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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 문명사
Ⅰ . 서유럽 사회의 형성
1. 중세문화의 의미
2. German 민족의 이동
3. 프랑크 왕국의 성립과 몰락
ll. 봉건제도의 성립
1. 봉건제도의 개념과 성립
2. 봉건제도의 요소
3. 봉건제도하의 사회신분
4. 장원의 구조와 농민
Ⅲ. 교회의 성립과 발전
1. 기독교의 성립
2. 중세 카톨릭 제도
Ⅳ.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
1. 신성로마제국
2. 제권과 교권의 대립
Ⅶ. 서유럽 중세사회의 변화
1. 중세 도시의 성립
V . 이슬람 세계
1. 이슬람교의 성립
VI. 십자군 원정
1. 십자군
Ⅶ. 서유럽 중세사회의 변화
1. 중세 도시의 성립
Ⅷ. 중세의 문화
1. 중세 문화의 특징
2. 중세의 대학
3. 중세 유럽의 철학
4. 중세 유럽의 문예
4. 중세 유럽의 문예
<참고문헌>
Ⅰ . 서유럽 사회의 형성
1. 중세문화의 의미
로마 세계제국 말기의 정치,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대내적인 위기와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라는 대외적인 위기와 혼란 속에서 서 로마의 제권이 붕괴되고, 7-8세기 경부터 아라비아인의 진출이 활발해지자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고전고대 문화의 성격은 그 본질을 내포한 채 점차적으로 변질되었다. 이 장기에 걸친 변질과정을 거쳐 고전고대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 역사적 발전을 전개한 것이 중세 문화세계이며, 그 세계 속에서 근세의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즉 게르만, 라틴, 슬라브 등의 서양민족들이 역사발전에 중요한 구실을 수행하고, 근대의 서유럽, 동유럽 등지에서 국가활동이 시작된 것도 중세시대부터 였다. 그 뿐만 아니라 현대의 서양문화는 각종의 문화적 요소의 복합체라 할 수 있는데, 그 형성도 중세시대에 이룩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14,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시대를 고전이 재생하는 시대이고, 중세는 문화의 빛이 없는 암흑시대라고 보았지만, 사실상 중세문화는 세계 문화 사상에 있어서 어느 시대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같은 의미가 있는 중세는 대체로 4-5세기에서 14-15세기까지의 약 1천년 동안에 해당 되는데, 이 기간을 특징적인 현상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할 수 있겠다.
전기는 4-5 세기부터 9세기까지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그들에 의한 국가건설이 있었고, 그 이후에 서유럽 민족들을 통합한 프랑크 왕국이 성립되어 로마 카톨릭교회와의 협조하에 서유럽 사회를 안정시켰던 시기이다. 중기는 10세기로부터 13세기까지로서 프랑크 왕국의 해체와 동시에 독일과 프랑스 및 잉글란드 왕국 등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봉건제도가 성숙되고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고 십자군 운동의 시기이다. 후기는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로서 봉건사회와 교황권이 동요되고, 십자군 운동과 그 여파 등을 계기로 중세 사회에는 점차적인 변질의 기운이 조성되는 시기이 다. 한편 서로마제국 황제권의 붕괴에 따라 통일적 지중해 세계는 대체로 세 지역, 즉 서유럽 의 로마적, 게르만적 세계와 동유럽의 희랍적, 슬라브적 세계 및 아프리카 북쪽 해안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걸친 희랍적, 이슬람적 세계 등으로 나누어졌다. 이와 같은 지역별의 분리현상으로 말미암아 로마 세계제국의 공로이던 지중해는 양단되었으며, 동방세계는 서방 세계와 분리되고 말았다. 이제 서유럽세계는 동방과의 교섭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문화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2. German 민족의 이동
게르만인은 인구가 중가하자 이때까지 이용하고 있던 토지만으로는 부족을 느끼게 되고 로마제국의 부와 좋은 기후, 풍토가 그들에게 큰 호감을 주어 민족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게다가 한에게 쫓긴 훈족이 375련 돌연 드네프르 강을 건너 흑해안의 동고트족을 정복한 것이 자극제가 되었고, 서고트의 침입으로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니 서고트는 이탈리아로 침입하여 로마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였다(410). 뒤이어 프랑크족은 갈리아의 북부에, 부르군드족은 갈리아 중부에, 알라만족은 라인 하류에 진출하고, 다시 반달, 스에비족은 갈리아를 거쳐 에스파니아에 침입하였다. 이탈리아에 침입하였던 서고트족은 다시 에스파니아에 들어가 서고트왕국을 세웠다(429). 서고트족의 침입에 의해 에서파니아에서 몰려난 반달족은 아프리카의 복만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반달한 반달황국을 세웠다(429). 이 같은 게르만인의 침입에 극도로 쇠해진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 출신의 용병대장 Odoacer에게 망하였고, 동고트족은 Theodorick왕 때에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오도아케르에게 멸하고 동고트왕국을 세워 Ravenna에 도읍하였다 (489). 그러나 결국에는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게 망하였다(555).
한편 5세기 중엽에는 Angle-Saxons이 영국에 들어가 토착인 켈트족을 정복하여 앵글로색슨의 7왕국을 세웠다(449). 또 6세기 중엽에는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원정군을 보내어 반달왕국을 멸하고(534), 롬바르드인은 동고트 왕국이 망한 뒤의 이탈리아에 침입하 여 롬바르디아 왕국을 새웠다(568). 게르만족의 연속적인 침입에 의해 서유럽의 통일은 무너지고 문명은 과거에 비해 발전이 덜 하였다. 그러나 침입한 게르만인의 수는 로마인의 약 3%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로마인의 높은 문화를 무시할 수 없어 그 문화를 섭취하고 보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리하여 9-11세기에는 로마인과 게르만인이 융합되어 여기에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낳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프랑크앙국의 발전이 크게 주목되는 것이다.
3. 프랑크 왕국의 성립과 몰락
라인강 북안에 살고 있던 프랑크족은 481년 Merovinger의 Clovis(481-511)가 전부족을 통일하여 Frank왕국을 세웠다. 클로비스는 게르만의 고유 종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인의 지지를 얻어 뒤에 프랑크 왕국과 로마교회가 손을 잡고 발전을 하는 기틀을 열었다. 클로비스가 죽은 뒤 왕령을 관리하고 근위군을 장악하고 있던 궁재 Karl Martel(714-741)은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해 오는 사라센 인을 물리쳤고, 그의 아들 Pippin(751-768)은 로마 교황의 양해를 얻어 메로빙거 왕조를 멸하고 왕위에 즉위하여 Carolinger왕조를 열었다. 피핀은 Langobard를 쳐부수고 Ravenna 부근의 토지를 교황에게 바쳤다. 이것이 곧 교황령의 기원이다.
피핀의 아들 Charlemagne(768-814)는 재위 40여년에 사방을 정복하여 통일의 업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복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게르마니아 지방까지 영토를 넓힌 일이다. 그는 토지를 넓힐 때마다 포교단을 보내어 새로 얻은 백성을 받아 카톨릭에 귀의시켜 그들을 회유하였다. 이리하여 옛날의 서로마제국의 대부분과 게르마니아의 남반부를 통일, 지배하여 서로마제국 멸망이래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Charlemagne는 교황에게 가지를 기진하고 교황 Reo 3세는 800년에 Charlemagne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어 카톨릭국의 원수로 삼았다. 대제는 중앙 집권적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군현제도를 실시하고 변경에는 변경백을 두었다. 학자를 초빙하여 라틴 고전을 연구시켜 라틴문화의 부흥에 힘쓰고 각지에 수도원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써,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중세 문화의 기틀을 열었다.
그러나 Charlemagne의 무능한 상속자 Louis 1세의 말년에 그의 세 아들 사이에 영토 분배로 분쟁이 일어나 843년의 Verdun조약에 의해 제국은 3분되었다. 장자 Lothair는 이탈리아 및 라인강 유역을 차지하여 황제라 일컫고, 차자 Louis는 라인 유역의 동부,삼자 Karl은 라인 유역의 서부를 각각 차지하였다. 로타르가 죽은 뒤 다시 분쟁이 일어나 870년 Mermen조약에 의해 라인강 유역 지방은 루이와 카알에게 분할되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동프랑크, 서프랑크의 3국으로 갈라져 지금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가 되는 기틀을 열었다.
ll. 봉건제도의 성립
1. 봉건제도의 개념과 성립
서로마 제국 제권의 몰락과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및 이슬람 교도의 위험 등은 서유럽 사회에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인 혼란을 초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유럽 농민들은 생명과 생활 및 재산상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소망하였는데, 이것이 마침내 사회, 경제, 정치적인 배경과 관련되어 봉건제도(feudalism)라는 한 형태를 만들어 냈다고 보아진다. 봉건제도는 9,10세기 경부터 중세 말기까지 서유럽 사회에서 한 지배적이던 조직으로서, 기독교와 함께 중세 서유럽인들의 생활양식들 중의 한 부분을 대표하는 것이다.
봉건제도의 개념에 대해서는 구구한 이론이 있다. 즉 근대화 이전의 일반적인 유제를 막연하게 총칭하는 것,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선행한 특수한 생산양식으로 보는 것, 특수분야에 속한 엄격한 법제라 보는 것, 한 사회형으로 보는 것 등이 있다. 그런데 봉건제도의 개념을 파악하 는 데 있어서 단순히 그 같은 개념들에만 결부시킬 것이 아니라, 경제 외적인 요소들도 중요시 해야 한다. 즉 토지에 대한 지배, 사람에 대한 지배, 재판상의 지배, 군사상의 지배, 또한 사회적인 도덕문제에까지 확대해서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그 개념은 복잡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봉토(fief)에 의한 주종관계로 설명하려는 법제사적인 것과, 자연경제적인 생산양식의 특수형태인 장원제로 설명하려는 두 가지가 있다.
