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했던 옥한흠 목사
신학교 동기생이었던 홍정길 목사는 옥한흠(1938-2010)을 평하길, “옥 목사님은 문자 그대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한눈팔지 않았다. 그분 말대로 서초동에 땅 속 깊이 움막을 파고 카타콤(교회 본당이 지하에 있었기에)과 같은 것을 지어 밖으로도 나오지 않은 채 교인들을 훈련시키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한, 탁월한 훈련자였다.” 라고 하였다. 그는 한 영혼 철학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훈련을 통해 교회의 기둥같은 일꾼들을 세우기 위해 몸부림쳤던 목회자이며, 조련사였다. 그런 면에서 그는 엄격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매우 따뜻한 인간미도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런 그의 삶을 목회라는 관점을 가지고 부흥과 연관시켜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의 생애
그는 경남 거제도 시골에서 1938년 12월 5일, 아버지 옥약슬과 어머니 이희순 권사의 슬하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신앙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깊이 받은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잘 보이지 않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였다. 우리는 그의 회심사건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사경회에 갔다가 그곳에서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에 접어들 무렵 내게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머니를 따라 당시에 유행하던 사경회란 사경회는 다 쫓아다니던 어느 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뜨겁고 강력하게 어린 나의 가슴으로 부딪혀 온 것이다. 소위 구원의 감격을 맛본 사건이었다.”
그 후 그는 성경에 심취하여 성경이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면서 감격적인 삶을 살았고, 주위의 어른들이 그에게 목사가 되라고 권면하였지만, 그는 신학교는 가기 싫었다. 이유는 목회자의 삶이 가난하였기에 자신이 목사가 되면 가족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평신도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던 중 해군사관학교에 지원서를 냈지만, 고혈압이라는 판정을 받아 낙방하여 결국은 부산의 고려신학교에 2년을 다니다가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군대에서 대학입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성균관대학교 야간 영문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군복무와 학업을 동시에 병행하면서 폐결핵에 감염되어 고생을 하였다. 그의 대학생활은 낭만과 꿈이 아닌 고통 그 자체, 사망의 골짜기였다.
“지금도 대학시절하면 두 가지만 유달리 기억에 떠오른다. 5년간의 처절한 투병 생활, 그리고 그 사망의 골짜기에서 만나게 되었던 아내이다.”
그가 대학을 어렵게 졸업하고 총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가 다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과 인간적으로는 그의 내면 깊은 곳에 목사가 되고자 하는 미련이 있었기 때문일 게다. 당시 총회신학교는 기라성 같은 교수진들, 박형룡, 박윤선, 간하배, 김의환, 명신홍, 최의원 박사 등이 포진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강의는 단순한 이론이 아닌 말씀이 육화된 학문이었고, 그들의 인격과 삶에 배어 있는 신학이었다고 옥한흠은 술회하였다.
신학교를 졸업 후, 옥한흠은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칼빈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는데, 제자훈련의 노하우를 미국에서 배워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부하는 동안, 그는 이론적인 학업에 실망 하였고, 칼빈신학교를 졸업 한 후 이어서 필라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옮겨 그곳에서 목회학 박사과정을 공부하였다. 여기서도 그가 원하는 제자훈련에 관한 실제적인 공부를 접할 수 없었고, 급기야 그는 모든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목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의 사역
그가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처음 사역한 곳은 신학교 1학년 때 은평교회(당시 배기주 목사)에서 주일학교(유년부, 학생부)를 맡아 담당하여 크게 부흥시켰지만, 한 장로와 불화로 사임하고, 성도교회(당시 김희보 목사)로 임지를 옮겨 대학부를 담당하였다. 이때 그는 제자훈련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당시 그 교회의 대학부 회원으로서 출석하는 인원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서울 공대 1학년생으로서 방선기였다. 옥한흠은 그를 통해 대학교 내의 선교단체에 대한 자료와 방법을 배우고, 방선기가 데리고 온 5명의 친구들과 제자훈련을 시작하여 1년간 집중하였더니 나중에는 재적인원 350명(출석인원은 200명)까지 늘어났고, 그들이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제자훈련의 위력을 발견하였고, 이 방법을 더욱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유학시절에도 한인교회를 목회하였지만,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아마 짧은 기간 동안 공부에만 전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유학생활를 모두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그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하나는 기존교회에 부임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개척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청빙 받길 원했지만, 기존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도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탓에 제자훈련을 위해서 그는 개척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때가 1978년 월 중순경이었으며, 강남 반도 유스호스텔 앞 3층 짜리 건물, 2층 40평을 얻어 개척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같은 해 7월 28일 이었다. 이때 교회 이름은 <강남은평교회>였다. 그리고 이후에 <사랑의교회>라고 개명되었던 것.
