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석양(夕陽)
①
금와본도(金臥本島).
금와일백팔해주의 본도인 금와본도의 남쪽 해변은 무수한 암초들이 솟아 있어 험난하기 이를데 없는 곳이었다.
사나운 파도가 일렁이고, 칼끝처럼 날카로운 기암괴석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 가히 인간의 발자취를 거부하고 있었는데, 그 한쪽 암석 위에는 언제부터인가 한 폭의 그림처럼 한 노인이 긴 낚싯대를 광란하는 파도에 담근 채 앉아 있었다.
동해상제 구양천괄, 바로 그였다.
이때 한 척의 어선이 곧바로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고 그 갑판에 사천극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구양천괄이 이채를 머금었다.
그는 나직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쯧쯧, 계집애들이란 그저 주책이라니까! 사내놈에게 반하면 제 할아비를 죽이라고 길 안내까지 할 정도라니."
"그 아이가 왔소?"
구양천괄이 앉아 있는 암석의 하단에는 귀황파파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구양천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늦게 온 셈이지. 임자는 비켜나 있구료."
"알겠수, 영감! 허나."
귀황파파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 역시 이제 구양천괄이 십대지군 중의 한 명임을 알고 사천극과의 숙명적인 대결을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귀황파파가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하다가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 힘없이 멀어져 가자 구양천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문득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할망구가! 그 어깨 좀 펴지 못해! 글쎄 걱정하지 말라니까, 연아를 시집보내기 전에는 안 죽을 테니."
귀황파파가 흠칫 걸음을 멈췄다.
허나 그녀는 끝내 구양천괄을 직시할 자신이 없는 듯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겨갔다.
사천극의 신형이 구양천괄 앞에 내려섰다.
"예(禮)가 늦었습니다. 천리목교에서의 은혜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천극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자 일순 구양천괄의 눈에 희미한 이채가 스쳤다.
"고마울거야 없네. 연아가 졸라서 간 것뿐이었으니까."
"......."
"그대 또한 시간이 별로 없을 테니 쓸데없는 예의는 집어치우고, 어서 빨리 할 일이나 하게. 짐작컨대 노부가 아마 십대지군 중 마지막 인물일 테니."
사천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허리에서 설빙혈을 뽑아 들었다.
"후배가 먼저 병장기를 뽑겠습니다."
구양천괄이 고개를 끄덕인 채 낚싯대를 물 속에서 꺼내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대치해 선 두 사람의 사이로 해풍(海風)이 스며들고, 그 순간, 사천극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쏴아!
설빙혈에서 무서운 검기가 회오리 쳤다.
삭!
구양천괄의 낚싯줄이 허공을 베어들었다.
단 일초식의 교환이었다.
허나 위치가 바뀌어 다시 암초 위로 내려서고 있는 사천극의 앞가슴 장포 자락이 이미 구양천괄의 낚싯바늘에 길게 찢겨져 있지 않은가?
"제가 졌습니다. 손속에 인정을 두어 주셔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사천극이 돌연 깊게 읍했다.
구양천괄의 눈에는 이 순간 놀람과 감탄이 어려 있었다.
미소! 그렇다. 사천극의 입가에 진정으로 맑은 미소가 떠올라 있지 않은가!
그 미소를 대한 구양천괄의 입가에서 알 수 없는 미소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고, 다음 순간 그는 짐짓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다. 네놈은 고의로 나의 낚시바늘에 걸려들었다."
"아닙니다. 노선배님의 초식이 워낙 빨라 피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제 후배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지하에 계신 아버님도 제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패배했다는 것을 아신다면 당신의 복수를 포기하는 저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구양천괄의 눈꼬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훗날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노선배님의 손녀를 데리러 올 것입니다."
구양천괄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허나 그는 오히려 호통을 치고 있었다.
"오지 마라! 네놈에게 연아를 줄 수는 없다. 이 늙은이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하는 놈에게 어떻게 귀중한 연아를 맡길 수 있겠느냐!"
"후후,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군요. 구양낭자에게 중원으로 도망 나오라고 하는 수밖에."
"엉?"
