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백마사원으로 가는 길
①
사천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품에서 마악 황비람의 손으로 건네지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은 완전히 탈진되어 거의 혼절해 있는 상태였다.
헌데 그 아이들의 손에서 한 개 암기(暗記)가 가공할 속도로 덮쳐오고 있지 않은가!
돌연 좌측에서 하나의 강전(强箭)이 날아와 암기를 쳐낸 것 또한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이 모든 광경에 황비람의 얼굴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이, 이런!"
"아이들을 어서 옮기시오. 비를 맞으면 해로우니."
사천극이 흡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때 한쪽에서 나직한 불호성이 들려왔다.
"나미아무타불, 시주께서는 조심하시오. 아무 것도 아닌 어린 시주들이라 해도 어느 때는 흉악한 어른들보다 무서울 때가 있는 법이라오."
황비람은 들려온 음성에 창백하게 질렸다.
"하, 하면 진정 홍아와 수아가 그런 짓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두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껄껄껄, 살펴보아야 소용없소이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뿐이니."
창노한 음성이 이어지고, 동시에 사천극이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화접목(梨花接木)의 수법이로군."
"껄껄, 그런 것 같소. 허나 이화접목의 수법보다는 더 고절한 사공(邪功)으로 아이들의 몸을 이용해 공격한 듯 하오. 수법으로 보아 천축 소뢰음사(小雷音寺)에서도 이미 절전된 인형공(引形功)인 듯 하외다."
창노한 음성은 이내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음성과 함께 한 청년승인이 천천히 사천극 일행을 향해 다가들고 있었다.
비내리는 노송(老松)의 좌측에는 언제부터인가 한 명의 청년기승이 우뚝 서 있었다. 비대한 체구에 축 늘어진 두 뺨은 어찌보면 익살스럽게 느껴지는 용모였다.
청년치고는 너무 비대해 오히려 괴이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의 음성이 조용히 이어졌다.
"소뢰음사의 인형공은 자신의 내공을 타인에게 주입시켜 자신의 의지대로 상대를 조종할 수 있는 사술이지요. 이갑자 이상의 공력이 없으면 펼칠 수가 없는 기공(奇功)입니다."
사천극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의외로군. 이 곳에 그 정도의 고수가 있었다니!"
"아미타불, 시주가 가고 있는 백마사원에는 인형공을 쓸 수 있는 고수가 천산의 눈(雪) 만큼이나 많답니다."
사천극이 흠칫해 했다. 그의 눈이 천천히 황의기승에게 고정되었다.
"호, 그대는 어떤 자인데 나를 알고 있는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음성이다. 일부러 모든 감정을 삭제하고 기(氣)만을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천극의 이러한 태도는 충분히 모든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황의기승이 장읍했다.
"소승은 숭산(崇山)의 약승(藥僧)이외다. 법명(法名)을 대치(大治)라 하지요."
사천극의 음성에서 더욱 감정이 사라져갔다.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음성, 그것은 살기를 담고 있을 때 보다도 더욱 가공할 압박이 되어 기승을 누르고 있었다.
"대소림(大少林)에서 오신 분이구료."
"그렇소이다."
약승, 대치선사는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사천극의 이런 태도를 아무 것도 못느낀다는 듯 묵살한 채 미소마저 떠올렸다.
- 약승, 대치선사.
나이 서른 일곱. 소림 최고배분을 지닌 무허성승(無虛聖僧)의 직전(直傳), 특이하게도 그는 소림무술보다는 의술(醫術)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어쨌든 본인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보답을 해야겠구료?"
사천극이 미소했다.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미소였다. 허나 대치선사는 여전히 넉살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껄껄껄, 보답은 무슨... 시주께서는 이 돌중이 막아주지 않았어도 충분히 피할 능력을 지니고 계신 것을 뉘라서 모르겠소이까, 소승은 단지 약간의 신세를 지기 위해 시주께 장난을 한 것 뿐이었습니다."
"내게 신세질 일이 있어 애써 막아주었다?"
"껄껄껄, 그렇습니다. 소승도 이번에 천산으로 가는 길인데 시간이 맞지 않아 시주의 마차를 얻어 탈까하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이지요."