이런 배경에서 <사랑의교회>는 출발되었는데, 목회에 가장 중요한 골격은 제자훈련이었다. 교회가 개척예배를 드릴 때, 옥한흠 목사는 본인이 설교를 하였는데, 제목은 “왜 이 교회를?”이었고, 사랑의교회의 모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서 찾아야 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예수님의 사역이 보여 준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기능은 바로 사랑의교회가 꾸준히 추구해야 할 기능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을 목자 잃은 양으로 보시고 가슴 아파하시며 그들을 위해 일할 일꾼을 찾으신 것처럼 사랑의교회는 세상으로 보냄 받은 소명자로서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목회의 비전을 두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제 사랑의교회의 사역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 게다.
한편, 그의 삶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은데, 하나는 과거 목회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가정보다는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목회자였다. 그 이유는 가정적인 영향도 있었고, 청교도적인 신학사상 때문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나중에 신학을 하면서 안 일이지만 교회에서 어릴 때부터 나도 모르게 받은 청교도적 신학사상이 나에게 더욱 가정보다 교회가 우선이라는 일방적인 생각을 가지게 한 것 같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예수를 위하여 가정을 포기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가야 한다는 가르침에 지나치게 심취해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가정은 목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교역자들에게는 가정목회를 잘 하라는 가르침을 시간 있을 때마다 주시곤 하였다. 그가 가정을 소홀히 여겼던 것은 그의 맏아들, 옥성호 형제의 고백 속에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그는 아버지와 함께 여행이나 소풍을 갔던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아버지는 영원히 실종된 존재이다.”라고 했다. 그만큼 아버지 옥한흠은 늘 교회사역에 늘 분주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음을 후에는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인간 옥한흠의 삶은 매우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필자의 동료가 옥한흠 목사의 집에 갔을 때, 아주 오래된 소파를 보고, 느끼는 것이 참 많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검소한 삶이 몸에 배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역자 회의 시간에도 물, 전기절약에 대해서 가르쳤으며, 실제로 불필요한 전기는 직접 소등하기도 하고, 물은 마실 만큼만 받아 마시고, 컴퓨터 역시 사용치 않을 때는 반드시 꺼 놓으라고 귀가 달토록 잔소리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삶과 직결되는 설교였다. 결코 이론만을 가지고 청중들에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실천하고 설교했으며, 혹은 설교한 것은 자신이 행하도록 무던히도 노력하였던 목회자였다.
사역의 특징
박용규는 그의 책에서 초창기 사랑의교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는 형식적인 특에서 벗어난 예배였다. 사랑의교회의 예배좌석은 원형으로 짜여 져 있었고, 주일저녁 예배에는 복음성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둘째는 직설적인 메시지였다. 즉 설교는 철학적이며 심미적인 내용을 담지 않고 원색적인 복음을 전했다. 셋째는 평신도를 깨우는 작업을 초창기 설교와 예배를 통해 시도하였다. 그리고 목회비전은 “평신도 훈련, 젊은이 선교, 공산권 선교”로 정했다. 하지만 이는 자료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지 사랑의교회와 옥한흠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진 못했다. 교회는 처음부터 완벽한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고, 점차로 그 조직과 제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사랑의교회의 특징은 목회자인 옥한흠의 목회비전 및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옥한흠의 목회철학의 핵심은 그의 <광인론>에 있었는데, 이는 “한 영혼 철학”으로 압축할 수 있다. 즉 한 영혼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우는 평신도 운동인데, 이 사역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제자훈련>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목회학 박사 논문으로 제출한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저서에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바로 제자훈련에 기초한 목회비전은 좀 더 확대 수정되어 오늘날에는 1)민족을 치유하는 섬김공동체 2)제자를 재생산하는 훈련공동체 3)세계선교를 마무리하는 연합공동체 4)다음세대를 책임지는 비전공동체 5)사회를 변혁하는 정감공동체 로 정했다.