구양천괄이 짐짓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제기, 와라! 그놈이 가출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못난 손녀 사위가 오는 편이 낫겠지."
"후후."
사천극이 진정으로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오랫동안 구양천괄을 마주 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가 타고 왔던 소선은 암초에서 십여 장 떨어진 바다 위에 홀로 떠 있었고, 사천극은 소선 위로 가볍게 내려서 망망대해 저쪽으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이때 돌연 구양천괄이 암초 위에 무릎을 꿇으며 격동에 떨리는 음성을 흘려 내기 시작했다.
"궁, 궁주님."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사천극이 이 금와일백팔해주를 찾아온 것은 십대지군의 한 명인 구양천괄과의 관계를 매듭짓고 오히려 그의 고뇌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바다(海), 아득한 망망대해 저편으로 한 점으로 화해 사라져 가는 사천극의 모습은 황혼에 반사되는 해면(海面) 속에 환상 같기만 했다.
②
휘이이잉!
은백의 세계로 뒤덮인 차가운 대지(大地)에 삭풍(朔風)이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난분분하는 눈발과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드넓은 설원(雪原)의 정경은 고적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북해도(北海島).
천하에서 가장 추운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어느 누구든 이 땅이라고 답할 것이다.
중원과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만리이역의 변방.
사시사철 얼음과 눈(雪)으로 뒤덮여 있는 동토(凍土)의 땅이 바로 이곳이다. 북해도에는 항시 겨울이 있을 뿐 봄과 여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골수를 파고드는 삭풍과 인적을 거부하는 빙토(氷土)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선택받지 못한 버림받은 오지가 바로 북해도였다.
허나 이 북해도에도 봄(春)은 찾아 들고 있었다.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을 해빙시켜 주듯 조금씩 조금씩.
북해도의 여명(黎明).
참으로 오랜만에 눈(雪) 대신 조양이 빛나고 있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져 있는 설원 위로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는 조양의 햇살은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사박! 사박!
언제부터인가 한 쌍의 발자국이 끊임없이 북해도의 고적한 벌판 위를 밟고 있었다.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설원 위를 점점이 이어가고 있는 선명한 발자국은 묘한 고독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한 사내, 한없는 고독감을 몸 전체에서 풍겨 내면서 사나이는 끝없이 발자국을 남기며 설원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긴 흑발에 치렁한 흑포를 휘날리며 걷고 있는 사내.
그는 바로 사천극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심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이 순간 고적한 설원의 풍경과 어울려 묘한 일체감을 담고 있었다.
불현듯 사천극은 저 멀리 흐릿하게 드러나고 있는 깎아지른 듯한 빙봉(氷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음! 천척빙봉(千尺氷峰)! 어릴 때 무예를 연마하며 부모님이 그리울 때마다 올라갔던 곳이었지!"
아련한 감흥에 젖어 있는 음성이었다.
사천극의 독백처럼 마치 대자연의 위대함을 한껏 자랑하듯 지평선 저편에 천척빙봉은 여전히 변함없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사천극은 문득 허리를 굽혀 발밑의 눈을 한 움큼 집어들었다. 싸늘한 감각이 그의 손 끝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이 차가운 감촉, 역시 변함이 없구나. 사람은 모두가 변했는데 말이다."
사천극은 그 차가운 감촉을 음미하듯 움켜쥔 눈덩이로 지그시 두 눈 위를 쓰다듬었다. 바로 그 때였다.
"주군! 도대체, 어, 어딜 갔다 오셨읍니까? 무지무지 오래된 것 같은데!"
"그래. 우리는 무척 심심했다구요."
어리숙한 음성들이 별안간 들려 오더니 홀연 사천극의 주위로 네 사람이 환상처럼 솟아올랐다.
한결같이 장대한 체구에 마치 원숭이처럼 기괴한 용모를 가진 사 인의 백의인들, 바로 북극사천이 아니면 이렇듯 기괴한 용모를 가진 인물은 없다.
사천극은 이미 그들의 출현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 입가에 고소를 베어 물었다.
"후후, 너희들도 나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느냐?"
북극사천 중 남사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죽여요? 우리가 주군을?"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북귀를 돌아봤다.
