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돌아온 제군!
①
제군! 그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가 발한 천하무림을 향한 경고는 천하 각처에서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천하를 폭풍처럼 휘감는 공포였다.
무림사이래 단 한 무인이 천하 자체를 공포로 휘감은 적이 어디 단 한 번이라도 있던가!
허나, 제군! 그는 달랐다. 그는 존재할 때부터 이미 공포였고, 그리고 사라질 때 또한 무림인들의 뇌리에 헤어날 수 없는 불안감을 주었고, 또한 이제 다시 돌아옴으로 해서 모든 이들이 피가 말라야 하는 공포를 느끼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제군! 그 이름이 주는 의미는 너무도 거대했기에,
만화대루(萬花大樓)
일 년 내내 꽃으로 뒤덮여 있는 소성(小城)이었다.
화려함과 정적을 안고 있는 만화대루는 원래 성을 이루고 있는 건축물들이 모두 하얗기 이를데 없는 대리석인지라 눈 속에 묻힌 그 자태는 신비롭기만 하다.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태호의 정경을 한껏 운치 있게 만들어 주고 있는 만화대루.
이 만화대루에 역시 지금 제군의 공포가 시작되고 있었다.
온통 설화(雪花)로 뒤덮여 있는 만화대루의 주청에는 지금 수많은 인물들이 모여 신년을 자축하고 있었다.
수십여 명의 청의인들의 정중앙에는 한 청의중년인이 오연히 앉아 사면을 흐뭇한 눈으로 쓸어보고 있었다.
"많이들 마셔 둬라. 앞으로는 좀 바빠질 것 같으니"
더할 나위없이 조용한 음성이었다.
헌데 만화대루의 빈청을 꽉 메우고 있는 인물들은 바로 북극성의 최정예들인 북극일백성좌이고 중앙의 인물은 바로 그들의 영수인 녹빙산이 아닌가!
녹빙산은 다시 좌중을 쓸어보며 입을 열었다.
관록이 깃든 위엄 있는 음성이었다.
"올해 안으로 본성은 다시 중원으로 진출할 것이다. 이제 과거처럼 지하무림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중원 전체를 지배하는 세력이 될 터이니, 너희들은 앞으로 무척 바빠질 것이다."
북극성! 과거 제군 사천극 시절에 이미 중원의 밤을 지배했던 단체, 헌데 그 북극성이 이제 완벽한 무림패주가 되기 위해 야망을 불태우고 있단 말인가?
만화대루의 주인도 이미 바뀌어 있었다.
사천극이 중원에 들를 때마다 임시로 거처하던 곳이 이제는 북극성의 정예들인 일백북극성좌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녹빙산이 문득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문 쪽을 응시했다.
"헌데, 어찌된 일이냐? 대막의 특별 요리라는 낙타구이는 언제쯤 들어오는 것이냐?"
녹빙산이 짜증을 내자 수하 중 한 명이 황급히 대청을 빠져나갔다가 이내 다시 되돌아오며 입을 떼었다.
"오고 있습니다."
그의 뒤쪽으로 체구가 장대한 두 명의 인부가 목반(木盤)에 헝겊으로 뒤덮여 있는 요리를 날라오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솟고 있는 요리는 그 크기가 보통이 아닌지라 일백북극성좌들은 일제히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지금 들어오고 있는 음식이 바로 대막의 최고 요리라는 낙타 통구이인 것이다.
희디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요리가 가운데의 원탁 위에 올려졌다.
"시작들 하자. 오늘은 그저 아무 생각 말고 마음껏 먹고 마시자꾸나."
녹빙산이 천천히 요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어 그는 낙타 통구이를 덮고 있는 흰 천을 벗겼는데,
"헉! 사, 사람이!"
돌연 그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목반(木盤)위에 올려져 있는 물체는 결코 낙타 통구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장대한 체구를 지닌 청의대한이 가슴에 한 자루 창을 맞고 쓰러져 있는 시체에 불과했다.
"이, 이 사람은 빙영수(氷影手) 흑웅산(黑雄山)!"
녹빙산은 죽어 있는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신음성을 흘려 냈다. 이 광경이야말로 너무도 돌발적인데다 공포스러운 것인지라 그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요리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물체가 느닷없이 한 구의 시신이고 그 시신의 가슴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음이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비수의 끝에는 한 통의 서찰이 매달려 있었다.
