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 그 희망의 계절.(펌)
1970년대 소백산과 태백산이 만나는 어느 고요한 한자락에 100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고, 그 마을 뒷편 저 넘어 한 20-30리쯤 되는 골짜기에는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련의 묘가 제대로 관리도 안된채 풀숲에 덮여 외로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 작은 동네에 외관이 다 찌그러져가는 초가집이 하나가 있었는데 어딜보나 빈티나는 촌집이었고,그 동네에서 자타공인 제일로 가난한 촌부부가 4형제를 날품팔이로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직장이라곤 가져보지도 못했고 시골에서 조차 그 흔한 농토한평 없이 살고 있었으니 가난에 찌들수 밖에 없는 생활구조였습니다.
그집 어머니는 거의 매일 남의 일을 품팔이 하셨고,겨울로 일이 없을때는 유난히도 추운 소백-태백 자락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셔서 나무를 한짐이고 내다팔아 그 빈곤한 한가족의 생계를 짊어지셨습니다.
하지만, 그집 어머니의 자존심은 대단해서 절대 남한테 얕보이지 않을려고 노력했고,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기색을 자식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 자식들은 어머니가 일이 힘들어서 우시는 모습을 평생 한번도 본적이 없었고,그 어머니 또한, 자식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예의범절과 학업에 열중하도록 최대한 배려를 하였고,그에 보답하듯 그집 4형제들은 학업성적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오히려 그집 장남이 어머니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홀로 눈물짓는 모습이 여러번 동생들에게 목격되었고,그것은 그 장남으로 하여금 어머니 대신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고뇌와 중압감을 어린나이에 주기에 충분한 환경이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집 장남이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인 1973년경에 박정희 대통령은 정수직업훈련원(아마도 지금의 정수장학회 전신)이란 그시대에서 만큼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좋았던 기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박정희 "정"자에 육영수 '수"자로 지어진 기술학교였습니다.
당시에 가장 인기좋았던 학교는 금오고등학교와 정수직업훈련원 이었습니다.모두가 박정희-육영수 여사의 지원을 받고 설립된 최고의 기숙학교였습니다.완전 국비에다가 무료기숙사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중,고등학교에서 1-2등만 학교장 추천을 받아 갈수있는 정말 인기좋은 학교였습니다.
지금시대에서 조명한다면 참 우스운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시대에서 만큼은 그 학교들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에 대학들은 장학제도가 지금과 달리 매우 미비했기 때문에 전체수석에 한해서 등록금 전액면제, 과수석들은 반액면제 정도였으니까 빈곤한 집안의 학생들은 대학갈 엄두를 내기가 힘든 때였습니다.
다만,금오고등학교와 정수직업훈련원의 차이는 3년제와 1년6개월제라는 점과 고교졸업장을 받을 수 있고, 없고의 차이였습니다.
당시 이 두학교 출신의 학생들이 얼마나 우수했는냐 하면, 세계기능대회에서 한국이 확실히 기억은 안나지만 80년대 언제쯤인가에 15-6년간을 연속 세계제패했는데,금메달수 1위가 금오고등학교이고 2위가 정수직업훈련원 학생들이었습니다.
정수직업훈련원이 금오고등학교에 비해 교육기간이 짧고,학생수가 훨씬 적었던 것에 비하면 정수직업훈련원 학생들은 정말 대단히 우수한 인재들이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두학교 학생들은 거의 100% 취업이 보장되었습니다.상황이 이러하니,빈곤한집 학생들에게는 당시에 꿈만 같은 곳이었고,어떤 가정에 만에 하나 그 두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있었다면, 그 집안의 학생은 시골마을 전체의 희망이 되었던 정말 소박한 시절이 우리들의 가난했던 70년대 한국사의 한장면으로 접혀져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의 20-30대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위에서 언급한 그 가난한 집안의 장남의 생각도 동생들과 부모님들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1년6개월제 정수직업 훈련원 밖에 없었고,그곳을 졸업하고 빨리 산업전선에서 돈을 벌어야 겠다는 일념 뿐이었습니다.