"북귀야! 주군이 오랜만에 보니 미쳤다."
진정으로 근심스런 어조였다. 북귀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미쳐? 나는 모르겠다. 주군께 여쭤보자."
"그건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 미친 사람이 미쳤다고 하는 것 봤냐?"
어린애처럼 금세 북귀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주군이 미쳤을 때는 어떻게 하라고 주군께 배운 적이 없는데!"
남사의 표정이 확 찌푸러졌다.
"많이 곤란한데, 주군을 때려서 정신차리게 할 수는 없고!"
여전히 변함없는 북극사천의 어리숙한 행동에 사천극의 입가에 혼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역시 이들만은 진정한 나의 충복이다. 이들같이 순수한 인간들은 배신이라는 말은 모르는 법.'
사천극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농담한 것이다."
"예? 농담이 뭡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북귀의 말에 이어 남사가 두 눈을 빛내며 북귀를 향해 물었다.
"농담? 먹는 거냐?"
북귀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주군의 별호다."
이미 이런 식의 대화에 익숙해 있는 사천극이었는지라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자! 가자, 오랜만에 빙봉(氷峰)위에 올라가 보자꾸나."
사천극의 신형은 미끄러지듯 저 멀리 보이는 천척빙봉을 향해 쏘아 나갔다.
"흐, 좋습니다."
"좋지요."
북극사천도 이내 반색을 떠올리며 사천극의 뒤를 따랐다. 채 일각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천척빙봉의 앞에 다다랐다.
헌데 불현듯 사천극은 천척빙봉의 앞에 한 사람이 조용히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형을 정지시켰다.
길게 휘날리고 있는 눈부신 백염에 백발, 그리고 백미, 게다가 의관마저 새하얀 백삼으로 전신을 휘감고 있는 마치 노신선(老神仙)을 연상시키는 노인.
"학노!"
사천극의 입술 새로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렇다. 그 인물은 바로 빙결사 택희몽이었다. 잠시 조용히 사천극을 바라보던 택희몽의 얼굴에 자애로운 웃음이 떠올랐다.
"허허, 주군!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허허, 그렇구나. 학노! 우리는 영원히 다시 보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남사가 갑자기 복귀를 돌아보며 득의양양하게 외쳤다.
"그것봐! 내 말이 맞지 않느냐? 농담은 주군의 별호라니까, 저 늙은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느냐?"
복귀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모르겠다. 주군께 여쭤보자."
그때 사천극이 무거운 음성으로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학노! 길을 터라. 빙봉 위로 오르는 길이다."
택희몽의 고개가 미미하게 옆으로 흔들렸다.
"안됩니다. 빙봉에는 노성주께서 계십니다."
"알고 있다. 그러니 물러서라."
"안됩니다. 주군!"
사천극의 두 눈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게 침착했다.
그것은 마치 살인 직전의 평정과도 같은 그런 고요함이었다.
"하면, 너는 죽는다."
"어려우실 겁니다."
"어렵지 않아!"
단정하듯 사천극의 말이 끊기면서 그의 입가에 초생달 형태의 단정한 파장이 일었다.
그는 느낀 것이다. 사천극의 전신에서 소리 없이 번져 나오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살기를!
그의 눈자위가 희미하게 경련하고 그때 사천극의 조용한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학노! 네가 소소예전의 후예로서 북극성에 잠입, 선친과 사이가 나쁘던 사부를 충동질해 음모를 꾸민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죽이기는 쉽다."
택희몽의 얼굴이 굳어졌다.
"또한, 네가 전일 본좌를 베지 않은 것은 혹여라도 사부에게 원망의 소리를 들을까봐였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택희몽은 한차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전자는 긍정합니다. 허나, 후자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속하가 주군께 정(情)이 들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사천극은 무심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자를 인정한 것만으로도 네가 죽을 이유는 충분하다. 사천(四天)!"
사천극의 싸늘한 외침에 북극사천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예! 주군"
"부르셨읍니까. 주군!"
사천극의 시선이 조용히 학노를 가리켰다.
"저 자를 죽여라."
"천명!"