2. 봉건제도의 요소
주종관계(Vassalage)라는 것은 비 자유민이 자유민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이 자유민에 예속하는 인격적인 결합관계를 말한다. 중세 서유럽의 각 지역에 왕국을 세운 최고 군사권력자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토의 일부만을 자기가 직접 소유하 고, 나머지는 소수의 대귀족에게 분봉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통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귀족도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왕이 분봉한 영토의 일부분만의 사용 용인권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소귀족들에게 분봉하였다. 이같은 관계는 몇 단계를 거쳐 최후 에는 불급기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국왕에서부터 하급기사에 이르기까지 분봉되는 토지를 봉토라고 한다. 이와 같이 영주가 신하에게 봉토를 분봉하는 경우에, 신하는 영주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군사적, 경제적, 통치상의 여러 분야에 걸쳐 보좌의 임무를 져야 하며, 영주는 신하를 보호 하고 봉토에 대한 용역권을 보장하여야 했다. 즉 영주와 신하는 쌍무적인 성격을 가지고 최 상급자에서부터 하급자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피라밋 형(hierarchy)의 계층인 연쇄관계를 형성 하고 있었다.
이 주종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은대지제(Beneficium)와 종사제이다. 은대지제는 게르만과 로마 사회에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주군이 일정한 봉사를 요구할 목적으로 토지를 대여하는 것이다. 이 경우의 토지는 조건부요 제한부인 불완전 소유였다. 그 소유권 은 타인에게 마음대로 이양할 수 없었으며, 이론상으로는 당대에 한했으나 실제상에서 는 세습적인 경우가 흔했다. 종사제도 이미 게르만과 로마 및 켈트 사회들에 존재했던 제도이다. 이 경우 완전한 자유민인 종사는 주군에게 군사적인 봉사를 약속하는 대신 주군으로부터 의 식, 무기, 마필 등을 받았다. 불수불입제는 봉토를 분봉받은 영주가 봉토와 영민에 대한 분권적인 지배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이에는 조세권, 행정권, 재판권 등이 있었다. 즉 이같은 공권의 사권화를 통해서 영주의 독립을 보장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제도들은 봉건제도의 기본적 요소가 되었으며, 특히 종사제와 은대지제의 결함은 봉건제도의 기원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 두 제도가 결합한 시기는 대체로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 말기와 카롤링 왕조 말기의 사회 및 정치적인 혼란시기와 특히 노르만 족의 침입 등을 경과하는 장기간이 아닌가 보고 있다. 즉 이 흔란시기들이 중앙권력을 약화시키고 지방분권적인 경향을 나타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3. 봉건제도하의 사회신분
봉건제도에서의 사회신분은 크게 봉건신분과 농민신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봉건 신분은 봉건사회의 핵심체로서 무사와 성직자가 이에 속했다. 장로, 사교, 대사교 등 고급 성직자들은 교회에 기증된 막대한 토지를 점유한 영주로서 그 권리나 의무관계에 있어서 일반 세속적인 영주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한편, 국왕, 공, 후, 백, 자 등의 대귀족과 소귀족, 기사(협의), 종사 등의 무사계급은 모두 기사라 호칭된다. 기사는 혼란한 사회의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학문과 예술보다도 연무, 예의, 수렵, 주연 등으로 보냈다. 기사는 명문 출신의 남 자로서 기독교 신자라야 했다. 이 조건이 구비된 자로서 7세에 주군의 성내에 들어가 시동 (page)이 되어 예의, 기마, 검술, 장기, 독서 등을 배우고, 14세에 종사(squire)가 되어 주군이나 기사로부터 무술을 배우는 한편, 주군을 따라 전장에도 나가 그를 돕고 운명을 그와 같이 해야 했다. 21세 내지 23세가 되면 장엄한 의식을 거쳐 기사가 되는데, 이 의식 때에 입는 적, 백, 혹색의 상의는 기사도의 상징으로서, 붉은색은 주군과 교회에 바치는 선혈을, 흰색은 청렴을, 검은색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기사는 기사도를 지켜야 했다. 원래의 기사는 성격과 행동이 난폭하였으나 기독교의 윤리성과 게르만 민족의 상무정신 및 여성 숭배사상이 결합되어 기사도가 생겼다. 기사는 충성을 바쳐야 하고 용감해야 함은 물론이고, 경신, 숭무, 신의, 여성존경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 기사도는 중세뿐만 아니라 현대 서유럽의 도덕생활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4. 장원의 구조와 농민
중세 봉건사회에 있어서 서유럽의 토지는 봉건신분의 봉토 내지 교회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특히 봉토는 다시 장원(Manor, Villa)이라는 기본단위로 분할되어 있다. 대체로 왕국은 자기 영내에 수백, 대귀족은 수십, 소귀족은 수개의 장원을 각각 소유하고 있었는데, 어느 장원이든지 대영주인 지주적 요소와 농지경작하는 농민적 요소로 구성되었다.
영주는 농 민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봉사를 받았고, 농민은 영주로부터 농지의 사용 용익권과 보호를 받는 관계가 성립되고 있었다. 장원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고대 말기에서 중세 초기 무렵에 걸친 로마와 게르만 사회들에 있어서 토지소유관계의 변천과 농민신분의 변질 속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즉 로마 제정 말기에 노예제를 기초로 한 콜로누스(Colonus)제가 점차로 발전하게 되었다. 더우기 로마제국 의 정치와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지방 호족들이 대두하여 지방분권적인 경향이 현저하였고, 그들은 마침내 지방분권사회에 있어서의 봉건영주와 같은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 사적인 보호관계가 성립되어 종래의 자유농민은 비 자유농민의 신분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한편 게르만 사회에서도 초기에는 농민들이 자유로와 자유민으로 구성된 공동체적인 요소가 지배적이었으나, 점차적으로 토지의 사유와 귀족에 의한 대토지소유제가 강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민족이동을 전후한 사회적인 불안속에서 군인계층의 지배권이 더욱 강화되자 이들은 토지와 군사권을 독점하였고, 자유로왔던 농민은 그들에게 예속, 보호되는 피지배농민충으로 되었다. 이와 같이 로마와 게르만 두 사회의 동질적 요소인 예속과 보호가 민족이동으로 두 사회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장원과 농민신분을 형성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서유럽 각처에 산재한 장원의 구조는 대체로 동일한 형태였다. 수개 호 또는 수십 호 정도의 농가가 1개의 정원을 형성하였는데, 장원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은 장원청과 장원교회였다. 장원청에는 영주나 그의 대리인이 거주하면서 장원의 행정과 수입 및 재판 등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였으며, 그 밑에 농민들의 대표자격인 촌장과 장리가 있어서 농업경영을 감독하였다. 그밖에 영주 소유인 제분소와 양조장 및 농민의 주택 등이 있었다. 이러한 중심지역을 벗어나면 경작지, 목초지, 방목지, 황무지, 임야 등이 산재하고 있었다. 경작지는 영주가 직할하는 직영지와 장원 내의 농민들에게 차용된 탁영지 등으로 나누어 졌으나,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장방형의 좁은 지조의 형태로 혼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토질의 공평한 분배와 농민들의 공동경작에 필요에서였다. 경작 방법으로는 삼단제를 택하여 춘시지, 추시지, 휴경지의 3개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비료의 제조법이 발달하지 못한 그 당시로서는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목초지와 방목장은 가축사육에 필수적인 곳이었고, 임야는 장원 내에서 소비되는 연료와 건축자재의 공급원인 동시에 수렵장으로 활용되었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진 장원은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독립된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있었으며, 이 기능을 발휘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수행한 것이 농민이었다.
농민의 신분에는 자유농민으로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이 있었고, 이에 따라 권리와 의무관계도 다양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이 세습적이라는 점과, 영주들에 대한 그들의 봉사가 자유로운 계약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속적인 신분관계를 반영한 경제외적인 강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공통적이었다. 영주에 대한 농민의 의무에는 크게 나누어 부역과 공납, 그 외에 잡세가 있었다. 부역은 노력으로 영주에게 봉사하는 노동지대로서 영주의 경제경영에서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가옥의 건축과 수리 그리고 가축의 사양 및 곡물, 신재, 건초 등의 운반과 같은 영주의 가사와 영주의 직영지에서 경작, 제초, 수확, 비축작업 등이 이에 속해 있었다. 즉 영주가 필요로 하는 모든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부역에는 정기적인 주간노역(매주 2-3일 또 는 3-4일)과 임시적인 특별 노역이 있었다. 공납은 현물지대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곡물, 가축, 직물 등과 또 각 지방에서는 그곳의 특산물로서 포도, 꿀 등을 영주에게 바쳐야 했다. 이 이외에도 영주의 소유인 제분소, 양조장, 빵솥 등에 대한 강제 사용료가 징수되고, 그 외에 결흔세, 상속세, 교회세, 통행세, 인두세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잡세가 농민들에게 부과되었다.
