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집에 대한 생각이 많다. 항상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빨리 아이가 태어나서 크기 전에 좋은 집으로 사서 갈 수 있을지 고민하곤 한다. 그럴 때면 항상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건 바로 우리 부모님이다. 내가 좋은 집에 대한 집착이 유독 강한 이유도 바로 어린시절 엄마를 보고 자라온데에 적지 않은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우리집은 연립주택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1층에서 현관문을 열고, 어둑시근한 아래를 내려가다 보면 여러칸의 단칸방들이 방문 하나 사이로 숨쉴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겨우 다섯살의 내 나이에도 궁핍해 보이는 집들이었고 다들 고만고만한 어려운 사정들이 있었다. 아빠가 밖으로 장사를 나가고 나면 엄마는 나랑 동생을 끼고 늘 인형 눈알 붙이는 부업을 하셨다. 나갈 수도 없는 그 비좁은 속에서 나는 엄마가 꿰매고 완성한 인형을 가지고 놀곤 하였다. 비가 오면 늘 물이 무릎높이까지 차올라서 방이고 밖이고 퍼다 내다 버려야 할 만큼 그 단칸방의 생활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연찮은 시골 외할아버지의 방문이 우리를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두레박을 선물해 주었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외할아버지는 돌아가는 길, 무척이나 통곡을 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아빠는 둘째 이모부로부터 아스콘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길로 아빠는 애초부터 적성에 맞지 않았던 장사는 때려치우고 곧바로 정선으로 먼저 올라 가셨다.
내 기억에 의하면, 어느날 엄마와 우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난생 처음 정선이라는 낯선 지방을 내려갔다. 조그만 평수의 주공 아파트에서 아빠의 옷가지를 발견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아빠와 이모부가 함께 자취하는 곳이라는 걸 단박에 눈치 챌 수가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쓰는 방에서 아빠의 옷들을 모두 수거하여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였다. 나는 그 동안 방 책상 한켠에 놓여 있던 몇권의 동화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며칠 안 있어 우리 집은 그 비좁은 단칸방에서 벗어나서 정선으로 이사를 왔다.
엄마 아빠의 청춘이 담겨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나오면서 부모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아마도, 꼭 지방에서 성공해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리라, 마음을 먹으셨을 것이다. 어쩌면,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허덕이다 벗어나게 되어 속이 후련했을지도 몰랐다.
우리가 이사를 온 곳은, 정선에서도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어느 산촌 마을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 방 두칸짜리 집에 월세로 살게 되었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그 곳은 서울에서 전세금을 모두 빼고 겨우 마련한 월세집이라고 하였다. 안집과 마주보고 있었지만, 서울 단칸방에 비하면 전혀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엄마는 단칸방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감격을 했고 우리에게 따로 방도 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방 하나에 칸막이를 만들어 겨우 방 두칸짜리로 변신을 시켜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방이 두개였고 그 두방은 서로 나란히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내 방에서 미닫이 문만 열면 바로 안방이었다. 가운데 문짝만 떼어버리면 단칸방과 다를 게 없음에도 엄마는 이제 우리도 방 두칸짜리에서 산다며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 역시도 아무것도 없이 달랑 이불만 펴놓은 내 방을 무척 귀하게 생각했다. 엄마가 안방에서 같이 자도 된다고 해도 나는 굳굳이 내 방을 사수했다. 엄마는 그 방문 하나 사이도 걱정이 되었는지 동생을 꼭 붙여서 재우곤 하셨다.
집 밖을 나와서 동네를 걷다가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고가도로가 나왔다. 고가도로를 올라가기 전 조그만한 동산같은 둔덕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동네 여자애들은 고무줄 놀이를 하며 놀았다. 나는 여자애들의 심한 텃세에 조금도 끼어들 생각도 못한 채 항상 그 모습을 멀찍이서 앉아서 바라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나한테 유난히 관심을 보이고 잘해준 언니가 있었는데, 나보다 두세살 정도 더 나이 많은 초등학생 언니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에서 유명한 도둑 오빠가 있는 질이 안좋은 아이였고 엄마는 그 언니랑 노는 걸 나 혼자 노는 것보다 더 질색을 하며 싫어하셨다. 내가 울면서 아무리 떼를 써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언니는 스스로 떠났는지 내가 먼저 떠났는지 알길이 없지만 어느 순간 우리 사이는 어색해져 버렸고 나는 다른 친구를 찾아 나섰다.
그러던 어느날, 동네 아이들이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길래, 나 역시 따라갔다. 어느 미끄럼 같이 생긴 낮은 지붕에서 단체로 아이들은 흙을 뿌려가며 엉덩이를 구르고 있었고 나 역시 신기함에 함께 합류하여 놀았다. 그건 나 혼자서도 놀 수 있었고 밥을 안먹어도 좋을만큼 재미있었다. 아무리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져도 난생 처음 타보는 미끄럼은 질리지가 않았다. 그렇게 놀다가 어느 순간 나는 또 다른 친구를 사귈 수가 있었다.
내가 당당하게 개선장군인 마냥 내 나이 또래의 아이를 사귀어 집으로 데리고 가자 엄마는 무척 환대하였다. 항상 함께 어울려 다니다가 어느날 그 아이는 엄마가 오늘은 일찍 오랬다고 하였다. 내가 아쉬워 하자, 엄마는 그럼 둘이 가서 느이 엄마한테 허락맡고 오렴, 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아이랑 함께 손을 잡고 난생 처음 그 아이 집을 방문하였다. 나를 잠깐 밖에 세워뒀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방문은 아니었다. 그 아이는 잠깐만, 이라고 말하곤 본인 집으로 들어갔다. 뒷간에서나 나는 쿰쿰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래도 나는 꾹 참고 그 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엄마한테 친구를 데려왔다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 애 엄마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친구가 엄마한테 맞는 둔탁한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엄마한테 허락도 없이 어디에 가서 쳐 놀다가 이제 왔느냐는 고함소리와 그 친구의 울며 지르는 비명에 나는 몸을 움츠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건 야단이 아닌 흡사 폭력에 가까워 보였다. 나로서는 한번도 겪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무차비한 폭력이었다. 나는 이대로 가다간 나 역시 끌려 들어가서 함께 얻어 맞을 것만 같았다. 결국 내 발이 나도 모르게 나를 우리 집으로 달음박치게 만들었다. 내 생애 최초로 그렇게 가슴떨리게 무서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은 진천 이월면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이후로 동네에서 그 친구를 봤던 기억은 없으니 아마 이사간다는 인사치레도 못하고 왔던 것 같다.