"호, 스님도 천보대회에 참가하신단 말씀이시오?"
대치선사가 손을 휘저었다.
"껄껄, 소승 따위에게 무슨 자격이 있겠습니까. 소승은 단지 사백(師伯)께서 참가하신다기에 시중이나 들어 드릴까 해서 가려는 것이지요."
"훗! 소림에서도 백마사원의 백마상탑이 탐이 나는 모양이로군요."
어찌들으면 매도하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대치선사는 얼굴조차 붉히지 않은 채 태연스럽게 대꾸하고 있었다.
"백마상탑을 노리는 것이 어찌 본사 뿐이겠습니까. 귀가 뚫려있는 무림인들이라면 모두 백마사원으로 달려가는 중이 아니겠습니까. 껄껄껄!"
대치선사의 태도는 소탈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거침없는 말 또한 호탕하기까지해 사천극은 저절로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좋소. 같이 갑시다."
"아이고! 감사하외다. 헌데,"
대치선사가 짐짓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꼬았다.
"조금전 아이들을 시켜 기습했던 흉수는 찾지 않으실 것입니까?"
"후후, 내일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사천극은 이미 마차로 오르고 있었다. 대치선사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르며 내심 고개를 젓고 있었다.
'누가 이 자를 노리는 것일까? 아무튼 이 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설프게나마 성공하긴 했는데.'
대치선사의 눈에 기광(奇光)이 스쳤다.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잠시 후 사천극 일행을 태운 팔기마차가 다시 빗속을 뚫고 구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떨어지던 빗줄기는 다시 굵어져 대지를 적시고 있고, 그 가운데 소리없이 질주하고 있는 팔기마차는 신비와 전설의 대지 백마사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천하의 뉘라서 모르겠는가! 백마사원으로 향한 그 길이 곧 피(血)와 음모가 난무하는 길(路)이었음을.
②
새북천황평(塞北天荒坪).
섬서상과 감숙성을 잇는 폐허지대, 사방 일천여 리에 걸쳐 싯누런 황토만이 자리해 있는 이 지옥의 땅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드넓은 황무지 위로 번뜩이는 천뢰(天雷)는 마치 귀영(鬼影)의 몸짓만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짙은 어둠과 굵은 장대비가 허공을 뒤덮고 있고, 발아래에서는 빗물에 젖은 황토흙이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는 새북평황평의 한곳에 삼남일녀(三男一女)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네 필의 말에 각각 몸을 실은 채 벽옥빛 사인교(四人轎)를 호위하듯 질주하고 있는 그들의 기태는 범상치 않았다.
모두 금의(錦衣)에 철립(鐵笠)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다. 가슴에는 금빛으로 <금상(金商)>이라는 글귀가 수놓아져 있다.
세 명의 남자는 모두 이십대 청년들이었으나 역시 함께 말을 몰고 있는 여인은 대략 삼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사내못지 않은 장대한 체구에 이마에 영웅건까지 질끈 두르고 있어 어찌보면 사내인지 여인인지 구분할 수 없을 듯 했다.
오추마를 탄 이들 삼남일녀는 가운데에 네 명의 교부(轎父)들이 메고 있는 가마를 호위하듯 포진해 있어 기실 일행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교부들의 발걸음이 제아무리 빠르다 해도 말에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이고 너무도 엄청난 악천후인지라 교부들은 차라리 쓰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인 것이다.
가장 선두에 서서 말을 몰고 있는 후리후리한 체격의 금의청년이 자신의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쓰윽 훔쳐내며 힐끔 뒤쪽의 기마를 바라보았다.
"지독하게 쏟아지는군. 도대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청년은 날씨를 불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천색(天色)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뒤쪽의 가마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구양형(區陽兄)!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 벌써 칠주야 동안이나 계속 비가 내리고 있으니."
가장 먼저 입을 열었던 청년의 좌측에는 여인처럼 섬세한 용모를 지닌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따르고 있었다.
체격 또한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그는 구양형이라 부른 인물을 향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고 있었다.