Ⅲ. 교회의 성립과 발전
1. 기독교의 성립
서양 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은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로마시대에 생겨 로마시대에 성장하였다. 즉 기독교는 유대인이 지니고 있던 메시아(Messia : 구세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나사렛의 한 목공의 아들 예수가 스스로 구세주(Christ)라 일컫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 설교하여 민중의 환영을 받은데서 비롯되었다. 예수가 그 제자 유다에게 참소당하여 예루살렘의 교외 골고다의 언덕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베드로 (Peter), 바울(Paul) 등에 의해 전유럽에 전도되었다.
기독교는 유대교를 모체로 한 것이지만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유대교와는 달랐다. 첫째, 유대교의 율법의 형식화에 대해 맹렬히 반대한 점이다. 둘째, 유대교의 배타적인 태도를 타파한 점이다. 요컨대 기독교는 유대교가 민족주의인데 대하여 인류주의였으며, 귀족적인데 대하여 대중적이었으며, 형식적 율법적인데 대하여 내면적 신앙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예수가 죽은 뒤 베드로, 바울 등의 12사도의 열렬한 포교에 의해 기독교는 차차 하나의 종교로서 성장하여 로마 영내에 퍼지지 시작하였다. 기독교도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할 뿐 아 니라 그들의 비밀 집회가 위정자들에게 불안감을 자아내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행해졌다. Nero(37-68)의 탄압이 유명하여 바울, 베드로 등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도는 늘어만 갔다. 드디어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에 의해 이를 공인하고 이어서 392년에는 데오도시우스가 이를 국교로 채용하고 다른 종교를 엄금하여 기독교의 승리로 돌아갔다. 당시 교의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성령을 동질, 동격이라 하여 삼위 일체 를 주장하는 Athanasius파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Arius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콘스탄 티누스는 324년 Nicaea 종교회의를 열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아타나시우스파 를 정통으로 채택하여 여기에 카톨릭 교회의 기초적인 교의가 확립되었다. 아리우스파는 이 종교회에서 이단으로 취급되었으나 그 이론이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에 많은 신도를 가졌다.
2. 중세 카톨릭 제도
기독교 교회는 신자의 수가 많아지고 교세가 성해지자, 자연 통제의 필요가 생겨 로마제국의 통치 조직을 모방한 교회제도가 발달하였다. 한사람의 사교(Bishop)를 중심으로 교구가 생겨 중요 도시에 사교좌가 설치되었다. 사교는 그 아래에 사제(Presbyter), 보제(Deacon) 를 두어 교회를 지도, 통솔하였다. 많은 교구가 연합하여 하나의 교관구를 만들어 그 중심지를 관내의 수도에 두었다. 교관구의 수도대사교는 다른 사교에 다하여 일정의 특권과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 교관구는 다시 제국의 행정구역을 본받아 총대사교관구에 의해 통할되었다. 이 총대사교관구를 본산이라고도 하여 로마, 콘스탄티노플(=이스탐불),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의 5개소에 설치되었다. 5대 본산 가운데 가장 유력한 것은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였다. 로마 교회는 사도 중의 1인자이며 기독교의 후계자인 베드로가 창건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전 기독교 교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로마 교회는 다시 게르만 민족의 개종사업에 착수하여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고 서유럽에 널리 기독교를 퍼뜨리고 프랑크 왕국의 원조에 의해 교황령을 설치하여 여기에 강력한 정치적, 재정적 배경을 얻어 더욱 더 그 세력을 강화하였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각각 중심 으로 하는 동서의 양교회는 제국의 분열과 문화, 교양의 차이 등에 의해 서로 멀어지게 되었는데, 8세기에 이르러 우상숭배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양교회는 완전히 분리하고 말았다. 동방에서는 우상파괴운동이 일어나 비잔틴 황제 Reo 3세가 칙령을 내려 우상숭배를 금하고 우상 파괴를 명하였으나(726), 로마 교황은 우상 숭배가 게르만 민족의 포교에 효력이 있고 교황청의 수입을 증가시키므로 이 금령에 반대하여 분쟁 수십년 끝에 드디어 프랑크 왕과 결탁하여 비잔틴 황제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리하여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로마 카톨릭과 동로마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로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Ⅳ.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
1. 신성로마제국
프랑크왕국이 분열되어 생긴 3국 중 가장 먼저 발전한 것은 동프랑크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단절된 뒤 선거왕제가 실시되어 삭소니아공 Heinrich 1세가 추대되어 독일 왕이 되었다. 그의 아들이 유명한 Otto 1세(936-973)이다. 그는 Charlemagne와 어깨를 겨눌 만한 존재로 왕권 강화, 이민족 정복에 힘을 기울여 오랫동안 침입을 거듭하고 있던 마쟈드인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955). 또 오토 1세는 부족공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사교와 수도원장을 왕권의 지주로 삼아 그들에게 많은 토지와 특권을 주는 대신에 재정, 군사상 황을 후원하게 하였다. 그 결과 승려는 황의 관리처럼 되고, 왕국의 사교좌와 수도원은 왕실의 사유 교회처럼 되어 그 소령의 수임은 왕실의 유력한 재원이 되었다. 이 Otto식 통치 방법을 흔히 '제국 교회 정책'이라 일컫는다.
Otto 1세는 Charlemagne의 전통을 계승하여 로마제국 재건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이탈리아를 3번이나 원정하여 로마의 불안을 없애고, 962년 교황 Johannes 12세로부터 로마황제의 왕관을 받아 나라를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라 일컬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그 뒤 독일과 북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역대 독일왕은 대개 이탈리아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은 뒤 황제라 일컬었다. Otto 1세가 죽은 뒤에도 신성로마제국은 약 2세기 동안 강하였다. 한편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는 사라센과 노르만의 침입에 대하여 무력하여 9세기 중엽 이후 세느강 하류를 점령한 노르만인의 우두머리 Rollo를 노르만디공에 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911). 노르만디는 11세기초에는 완전히 프랑스화되었다. 987턴 카롤링거 왕조는 끊어지고 Hushes Capet가 왕위에 올라 카페왕조를 열었다. 이탈리아는 카롤링거 왕조가 끊어진 뒤 소국가가 분립하여 혼란을 거듭하였다. 게다가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이 로마제국의 발상지라 하여 여기를 본거지로 유럽 통일을 꾀하였기 때문에 국제적 투쟁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2. 제권과 교권의 대립
프랑크 왕국의 를로비스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휴 이래(496) 카알 마르텔에 의한 이슬람 교도의 격퇴(732), 피핀에 의한 랑고바르드 족의 정복과 교회령의 증정(754), 카알 대제의 서로마 제관의 수수(800) 등은 모두 제권(Imperium)과 교권(Sacerdotium)의 원만한 협조관계를 보여주는 것인데, 신성 로마제국의 오토 대제(Otto the Great, 936-973)는 이 관계를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즉 카알 대제의 사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결과로 파생된 동 프랑크 왕국에서는, 그 지방의 토착 종족인 프랑켄(Franken)의 콘라드 1세(Konrad 1, 911-918)가 독일 민족의 독일사를 개척하기 시작한 이래 하인리히 1세(Heinrich 1, 919-936)와 오토 대제에 이르기까지 제권과 교권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하인리히 1세는 동쪽에 대한 중시책(Drang roach Osten)에 의해 동유럽의 이교도들을 정벌함으로써 로마 카톨릭교의 세계를 보호하고 확대하여, 분립되어 있던 독일 민족을 통일시켰다. 그의 유업을 계승한 오토 대제는 제후들을 굴복시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군주국을 세우고, 아아현(Aschen)교회의 주교로 하여금 자신의 대관식을 거행케 하여, 교회가 그 자신의 정신적인 지지자임을 과시하였다. 한편 그는 교회의 조직을 그대로 국가의 조직에 적용하여 제후의 권리를 주교에게 이양시켰다. 따라서 주교가 지방 행정권과 징세권을 장악하였고, 궁정에서 근무함으로써 대제의 고문직, 행정, 재정, 군사 등에도 관여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오토 대제의 조직(Ottoman System)이라 한다.
대제는 또한 엘베와 오델 강 유역의 슬라브 족과 덴마아크 등을 개종시켰으며,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족 중의 나머지 이교도들을 정복하여 이탈리아 왕국을 세우는 등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현저한 공을 세웠다. 이에 교황 존 12세(John Xll, 955-963)는 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을 부여하였다. 오토 대제 이래 독일 황제들은 주로 이탈리아 중심의 정책을 폈는데, 10-11세기에는 황제가 교황과 성직자들의 임면문제를 좌우하였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교황의 명에는 불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속직 문제들에 관여하면서 부패하고 타락해 버리는 경향이 생겼다. 이 때에 클루니(Cluny) 수도원 출신의 그레고리 7세(Gregory Vll, 1073-1085)가 교황이 되었다. 클루니 수도원은 교회와 성직자의 속화에 대해 비난하면서 속권에 대한 교권의 자립을 요구하는 동시에, 교권이 제권의 상위에 있다는 교황지상주의의 확립을 주장한 곳이다. 그레고리 7세는 교황이 되면서 유명한 교황선언(Dictatus papae)을 발포하였다.
