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낙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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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은혜의 수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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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CBS '원주' 운영이사회 (이사장:최헌영 감독) 이사들이 연수차 제주에 오셨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미루다 이번에야 겨우 성사되었는데 도착하여 첫 일정으로 '이시돌' 목장안에 있는 '새미 은총의 동산'을 방문했습니다. 예수님이 마구간에 나신 장면부터 마지막 만찬장면까지 일생을 간락하게 소개한 조형물에는 '세례 받으심', '가나의 포도주 기적', '풍랑을 잔잔케 하심', '나사로의 부활', '예루살렘 입성', '오병이어의 기적',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최후의 만찬'에서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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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과, '유다'가 예수님께 문안인사로 제사장의 종들에게 신호하는 장면, 그리고 흥분한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르는 모습이 있고,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는 제1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를 지는 2처, 예수님이 쓰러지시는 3처,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는 4처, 또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는 5처부터 못 박히는 12처, 십자가에 달리는 13처, 십자가에 내려 장사지내기까지 있는데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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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반 동안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 십자기의 길을 걷는 길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장소 장소가 정말 유명한 조각가 '박창훈' 선생님의 생명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작품이 너무 소홀히 다루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더군다나 '십자가의 길' 자체가 보수나 수리 등 전혀 손을 보지 않고 있어 마음이 더 아픕니다. 마치고 '늘봄 흑돼지'에서 이사장 최헌영 감독님이 저녁을 접대하셨습니다. 식사 후에 바로 옆 우리교회 '베델성전'에서 도착 예배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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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관광을 끝내고 돌아오신 위원들은 저희교회 수요일에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최 감독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외부에서 오셔서 같이 예배를 드리는 중에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조용한 중에 물이 흐르듯 은혜가 성도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목사인 저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많이 참석하지 못한 것이 속이 상해 설교동영상을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달라고 방송실에 부탁했습니다. 광고시간에 같은 교단에 속한 어른이라 '양명환' 감독님을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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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고 새 가족실에서 어느 집사님이 보내주신 홍시를 나누어 드시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마침 새 가족실에 제 '기도시리즈'가 있어서, 참석하신 분들에게 한질씩 사인해서 선물했습니다. 한 분씩 존함을 여쭈어가며 선물한 책은, 사실 저녁에 저희에게 은혜를 끼쳐주신 최 감독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번 제주 연수에는 '차용헌 목사님 (21세기 성경연구원)이 계셔서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했는지, '십자가의 길'도 사실은 목사님께서 부탁해서 다녀왔습니다.
목회 낙수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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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권의 사랑! - 26권째 소중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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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좋아하는 일과, 기뻐하는 일은 각각 다릅니다. 사람들의 취미와 재능이 모두 같다면 끔찍할 것입니다. 저는 무엇을 수집하면 버리지 않고 정리하는 즐거움으로 살고, 이런 일에 직접 시간을 쓸 때 참 기쁩니다. 그 중의 하나는 '페이스 북'에 낙서 하는 일인데, 이 일을 더 기쁘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그동안 페이스 북에 올린 글을 묶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재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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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사이월드 미니 홈피'는 모두 두꺼운 책으로 6권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 4,000여 편의 글, 사진들이 들어 있어서 이를 살펴보는 마음도 행복합니다. 그러다가 2012년에 시작한 '카카오 스토리'는 '아름다운 추억'이란 이름으로 올해 6월 30일까지 모두 13권이 묶여져 나왔습니다. 페이스 북에 실린 글들을 모두 정리하여 책으로 내니 26권 째가 되었습니다. 그건 판매용도 아니고, 딱 한 권이나 두 권 저자(필자)용으로 만들어 혼자 추억의 되새김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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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권씩 쌓여가는 '추억 일기'와 지난 글들을 돌아보는 동안, 지나간 추억도 새록새록 피어오르고, 그 때 그 시간, 저의 영혼과 심령이 얼마나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어 왔는지 볼 수도 있고, 험하고 굴곡 많은 시절의 아픈 상처도 되짚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책장에 있는 26권의 '소중한 사람들' 이야기가 보석처럼 빼곡히 박혀 있습니다. 만나는 친구는 만나서 반갑고, 먹고 마시는 친구는 그대로 귀하지만 페이스 북의 친구가 되어. 댓글로 좋아요로 교제하는 것도 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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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분들을 친구로 모시고 즐거움도 누리고, 이들 친구 분들과의 우정을 간직하는 기쁨도 누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제가 친구들과의 우정의 증거로 남아있는 '몸글'과 '댓글', '답글'과 '좋아요'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사랑의 증거인 함께 찍은 사진들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온라인에서 볼 때는 온라인대로 소중하고 행복하지만, 종이책으로 만들어 책장은 넘기며 보는 그 행복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추억입니다. 그래서 저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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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짐작하기는 사이월드 미니홈피는 기능이나 선호도, 제 개인적인 접근성은 떨어져 더 이상의 활용은 어려울 것 같고, 아직 '인스타그램'은 많은 자료들이 올라있지 않습니다. 이는 '트위터'와 마찬가지로 게시물의 제한과 함께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우리처럼 한 세대를 먼저 산 사람들은 자연히 SNS기능을 자유롭게 사용하기에는 무언가 낯선 세대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몇 개의 SNS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저에게 주신 은총일 뿐입니다.
목회 낙수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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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5억 보낸다. 시작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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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위력이 있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큰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다 산 것은 아니지만 이만큼 살아오는 동안, 돈을 계산하여 저축하고 살아오지 못한 사람이라 요즘 아주 난감한 일 앞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오늘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라 아침부터 몇 곳을 다니며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5억 미만이면 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거나, 또 구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그 5억이 없어서 그냥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렇다고 단 5천만 원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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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빈손으로 집을 나섰고 빈손으론 안 된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없으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용납이 안 되어 내비게이션을 의지해서, 30년째 살고 있는 낯선 제주 땅을 다녔습니다. 제주는 참 넓습니다. 어떤 이는 "목사님! 제주에서도 축구 할 수 있어요?" 하는데 그 뜻은 "섬에 공항 빼고 나면 축구장 할 데가 있어요?"라는 뜻입니다. 걱정 마세요. 제주도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은, 오늘 몇 시간 자동차로 다니는 내내 처음 가본 곳만 다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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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기분으로 돌아오는데 돈을 좀 모아두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과, 그렇더라도 제가 살아온 삶에 후회는 안한다는 자위가 섞여 있었습니다. 참 마음에 드는 곳도 있었고, 그 정도면 좋은 펀에 속한다고 판단이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곳은 10억은 있어야 할 터이나, 웬만큼 좋은 곳도 5억은 있어야할 듯하니 이제 내일부터는 평생 안해본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모릅니다. "아버지, 우선 급한 대로 한 5억만 좀 주세요!" 그렇게 한 나절을 다니고 나니 무력감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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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만 보기로 하고 2시에 4,500원짜리 콩나물 해장국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7시에 아침을 먹은 지 7시간 만에 먹는 점심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국물까지 후루룩거리며 모두 마셨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이 해장국을 10만 그릇은 팔아야 4억 5천만구나." 그래도 하나님은 어떻게든 주실 것이고, 얼마나 제 피를 말릴지는 모르지만 제가 꾸는 꿈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왜 저는 만날 이렇게 꿈을 찾아 헤메고 다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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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덧 시간을 달려 낯선 곳을 보며 드는 생각은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기가 어렵고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데도, 잘들 사는구나 하는 생각과, 골짜기마다 나름대로 비전을 품고 들어와 만들고 꾸미고 산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오늘은 제 시야를 넓혀, 보다 넓은 곳을 보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리석고 초라한 걸음이지만 축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정 목사야! 계좌 번호 불러라! 우선 5억 보낸다. 시작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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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오늘 어느 낯선 마을의 귤밭 곁을 지나가다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귤을 보고 차를 세워 찍은 것입니다.)