구양형이라 불리운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하는 수 없지 않소. 중앙절까지 천산에 도착하려면 이렇게 강행군을 하지 않고서는."
"하지만 연매( 妹)의 몸이 성치 못해서 하는 말이외다."
여인처럼 섬세한 용모의 청년이 다시 가마 속으로 눈길을 돌렸다. 네 명의 교부에 의해 조심스럽게 움직여지고 있는 가마 안쪽에서는 가끔 가다 억눌린 듯한 기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쿨룩! 쿨룩!"
우연이었을까? 섬세한 청년이 안타까운 눈으로 가마를 응시하는 순간 다시 힘에 겨운 기침소리가 흘러 나오고, 청년은 더욱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일이오. 연매가 또 기침을 하고 있소."
구양형이라 불리웠던 청년이 무거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양형께서는 너무 신경쓰시지 마십시요. 연아의 기침이야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지 않소!"
"그렇지만 이 기침소리는 평소와는 다릅니다."
이때였다. 그들의 귀로 또 다시 참으려 하나 저절로 터져나오는 것이 역력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그들과 함께 가면서도 내내 침묵을 지키던 장대한 체구의 여인이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소주(少主)! 아가씨의 상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피풍(皮風)을 치고 잠시 쉬어가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여인답지 않게 이마에 영웅건을 질끈 두른 여인, 어느 사내 못지 않은 기도를 흘려내고 있는 여인의 말에 구양형이라 불리운 인물이 거칠게 말을 받았다.
"해마(海馬)! 바보같은 소리하지 마라, 일 각이라도 지체하면 우리는 황톳물에 휩쓸려갈지도 모른다."
"안됩니다, 소주! 아가씨께서는 사흘째 건량(乾糧)조차 못드셨습니다."
장대한 체구의 여인도 지지않고 말을 받았다. 구양형이라 불리운 청년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알고 있다. 허나 그대의 눈에도 저 시뻘건 황톳물이 점점 불고 있는게 보일게 아니냐!"
이때 유일하게 가마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던 유난히 넓고 각진 얼굴을 지니고 있는 청년이 단호한 음성을 흘려냈다.
"사형(師兄)! 더 이상 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가마를 멈춰야겠습니다."
"말을 멈추면 안된다. 사제,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안됩니다. 더 이상 무리하면 사매는 죽습니다."
뒤쪽의 청년이 말을 멈춰세웠다. 그러자 네 명의 교부들 역시 지친 기색으로 가마를 멈춰세웠다.
"그렇게 합시다, 소주! 대부(大夫)와 대모(大母)께서도 이런 상황이면 쉬어가실 것입니다."
해마라는 장대한 체구의 여인이 용기를 얻은 듯 강요하고, 그러자 구양형이라 불리운 청년 역시 마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연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겨 두 분께 꾸중듣는 일은 나도 원치 않는 바이니."
이때 빗소리에 섞여 가까운 곳에서 마차소리가 들려왔다.
"오, 마차인 듯 하다."
해마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구양형이라 불리운 청년은 가마쪽으로 다가가며 가마 안쪽을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연아야, 몸은 쫌 어떠냐? 마차를 빌려 타고 잠시 쉬어가려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쿨룩, 그렇게 하세요. 오라버니."
가마 안쪽에서 힘에 겨워하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구양형이라 불리운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쪽의 청년에게 입을 열었다.
"사제! 마차를 멈춰세우게."
"예, 사형!"
선이 굵은 용모의 청년이 힘차게 대꾸한 후 지그시 뒤쪽을 노려보았다.
짙은 어둠과 굵은 장대비 사이 저쪽으로부터 한 대의 팔기마차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네 명의 백포거한에 의해 호위되고 있는 팔기마차는 어둠의 일부처럼 검은 색 일색이었으나 그 화려함과 규모는 실로 놀라울 정도였는데, 바로 사천극이 타고 있는 팔기마차가 아닌가.
"우리는 금와주(金瓦州)의 금와사성(金瓦四星)이다! 병자가 있어서 그러니 잠시 마차를 멈춰라!"