즉 모든 성직자의 임면권은 교황에 있고, 교황은 또 황제를 퇴임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 으로 말미암아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대주교와 주교가 더 많고 이들과 황제가 특히 긴밀하였던 신성 로마 제국에 있어서 더욱 타격이 심하였다.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제권은 고위 성직자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 7세 사이에 충돌이 생겨 제권주의와 교권주의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카놋사의 굴욕(Gang roach Cannosa)이라는 말은 이때 제권이 교권에 굴복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1122년에는 하인리히 5세와 카릭투스 2세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어, 교황은 종교적인 권위자로서 성직자의 임면권을 소유하고, 황제는 그 임면에 동의하는 동시에 봉건적인 영주로서 권리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이 교권과 제권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양자는 세속적, 종교적인 차이는 있으나 모두 세계지배의 이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1177년에도 프리드리히 1세(Feiedrich I)와 알렉산더 3세(Alexander In) 사이에 대립이 있었으나 교권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였다. 교황 인노센트 3세(Innocentius 111)때에는 스콜라 철학을 그 사상적인 배경으로 하여 교권이 최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교황의 칭호가 베르로의 대직(Vicarius Petri)이라 확신하고 종교와 세속 두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신정을 베풀고자 하는 이상을 실현하기에 노력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를 폐하고 오토 3세를 즉위시켰으나, 교황에 맹종하지 않자 그를 폐하고 다시 프리드리히 2세를 즉위 시키는 등 황제의 옹립과 폐위를 좌우했다. 이와 같은 교권 우위의 우월성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게도 동일하였다.
11세기부터 13세기 후반 (1096-l270)에 걸쳐서 유럽을 진동한 십자군의 대원정도 이 시기의 신앙열과 교황권을 배경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12세기 중엽에 (그라티아누스 교회법전)(Decretum Gratiani)이 완성되었는데, 이 법전은 종래의 법령들을 조직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인노센트 3세와 그레고리 9세에 이르러서야 계통적으로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법이 집성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권력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교황권의 절대 우월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논거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 필립 4세(1285-1314)는 교황 보니페이스(Boniface) 8세(1294-1303)와 교회령에 대한 과세문제로 쟁의를 거듭한 끝에 무력 충돌까지 일으켜 교황을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 사건은 교회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 후 필립 4세는 1309년에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 1305-1314)를 프랑스 남쪽 아비뇽 (Avignion)에 유폐하고 말았다. 교황의 유폐는 그레고리 11세(Gregory Xl, 1370-1378)까지 계속되다가 1378년에 이르러서야 교황이 로마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이후 교황청 내에는 프랑스 파와 로마 파가 생겨 서로 교황을 세우고 또 서로 파문하면서 정통임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409년의 파리 종교회의에서 양파가 세울 교황을 폐위시키고 새로 교황을 정했으나 양 파가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 3명의 교황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콘스탄쯔(Constanz) 종교회의(1414-18)에서 3명을 폐위하고 새로 마르틴 5세(Martin V, 1417-31)를 교황으로 추대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때에 비로소 로마 카톨릭 교회는 통일 되었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교황권이 황제권의 하위로 떨어지거나 유폐되고, 또 교회가 분립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은 중세의 종교와 정신면에 변질을 가져온 것으로서, 그것은 봉건사회의 전반에 걸쳐 전개 되었던 변질과정과 그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교속의 대립과 수도원의 발전
교회의 최고 무기는 개인에 대한 파문과 공동체, 국가에 대한 '종교집행정지'였다. 교황권의 발전에 따라 로마법에 기초를 둔 교회법이 형성되어 승려는 물론 속인일지라도 결혼, 유언, 독신, 요술, 이단에 관하여는 교회의 재판을 받았다. 교황의 세속적 권력이 강대해지자 세속계에서도 군주위에 서서 이를 호령하려는 의욕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결과 교황과 속계의 최고 권위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우월권을 에워싸고 싸움이 벌어져 11세기 이후 약 2세기에 걸쳐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당시 황제 또는 국왕은 종교 제후에 대하여 서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교황 Gregory 7세 (1073-1085)는 교칙을 내려 군주의 승관서임을 금하고, 승관의 매매와 승려의 대처를 금지 하였다. 신성로마 황제 Heinrich 4세(1050-1106)는 이를 반대하여 싸웠으나 교황이 그를 파문에 처하고 독일 제후의 그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해제시키는 바람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 7세의 용서를 받기 위해 이탈리아 카놋사에서 사흘 밤 사흘 낮을 눈 가운데서 무릎을 꿇었다는 '카놋사 사건'(1077)은 교황권의 우월을 말하는 좋은 예로 되어 있다.
이리하여 13세기 초의 Innocent 3세(1198-1216)에 이르러 교황권은 최고 절정에 달하였다. 교회가 세속적 세력을 높이고 지상의 재보를 쌓아 올려 원시 기독교의 순수성을 잃고 있을 때에 수도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수도사 생활은 오리엔트에서 먼저 일어났으나 서유럽에서는 6세기 초에 St. Benedict(480-543)가 로마의 남쪽 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세운 것이 처음이다. 그 수도원의 수도사를 위해 정한 이른바 베네딕트 계율은 그 이후의 수도 원의 계율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청빈, 정결, 복종을 지킬 것과 한 평생을 수도원에서 보낼 것을 서약시키고 날마다 규칙적인 기도와 명상과 노동에 종사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노동은 농경 따위의 육체 노동과 학예상의 노동 등이 존중되었는데 학예상의 노동에는 고서의 필사 등이 있었다. 이리하여 수도원은 세속화되어 가는 카톨릭 교회에 새로운 공기를 주입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원도 부유해지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감에 따라 차차 귀족화하여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타락한 수도원을 베네딕트의 계율로 돌이키려는 Cluny, Sith 등의 새로운 수도원단이 나타났으나 이것도 결국에는 세속화되었다.
V . 이슬람 세계
1. 이슬람교의 성립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이라고 불리는 사막의 유목민과 쿠레이져 (Kuraish) 부족을 중심으로 한 오아시스 정착민들이 부족 단위의 공동 생활을 영위하면서 다신교와 협의체 의사 결정 방식을 토대로 한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메카는 오아시스 대상교역의 중심 도시로, 각 부족의 우상을 모신 순례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더욱이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의 전쟁으로 지중해와 유크라데스-걸프해를 통한 동서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메카와 메디나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급격히 번창하게 되었다. 부의 급증으로 인한 빈부의 갈등, 우상 숭배의 만연, 도덕과 윤리의 타락이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 팽배한 사회적 분위기였다.
이슬람교를 성립시킨 마호메트(Mahomet, 570-632)는 이러한 시기에 메카의 명문 쿠레이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조부와 숙부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 험난한 대상 활동에 종사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의 대상 여행을 통해 그는 당시 혼란한 사회상에 깊이 회의하고, 크리스트교와 유대교 사상에도 관심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를 고용한 여주인 카디자(Khadijah)와 결혼한 마호메트는 사업보다 명상 생활을 통해 병든 인간 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구하였다. 오랜 명상 끝에 40세 되던 610년경 드디어 신으로부터 첫 계시를 받아, 계급과 우상 숭배의 타파, 혈연과 인종, 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보편적 사상인 이슬람을 완성하였다.
2. 이슬람교의 사상
이슬람은 절대자이고 유일신인 알라(Allah)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의미하고 있으며, 언어적으로는 평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슬람의 교의는 코란(Koran)에 집대성되어 있다. 전체가 114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은 전혀 독립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코란이 제시하는 신학의 내용은 단순 명백하다. 거기에 의하면 유일신 알라가 있으며 마호메트는 그의 예언자이다. 과거에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예수 등이 있었으나 진리의 일부만이 그들에게 계시되었고 최종적 계시는 다만 마호메트에게만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은 후 신체의 부활이 있으며 내세의 생활이 있다.
충실한 신도에게는 쾌락 을 마음것 취할 수 있는 천국이 있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영원한 지옥의 불이 있다. 또한 신 앞에 만민의 평등과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중개자도 두지 않는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여러 가지 규칙과 의무가 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우상 숭배를 금하며, 음주와 도박을 하지 말도록 규정되어 있다. 한편 4명까지의 부인을 갖도록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또한 신도에게는 5대 의무가 있었다. 신앙의 고백,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자선을 위한 구빈세, 라마단 그리고 평생에 한 번 메카의 순례가 그것이다.
3. 이슬람의 팽창
그러나 마호메트의 이슬람이 처음부터 주변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유일신 사상은 당시 우상 숭배자들인 메카 상류충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였기 때문 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하였다. 그래서 622년 마호메트와 그 추 종자들은 메디나로 이 주하여 새로운 이슬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것을 해지라(Hegria)라하여 이슬람력의 원년 으로 삼았다. 메디나를 장악한 이후로 마호메트교는 정복적 성격을 떤 종교가 되었다.
그는 정치적 군 사적 지도자로 군림하고 이웃의 여러 지역에 대한 포교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세 차 례에 걸친 전투 글에 630년 메카에 입성하게 되었고 교세는 더욱 확장되었다. 이슬람 공동체의 성장은 632년 마호메트가 타계함으로써 일시 위기에 봉착했으나 이슬람 식 합의제 선출을 통한 칼리프(calif: 후계자 또는 대표)의 등장으로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 였다. 칼리프는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관장하는 동시에 최고의 통치자로서 이슬람 공동체를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7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및 퉤르시아에 그 세력을 미치게 되었으 며, 중국과 인도 혹은 한국가지 아라비아 상인들의 활동이 미쳤다. 또한 이집트를 거쳐 8세 기에는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여 마침내 서유럽의 핵심부인 프랑크 왕국과 접경하게 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이러한 급속한 팽창을 설명하기 위해 사양의 학자들은 흔히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당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하였고,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강제 개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4. 이슬람 문화
세 대륙에 걸쳐 형성된 이슬람 제국은 아랍의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이란 및 인도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슬람 문화는 8-11세기에 절정에 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서양의 고전 문화가 보존될 수 있어 유럽의 문화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이슬람 문화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는 분야는 과학이었다. 의학에서 그들의 스승 겪인 그리스를 능가하였고 안질, 마마 그리고 홍역에 관한 의학서는 18세기까지 최고의 권위서로 알려졌다. 수학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받아 아라비아숫자와 영(0)의 개념을 확립하였다. 천문학에서도 경도와 위도 그리고 자오선의 길이가 측정되고, 천체 관측 기구를 만들어 지구 구체설을 중명하였다.
