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전 [김명인]
부질없어서 민들레는 들판 너머로
씨앗을 날려 보낸다, 멀리 바다로 가서
수평선을 기웃거리다
어떤 섬에도 내려앉지 못해 마침내 수장되겠지만
이른 봄날 민들레꽃 지천인 외딴섬 여 사이로
팽팽한 실랑이 끝에 낚싯줄 끊고 도망치는
물고기가 있다, 해도
미늘에서 멀찍이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맞물리면 끊어버릴 수 없어
미끼 근처로 되돌아서는 호기심
이 끈적임은 피가 아니라 떨칠 수 없는
유전자라는 것, 일생이 겨워도
한입 적시며 종족들이 이어진다
고집 센 물고기가 당겨대다 기진하는 바닷속에도
느슨하지만 연대가 엄연한 삶,
우리가 죽음이라 불러서 은밀하고 두터운
생식들은 지켜진다, 어둠 속에서
삐져나온 손이 다른 손목을 휘어잡는다
상대는 안 보이는데 끈근하게 질척거린다면
나를 휘어잡은 것 너의 사랑인가, 눈먼 유전자인가
-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문학과지성사, 2018.
밟을 뻔했다 [황동규]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래 집콕 하다
마스크 산책 나갔다
마을버스 종점 부근 벚나무들은
어느샌가 마지막 꽃잎들을 날리고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색이 한참 바래 있었다.
그리고 아니 벌써 라일락!
꽃나무들에 눈 주며 걷다
밟을 뻔했다
하나는 노랑 하나는 연분홍, 쬐그만 풀꽃 둘이
시멘트 블록 터진 틈 비집고 나와
산들산들 피어 있었다.
둘 다 낯이 익다.
노랑은 민들레, 그런데 연분홍은 무슨 꽃?
세상 사는 일이 대개 그렇듯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모른다.
알든 모르든 둘 다 간질간질 예쁘다
어쩌다 지구 사람들 모두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서로서로 거리 두는 괴물들이 되더라도
아는 풀 모르는 풀이 함께 시멘트 터진 틈 비집고 나와
거리 두지 않고 꽃 피우는 지구는 역시 살고픈 곳!
그 지구의 얼굴을 밟을 뻔했다.
-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
그해의 꽃구경 [최문자]
그해
그를 생으로 뽑아낼 수 없어서
생으로 사랑니 하나 뽑아내고 치통을 견디다 못해 꽃구경을 갔었다.
토종 흰 민들레 군락지, 제천 구인사
한꺼번에 피를 다 쏟아낸 듯한 핼쑥한 꽃들이
어금니가 보이도록 희게 웃고 있었다.
엎드려서 흰 꽃 두 송이 꺾는 사이
피가 한입 가득 고였다.
흰 꽃 위에다 대고
시뻘건 그를 뱉고 또 뱉어냈다
비린 입술을 흰 꽃으로 닦았다.
해질녘까지 지혈되지 않는 그를
약솜처럼 물고
하루 종일 그 산을 쏘다녔었다.
그해
그게 꽃구경이었을까?
- 박두진문학상 수상작, 2008
낮잠 [김참]
내가 창문 활짝 열고 낮잠 잘 때 내 귀는 한여름 토란잎처
럼 커다랗게 자란다 내가 코골며 꿈을 꿀 때 내 귀는 고구
마 줄기처럼 길게 뻗어나간다 내 귀는 냇가 돌담 옆 민들레
로 피어나 검은 염소가 풀 뜯는 소리 듣는다 내 귀는 쇠비름
처럼 번지며 돌담 따라 걷는 아이의 낮은 발소리를 듣는다
키 큰 남자는 녹색 장화를 벗어 내 귀가 해바라기처럼 자
라는 화단 너머로 던진다 옆집 마당에 핀 안개꽃이 창백한
낮달로 뜬 내 귀를 바라본다 옆집 아가씨가 창밖으로 얼굴
을 내밀어 화단의 열대식물을 내려다본다 내 귀는 그녀의
지붕에 앉은 비둘기가 되어 그녀의 콧노래에 맞춰 고개를
흔든다
점점 커지는 내 귀에 흰나비 두 마리 춤추며 내려앉는다
내 귀가 이탈리아 식당 뜨거운 지붕 위에서 화덕의 피자처
럼 빨갛게 익어갈 때 나는 식은 땀 흘리며 낮잠에서 깨어난
다 대문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가 느티나무에 뜨거운 귀를 붙
인다 바람이 분다 내 귀는 느티나무 가득 초록 잎들로 돋
아난다
-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문학동네, 2020.