<녹빙산! 본좌는 언제나 받은 것을 두 배로 돌려주는 사람임을 잊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네가 나의 가슴에 독비(毒匕)를 꽂았기에 먼저 너의 가장 충실한 심복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기다려라! 오늘의 음식이 최후의 만찬임을 명심한 채.
제군(帝君).>
"성, 성주가!"
"이, 이럴 수가! 성주가 살아났단 말인가?"
일백북극성좌들의 눈에 공포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처절한 공포였다.
장내에 순식간에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죽음의 사신(死神)을 피해 깊고 깊은 곳에서 자축(自祝)하던 사람들에게 그 죽음의 신(神)이 소리 없이 찾아 든 듯한 공포였다.
서로의 얼굴만을 마주 본 채 공포에 질려 있는 얼굴들!
허나 이 순간 제군에 의한 공포는 또 다른 곳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②
유행목원.
유림의 하늘이라 일컬어지는 우문세가(宇文勢家)의 본가(本家)이며 십대지군의 일인으로서 사천극을 용지연 폭포 아래로 잠재워 버린 만경선생 우문통의 거처인 유행목원의 은행나무숲은 지금 온통 백설로 뒤덮여 있었다.
행문제(杏文齊).
이 행문제는 우문세가의 사당(祠堂)이랄 수 있는 곳이었다.
역대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이 행문제의 제청(祭廳)에 언제부터인가 온갖 제물(祭物)들이 차려져 있고 향로가 향훈을 흘러 내고 있었다.
그 전면에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단정한 의복을 갖추고 서 있었는데 마침 차례를 올리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모두들 도포와 유건을 걸치고 있어 엄한 가풍(家風)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만경선생 우문통은 가장 선두에 우뚝 서서 수많은 위패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의 눈에서는 어떤 회한의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정녕 나는 예상치도 못했다. 내 생전에 나보다 먼저 죽은 아우에게 잔을 따를 줄은 정말 몰랐다."
죽은 쌍동이 아우를 기리고 있음인가?
그의 음성은 처연하기만 했다.
"허나, 아우는 염려하지 마라. 너를 벤 사천극을, 이 형이 확실히 네 곁으로 보내 주었으니 말이다"
쪼르르.
우문통은 무릎을 굽혀 가장 새로와 보이는 위패에 술잔을 올렸다.
"네가 본가의 아들이자 가장으로서 폐관 중이던 이 형을 대신해 가문을 지킨 것은 우리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너의 갸륵한 충정은, 길이 길이 후대에게 전해질 것이다."
우문통의 눈가에 잔경련이 일고 있다.
"허나, 허나 이 못난 형은 못내 가슴이 아프구나. 이 형 때문에 네가 대신 먼저 갔으니 말이다."
장내는 숙연하기 이를데 없었다.
우문통은 위패를 향해 오랫동안 독백하다가 문득 몸을 일으켜 한쪽에 서 있는 중년인을 응시했다.
"각아야."
"예!"
"이제 네가 아버님에게 잔을 올리거라."
"예, 백부님!"
삼십대 초반의 중년인, 그가 우문통의 쌍동이 아우였던 우문화의 혈육이었던가?
청수한 용모의 중년인은 한 걸음 위패 앞으로 다가들어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아버님, 아버님을 끝까지 지켜 드리지 못한 이 못난 놈을 용서하십시요."
술잔에 따라지기 시작한 맑은 술은 이내 술잔을 채우고 술잔 위로 넘치기 시작했다.
우문통이 백미를 찌푸렸다.
"각아야, 술이 넘치고 있구나. 그만 따르거라."
청수한 용모의 중년인은 우문통의 나직한 음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술을 따르고 있어 술은 잔을 넘치고 바닥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각아라고 불리운 중년인은 돌연 동작이 굳어진 사람처럼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리고 술을 따르고 있는 동작 역시 멈추지 않은 채 석상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문통은 무어라 큰 소리를 지르려다 돌연 눈을 부릅떴다.
술잔에 흐르고 있는 술빛이 기이하지 않은가!
"피? 잔에 피가?"
그는 깜짝 놀라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이 넘치고 있는 술잔 안에 붉은 빛이 스며들고 있지 않은가!
그 붉은 액체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술을 따르고 있는 각아라고 불리운 중년인의 팔목을 타고 손가락 위로 흐르며 주담자에서 나오는 술과 함께 술잔으로 흐르고 있었다.
"각, 각아야!"