또한 이슬람력의 원리는 원대에 중국과 우리 나라에도 소개되어 태음력의 정비와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화학 분야에서는 실험을 통하여 승화 작용이나 중류법이 고안되어 알칼리, 알코올 등의 용어가 생겨나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문학에서는 이란 문학의 영향을 받아 산문이 유행하고 궁정 문학이 발달하였는데 (아라비 안 나이트)로 알려진 천일야화는 이슬람의 융합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 건축술도 뛰어나 둥근 돔과 아치, 첨탑을 특징으로 하는 사원 건축과 여기에 화초 문양의 기하학적 표현인 아라베스크가 유행하였다.
7. 십자군 원정
1. 십자군
중세 유럽의 기독교도 사이에는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습관이 있었다. 기독교도들은 예루살렘 성묘의 순례를 최대의 덕행으로 생각하였을 뿐 아니라 동반의 진화를 가져가서 팔아 얻는 경제적 이익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순례자는 날로 성행되었다. 사라센인은 처음 순례자를 후하게 대접하였으나 차츰 동방 무역의 독점을 꾀하고자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셀주크 투르크인은 소아이아로 진출하여 동로마군과 싸워 콘스탄티노플(=이스탐불)을 위협하고 다시 팔레스티나에 침입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1071) 순례자를 더욱 박해하여 기독교도의 격분을 샀다. 이에 비잔틴 황제의 구원 요청에 응하여 로마 교황 Urban 2세(1088-lG99)는 봉건 귀족과 승려를 남프랑스의 Clennont에 소집하여 성지 회복의 원정군을 일으킬 것을 선언하였다. 각계 각층은 각각 다른 목적아래 원정에 참가한 것이지만 중 세인의 맹목적이라 할 만큼 열렬한 신앙심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십자군은 1096년에서 1270년에 이르기까지 약 2세기동안 전후 8차에 걸쳐 행해졌다. 1회 십자군(1096-1099)은 성지 예루살렘을 빼앗고(1099) 지중해 동안에 예루살렘 왕국과 3개의 봉건제후령을 세웠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이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을 받아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신성로마황제 콘라드 3세와 프랑스 왕 앙리 7세가 연합하여 2회 십자군 (1147-1149)을 일으켰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도중에서 되돌아 오고 말았다. 그 뒤 투르크령의 이집트 제후인 paladin이 예루살렘 왕국을 멸하였으므로 영, 독, 프의 군주가 3 회 십자군(1189-1192)을 일으켰으나 내홍이 일어나 실패하였다. 베네치아를 집결지로 한 4 회 십자군(1202-1204)에는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경제적 요소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베네치아의 상적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비잔틴 제국을 일시 멸하고 여기에 라틴 제국 (1204-1261)을 세웠다. 5회 십자군(1219-1221)은 이집트의 Damietta를 점령하였으나 전리품의 분배로 분쟁이 있어나고 지도자가 무능하여 이슬람교도에게 다시 빼앗겼다. 그 후에도 3번이나 파견하여 1212년에는 어린이 십자군의 참극까지 일어났으나 성지 회복 의 목적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십자군이 실패한 원인은 서구의 제왕, 제후, 비잔틴 제국, 이탈리아 여러 도시, 종교 기사단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아 행동의 통일을 볼 수 없었다는 것과 정규의 해군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데 있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 원인은 계속적이고 조직적인 대식민이 행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십자군의 실패는 교황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십자군 참가자에게 면죄부를 함부로 주는 풍속을 자아내어 교회의 권위를 더욱 손상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봉건제를 붕괴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또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민의식을 일으켜 왕권 강화에 유리한 작용을 하였다. 동방무역이 열려 이탈리아, 이어서 다른 여러 나라의 도시가 번영하였다.
2. 십자군의 역사적 의의
서유럽사회가 봉건영주들과 로마카톨릭교회의 지배하에 안정을 되찾고 점차 성장의 길로 들어서자, 서유럽세계는 그 세력을 외부로 신장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동방 오리엔트에서는 셀주크 투르크가 일어나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소아시아를 빼앗아 직접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십자군 원정의 직접적 계기를 만든 것은 비잔틴황제였다.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위협당하자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Alexius Comnenus)는 로마교황 우르반 2세 (Urban)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우르반 2세는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성지탈환의 성전을 일으킴으로써 동서로 갈라진 교회를 다시 통합하여 그 수장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는 프랑 스의 클궤르몽에서 공의회를 열어 성지회복을 위한 성전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많은 군중과 기사들이 교황의 성전호소에 호응하여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그후 13세기 후반가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8회에 걸쳐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성과는 대수로운 것 은 못되었다. 종교적인 열광으로 성지에 도착한 최초의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하였으나 일시적인 점령에 그쳤고, 그후 이슬람교도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그리스도교도들을 공격하자 1187년에 예루살렘은 다시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몇 차레 십자군 원정이 시도되었으나, 제5회 때 이슬람교도의 내분을 이용하여 잠시 회복했을 뿐이었고, 예루살렘은 줄곧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었다. 초기의 십자군은 종교적 열정이 넘쳐 있었으나 회가 거듭됨에 따라 점점 종교적 열정은 사라지고, 정치적 야심이나 상업상의 이해가 오히려 원정의 주된 동기가 되었다. 그 중에 대 표적인 것이 1204년의 제4회 십자군이었다. 십자군 병사들은 베네치아 상인의 요청에 따라 성지회복이라는 그 원래의 목적을 저버리고 성지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비잔틴제국 을 넘어뜨리고 라틴제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십자군은 결국 성지회복이라는 그 본래의 목적 을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 유럽세계의 외부로의 진출은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십자군의 영향은 자못 크다. 그것은 전성기의 유럽세계의 힘의 팽창을 표시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계속됨에 따라 중세 유럽사회의붕괴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 었던 것이다.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으로 그 절정에 달했으나. 성지회복이 실패하자 신앙열도 식어지고 교 황의 권위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또 십자군의 실패는 원정의 주동 역할을 하고, 가장 많은 희생을 바쳤던 기사계층의 몰락을 촉진하여 봉건제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서유럽인들은 이슬람문화와 비잔틴문화와의 접촉이 늘어남으로써 그들에게서 큰 영향과 자극 을 받았고,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서유럽의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이에 수반한 화폐경제의 발달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적이었던 장원경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Ⅶ. 서유럽 중세사회의 변화
1. 중세 도시의 성립
중세 장원경제는 자급 자족을 위주로 하는 자연경제였다. 따라서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공업품의 교환이 활발해지자 사교의 주재지, 수도원의 소재지, 봉건귀족의 성새의 소재지, 수륙 교통의 요지 등 상품 소지자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시장이 열려 수공업자, 상인이 많이 모여들어 정주하여 인구가 조밀한 취락을 이루어 도시가 발생하였다. 시장 보호권을 국왕으로부터 얻어 시장 영주가 되어 도시 시민을 재판하고 또 시장세, 성품 세를 징발하여 재원을 풍족히 할 수 있었던 봉건 영주들은 도시 건설을 보호, 장려하고 때로는 스스로 이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생긴 도시는 국왕 및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도시가 발전하려면 광범한 시장 및 농촌과의 교환이 필요하였는데 그러기에는 봉건 영주의 지배가 방해물이 되었다. 이 때문에 도시 시민들은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해 영주에 대해 투쟁을 개시하였다. 투쟁은 때때로 전투 형식을 취하였으나 많은 경우 평화적으로 해결 되었다. 국왕은 대개 도시를 원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중개자의 역할을 하였다. 국왕은 이에 의하여 붕건 영주와의 투쟁에 있어서 도시를 자기의 재정적 원조자, 동맹자로 할 수 있었고 도시는 국내의 평화와 상업로의 옹호를 위해 중앙 권력의 강화를 어느 정도 필요로 하였던 것 이다. 도시민의 영주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지도적 세력이 된 것은 Guild의 상인이었으며 수공업자, 하충민이 이를 지지 하였다.
투쟁의 결과 도시는 특권과 자유를 얻었다. 자치와 자유를 획득한 도시는 법적 인격으로서 하나의 도시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도시내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거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인격적으로는 자유가 인정되었고 장원에서 도망해 온 농노도 1년이상 체 류하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참으로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주는'(City air gives freedom) 것이었다. 도시는 각각 참사회 재판소를 가지고 있었고 도시법을 만들었다. 도시의 발전에 따라 봉건 문화와 구별되는 도시 문화가 발생하여 여기에 비로소 세속의 지식인이 발생하였다. 12세기 경에 이르러 수공업자의 수가 늘어나자 수공업에 종사하는 직인들이 직업별로 동직자 조합(Craftgild Zunft)을 만들었다. 이것 또한 안으로 공존 공영과 상호 부조를 꾀하고 밖으로 외부 수공업자와의 경쟁에 대항 하기 위해 조직된 것인데, 차츰 세력을 얻게 되자 정권을 독점하고 있던 도시의 귀족 및 상인 길드에 대하여 참정권을 요구하여 투쟁하였다. 수공업이 상업보다 우세한 도시에서는 동직자 조합이 승리를 거두어 도시는 동직자 조합의 연합체가 운영하는 곳이 되었다.