보수동 골목 [박은영]
절판된 길을 읽습니다
읽다가 접어놓은 흔적으로 두툼한 한 권,
로맨스 소설이고 싶었으나
그의 생은 고딕체
딱딱한 문장으로 나열되었습니다
최초의 독자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죠
한 단락 안에서 줄거리 없이 살다
장문의 봄,
별이 되어 각주로 매달렸다죠
겉장의 시대를 지우고 수명이 다한 날들이
좁은 장지에 몸을 뉩니다
변하지 않는 자세로 바닥에 깔린 역사서
구겨진 가슴이 기운 세계를 받치고 있습니다
부록같은 자식들은 곁을 떠나고 없지만
책장 어디쯤 민들레 한 송이 피어 있을,
저 두꺼운 몸을 빼내면
지구 한 귀퉁이가 무너져 버릴지도
양장의 날개를 펼친 책들이 페이지를 벗어나
어느 문맹의 별을 반짝일지도 모릅니다
어깨 접힌 골목에 밑줄을 긋는
저녁의 행간
늙은 개척자의 목차에서 길을 찾던 바람이
한 장, 보수동을 넘깁니다
-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실천문학사, 2020.
남해금산 [원종태]
끝내 오르지 못하는 산 하나 있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물음이 올 때
누구는 저 산을 오른다고 말했다
가만히 귀 기울여주는 굴참나무숲에서
오래토록 서 있었다
시릿대숲에서 시릿시릿한 바람이 새어나온다
위로받지 못한 청춘의 날들이
바위에 서툰 글씨로 적혀있는 것을 본다
민들레 홀씨는 가벼워서 멀리 가겠구나
히말리야 갠지즈 강이 좋아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를 생각한다
바위는 바람을 불러 제 몸을 깍고
별빛과 달빛에 씻은 제 몸 조각들을
남해바닷가 모래알로 뿌려 놓았다
붉은 노을 조각조각 물결에 밀려 떠나가는데
끝내 입술을 넘지 못하는 말하나
바위속에 쿵쿵 던져두고 온 날들이었다
* 강허달림의 노래제목
- 풀꽃 경배, 신생, 2015.
동질감 [고영]
큰 눈을 가진 사람과
면사무소 간다
단양에서 살면서도
단양은 멀고
가는 봄비는
가는 봄비의 행방을 모른다
흰 민들레와 노란 민들레의 효능에 대한 사소한 실랑이 끝에 우리는
사실 관계에 집중하기로 하고
손을 잡는다
배후背後를 자처했지만
배면背面 의 슬픔만 지켜봐야 하는 무기력
전입신고를 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수선화와 함께
가는 비와 함께
그리고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단양에 살면서도
단양은 여전히 멀고
- 이승훈 시인 1주기 기념시집 <내일의 시>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문태준]
만일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 텐데
집밖을 나서 논두렁길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 텐데
흙을 부드럽게 일궈 모종을 할 텐데
천지에 작은 구멍을 얻어 한 철을 살도록 내 목숨도 옮겨 심을 텐데
민들레가 되었다가 박새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바람이 되었다가
나는 흙내처럼 평범할 텐데
-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2018
무릎에서 민들레가 자라면 [이린아]
얘야, 무릎 좀 닦아주겠니?
뒤뚱뒤뚱 걷는 사람이에요
나는 평생 무릎이 벌에 쏘인 것이라 생각했지요
벌들은 숨겨둔 꽃씨들을 물어 갔고
할머니는 오래 살아서 그렇다고 했지만
나는 할머니 집 앞 정원에 윙윙거리는 벌들 때문이라
는 것을 알아요
벌들이 날아가면 할머니는 하루 종일 누워 있어요
할머니는 벌이 드나드는 것이 저 민들레 때문이라고
했지만 비 오는 날엔 민들레가 가장 예쁘고 벌은 집 안으
로 들어오지요 할머니는 비 오는 날 밖에 나간 적이 없고
그래서 민들레를 본 적이 없어요
할머니가 재채기를 하면 시큼한 냄새가 났어요
벌들은 낮 동안 꽃씨를 물고 핥고 빨았고
나는 할머니 몰래 밤새 벌을 쫓았지요
벌은 낮에 날아야죠, 그렇죠?
퉁퉁 불은 꿀이 할머니 무릎에서 터졌어요
당분간은 할머니 곁에 벌이 오지 않겠지요
할머니에게 생긴 민들레의 며칠,
아마 밤새 긁기만 한다면
할머니는 매번 꽃밭에 갈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마른 단풍잎 같은 할머니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요,
얘야, 꽃밭에 좀 데려다주겠니?
- 내 사랑을 시작한다, 문학과지성사, 2023
꽃들과 싸우다 [이희중]
안경을 벗으면
풀꽃들이 밉다
한 송이 민들레는 줄잡아
이백 개의 씨앗을 배고 있다
저 한 송이가 씨를 날려
이백의 싹을 틔우기 전에 목을 쳐서
말라 부스러질 때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별꽃, 질경이, 괭이밥, 개여뀌, 뱀딸기 그리고
수많은 풀, 풀꽃들이 내 날 아래 죽고
맨눈으로 밭에 서면
나는 한낱 농부, 지킬 것이 있어
풀꽃들과 날을 헤며 싸울 뿐
다시 안경을 쓰면
풀꽃들이 고울 것이다
아이에게처럼, 착한 시인에게처럼
지난 어느 날의 내게처럼
-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문학동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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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잘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