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 그를 만나러 간다.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철저하게 저녁형 인간인 내가 새벽7시에 눈을 떴다. 공연은 4시. 하루가 꼬박 남았건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결국 무작정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신촌을 향한다.
이루마. 그의 음악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부쩍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에 부대끼는 출퇴근 지하철 시간도, 사정없이 막히는 러시아워의 버스 안 시간도 길면 길수록 행복해질 뿐이다. 나와 그만의 은밀한 교감이 연장되는 것이니.
콘서트에서 그가 무슨 음악을 연주할까. 아무래도 From the yellow room에서 가장 많이 선곡할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샤콘느를 연주했으면 정말 좋겠는데. I'm just a..도 듣고 싶다.
아..오늘은 날씨가 너무나 좋다. 청명한 하늘과 약간 싸늘하지만 상쾌한 바람이 분다.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햇빛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늘도 그의 콘서트를 응원하는 것일까.
친구를 만나 시청에 가는 버스를 탄다. 호암아트홀에 도착. 여유롭게 도착했으니 다행이다.
예매한 표를 바꾸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프로그램을 사서 본다.
프로그램은 주관객인 20대 여성 즉 나의 취향에 딱 맞게 만들어졌다. 프로그램에는 그의 친필, 그의 노트, 그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단번에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오늘 공연의 곡 목록을 보았다. 샤콘느가 있다! I 도 있다. passing by 도 있다..아니..내가 좋아하는 곡은 다 있다! 그의 모든 곡을 좋아하는 나에게 선곡이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석한 것은 I'm just a..가 없다는 것. 그래도 마지막 곡 ‘잠시’에 눈길이 간다. 미발표곡이라니..무척 기대된다.
#2. in the concert
나의 자리는 오케스트라석. 운이 좋게 좋은 좌석을 예매했다. 커다란 스크린에 아름답지만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바닷가에 피아노가 놓여있고,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 보이고, may be가 울려퍼진다. 나의 좌석에서 스크린을 보는 것은 조금 고역이지만, 스크린 뒤로 그가 피아노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세로 줄무늬의 남방을 입고 있다. 지난번 이사오 사사키와의 콘서트에서도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었던 것 같은데...잘 어울린다. 뭔가 격식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털털한 차림.
스크린이 올라가면서 그가 이어서 연주를 시작한다. 아...
그에게 미안하지만, may be는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온통 시각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의 손, 손목에 툭 튀어나온 부분, 손가락이 움직이면 근육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팔, 그리고 허리 부분에 살짝 구김이 간 남방, 짙은색 바지, 갈색 단화까지..그리고 음악에 몰두하는 그의 조금은 풀린 표정, 언제나의 헤어스타일.
무엇보다 아름답게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 한 음을 치고, 다음 음을 치기 위해 손가락의 위치를 부드럽게 바꾸는 동작, 또..가끔씩 보이는 미세한 손가락의 떨림은 나의 환각이었을까.
넋이 반쯤 나갔을때..그가 연주를 끝내고 마이크와 조그만 메모를 들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여전히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 그는 약간은 긴장한 듯 했다. 그러나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오늘 호암아트홀 같이 그리 크지 않은 공연장에서 얼굴을 보면서 공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쁜 듯 했다. 마치 그의 ‘방안’에서 연주를 들려주는 것 같은 공연을 하겠다고 말하는 그. 마치 그의 방에 초대받은 손님마냥 그가 가깝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3.part 1
one day I will 과 do you에 대한 곡 설명을 하고 연주를 시작하는 그. do you...love me?
이제는 시각을 벗어나 청각으로 그의 음악을 흡수하기 시작하는 나. 늘상 접해서 익숙했던 음악이 그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워진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연주들은 오직 이 순간에서만 그 빛을 발할 뿐이다. 일순 강렬한 빛을 발하고 명멸하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그의 음악도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공간을 메운다.
River flows in you, tears on love-강가에 돗자리 펴고 컵라면과 사이다라...그의 수더분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기분이 좋다. 가식을 싫어한다고 여러번 강조하던 그. 아무래도 서정성 짙은 그의 음악과 젊고 게다가 훤칠한 그를 생각할 때 누구나 쉽게 가지게 되는 편견. 겉멋만 든 번지르르한 피아니스트. 그러나 그는 너무도 소탈하고 착한 심성의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가 말하는 걸 보면, 또 그가 매번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는 관객을 향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입모양을 보면. 그는 정말로 좋은 사람일꺼라는 느낌.