선이 굵은 용모를 지닌 청년은 팔기마차가 이십여 장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앞길을 막으며 소리쳤다.
그의 음성은 굉량하기 이를데 없어 빗 속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팔기마차의 선두에서 질주해오고 있던 남사와 북귀가 서로 눈을 마주보았다. 남사가 입을 열었다.
"북귀! 이게 무슨 말이냐?"
"모르겠다. 하지만 기분이 안좋다."
"그럼 죽일까?"
"아니다. 주군께 물어보자."
남사와 북귀가 주고 받는 말을 듣고 있던 금와주 일행들의 눈이 커졌다.
'뭐 저런 것들이 다있지? 조금 모자란 것 같기도 하고, 엄청난 고수들 같기도 하고?'
이때 거대한 팔기마차의 내부에서는 여전히 사천극이 꽃꽂이에 열중해 있었다.
마차의 내부는 실로 넓어 연능발과 대치선사는 그와 뚝 떨어진 반대편 교위(交椅)에 앉아 있었으나 조금도 비좁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대치선사가 밖에서 들려온 음성에 사천극을 향해 입을 열었다.
"태워줍시다. 금와주의 젊은 시주들이 재난을 당한 듯 하군요."
사천극은 대치선사의 말을 무시했다.
"남사! 비가 많이 내린다 마차를 좀 더 빨리 몰도록 해라."
"예, 주군!"
사천극의 음성이 마차 안에서 흘러나오자 남사와 북귀 또한 전면에 길을 막고 서있는 금와주 일행들을 무시했다. 팔기마차는 금와주 일행들을 비스듬히 비켜가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마차 안에서 대치선사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시, 시주! 사해(四海)는 동도(同道)라 했습니다. 어려운 처경에 빠진 사람들을 두고 그냥 간다는 것은, 더욱이 금와주는 동해의 황금상가(黃金商家)로써 명문거파입니다."
사천극이 고소했다.
"괴이한 법도로군. 명문거파의 제자들은 하대(下待)밖에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사천극이 마차를 멈춰세우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 순간 마차는 이미 금와주 일행을 스치고 오륙 장을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헌데 빗속에서 사천극의 팔기마차를 빌려 타려던 이들이 바로 금와주의 금외사성이었단 말인가?
- 금와주.
동해 금와군도(金瓦群島)에 자리잡은 이른바 천하제일황금상가(天下第一黃金商家), 천하의 상권(商權)을 장악하고 있는 일백 여덟 개의 상인가문이 연합해 세운 단체로써 이들의 재력(財力)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황금으로 중원대륙을 살 수 있다면 열 번도 더 살 수 있는 재력을 지녔다는 것이 바로 금와주인 것이다.
이 금와주는 북해의 북해도와 더불어 중원의 이대신비대섬으로 불리우는 곳으로써 정확한 명칭은 금와일백팔해주(金瓦一百八海州)로 알려져 있었다.
헌데 그 천하최고의 상권을 지니고 있는 금와주조차 백마사원에서 개최되고 있는 천보대회에 참가하고 있단 말인가?
- 금와사성!
북해도와 더불어 천하의 이대신비지도로 손꼽히고 있는 금와주의 다음 대를 이끌어갈 대표적인 영재들이었다.
금와사성의 눈에 언뜻 노기가 스쳤다.
자신들의 신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사천극이 탄 팔기마차가 그대로 스쳐나가지 않는가!
마차를 막아섰던 선이 굵은 용모의 청년이 노기를 터뜨렸다.
"헛! 기가 막히군. 썩은 마차 따위로 위세를 부리려 하다니!"
그들이 마악 팔기마차를 향해 덮쳐갈 듯 노기를 터뜨리는 순간 가마 안에서 다급한 음성이 기침 소리와 함께 섞여 나왔다.
"쿨룩, 막내사형께서 무례를 범하신거예요. 처음 뵙는 분들에게, 쿨룩!"
가냘픈 음성이 질책하듯 이어졌다.
헌데 가마 안의 소녀가 질책하듯 입을 열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 채 듣고만 있지 않은가.