북극사천은 동시에 우렁차게 외친 뒤 신속히 택희몽을 향해 돌아섰다. 택희몽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속하의 청이 있습니다. 주군께서 직접 손을 쓰시지요."
허나 사천극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천천히 등을 돌렸다.
"들어줄 수 없다. 본좌는 내가 믿던 자에게 살수를 베풀고 싶지는 않아!"
그때 그의 등 뒤로 남사와 북귀의 살기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흐훗, 늙은이! 옛날부터 고까왔다. 특히 우리보다 주군과 더 친한 척 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맞아. 나도 그랬어."
다음 순간 요란한 폭발음과 굉음이 사천극의 등 뒤로 울려퍼졌다. 어느 틈에 북극사천과 택희몽이 어울려 치열한 생사박투가 시작된 것이다.
허나 사천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빙봉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연신 북극사천의 공격을 받으면서 택희몽이 나지막한 외침을 터뜨렸다.
"주군! 한 마디만은 대답해 주십시요."
빙봉을 걸어 올라가던 사천극의 신형이 멈춰졌다.
"좋아."
여전히 등은 돌린 상태였다. 택희몽이 다시 외쳤다.
"주군께서 지하무림의 제군이 되신 후 일단 은퇴하셨다가 다시 강호에 회귀(回歸)하시기까지는 삼 년이 걸리셨습니다. 그 삼 년 동안 어디에 계셨던 것입니까?"
"만화대루에 있었다!"
택희몽은 계속되는 북극사천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불신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삼 개월에 하루, 육 개월에 이틀 정도씩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군께서는 만화대루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사천극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부인하지 않겠다."
택희몽이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떨리는 음성으로 재차 물어 왔다.
"혹, 혹시 지금까지 주군의 주위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주군께서 출생의 비밀을 캐고자 스스로 음모를 꾸미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우, 우리는 모두 제 풀에 놀라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주군께서 짜 놓은 철저한 각본대로 말입니다. 주군?"
"네 질문은 이미 열 마디가 넘고 있다."
순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북극사천의 공세 속에서 택희몽은 부르르 전신을 떨어야만 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마음 속에서 설마 하고 부인해 왔던 모든 일들이 거의 확연한 사실로 변해 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무, 무서운! 정녕 무서운 분이다. 자신의 죽음을 걸고 어떻게 그런 연극을 철두철미하게?"
아! 택희몽의 독백,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삼 년 동안의 공백은 분명 확실치 않은 세월이었다.
사천극의 삼 년 동안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출생에 대한 무엇인가를 알고 모든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삼 년 동안 수많은 근거를 수집하면서 역반전의 음모를 꾸민 것이었단 말인가?
오오! 그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③
천척빙봉.
하늘에는 뜨거운 태양, 그 아래에는 은색의 광활한 동토(凍土), 천 년을 두고 녹지 않은 만년빙과 만 년을 두고 녹아 본 적이 없는 만년설과 살을 에이는 지독한 한풍만이 존재하는 이 설원 가운데 엄청난 빙봉이 솟아 있었다.
마치 한 자루의 검을 거꾸로 박아 놓은 듯한 형상의 빙봉은 바로 사천극이 어린 시절 부모의 정을 그리며 미친 듯 기어올랐던 그 빙봉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일까?
그 아득한 정상 위에 청수한 용모의 청의중년인이 신선 같은 기태로 우뚝 서 있었다.
빙봉 위의 한풍은 칼처럼 차고 폭풍처럼 거세었다.
허나 청의중년인은 한기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언제까지나 망연히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보기에는 사십대에 불과할 듯 보이나 이미 일백여 세가 넘은 북극의 절대자 북극한황 채리소소였다.
백마원주를 단숨에 해치울 수 있었던 엄청난 강자!
허나 지금 이 순간의 그에게서는 놀랍게도 강자다운 면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인생을 다 살아 버린 사람의 그것 같은 회한과 허탈만이 감돌고 있다고나 할까?
문득 그의 뒤쪽에 한 흑영이 내려섰다.
그 아득한 빙봉 위를 호흡조차 거칠어지지 않은 채 오른 인물은 바로 사천극이었다.