진천 집은 학교에서도 한참이나 뚝 떨어진 논 한가운데에 외딴집이었다. 그 근방에 집이라곤 우리집과 안집 딱 두집 뿐이었다. 진천 집은 복도식 부엌이 조그맣게 안에 딸린 방 두칸짜리 새집이었다. 희한하게도 방 두칸 모두 너나할 것 없이 크기가 똑같았다. 다락방의 존재가 안방이라는 것을 표시할 뿐이었다. 방 두개다 넓직했고 어쩐지 엄마는 전보다 조금 더 훨씬 넓은 집으로 이사 온 걸 기뻐하면서도 그 방 두개를 활용하지를 못했다. 내 기억에도 방 한칸은 늘 빈방이었다. 엄마는 그 방을 거의 없는 취급을 하였다. 그리고 온 가족은 모두 안방에서 기거했고 모든 생활은 안방에서만 이뤄졌다.
지금에서 회상을 하면, 엄마는 작은 방은 어쩐지 쓰기가 싫었다고 하셨다. 아마도 외딴 집에 유난히 넓었던 작은 방이 마음이 걸리셨던 것 같다. 하다 못해 외할머니가 오셔서 하룻밤 자고 가도 작은 방은 비워뒀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엄마는 진천 집에 대한 무섬증이 있었고, 그 무섬증은 우리 가족이 모두 붙어 있지 않으면 혹여나 누구에게 뭔일이 일어나도 모를 것이라는 소름끼친 예감에 기반한 것이었다. 기름보일러와 그로 인해 사시사철 콸콸 나오는 따뜻한 물, 안에 부엌이 딸린 방 두칸짜리 집을 항상 소원했건만, 엄마는 진천 집을 썩 좋아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지금에서 부정하지만, 항상 집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긴다는 걸 어린 느낌에도 감지할 수가 있었다. 나 역시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작은 방에 내 방이랍시고 들어가면 항상 뭔가 서늘한 기운을 받곤 하였다. 작은방에서 낮에 들어가서 노는 건 제지하지 않으셨지만, 느즈막한 저녁이 오면 엄마는 작은 방을 늘 굳게 걸어두었다. 이제 그만 안방으로 들어가렴, 이라고 엄마는 말하곤 안방에 딸린 욕실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씻기곤 하였다.
진천에서 엄마는 항상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보채다 시피 하셨지만,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비료푸대 공장으로 일을 나가기 전까지 엄마는 늘 활기 차고 밝으셨다. 내가 말썽을 피우면 바깥에서 빨래를 널면서 마음씨가 예뻐야 여자지, 라는 유행가를 내 앞에서 부르면서 놀리곤 하셨다. 내가 퉁퉁거리면서 마음씨가 예뻐도 얼굴이 미우면 여자 아니야, 라고 말하면 엄마는 자지러지게 읏으셨다.
그러다가 안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엄마는 가까운 옆동네 비료푸대 공장으로 일을 다니셨고, 그 즈음부터 엄마는 늘 피곤해 보였다. 나는 그로 인해 학교가 파하면 항상 동생이 다니는 유치원으로 가서 엄마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곤 하였다. 그렇게 엄마가 저녁 느즈막히 우리를 데리러 오면 나는 한참 유치원 내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다가 풀이 죽어 엄마 손을 잡고 동생과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한참 재잘거리며 떠들고 싶은 마음과 엇갈리게 어떤 말을 해도 별 반응이 없던 엄마와 터벅터벅 걷는 농로 길은 나에게 고역이었다. 엄마의 얼굴은 어쩐지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내가 엄마를 어떡게든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오늘은 학교에서 발표 잘했다고 선생님이 포도송이를 두개나 주셨어! 라고 자랑을 해도 엄마는 그러니, 좋겠다, 라고 마치 남의 아이를 칭찬하듯 하였다. 그때 엄마는 어쩐지 피곤한 기색으로 나한테 딱 한마디만 하셨을 뿐이었다. 엄마는 얼른 여기를 떠났으면 좋겠다, 고.
며칠 안 있어, 안집 오빠랑 놀다가 오빠가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였고 그건 바로 새로 산 경운기였다. 새 경운기는 반짝 반짝 윤이 났고 아주 멋있었다. 맨날 폐 경운기만 보다가 처음보는 새 경운기에 놀라서 입을 다물줄을 몰랐다. 늘 폐 경운기를 놀잇감처럼 여겼던 나였다. 그 위에서 동생과 소꿉놀이도 했고 이것저것 건들여보면서 놀기도 하였다. 내게 놀잇감과 다름없던 경운기가 무서운 괴물로 변신한 건 순식간이었다. 오빠가 자랑스럽게 모터를 돌리는 동시에 나는 모터 쪽으로 집게 손가락을 집어넣었고 순간 나는 악 소리를 지르고 악다구니를 질러대었다. 사색이 되어 혼비백산하는 오빠를 두고 어느 틈에 놀라서 뛰쳐나온 안집 아주머니는 순식간에 내 손가락을 모터에서 끄집어 내었다. 다행히 손가락은 절단되지 않았지만 손톱은 반 이상 잘려져 나가고 없었다. 아주머니는 손가락의 상태를 보고 안심을 하자마자 집안 마당에서 싸리빗자루를 가지고 나와서 오빠를 쥐잡듯 때렸다. 이 놈의 자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어린애 데리고 별 해괴한 짓 다한다고 온갖 욕을 하고 얼른 들어가지 못하냐고 소리를 질러대었다. 안집 오빠는 울면서 그게 아니라 나는 그게 아니라, 하면서 결국 집 안으로 마지못해 들어가 버렸다. 아주머니는 급하게 집으로 들어가서 소주를 갖고 나와 내 손가락을 소독해 주었고 조금 있으면 엄마가 올테니 그때까지 참고 있으라고 하였다. 오빠가 철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우리집으로 들어가서야 나는 참고 있던 겁에 질린 울음을 터뜨렸고 한쪽 손으로 손가락을 감싸쥐고 이불을 푹 뒤집어 쓴채로 잠이 까무룩이 들었다. 나는 엄마가 오히려 알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이불로 뒤집어 쓴 것인데, 어느새 일어나보니 엄마는 울면서 내 손을 품에 안고 있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어린애들 놔두고 미쳤지, 진희야 엄마가 미안해, 라고 계속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엄마는 그 비료푸대 공장을 곧바로 그만두셨다. 공장을 그만두고 얼마 안있어 아빠께서 회사를 경북쪽으로 옮긴 동시에 우리 역시 악몽에서 벗어나듯 진천을 벗어나 경북 영천 문외동으로 이사를 갔다.