그들과 스쳐지나가던 사천극이 마차 안에서 소녀의 잔기침소리를 듣고 문득 이채를 떠올렸다.
"남사!"
"예, 주군!"
"마차를 잠시 멈춰 세워라!"
거대한 팔기마차가 순식간에 멈춰섰다.
대치선사의 눈에 안도와 경악이 뒤섞였다.
'역시, 알 수 없는 자로군. 하대를 했다고 그냥 지나치려다가 소녀의 기침소리에 마차를 멈춰 세우기도 하고, 도대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성격이야.'
이때 마차가 멈춰서자 금와사성 중 대형뻘인 청년이 마차의 문을 열고 안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고 있었다.
"하하! 실례하겠습니다. 누이가 몸이 성치 못해 부득불 신세좀 져야겠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다분히 강압적인 것이었다. 대치선사가 우뚝 서있는 그를 향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어서 오시오. 구양소시주. 소승은 숭산의 대치입니다."
청년의 얼굴에 반가움의 빛이 스쳤다.
"허어, 대치선사를 이 곳에서 뵙게 될줄은 몰랐군요."
"나무아미타불,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자, 마차가 넓으니 친구분들도 모두 비를 피할 수 있을 것이외다."
"이거 진정 고맙습니다."
대치선사의 이런 거침없는 태도에 사천극은 고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되면 사천극의 완패(完敗)였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허나 그는 대치선사가 마치 자신의 마차인 양 선심 쓰는 것에 별반 신경쓰지 않은 채 여전히 꽃가지만을 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사천극이 고소하는 것을 발견한 대치선사가 빙그레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껄껄껄, 기실 구양소시주는 소승에게 감사해야할 필요는 하나도 없소이다. 소승 역시 얻어탄 객일 뿐이니까요."
그제야 청년은 마차 안쪽을 휘둘러 보았다. 그리고 한쪽에 단아한 자세로 앉아 꽃가지를 다듬고 있는 사천극을 발견하고 대뜸 입을 열었다.
"초면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동해의 구양문(區陽文)이외다."
구양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괴이한 분위기를 지닌 사내로군.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있는 날 달리는 마차 속에서 꽃꽂이에 열중해 있다니, 분명히 남자는 남자인 것 같은데?'
구양문의 눈에는 기실 놀람에 가까운 빛이 가득해 있었다.
어둠처럼 짙은 흑의에 대조적으로 희디 흰 피부를 지닌 채 조용히 꽃을 다듬고 있는 사천극의 모습은 너무도 정적(靜的)인 가운데 단 한 순간의 폭발을 기다리는 어떤 동적(動的)인 압박감이 느껴진다. 여기에다 꽃가지를 다듬고 있는 손 또한 희고 갸름해 어찌보면 단아한 자세와 어울려 고고한 남장여인(男裝女人)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구양문이 멍청히 사천극의 이런 특이함에 빠져 서있자 대치선사가 입을 열었다.
"껄껄껄, 구양소시주, 빗발이 들이치고 있소이다. 어서 병 중이신 분을 모시고 들어오시지요."
"예? 예!"
구양문이 사천극에게 받은 첫인상의 강렬함에서 깨어나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해마! 연아를 마차로 데려오너라."
"예, 소주!"
해마라고 불리운 거대한 체구의 중년여인이 잠시 후 십 칠팔 세 가량 된 소녀를 안고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해마의 가슴에 안겨있는 자의소녀는 병이 깊은 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얼굴 또한 창백하기 이를데 없어 병색(病色)이 짙었다.
그녀는 마차 안에 들어서자 애써 해마의 품에서 내려 사천극을 향해 예를 갖추려는 태도를 지어보였다.
"쿨룩! 소녀는 동해의 구양비연(區陽翡 )이라 하옵니다. 야심한 시각에 결례를."
"아가씨! 밤공기가 찹니다. 말씀을 하시면 안됩니다."
해마가 황급히 그녀가 사천극을 향해 예를 갖추려는 것을 오히려 말렸다.
그동안 내내 사천극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있었다.
자의소녀는 이채를 띄운 채 준수한 사천극의 옆 얼굴을 일별했다. 사천극의 태도는 실로 단아하기만 해 소녀에게는 무척이나 의외인 듯 했다.