목회 낙수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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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1 - 오늘의 목회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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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11월 첫날이자 첫 주일입니다. 힘겹고 어려웠던 지난 9개월 동안의 영적, 사회적 전쟁에 승리하게 하심이 고맙습니다. 코로나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이 일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상처와 아픔들을 능히 이기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무너진 믿음을 일으켜 주시고 위협받는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저희를 지켜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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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세계 여러 나라 정세를 비롯하여 그 땅의 백성들을 기억하시되, 특별히 이제 모레 실시되는 미국의 대통령선거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강대국의 지도자는 세계 각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큽니다. 특히 미국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큽니다.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세계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세워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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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위축되어 생존이 위협받고 안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의 세계 민족들의 아픔을 헤아려 주옵소서! 그리하여 위축된 경제를 일으키시고, 무너진 사회를 다시 세워 주옵소서! 살벌한 사회 분위기를 질서 있게 세우시고, 더 이상의 침체나 붕괴가 없이 모든 지표들이 반전과 반등만 일어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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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기의 시간을 보내는 교회와 가정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서로 긴장하고 갈등하며 날카로워진 상호 관계를 부드럽게 하시고, 더 이상은 위험하지 않은 평화로운 세계 공동체가 되게 하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이 시대에 우리 교회가 평회 공동체와 사랑공동체로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아름다운 교회로 남아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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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예배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추옵소서! 육신의 질병을 안고 고통을 참아 견디는 이들을 기억하고 위로하여 주옵소서!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에 하나님 사랑을 부어주시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당하는 성도들의 가정마다 채무에서 벗어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곳에 사랑이 가득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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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살려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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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년의 임기를 마치신 삼남연회 김종복 감독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김 감독님! 고맙습니다.)
페목 칼럼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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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92) -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당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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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요한복음 10: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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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사역의 어려움 중에 하나는 늘 물리적 위해를 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하나님의 군대'가 주님을 호위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자들을 조폭 수준의 '주먹'들로 구성한 것도 아닌, '어부'들 '세리' 전부 몇 명 되지도 않는데, 그나마 급하면 도망가는 겁에 질린 졸장부들입니다. 이들과 함께 일하시는 예수님은 늘 신변의 안전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끝내 안전장치가 없어 군인들에게 붙잡혀 죽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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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특별히 신변의 안전에 위협을 느낀 것은 '바리새인'들이 천금같이 여기는 율법에 저촉되는 신성 모독적 발언을 수시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이 있기에, 그들은 언제라도 예수님의 발언을 빌미로 마치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듯이, 아니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여 온 여인을 돌로 치려고 수많은 이들이 돌을 들고 모이듯이, 그렇게 무서운 기세로 예수님을 향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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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보음 8장 5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 보고 기뻐하였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막힙니까? 유대인들이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하자, 한 술 더 떠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히 신성모독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그런 위험한 일은 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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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8절에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베다니'로 가려고 하시자 제자들은 "선생님! 얼아 전에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 가시려 합니까?"하고 말합니다. 즉, 얼마 전까지 유내인들이 죽이려 했고, 지금도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노라면 죽음의 위협이 섬뜩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역을 진실하게 감당하려는 동안, 이처럼 숱한 위험을 당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적들의 음모가 수십 번이나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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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53절에는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모의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도처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형(私刑)을 집행하기 위하여 11장 57절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하고 방을 붙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3년 만에 잡혀 죽이신 것 같지만 실상은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별별 모의를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일을 성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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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거나 시도한 일만도 수십 번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절에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 주님을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민란이 날까 두려우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대제사장 관저에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막강한 고위 종교인들의 은밀한 처소에서는 이런 흉계가 꾸며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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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장 1절 이하에는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고 했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자력(自力)으로 안 되니 총독의 판결로 도움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은 오늘의 행태와 똑같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몸이신 교회야 죽든 말든 예수님을 죽이는 판결을 구하기를 마치 빌라도의 권세를 의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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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 31절에는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고 한 걸 보면 '헤롯'도 기회를 보아 주님을 죽이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은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려 하니,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즉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의 환자를 고쳐주신 다음 일어났던 일인데 자신들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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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53에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에브라임'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니라."고 했습니다. 즉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려주신 다음, 입지가 좁아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아예 죽여 버리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늘 "당신이 선한 일을 하는데도 우리가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다. 당신이 사람인데 자칭 하나님이라 한다."고 변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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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위기를 만나 애굽으로 피난하셨던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노골적인 살해 음모를 수십 차례 겪으셨습니다. 성경에 드러난 대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발견하는 대로 신고하도록 포고를 내고,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모의하고, 유대인들은 여러 상황들이 자신들의 권의를 위협하니 죽이려 했습니다. 결국은 당시 주류사회, 권력사회, 종교지도자 모두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계획하고 있어 예수님은 그 덫을 비켜갈 길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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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전 삼남연회 김종복 감독님이 오늘 보내주신 사진 중에 하나를 양해를 얻고 실었습니다. 감독님! 지난 2년간 애쓰셨습니다.)
페목 칼럼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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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91) - 몸으로 피곤과 시장함을 느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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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요한복음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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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우리의 구주되심에 큰 감동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아무 고통 없이 이루신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하늘은 'sky'가 아니라 'heaven'입니다. '상공'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로 태어나서 자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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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죄 없으신 분이 동일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인간 누구와도 동일하게 인간의 '생로병사'를 경험하신 분입니다. 우리와 동일하게 '오장육보'를 가지고 계셨으며,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입고 사셨습니다. 때문에 주무시지 않으면 피곤하여 고물에 쓰러져 주무시고, 시장하시면 무화과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어 하시는 소망이 있으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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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신 분이기에 우리처럼 식사를 거르시면 시장기를 느끼고, 몸이 힘들면 피곤을 느끼십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들린 '사마리아'의 '수가'성까지 오시는 동안 정오의 태양도 뜨겁고 시장기와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그 시절에 자동차가 있습니까? 말을 타셨겠습니까? 걸어서 오시는 동안 시간은 한낮이라 뜨거운 햇볕아래 우물에 걸터앉으신 예수님은 먹을 것을 사러 간 제자들을 기다리며 시장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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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로에 곤하여 우물가에 걸터앉으신 예수님'은 성경에서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이 가장 잘 드러난 적절한 모습입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신적인 조건, 즉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의 속성,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으시고 갈함도 주림도 없으신' 주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못 박으면 고통을 느끼고, 창으로 찌르면 물과 피를 쏟으시는 분입니다. 인생이 가지는 모든 약함을 그대로 가지신 완벽한 인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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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이기에 아무런 고통도 없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우리가 그렇게 감동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온갖 약점을 그대로 간직하신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간의 약점을 아시고, 인간을 입으셨기에 인간들이 가진 고뇌와 아픔을 모두 아십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주전 8세기에 예수님에 대한 그림 같은 모습을 마치 예수님 시대를 함께 살아온 선지자처럼 예언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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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장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셨는데, 우리는 그가 그렇게 고난을 당한 것은 그의 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완벽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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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허물이 그를 찌르고, 그가 받은 징계가 죄인 인생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맞은 채찍은 우리로 하여금 나음을 입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병사들에게 채찍에 맞아 살점이 패여 떨어져나가도, 그는 외롭지도 아프지 않고 우리를 살리신 게 아니라 우리가 고통 받을 것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아플 것을 대신 아파하시며, 우리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자신의 몸을 던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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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 보면 우리 인생들과 주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인생은 교만하고 오만 방자하여 자기 길로 가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복했습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으니, 하나님은 그렇게 패역한 인생들이 지은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 전가시킨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의 죄로 인해 받은 심판이 아니라, 우리의 심판을 대신해서 죄 짐을 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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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형벌을 당하며 인간이 겪을 형벌의 크기와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아셨으며, 하나님 앞에서 인생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셨습니다. 온몸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상처입고 쓰러진 이들에게 '상처 입은 치료자'가 되셨습니다. 죄인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무 고통도 상처도 없이 인생들의 죄를 씻어 주신다면 우리의 감격은 지금의 절반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와 동일한 고난을 받으시면서 우리의 고통 중에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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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육신적인 아픔을 모두 겪고, 고통을 온 몸으로 끌어안으셨습니다. 온몸이 아비될 만큼 아프시고 기절할 만큼 고통스러운 못 박히심을 당하고, 피 말리는 고통과 외로움을 겪으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그가 목마르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아도 되었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으며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가 죄인의 형벌인 죽음을 감당하셨기에 더 이상 율법은 우리의 형벌 죽음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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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일을 모릅니다."하고 용서와 중보를 해 주심으로 우리 죄는 용서되었고, 십자가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도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강물처럼 우리의 영혼을 적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구원을 내 마음껏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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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오늘10월 31일 아침에 먹은 밥입니다. 집에서 먹을 때는 늘 이런 콩밥입니다. 건강때문이라기 보다 맛이 좋아서 이렇게 먹습니다.)
