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血羅의 恨(혈라의 한)
1. 곤륜삼성(崑崙三星)
곤륜(崑崙)!
머리에 흰 눈을 얹고서 천하를 오시하면서 서녘에 우뚝 솟아있는 천하의 명산인 곤륜산!
그 오르는 길이 어찌나 험한지 필설로 설명하기가 힘이 들 정도다.
깍아지른 만장단애(萬丈斷崖)가 아찔하게 펼쳐진 산 모퉁이를 돌아서면 안개 자욱한 산자락이 마치 여인의 치마자락 처럼 펄럭인다.
세인(世人)의 발길을 거부하듯 오연한 자세로 서 있는 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곤륜산 많큼이나 도도한 곤륜파(崑崙派)가 자리하고 있다.
중원 구대문파(九大門派)의 한 축을 이루며 숫한 영웅호걸을 배출한 이 거대문파가 근래에 들어서는 그 위명(偉名)을 사해만방(四海萬方)에 떨치고 있다.
곤륜삼성(崑崙三星)!
곤륜이 배출한 최절정의 고수라는 이들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곤륜산에 오르는 것을 본 다섯 명의 곤륜승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무엇을 잘 못 보았나 의심했다.
그들은 마치 거친 들판을 달려오는 혈랑처럼 강한 살기를 뿜으면서 거침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자주색 승복을 걸친 사십중반의 승인과 성한 곳이 한 곳도없는 남루한 의복을 걸친 이십 오륙세의 젋은이였다.
승인들의 신경은 이역승의 전신에 쏠렸다.
그에게서 곤륜승들은 상상조차 해 본적이 없는 강렬한 살기를 느꼈다.
"심상치 않은 인물이다. 현기(賢技), 본원에 통보해라."
현자배 승인 중 가장 항렬이 높은 현성(賢星)은 직감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예, 사형. 알겠습니다."
현기가 다급한 걸음으로 안으로 사라지자 현성은 눈을 또렷이 뜨고 곤륜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다가올수록 이역승이 뿜어내는 기도에 현성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부님이 빨리 오셔야 할 텐데."
현성은 조바심이 어린 시선으로 현기가 사라진 산문을 바라보았다.
일다경이면 다다를 거리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고갤 돌린 현성의 눈에 어느덧 이십장 안으로 접근해 있는 혈라의 모습이 보였다.
현성은 묵묵히 곤륜산을 향해 합장을 했다. 삼인의 사제가 의아해서 현성을 쳐다봤다.
"사제들, 곤륜산을 향해 마지막 예를 올리게."
"사형, 저들이 그 정도로 무서운 인물들입니까?"
"난 그의 일초지적도 안될 것 같네."
현강(賢鋼)을 비롯한 삼인은 곤륜산을 향해 경건하게 합장을 했다.
"삼성을 오라고 해라."
얼굴에 멍이 가득한 자는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현성은 눈앞에 버티고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것이 독해 보이는 인상이기는 해도 취하고 있는 자세로 보아 삼류고수의 수준도 못 되었다.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깡패 정도였다.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가 날 뛰는군.'
현성은 상대 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을 혈라에게 돌렸다.
이역승은 몸을 뒤로 돌린 채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강퍅하게 마른 혈라의 손이 시선을 당겼다.
뒤짐을 지고 있는 양손은 십자로 교차된 체 오른 손을 쥐고 펴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동작을 따라 자주색 승포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무언가 무서운 기운이 현성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그 느낌은 아주 강렬했다.
현성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으음!"
현성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무슨 일로 본파를 찾으셨는지요?"
심중은 어떠한지 몰라도 현성의 음성은 차분했다.
"!"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같은 동작을 되풀이 할 따름이었다.
손을 쥐고 펴는 단순한 동작을 따라 무시무시한 기운이 일렁였다.
삼장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해일이 밀려오듯 무형의 기운이 현성을 덮쳤다.
주춤, 현성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이내 실태를 깨달았는지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유부의 세계를 관장하는 아수라(阿修羅)의 저주처럼 귀기 서린 음성이 고막을 울렸다.
"혈라가 일년전의 빚을 받으러 왔다고 전해라."
곤륜산이 일시에 암흑(暗黑)으로 변했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현성이 연신 뒷걸음질 쳤다.
"당신이 천룡사의 주지?"
혈라가 몸을 돌렸다.
무서운 눈이었다.
축 늘어진 두꺼운 눈두덩이 살로 반쯤 가려진 눈에서 냉혹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방문한 이유를 밝히시오."
현성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혈라가 느릿하게 도를 뽑아 드는 것이 보였다.
"삼성을 불러라."
"건방진 놈."
현성의 뒤에 있던 삼인이 번개처럼 혈라를 덮쳤다.
"파천일섬(波天一閃)."
일수유(一須臾)의 짧은 시간 혈라의 신형이 뒤집어 지면서 배후에서 공격해 오던 삼인을 향해서 벼락치듯 도를 떨쳤다.
자욱한 피보라가 일어나면서 분해된 육편들이 지면에 후드득 떨어졌다.