우문통은 깜짝 놀라 중년인의 손가락과 팔목으로 그리고 다시 가슴 부위로 눈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피(血)는 놀랍게도 중년인의 가슴에 박혀 있는 비수에서 시작되어 가슴 아래로 타고 흘러 팔목까지 이어졌다가 술잔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정녕 섬뜩한 광경이었다.
언제 누가 그의 가슴에 한 자루의 비수를 꽂았단 말인가?
'이럴 수가! 누가 감히 나의 눈을 속이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우문통의 눈에 경악과 불신이 빛이 떠올랐다.
'이럴 수가 없다! 이곳에 모여 있는 아이들 중에 약한 자는 한 명도 없다. 명색이 십대지군의 가전무공을 잇고 있는 아이들인데, 누가 있어 우리 모두의 눈을 속이고 사람을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문통만이 가슴에 비수를 박고 앉은 채 죽어 있는 중년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뒤쪽의 사람들은 아직 중년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도 모르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해서 그들은 숙연히 고개만을 떨군 채 의식을 진행시키고 있어 우문통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 본 듯한 느낌이었다.
허나 비수는 분명히 박혀 있었고, 그의 조카 되는 인물은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문득 우문통의 눈에 비수 끝에 매달린 한 통의 서찰이 들어왔다.
"으!"
우문통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불신의 눈으로 자신도 모르게 서찰을 잡아떼어 펼쳤다.
<우문통!
네 아우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네 조카의 피(血)로 잔을 올린다. 허나, 이제 슬퍼하지 마라. 너 또한 네 아우의 뒤를 따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지 않느냐.
제군(帝君).>
"제군!"
우문통이 돌연 서찰에서 눈을 떼어 허공을 직시했다. 쏘는 듯한 무서운 눈이었다. 그의 입에서 상처 입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기성이 새어나온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오냐! 사천극! 이놈, 고맙게도 살아 있었구나. 그래, 이번에는 가장 잔인하게 네 놈을 죽여주마. 다시는 살아날 수 없도록 가장 잔인하게 말이다."
우문통의 몸이 끝없이 진동하였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중인들의 눈에 공포로 인한 어둠(暗)이 내리고 있었다.
제군! 그가 돌아온 것이었다.
③
하남성(河南省) 대봉(大鳳).
남과 북으로 두 개의 산(山)이 마치 거대한 대봉(大鳳)이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대봉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한개의 도읍이다.
남로(南路)와 북도(北道)가 그 두 개의 산악에 의해 차단되어 교통이 불편한 때문에 은자(隱者)의 고향이라고도 불리우는 적요로운 고을이 바로 대봉인 것이다.
이 대봉의 중앙에 사시사철 청죽(靑竹)으로 뒤덮여 있는 장원이 있었다.
- 화군가(畵君家).
당대제일의 화예명인(畵藝名人)인 화군(畵君) 동궁국(東宮國)의 거처였다. 동궁국은 대대로 화도(畵刀) 하나만으로 성명(盛名)해 온 가문으로써 그 화예는 실로 놀라와 고관대작들은 그의 그림 한 점 얻기를 꿈에서조차 갈망할 정도였다.
죽림이 내다보이는 화군가의 대청에는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신선풍의 청수한 풍도를 지니고 있는 오순의 금의장년인과 이제 삼십대 초반에 접어든 듯한 백의청년이었다.
그들은 부자지간(父子之間)인 듯 한가롭고도 평화로운 얼굴로 마주앉아 한 사람은 먹을 갈고 한 사람은 붓을 든 채 바닥의 화선지(畵仙紙) 위에 백설을 이고 있는 죽림을 담고 있었다.
스스슷.
희디 흰 백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죽림의 풍경이 화선지 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청색과 흰색이 너무도 고아하게 어우러져 있어 그야말로 선경(仙景)을 방불하고 있는 대청 밖의 풍경은 화선지로 옮겨지며 더욱 오묘한 생명을 얻어 오히려 화선지 속의 풍경이 더더욱 환상적으로만 느껴진다.
묵묵히 붓을 놀리며 죽림백설도(竹林白雪圖)를 완성시켜 가던 금의장년인이 문득 붓을 멈추고 전면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네 시중을 받으며 해마다 정초에 백설도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랜 된 듯 하구나."
"예! 제가 다섯 살 때부터 아버님의 먹을 갈아 드렸으니 벌써 이십 육 년째입니다."