페목 말럼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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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90) -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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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2: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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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장 난감한 때는 사람들이 표적을 구할 때입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집요하게 구한 이들은 예수님에 의해 공격받고 종교적 수모를 당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세로 세상에 오신 증거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그가 큰 고기 뱃속에서 나오듯 '부활의 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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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토해진 것은, 예수님이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부활하는 표적을 말하는 것이고, 세상에 아무리 다른 표적이 있다 할지라도 죽은 자가 다시 사는 표적만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서 예수님은 "차라리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그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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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예수님은 "요나보다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 때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터인데, 이유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6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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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수님의 발언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신성모독 발언을 계속하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의논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고 하시고,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록을 보면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거나 "'다윗'도 나를 주로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신성모독적인 언사는 계속 그에게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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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은 대적뿐 아니라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는 제자 중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절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며 책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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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들인 증거,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증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들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 표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의 표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는 불치병에서 고침 받은 게 아닙니다. 장애에서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 인생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났다는 것만큼, 큰 증거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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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가슴 속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증거, 하늘의 표적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숱한 이들의 비난과 야유를 받고 이런 요구를 받을 때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고 하시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시며 스스로를 위로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며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답변하시거나 보여주실 요령으로 하나님의 증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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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행하신 가장 큰 기적은 부활의 기적이고, 보이신 가장 큰 표적도 부활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우리가 믿지 못하는 방법으로 고쳐주셨습니다. 평생 장애를 안고 살던 이들의 장애를 떨치고 새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귀신들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에 비교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표적은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요나의 표적'입니다. 이 부활의 표적을 갖고 사역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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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면 저는 '요나의 표적'을 들겠습니다. 왜냐하면 부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저에게 "예수 믿는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요나의 표적'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저에게 비난과 야유를 퍼부으며 저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면, 저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어찌하여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나는 요나의 표적이 있다."고 말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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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고 떠나가신 것처럼, 저도 오만의 자리에 앉은 이들이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부을 때, 이들을 피하여 기도와 묵상의 자리로 가겠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고침받지 못한 채 질병을 그냥 안고 살지라도, 제가 기도하던 것을 하나도 응답받지 못하고 산다 해도 '요나의 표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표적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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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일 '은평교회' 건너편에서 이른 점심으로 먹은 '소머리국밥'인데, 제가 먹어본 국밥 중에는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페목 칼럼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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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89) - 답답한 제자들을 만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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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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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스승들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제자 같은 이들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객관적 기준으로 보아도 오합지졸에, 생각도 각각 다르고 그들이 주님의 제자인가하는 생각이 들만큼 형편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제일 열정적이고 과격한 '베드로'는 나설줄만 알고 큰소리만 쳤지 뒷심도 없고, 재정책임자 '유다'는 틈만 나면 돈을 빼내갈 궁리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냐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답답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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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을 때, 제자라면 그의 헌신을 칭찬하고 격려해야할 터인데, 오히려 책망하여 헌신자의 용기를 꺾어 놓고, 그나마 그의 마음속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걸린 게 아니라 6절에 보면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매사에 그렇게 생각하셨으니 주님은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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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나아와서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던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명예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이는 비단 야고보와 요한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제자를 뽑았는데 전부 이런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도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고 한 성경이 응하신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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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조차 기억하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님께 대한 기록이라는 것과 사람들이 주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도. 처음에는 "주님! 제 발을 씻기실 수 없습니다."하다가, 나중에는 "그럼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자 "주여, 그럼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합니다.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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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수제자'라고도 부르는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의 발을 씻기면서 마치 유언처럼 세족식 등 당부의 말씀을 하시자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주여 왜 나중에는 되는데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내 목숨이라도 버리겠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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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하는 그에게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린다고?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비교적 성경의 출현 빈도나 열정이 다른 이들보다 월등했던 베드로가 이 정도라면 나머지 제자들은 어떻겠습니까? 제자들은 거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설교를 하실 때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지적 능력도 부족했고, 이해력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속을 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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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주님이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고 재정을 충당해 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필요한 때마다 이걸로 해결하시라고 준비해서 드린 물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저들을 마을로 보내어 사 먹게 하소서!"라고 말씀드린 것이 전부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예루살렘'의 입성 때에 타신 나귀도 빌린 것입니다. 마지막 식사준비도 제자들이 아니라 다른 이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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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한 경제적 역할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에게는 재정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배와 그물, 삯꾼 등 모두 배에 두고 빈손으로 떠났습니다. 장래 사역을 위해 아무런 준비를 못하고 나왔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입고 있는 옷 한 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나귀도 다른 이의 것을, 만찬도 다른 이가 준비한 것을, 무덤도 다른 이의 무덤을 쓰신 예수님은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준하여서 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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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도 잘 깨달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실상을 말하노니,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했는데 이 말씀도 이해를 못했습니다. 스승에 대한 진실한 믿음도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과 3년을 지내는 동안 주님은 늘 제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중보 하셨습니다. 그 사랑과 기도가 많은 제자들의 부족을 채워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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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30일 천안 아산 역에서 7시 17분 열차를 타기 위해 나와서 6시 30분에 아침 식사로 먹은 '떡갈비 도시락'의 사진입니다. 맛 있었습니다.)
목회 낙수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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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도들' 후기 - 사도의 '외로움'은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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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외로움'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불행'을 연상합니다. 외로움은 슬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지내며 경험하는 외로움은 다릅니다. 주님은 외로움을 사랑의 기회로 바꾸시며, 외로움의 시간에 더욱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셨고, 외로운 시간을 창조적 사역으로 바꾸셨습니다. 외로울 때 기도하셨고, 외로울 때 우셨습니다. 외로울 때 사랑하셨고, 외로울 때 섬기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렇게 주님만큼 외로운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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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을 떠올릴 때마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생각합니다. 그는 정말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외로운' 사도였습니다. 복음의 사람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던 때에 가해자들의 옷을 지키던 그가, 무서운 박해를 위해 떠난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후,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로마의 감옥에서 참수될 때까지, 그의 삶은 외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역, 특히 전도기록은 '사도행전'과 그가 남긴 13권의 서신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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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없이 많은 살해의 위협을 당하고, 많은 배신과 음모를 겪었지만 끝까지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스스로 역사에 남겼거나, 그의 자취를 기록한 '사도행전'의 행간과 자간에는 사도 바울의 신앙의 담력과 용기만 아니라 이보다 훨씬 짙은 외로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주님의 사도로 부름을 받지만, 사도의 사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외로웠습니다. 유대인들의 후원과 대제사장들의 법적인 신분 보장과 장치를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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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강권적 섭리에 의해 초자연적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특별한 선교의 길을 갑니다. 그 길은 흩어진 교회를 박멸하려고 파송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유대인들에게는 치명적 배신입니다. 이를 갈게 되는 변절입니다. 당장 바울을 죽이려는 이들이 도처에 매복하여 바울을 살해하려고 했고, 실제로 사도 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도망치거나 고향으로 가서 숨어 지내야 할 만큼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는데, 바울 사도의 사역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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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생명처럼 지키며 살았거니와, 당대 '예루살렘'에 기거하는 세계적인 율법 대가(大家)인 석학(碩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한 촉망받는 장래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사회에서 바울의 소명에 대한 순종과 그의 선택은 같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따라서 교회를 박해하는 강도(强度)만큼이나 그를 제거하려고 사람을 세우고 음모를 꾸미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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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도 바울을 외롭게 한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예수님의 직계 제자로 부름 받은 사도가 아니기에 당하는 기존 제자들로부터의 소외와 견제, 촉망받는 율법가의 길을 떠나 전도자의 길을 간 때문에 받는 의혹의 눈총입니다. 혹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는 덫은 아닌가 보는 시각입니다. 물론 이 의심들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지만, 직계 사도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견제 받거나 소외되는 일은 아주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도를 몹시 외롭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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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의 사역이 '마케도니아'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전도자로서 안정적으로 지속되면서 '동역자와의 갈등', '공동체의 이탈', '사역자의 배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로웠습니다. 여러 차례 원치 않는 수감 생활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외로운 밤을 수없이 보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의 사자(使者)가 찾아와 위로했지만, 짧은 위로를 받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외로움이 외롭지 않은 것은 주님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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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사도에게는, 확증은 할 수 없지만 부인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금처럼 고정된 교회의 멤버들과 함께하는 '목회'가 아니고 몇 제자들과 함께 순회 전도자의 길이었기에, 몸과 마음은 더 힘들었고 경제적 위축은 심했습니다. 그때 아내 된 동역자가 곁에 있었다면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도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를 살해하려는 위험, 반대하고 훼방하는 이들로 인한 외로움, 동역자들의 배신과 이탈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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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외롭고 힘든 고난의 사역이 계속되는 동안 그가 외로움을 이기도록 힘을 주었던 일이 있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매 맞고 위험에 노출되어 감옥에 갇히는 동안, 사역을 중단하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은 죄인의 괴수인 그를 사도로 부르시고, 언제나 위로와 계시로 동행하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도는 임종이 가까운 감옥에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주님이 기다리고 계심'과 그가 가는 길 끝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견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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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사도가 전해준 복음을 듣고 제2, 제3의 사도가 되어 그가 갔던 그 글을 뒤이어 갑니다. 위협은 여전하고 사역은 여전히 고달프고 힘들지만, 지금도 중단할 수 없고, 지금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기 있다면, 때마다 우리에게 위로와 능력이 되시며 언젠가 우리의 눈에 눈물을 닦으시고 품에 안고 칭찬해 주실 주님께서 우리의 맞은 편 언덕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두 제자에게도 주셨고, 사도 바울에게도 주셨으며 우리에게도 주신 변함없는 약속이자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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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어제(30일) 아침 7시 40분 쯤에 들렸던 '익산'역의 모습입니다.)