경북 영천에선 무척이나 볕이 잘 드는 동네에서 살았던 걸로 기억한다. 대청 마루가 딸려 있는 디귿자로 된 집이었고, 그 중 한칸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동네 자체도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밝을 뿐더러, 함께 사는 사람들도 많아서인지 마당은 항상 북적북적하였다.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디귿자의 한옥을 쪼개어서 한칸은 안집, 한칸은 우리집, 다른 한칸은 어느 할머니와 시집 안 간 아가씨가 쓰는 집 이렇게 나뉘어졌다. 마루는 있었지만, 부엌은 재래식도 그렇다고 완전한 수세식도 아닌 쑥 내려가서 있는 조금 애매한 구조의 부엌이었다. 방도 두칸이었지만, 정선때처럼 방 한칸을 두개로 쪼갠 듯 방 두칸이 서로 미닫이 문 하나 사이로 나뉘어져 있었다. 집 크기만으로 보자면, 진천집이 훨씬 나았었다. 엄마는 큰 방은 안방으로 쓰셨고 그 옆에 딸린 작은 방은 나와 동생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셨다. 할머니의 깜짝 선물로 내 방에 책상도 생겼고 드디어 내 방에서 잠도 잘 수가 있었다. 어찌 보면 최초로 생긴 내 방이나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진천 때와는 달리 영천 집에서는 집에 대한 활용을 쓸모있게 잘한 편이었다. 모든 낮에 생활은 거의 마루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면 되었다. 특히, 부슬부슬 비오는 날 엄마가 마루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나는 그 옆에서 엎드려서 학교 숙제를 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낭만이었다. 비오는 날 마당 화단에 흙에서부터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는 나에게 아련한 향수같은 것이었다. 숙제도 마루에서 했지만, 엄마한테 혼나는 것도, 공부 지도도 모두 마루에서 이루어졌다. 엄마는 방에 대한 활용을 잘했다기보다 마루에 대한 활용을 잘했던 것 같다.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엄마가 방에 있던 때보다도 마루에서 있었을 때가 더 기억에 남을 만큼이었으니 말이다.
막상 이사 온 영천에서의 생활은 썩 즐겁지가 못했다. 안집을 제외한 다른 셋집들의 텃세가 심했다. 나 역시 학교를 가면 반 아이들과의 관계도 문제였지만, 나를 늘 미진아 아동으로 취급하는 선생님과의 관계도 썩 좋지가 않았다. 선생님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나를 다른 아이들과 달리 취급하였다. 50대의 아줌마 전형의 파마머리 선생님이었는데, 늘 나를 보는 눈빛이 썩 곱지가 않았다. 진천에서는 친구가 없어도 시험만 보면 아이들이 나한테 우르르 몰려들 정도로 내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다. 특히 슬기로운 생활과 받아쓰기 시험을 잘봐서 그 주변 아이들은 늘 나한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시험을 잘 볼 수가 있느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진천에서만 해도 학교만 다녀오면 엄마가 공부하란 소리를 안해도 혼자서 척척 공부할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학습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엄마는 그냥 나가 노는 걸 더 좋아하셨고 나는 주변에 친구도 없지, 심심하니까 항상 엄마를 졸라서 학교 근처 서점에서 산 이달학습이라는 학습지를 매일 심심할 때마다 풀어보곤 했었다. 그렇게 늘 당연하듯 철썩같이 따라붙었던 우등생이라는 꼬리표가 떼어진 건 1학년 2학기에 영천 중앙 초등학교로 전학을 와서부터였다.
전학을 오자마자 선생님은 일교시부터 저번 시간에 배운 부분을 복습 겸 쪽지 시험을 본다고 하였다. 쪽지시험을 봐서 50점 미달 학생은 무조건 나머지를 시키겠다고 협박조로 말씀하였다. 반 아이들은 익숙하듯 다들 자기 가방을 책상 가운데에 척척 올려놓았다. 한번도 쪽지 시험이라는 걸 진천 학교에서는 정규 시험, 혹은 받아쓰기 이외에는 치뤄본 적이 없던 나였다. 더군다나 선생님이 시험을 본다는 부분은 진천 학교에서는 전혀 진도를 나가지 않은 부분이었다. 나는 손을 들고 선생님한테 전학교에서 아직 그 부분까지는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는 말을 하였다. 당연히 제외가 될 줄 알았던 예상을 깨고 선생님은 표정 하나 없이 무뚝뚝한 말투로 그건 니 사정이고, 그럼 니 옆짝한테 묻던지 왜 내한테 그러는데, 라고 말하였다. 옆을 보니 짝꿍은 오히려 벌레를 훌치는 듯한 표정으로 더욱더 손으로 시험지를 가리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 날 눈 앞이 캄캄한 속에서 답안지에 아무것도 적어낼 수가 없었다. 반 아이들이 모두 나가고 남은 나와 다른 전학생 둘만이 남은 적막한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 교통지도를 한다며 나가서 들어올 생각을 안했다. 그렇게 한시간, 두시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전학 온 다른 아이가 니도 전학왔나, 라고 물었다. 순간 나는 나 말고도 비슷한 아이가 또 있구나 싶은 동질감에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아이는 씨익 웃어보였다.
"야, 니도 그냥 집에 가라."
그렇게 그 아이는 그 말만 남기고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먼저 가방을 싸서 밖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있다가 보니 무척 서러웠고 나는 울면서 해가 질 무렵에서야 겨우 밖을 나왔다. 운동장 사이를 건너는데, 건너편에서 담임 선생님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선생님은 마치 남의 반 아이를 보듯 무심하게 나를 보곤 어떠한 말 한마디도 없이 옆을 휙 지나가 버렸다.
눈물 바람으로 집에 들어선 나에게 엄마는 어찌된 일이냐며 놀라서 맨발로 마당을 뛰쳐나왔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다 말했고 엄마는 그게 그렇게 울며 들어 올 일이냐며 오히려 나를 회초리로 때렸다. 엄마는 계속 울면 계속 때릴 거라고 했고 나는 그런 엄마가 영문 모르게 원망스러웠다. 그땐 특히 즐거운 생활에서 계이름 시험을 날마다 보곤 하였는데, 엄마는 그때마다 속상한 얼굴로 나를 계이름 복습을 시키곤 하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장조를 보면 그 다음날 바로 바장조가 아닌 사장조 시험을 보는 식이었고 엄마는 전투라도 돌입한듯 복습뿐 아니라 진도가 한참 남은 예습까지 몽땅 미리 가르치곤 하였다. 그때 오죽 답답했으면 엄마가 시외에 있는 이모한테 전화해서 하소연을 했을 정도였다.