옥한흠 목사는 언제나 교회의 비전과 철학에 근거한 사역을 유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 사역의 기본은 언제나 제자훈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여기서 가르치고, 치유하고, 전파하는 사역을 실천한 것이다. 2003년 8월, 사랑의교회를 65세에 조기은퇴 한 후에, 그 바톤을 남가주사랑의교회를 섬겼던 오정현 목사가 이어 받아 목회하고 있다. 두 지도자는 동일할 수 없지만, 옥한흠은 유학직후 내수동교회 수련회에서 만난 오정현을 오랜 세월동안 눈여겨 지켜봐왔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후임자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오정현 목사는 전임목회자의 정신을 이어 받아 여전히 제자훈련을 골격으로 하는 목회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겠다.
옥한흠의 부흥사역
그렇다면, 옥한흠 목사는 사역하는 가운데 그의 부흥관은 무엇이며, 어떤 부흥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우선, 그의 부흥관을 이해하기 위해선 제자훈련 교재를 중심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교재는 그가 가르쳤던 교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장로교 배경을 가졌고, 그런 신학적 배경을 가진 학교에서 공부했기에 정통 칼빈주의 신학을 지지한다. 예컨대, 그는 칭의에 대해 말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어떤 의가 조건이 되어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의로운 데가 하나도 없는 자를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그는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얻는 것이요, 또한 성령세례 역시 마찬가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중생에는 어떤 특별한 체험이 필요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바로 칼빈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그의 교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통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노선에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교재가운데 한 가지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부분으로서 그는 예수를 믿어도 변하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훈련하기 위해 교재 3권을 활용하고 있다. 이 부분이 바로 그가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목회자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훈련교재 3권의 주제는 “작은 예수가 되라”는 것. 그 내용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인 “순종의 생활” “봉사의 의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활”을 비롯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신앙 인격의 연단” “청지기직” 등 대사회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완벽한 주제를 다루고 있진 않고, 앞으로 더 보완할 과제가 있다 하겠다.
부흥은 성령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의 성령론 역시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다. 성령세례를 설명할 때, 그는 “우리가 믿기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 그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이어서 그는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 받은 절대적인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령을 받으면 반드시 방언을 하며, 방언을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지나친 주장이다.” 이는 아마 순복음 교회의 신학을 염두 해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역동적인 은사를 강조하진 않으며, 오히려 내주 하시는 성령을 강조한다. “성령을 모신 자는 성령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부흥과 관련하여 영적대각성 운동에 대해 언급되어야 한다. 그가 목회하면서 일 년에 1회, <영적대각성 전도집회>를 했다. 이 운동의 목적은 두 가지, 하나는 기존 성도들의 심령을 다시 영적으로 강하게 회복하는 것, 다른 하나는 아직 불신세계에 있는 자들을 전도하는 사역이었다. 사실 옥한흠은 처음부터 이 운동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사랑의교회도 처음에는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처음 부흥회는 1980년 9월 이었다. 하지만 사랑의교회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강사의 전형적인 메시지와 권위주의적인 스타일이 교인들과 맞지 않았고, 이로 인해 더 이상 부흥회는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나온 프로그램이 바로 영적대각성 전도집회였다. 이 집회로 인해 사랑의교회는 매년 천 명씩 성장하는 놀라운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옥한흠 목사의 설교와 제자훈련, 그리고 영적대각성 전도집회를 통한 시너지를 통해 성장하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그는 너무 과로한 나머지 1989년 후반기에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어느 날 수요예배를 마치고 응급실로 가서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갑상선 종기로 판명되어 수술한 후에 어쩔 수 없이 교회로부터 1년 정도 안식년을 교회로부터 받아 하와이에서 휴양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로 하여금 다시 재충전할 수 있는 부흥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강단으로 돌아와 주일설교는 로마서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설교는 교인들뿐만 아니라 옥한흠 목사도 기억에 남는 복음 중심의 설교였으며, 교회가 영적으로 더욱 부흥할 수 있는 설교였다.
“로마서 강해를 끝낸 지 5년이 넘은 지금도 나는 아직 그 일 년 반 동안 받은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다. 육체적으로는 정말 약했지만, 복음의 감격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십자가의 샘 곁에서 진정 감함이 무엇인가를 자주 체험하였다. 나의 영적 침체를 유발하는 숨은 뿌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한때 그렇게도 황홀했던 구원의 감격을 잊어버린 데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축복이었다... 설교를 마칠 즈음이 되면 시간마다 나는 메시지 내용과 일치하는 찬송을 선정하여 불렀다. 짧으면 10분, 길면 20분 넘게 우리는 열정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였다.”