목회 낙수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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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후기! - 추억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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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부정한 혈통이 여기저기 돌출되는 부끄러운 족보에서 '죄인'의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처음 그가 태어나던 때에 동방의 박사들에게 방문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보통 아이들처럼 자랐고,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열두 살 되던 해 '예루살렘' 성전에 남아서 랍비들과 성경을 토론하던 때도, 어머니의 가슴에 두려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30여세 되던 때에 '세례 요한'의 증거로 그 신분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고난의 세월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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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마귀는 그의 정체를 알고 시험하여, 인류구원의 길을 막으려고 애를 썼고, 이 일이 실패로 끝난 다음 얼마동안 떠났던 마귀는 끝내 예수님을 포기하지 못하고, 제자 캠프의 재정을 책임진 '가룟'인 '유다'에게 접근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가뜩이나 쪼들리는 재정과, 본인의 기대와는 다른 '메시야'의 행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유다는 결국 주님을 배신하고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계신 위치를 알려주고 은 30을 받아갑니다. 그것이 유다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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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신의 죄가 죄 없는 예수님의 죽음은 가져왔다는 슬픈 생각에 은 30을 도로 가져갔지만, 그 돈은 이미 '범죄수익'으로 분류되어 다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스승을 밀고한 돈 은 30은 단 한 푼도 써보지 못한 채 스스로 목을 맨 유다는 죽으면서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던 나뭇가지가 부러졌거나 줄이 끊어져 땅에 고꾸라져 땅바닥에 뒹굴며 창자가 터져 추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하였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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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의 사위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 서셨지만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두 손이 묶인 채 법정에 섰지만 모든 사람들을 죄에 포로 된 몸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는 좌우편 강도 사이에 갓도로 죽었으나 당신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으나, 우리는 버림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분은 죽으셨지만 우리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떠나서 땅으로 오셨기에,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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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버렸고, 그 값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해 주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고, 그의 부활로 우리는 죽음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3년 동안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3년 동안 보통사람이 3000년 동안 해도 못 이룰 일을 이루셨습니다. 혼자 일하셨지만 황제의 군대가 이룬 일보다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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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힘없이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유일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남기고 가신 것이 없지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에 많은 이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다가 막상 그가 죽으면 실망하고 낙심하여 그를 떠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보고 낙심하여 떨어져 나가는데 비해, 주님은 죽으신 후에 그른 비난했거나 멀리했던 이들도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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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혈통을 심판의 피가 흐르는 죄인의 혈통에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혈통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해 주셨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누구의 동정이나 도움도 받지 못하셨지만 세상 모든 이들을 도우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전 세계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일하셨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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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정치인이 아니시지만, 세계적인 정치인이 하지 못할 인류구원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세계 난민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세계적인 재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주를 사고 남을 만큼 넉넉하고 풍성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수 천, 수 만년을 꿈 꾸어오던 인류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간의 두뇌로는 계산할 수 없는 영원한 미스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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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질병 문제를 해결하실 열쇠를 가지셨기에, '코로나'의 '팬데믹'을 치료해 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분쟁지역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남북 분단을 비롯해서,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쟁은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치유자이십니다. 평화를 선언하시고 하나 되게 하실 분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문제를 당신의 온 몸으로 끌어안고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인생들이 그토록 갈급 하는 구원의 문제는 '오늘'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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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어제 10월 30일에 들린 '군산'의 명물 '이성당'의 모습입니다.)
목회 낙수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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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외로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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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외로운 예수님'을 쓰는 동안 많이 외로웠다고 했더니, 어느 친구 분께서 "나이든 목사님이 외롭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예수님'을 쓰는 동안, 주님의 외로움에 몰입해서 함께 외롭게 살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천 년 전 예수님 시대로 돌아가, 바람 부는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만나시던 때부터, 그가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시고 부활 후 갈릴리에서 다시 일곱 명의 제자를 만날 때까지의 3년 세월을 예수님과 함께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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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함께 보낸 시간은 지난 8월 24일부터 석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주님 곁에서 주님의 심정으로 호흡하며 함께 걸었습니다. 제 안에 늘 주님이 계셨고, 저는 주님 안에 있었습니다. 덧없이 흘러간 이천년 세월의 이끼들을 걷어내고, 자연인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분은 저에게 무언가 말씀하시는 듯했고, 실제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에 단 한 번도 호탕하게 웃어본 적도, 행복에 겨운 식사를 해보신 적도 없이 분주하고 피곤한 일상을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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몆 번이고 주님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복음서에 두 번, 서신에 한 번 모두 세 번 우신 기록이 있지만 실제는 더 많은 상황에서 주님은 우셨습니다. 물론 단 한 번도 웃으신 기록은 없습니다. 저는 우수가 가득한 주님의 그윽한 눈빛 속에 묻어있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때로는 슬퍼서 울고, 때로는 안타까워 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울음조차 토해내지 못한 수많은 외로움과 아픔이 예수님의 눈에는 언제나 가득했습니다. 주님은 일생을 그 외로움 속에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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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적한 곳에 기도하실 때도 외로우셨고, 무리들을 배불리 먹인 후 돌려보내신 뒤에도 외로우셨습니다. 마치 막이 내리고 불 꺼진 무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려고 할 때도 당신은 외로우셨습니다. 대적들이 눈에 불을 켜고 약점을 찾느라 혈안이 되고, 병자를 고칠 때마다 안식일을 범했다며, '네가 누구인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느냐?' 할 때는 많이 외로웠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사명이고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외로움을 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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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모두 떠난 다음 외로운 재판을 받으며 여기저기 끌려 다니실 때는 더욱 외로우셨습니다. 하루 만에 내리는 판결을 받기 위해 끌려 다니던 길은 당신이 살아온 30년보다 더 길고 외로웠습니다. 빌라도에게 사형판결을 받고 나올 때는 많이 외로우셨습니다. 그래도 내색은 않으셨지만,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하나님, 이렇게 저를 버리십니까?" 하고 절규할 때는 끝내 아무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 앞에서 한 없이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그건 주님의 운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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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부활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뿐 아니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제가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부활은 최후의 승리입니다. 주님께서 외로운 십자가에서 무덤을 깨고 살아나시듯이, 저도 주님의 부활을 제 몸에 입고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제가 의지하고 기대할 이는 '부활의 주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0.1%도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0에서 시작하시어 역사를 이루신 분이시기에 저는 그분의 능력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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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해 8월 19일 물 빠진 '금릉해수욕장'에 외로운 세 분의 목사님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일 년이 넘었네요.)