2. 길드조직의 발전
11세기 초에 갈은 도시의 전상인이 모여 조직한 상인 조합(Merchant guild)이 나타났다. 여기에는 수공업자도 가입하였으므로 정확히는 상공업자의 단체였는데 안으로 공존공영을 꾀하고 밖으로 상업을 독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는 농촌 인구를 흡수하여 수공업자의 수가 늘어 12세기경에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직공들이 직업별로 조직하는 동직 조합(Craft guild, Zunft)이 나타났다. 이것 또한 안으로 공존 공영과 상호부조를 꾀하고 밖으로 외부 수공업자와의 경쟁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인데 이는 생산과 판매를 통제함으로써 동업자끼리의 자유 경쟁을 없게 하였다. 또 비조합원의 영업을 금지하고 도시 주변의 일정 지역내의 수공업 경영과 상거래를 금지시키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수공업은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몇 개의 봉건적인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도제제도가 곧 그것이다. 장인(Master)은 독립하여 자기의 작업장과 점포를 가지고 도제 (Apprentice), 직공(Journey Man)을 거느리고 있었다. 도제는 장인 가족의 일원으로서 생활하면서 기술을 배워 일정 연수를 겪은 뒤 직공이 되었다. 직공은 몇 년 동안 장인밑에서 일한 뒤 다른 장인 밑에서 수업하고(편역시대) 장인 시험인 Masterpiece를 만들어 합격하면 장인이 되었다.
3. 중세도시의 발달
10세기로부터 11세기에 걸쳐 모든 이민족의 침입이 종식되고 유럽사회는 게르만민족 이동 이후 처음으로 전반적인 안정을 되찾게 되었으며,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유럽에는 새로운 활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11세기로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계속적으로 중가하 고 전유럽적인 개간과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새로 개척된 지역에는 신읍이라고 하는 새로운 마을이 건설되고, 그곳의 농민은 장원의 농노와는 달리 신분적으로 자유로웠다. 사회의 안정, 인구의 중가, 그리고 경작지의 확대에 따른 사회적 유동성의 중대는 교역과 상업의 발달을 자극하였다. 농업생산력의 중가는 잉여생산물을 낳게 하고, 이러한 잉여생산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소규모의 지방적인 시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점차로 교환 경제를 움트게 하였다. 이리하여 10세기 후엽부터 11세기에 걸쳐서 서유럽세계에는 새로운 상인계층이 광범하게 형성되어 갔으며, 이들의 상업활동의 근거지 또는 중심지로서 중세도시가 또한 널리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도시는 제후의 성곽이나 주교도시 또는 수도원도시의 주변에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거주하는 새로운 지구가 조성되고 이를 둘러싸는 새로운 성벽이 구축되어 형성되었다. 그리고 도시주민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새로운 성벽 안에 거주하는 이들 상공업자층으로써 이들이 성곽(Burg, bourg)의 주민, 즉 시민(Burger, bourgeois)이었다. 처음 도시의 사업활동의 범위는 주변농촌을 대상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 지나지 않았으나, 노르만인이나 아랍상인의 활동에 자극되고, 특히 십자군의 영향으로 교통로가 발달함에 따 라 그 교역의 범위가 넓어져 점차 원거리무역이 번창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항구도시는 십자군원정으로 동방무역이 한층 활발해 졌으며, 이곳 상인들은 아시아에서 후추를 비롯한 향료, 비단 등 사치품을 들여와 이를 프랑스, 독일 등지에 넘기고 그 대가로 은을 지불하였다. 이탈리아에 이어 원거리무역이 번창한 지역은 브리쥐, 강(Ghent), 이프르(Ypres) 등을 중심으로 하는 플랑드르 지방과 뤼벡(Lubeck), 함부르크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독일지방이 었다. 이 북부유럽 지역의 주요 무역상품은 플랑드르의 모직물이었다. 중세도시는 새로 건설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고대도시의 자리나 국왕, 봉건제후 또는 주교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하였다. 그들은 자기 영내에 도시가 발달하는 것을 환영하였는데 그 이유는 시장세, 상품세를 징수할 수 있고, 또 도시에 대한 재판권 행사나 각 종 인가를 통해서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인의 입장에서는 영주로부터의 각 종 속박은 그들의 경제활동에 맡은 지장을 받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상인의 주도 하에 도시공동체를 형성하여 그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영주에게 일정의 금액을 지불함으로써 자유를 인정하는 특허장을 받아 자치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도시의 주민들은 비록 도시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나름대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장원의 농민에게는 부러운 일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장원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도망해 오는 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도시는 도망해온 농노가 도시 안에서 1 년과 하루만 넘기면 자유민이 될 수 있게 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인들이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중세도시의 주민들이 누린 자유는 근대사회의 시민들이 누린 것과 같은 개인의 자유 는 아니었다. 그것은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이 단결하여 영주로부터 얻어낸 그들 자신의 집단적 자유였다. 시민들은 그들의 특권적 자유를 독점하기 위해 배타적인 조직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곧 길드(guild)였다. 따라서 도시 내에서의 상업활동이나 생산활동은 집단적이고 보 호와 엄격한 통제를 받음으로써 완전한 개인의 자유와 자유경쟁에 입각한 근대사회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비록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중세도시의 발달은 비봉건적이고 비농업적인 사회세력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다.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시민계급의 성장, 시장경제의 발달, 이 모든 것은 도시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얼마안가서 주변의 농촌적인 봉건사회에 대해서도 서서히 그리고 결정적인 해체작용을 미치게 되었다.
4. 중세말 교회세력
중세유럽인들의 생활과 그들의 문화에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교회의 세력도 13세기를 지나면서부터 차츰 쇠퇴의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교황과 세속군주와의 싸움을 통하여 로마교회 자체가 하나의 정치기구로서 세속화 한데다가 십자군의 실패로 민중의 신앙심이 식어갔기 때문이었다. 또한 봉건제후와 기사들의 세력이 약화되어 왕권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보편적인 권력으로서의 교황권은 그 존립의 기반을 상실하면서 세속적인 왕권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업었고, 그 과정에서 교황권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3세기 말에 교황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Vll)는 프랑스의 필립 4세와 과세권문제로 다투다가 실패하고, 다시 재판권문제로 싸웠으나 마침내 왕에게 붙잡혀 굴욕 속에 죽었다(1303). 이때 국왕이 소집한 삼부회에서 성직자들은 귀족, 평민 대표자들과 함계 국왕을 지지하여 교황의 프랑스 교회에 대한 간섭을 배격하였다. 1305년에 추기경회의에서 클레멘스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교황청은 남부 프랑스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져 약 70년간 교황은 프랑스 왕의 간섭을 받게 되어 교황의 권위는 한층 더 떨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고대 유태인들의 바벨론 유수에 비겨 '교황의 바벨론 유수'라고 부른다.
인문주의자 폐트라르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주장으로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가고 다음 해 로마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우르반 6세가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추기경 들은 곧 그와 대립하게되어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하여 교황청을 다시 아비뇽 으로 옮김에 따라 교황청은 로마와 아비뇽으로 갈라져, 이른바 '교회의 대분열(Schisma, 1378-1417)로 알려진 그리스도교계의 양분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 었다.
5. 14,15세기에 서유럽세계가 겪은 사회경제적 위기
중세유럽의 쇠퇴현상은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나게 시작하였다. 12세기이래 계속된 농업생산의 증대,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 인구의 증가 등 사회경제적 발전이 13세기말을 전후하여 점차 퇴조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경작지의 확대가 한계점에 도달했으며, 지력의 고갈, 적절한 시비방법의 결여, 부역노동의 비효율성 등으로 농업생산력은 다시 저하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이 무렵부터 인구의 감소 현상이 나타나더니 14세기의 흑사병의 유행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로 감소시켜 곡물에 대한 수요의 감소로 가격이 떨어진 반면, 농업노동력의 감소로 그 임금은 크게 올라갔다. 이리하여 많은 농토가 버려져 황무지로 바뀌고, 마을의 가옥들은 비어진 채 폐허로 변해 유럽 농촌은 '봉건적 위기의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동안 상업과 도시의 발달로 화폐의 사용이 늘어나자 영주들의 수입증가에 대한 욕구는 오히려 늘어났다. 영주들은 농업상의 위기에 당면하여 우선 택한 길은 농민에 대한 압력을 가중하여 부역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 다. 부역의 강화는 장원으로부터 농민들의 도망을 유발하였다. 영주들은 농민의 도망을 막기 위해 오히려 농민의 부담을 경감하고 그들의 신분적 속박을 완화해 주어야 했다. 영주들 자신이 화폐에 대한 욕구가 늘어난 데다가 비능률적인 부역노동에 의한 직영지보다는 화폐 지대를 받는 토지임대를 바라는 점도 있었다. 이래서 영주들은 농민의 부역을 폐지하고 직영지를 분할하여 이를 농민에게 대여함으로써 지대를 화폐 또는 생산물 지대로 받는 길을 택하였다. 15세기말경에 이르러서 서유럽에서의 부역노동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지역에 따라 영주들이 지대를 올리고, 농민의 신분적 속박을 강화하려 하자 14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에서는 자크리(Jacqerie)의 농민반란이 일어났고,영국에서는 와트 타일러(Wat Tyler)의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도시에서도 경제적 후퇴에 수반한 사회불안과 대중반란이 일어났다. 흑사병에 의한 인구감소는 상품에 대한 수요 감소와 노동인구의 감소, 그에 따른 임금의 상승을 가져왔다. 이에 대해 상공업자는 노동인구의 감소를 막고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등 길드의 규제를 강 화하자 14세기 초엽에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대중 폭동이 일어났다. 14, 15세기의 유럽세계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사회적인 불안과 경제적 쇠퇴의 양상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그 속에서 장차 유럽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올 새로운 요소들, 이른바 자본주의 요소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6. 중세 말 중앙집권적 민족국가의 성립
13세기 말경부터 교회세력이 쇠퇴하고 봉건영주들의 힘이 약화되자 상대적으로 국왕권의 강화 현상이 나타났다. 국왕은 종전에 제후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법, 행정, 군사, 징세 등의 권한을 되찾아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성립한 국가는 16세기 이후에 절대주의 국가가 성립할 때까지의 과도적인 형태로서 성직자, 봉건영주, 그리고 시민이라는 세 신분의 바탕 위에 세워진 신분제 국가, 즉 왕조국가였다. 국왕은 신분제의 회를 통해서 과세에 대한 국민의 협찬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점차 이 의회가 왕권에 대한 제약기구로 변모되기 시작하자 국왕은 신분제의 회를 무력화 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15세기 말엽에는 서유럽의 몇몇 지역 에 절대군주제의 중앙집권적 민족국가가 성립하게 되었다.