그 잘하던 받아쓰기 조차 항상 반은 맞고 반은 틀려갖고 오니 항상 받아쓰기만은 알아서 잘하겠거니 믿었던 엄마는 실망 뿐 아니라 적지않은 충격까지 받으셨었다. 그때 엄마의 망연자실한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날 선생님 부름으로부터 학교로 끌려간 엄마는 딸이 학습 부진아 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었고 혼비백산 된 엄마의 눈 앞에 보인 것은 바로 담임 선생님의 반쯤 열린 책상 서랍문이었다. 그제야 선생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게 된 엄마는 표정을 태연하게 감추고 그러냐고 그럼 혼내든 어쨌든 알아서 하시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나오셨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보람반에 보내야 할 거 같아요, 라는 말에도 엄마는 그러시라고 했고 우스운 사실은 무서운 협박을 잔뜩한 선생님은 끝내 나를 학습 부진아들만 모아놓은 보람반에 보내지도 못하셨다.
지금에서 엄마가 그때를 회상하며 하신 말씀에 의하면 선생님이 말하는 그 보람반이라는 곳은, 안집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학습부진아가 가는 곳이 아니라 지체 장애인이나 저능아들이 가는 반이라고 하였다. 그것도 안집에 내 또래 언니가 보람반에 있기에 슬쩍 떠보듯 진경이는 왜 보람반에 간 거예요? 라고 물어서 알게 된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 사실을 알고 엄마는 피가 거꾸로 솟듯 하였지만 곧 평정심을 찾았고 다시는 나를 가지고 쪽지 시험 못봐갖고 왔냐는 타박은 하지 않으셨다.
내가 발표를 하면 대놓고 뭐 저런 애가 다 있느냐고 되도 않는 말 하니까 발표도 하지 말라는 투로 빈정대던 선생님께 벗어날 기회가 생긴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영천으로 온지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아빠께서 본사로 발령받으셨다며 이사를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가 한참 추운 겨울인 93년 12월이었다. 발령받은 본사는 경북 영양이었고 엄마는 이사가기 지겹다고 하면서도 어쩐지 표정은 썩 싫지 않아 보였다. 엄마한테 이사가야 하니 짐을 싸라는 말을 들은 나는 최초로 신나게 내 물건을 알아서 척척 싸기 시작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이사갈 때마다 서운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는데, 영천에서는 나름 동네 친구도 몇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학교에서 많이 데여서였는지 항상 이사갈 날만을 기다렸던 터였다. 동네에서 사귄 몇몇 친구들한테 이사간다는 말을 전함은 물론 항상 뻔질나게 가서 놀곤 했던 성당에 늦은 저녁에 모여서 눈물의 이별식도 하였다. 가장 서운하게 생각하고 슬퍼했던 사람은 안집 언니였던 진경이 언니랑 우리 바로 윗집 살았던 지희언니였다. 우리 나중에 커서 꼭 다시 만나자, 고 서로 손가락을 걸으며 약속했다. 내가 이사가던 날, 아침 일찍, 진경이 언니는 나를 안집으로 불러서 이것저것 자신이 쓰던 물건을 나눠주기까지 하였다. 본인이 무척 아꼈던 것들이니 너도 아껴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가 이삿짐 센터 차에 올랐을 때 안집 마루에 서서 빼꼼히 나를 바라보던 진경이 언니의 눈빛도 잊을 수가 없다.
영양 살기 전까지 우리 집은 자가용이 없어서, 항상 이사다닐 때마다 이삿짐 센터 차의 신세를 져야만 했었다. 가까운 거리는 짐이 실려 있는 뒷칸에 겨우 앉아서 가거나 아빠를 제외한 엄마와 우리는 따로 시외 버스를 타고 가거나 하였다.
영양에 살집에 도착하니, 안집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마중을 나와 계셨다. 물론 영천에 안집도 마루에 다들 신기한 구경을 하듯 마중을 나왔지만, 그렇게 따뜻하게 맞아주는 집은 영양 집이 최초였다. 나이든 사람들만 사는 시골 동네에 모처럼 젊은 사람들이 와서 반갑고 뭔가 신기한 눈초리도 없잖아 있었다. 영양은 커다란 철제 대문이 있고 그 안을 들어가서도 더 안쪽으로 쑥 들어가서야 우리가 살 집이 있었다. 안집을 거쳐서 들어가야 있는 구조의 집이었다. 화장실은 옛날 재래식이었고 방은 두칸이었다. 안방이 조금 더 넓긴 했지만, 작은 방도 그렇게 안방도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영양 집도 안방과 작은 방이 붙어 있었고 안방을 통해야 작은 방을 건너갈 수가 있었다. 안방에서 나오면 바로 부엌이 조그맣게 있었고 부엌에서 나오면 바로 바깥 마당이었다. 희한한 건 그 전에 집들에 비해 좋은 점이 하나 없는 집이었음에도 엄마의 회고에 따르면 영양집이 그 전 집들에 비해 전세값이 좀 나간 편이었다고 하셨다.
집은 영양읍내에 있었고 읍내 중심에 있어서인지 집에서 몇발자국만 나가면 사람들로 무척 활기가 있었다. 남들은 오지 시골이라고 해도 읍내여서인지 나름 근처에 시장도 있었고 광장에서는 5일장도 서곤 하였다. 읍내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 나름으로 구색을 다 갖춰놓고 있는 동네였다. 나가면 논 밖에 없던 외딴집이었던 진천이나 시장을 차타고 30분은 넘게 나가야 갈 수 있던 영천에 비하면 무척 번화가에 살았던 셈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우리가 듣도 보도 못했던 시골 오지로 이사를 간다며 차안에서 내내 슬프게 우셨고 나는 얼마나 시골이길래 저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텃세가 심해서 적응하기가 척박했던 영천과 달리 영양 사람들은 무척 순박한 편이었다. 애초부터 텃세라는 걸 모르는 사람 같았다. 오히려 우리보고 서울 사람이 이런 시골에 왔다며 무척 반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다못해 안집 노부부도 우리 가족을 한식구처럼 여겼고 때문에 우리는 어디 놀러다닐 때면 꼭 안집 분들을 모시고 다니곤 하였다.
영양중앙초등학교 1학년 2반으로 전학을 했는데, 학교는 전형적인 시골 학교 답게 무척이나 조그만했다. 내가 다닌 학교들 중 가장 규모가 작았다. 2층으로 된 옛날 일제식 건물이었고 건물 자체는 전학교인 영천 중앙초와 무척이나 흡사했다. 하다못해 영천 학교와 이름조차 똑같아서 나는 혹여나 이번 학교에서도 똑같이 텃세가 심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내 성격마저 확 바뀌었을 만큼 선생님이고 아이들이고 너나 없이 모두 순박하고 친절했다.
담임은 김숙희 선생님이었고, 무척 젊고 머리가 긴 처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항상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눈여겨 보곤 하셨다. 쉬는 시간이면 나는 교실 뒷편 양탄자가 깔린 도서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곤 하였고 선생님은 무슨 책을 읽느냐고 관심있게 물어오기도 하고 친구들과 나가 놀으렴하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쑥스럼이 많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대신해서 선생님은 몇몇 여자아이들에게 진희랑도 놀렴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게 계기가 되어 나는 전학을 오자마자 금세 친구도 몇 사귈 수가 있었다.