고개를 든 소녀의 용모 또한 창백한 병색이 오히려 그녀의 기품을 돋보이게 하고 있어 매우 기이한 특징으로 떠오르는 그런 것이었다.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물을 머금은 애처로운 수국(水菊)을 대한다고나 할까?
기이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자의소녀는 짧은 순간 사천극의 옆모습을 일별한 후 아무도 모르게 탄식한 후 한쪽에 다소곳이 쪼그리고 앉았다.
마차 안으로 삼남일녀가 모두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치선사는 벌떡 몸을 일으켜 마치 자신이 주인인 양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껄껄껄, 동해의 기린아들께서 모두 오셨구료."
"하하, 호기심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구양문과 대치선사는 안면이 있는 듯 별반 어려워하지 않는 처지였다.
"껄껄껄, 천산까지는 멀고 험한 길이니 앞으로도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이외다."
구양문의 뒤를 따라 들어서던 여인같은 용모의 왜소한 청년과 선이 굵은 용모의 청년이 정중히 읍하며 입을 열었다.
"양붕(楊鵬)이라 합니다."
"냉형창(冷亨昌)이 대사를 뵙습니다."
"껄껄껄, 반갑소이다. 사해수재(四海秀才) 양시주와 단사검경(斷砂劍鯨) 냉시주의 명성은 귀가 따갑게 들어왔지요."
대치선사는 넉살좋게 그들의 예를 받은 후 자의소녀와 함께 들어와 있던 중년여인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껄껄껄, 물론 용왕녀(龍王女) 해마(海馬) 여시주의 혁혁한 위명도 익히 들었지요."
구양문이 환하게 웃었다.
"하핫, 대사께서 너무 과찬하시는군요."
대치선사의 눈이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 고통을 참고 있는 듯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 자의소녀를 바라본 후 혀를 찼다.
"쯧쯧! 나무아미타불, 천하에 이런 불운이 있다니 재색절금의 구양여시주께서 폐혈증(閉血症)에 걸리셨다니."
폐혈절맥증(閉血絶脈症).
이것은 삼음절맥이나 구음절맥과 유사한 단맥증으로써 전신의 대소혈맥이 성장함에 따라 점차 막혀가는 선천적인 기병이었다.
그 치료방법이 구음절맥등보다도 더 까다로와 가히 불치의 병으로 알려져 있는 실로 희귀한 절맥(絶脈)이었는데, 구양문은 대치선사가 한 눈에 누이의 병세를 알아내자 일순 기광을 띄운 채 입을 열었다.
"역시 대사께서는 의도(醫道)에 밝은 분이시로군요. 그렇습니다! 연아는 선천적인 패혈절맥인데다 뱃길에 먼길을 오느라 지쳐 병세가 악화......."
"쯔쯧, 여시주께서 기침을 하는 것 쯤이야 잠시 휴식을 취하면 안정될 것이나, 폐혈절맥증은 소승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안타까울 뿐이외다. 아미타불."
구양비연이 대치선사의 안타까운 음성에 눈을 들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창백하리만큼 핏기없는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나자 그것은 얼음에서 꽃이 핀 듯 마차 안이 환해지는 듯했다.
"소녀는 개의치 않고 있답니다. 만료의숙(萬療醫叔)께서도 소녀 때문에 민망해 하신 적이 있어 오히려 몸둘 바를 모를 따름이지요."
생과 사에 관해서는 이미 초연해 있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런 구양비연이 태도는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저려오는 통증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대치선사의 눈이 커졌다.
"오오, 동해쌍선(東海雙仙)의 지기이신 화대인(華大人)께서도 이미 여시주의 병을 대했단 말씀이시오? 아미타불, 그 분조차 손을 대지 못하셨다니 놀랍군요."
대치선사는 손을 저으며 안타까운 듯 길게 불호를 외운 후 눈을 내리감았다. 만료의숙조차 구양비연의 병세에 손을 들고 말았다니 그로서는 진정 아무 힘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헌데 사천극이 돌연 꽃가지를 다듬던 손을 멈추며 바로 옆에 시립한 듯 서있는 연능발을 향해 질문하듯 입을 떼고 있었다.