"극아가 왔느냐?"
"예, 사부님!"
"나는 언젠가 옥아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네놈이 음모를 꾸민다면 네 자신조차 속이고 사해팔황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나의 그 판단은 정확했던 것 같다."
사천극은 내내 침묵했다. 그의 표정은 무감정했다.
그의 표정은 오히려 너무도 평온해 숙명의 대결을 위해 채리소소를 찾아온 사람답지 않게 온유하기까지 했다.
"멋진 음모였다. 이천여 년간이나 비밀에 가려져 모르고 있던 천궁의 실체가 드러나고, 너는 그 천궁의 십대지군들을 모조리 파헤쳐 산산이 부셔 버린 것이다. 십대지군들은 이천 년간이나 신분을 속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그 음모에 모조리 드러나 버린 것이다."
채리소소의 음성은 허탈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의 음성에는 역시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았으나 사천극의 무감정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죽었던 이 사부조차 살아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멋진 음모였던 것이다."
사천극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열리며 저미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제자는 음모를 꾸민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냐?"
채리소소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다. 그렇다면 네게 한 가지만 묻겠다."
사천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부가 백마사원에서 백마원주 서문차를 죽이고 바로 너의 앞 길을 막지 않은 이유를 아느냐?"
사천극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후후, 나는 이미 네게 질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문차를 죽인 직후에야 그 모든 것이 이미 너의 안배대로 된 것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자는 모르겠습니다."
"후후후, 네가 그것을 부인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우연이 겹쳤다."
채리소소가 허탈에 젖은 긴 웃음을 흘려 냈다.
다음 순간 그는 몸을 돌려 사천극을 직시했다. 이글거리는 눈빛, 조롱 당한 야수의 눈빛 같은 무서운 눈이었다.
"우연들, 너무도 많은 우연들이 네게 겹쳤고, 그리고 너는 아주 자연스럽게 너의 출신내력을 알게 된 듯했다. 허나."
나직했지만 단호한 음성이었다.
"네가 강호에 재출도하자 마자 봉수주가 너에게 살인을 청부하고, 그 순간 백마원주가 너에게 도전하며 끌어들이고, 또한 십대지군들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서둘러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고, 네가 죽을 때쯤 되자 천동과 지부의 기연이 네 앞에 나타났다. 이 모든 우연들이 너무도 잘 짜여져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 하나만 네 입으로 설명해 다오."
그는 사천극의 눈을 쏘아보았다.
"네가 삼 년 전 강호에 재출도할 때만 해도 너의 무공은 오히려 이 사부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가 않았다. 사실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저의 무공은 사부님에 비해 두 수 정도 아래였습니다."
"후후, 그래서 백마십층설왕봉을 오르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게냐?"
"그렇습니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부가 어찌 죽였다고 하고 폐관에 들어 갔겠느냐."
채리소소의 표정이 보기에 무서울 정도로 굳어졌다.
"네 놈은 너무도 철저했다. 무공조차 감추며 삼 년의 공백을 이용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조사해 음모를 꾸며 놓은 것이다."
"제자는 음모를 꾸민 적이 없습니다."
"들어라! 너는 그 이후 스스로 펼쳐 놓은 그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날 수 있는 자신이 있고 그렇게 해야만 모든 비밀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에 너는 그렇게 한 것이다."
이때 침묵을 지키던 사천극이 역시 무감정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제자도 한 가지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사부께서는 왜 제 아버님을 죽이셨읍니까?"
"으음."
일순 채리소소의 눈에 곤혹의 빛이 스쳤다.
허나 잠시후 그는 허탈해진 눈빛으로 오히려 반문했다.
"너는 이 사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단지 저를 길러 주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랬겠지. 그 일은 십대지군들조차 모르고 있던 일이니, 이 사부는 바로 너의 외조부이다."
"외조부?"
사천극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그 때문에 너와 옥아가 혼인하려는 것을 장로원을 통해 말리려 했던 것이다. 옥아와 너는 같은 피를 이은 사촌간인 것이다."
"아! 헌데 왜 아버님을?"
사천극이 망연히 질문을 던졌다.