페목 칼럼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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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88) - 인생의 실패자들을 찾아오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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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누가복음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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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실패자에게 관심하지 않습니다. 복싱 경기가 열리면 조금 전까지 세계 챔피언 타이틀이 있었어도 패하여 링 위에 쓰러지고 나면, 기자들과 카메라는 그를 밟고 새로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이에게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반환점을 돌 때까지 선두였더라도, 마지막 풀코스를 세계 신기록으로 완주하고 테이프를 끊은 선수에게 청중들은 기립 박수를 보내고, 모든 매스컴의 관심은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건 비단 스포츠나 연예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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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에게는 찬사가 따르고 사람이 몰리지만, '패자'는 아무리 고상한 매너나 경영 철학이 있어도 누가 귀를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정치에도 선거에 이긴 사람, 기업에도 경영 신화를 이룬 사람, 연구와 학문에도 정상에 선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고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성공자, 승자의 길은 늘 환호하는 사람들로 요란하고 실패자의 주변에는 누구도 걸음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패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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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많이 번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 돈이 많을지라도 영적인 공허감에 괴로워하는 자, 건강한 자보다는 질병으로 신음하는 자, 사업이나 인생에 성공하여 축제를 여는 이들보다는 실패와 좌절의 쓴 맛을 보고 울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십니다. 왜냐하면 무언가 베풀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고,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자를 찾아가는 것은 자기 부족에 대한 갈증을 채우려는 것이고, 예수님이 실패자를 찾으시는 것은 그를 일으켜 세워주시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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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예루살렘'성 안 '미문(美門')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38년 동안 찢기고 무너진 그의 인생을 세워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 '글로바'와 동행자를 찾아 몇 시간을 함께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몇 년간 따르다 그의 죽으심과 함께 찾아온 절망감을 딛고 다시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는 승리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찾아 가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 밤 이후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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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찾아 '사마리아'를 관통하여 '갈릴리'로 가시는 행로를 택한 것은, 다섯 남자와 살면서도 행복을 모르고 살던 이가 여섯 번째 남편과도 인생의 의미를 모른채 사는 것을 측은히 여기시어 그에게 삶의 행복을 알게 해 주시려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다음 '메시야'를 만났다는 간증하는 전도자가 되어, 수가 성 전체를 복음화 시키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수가성 안에는 복음의 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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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바람부는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찾아간 '거라사'는 군대귀신이 들린 채 피폐해진 채 사는 인생을 건져주시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옷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채, 자신의 몸을 돌로 찢어 피범벅이 되어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그에게서 나오라고 하시고, 자기는 '군대귀신'이라고 대답한 무서운 세력은 언덕에 있던 돼지 떼 이천 마리에 들어가 갈릴리 호수에 빠져 죽습니다. 후에 그는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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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찾아온 갈릴리 호수의 작은 어선은 '시몬'과 '안드레'의 배였습니다. 이들은 지난밤에 온 갈릴리 호수를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고기를 잡으려 애를 썼지만 못 잡았습니다. 어부란 오직 고기 잡는 일로 인해서 행복과 불행, 실패와 성공이 좌우되는데 그에게는 오직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지난 밤의 아픈 추억만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시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시자, 그는 그물을 내려 한 번의 그물질로 고기를 두 배 가득히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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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우리 인생이 실패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재기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 절망의 끈을 끊고 다시 희망의 닻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늘 우리의 실패를 바꾸어 성공으로 돌아서게 하시고, 절망과 낙심을 버리고 거대한 희망의 파도를 타게 하십니다. 주님을 딱 한번 만난 후에 가장 비참하고 외로운 형편에 있던 이들은 새로운 희망의 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실패의 나락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찾아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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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형편과 상황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실패했는지, 얼마나 참혹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늘 우리에게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말씀으로 가르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 한 마디는, 그 배의 어부였던 실패자 시몬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주님은 그 때 실패한 시몬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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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주님의 베데스다의 병자를 향한 질문 속에는 주님의 해답이 들어 있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귀신을 향한 질문은 곧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여인을 향하여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은 그 여인에게 새로운 인생의 행복을 알게 해 줄 신호탄이었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하실 때 이미 그는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미 그를 짓누르는 도덕적, 양심적. 신앙적, 사회적인 짐들은 그에게서 사라진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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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극동방송뒤 해안도로 '가문동'의 어느 커피집 바깥 뜰입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페목 칼럼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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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87) - 영적 맹인들을 만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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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요한복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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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언제가 제일 답답합니까? 서로 말이 안 통할 때입니다. 불과 몇 백 단어로 일상에 필요한 의사소통만 겨우 하는 어린아이들을 만난 경우는 그들이 어린아이니까 달래고, 또 손짓발짓을 하면서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일상의 언어는 누구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고 구사할 수 있는 쉬운 언어였으며, 예수님은 그의 비유나 설교 중에도 형이상학적인 어려운 말씀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늘 간결하고 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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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가 말씀을 전하는 도구를 주로 '예화'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들은 친숙하고 간결했으며, 예화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쉽고 강력한 접근성이 있었습니다.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모르는 이가 있습니까?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그건 순전히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에서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는 뜻에 쓰였습니다. "입을 것 가지고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길쌈도 않는데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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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먹고 마시고 입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시며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드셨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들과 교류하고 같이 먹는다."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들에게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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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것을 찾다가 찾으면 집에서 잔치를 하지 않겠느냐?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온통 집을 다 뒤져서 부지런히 찾지 않겠느냐? 찾으면 친구들을 불러 드라크마를 찾았으니 잔치하지 않겠느냐?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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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하여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쓰고 거지가 된 다음 돌아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들이라는 이름을 감당할 수 없으니, 이제부터 품꾼으로 써 주소서!' 했으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 잔치하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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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의외로 말이 안 통하는 영적 유년기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유대인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가 밤에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인 줄 압니다. 행하시는 이 표적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증거입니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람이 두 번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으로 그야말로 니고데모에게 선문답을 하십니다.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또 태어납니까?"고 그가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두 번 태어난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는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물었고, 예수님은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런 것도 모르느냐?"고 하셨습니다. 유대인 최고 지성의 한계였습니다. 주님은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나도 들려야 하리니,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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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난 다음, '가버나움' 회당에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우리의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만나'와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난해한 말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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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많은 제자들이 듣고 "이 말씀은 어렵다. 이걸 누가 이해할 수 있느냐?"며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가 세운 고린도 교회 목회할 때에 "내가 영적인 자들에게 하듯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말하였다."고 합니다. 미성숙한 영적 어린이이가 되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교회 안에는 십년을 다녔어도 아직도 어린 아이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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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끝내 말이 안 통하는 이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세상의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고 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빌라도 총독 앞에 섰을 때 총독이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다."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했지만 아무 대답도 안하셨습니다. 그의 대답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이가 거기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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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저의 외로움을 위로해주는 '이지'와 '우니'입니다. 얘들만 보아도 마음이 조금은 좋아집니다.)
페목 칼럼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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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86) - 힘없는 여인들이 곁에 있는 것을 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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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복음 19: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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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당연히 '예루살렘'에도 어린 '새끼나귀' 대신 '백마'를 타고 입성하셨을 것이고, 설령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해도, 그 곁에는 '장군들'과 '기마병'들이 지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곁에는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늘 '환자'들과 '어린이'들과 '세리'와 '죄인'들이 있었을 뿐, 권력에 줄을 대려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반대로 권력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늘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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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식사하는 자리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했고, 백성들로부터 거짓 존경과 신뢰를 받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늘 그의 행동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권력에 줄을 대려는 정치적 성향의 사람들이 아니라 병 고침을 받기 원하는 가련한 병자들과,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기 원하는 부모들, 그리고 오랫동안 육체의 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아이들이 그 앞에 나아와 찬송을 불렀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하는 아이들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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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지막 저녁 식사도 어떤 여인이 제공한 다락에서 조촐하게 이루어졌고, 그가 붙잡히던 순간에도 잘 훈련된 경호나 안전 요원대신 졸던 제자들 몇 명이 전부였으며, 그 제자들 중에는 겉옷을 팔아 그 돈으로 사서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이 '베드로'의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주님이 체포되시던 때 부당한 체포와 구금에 반대하는 어떤 저항도 없었고, 그가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기까지 곁에는 동행자도 한사람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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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인류구원의 사명을 안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가증한 정치권력의 제물이 되어 무참히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가슴 치며 통곡하는 제자 한 사람 없었고, 주님 대신 나를 잡아가라는 용기 있는 추종자도 한 사람 없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병 고침을 받았지만 '이분은 악을 행한 것이 없는 선하고 의로운 분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 주님을 변호하거나 위로가 된 이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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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만이 조롱하는 다른 강도를 향하여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며 동료 강도를 책망한 것이 전부였고, 사형을 집행하던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지켜본 뒤에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한 것이 전부입니다. 이기적이고 매정한 제자들은 한결같이 모두 몸을 사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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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리들의 끝없는 야유와 군중들의 성난 함성, 그리고 병사들의 채찍과 가슴을 때리는 주먹, 창으로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러 물과 피를 다 쏟게 하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잔인한 처형은 끝이 났습니다. 지축을 흔들던 천둥번개 소리도 멎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는 절규도 멈추었습니다. 아직 두 강도의 숨은 끊어지지 않고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을 때, 세기의 재판과 처형을 지켜본 이들도 안타까움과 슬픔을 뒤로하고 하나씩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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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예수님의 피 흐르는 십자가 곁에 몇몇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며 그날의 짭짤한 수익을 놓고 좋아하고 있을 때, 속옷을 들고는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고 하니 이는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인데, 제비를 뽑은 친구는 흥분했습니다. 군인들은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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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로 옆 십자가에서는 죄 없는 예수님이 무참히 숨을 거두고 있었고, 병사들은 그날의 수입으로 흐뭇한 미소를 띄고 있을 때,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자, 그 때부터 제자가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그는 '요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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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렇게 어머니에게 쓸쓸한 인사를 드리고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신 후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자 그걸로 목을 축이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만왕의 왕 예수님은 운명하시고 마지막까지 그를 지켜 본 이들은 힘없는 몇 명의 여인들과 한 사람의 제자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십자가 곁에는 장담하던 제자들 대신 힘 없고 이름 없는 여인들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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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주님의 십자가 곁에는, 힘없고 가련한 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어렵고, 주님의 죽으심이 진행되듯이 힘겨운 시간에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이들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것 같은 이들이 피 흐르는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큰 소리 치던 이들, 넘치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은 모두 어디론가 숨고, 피하고, 사라진 십자가 곁에는 통곡할 기력조차 없는 이들이 탈진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키는 힘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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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어제 10월 25일오전 예배 전에 예배당 입구 정원수를 찍은 것입니다.)
