함경북도 선봉) 만호에 임명한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비정상적인 특혜.
이를 두고 류성룡의 추천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10단계 넘는 초고속 승진은
감히 신하로써 조언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
선조를 두고 한편으로는 율곡 이이나 이순신 같은 신하를 발탁하고, 신하들의 반대를
억누르면서까지 일을 맡긴 안목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들려오는 요즘.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묘.
19세에 50세가 넘는 인조에게 시집와 왕후가 된 분.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광해군이 즉위한 후 모함에 의해
아들 영창대군을 증살로 잃고, 자신마저 서인으로 강등되어 10년간 유폐되는 치욕을 겪음.
결국 인조반정을 통해 다시 권력서열 1위가 되었으나,
병자호란의 엄청난 전란으로 인해 좋은 평가만을 내리긴 어려운 분.
인목대비의 묘는 유일하게 능침구역까지 가볼 수 있도록 개방됨.
인목황후 김씨의 묘에서 단체촬영 앵글 속에 들어온 님들.
바람에 휘날리는 수염이 인상적인 문인상.
얼굴 형태가 다소 코믹하다는 평가는 받는 인목왕후 김씨 묘의 문인상과 무인상.
곡장 뒤에서 바라보는 인목왕후의 묘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묘인 휘릉.
인조가 죽고도 오랬동안 살았던 이분은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가 죽고나서
본의아니게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예송논쟁의 중심이 됨.
그래선지 묘자리도 인조가 파주에 별도로 원비와 묻힌 것과 달리 혼자 이곳에 잠듦.
자신의 묘를 간소화하는 릉의 표본으로 삼으라 하였던 영조와 정순황후 김씨의 묘
조선 최장기 집권 왕의 권위와 달리 석물들은 매우 간소화하여 작고 수도 적음.
비록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긴 했어도 백성 사랑했던 마음이 느껴짐.
소나무는 조선이 사랑했던 나무.
조선이 사랑했던 나무와 함께 했던 동구릉 산책을 마침.
첫댓글 잊을만하면 하게되는 역사공부. 발도행의 매력이죠. 바람한 점 없는 따뜻한 춘삼월에 유유자적 즐거웠던 하루였습니다. 어느것하나 부족함이 없었네요. 벙개의 감칠맛이 생생해요. 오늘 해설사, 발견이님 만점입니다. 다음벙개 기대되요^^
고운 걸음 함께 하셔서 좋았습니다. 이번주 번개도 공지에 올렸으니 시간 되시면 함께 하셔요. ^^
저는 강변역에 살아서
강변산책을 가끔 가는데
지루할 때가 있어요.
봉화산 둘레길은 아기자기 좋아서
그주변 사시는 분들이 부럽더라구요.
바삐 사느라 잊고 있던
역사속 왕과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동구릉을 거닐며
발견이님의 설명으로 들어서
더 기억에 남을거 같아요.
수고 많으셨어요.
다음길에서 뵈어요~*
저녁별님의 아릿한 커피향이 오늘 아침 저희 사무실을 가득 채웁니다.
향기로운 걸음으로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발견이님의 조예깊은 해설과 안내로
어릴적 와봤던 기억을
추억하며 보낸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얕고도 아주 얕은 지식인걸요. 고무래님을 통해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
조촐, 다정, 편안, 강건. .
딱 제 스따~~일인데
제가 왜 못갔을까요?
ㅎ
울성당 신부님의
<몽골 돕기 기증품 수거
프로젝트>. . .
신부님이 트럭 몰고
손수 수집하러다니시는데
어찌 한 눈 팔겠냐고라고라~
몸은 신부님과
마음은 발견이님과. .
ㅎ
서리풀님께서도 한 몫 단단히 하셨네요
주일에 트럭위에서 강론? 하시는 신부님 멋져요 !!
@미지 주일 강론 훌륭히 마치시고
오후 내내 수거하셨답니다.
노래, 춤. 기타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미지님 만난지도
어언 몇개월 째,
보고싶군요~ㅎ
정말 뜻깊은 일을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늘 이렇게 사회는 음지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덕분에 돌아갑니다. 더 큰 응원을 보내야 할 분들이 참 많습니다. ^^
요즘 일간지에 이순신의 리더십을 열심 읽고 있는데 선조의 재조명?도 느껴지고 역사는 늘 재조명되고 해석되는 듯 합니다. 지금의 시국은 훗날 어찌 평가가 될 지 궁금합니다 ㅎ 수고 하셨습니다.
어제 밤, 이규현의 스포트. .
시청해보니
답이 나오더군요. ㅎ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지도자가 참 지도자~~
저도 그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사람이 어떻게 좋은 면만 있고, 혹은 나쁜 면만 있을까요.
양면을 다 알고 균형을 잡아가는게 정확한 역사관 아닌가 생각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천하를 호령해도 시간 앞에는 장사가 없으니 어찌 이 시간을 정으로 하나하나 쪼개어 값지게 새겨갈 지를 늘 고민해야겠습니다.
그 시간의 무늬로 사람들이 저에게는 어떤 평가를 내릴지 생각하니 자못 비장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