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XrqApzd3t-I?si=rh3hDLVZBJky1cbt
-역사적 인물을 정치적 논란의 대상으로 삼는 이런 상황에서 역사학자로서 침묵할 수 없다는 생각에 홍범도 장군 이야기를 안할 수 없게 되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모두 1920년에 일어났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통해서 독립선언: 세계에 청원한 것도 아니고 부탁한 것도 아닌 우리가 독립했음을 알린 것인다. 그래서 '만세'를 부른 것이고 그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
-봉오동 청산리 전투는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사건이다.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7일, 대한독립군 홍범도의 부대와 대한북로독군부의 최진동 부대의 연합작전)
-홍범도의 군대는 중국 땅에서 주둔하며 두만강을 도강하여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주둔한 일본군을 상대로 타격전을 벌이고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던 차에 일본군이 추격->1920년 6월 6일 '삼둔자 전투' 발생, 홍범도 장군의 1차 승리->6월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격파하며 2차 승리
-봉오동 전투 패배후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
-중국 땅을 들어가기 위해 일명 '훈춘사건' 일으켜 (마적을 매수해서 일본영사관 공격 사주, 자국민 보호를 목적으로 군대파견 명분)
-간도에 파병된 일본군을 피할 것인가 싸울것인가? 백두산 쪽으로 이동하기로 선택한 홍범도 장군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10월 26일 까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연합작전으로 청산리 전투 펼쳐져.
첫댓글 이익주 교수님께서 홍범도 장군 특집 방송을 시작하셔서 요약해보았습니다. 최신 업데이트된 청산리 전투 상황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봉오동 전투 이후 백두산 쪽으로 남하하던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국경을 넘어온 일본군을 격파한 것이라고. 훈춘 사건으로 침공의 명분을 만들어 국경을 넘는 일본제국을 보니 푸틴이 생각나네요.
영상은 아직 안봤지만, 홍범도 휘하 독립군은 무장수준도 당시 상대하던 일본군보다 나았었지 않았던가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보급이 전무후무해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탄환이 부족하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해서(피해야 어떻든 패배한건 확정)
무력으로 일본과 싸울수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죠
네, 맞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