페목 칼럼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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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85) - 살기 위해 도망치는 제자들을 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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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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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신의(信義)와 의리(義理)를 보려면 어떻게 합니까? 충성스러운 사람과 불충한 사람을 분별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느냐, 아니면 힘들고 어렵다고 도망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좋은 남편 좋은 부인은 가정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 가정 붙들고 끝까지 가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돈 좀 못 번다고 못 살겠다고 이혼하고, 성격 안 맞는다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지경에 처해도 가정과 자녀를 생각하고 버티는 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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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어떤 공동체, 그 중에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섬기는 이들은 공동체의 이해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당신의 피를 부으셨으니 우리도 생명을 부을 각오로 머물러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는 공동체성을 지키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는 '혈육공동체'도 아니고 '이익공동체'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묶어 둘 수 있는 동력이 거의 없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이기에 믿음이 있어야만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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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는 언제나 자기 얼굴 내는 자리에만 어깨에 힘을 주고 나타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누구를 대접하면 담임목사가 나와서 "초대에 응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 됩니다. 내 돈 내는 사람들도 아닌 중직들이 거기 와서 또 일인분 시켜먹고 이 쑤시고 "잘 먹었다."는 인사를 받습니다. 도리가 아닙니다. 교회의 대표 한 사람 이외에 인사 받고 싶은 이들은 교회의 재정이 아니라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자기가 대접하고 싶은 이들을 초대해서 대접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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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기한 것은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대개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모두 발뺌합니다. "돈이 없다."고 합니다. "가난하다."고 합니다. "그럼 집이라도 담보하세요."하면 잡아 먹을듯합니다. "죽으라"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게거품을 물고 덤빕니다. 교회의 어려운 재정을 의논하는 자리에는 참석도 안 합니다. 교회의 복잡하고 힘든 문제를 풀어갈 때는 얼굴도 안 내밉니다. 그러다가 얼굴 안 내미는 것으로 버틸 수 없을 때는, 공동체를 이탈하여 구성원에서 자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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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을 누리며 예수님을 만나려는 이들을 안내하기도 하고, 자기 자녀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올 때는 이를 제지하기도 했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면, 비록 고치지는 못했지만 대신 기도하고 안수해 주기도 했습니다. 보리떡과 생선을 나눠 줄 때는 신이나게 광주리의 떡과 생선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 때는 좌우에서 예수님을 호위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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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에게 위기가 왔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대제사장과 총독에게 끌려 다니며 재판을 받습니다. 상황이 심각하지 않았을 처음에는 "감옥에 갈지언정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잡히시고 도저히 풀려날 가능성도 없어지자,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당한 체포의 위협이 제자들에게도 닥칠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 부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부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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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은 계속되었고 그 위험의 포위망이 서서히 제자들에게로 다가오자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패기 넘치고 의기양양하여 '감옥에 갈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던 이가 세 번씩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그 중에 한 청년은 무슨 연유인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불심검문에 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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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란 모름지기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는 학문적 가르침만이 아니라, 스승의 사상, 신념, 철학, 인품을 모두 배우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스승이 고난의 길을 갔으면 제자도 고난의 길을 같이 가는 것이고, 스승이 죽임을 당하면 같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배신'은 나란히 가던 길에서 돌아서 '등'을 보이는 것입니다. 스승은 죽는데 나만 살겠다고 딴 길을 가는 게 배신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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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알고 계셨고, 시기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밤인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고, 그 때가 그 날밤 닭이 세 번 울기 전인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민망했으며, 예수님은 얼마나 아팠을까, 어찌 당사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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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어제 밤(10/25) 미스바선교회(이재민 목사)의 제 12회 '미스바 대성회'가 열리던 제주 '블루 하와이호텔'의 입구 야경입니다.)
페목 칼럼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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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84) - 헌신을 시기하는 이들을 만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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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마가복음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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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기사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었고,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화를 내며 "무슨 의도로 비싼 것을 이렇게 허비하느냐? 차라리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으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에는 그 값이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비싼 것이었습니다. 향유가 필수품인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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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요한'이 전해 줄 때는,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었고 향유를 부은 여인은 그의 여동생 '마리아'입니다. 그는 비싼 향유 즉 순전한 '나드'향 한 근을 가져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향유 냄새가 온 집에 진동할 때 이름이 명시된 '가룟 유다'가 "이 비싼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며 마리아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가난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돈을 탐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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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에 기록된 이야기는 감동이 더한데 거기는 '바리새인'의 집이었고 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시몬'입니다. 여인은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춥니다. 그때 바리새인 '시몬'이 속으로 "예수가 선지자라면 이 여자의 신분을 다 알 텐데, 그걸 안다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가?"하는 못 마땅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걸 아시고 초청자인 시몬을 책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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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지금까지 내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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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사건을 '베다니'의 '마리아'로 보는 이도 있지만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여러 정황상 세 복음서가 전하는 베다니 마리아의 사건과는 상이점이 너무 많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고가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 혹은 머리에 부은 이 사건의 공통점은, 그 때 이런 뜨거운 헌신을 훼방하고 시기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에는 '제자들'이 요한에는 '유다'가, 또 '누가'에는 초대자 '시몬'이 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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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마다의 공통점은, 그 때마다 모두 예수님께서 향유를 부은 여인의 편이 되어 그를 변호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태, 마가, 요한에서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준비는, 니고데모 이전에 '베다니'의 '마리아'가 먼저 준비한 것입니다. 다만 '누가복음'의 '여인'은 그가 죄 사함 받은 감동으로 드린 헌신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주님의 죽음 직전에 드린 아름다운 한 편의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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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가지는 의심은 왜 이런 헌신자 곁에는 항상 이를 시기하거나 음해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지금도 우리 주변에 주님께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헌신을 맞들고 짐을 가볍게 하려는 이들보다, 그 일을 질투하고 시기하여 헌신자의 순수한 봉사를 폄하하고 의욕을 꺾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비단 교회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그건 사탄의 계략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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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이 아는 사람 중에 요한삼서 1잠 8절 이하에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지도자로 자처하며 자기를 다른 사람 앞에 내세우기 좋아하는 교만에 찬 '디오드레베'가 내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힘깨나 쓰고, 지위깨나 누리는 이들이 안하무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10절에 "이번에 내가 그곳에 갈 기회가 있으면 그의 잘못된 행동과 모독적인 언사로 나를 중상한 일을 추궁할 생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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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드레베'는 전도여행에 나선 전도자들을 환영하기는커녕 그들을 환영하는 이들이 돕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자들을 대접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추방하곤 했습니다. 얼마나 악랄한 사람인가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시어 그들을 침묵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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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여인을 위하여 직접 변호하기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하시고, 그 뜨거운 사랑과 헌신을 보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헌신 중에는 주님의 감동과 함께 주님께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이든 함께 전해졌으면 하는 진한 감동들이 있습니다. 그 스토리의 주인공은 행복합니다. 정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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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어제 제주 '소랑교회'를 방문하러 가는 길가에 탐스러이 열린 귤을 보고도 약속 시간이 되어 그냥 갔다가 다시 그 길을 되돌아와 밤에 찍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 탐스럽게 열렸는지 모릅니다.)