눈 깜짝 할 순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현성은 믿어지지 않는지 혼이 나간 눈으로 도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현성의 눈빛은 서서히 굳어 갔다.
"잔혹한 수법, 겉모습은 승인이되 속마음은 아수라로군."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벼락치듯 혈라를 덮쳤다.
"흥!"
싸늘한 코웃음과 함께 혈라의 손에 들린 파천도가 호선을 그렸다.
"크윽!"
답답한 신음과 함께 현성의 몸이 다섯 조각으로 나뉘었다.
사지가 절단되고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현성이 암울한 눈으로 혈라를 올려다보았다.
"너도 살아봐라."
혈라의 무심한 음성이었다.
"삼성이란 작자들이 천룡사 승인을 너와 같이 만들었다. 천룡사의 승인들은 그러한 몸으로 일년을 살아왔다."
음울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릴 때 현성의 정신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설…… 마?"
곤륜삼성이 누군가?
성인으로 추앙 받는 곤륜의 자랑이자 전 중원 무림인이 존경하는 삼인이 아닌가!
삼성이 그러한 만행을 저지를 리가 만무하지만 현성은 혈라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저런 음울한 표정은 진정한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다.
극단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자조석인 음성이 현성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차라리 죽여라. 불존을 모시는 승인으로서 어찌 이리 잔혹할 수 있는가?"
냉혹한 눈이 현성의 전신을 훑었다.
"불존이라고? 한가지 가르쳐 주마. 내가 펼친 도법의 첫 음이 혈해(血海)다."
현성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혈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그는 전율했다.
그는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자신에게 등을 돌린 사내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벽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혈라의 눈은 기이한 빛을 띠고 곤륜선원(崑崙禪院)의 돌층계를 내려오는 승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수는 무려 삼백여명에 이르렀다.
그 많은 숫자가 움직이는 대도 불구하고 질서정연(秩序整然)한 모습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네 사람만이 황색가사를 걸치고 나머지 승인들은 회색 승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인의 승려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특히, 탐스러운 백염(白髥)을 쓰다듬으면서 한층 한층 층계를 걸어내려오는 승인에게서는 광량한 기도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바로 곤륜장문인(崑崙掌門人) 백호선사(白虎禪師)였다.
황색 가사를 걸친 나머지 삼인은 장문인을 호위하듯이 품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삼인 승려의 기도도 장문인인 백호선사에게 뒤지지 않았다.
탐스러운 흑염이 위맹한 기운을 풍기는 사십대의 중년승인.
곤륜의 신화를 창조한 곤륜삼성이었다.
장문인을 호위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삼성의 고리눈은 오십장의 공간을 가로질러 혈라와 도악의 몸에 꽂혔다.
형형한 안광이 동공을 파열시킬 듯 쏘아오자 도악은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순간 사인의 시선보다 무서운 기운이 도악의 전신을 덮어왔다.
도악은 신경세포가 올올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눈길을 돌렸다.
고개를 돌린 도악은 내심 뜨끔했다. 일체의 감정을 배재한 혈라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혈라의 얄팍한 입술이 벌어졌다.
"종놈은 별수 없군."
흉측한 도악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뿌드득! 오기가 솟구친 도악이 이를 갈면서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갈코리 같은 손이 도악의 어깨를 잡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혈라를 바라보는 순간, 어깨가 일그러지는 통증과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쿵!
머리가 부서지는 통증이 일었다.
어찌나 세게 집어던졌는지 도악의 머리와 부딪힌 지면에 구멍이 뻥 뚫렸다.
'쌍놈의 쌔끼.'
지면에 얼굴을 쳐박은 도악이 내심 씨부렁거리며 일어섰다. 시야를 가린 피를 닦아내면서 무어라 항의하려던 도악의 전신이 굳어졌다.
사람의 눈이 아니다.
다가서는 곤륜승들을 노려보는 혈라의 눈에서 피처럼 진한 가공할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귀도 위일염을 죽일 때의 모습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껏 보아온 혈라의 모습과는 비교도 안될, 돌이켜 보면 이전의 모습은 장난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이럴 수가!'
"아미타불! 당신이 저지른 짓이오?"
곤륜장문인 백호대사의 음성은 나직이 떨리고 있었다.
삼백 승인의 호위를 받으며 버티고 선 그는 분노한 시선으로 혈라를 노려보았다.
백호대사의 손은 사지가 절단된 비참한 모습으로 바닦에 뒹굴고 있는 현성을 가르키고 있었다.
냉혹한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던 혈라의 입에서 쇠를 깍는 듯한 기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직 사십구(四十九)명이 남았다."
곤륜승들은 음성에 실린 살기만으로도 몸을 떨었다.
삼백승인은 비로소 눈앞에 버티고 선 이역승이 결코 평범하지 않음을 감지했다.
그들은 곧 익숙한 몸놀림으로 대적자세를 취했다.
"장문인, 그가 달탄대사입니다."
사지가 절단된 현성의 입에서 비명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알고 있다."
짤막한 대답과 함께 장문인을 호위하던 삼인의 승려가 앞으로 나섰다.
곤륜삼성! 곤륜의 힘이라는 그들이 나선 것이다.