영국의 발전
민족국가의 성립에 앞장선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에서는 1066년 월리암의 정복이래 노르만왕조의 지배하에 강력한 왕권을 수반한 예외적인 봉건제가 발달하였다. 노르만왕조를 이은 플란타지네트(Plantagenet)왕조의 헨리 2세(1154-1189)는 보통법의 정비와 재판제도의 개혁으로 집권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존왕은 실정을 거듭하다가 귀족의 반항에 부딪쳐 1215년에 대헌장의 승인을 강요당했다. 이 문서는 주로 봉건귀족들의 특건을 국왕에게 확인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국왕이라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근본원리를 확인하는 것으로 영국입헌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그 뒤 레스터 백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fort)가 제후들과 함께 헨리 3세에게 대헌장의 재확인을 강요하였으며, 그는 수년간 실질적으로 영국을 지배하였다. 그는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대회의(great council)에 주와 도시의 대표를 참여케 함으로써 영국의회의 시초가 되었다. 몽포르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1세(1272-1307)는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그 강화책으로서 왕좌재판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1295 년에 소집한 모범의회(Model Parliament)로서 영국의회의 진정한 기원을 이룬 점이었다. 에드워드 1세 때 성립한 의회는 14세기에 발전을 계속하여 에드워드 3세(1327-1377)때는 상 하 양원이 분리되고, 의회의 권한도 강화되었다.
프랑스의 발전
영국의 노르만왕조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에서는 봉건제후들이 지방에 할거한 가운데 카폐 왕조는 미약하여 그 지배권은 파리 주변의 소위 '프랑스의 섬'(lIne de France)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12세기말에 왕위에 오른 필립 2세는 영국의 존왕과 맞서 프랑스 내의 영국령(노 르만디, 메인, 앙쥬, 투레인)의 태반을 되찾았다. 그 후 루이 9세(1226-l27G)는 공정한 재판으로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고등법원을 설치하였다. 필립 4세(1285-1314)는 교황 보니파키우스와 싸워 프랑스교회에 대한 국왕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백년전쟁
백년전쟁(1337-1453)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가 중앙집권적 민족국가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프랑스 내의 영국령의 문제와 플랑드르지방의 모직물공업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에 기원을 두었으나, 프랑스 왕위의 계숭권에 대한 영국황의 요구를 구실로 하여 일어난 봉건적인 전쟁으로 시작되어 점차 두 국민 사이에 민족의식이 높아져 민족국가간의 전쟁으로 변모해 갔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발전에 두 가지 이점을 주었다. 그 하나는 영국으로부터의 영토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쟌 다르크에 상징되듯이 새로운 국민의식의 싹틈이다. 그 결과 프랑스는 민족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영국은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내의 영국령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으나 그 대신 국민의식 강화되었고, 게다가 왕실 내에서의 왕위쟁탈전인 장미전쟁(1455-1485)을 겪는 동안에 여기에 휘말린 제후들의 세력이 타격을 받게 되어, 1485년 헨리 7세의 튜더왕조 하에서는 왕권이 크게 신장하여 장차 강력한 민족국가로서 발전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에스파니아왕국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교도들의 '재정복'(Reconquista)을 통하여 성립한 아라곤, 카 스틸라, 포루투갈의 3왕국이 그라나다의 무어인 이슬람 국가에 대한공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도시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의회인 코르테즈(Cortes)도 발전하였다. 이베리아반도의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틸라의 이사벨라의 결혼이었으며(1469) 두 사람이 잇달아 왕위에 오름으로써 통합된 에스파니아를 탄생하게 되었다. 에스파니아는 이슬람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를 공격하여 이를 병합하고(1492) , 포루투갈은 중세이래 독립왕국으로 남게 되었으며, 양국은 곧 신항로와 신대륙 발견에 앞장을 서게된다.
독일
영국과 프랑스가 왕권을 중심으로 집권적인 통일국가로 발전하고 있을 때 독일은 영방국가와 자치도시, 기사령 등 수많은 대소의 독립적인 정치단위로 분열의 길을 걸었으며, 그러한 추세는 황제권의 쇠퇴와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황제권은 프리드리히 2세를 마지막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소위 대공위시대(1256-1273)를 거쳐 1356년에는 카알 4세가 황금문서(Golden Bull)를 공포함으로써 황제는 7명의 선제후에 의하여 선출되게 되었다. 황금칙서는 황제선출에 관련된 분쟁의 발생을 방지하였으나 황제권의 약화 내지 유명무실화를 확정지은 것이기도 하였다. 황제권의 쇠퇴는 곧 독일의 정치적 해체 추세의 심화를 뜻하며,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영방국가(teritorial state)의 형성이었다. 이 영방국가는 봉건적 사회질서로부터 근대적인 절대왕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신분제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도 상황은 비슷하여 중부의 교황령 이외에 북부에는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두 공화국과 밀라노공국, 남부에는 나폴리왕국 등 여러 제후국과 도시국가가 분립한 데다가 외세의 간섭과 당파싸움(황제당과 교황당)까지 겹쳐 통일의 전망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Ⅷ. 중세의 문화
민족이동 후 10세기까지 고대 로마의 빛나는 문명이 파괴되어 유럽세계는 일시적으로 '암흑'상태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유럼세계에서의 문명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비록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중세 초기의 혼란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사회가 안정을 되찾자 새로운 활력을 얻어 다시 빛나기 시작 하였다. 중세 유럽문화가 처음 활력을 되찾은 것은 9세기 초 찰스대제의 문화보호정책에 의하여 카롤링 르네상스가 일어남으로써 문화의 등불이 비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세문화의 전성기는 역시 중세사회가 그리스도교와 봉건제라는 새로운 체제하에서 안정과 번영이 절정에 달했던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가지의 200련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세계는 고대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게르만적 요소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특색을 지닌 중세 유럽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1. 중세 문화의 특징
중세 유럽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선 그것이 그리스도교 중심의 문화라는 점에 있었다. 중세 천년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럽인의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신부, 즉 교회는 비단 중세 유럽인들의 신앙생활만을 지배해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생활의 구석까지 침투하여 이를 규제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영향은 학문과 예술 등 중세 유럽인들의 지적, 문화적 활동에서 눈에 띄게 나타났다. 신앙은 이성보다 우월했으며, 따라서 신학이 모든 학문의 으뜸이 되고 철학은 신학을 위한 학문, 즉 신학의 시녀일 따름이었다.
중세학문을 대표하는 신학적 철학체계라고 할 스콜라철학은 주교성당이나 수도원의 부속학교인 스콜라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우며, 그 기반은 로마시대의 교부철학이었다. 11-12세기에 걸쳐 이슬람세계로부터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한 고대철학은 스콜라철학자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스콜라철학은 발전하고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스콜라철학자들의 당면한 문제는 스콜라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신앙과 이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 점은 중세 철학가들의 중요한 논쟁거리였던 '보편논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편논쟁이란 보편적 관념의 실재 여부에 관한 대립된 주장으로서, 실재론과 유명론이었다. 실재론자들은 풀라톤의 주장에 따라 보편적인 관념(idea)은 우리의 감각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 받은 유명론자들은 보편적인 관렴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단순한 명칭에 불과하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자들의 대립된 견해는 13세기의 '신학대전'을 저술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마침내 종합되었다. 온건한 실재론에 입각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한 카톨릭교리의 종합적 체계화를 완성하여 중세 스콜라철학을 대성하였다. 중세대학은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초에 걸친 시기에 학생 또는 교사조합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대학을 가리키는 'universitas'는 원래 전체란 뜻으로서 그것은 같은 목적을 위하여 협동하는 집단, 즉 길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법학), 파리 대학(신학), 영국의 옥스퍼드 등의 유명 대학이 설립되어졌는데 이들 대학들은 세속군주나 교회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이며 자치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자라나 장차 근대 유럽사회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 학문과 교육의 분야와 아울러 그리스교적 이념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미술의 분야에서였다.