목회 낙수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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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을 끝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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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시리즈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이 '외로운 예수님'을 쓰면서 저는 '외로운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멍에로 '외로움'이 운명이었다면 저에게도 운명처럼 외로움이 전이된 듯싶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제 운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외롭고 싶지 않습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단풍도 보고 좋은 친구들과 만나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도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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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에게는 여전히 저를 괴롭히는 대적들이 끈질기게 붙어 있고, 여전히 제가 기른 제자들은 곁에 아무도 없고, 저를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함께하는 이들도 없습니다. 여전히 저는 '헤롯'에 끌려가고 '가야바'와 '안나스'에게 끌려 다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섰습니다. 그동안의 말은 왜곡되어 저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는 발언을 한 사람'으로,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는 말로 백성을 기망한 자로, 때로는 '율법을 범한 자‘로 고발당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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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전히 예수님처럼 벌거벗긴 채로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제 몸은 그들이 때린 채찍 자국에 피들이 흐르고 있고, 그들의 주먹에 맞은 몸은 피멍이 들었습니다. 이들이 묶여있던 손발에 못을 박는 바람에 제 손과 발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아오르고 있고, 그들이 씌어준 머리의 가시관은 제 뇌를 멍하게 만들었습니다. 옆구리에는 그들의 창이 깊숙이 들어와 내장이며 물이며 피를 모두 땅바닥에 쏟아버리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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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이 없습니다. 홀로 남겨진 십자가 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한 모습만 석양의 노을에 비추이고 있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울부짖는 외마디 절규에 하나님은 끝내 침묵하셨습니다. 날은 캄캄해지고 매일 바라보던 해와 달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십자가 아래는 사랑하는 어머니 교회만이 애처로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고, 생전에 귀신들린 참혹한 자리에서 고쳐준 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이모가 몇몇 힘없는 여인들과 함께 울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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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들의 주장을 펴던 제자들은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고함치는 무리들 근처에 숨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더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렸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제 전혀 뜻밖의 사람들인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이 제 무덤을 준비해줄지, 아니면 저에게 왔다간 이후 소식이 끊어진 '니고데모'가 '몰약' 섞은 '유향'을 가지고 나타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제가 십자가 위에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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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어제(10.25) 주일 아침 예배가 시작되기 두 시간 전 해가 떠오르기 전의 모습입니다.)
페목 칼럼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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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83) - 부르심에 핑계하는 무리들을 만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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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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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려면 사람이 필요하고, 이때 경영자나 회사는 기준을 정하고 그에 맞는 사람을 찾습니다. 현대 사회의 두 가지 모순(矛盾)은 일할 곳이 없다는, 즉 뽑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일을 맡길 사람 즉 뽑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취업 희망자들은 많은데, 취직의 문은 좁고 반대로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필요한 사람은 많은데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 시대에도 동일했습니다. 필요한 사람은 거절하고 필요 없는 사람들은 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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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에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고 합니다. 당시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서기관이 그 정도의 결심을 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요, 칭찬 들어도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서기관의 의도를 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얻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물론 그는 즉시 자기 길을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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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또 한 사람이 주님의 제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합니다. 본문은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만 치르고 오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연세가 지만하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홀가분해 지면 주님께로 가겠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전자(前者)의 경우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그건 인정상 아주 딱한 형편이고, 이는 예수님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하실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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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아주 냉정합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의미론적으로 이해하자면 이미 '죽은 자는 너희 중에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이 장사하게 하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는 단호한 어조입니다. 이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현실이나 상황을 모두 참작하고 필요를 채운 후에 여유 있게 출발하는 한가한 일이 아니고, 부름이 있을 때는 곧 떠나야하는 시급성과 긴박성을 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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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제자 되기를 요청하여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레저 활동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 취미 활동하러 모이는 동호인도 아닙니다. 급박한 시대의 부름에 따라 인명구조를 책임지고 비상 출동 명령을 기다리는 119구급대원 이상의 절박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누구도 그 명령을 지체시키거나 변경할만한 한가로움이 없습니다. 그냥 떠나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 있어도 우리가 출동하는 위급 상황보다 시급한 상황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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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주님의 부르심이 들리면, 이를 듣는 순간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 레위 등 그 부르심의 과정들이 소상히 기록된 제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많은 학문을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더 특별한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당시에 배 타고 나가서 고기 잡던 열두 명의 사도만큼 공부 못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들만큼 헌신적이지 못한 이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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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기를 잡던 그들이 어떻게 사도의 반열에 들었습니까? '세리'로 있던 이가 어떻게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주님이 부르실 때, 배와 그물 아버지와 삯꾼들을 두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지체함도 망설임도 없이 주님을 따라나선 그 한 가지가 그들을 사도의 자리에 세웒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과거의 결점이나 실수가 없습니까? 그러나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나아가는 순간, 이들의 실수와 약점들은 주님의 사랑에 모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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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스스로 부족하다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줄 믿고 주님의 부르심에 아멘하고 가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조금만 있다 때가 되면 간다는 사람은 쓰지 않습니다. 그 때가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이는 순발력의 사람입니다. 부르시면 얼른 오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미루는 사람이나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손 내밀면 닿는 곳에 있는 사람, 부르시면 달려오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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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실패는 안전을 추구하고 계산하다 당합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순종입니다.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것입니다. '즉시'로 떠나는 것입니다. '곧' 떠나는 것입니다. '이에' 떠나는 것입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도 나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떠나지 않아도 나는 떠나는 것입니다. 왜 아무개는 안 오는지, 아무개는 안 하는지, 그것은 우리가 관심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고, 우리의 일을 하면 됩니다. 핑계거리 찾다가 놓치지 말고 일어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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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현역 시인보다 더 젊은 원로 보배시인 '원방현' 장로님께서 지인에게 받으셨다며 보내주신 가을 사진입니다. 고맙습니다. 저작권 문제가 제기되면 내리겠습니다.)
목회 낙수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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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주문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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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에게 선 주문을 받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이 책 초판의 출판 기념으로 100분의 사전 주문을 받습니다. 참고하시라고 목차를 공개합니다. 주문 방법은 이곳이나 카톡, 혹은 페북 메시지나 카카오 스토리의 댓글이나 메시지로 준문하시고 아래 계좌로 입금해 주시면, 책 앞에 존함을 쓰고 싸인한 후에 송료는 제가 부담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나 문자로 주문하셔도 좋습니다. 늦어도 11월 안에 도착합니다. 돈을 모으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을 모으는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 돈을 보태서 이 책을 찍고 싶어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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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있으신 분은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전에 주문하고 입금해 주신 분들은 다시 주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책 값은 권 당 15,000 원이고 섬기는 교회의 소그룹 리더나 다른 지인에게 선물할 요령으로 더 주문하시는 분은 5권 이상은 12,000원에 드리겠습니다. 그 분들에게도 아주 뜻 깊은 선물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 경우 싸인은 주문하시는 분 한 권에만 해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속장님! 우리들의 속장님!>은 열흘, <구역장 내비게이션>은 20일 정도 늦습니다. 그 책을 주문하시려는 분은 책 이름을 적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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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메시지나 전화 문자, 혹은 카톡이나 카카오 스토리의 댓글이나 메시지에 받으실 주소를 정확하게 적어 주셔야 합니다. 주문 먼저 하시고 입금은 보름 후인 11월 15일까지 해 주셔도 됩니다. 그 때쯤 책을 발송 할 듯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를 사랑하시고 관심해 주신 분들의 사랑에 보답하려면 한 천여 권쯤 찍어서 고마운 마음으로 한 권씩 보내 드림이 마땅하겠지만, 그렇게는 못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존함을 적고 싸인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절기에 받으시는 분들에게 큰 기쁨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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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농협 352-0400-0239-43 정성학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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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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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학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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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한 셀 리더!