백의청년이 밝은 미소를 떠올렸다.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손을 놀려 먹을 갈고 있었는데 그 손길이 그렇게 온정(溫情)할 수가 없었다.
"이십 육 년째라? 이제 싫증이 나지 않느냐?"
백의청년이 느닷없는 금포장년인의 말에 손을 멈추고 눈을 들었다.
온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는 금의장년인의 표정이다.
그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 화군 동궁국.
백의청년이 갈아주는 먹으로 죽림백설도를 그리고 있는 이 금의장년인이 바로 전설적인 화예의 명인 화군 동궁국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앉아 단정한 자세로 먹을 갈고 있는 백의청년은 바로 그의 유일한 혈육인 동궁설탁(東宮雪卓)이었다.
동궁설탁은 부친의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내지 못하자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떼었다.
"아닙니다. 싫증이라니요? 해마다 새해 첫날의 이런 자리가 저에게는 즐겁기 이를데 없는 자리인 걸요."
"놈, 마음을 속일 필요는 없다. 내가 어찌 너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이제 너도 그림을 그리고 싶을 것이다."
동궁국이 미소하며 입을 떼었다. 동궁설탁은 자신의 내심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지 못했다.
동궁국의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내년부터는 관(觀)아에게 시중을 들라 해라. 서른이 넘은 너의 시중을 받는 것도 이제는 부담이 되니,"
"예?"
동궁설탁이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들었다.
이내 그의 눈에 기쁨의 빛이 파도치듯 일렁였다.
"하, 하오면, 내년부터 저도 필(筆)을 들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됐다. 이십 년 이상 먹을 간 연후에야 붓을 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본가의 가통이 아니었더냐. 이제 너도 자격이 있음이다."
"고, 고맙습니다. 아버님."
동궁설탁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동궁국의 음성이 돌연 엄숙해졌다.
"명심해라. 네가 붓을 잡기 시작한 그날부터 너 또한 가법을 지켜 나가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이십 년 이상 먹을 갈아야 겨우 붓을 들 수 있다는 실로 놀라운 가법, 그 엄청난 시련이 있은 후에야 진정한 화예(畵藝)를 논할 수 있다 함이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어찌 보면 지독하기 이를데 없는 가법이었으나 뉘라서 이 가법을 부인하겠는가!
그 가법 때문에 화군가의 명성이 누대를 내려오며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동궁설탁은 격동의 빛을 애써 누르며 다시 단정한 자세로 먹을 갈기 시작하고, 동궁국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죽림백설도를 완성시키기 위해 다시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아주 작은 기이한 파공음이 동궁국의 귓전에 들려온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것은 아주 먼 곳에서 뇌성(雷聲)이 인 듯한 음향이었고, 그리고 아득한 창공 위에 흘러가는 바람소리 같기도 했다.
동궁국은 다소 기이함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아들은 여전히 먹을 갈고 있고 주위의 모든 풍경 또한 조는 듯 한가롭기만 하다.
귓전을 울려왔던 나직한 음향이 자신의 착각임을 느낀 동궁국은 문득 동궁설탁이 갈고 있는 먹을 응시했다.
그의 노안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먹을 갈고 있는 손길이 불안정하기 이를데 없는 것은 둘째치고 그 손이 점차 멈춰지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어 사방으로 먹물이 넘치고 있을 정도였다.
'놈! 붓을 잡아도 좋다는 말에 격동해 마음의 안정을 잃다니 아직 붓을 잡기에는 이르군!"
동궁국은 내심 혀를 찼다.
화예(畵藝)는 하나의 도(道)로써 무엇보다도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정력(定力)을 갖추어야 한다.
육체는 곧 마음의 반영이고 그 마음이 안정되어 있어야만 붓을 잡은 손이 떨리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화군가는 대대로 이십여 년 이상 먹을 갈며 무엇보다도 무념무상의 자아(自我)를 완성시켜야 하는 가법을 만든 것이었다.
허나 이 순간 동궁설탁의 마음이 평정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으니.
기이한 음향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는 듯한 음향이었다.
그 음향은 바로 동궁설탁의 가슴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피?'
동궁국의 가슴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짙은 선혈이었다.
피는 동궁설탁의 가슴에 박혀 있는 기물체 끝에 한 방울씩 매달렸다가 떨어지고 있었다.
'강전(强箭)이!'