전학을 온 날, 학교를 다녀오자마자 엄마가 가장 먼저 궁금해 한 건 친구는 사귀었니, 였다. 항상 내가 혹여나 학교에서 적응을 못해서 친구도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될까봐 엄마는 늘 노심초사였다. 내가 학교를 다녀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엄마는 내 손을 끌고 근처 피아노 학원부터 등록하였다. 학교에서도 겨우 적응할까 말까인 와중에 또 다른 짐을 진 것 같은 참담한 심정으로 나는 무슨 피아노 학원이냐고 되물었다. 엄마는 안집에 고모가 이 곳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고 더군다나 여기 애들은 다들 피아노 학원을 다니나 보더라, 고 하였다. 나는 엄마가 안집에 잘보이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내 교우관계를 걱정하는 때문인지 헷갈리는 와중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의외로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엄마가 원했던 교우관계의 효과는 무척이나 큰 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매일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오자 엄마는 그때마다 어떤 친구든간에 무척 환대하였다. 더군다나 2학년 올라가자 마자 엄마는 자모회에 들었고 그 덕분에 엄마 같은 동네에 사는 자모회 엄마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자모회 엄마들과 함께 모여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가까운 군청 바로 옆에 있는 군립 도서관에 드나들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자모회 분들과는 멀리 이사 온 지금까지도 가끔씩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할 정도니 그 당시 얼마나 친하게 지냈는지는 짐작해 볼 만하다.
내가 서울 출신이라는 걸 내 친구들은 그닥 신기해 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살결이 하얗다고 역시 서울 사람은 뭔가 다르다고 난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심지어, 엄마 팔뚝살을 만져서 얼굴에 찍어바르는 시늉까지 할 정도였다. 친한 아주머니께서 엄마를 다른 분에게 소개할 때도 서울에서 온 진희엄마라는 말을 꼭 덧붙이곤 했다고 하였다. 엄마나 나나 서울 출신이라는 걸 으레 어떤 특권처럼 생각했고 특히 엄마는 그걸 외국에서라도 살다 온 것처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곤 하였다. 언젠가부터 너는 서울에서 살다 온 애니까 시골 애들한테 기죽을 거 하나도 없어, 라고 늘 버릇처럼 말씀하기도 하였다.
내 기억에 의하면, 엄마는 나를 뭔가 다른 애들과 다른 특별한 아이로 만들고 싶어 하셨고, 그건 서울 출신이라는 자부심에 기반한 것이었다. 아이들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서울'이라는 타이틀을 엄마는 다른 아주머니들과 휩쓸려 대단한 것인양 아셨고 때문에 학용품도 무조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 옷도 좋은 걸로 입히려고 온갖 애를 쓰셨다. 특히 영양에 할아버지나 할머니들만 사는 아이들은 제대로 씻고 다니지도 못하는 형국에, 나는 드레스마냥 생긴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갔으니 반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튀어도 너무 튀어 보여서 문제였다. 반 애들은 나를 보곤 공주라고 놀리곤 하였고 그때마다 나는 오히려 창피해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어느날 부턴가 엄마는 내가 못사는 집 아이를 집에 데리고 오면 지저분한 애들을 사귄다며 싫어하셨고 집에도 데리고 오지 말라고 엄포도 놓았다. 나는 얘네들도 다 친구야 라고 항의하듯 말해도, 엄마는 절대 안된다는 주의였다. 우리가 예전에 받았던 차별은 벌써 잊은 듯, 하다못해 영천에 아파트 사는 엄마들은 잘난척 하는 여자들이라고 대놓고 흉봤던 엄마는 이제는 완전히 전세가 역전이 된 듯 하였다. 엄마 논리에 의하면 함께 다녀도 전혀 남들에게 흉잡히지 않을 만큼의 깔끔한 차림의 친구를 사귀란 거였고 나는 어떻게 그런 친구만 쏙쏙 골라서 친해줄 수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엄마가 원하는 공부도 잘하면서 깔끔한 친구들을 단짝으로 사귀어서 집으로 데리고 오곤 하였고 나 역시 그 친구들 집으로 놀러가곤 하였다. 거기에 엄마는 무척 흡족해 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워낙 내가 예전에 학교에서는 친구도 없었고 혼자였다 보니 엄마는 친구를 데려오는 자체는 무척 반기셨다. 항상 친구들이 오면 밥먹고 가라고 하나라도 맛난거 해주려고 애쓰고 친엄마 빙의라도 하듯 무척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아빠는 어느날, 회사에서 다마스라는 차를 중고로 얻었다고 하였고 우리는 중고든 새차이든 어쨌든 우리에게 드디어 차가 생겼다는 것에 무척 환호하고 기뻐했다. 우리에게 생긴 최초의 자가용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자랑스럽게 끌고 온 다마스는 이미 폐차 되기 직전의 굴러가는 것도 시원찮을 것 같아 보이는 고물차였다. 엄마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똥차네, 라고 말했다. 그 뒤부터 다마스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똥차가 되었다. 엄마는 툭하면 똥차가 그래도 잘 굴러가네, 영 시원찮은 게 똥차라서 그런가 봐요, 라고 습관처럼 말씀하곤 하셨다. 잘 굴러가도 똥차라서 그렇다고 하셨고 못 굴러가면 똥차라서 그렇다고 타박을 하셨다. 나중에는 엄마만 똥차라고 부른 게 아니라 아빠도 다마스를 똥차라서 고쳐야 할 데도 많다는 둥 하셨고, 나랑 동생도 똥차라고 놀리곤 하였다.
비록 외관상으로는 보잘것 없는 똥차여도 우리 집은 차가 생긴 이후로 영양 군내 어디를 그렇게 잘 쏘다녔다. 근처 대진 해수욕장에 다녀오기도 했고 곡강으로 놀러가서 고기를 궈먹고 오기도 하고 안집 분들 모시고 시원한 냇가에 가서 발 담그고 오기도 하였다. 짐 싣기도 좋아서 캠핑도 잘 다녔었다. 비포장길도 탈탈 소리를 내면서도 무사히 잘 다녀서 엄마는 그 점을 무척 신통하게 생각하였다. 영 시원찮을 것 같던 똥차의 능력은 생각보다 값진 것이었다.
다마스를 끌고 다니다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아빠는 다마스를 폐차시키고 또 다른 중고차 프라이드를 끌고 오셨다. 엄마는 그래도 정들었던 다마스가 사라짐에 무슨 사람이 죽은 것마냥 무척 슬퍼하였다. 엄마는 다마스를 똥차라고 부른 것도 미안하다고 하셨다.