"능발!"
"예,제군!"
"너는 이해할 수 있느냐?"
"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연능발은 느닷없는 사천극의 질문에 크게 당황해 더듬거렸다.
"후후, 한갖 폐혈절맥증 따위를 치유시키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숙이니 약승이니 하는 거창한 명호를 붙인 사실을 너는 이해할 수 있느냐는 뜻이렸다."
"예? 하면 제군께서는 치료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연능발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사천극의 가벼운 말투는 기실 이 시대 최고의 의성(醫聖)이라는 만료의숙을 무시하는 것인지라 연능발로서는 오히려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마차 안에는 그 만료의숙과 가까운 인물들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바로 눈앞에 있는 소림의 대치선사 또한 사천극의 말 한 마디에 형편이 말이 아닌 입장이 되어 버렸지 않은가.
연능발의 질문에 사천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훗!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의 대답은 극히 무심하게 울려나왔다. 그러자 마악 싸늘한 빛을 띄운 채 사천극을 쏘아보던 금와사성의 눈에 번개같은 기광이 솟아올랐다.
대치선사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 사시주! 지금 하신 말씀이 정말이시오?"
"후후, 그대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로군. 불제자로서 남의 말을 무조건 의심부터 한단 말인가?"
"그, 그게 아니고!"
대치선사는 할 말을 잊고 더듬거렸다.
여간해서는 넉살기를 잃지않고 있던 그로서도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한 태도였다.
구양문이 싸늘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형(師兄)! 농담이 지나치구료."
사천극이 눈을 돌렸다. 심해(深海)처럼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그대 또한 이 대치처럼 괴이한 자로군.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누이를 앞에 두고 치료해 달라고 간청하기는 커녕 쓸데없는 말을 하다니."
구양문은 사천극의 조용한 눈길에 자신도 모르게 내심 한기를 머금었다. 비록 구양문이 엄청난 고수라 해도 사천극의 이런 눈은 난생처음 대하는 것이었다.
사천극의 눈은 어둠의 관록과 지하의 제황다운 피와 죽음의 냄새, 그리고 구양문처럼 아쉬운 것 없이 성장한 인물들로서는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기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무공과는 또 다른 기세로써 구양문은 대뜸 그 눈이 절대 거짓이나 농담을 말하는 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눈은 바로 지하의 제황, 제군의 눈이었던 것이다.
"하, 하면 진정 연아의 병을 고칠 수 있으십니까?"
구양문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질문을 던진 그 순간 내심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후후, 본좌는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 사람이오. 같은 말을 두 번 하지도 않고."
구양문이 황급히 허리를 접었다.
"사, 사형! 나 구양문은 금와주의 소도주로서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이다. 연아의 병만 고쳐준다면 어떤 일이라도 사형이 원하는 일이라면."
"조건은 있소."
사천극이 짧게 말했다. 구양문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무엇입니까? 설혹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본도의 대부와 대모께서."
"내 조건은 간단한 것이오."
"......?"
"마차 안에서 조용히 해달라는 것이오."
구양문과 대치선사가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치선사의 당황은 오히려 구양문보다 더했다.
그만이 사천극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럴리가 없다. 지하무림의 제황이라는 자, 살수의 제황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천하에서 따를 사람이 없는 것이나 정반대의 의도(醫道)에 또한 조예가 깊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어둠의 황제이자 살수의 대부인 그가 살인술과는 정반대인 의도에 또한 조예가 깊단 말인가!
제군,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③
사천극의 너무나도 당당한 장담에 중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다. 제군께서 의술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모를 일이지. 제군께서는 워낙 신비한 분이시니.'
연능발이 새삼스럽게 사천극을 바라볼때 장대한 체구의 해마 역시 의혹과 불신의 눈으로 사천극을 직시하고 있었다.
'아가씨의 병은 천하명의들도 모조리 포기한 것이다. 헌데 이 지옥의 한모퉁이 같은 곳에서 우연히 만난 이 미서생이 고칠 수 있다니, 혹 아가씨를 이용한 음모?'
