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블라냐 4 - 국립 미술관을 지나 오페라좌를 보고 프랑스 혁명광장에 가다!
2022년 5월 5일 슬로베니아 피란(Piran) 에서 버스를 타고 포스토이나 (Postojna)를 거쳐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라냐 (Ljubljana)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나와 기차역으로 가서 내일 아침에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로 가는 기차표를 끊는데 무려 7시간이나 걸리는데도 요금은 1인당 19유로에 불과해 놀랍니다?
도시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기로 하고는 10여분을 걸어서 티볼리 공원 Tivoli Park 에 도착하니 그 규모가
엄청나게 넓어 놀라는데 공원에는 예수회가 지은 티볼리성 Tivolski Grad 이 있다는데 대충 보고 나와
국립 미술관 의 뜰에 전시된 조각품들을 구경하고 근대미술관을 지나 오페라좌 Opera 건물을 찾아갑니다.
슬로베니아는 슬라브인들의 나라 라는 뜻인데 남한의 5분지 1 정도 면적에 200만이 사는데 북쪽
오스트리아와 접경에는 유리안 알프스 산맥 이 있고 남쪽 발칸반도 쪽에는
디나르 알프스 산맥 이 있으며 동쪽 헝가리 접경에는 거대한 평야인 판노니아 평야 가 펼쳐집니다.
오래전에 로마 제국의 영토 로 크로아티아와 함깨 일리리아 로 불렸으니 오래된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이 있으며.... 7세기에 슬라브인 들이 이주해 와서
사모왕국 Samo's Kingdom 이 세워졌는데 국왕 사모는 게르만 프랑크족 이었답니다.
7세기 후반에서 9세기 까지는 슬라브인의 나라인 카라타니아공국 Carantania 가 들어섰고 9세기에는 서쪽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10세기에는 독일 신성로마제국 의 일부로 편입 됩니다.
14세기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의 영토로 되었으며 게르만화가 진행됨에
따라 원래 슬라브족이었음에도 독일어가 국어 가 되었으며 1809년 부터
5년간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점령해 일리리아주 Illyrian Provinces 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에는 다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으며 1919년 1차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하자
유고슬라비아 영토 로 편입되었다가 1991년에 독립 하는데 오랫동안 유고연방에서 생활하다 보니 언어는
크로아티아와 단어가 유사한게 많으니 감사합니다는 Hvala(흐발라) 이고 실례합니다는 Oprostite 라 합니다.
유럽 4대 전자기기 회사인 Gorenje 가 있으며..... 물가는 외식비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나 커피는 싼 편이고 마트의 식자재는 더 싸며 치안이 좋은 나라 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 를 받아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가톨릭 을 믿는 관계로 서구 유럽과
문화적 동질상을 갖으며 1991년 독립전쟁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로
부터 독립했는데.....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고 화폐는 유로 를 사용합니다.
루블라냐에서 북서쪽으로 50km 지점 블레드 Bled 라는 도시에 호수 위의 섬에 블레드 성 Bled
Castle 이 유명하니 블레드성은 독일황제 헨릭이 주교에게 이 지방을 하사하자 성벽과
로마네스크양식의 탑외에 아름다운 성채를 쌓았는데..... 유고의 티토 대통령 별장 으로
빌리브란트, 김일성, 후세인 요르단왕, 아키히토 천황, 차우체스쿠, 찰스 왕자가 다녀간 곳입니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Ljub ljana) 는 독일어로는 Laibach(라이바흐),
이탈리아어로 Lubiana(루비아나), 라틴어로는 Emona(에모나) 라고 부릅니다.
류블랴나 (Ljubljana) 는 알프스 산맥과 지중해의 연결 부분과, 사바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류블랴냐 강의 하구 해발 298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기원전 15년에 로마 제국은 이곳에 도시 에모나 (Emona)를 건설했으니 500년 동안 유지되었으나
훈족이 침입해 파괴 했으며....... 6세기에 슬라브 민족인 슬로베니아인 이 정착하였습니다.
1144년에는 강 건너 언덕 위에 류블랴나성 Ljubljana Grad 이 건설되었으며 도시에는 류블랴나
대성당 과 1810년에 설립된 2만명의 학생수를 가진 류블랴나 대학교 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초상이 새겨진 오벨리스크(돌기둥) 가 서 있다는 프랑스 혁명광장
Trg. Francoske Revolucije 을 찾아가는데 원래는 파리의 레퓌블리크
광장 (프랑스어: Place de la République) 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오벨리스크는 일리리아주기념비 라는데 류블라냐의 건축가 플레츠닉이 만들었으니 일리리아주
를 설치한 나폴레옹 얼굴 과 의인화한 일리리아의 얼굴이 황금색 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류블라냐 시내에 자리한 프랑스 혁명광장 에서 나폴레옹 이후의 프랑스 를
생각하니...... 임용한의 전쟁사에 "성스러운 길" 이란 글이 떠오릅니다.
필리프 페탱 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패전하자 나치에 부역한 비시 정권의 수반 을 지냈다.
만년이 정말 좋지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를 구한 최고의 전쟁영웅 이었다.
베르됭 전투 가 위기에 빠졌을 때, 페탱이 구원자로 투입됐다. 그는 1차대전을 지옥으로 만든 맹목적
인 돌격 전술을 혐오했다. 그가 찾아낸 대안은 포병을 이용한 화력전 이었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독일군답게 정밀한 포격 계획을 세워 프랑스군 진영을 초토화했다. 페탱은 우왕
좌왕하던 포병을 다잡고, 화력을 증원하고, 체계적인 집중 포격 으로 독일군에 악몽을 되돌려 주었다.
화력전으로 전환되자 포탄 조달 이 관건이 되었다. 페탱은 프랑스 전역을 뒤져 트럭 과
가용한 운송수단을 다 끌어모아 3500대의 차량 을 마련했다. 그런데 도로가 없었다.
베르됭으로 오는 철도와 도로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독일군의 포격으로 다 절단 되었다.
단 하나 도로만 남아 있었다. 도로는 폭이 6.5m로 트럭 두 대가 간신히 비켜갈수 있었다.
너비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도로의 내구성 이었다. 부드러운 프랑스의
대지 위에 설치된 비포장 도로는 엄청난 물량의 수송을 감당할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페탱은 유능한 공병감을 시켜 철저한 도로 관리 계획을 세웠다. 도로에는 트럭과
공병들이 빽빽하게 늘어섰다. 트럭들이 기차 처럼 길게 줄을 지어 이동하는
동안 길가의 공병들은 삽으로 겨울에는 모래 를, 비가 오면 자갈 을 도로에 부었다.
이 도로는 성스러운 길 (부아사크레) 이라고 불렸는데, 원래의 뜻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 이란 의미였다. 바꿔 말하면 죽음의 길 이란 의미인데, 그 죽음들
덕분에 거의 패배했던 베르됭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있었으니 성스러운 길이 틀린 말도 아니다.
전쟁에서 도로는 말 그대로 생명선 이다. 도로를 통해 누가 얼마나 빨리 대량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
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하지만 이들의 공로는 곧잘 잊혀진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첫댓글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고
천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복(福)은 자기에게서 싹트고 화(禍)도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准南子-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복과 화는 모두 자기로 부터 나온다.
천천히 되새겨 볼 말인가 합니다.
페탱이 극과 극을 오가는 삶을 살았으니... 2차대전때 프랑스가 너무 무기력했죠.
1차대전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2차대전때는 독일의 부역자가 되었으니....
그래도 프랑스 국민들 입장에서 보자면
독일군의 군정 통치에 비하면
저 비시정권 통치가 좀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