sometimes...someone,,.,chaconne-그의 곡 설명이 아리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던 부분. 언제나 그는 나에게 favorite musician 이상의 감정을 가지게 하는 존재다. 그것은 그의 음악이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이고, 그의 삶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부분-사랑에 관한 그의 일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와 교감을 하는 나에게 있어, 그는 개인적인 친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그가 여자친구와 얼마 전에 헤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그의 음악을 연주할 때마다, 일기를 들쳐보고 그 때를 상기하듯, 아픔을 느낀다는 얘기를 들을 때 나의 가슴 또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음악을 통해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도, 실제의 그와 교감할 수 없는 현실. 그에게 있어 나는 이름모를 타인이라는 것,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깊게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yellow room, indigo-노란색과 짙은 남색의 만남. 전혀 정신병자 같지 않았지만, 그의 수줍은 방에 대한 묘사들. 노란 벽지와 세트인 노란 커튼,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비치면 온통 노랗게 된다는 그의 방. 나는 정말로 영국의 그의 방에 앉아있는 듯 했다. 사실 나는 yellow room에서 짙은 우울함을 느꼈는데, 그에게 있어 노란색은 정말 따스한 색인 것 같다. 이어지는 indigo. 푸르스름한 조명과 함께 밤하늘 빛을 연주하는 그의 모습. 어느새 나는 이루마란 존재를 잊고, 그의 음악과 교감하고 있었다.
#4.intermission
잠시 쉬는 시간. 문득 현실로 돌아온다. 마치 유체이탈을 경험한 듯 조금은 지친 기분이다. 콘서트는 정말로 아름답고..또 유쾌했다. 그는 그의 말마따나 정말로 말이 많았는데, 상당히 재미있는 말들이었다. 물론 일순간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그의 발언들도 적지 않았으나 위로 누나가 둘인 막내 특유의 애교스러움으로 무마하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스물일곱인 자신의 나이가 많지도 않지만, 적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그답게, 현 한국사회에 대한 생각이 많은 걸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답게 한국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그를 보면서 괜시리 뿌듯해지는 이유는 왜일까. ‘그리움’을 주제로 선곡된 아름다운 때로는 슬픈 선율의 곡들 사이사이 그의 인생철학, 가치관, 그리고 유머까지 엿들을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를 더욱 가깝게 느끼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시간들.
#5. part 2
It's your day-그는 위에 자켓을 걸치고 나타났다. 깔끔해보였으나, 난 남방 차림이 더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피아노 위치가 바뀌고 무대 셋팅이 달라졌다. 현악기를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I, passing by-I가 이사오 사사키의 곡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아서 섭섭하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귀엽다. 일본으로 콘서트 투어를 간다니, 일본에서도 분명 대단한 인기를 모을 꺼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그의 음악이 아름답고, 둘째 그는 멋지다. 현악 선율과 같이 어우러지는 passing by. 우연히 자신과 마주쳤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그. 이렇게 자신의 음악을 듣고, 자신의 공연에 온 관객들도 분명 인연이 있는 거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나는 그와 마치 대화를 나누듯 연주를 하는 바이올린과 첼로에 부러움 반, 질투 반의 눈길을 보낸다. 무대가 더욱 꽉 차는 듯한 느낌. 사람 내음이 진하게 울려퍼진다.
small steps, all myself to you-그에게 살사를 보여줬다는 둘째 바이올린 연주자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질투어린 눈길을 보낸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공연을 준비하면서, 또 리허설을 하면서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음악가의 모습일지. 사람 좋은 털털한 웃음을 지어 보일지. 이어지는 곡에서 첼로 파트는 부모님을 떠올린 부분이라고 말하는 그. 부모님이 혹시 돌아가신 관객에게 이 곡이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두서없이 그의 말이 흩어져서 안타깝기도 했다.
kiss the rain, when the love falls-그도 속칭 싸이질을 하는 모양이다. 싸이에 관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파도타기임이 분명한 것 같다. 그가 돌아다닌 홈피들에 꽤 많이 bgm으로 깔려있었다는 곡 kiss the rain. 그는 참 신기했다고 말한다. 왠지 아이처럼 모니터를 보고 혼자 좋아했을 그의 모습이 상상된다. when the night falls에서 love가 되었다는 다음 곡. 불타오르는 노을과 그 노을이 일순 사라지고 다가오는 짙은 남색빛 밤하늘까지에서 사랑의 과정을 발견하는 그. 그는 분명 치열한 사랑을 경험해봤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말마따나 그의 감수성이 차고 넘치는 것일지도.