"그 이유는 네 아버지 되는 자가 너무도 파렴치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사천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채리소소가 말했다.
"너의 모친이자 나의 딸인 그 아이는 원래 정혼자가 있는 아이였다. 헌데 어느 날 네 부친이 그 아이를 강제로 범했고 그 아이는 너를 낳은 후 자결했다."
천천히 입을 열고 있는 채리소소의 신형이 흔들렸다.
사천극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궁주의 직위를 이용해 그런 인면수심의 죄를 범한 네 부친을 자결한 그 아이의 부친으로서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느냐!"
"으음."
채리소소가 더욱 허탈한 눈으로 사천극을 직시했다.
"이제 너는 모든 것을 알았다. 노부를 어찌 하겠느냐?"
사천극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평정을 회복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의 입에서 음성이 흘러나왔을 때 쯤엔 그의 얼굴은 완전히 원래의 표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제게 돌아가셨던 사부이자 외조부이셨던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 하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놈, 나를 살려 두겠다는 것이냐?"
"저를 길러 주신 분이십니다."
"으음."
채리소소의 몸이 다시 격동으로 흔들렸다.
사천극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독백처럼 같은 내용의 말만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제자는, 음모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음모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휘이이잉,
천척빙봉을 휘감은 한풍은 더할 나위없이 차가웠다.
- 제자는, 음모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④
만추(晩秋), 만산(萬山)은 홍엽으로 물들고 만물(萬物)은 풍요롭기만 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이 가을의 저녁은 실로 대하는 이로 하여금 두고 온 고향을 생각나게 만드는 풍광이었다.
남해 회한구(悔閒口).
남해에 인접해 있는 자그마한 항구 쪽의 바닷가에 언제부터인가 땅거미가 내리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뛰어 놀고 있는 소동들이 있었다.
대략 삼사십 명?
소동들의 표정은 밝았다.
두 패로 나뉘어 기마전(騎馬戰)을 하고 있는 소동들에게서는 실로 순박한 동심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와아! 청군의 대장이 무너졌다. 우리가 이겼다!"
"와아!"
바닷가의 모래사장에서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그 바다 위로 깃들고 있는 황혼. 실로 평화롭다고나 할까?
헌데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는 백사장의 한쪽에 언제부터인가 이십대 후반의 흑의미공자 한 명이 부드러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그의 앞에는 한 폭의 화구(畵具)가 펼쳐져 있었고, 예의 화구에는 지금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이 실물처럼 생생하게 옮겨지고 있었다. 바로 사천극이 아닌가?
사천극의 좌측에는 또 한 폭의 화구가 세워져 있었다.
그 화구 앞에는 대략 십 이삼 세 가량 된 소동이 앉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문득 사천극의 눈이 바로 옆에 함께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동을 응시했다.
"후후, 화아야, 잘 되지 않느냐?"
"에이! 뭐가 이렇게 잘 되지 않지! 원주아버님은 저렇게 잘 그리는데."
화아라고 불리운 소동이 힐끔 사천극이 그린 그림을 보며 투덜거렸다.
"후후, 화예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 것이란다."
사천극이 얼굴에 온통 먹물을 묻힌 채 투덜거리는 소동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소동이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형아들이 기마전을 하면서 계속 움직이니까 마음이 잘 안정되지 않는단 말이야. 대상(對象)이 자꾸 움직이니 내 실력으로는 빨리 그릴 수가 없어."
"후후, 그래도 인내를 갖고 그려보렴."
"알았어!"
소동은 시무룩해져 대꾸한 후 다시 전면을 바라보며 붓을 들었다. 허나 기마전은 이미 끝나 있었고 이긴 편의 대장인 듯한 소년 한 명이 사천극과 소동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화야야! 어때, 이번에는 잘 그렸냐?"
"뭐야! 벌써 끝난 거야?"
소동이 소리쳤다. 비록 신경질적인 말투였으나 그 태도 또한 귀엽기 이를데 없었다.
"아니 벌써 끝나면 어떻게 해! 나는 아직 반도 그리지 못했단 말이야."
"그, 그럼 또 기마전을 할까?"