안집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를 친손자처럼 생각을 하셨다. 특히 할아버지는 나무공예 일을 하셨는데, 지금은 모르지만 그 당시는 예술가로 인정도 못받는 직업이었다. 누가 뭐라하든 항상 묵묵히 집 안에서 혼자 나무 깎는 일을 하셨다. 문제는 작업을 하실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리곤 해서 항상 엄마는 그걸 불만으로 여기고 있다가 할아버지한테 한소리 하신 적도 있으셨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우리가 지나갈 때면 작업을 중단하곤 손으로 허공을 휘저어 먼지를 없애는 시늉을 하셨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하면 항상 호주머니에서 눈깔 사탕을 꺼내어 내 손에 쥐여주곤 하셨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 "오야."라고 대답하곤 이빨빠진 얼굴로 활짝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곤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항상 할머니랑 싸우시는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알고보니 동네에서 유명한 술고래에 젊을 적 거의 건달 급이었다고 하였다. 그런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할머니는 천성부터 무척 온순한 분이었다. 할아버지의 젊을 적 포악한 성격에 못견디고 객지로 나간 자식들을 제쳐두고도 할머니는 끝까지 할아버지의 곁을 지키셨다. 항상 고추 꼭지 따는 일을 하면서 엄마한테 할아버지 흉을 보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엄마는 항상 할머니 편을 들어드리곤 하였다. 할머니는 이 놈의 영감 때문에 못살겠다는 둥, 얼굴도 꼴뵈기 싫다는 둥 해도 항상 할아버지의 알콜로 상한 몸을 걱정하셨다. 우리가 이사가고 10년 뒤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열흘도 안 있어서 할머니 역시 세상을 뜨셨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평생을 이대로 평화롭게 영양에서 살 것 같은 시절도 얼마 안가서 막을 내려야 했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그 시절을 그리워 할만큼 정말 아무 걱정 없이 2년을 살았었는데 아빠는 대구로 이직을 한다고 하셨다. 엄마나 나나 누렸던 호시절을 내려놓듯 무척 슬퍼했다. 나는 단짝으로 친했던 경수라는 친구가 무척 서운해 했고 부모님은 안집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나가지 말라고 눈물로 말리곤 하셨다. 그래도 이사를 가야 한다는 우리집과 옥신각신 며칠간 다투다가 할머니는 집안으로 홱 들어가 버리셨고 방을 보러 오는 사람들마다 퉁명스럽게 대하곤 하셨다. 엄마는 도대체 할머니는 어쩌자고 저러시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하면서도 그래도 우리 아이들을 친손주처럼 생각하셨는데, 라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다행히 이사 기간에 맞추어 이사 올 사람이 구해졌고 우리가 이사가는 날 할머니는 안나올 것처럼 하다가 끝내는 우리를 눈물로 배웅하셨다. 예쁜 것들을 이제 앞으로 못본다는 게 말이 되노, 라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할머니 눈물을 닦아드리면서 할머니 저희 대구에 가더라도 또 한번 더 놀러올게요, 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랑 동생 인협이를 품에 한번 안으시곤 다음에 꼭 놀러오라고 당부도 하셨다. 한번도 못 찾아뵙다가 10년 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은 엄마는 눈물을 훔칠만큼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였다. 얼마나 진희랑 인협이가 보고 싶으셨을까, 이렇게 잘 큰 걸 알면 무척 좋아하실텐데, 라고도 하셨다.
여기저기 수시로 이사를 다니면서 단한번도 서운해 하지 않았던 엄마는, 영양을 떠나면서는 내내 고개도 못들고 눈물을 훔치셨다. 지금도 1년에 한번씩은 꼭 영양을 찾아갈 만큼 너무나 정이 들어버린 탓이었다.
먹구름이 걷히듯, 소나기가 지나간듯 우리의 기분도 대구를 목전에 두고는 무척 설레어 하였다. 새로운 고장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충만했다. 엄마는 내 기분을 애써 달래듯 이번 집은 거의 새집이라고 하였다. 집 바로 앞에 어린이 놀이터도 있다고 하였다. 화장실도 집안에 있고 따뜻한 물도 사시사철 아무때나 나온다고도 하였다. 대구에 거의 도착했을 때 우리집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새로운 고장에 대한 기대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모든 게 신식인 새로운 집에 간다는 설레임이 더 컸다.
맨 단층 주택에서만 살다가 다세대 주택 그것도 3층으로 온 건 대구가 처음이었다. 남들에겐 평범해 보이 집이 우리에게는 엄청 대단한 선물인 것처럼 여겨졌다. 은색 대문을 열고 들어서서 엄마 아빠를 따라서 3층 집으로 올라갔다. 아직 가구가 없어 횅한 집이지만 딱 보기에도 예전 집들에 비하면 궁궐이었다. 엄마는 우리도 이제 이런 집에서 산다며 자부심 어린 눈빛으로 얼른 들어가서 구경하라며 우리를 채근하였다. 방은 두칸이었고 안방은 작은방에 비하면 무척 넓은 편이었다. 거실겸 주방이 있었고 화장실은 운동장마냥 넓었다. 이제 지은지 2년 밖에 안된 거의 새집이라고 하였다. 집 외관은 밖에서 보기에도 마치 외국에 있는 건물마냥 멋있기만 하였다.
엄마는 한 열흘은 행복해 하셨고 비록 전세집이지만 꼭 내집인 것마냥 생각하셨다. 엄마는 이게 다 아빠 덕분도 있지만 엄마가 워낙 안쓰고 꼼꼼히 모아온 결과라고 입이 닳도록 우리한테 자랑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뭔가 허전해 하셨고 그건 바로 내집 마련에 대한 갈망이었다. 살다보니 대구 집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되어 갔다. 더욱이, 안집 희수 아줌마가 집을 무리하게 지은 바람에 빚에 허덕이는 모습을 엄마는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젊은 아기 엄마도 무리하게라도 집을 지었는데 우리는 이게 뭔가,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으셨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엄마는 직장을 다니셨다. 안집 희수 아줌마가 일자리를 소개해주었고, 계명대 바우어관이라는 매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어느날부턴가 엄마는 나름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많이 버심에도 점점 우리에게 주는 용돈이나 모든 생활비에는 야박하리만큼 돈을 쓰지 않았다. 동생이 자전거를 사달라고 아무리 눈물바람으로 졸라도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에서 엄마의 회고에 따르면, 그 당시 가장 돈을 많이 벌었고 또 많이 모았었다고 하셨다.