이때 교회는 영적 부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한 단계 더 영적으로 도약하게 되어 집회 인원은 계속 증가하였고, 사역은 놀랍게 확장되었다. 당시 필자는 다른 교회를 섬기면서 그의 로마서 강해설교를 듣기 위해 매주 1부 예배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쳤는데, 이는 사랑의교회 모든 교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이 후 평신도 지도자들은 매년 수 백 명씩 배출되었고, 매년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교회에 등록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가 경험한 놀라운 부흥의 사건이었다.
삶의 마무리
그의 사역은 여기서 점차 확장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성장하였지만, 교단은 금권정치로 인해 섞어가고 있었을 때, 합동측 개혁적 성향을 가진 목사들 중심으로 <교회갱신목회자협의회>를 만들어 교단을 정화하고자 하였고, 범교단적 차원에서는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를 조직하여 한국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데 앞장섰다. 게다가 중국 조선족들과 한족들을 위한 <연변과기대>를 비롯하여 <평양과기대>를 후원하는 일 또한 그가 담당할 몫이 되었다. 그는 과연 힘이 붙이도록 사역하였으며, 정년을 5년 앞두고, 자신의 리더쉽을 좀 더 젊은 목회자에게 이양하는 계획을 세워 진행시켰는데, 그가 바로 당시 남가주사랑의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오정현 목사였다.
하지만, 그가 은퇴하고 자신의 평생사역으로 삼은 <국제제자훈련원>사역을 중심으로 국내,외적으로 사역하고 있었을 때, 대학교 시절 폐결핵을 앓았는데, 이것이 폐암으로 재발되어 다시 병원에 입원하여야만 했다. 의사는 다시 수술하고자 권면했으나 “이 나이에 수술하여 몇 년 더 살자고 생명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내가 지금까지 설교한 대로 주님 계신 영광스런 천국에 가길 원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온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한 후 중환자실에서 2010년 9월 2일, 72세의 일기로 천성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안성수양관 양지 바른 곳에 모셨다. 좀 아쉬운 나이지만, 그는 이 땅에서의 모든 사명을 다 감당하시고 꿈에도 그리던 영광스런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하실 것이니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옥한흠 목사가 중환자실 병상에 있을 때, 장남 성호 형제가 국민일보 기자에게 보낸 이멜 내용을 인터넷에서 읽으면서 가슴 뭉클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인 옥한흠에 대한 변호, 느낌을 적어 기자에게 보낸 것이다. 내용을 보니 아들이 목회자인 아버지를 무척 이해하고자 하는 느낌이었고,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아들의 모습을 담았다. 특히, 병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아직 사명이 있으면 살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천국으로 가신다는 그의 결연한 의지, 그리고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깊이, 넓이를 모두 설교치 못해서 “성도들에게 미안하다.” “성도들에게 감사하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옥한흠 목사는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며 말하길,
“이제는 정말 사랑하는 예수님이 보고 싶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참 많다. 그의 장례식 위로예배에서 K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C목사는 설교에서 말하길, “자신이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 보이지 않게 고인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참 많은 도움을 주셨다.”라고 하였을 때, 조객들의 마음의 심금을 울리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사랑의교회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 어느 해 년 말에 제법 큰돈을 내미시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했다. 그 분이 얼마나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챙기시는 분이신지를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일 어느 날, 장애우들이 화장실 사용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주간에 교회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화장실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에피소드는 어느 정도 오래토록 사랑의교회를 다닌 교인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옥한흠 목사는 이 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있었을 때, 태어나 625전쟁의 폐허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를 위해 준비된 귀한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 양측에서 존경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제자훈련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한 영혼을 하나님 앞에 작은 제자로 세우고자 헌신했던 인물이었으며, 한 영혼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았을 때, 교회는 크게 부흥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한국교회를 깨우고자 함에 있어 자신의 몫을 다한 지도자였다. 그가 모태신앙이지만, 회심부흥을 경험하였고, 목회자가 되기 위한 영적준비를 철저히 하였고, 정통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배워 사랑의교회를 개척하여 성장토록 하였으며, 교회가 영적으로 견고해 질 필요가 있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로마서를 통해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부흥의 흔적은 지금도 사랑의교회 저변에 흐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조경현(세움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