12세기경부터 나타난 고딕양식은 하늘 높이 솟은 첨탑, 경건한 조각들은 천국을 향한 중세 유럽인들의 염원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인들의 생활과 그 문화에서는 이렇듯 그리스도교가 계속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완전히 지배한 것은 아니다. 문화의 세속적인 측면도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 등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두드러진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는 고대 로마인과 게르만인들의 세속적이며, 이교적인 생활방식을 불식하지 못했으며, 양자는 중세를 통하여 계속 공존하였던 것이다.
2. 중세의 대학
현재 우리가 몸 담고 있는 대학은 서양의 것을 수용 발전시킨 것이다. 물론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도 태학 국학 국자감 성균관 등과 같은 교육 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관들은 자국의 엘리트 양성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대학과는 거리가 있다. 대학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모든 나라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편적, 국제적인 교육 기관이다. 대학을 의미하는 원래의 용어가 '스투디움 게네날레'(studium generale)였다는 것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 스투디움은 학교요, 게네날레는 보편적, 국제적이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스투디움 제네날네는 12세기에 설립되었다. 볼로냐대학(Bologna, 1116-35), 파리대학 (Paris, 1150-70) 그리고 옥스퍼드대학(Oxford, 1167-90) 등이 그것이다. 간혹 의학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살레르노(Salerno, I080)를 최초의 대학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스투디움이지 게네날레였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볼로냐가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는 영예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유니버스티(university)를 대학으로 흔히 번역 사용하고 있다. 그것의 어원은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라는 라틴어이다. 그러나 중세의 문헌에서 흔히 발견되는 그 용어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 우니베르시타스가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의 조직 인 길드(guild)의 별칭, 즉 단체 혹은 조합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니베르시타스가 대학을 의미하게 된 이유는 무었일가? 서적이 귀했던 중세에 학생들이 지식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은 교수들의 강의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유명 교수를 찾아 몰려 다녔다. 볼로냐가 최초의 스투디움 게네날레가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하였다. 그곳에 로마법의 최고 권위자 이르네리우스(Irnerius)와 교회법으로 유명한 그라티아누스(Gratianus)가 있었던 것이다.
각지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점차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몰려들자 학교 주변의 시민들은 방세를 대폭적으로 올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은 신변의 안전에도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11세기 이후 교황과 황제 사이의 이념 투쟁으로 이탈리아는 거의 무정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생들은 조합을 결성하였고 그것을 우니베르 시타스라 불렀다. 그런데 당시 교수들은 조합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학생들과 달리 그들은 도시 당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합을 결성한 학생들은 먼저 방세 인하를 요구했다. 그들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다른 도시로 가겠다는 위협도 했다. 교회나 공공 건물을 이동하면서 강의가 행해진 당시 상항 에서 그것의 위력은 대단했다. 결국 볼로냐의 방세는 인하되었다. 학생들은 다음으로 교수들에게 요구했다. 마음대로 휴강하지 말고, 강의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그리고 폭넓은 강의를 할 것 등이 그것이다. 그와 같은 요구가 거부될 경우 학생들은 수업이나 등교를 거부했다.
당시 학교는 대체로 수업료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그것의 힘은 대단했다. 마침내 대학의 운영까지 학생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1252년에 교황이 승인한 학생의 대학 운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모든 학생들이 모여야 되는 학생 총회는 너무 규모가 커서 학생 대표의 임기나 학칙을 시기적절하게 조절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볼로냐의 운영권은 14세기에 교수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법학의 볼로냐와 달리 노틀담(Notre Dame) 부속학교에서 발생한 파리대학은 신학으로 유명했다. 교황의 관심과 더불어 신학 이론에 해박한 아벨라르(Pierre Abelrard)와 롱바르 (Peter Lombard)와 같은 지식인들이 파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대학의 특징은 처음부터 교수 대학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볼로냐와 달리 대부분의 교수들이 파리와 특별한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조합 결성을 주도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은 학생이나 교수 조합을 길드의 별칭인 우니베르시타스라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과 길드는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길드는 사라져간 반면 대학은 번창해 갔다. 그것이 우니베르시타스가 스투디움 게네날레를 대신하게 된(15세기 이후) 이유였다.
3. 중세 유럽의 철학
중세 문화를 지배한 것은 교부철학이다. 중세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이 있듯이 철학과 신학이 분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철학이 신학의 체계화에 이용되었다. 교부라 함은 초대 기독교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인데 2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로마 교회를 지도하였다. 그 대표자는 『신국』 , 『고백록』 , 『삼위일체론』 의 저자 Augustinus(354-540)이다. 그는 로마 교회의 교의와 권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그는 이러한 신학 체계를 플라톤 내지 신 플라톤의 학설을 빌어 설명하여 중세인이 플라톤, 아리스토델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기틀을 열었다.
중세 후기의 학문을 대표한 것은 Schola철학이다. 스콜라철학은 사원과 수도원의 학교에서 젊은 승려가 교사(Scholasticus)에게서 받은 교육에 기원을 둔 것인데, 12-13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무렵 플라톤 대신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환영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인용하여 카톨릭 세계관을 체계화하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 이 Thomas Aquinas(1225-1274)이다. 그의 『신학대전』 은 스콜라 철학의 최고봉이라 일컫는다.
그는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을 구별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하여 신의 인간에 대한 우월을 주장하였다. 또 그는 신의 국가와 죄악적인 세속국가를 엄밀히 구별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국가관에 수정을 가하였다. 그의 유기체적 국가 학설에 의하면 사회는 전체이며 인간은 그 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에 봉사함으로써 비로소 그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중세 말에 이르면 스콜라철학은 문자 그대로 번쇄철학으로 타락하여 사람들의 흥미를 잃었다. 이 결과 신학적 논중이 아니라 내면적 반성에 의해 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신앙의 유일의 근거를 성서에 두는 신비주의(Mysticism)가 나타났다.
4. 중세 유럽의 문예
민족 이동 이후의 수세기 동안의 문학은 민족 구래의 신화, 전설, 영웅의 사적에 취재한 서사시가 유행하였다. 영국의 『베오울프』 (Beowulf),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가 대표적 작품이다. 이러한 직업적, 게르만적 서사시는 라틴 문화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낭만정신을 보태어 기사도 문학으로서 발달하였다. 영국의 『아더왕의 이야기』 ,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가 대표작이다.
11-12세기경 남프랑스에 Troubadours라 일컫는 음유시인들이 나타나고 이 영향을 받아 12세기 후반 독일에 Yinnesinger가 나타났다. 중세 문학의 최후를 장식한 자는 이탈리아의 Dante(1265-1321)와 영국의 Chaucer(1340?-1400)이다. 단테는 이탈리아의 속어로써 중세 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컫는 『신곡』 을 쓰고 초오서는 『캔터베리 이야기』 (Canterbery Tale)를 써서 르네상스 문학의 선구자가 되 었다.
중세교육과 대학
12세기에 이르자 교회 혹은 수도원의 부속학교로서 대학이 발생하였다. 사레루노의 의학교, 볼로냐의 법률학교가 먼저 일어나고, 이어서 파리의 신학교(대학)가 생겼다. 파리 대학은 하급 대학인 자유과와 상급 대학인 신학(철학), 법학, 의학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자유과에서는 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 이른바 자유 7과의 기초 지식을 가르쳤다.
중세미술
중세 미술은 건축, 그것도 사원 건축이 주가 되었으며, 회화, 조각은 장식물,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건축은 10세기 초에 로마풍의 Romanesllue양식이 이탈리아에 일어나 독일, 노르만디, 잉글 랜드 등에 널리 퍼졌다. 그 특징은 평면도가 장십자형(Roman Cross)이며 지붕을 반원형으로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받는 기둥과 벽에 심한 중력이 가해져. 따라서 기둥이 커지고 벽이 두껍게 되어 창문을 많이 내거나 크게 낼 수 없어서 내부가 어둡고 외관이 둔중하였다. 12세기 중엽에서 15세기에 걸쳐 Gothic양식이 발달하였다. 이 양식은 지붕의 중력이 일점에 집중되도록 설계한 것인데, 오로지 기둥과 지주로써 그 중력을 받게 하였다. 따라서 벽이 엷어지고 창문을 크게 많이 내어 색유리를 끼었다. 파리의 Notre Dame, 쾰른, 요오크, 웨스터민스터의 대사원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참고 문헌>
중세 유럽의 도시, 앙리 피렌느, 신서원
에세이 세계사 3:중세, 편집부 편, 백산서당
중세 영국 농민의 생활수준 연구, 홍성표, 탐구당
중세 유럽의 문화유산, 프레데릭 B.아르츠, 보진재
중세 유럽의 사회와 문화, 이원근, 중문출판사
서양 중세 문명, 자크 르 고프, 문학과 지성사
세계의 역사 5:카를 대제와 잔 다르크-중세 유럽, 편집부 편, 글사랑
중세 허영의 역사, 마리아 아쑨타,혜안
중세시대의 서유럽, 조세프R-스트레이어,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서양 중세사, 브라이언 타이어니, 집문당
참고 사이트
http: //roseo- kyungPook. ac- kr/~z971554/
http: //cc. kaue. ac. kr/~hocho/medlink/med. html/
http: //myhome. netsgo. com/ksnl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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