엄마에게는 돈버는 기쁨이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행복하지 않았다.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항상 혼자였고 하교해서 집에 가면 반겨주는 엄마가 없이 휑한 집안이 왠지 나는 싫었었다. 게다가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동생은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온갖 떼를 쓰고 악을 써가며 나를 힘들게 하였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항상 집에서 있으면서 간식도 해주는 다른 집 아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동생은 저녁 늦도록 집앞 놀이터에서 노느라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안들어가려는 동생을 거의 소처럼 잡아 끌어가며 간신히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곤 하였다. 욕실에서 씻기고 숙제시키는 것도 모두 내 몫이었다. 그땐 그게 지칠만큼 힘들었음에도 한번도 엄마한테 힘들다는 이야기조차 한적이 없었다. 힘들다고 말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다는 편이 더 알맞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1층 마당에서 동생이 혼나는 소리를 들었다. 2층 재민이 아줌마가 동생 인협이를 앞에 세워두고 연신 삿대질까지 해대며 혼을 내고 있었다.
"니 때문에 우리 재민이가 지 자전거도 잘 못타고 그게 되는 말이가. 내가 니 뺏어 타라고 재민이 자전거 사준줄 아나. 그렇게 타고 싶으면 느그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던지! 니 앞으로 재민이 자전거 탈거가 안탈거가!"
내가 듣기론 듣기 역겨운 협박에 가까운 윽박지름이었다. 동네에서 고만한 또래들 중 자전거가 없는 아이는 유일하게 동생 하나 뿐이었다. 동생은 항상 엄마한테 자전거 한대만 사도~ 라고 부탁을 하고 손을 빌어도 엄마는 듣는 체도 하지 않으셨다. 괜히 자전거 좀 끈답시고 도롯가에 가서 타게 되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결국 엄마한테 자전거를 얻어낼 재간이 없자 동생은 동네 아이들한테 한번씩 자전거를 빌려타는 모양이었고 그 중 가장 만만한 아이는 같은 나이에 같은 집에 사는 재민이었던 모양이었다. 안그래도 재민이가 맨날 인협이 꼬붕 노릇하고 다닌다며 속상해 했던 2층 아줌마였다. 나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아줌마한테 애가 뺏어탄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번 재민이한테 자전거 빌려 탄 거 같은데 그것가지고 이웃간에 야박하게스리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라고 말했고 아주머니는 순간 내 눈치를 보면서 그게 아이고, 진희야, 그게 아이다 라고 자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는 거였다. 나는 너무 서럽고 어이가 없는 마음에 동생 손을 억지로 잡아 끌면서 안그래도 우리도 엄마가 곧 있으면 자전거 사주신다고 했다고 치사해서 다시는 재민이 자전거 못타게 제가 타이를테니까 다시는 제 동생 야단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무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줌마를 뒤로하고 나는 울고 있는 어린 동생을 집으로 끌고 가서 정신없이 매질을 하였다. 동생은 누나 다신 안그럴게, 다신 재민이 자전거 안탈게 라고 울부짖었고 나는 정말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마냥 등이고 엉덩이고 가릴 것 없이 사정없이 때렸다. 그렇게 한차례 때리고 서럽게 울고 있는 동생이 안쓰러워서 안아주고 다독여주곤 나가서 놀라고 하였다. 그때 나는 가슴이 어찌나 아프던지 다른 건 모르겠지만, 동생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던 엄마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그날 엄마는 동생 인협이의 빨갛게 부은 자국을 보고 나를 불러선 어쩐 일이냐고 물었고 엄마는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우선 나를 혼내기부터 하셨다. 동생 혼내는 일은 엄마만 할 수 있는 권한인데 왜 네가 동생을 무슨 자격으로 때렸냐는 거였다. 나는 오늘 낮에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 하였고 순간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우리가 없이 사는 것도 아닌데, 라고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갑자기 서랍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우리 앞에 통장 하나를 내밀어 보였다. 거기엔 몇천만원이나 되는 돈이 찍혀 있었다. 96년도에 몇천만원의 돈은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었다. 5천만원 정도면 아파트 한채를 살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었으니 말이다. 엄마는 그 동안 숨겨왔던 엄마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제 우리를 안정적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아파트 살 돈을 모아오셨다는 거였다. 이미 부모님은 청주에 있는 아파트 분양 모델하우스에 다녀왔고 분양 접수도 하고 오셨다고 했다. 추첨제라서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니 절대 다른 집에는 입밖에도 내지 말라는 엄포도 하였다. 아파트에 '아'자도 꺼내선 안된다는 거였다.
자전거는 아빠한테 선물로 받았고 아빠 말씀에 의하면 아동용 중에 최고급으로 산 거라고 하셨다. 검은색 바디에 빨간색 바퀴는 정말 누가 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동생은 선물을 받자마자 자전거를 놀이터로 가지고 나가더니 저녁이 늦도록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빠는 동생 뒤를 밀어주었고 엄마랑 나는 계단 난간에서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엄마의 어마어마한 계획도 모르는 이웃집 여자들은 모두 엄마를 흉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진희엄마 악착같이 돈을 벌면 뭐하냐고 애들은 꼬질꼬질한데, 애들만 불쌍하지, 라고 하지는 않나, 어떤 아줌마는 그게 아마 진희네가 뭔가 빚이 있어서지 않을까요, 하면서 저들끼리 멋대로 추측하고 입으로 까불기에 정신이 없었다. 계단 난간에서 앉아서 재깔거리며 떠드는 여자들이 나는 어쩐지 잉여롭고 할짓없어 보였다. 내가 계단을 올라갈 때면 여자들은 하던 험담을 뚝 그치고 딴청을 피우며 길을 비켜주곤 하였다.
안집 희수 아줌마는 그 여자들 떠드는 자리에는 항상 없었다. 여자들과 어울리는 자체를 본적이 없던 것 같다. 항상 뭔가 정갈하고 고고해 보이는 이미지의 아줌마였다. 또 그렇게도 우리 엄마를 잘 따르기도 하였다. 엄마 말씀에 따르면 희수 아줌마가 가끔씩 와서 돈을 잘 꾸곤 했다는 거였다. 그때마다 엄마는 생색조차 내지 않고 항상 돈을 얼마건 간에 꿔주곤 하였고 아줌마는 그걸 무척 고마워 했다고 하였다. 아줌마는 나랑 인협이를 무척 예뻐했고 하다못해 열쇠가 없어서 우리가 집에 못들어가고 있으면 일부러 안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었다. 우리가 훗날 청주로 이사가고 나서도 엄마한테 대구에서 유일하게 꾸준히 연락 해 온 사람도 바로 안집 희수 아줌마라고 하였다.