동궁국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이는 근 두 자에 이른다. 굵기는 어른 엄지 손가락 정도, 그 엄청난 크기의 강전이 소리 없이 동궁설탁의 가슴으로 고개를 내민 채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강전의 깃털 부위에는 붉디붉은 혈첩(血帖)이 매달려 있지 않은가!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소소예전(小宵藝全)의 군사 동궁국에게.
죽림백설도는 백설과 죽림의 백색과 청색이 조화되는 그림이기는 하나 본인은 늘 그 죽림백설도에 한 가지 색(色)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바로 붉은 색, 같은 화도의 명인으로서 그대에게 죽림백설도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기 바라는 의미에서 붉은 색을 선사한다. 물론 천하에서 가장 짙은 붉음은 곧 인간의 피(血)임을 그대는 모르지 않을 것,
소소예전의 번창을 빈다.
제군(帝君).>
"제군!"
동궁국은 깜짝 놀라 눈을 들었다.
그의 눈이 대청에서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 오백여 장 저쪽의 산전(山頂)에 고정되었다.
대봉이라는 작은 고을을 남과 북으로 가로막고 있는 대산(大山)이었다.
헌데 오백여 장 아득한 그 산정 위에 언제부터인가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사내가 걸친 것은 짙은 흑의(黑衣)!
흰 백설을 이고 있는 산정에 짙은 흑의사내가 우뚝 서 있는지라 그 모습은 아득하면서도 강렬하게 눈을 찔러 오고 있었다.
마치 백설이 뒤덮인 광야(廣野)에서 홀로 서 있는 듯한 기태의 흑의사내와 동궁국의 눈이 오백여 장의 거리를 격해 허공에서 마주쳤다.
'사천극!'
동궁국의 전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백여 장 밖의 산정에 거대한 강전을 한 손에 늘어뜨린 채 서 있는 흑의사내의 눈은 무심하기 그지 없었다.
바로 제군 사천극이었다.
"으, 저자가 소소예전을 모두 파악했단 말인가?"
동궁국은 아들의 죽음보다도 사천극이 소소예전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음을 느끼고 더욱 전율했다.
소소예전, 천하의 그 누구도 모르는 신비의 단체가 이제 사천극의 도전을 받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동궁국이 망연히 산정의 사천극을 응시하고 있는 순간, 사천극의 신형은 아득한 산정 저쪽에서 문득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것은 마치 환상이 돌연 눈 앞에 나타났다가 저절로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허나 분명한 것은 있었다. 사천극이 돌아왔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그리고 천궁의 전대 궁주인 사천극의 부친을 소소예전과 북극한황 채리소소가 힘을 합쳐 살해한 이상 이제 소소예전은 더이상 신비(神秘)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천극의 복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④
호북성 무창.
무창에서 가장 혼잡한 저자거리에서 좌측으로 오십여 장 떨어진 곳에 한 채의 허름한 장원이 서 있었다.
장원의 규모는 그리 작지 않았다.
십여 채에 달하는 전각들과 드넓은 화원 등으로 인해 과거에는 지체가 꽤 높았던 인물이 기거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낙애원(樂愛院).>
이곳은 결코 일반적인 장원이 아니었다. 바로 천하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아원이었던 것이다.
눈(雪)은 이 낙애원의 하늘 위에도 내리고 있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주방(廚房)이었다.
수많은 솥이 걸려 있는 주방의 입구에는 지금 수많은 아이들이 그 문턱에서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아 눈을 빛내며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에 군침을 삼켜 대며 수많은 솥들을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아이들은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면서도 눈은 계속 솥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히히, 떡아! 제발 빨리 좀 익어라. 응!"
"그래 그래! 모처럼 원주아버님이 오셨는데 설익으면 안된다. 아주 잘 익어라."
소년들과 소녀들이 섞여 있는 아이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하며 여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실로 평화스럽기만 했다.
떡이 익기를 기다리며 턱을 괴고 문턱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들을 대하고 흐뭇하지 않으랴.
아이들의 뒤쪽에서 한없이 자애한 음성이 조용히 들려왔다.
"후후 그놈들! 평생 떡 한 조각 먹어 보지 못한 놈들 같구나."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뒤로 돌리며 다시 한 마디씩을 내뱉았다.
"쳇! 형들이 우리에게 잘해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원주아버님이 없을 때는 떡도 맛이 없어 먹지 않았단 말이야!"
아이들이 조잘거렸다.
"그래! 원주아버님이 안 계실 때는 우리는 아무것도 안 먹었어!"
"헤헤헤, 원주아버님은 무조건 나빠! 이렇게 오래간 만에 오다니!"