금오고등학교는 재학기간이 너무 길고 너무 먼곳에 있어서 오고가는 교통비에다가 용돈문제를 어머니의 나뭇짐에만 의존 하기에는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입니다.그도 그럴것이 그 장남이 성인이 될때까지 그 집안이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면서 한달에 밀가루 한포를 받아가며 살았으니, 그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그집 장남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정수직업훈련원에 원서를 내려했으나,그의 어머니의 대학은 꼭 가야한다는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가까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지원했고,전체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하지만,그집 장남은 고3초까지 줄곧 1위만을 했지만 대학등록금과 동생들 교육등 모든 것을 걱정해야만 했고,고3시절 3-4월에 부모형제들 몰래 결국은 정수직업훈련원에 원서를 내었고 합격한 후에야 가족들에게 알렸습니다.
당시 정수직업훈련원은 한군에서 3명만을 선발하기 때문에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고,전체학교 성적순으로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서 그 군의 군수가 최종3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위의 빈택집 장남은 중학교 성적이 전체 1위였고,고2때까지 성적 역시 전체 1위였기 때문에 합격을 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었을 겁니다.
고등학교에서도 그집 장남의 사정이 너무 안타까워서인지 고3초에 학업을 그만두었는데도 그 학교 교장께서 다음해 일월달에 2월달에 있는 졸업식때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고,그집 장남은 그 교장의 덕택으로 고교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집 장남이 학교를 중도포기 하고 정수직업훈련원으로 떠나던 날에... 많은 이웃 주민들이 배웅을 해주었고,그집 어머니와 장남이 그렇게 서로 부여안고 한없이 울던 뒷모습이 아직도 내눈에 훤하게, 그리고 눈이 시리도록 쓸쓸하게 한참을 지금 맴돌고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집 빈택의 네아들중 한명이었습니다.당시에 제형과 정수직업훈련원은 나와 우리 집안의 희망이었고 우리 이웃의 희망이었습니다.제형은 예정대로 1년6개월뒤에 정수직업훈련원을 졸업하고 아시아 자동차(현재의 대우자동차)에 입사하였고,우리집 가정형편은 점점 좋아져 갔습니다.
이런 빈학도의 희망이 되었던 정수직업훈련원을 누가 감히 비난할 자격이 있으며, 누가 감히 그런 희망재단을 세운 박정희-육영수 여사와 그분들의 따님에게 돌팔매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변해도 변하지 말고 제자리에 영원히 지켜져야할 것이 정의와 진실입니다.정의와 진실이 매도되고 부정이 득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며,오늘날 부정부패 원흉들의 자녀들이 정의와 진실을 욕되게 하고,마천루 높이 바벨탑을 지으며 만면희색 하게끔한 우리의 좌파세상은 반드시 척결되어져야 하는 이유역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번의 부정부패 원흉 김지태 후손의 낯부끄러운줄 모르는 뻔뻔한 고발사태는 다음 우파정권 집권시에 그 의도를 철저히 파헤쳐 이땅에 두번다시 부정한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도록 일벌백계로 삼아야 마땅할 줄로 압니다.
정수직업훈련원...그 희망의 시대 - 70년대를 생략해 버리고, 그 누구가 감히 나와 내가족 앞에서 세치혀로 세상을 속이며 거짓을 논한단 말입니까?
※ 제가 글을 쓰다보니까 이젠 저의 별난 가정사까지 다쓰게 되는데 왠만하면 불행은 아니었지만, 불편했던 과거사라서 숨기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는 분명 밝혀져야 하고, 부정한 자의 후손이 득세하는 꼴을 보고도 우리가 침묵한다면 미래의 우리들 세상은 암울하기만 할 것입니다.
- 구름꽃(최 영) 배상 -
첫댓글 강력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