우리가 아파트 당첨이 되고 나서도 엄마는 절대 아파트 이야기 이웃들한테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게 왜 그래야 하는지를 몰랐다. 혹시나 이사간다고 하면 우리를 못살게 괴롭히고 천덕꾸러기 취급할까봐? 라고 물었고,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의외의 대답을 하셨다. 당첨이 되었더라도 혹여나 불상사로 우리가 떨어져서 못가게 된다면 그게 동네에 무슨 망신이냐는 거였다. 엄마는 아파트에 당첨된 사실조차 잘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뻐하는 목소리보다 염려의 마음이 더 커보였다. 그 말을 할 때 엄마는 왠지 신주단지라도 모시듯 목소리를 죽이며 무척 비밀스럽게 말했고 목소리 마저 떨렸다.
엄마가 말하지 말란다고 곧이 곧대로 말하지 않을 내가 아니었다. 어차피 어린 내가 봐도 엄마가 염려하는 그런 일은 단 1%도 일어 날 일이 없어 보였다. 이 사실을 이웃집 여자들이 알아야 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안그래도 다른 때와 달리 싱글벙글한 내 표정을 보고 안집 아줌마는 뭔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집 내년에 아파트로 이사간다고 자랑했고 아줌마는 정말? 어머 잘 됐다 하면서 정말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빛을 보이셨다.
"느그 엄마 그래 고생하더니만 잘됐다, 정말 잘됐어. 어디로 가는데?"
"청주에 세원아파트로 가요. 우리도 이제 우리집이 생겨요."
"아이고 잘 됐다. 이제 진희네 집이 활짝 필 모양이다. 축하한다 잘됐다 야야."
우리집에 대한 소문은 윗집 아랫집 가릴 것 없이 널리 퍼졌다. 계단에 퍼질러 앉은 여자들이 이번에는 진희네 그렇게 고생하더니만 아파트로 사서 간대요, 소리부터, 진희 엄마가 고생 많았지, 애들도 고생 많았고, 우리는 언제 아파트에 자가로 이사가노, 라며 한탄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럴 때 기분이 어찌나 날아갈 듯 하던지. 내가 다 성취감이 느껴지고 이제 우리집은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사갈 날이 임박해서 아직 짓고 있는 우리 집이 될 아파트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이사갈 청주는 엄마가 태어나서 자라온 엄마의 고향이었다. 외가를 다녀오는 길에 지나치면서 자연스럽게 보게 된 것이었다. 엄마는 내 이름을 득달같이 부르며 여기가 우리 아파트라고 손가락질을 연신 하였다. 이제 막 도색하기 시작한 아파트 외벽에는 촌스럽게도 '세원3차'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아니 그보다도 더 크게 검은색으로 쓰여 있었다. 내가 꿈꿔왔던 아파트의 롤모델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우리집 근처 우방타운이나 청구아파트 같은 고급 아파트였다. 내가 우리집도 그런 거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애매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집 근처 주공아파트 이름을 대었을 땐 엄마는 그런 닭장아파트와 우리집은 차원이 다르니 비교도 하지 말라고 워낙 강조를 해왔더랬다. 그래서 나는 무척 대단하게 특별한 아파인줄로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아파트의 외벽만 보곤 실망하여 얼른 눈을 돌려버렸다. 엄마는 그런 나를 눈치채곤 지금은 저렇지만 이제 도색 들어가면 더 예뻐질 거라고 애써 설명을 하였다. 그리곤 한번 더 보라고 종용했지만 나는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 한번 보는 척 했다가 다시 눈을 돌려버렸다. 왠지 이사가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파트 외벽에 대한 충격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는지, 나는 굳굳이 친구도 없는 학교를 전학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건 청주로 이사가기 싫다는 말과 동일했다. 엄마는 오히려 내가 하도 전학을 다녀서 이사가길 질려하는 줄로 알곤 그걸 안쓰럽게 생각하였다. 설득을 하듯, 이번에 전학가는 학교는 새학교이고, 집도 새집이다, 네 방도 따로 있다, 그리고 다시는 이사를 가지 않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그렇게 막상 이사간 아파트는 생각보다 촌스럽지 않았지만, 이미 나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터라 아파트 현관문조차도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24평형에 방이 세칸이었다. 중앙난방이라 따뜻한 물이 사시사철 콸콸 나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내 방도 따로 생겼다. 동생과 함께 쓰는 방이 아니라 온전한 내 방이었다. 더군다나 화장실에 욕조가 있고 주방에 오븐렌지가 있다는 점이 그동안 없이 살았던 우리에게는 무척 신기한 것이었다. 늘 거실도 없다시피 살아왔던 우리에게 거실이 따로 생겼다는 사실은 감격 자체였다.
엄마는 이사 온 다음날 부터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주방 식기건조대에 달린 라디오를 틀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방에서 음식을 할 때도 청소를 할 때도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엄마는 새집에 대한 자부심으로 대구에까지 끌고 왔던 가구는 모두 버리고 거의 다 새가구로 교체를 하였다. 내 방에도 침대가 생기고 책상이 새로 생기고 안방에도 온통 새 가구들로 채워졌다. 거실에 텅빈 베란다에는 응접세트가 놓여지고 새로운 서랍장이며 가전제품들이 착착 놓여졌다.
그렇게, 우리 집은 18년 정도를 한결같이 살아왔고, 내가 출가하고 나서도 여전히 부모님은 이 집에서 살고 계신다. 워낙 처음 이사왔을 때의 설레이고 감격적인 마음이 잊혀지지 않아서 지금껏 한번도 이사할 생각조차 못하고 살다가 부모님은 얼마전에 또 다른 아파트를 분양하고 오셨다. 우리 아파트는 복덩이었는지, 처음 분양받던 가격에서 무려 지금은 몇배가 뻥튀기가 되어 돌아왔다. 5600만원의 아파트는 무려 2억 가까이 올랐고 부모님은 이제 조금 더 전원적인 시골로 이사를 가고 싶다며 지금 집은 전세를 놓고 근처 오창에 있는 새 아파트로 내후년에 이사간다고 하셨다. 엄마는 아직 지금 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래도 어떻게 마련했던 아파트인데, 라고 중얼거리며 끝까지 이사가기를 거부하셨다. 지금 집은 전세를 놓고 2년 뒤에 다시 돌아오자는 아빠의 간곡한 설득에 그제야 엄마는 그러자고 하였고 아파트는 무난하게 당첨이 되어 내후년에 이사갈 계획을 꾸리고 계신다.
사실 우리 부모님의 맨 처음 시작은 어느 부잣집의 차고방이라고 하였다. 부엌도 없고 연탄도 땔 수 없는 손바닥만한 방 한칸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르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저렇게 부모님을 본받아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지금의 내 투정은 말그대로 행복에 겨운 투정인 것 같다.
첫댓글 출근길에 잡혀 다 읽어 내리기에는 긴 분량이지만 다 읽고 출근을 해 봅니다. 살아있는 표현은 감동입니다. 역시나 다시 차근차근 되집어 보면서 정리를 하시면 좋은글이 나올것 같습니다. ^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열심히 더 추고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