"그래! 어서 기마전을 또 해!"
"화, 화아야, 하지만 벌써 너 때문에 우리는 삼 일간 백 번도 넘는 기마전을 하고 있어. 이제는 재미도 없고 힘만 든단 말이야."
소년이 짐짓 울상을 지었다.
허나 소동은 막무가내였다.
"그럼 형아는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거야?"
"약, 약속은 지키려고 하는데, 네가 이렇게 늦게 오랫동안 그릴 줄 누가 알았냐!"
"치이!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내가 기마전도(騎馬戰圖)를 완성시킬 때까지 형들은 기마전을 해야 돼!"
"어이쿠!"
소년이 두 손을 내흔들었다.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후후, 놈들! 기마전도를 멋지게 그려 준다는 화아의 말에 그림이 끝날 때까지 기마전을 하기로 약속해 놓고 아주 곤욕을 치루는군!'
소년과 소동이 다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천극이 내심 미소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여유롭고 한가하며 평화스러워 보여 과거 어둠의 제황이었던 제군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망망대해 저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황혼에 눈을 주고 있던 사천극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득한 백사장의 저쪽에 한 흑영이 나타나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전신에 짙은 흑의를 걸친 흑의인의 걸음은 무척 빨라 순식간에 사천극 앞으로 가까워져 왔다.
전신에서 흐르는 죽음의 기도, 허나 예의 흑영은 사천극의 삼장 전면에 이르자 더할나위없이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제군! 속하 능발입니다."
"ㅋ! 능발! 이제 제군은 네가 아니더냐. 나는 이미 그 자리를 네게 물려준지 이 년이 지났다. 아직도 나를 제군이라고 부를 셈이냐!"
사천극 앞에 나타난 흑영, 그는 바로 팔야경의 대좌령 연능발이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가 새로운 제군으로 등극했단 말인가!
사천극의 말에 의하면 바로 그가 지하무림의 새로운 제군으로 등극한 것이 벌써 이 년 전이라는 뜻이 아닌가!
문득 연능발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군, 지하무림에 난제(難題)가 발생했습니다."
"그곳의 일은 이제 내 관할이 아니다. 모든 일은 네가 처리해야 함이다."
사천극이 차갑게 내뱉았다.
연능발의 눈에 당황과 조급해 하는 빛이 함께 어우러졌다.
"제군! 속하 연능발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군을 찾아왔습니다. 고견을 들어 주십시요."
사천극이 잠시 침묵했다.
잠시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능발, 지난 시절 모든 지하무림이 그 자신을 배신했을 때 그 혼자만이 사천극을 위해 죽음도 불사한 채 도와주지 않았던가. 해서 그에게 지하무림의 제군의 위를 물려준 사천극이었다.
"말하라!"
사천극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연능발은 다소 안도의 빛을 드러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기실 속하는 팔야경의 소속이었습니다."
"그랬지"
"허나 제가 제군으로 오르기 전만 해도 저는 팔야경의 총수는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다. 너희 사형인 선가가 바로 팔야경의 지존이었지."
"예! 해서 사실 사형은 제가 지하무림 전체를 다스리는 제군의 위에 오른 것에 내심 불만을 지니고 있는 듯 합니다."
"호,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헌데 그가 언제부터인가 그 불만을 불만으로만 갖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 합니다."
"행동으로? 그렇다면 그가 너를 죽이고 제군의 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야?"
"증거는 없습니다. 원래 사형은 저보다 심기가 깊고 무공 또한 뛰어나 일단 무슨 일을 계획하면 절대 증거를 내보일 사람이 아닙니다."
"...!"
"오늘날의 팔야경은 사형께서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사람의 능력은 뛰어납니다. 그런 사형이 저를 향해 죽음의 덫을 치고 있다면, 저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흠! 쉽지 않은 문제이군."
"예! 물론 제군의 위엄에 도전한 증거가 확보되면 그를 처단할 수도 있으나 먼저 증거를 찾을 수 없는 데다가 그렇게 되면 내가 사형에게 불안을 느껴 먼저 그를 친게 되어 지하무림의 질서가 염려됩니다."