경악에 잠긴 중인들의 시선이 사천극에게 고정되어 있는 순간 한쪽에 쪼그려 앉아 힘없이 내리감고 있던 구양비연이 조용히 눈을 떴다.
"풋! 공자께서는 소녀가 무척이나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로군요. 동정을 하시는 것을 보니."
그녀의 입에서 자조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탄식과 심한 자조가 뒤섞인 처연한 음색이었다.
사천극의 이마가 찌푸러졌다.
"흠, 무척 불행한 여인이로군. 몸과 더불어 정신마저 죽어가고 있으니 말이야."
사천극의 빈정거림에 해마의 눈에 터질 듯한 노기가 어렸다. 그녀의 입에서 노호성이 흘러 나왔다.
"사공자! 무례하오!"
이제라도 덮쳐들 듯한 기세였다. 구양비연이 흠칫 사천극을 바라보다 돌연 고개를 끄덕였다.
"해마! 사공자님의 말씀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처연한 음성이 이어졌다.
"공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소녀는 죽음을 이고 살아가는 동안 어쩌면 정신마저 죽었는지도 모르지요. 허나, 제가 알기에 제 병을 고치려면 두 가지 불행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기에 자연 소녀는 살아날 희망 따위를 품어본 적이 없었답니다."
사천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또 다시 냉정하기 이를데 없는 조소적인 것이었다.
"훗!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는 것을 보니 정상인이라 해도 장수(長壽)하기는 어렵겠소이다."
'사, 사소한 것이라고? 저자가 뭐를 알고 말하는 건가? 분명 만료의숙께서는 연아의 몸을 치료하려면 초극의 음한지기(陰寒之氣)를 지닌 고수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그러나 그런 고수가 있을 수 없다고 했지 않은가?'
구양문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구양비연이 사천극을 열기(熱氣)가 가득 담긴 눈으로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은?"
"훗! 북해도의 사화산(死火山) 속에서 두 살 때부터 양공(陽功)을 익힌 사람과 태어났을 때부터 눈과 얼음 속에서 살아온 고수들이 있소. 그들만 있으면 소저의 병은 치료할 수 있지 않겠소?"
구양비연과 구양문이 멍청해졌다.
사천극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내용은 분명히 만료의숙이 제시한 치료방법과 일치했던 것이다.
사천극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물론 혈맥을 타통한 후 펼치는 금침대법 정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고."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군요. 헌데, 그런 고수가 과연 천하에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어, 어떤 분인가요?"
"후후, 바로 본좌와 나의 친구들이오."
"아!"
구양비연이 깜짝 놀라 새삼 사천극을 직시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 듯 이채를 머금었다.
"혹시, 사공자께서는 북극성의 성주이신 북극천자(北極天子) 사대인이 아니십니까?"
"북극천자?"
사천극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어 차가운 조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북극천자가 누군지는 모르나 본인이 현재 북극성을 맡고 있는 것은 사실이오. 그리고 본좌는 제군일 뿐이오."
"제군!"
"오오, 제군!"
마차내부에 질식할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경악의 폭풍이 가라앉은 후 구양비연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소녀는 운이 좋았군요. 할아버님께서 이따금 말씀하시던, 그 분을 만나게 되다니."
"훗! 그런 의미에서 본좌는 운이 없는 편이외다 귀찮은 일을 맡게 됐으니 말이오."
"죄, 죄송합니다. 소녀가 공자의 눈에 띄어......."
"됐소. 싫든 좋든 이미 만났으니."
사천극과 구양비연의 눈은 허공에서 얽혀 있었다. 구양비연의 눈에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결코 병세 때문에 일어나는 열기는 아니었다. 한 사람은 지하무림의 제황인 사천극이요, 또 한 사람은 금와주라는 거대한 연합세력에서 금지옥엽으로 성장한 구양비연이다.
이 만남이 주는 의미는 지금의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피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백마사원으로 가는 길(路)에서 이렇게 두 운명이 조우한 것이다.
첫댓글 잼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