아이들의 불평 어린 외침에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훗! 그놈들도, 그래! 내가 잘못했다는 의미에서 이번 새해에는 너희들의 용돈을 듬뿍 주마."
"와아! 그 말 정말이야?"
"믿어도 돼?"
아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후후, 언제 이 아버지가 거짓말한 적이 있느냐! 그 뿐이 아니고, 올해에는 눈싸움을 해서 이긴 쪽에게 특별히 황금 닷냥을 상금으로 줄 예정이란다."
"윽! 황금 닷냥?"
아이들이 일제히 까무라치는 시늉을 했다.
너무도 파격적인 상금인 것이다. 뉘라서 모르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떡도 아니고, 그리고 황금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이 이렇게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은 단 한 사람 때문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진정한 아버님과도 같은 존재인 사천극이 이미 아이들에게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사천극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주방 안으로 들어서 솥들을 열어 보기도 하며 아궁이에 장작을 더 넣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잔혹한 살인자가 아니라 인자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아버지 같은 태도였다.
이때 아이들이 환성을 지르며 일어섰다.
"와아! 그렇다면 우리 지금 눈싸움하자!"
"그래, 와아!"
아이들은 일제히 드넓은 화원 한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이어 순식간에 편을 갈라 눈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후후, 그놈들 떡은 안 먹느냐?"
사천극이 고소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먹어! 원주아버님이 다 먹어."
"아니야, 내 것은 조금 남겨!"
여기저기 흰 눈뭉치가 하늘로 날아다니고, 아이들의 함성에 천지가 떠들석하다.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기까지한 광경이 아닌가. 사천극은 주방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없이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하늘.
점점이 뿌려지고 있는 백색의 막(幕)을 응시하는 사천극의 눈이 천천히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속에 다시 살인(殺人)이 계획되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를 향한!
밤(夜).
기해년 정월 초 이틀 째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허나 황도(皇都) 금릉(金陵)의 밤은 오히려 낮보다 더욱 소란하고 더욱 화려했다.
펑!
여기 저기서 솟아오르는 폭죽과 요란한 함성 소리들. 그리고 관도를 메우며 오가는 선남선녀들. 황도의 밤은 새해를 맞아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하얗게 내린 눈 위에 여기저기 온갖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궁등(宮燈)들이 걸려 있고,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금릉의 곳곳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흥청대는 수많은 인파로 인해 마치 저자거리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몰랐다. 그 불야성 속으로 음습한 죽음의 손(手)을 지닌 한 흑의사내가 소리 없이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금성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저자거리의 한쪽에 거대한 천막이 쳐져 있고 주위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었다.
휘황한 횃불이 어둠을 밀어내는 가운데 천막 안에서는 연신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피리 소리와 북소리, 그리고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는 천막은 한 눈에도 광대놀이패의 천막임을 알 수 있었다. 천막 안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앉아 있고 그 전면에 거대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는 지금 익살스럽게 분장한 어릿광대 한 명이 재담(才談)을 쏟아 내고 있었다.
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얼굴에 온갖 색깔을 범벅으로 해 놓아 대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어릿광대.
그의 말투는 지독히도 빠른 가운데 코먹은 듯한 음성인지라 또한 익살스러웠다.
"자, 자! 이제 우리 천리유랑단(千里流浪團)의 보배, 외줄타기의 명인 황루면인(黃?面人) 율소개(律小 )의 등장입니다."
"와아!"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무대 한쪽으로부터 한 사나이가 건장한 상체를 드러낸 채 천천히 걸어나왔다. 군살 없이 미끈하게 빠진 상체다.
허나 그의 얼굴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듯한 해골 형상의 가면이 씌여져 있어 그 용모는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예, 예. 고맙습니다. 지금 박수를 쳐주신 귀빈들께서는 분명히 만수무강하실 것이되 박수를 치지 않은 개 같은 손님들은 겨우 백 이십 살 정도까지 사시든지 말든지 할 것입니다."
"와아"
"하하하!"
어릿광대의 익살에 다시 한 번 장내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때 천리유랑단의 천막 입구에 한 흑의사내가 조용히 들어섰다. 관객들은 모두 전면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인지라 누가 들어섰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설혹 흑의사내가 들어선 것을 보았다 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일 사람도 없었다.
허나 단 한사람만은 흑의사내가 조용히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발견하고 눈빛을 굳히고 있었다.