Love me, Wait there-이제 마지막이라는 그의 말. 너무나 가슴시리게 행복했던 순간이 이렇게 빨리 끝나버린다는 생각에 갑자기 다운되는 기분. 일생에 아름답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듣겠냐고 하는 그의 말. 갑자기 그에게 외치고 싶었다. 사랑합니다. 정말로.
아니 분명 그는 그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청중의 진한 사랑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든든한 에너지를 흡수했을 것이다. 청중은 조건없는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의 에너지를 그에게 보냈고, 그는 다음에, 또 다음에 청중에게로 돌아올 힘을 얻었을 것이다.
잠시, Autumn scene-잠시 무대 뒤로 들어갔다 나온 그. 무척 서둘러 나왔으면서도 쑥스러워하며 말을 잇는 그의 모습이 참 소탈해보인다. 준비된 앵콜쯤이야 흔하디 흔한 관례임에도 그는 그러한 작은 가식조차 불편해한다. 그리고 7시 공연 준비를 위해 잠시 앵콜을 망설였던 자신의 마음에 대해 무척 미안해한다. 따뜻해지는 느낌. 그는 역시 좋은 사람이다.
그가 손에 식은땀을 쥐고 불렀던 노래. 잠시. 그의 무척이나 감미로운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노랫소리는 아름다웠다. 불안한 음정처리와 조금은 어색한 그의 표정까지도 그의 노래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음악. 중간 부분, 조금은 빠른 곡조가 이어지자, 청중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당황한 그의 표정. 나는 청중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간다. 그들도 나만큼이나 그를 친밀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정말로 그의 콘서트는 그의 ‘노란 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두들 그에게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대접받은 기분으로 그의 공연을 감상했던 것이고, 집주인과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듯이 그의 음악과 교감을 했던 것이다.
#6.In the end...
드디어 공연은 끝났다. 다음 공연 때문에 더 오래 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멍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공연장을 빠져나오는데, 다음 공연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벌써 로비에 북적댄다. 순간 일어나는 질투심. 다음 공연, 그리고 내일 공연까지 다 보고 싶은, 그를 독점하고 싶은 나의 마음. 그는 또 다른 그의 생각, 또 다른 그의 음악을 청중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놓칠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에 대한 아쉬움이 못내 발걸음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이루마. 다음번, 새로운 모습을 기약한 그. 예전과 다를 그의 모습에 대한 높은 기대감과 예전 그대로의 그를 바라는 마음이 교차하면서 복잡해진다. the last concert in Seoul. 그가 나에게 준 행복감만큼, 그가 앞으로 행복하기를..
첫댓글상상이란 것- 참 대단한 능력인 것 같아요. 마치 그림을 그리 듯, 마음으로 떠올리 듯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마음으로 동감해보았답니다. 난 비록 그 곳에 있지 않아도 상상으로 함께 했다는 느낌. 그 상상이 날 웃게 합니다. 지금 들려오는 루마님의 피아노 선율 속에서도 난 행복하고 많이 기쁘다는 걸...
첫댓글 상상이란 것- 참 대단한 능력인 것 같아요. 마치 그림을 그리 듯, 마음으로 떠올리 듯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마음으로 동감해보았답니다. 난 비록 그 곳에 있지 않아도 상상으로 함께 했다는 느낌. 그 상상이 날 웃게 합니다. 지금 들려오는 루마님의 피아노 선율 속에서도 난 행복하고 많이 기쁘다는 걸...
글 잘 읽었어요^^ 너무나 좋은 걸요?
공연을 다시 보는듯..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네요~
정말 있는 그대로 공연을 옮기시네요. 온통 마음을 열고 느끼셨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요. 공연을 다시 보는 듯합니다. 감사해요.
루마님은 행복하시겠어요.... 이런 팬 분이 있으셔서.....
와,, 호암공연 정말 가고 싶었는데,, 여긴 지방도시라서ㅜㅜ 정말 이 분 대단하신데요
팬과.. 팬의 사랑의 받는 주인공은.. 서로 닮는다고 하더군요. 이 글 읽으니까.. 남아있는 공연들.. 너무 너무 보고 싶네요.
와.. 불친절한 듯 하지만 친절한 글이에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말 아쉬우셨겠어요. 그 맘이 십분 이해 갑니당.. 으으 저같이 한번도 공연 못 가본 사람보다 공연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더 아쉬울 것 같아요.
앗..열분들 반응에 부끄럽습니다. 그냥..너무 좋았던 공연에 대한 잔상을 하나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쓰게 된 글이었습니다. 그리고..여러분들과 교감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구요...다 읽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후기 정말 잘 읽었어요.... 역시 루마님 공연을 보시고 온분들의 마음은 다 똑같은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