-나는 내가 셀 리더라는 것이 미치도록 좋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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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에 대하여!·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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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의 원론적 정의·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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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은 세포입니다.·26
2) 셀은 생명입니다.·27
3) 셀은 증식입니다.·29
4) 셀은 능력입니다.·30
5) 셀은 교회입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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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셀의 일반적 정의·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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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은 목장입니다.·34
2) 셀은 학교입니다.·35
3) 셀은 가정입니다.·37
4) 셀은 군대입니다.·38
5) 셀은 병원입니다.·39-45
(1)셀은 산부인과 병원입니다.·39
(2)셀은 외과 병원입니다.·40
(3)셀은 안과 병원입니다.·41
(4)셀은 성형외과 벙원입니다.·42
(5)셀은 이비인후과 병원입니다.·43
(6)셀은 재활의학과 병원입니다.·44
(7)셀은 정형외과 병원입니다.·45
(8)셀은 심리치료학과 병원입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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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셀의 기능·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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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은 만남의 장입니다.·47
2) 셀은 배움의 장입니다.·49
3) 셀은 사귐의 장입니다.·50
4) 셀은 섬김의 장입니다.·51
5) 셀은 나눔의 장입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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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셀의 다양성·5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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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족(家族)모임 같은 셀·54
2) 친구(親舊)모임 같은 셀·55
3) 부자(父子)만남 같은 셀·57
4) 연인(戀人)만남 같은 셀·58
5) 사제(師弟)만남 같은 셀·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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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공적인 셀·6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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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로에게 진실하십시오,·63
2) 서로에게 겸손하십시오.·63
3) 서로에게 진지하십시오.·64
4) 서로에게 배려하십시오.·65
5) 서로에게 힘이되십시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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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건강한 셀·6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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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배에 대한 기대가 가득한 셀·67
2) 말씀에 대한 갈증이 절절한 셀·69
3) 리더에 대한 존경이 특별한 셀·71
4) 교회에 대한 자랑이 충만한 셀·72
5) 멤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셀·73
6) 전도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셀·74
7) 모임에 대한 열심이 남다른 셀·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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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셀예배는 무엇입니까?·7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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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과 돌봄의 장입니다.·78
2) 치유와 회복의 장입니다.·79
3) 위로와 격려의 장입니다.·81
4) 도전과 희망의 장입니다.·82
5) 전도와 부흥의 장입니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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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셀리더에 대하여!·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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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셀리더의 정의·8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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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리더는 어머니입니다.·86
2) 셀리더는 아버지입니다.·89
3) 셀리더는 형제입니다.·91
4) 셀리더는 친구입니다.·92
5) 셀리더는 연인입니다.·93
6) 셀리더는 스승입니다.·94
7) 셀리더는 목자입니다.·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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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셀리더의 신앙적 정의·97-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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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뿌리는 사람입니다.·97
2) 가꾸는 사람입니다.·99
3) 돌보는 사람입니다.·101
4) 거두는 사람입니다.·102
5) 상받는 사람입니다.·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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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셀리더의 정체성·10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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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자에게|동역자입니다.·106
2) 멤버에게|어머니입니다.·110
3) 주님에게|증인들입니다.·112
4) 교회에게|보배들입니다.·114
5) 세상에게|증거자입니다.·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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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셀리더의 역할·12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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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리더는 중보자입니다.·116
2) 셀리더는 연결자입니다.·118
3) 셀리더는 모범자입니다.·119
4) 셀리더는 개척자입니다.·120
5) 셀리더는 보호자입니다.·1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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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셀리더의 자세·12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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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위에 순종하는 자세입니다.·125
2) 양들을 사랑하는 자세 입니다.·126
3) 자기를 포기하는 자세 입니다.·128
4) 최선을 경주하는 자세 입니다.·139
5) 기도를 우선하는 자세 입니다.·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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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셀리더의 관심·13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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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배에 관심해야 합니다.·133
2) 영혼에 관심해야 합니다.·137
3) 자신에 관심해야 합니다.·138
4) 세상에 관심해야 합니다.·140
5) 멤버에 관심해야 합니다.·14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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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셀리더의 사역·14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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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 사역입니다.·144
2) 돌봄 사역입니다.·146
3) 기도 사역입니다.·147
4) 치유 사역입니다.·158
5) 보고 사역입니다.·15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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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셀리더의 확신·15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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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셀은 반드시 증식된다.”는 확신입니다.·153
2) “우리 셀은 주님이 동행한다.”는 확신입니다.·154
3) “우리 셀은 축복의 현장이다.”는 확신입니다.·157
4) “우리 셀은 남보다 앞서간다.”는 확신입니다.·159
5) “우리 셀은 부흥의 모판이다.”는 확신입니다.·16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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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셀리더에게 필요한 능력·16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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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도력(指導力)입니다.·163
2) 영력(靈力)입니다.·165
3) 지력(知力)입니다.·167
4) 이해력(理解力)입니다.·168
5) 재력(財力)입니다.·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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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셀리더의 자리·17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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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리더의 자리는 셀멤버의 앞입니다.·172
2) 셀리더의 자리는 셀멤버의 뒤입니다.·174
3) 셀리더의 자리는 셀멤버의 위입니다.·175
4) 셀리더의 자리는 셀멤버의 곁입니다.·176
5) 셀리더의 자리는 셀멤버의 밑입니다.·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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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셀리더에게 필요한 열정·179-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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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흥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180
2) 예배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182
3) 기도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184
4) 인생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186
5) 미래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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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셀리더에게 필요한 비전·190-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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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수꾼의 비전입니다.·190
2) 보발꾼의 비전입니다.·193
3) 일꾼의 비전입니다.·194
4) 살림꾼의 비전입니다.·195
5) 농사꾼의 비전입니다.·296-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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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셀리더의 언어·199-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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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난(非難)보다는 칭찬(稱讚)의 말입니다.·200
2) 책망(責望)보다는 격려(激勵)의 말입니다.·202
3) 절망(絶望)보다는 희망(希望)의 말입니다.·203
4) 파괴(破壞)보다는 창조(創造)의 말입니다.·205
5) 부정(否定)보다는 긍정(肯定)의 말입니다.·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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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셀리더의 자산(資産)·207-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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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의 미래를 향한 비전입니다.·207
2) 셀의 영흔을 향한 사랑입니다.·209
3) 셀의 부흥을 향한 열정입니다.·210
4) 셀의 양육을 향한 연구입니다.·211
5) 셀의 증식을 위한 기도입니다.·2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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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모범적인 셀리더·21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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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하는 셀리더입니다.·214
2) 기도하는 셀리더입니다.·216
3) 훈련받는 셀리더입니다.·217
4) 앞서가는 셀리더입니다.·218
5) 실천하는 셀리더입니다.·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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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좋은 셀리더의 조건·2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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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상 긴장할 것입니다.·221
2) 항상 준비할 것입니다.·222
3) 항상 기도할 것입니다.·224
4) 항상 감사할 것입니다.·225
5) 항상 돌아볼 것입니다.·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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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성숙한 셀리더·228-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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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멤버의 존재를 인정합니다.·230
2) 셀멤버의 성장을 인정합니다.·231
3) 셀멤버의 가치를 인정합니다.·232
4) 셀멤버의 능력을 인정합니다.·233
5) 셀멤버의 수고를 인정합니다.·23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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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아름다운 셀리더·236-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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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리더는 초신자에게 모델입니다.·237
2) 셀리더는 회심자에게 의지입니다.·238
3) 셀리더는 재신자에게 위로입니다.·240
4) 셀리더는 새가족에게 식구입니다.·242
5) 셀리더는 모든이에게 친구입니다.·2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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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셀에서 만나는 즐거움·247-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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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기잡는 즐거움입니다.·248
2)농사하는 즐거움입니다.·251
3)양육하는 즐거움입니다.·256
4)경영하는 즐거움입니다.·258
5)묵양하는 즐거움입니다,·260-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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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셀과 리더의 미래·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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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행복한 셀을 위하여!·26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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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264
2)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265
3) 모두 행복하게 합시다,·265
4) 헹복을 나누어 줍시다.·266
5) 행복한 리더, 행복한 교회!·266
6) 행복한 셀, 행복한 신앙생활·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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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행복한 리더를 위하여!·268-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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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워 하며 행복하십시오,·268
2) 만남의 행복을 누리십시오.·271
3) 그리운 이와 사랑하십시오.·272
4)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갑니다.·272
5) 사랑과 행복은 같이 갑니다.·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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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셀리더의 축복·274-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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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적 지도력 축복입니다.·274
2) 영적 교제의 축복입니다.·276
3) 말씀 연구의 축복입니다.·277
4) 성역 봉사의 축복입니다.·279
5) 목회 동역의 축복입니다.·28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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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셀리더의 행복 (1)·28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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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을 바라보는 행복입니다.·284
2) 변화를 지켜보는 행복입니다.·286
3) 성숙을 경험하는 행복입니다.·289
4) 양식을 준비하는 행복입니다.·290
5) 사랑을 공급하는 행복입니다.·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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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셀리더의 행복 (2)·29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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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의 부흥을 희망하는 행복입니다.·294
2) 셀의 영역이 확대되는 행복입니다.·296
3) 셀의 증식을 바라보는 행복입니다.·298
4) 셀의 축복을 공유하는 행복입니다.·299
5) 셀의 내일을 기대하는 행복입니다.·3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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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셀리더의 기쁨·30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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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의 기둥이 되는 기쁨입니다.·303
2) 주님의 인정을 받는 기쁨입니다.·305
3) 주님의 측근이 되는 기쁨입니다.·307
4) 주님께 쓰임을 받는 기쁨입니다.·308
5) 역사의 주역이 되는 기쁨입니다.·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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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행복한 셀리더의 비결·31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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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과 의지가 일치해야 합니다.·311
2) 목회자와 비전이 일치해야 합니다.·313
3) 타리더와 마음이 일치해야 합니다.·316
4) 셀멤버와 의견이 일치해야 합니다.·317
5) 스스로는 목적이 일치해야 합니다.·318-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