어릿광대였다. 그는 연신 익살을 터뜨리고 있다가 천막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는 흑의사내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으나 요란한 분장 때문에 그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는 이내 평정을 되찾은 듯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자, 자! 황루면인! 어서 너의 묘기를 손님들께 보이거라!"
황루면인은 침묵으로 일관한 채 십 장 높이 허공에 걸려 있는 외줄을 향해 다가들었다.
헌데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춘 채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릿광대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 이놈아! 엉덩이에 종기가 났냐? 왜 가다가 멈추는 것이냐?"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혼잣말처럼 귀를 쫑긋해 하며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신년초인데 배가 고프다고? 이런 제기, 아니 그래 배가 고파 걷지도 못하겠다는 것이냐!"
어릿광대가 다시 중얼거렸다.
"쯧쯧쯧! 그럼 진작 말해야지. 네가 배가 고프다는데 귀빈들이 가만히 계시겠느냐!"
어릿광대는 기이한 몸짓을 해 보이며 관객들을 향해 익살을 터뜨렸다. 관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뿐이랴! 관객들은 은자 등을 어릿광대 앞으로 던지기 시작해 순식간에 제법 적지 않은 은자가 그의 앞에 쌓였다.
기다렸다는 듯 어릿광대의 익살이 다시 터져나왔다.
"어이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자 이놈아! 귀빈들께서 무려 네가 죽을 때까지 흥청거리며 쓰고도 남을 만큼의 은전을 주셨다. 어서 재주를 보이거라!"
황루면인이 다시 천천히 외줄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허나 그의 걸음은 채 반 장도 나아가기 전에 또 멈추어지고 있었다.
"응? 저놈이 아주 배짱이네? 아니 왜 또 멈추는 것이냐?"
어릿광대가 으르렁거렸다.
그는 다시 귀를 쫑긋거리며 입도 열지 않은 황루면인이 무슨 말인가를 했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엉? 심심해서 한 번 해봤다고? 이런 제기랄!"
"와하하하!"
"흐흐흐."
어릿광대와 황루면인의 죽이 잘 맞는 익살에 손님들 사이에서 다시 요란한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때 황루면인은 가느다랗기 이를데 없는 외줄로 올라서 서서히 재주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기 이를데 없는 광경이다.
허공 십 장 높이에 설치되어 있는 외줄 위로 올라간 그는 한 발로 깡총깡총 뛰기도 하고 허공에서 재주를 넘은 후 다시 줄 위에 내려서기도 하는 등 실로 온갖 재주를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관객의 눈은 줄 위의 황루면인에게만 고정되었다.
그러나 이 순간 어릿광대의 눈이 다시 긴장을 담은 채 흑의사내 쪽을 응시했다.
'사천극! 저자가 이곳에 오다니, 큰일이로군!'
어릿광대는 흑의사내를 예의 주시하며 긴장으로 몸을 굽혔다.
지금 무심한 눈으로 관객들의 뒤쪽에 서 있는 인물은 바로 제군 사천극이 아닌가!
사천극의 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어릿광대는 그를 발견한 순간 이미 팽팽한 죽음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외줄 위에서 재주를 보이던 황루면인이 돌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가 그대로 떨어져 내리지 않는가!
"앗!"
"떨, 떨어진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관객들이 일제히 비명성을 내질렀다. 허나 그 순간 황루면인은 절묘하게 한쪽 다리로 외줄을 걸치며 다시 튀어 올라 줄 위로 내려서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짐짓 떨어지는 척 했던 광경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헤헤헤, 손님들 많이 놀라셨네! 어이, 저기 저 처녀는 쌍동이 애가 떨어졌겠어."
손님들의 놀라는 표정을 바라보며 어릿광대가 다시 익살을 터뜨렸다.
이때 사천극이 서 있는 지점까지 다가왔던 황루면인이 돌연 다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허나 이번에는 그것 역시 연극이라 생각하고 있는 관객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무심한 태도로 서 있던 사천극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본 것이었다. 자신에게 떨어져 내리고 있는 황루면인의 손에 어느새 번뜩이는 작은 비수 하나가 쥐어져 있는 것을!
"흥! 고맙군. 내려와 줘서!"
사천극이 손을 뻗어 황루면인을 받아 안았다.
황루면인은 기실 사천극을 공격해 온 것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마치 그의 품에 저절로 안긴 형상이 되어 버렸다.