"그렇지. 집안싸움을 하게 되면 제군의 신위가 떨어지게 되지."
사천극은 오랫동안 망망대해를 직시했다.
해는 이미 완전히 저물어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잠시후 그의 입이 열렸다.
"확실히 난제로군. 소리 없이 그의 손에 제거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먼저 그를 치자니 제군의 위엄을 잃는 일이 되고, 더구나 정면 대결하기에는 무공도 약하니 참으로 어려운 문제로군."
"그렇습니다. 제군. 허나 무공만이 문제라면 중경의 팔야경 총단에 역대 조사들께서 남겨 놓으신 비급이 있어 그것을 익힌다면 사형을 꺾을 수는 있습니다."
이때 돌연 사천극의 눈빛이 굳어졌다.
"연능발!"
"예, 제군."
"너는 본좌의 후예로서 제군의 위엄을 이미 잃었다."
"예?"
사천극의 얼굴이 굳어지자 연능발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사천극의 싸늘하면서도 절제된 음성이 이어졌다.
"본좌는 네게 그따위 음모에 희생되라고 지하무림을 맡기지는 않았다."
"그, 그렇습니다. 제군!"
"본좌는 지하무림의 전대 제군으로서 네게 명한다."
"천명!"
연능발이 황급히 모래사장에 이마를 박았다.
사천극의 음성이 천천히 이어졌다.
"네게 두 달의 기한을 주겠다. 그 동안 너는 천하의 어떤 곳으로 도망가도 좋다. 허나, 두 달 뒤부터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추적할 것이다."
"제, 제군!"
"물론 너는 사천 중경에서 죽게 될 것이다. 본좌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때 모든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너의 사형에 의해."
'......?'
일시지간 연능발의 눈에 짙은 의혹이 어렸다.
무엇인가 알 듯 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닌가.
허나 다음 순간 그는 사천극의 말이 뜻하는 의미를 깨닫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함정에 빠져 그의 음모를 드러내게 해 후일 정당한 명분으로 그를 칠 수 있게 하시라는......."
"나는 그런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두 달 뒤부터 너를 죽이기 위해 추적할 뿐이다."
"제, 제군 감사합니다."
연능발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사천극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허나 그 뒤에 숨어 있는 역음모(逆陰謀)는 너무도 절묘해 연능발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책(奇策)이었던 것이다.
"가라!"
"예, 그럼."
연능발이 몸을 돌렸다.
이제부터 그는 긴 도주의 길에 오르게 된다.
연능발이 사라지고 난 빈 모래사장을 바라보며 사천극이 나직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둠의 음성이었다.
"연능발, 지금으로부터 얼마전, 그대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출신내력에 한가닥 의혹을 품게 되었었지."
음성은 계속되었다.
"허나, 그는 자신의 출신내력을 알게 되자 끝없는 추격을 받았고, 그리고 죽음 가운데 다시 태어나 떳떳한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연능발, 너 역시 본인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네가 제군의 위를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의 사형인 선가 역시 너를 추적해 너를 죽일 것이다. 허나, 너는 다시 태어나 떳떳이 그를 제거할 수 있다.
아아! 무슨 뜻이란 말인가?
연능발의 지금 상황이 과거 사천극이 겪은 상황과 비슷하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 해결책 역시 사천극이 한 것처럼 해야 한다고 암시하고 있는 사천극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과연 자신의 출신내력과 부모의 원수를 알아내기 위해 처절한 음모를 전개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오 년 전의 일이었다.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부모를 모르는 고아의 신분인 것이 싫어 어둠의 제황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출신내력의 엄청난 비밀을 뜻하지 않게 우연히 알게 되고, 그날부터 그 비밀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하나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니,
음모! 침묵의 율법으로 가로막혀 있고, 천하의 모든 인물들이 그의 주변에서 그 비밀을 가리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그의 음모는 당연히 치밀해야만 했다.
삼 년(三年)! 그 사내가 음모를 완성하는 데에는 삼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삼 년은 사내에게는 무척이나 지루하고 고독한 세월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제군이었다.
- 대미(大尾) -
첫댓글 잼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잘 보았습니다. 감사.
고맙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