사천극의 잔잔히 가라앉은 눈이 가슴에 안겨 있는 황루면인의 눈을 직시했다. 무서운 눈이었다. 마치 대하는 이의 뒤통수까지 꿰뚫어 버릴 듯한 쏘는 듯한 눈빛이었다.
"본인은 네가 이미 소소예전의 외당당주 중 한 명임을 알고 있다. 전주(全主)는 어디에 있느냐?"
속삭이듯 나직한 음성이 사천극에게서 흘러나왔다.
황루면인은 사천극의 눈빛을 대한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려 갔다. 허나 그는 애써 냉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다고 해도 가르쳐 줄 것 같으냐?"
"싫다면 할 수 없지. 그렇다면 하던 일이나 계속하게!"
사천극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 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휘익!
황루면인의 신형이 화살처럼 퉁겨지며 허공 삼장 위쪽의 외줄로 뻗어 나갔다. 뒤이어 그의 몸은 그 외줄에 걸쳐지고 있었다.
허나 그의 몸에는 이미 생명이 남아 있지 않았다.
퉁기듯 가볍게 내저은 사천극의 손에서 무서운 힘이 뻗어 나와 그의 심맥을 단숨에 끊어 버린 것이었다.
"와아!"
"정말 멋진 재주로군!"
관객들은 사천극 또한 곡예단의 일원으로서 황루면인과 서로 짜고 다시 외줄로 퉁겨 보낸 것인 줄 알고 환호했다.
이때 사천극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이미 어릿광대의 전면으로 다가와 있었다.
일견해 무척 느린 듯한 걸음이었으나 어느새 그의 전면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사천극이 다시 나직이 질문을 던졌다.
"너는 알고 있느냐? 전주가 있는 곳을?"
어릿광대가 고개를 저었다.
"귀빈께서는,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군요."
"그래? 허나 외줄을 타던 네 동료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알고 있다면 어려운 대답도 아닐텐데?"
어릿광대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때 그제서야 외줄에 몸이 박혀 있던 황루면인의 얼굴에서 황금가면이 떨어져 내리고 드러난 그의 얼굴에서 검붉은 선혈이 흘러나와 지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생각이 나느냐?"
사천극이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태도였으나 원초적인 공포감을 느끼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어릿광대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노, 노부는 모르오. 전주께서 우리와 함께 금릉에 들어온 것은 확실하나, 지금 어디에 계신지는 모르오."
사천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우수가 어릿광대의 얼굴에 닿았다 떨어졌다.
주르륵!
어릿광대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분장이 지워지며 동시에 다섯줄기의 손가락 자국이 얼굴을 덮으며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어릿광대의 얼굴이 한 치 깊이로 일정하게 다섯 개의 구멍으로 뒤덮이며 그 곳으로부터 선혈이 샘솟듯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릿광대는 최초로 지옥의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이, 이제 생각이 났소. 전주는 황성에 계십니다."
"황성? 호, 금제(琴帝) 대흥동(大興東)이 황실에서 개최되는 연회에 악사(樂士)로 참석 중이라 이것이냐?"
"그, 그렇소"
사천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그의 몸이 움직였다고 느껴진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천막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동시에 나직한 음성이 사천극의 등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아이들을 동원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두 잠을 자고 있으니."
어릿광대는 사천극이 사라지며 내뱉은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사면을 쓸어보았다.
그순간 그는 곡예단을 이루고 있던 모든 인물들이 이미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아님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리를 불던 자는 피리를 입에 문 채, 북을 치던 자는 북을 치는 동작 그대로, 모든 수하들이 그대로 정지되어 있지 않은가!
그들의 몸 여기저기에는 각기 날카로운 비수가 박혀 있었는데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실로 엄청나 무대 뒤쪽은 그야말로 피의 강(江)이 흐르고 있었다.
사천극이 황루면인을 죽이기 시작해 어릿광대에게 대답을 들은 후 사라지기까지는 그야말로 눈 한번 깜짝할 순간의 일인 듯 짧은 순간이었다.
허나 그 짧은 순간에 이미 십여 명에 달하던 소소예전 수하들이 모조리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릿광대는 단연코 사천극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모든 동료들이 스스로 죽어 버린 듯한 엄청난 광경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엄청난 살인극이 벌어진 것을 깨달은 관객들이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치며 천막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금릉의 거리에서는 아직도 요란한 폭죽 소리와 떠들썩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금릉의 밤은 이렇게 엄청난 살인을 품은 채 흥청거리며 깊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