"일년전의 보답인가?"
붉게 충혈된 혈라의 눈이 곤륜삼섬을 노려보았다.
일년전의 참상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생각하기 조차 끔찍한 참상이었다.
* * *
불존에게 올리던 향냄새 대신에 괴괴하게 깔려 있던 피비린내.
산문을 넘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도였다.
서장 불문의 성지인 천룡사를 뒤덮은 시신들.
수백 명의 승인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지 쉰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들의 사지는 검에 잘린 상태였다.
그들의 몸뚱이를 뒤덮은 시꺼먼 파리 떼 속에서 간간이 신음이 흘렀다.
---우리들이 죽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왜 우리를 공격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 중원을 핏물로 잠기게 해 주십시오.
사지가 절단 되 반쪽 몸뚱이만 남은 제자들의 절규를 들으면서 활불(活佛)이라 추앙받던 달탄(達誕)대사가 사라졌다.
백 오십 인의 승려를 한꺼번에 화장하는 그을음으로 천룡사가 시커멓게 변할 때 처절한 외침이 울렸다.
"오늘부터 내 이름은 마승 혈라다."
이후 천룡사는 인적이 끊겼다.
혈라가 육 개월의 폐관을 마치고 변방에 나타났을 때 그가 닿는 곳은 죽음이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달탄이 사라지고 탄생한 혈라는 공포의 대명사(代名詞)처럼 변방을 휩쓸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돌려주십시오.
혈라가 중원으로 출발하던 날, 그를 배웅하던 팔 다리가 잘린 오십 인의 처절한 절규가 혈라의 귀에 메아리쳤다.
혈라의 눈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풀어 주마, 너희들의 한을."
스르릉!
파천도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강퍅한 손가락이 칼자루를 굳게 움켜쥐었다.
죽음으로 산화한 이백인의 혼백(魂魄)이 파천도로 스며들었다.
타앗!
지면을 박찬 혈라의 신형이 곤륜삼성을 향해 쏘아 갔다.
칠장의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밧!
수평으로 긋는 파천도의 괴적을 따라 대기가 갈라졌다. 그 괴적의 끝에 곤륜삼성이 있었다.
"악!"
관전하고 있던 곤륜의 진영에서 다급한 비명이 울렸다.
금시라도 삼인의 목이 잘려 나갈 것 같았다.
그들은 손에 땀을 쥐고 삼성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곤륜삼성은 담담했다.
가공할 혈해수라도법의 파천일섬이 목을 노리고 날아들건만, 곤륜삼성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긴장감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인가?
중인들은 곤륜삼성이 무슨 신법으로 삼장의 공간을 이동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일시에 세 방향(方向)으로 나뉘어진 그들이 무슨 신법을 펼쳐서 품(品)자 형태로 혈라를 에워쌌는지 알아본 사람도 극소수(極少數)에 불과했다.
"저것이 천기신보(天機神步)다."
자부심에 가득 찬 곤륜장문인 백호대사의 외침에 곤륜진영에서 경탄(敬歎)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운룡대팔식에 비견되는 천기신보!
안타깝게도 백년 전부터 실전(失傳)된 것으로 알려진 곤륜의 절기가 아닌가?
그 실전된 무공이 삼성의 몸에서 다시 시연된 것이다.
'이긴다, 이길 수 있다.'
한결같은 확신(確信)이었다.
삼백에 달하는 곤륜승들의 가슴속에 문파에 대한 자부심이 솟아나면서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이 풀렸다.
그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사인의 대결을 지켜봤다.
곤륜삼성을 바라보는 혈라의 두 눈은 살기가 넘쳐 진물처럼 흐르고, 진한 피 비린내가 자주색 승포에서 안개처럼 스물거렸다.
파천도가 비스듬히 허공에 걸렸다.
혈라의 눈에서 폭죽처럼 살광이 터져 나왔다.
"피햇."
위험을 감지한 삼성중 대형인 백상(白象)의 외침. 그러나 그보다 파천도가 빨랐다.
스윽!
살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슈욱!
잘린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소리였다.
데구르르!
삼성중 두 사람의 목이 바닥을 뒹구는 소리였다.
쿵!
목이 잘린 시신이 맥 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삼백에 달하는 곤륜의 문도들은 넋을 잃고 멍하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본 것은 파천도가 그리는 기이한 호선뿐이었다.
아이들이 장난을 노는 것처럼 그린 조그만 원이 한 순간 폭사되는 것을 본 것뿐이었다.
설마 그 원(圓)이 곤륜삼성 중 두 사람의 목을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혈라가 펼친 수법이 혈해수라도법(血海修羅刀法)의 삼대절초(三大絶招)중 하나인 멸천겁(滅天劫)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쪽에 비켜서서 구경하던 도악마져도!
낌새를 눈치채고 황망히 뒤로 물러선 삼성의 대형인 백상(白象)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의 어깨도 도기에 반 이상 갈라져 너덜거렸다.
백상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한 표정으로 자신의 발 앞에 뒹굴고 있는 사제들의 잘린 머리를 쳐다보았다.
부릅 뜬 사제들의 눈에는 의혹이 담겨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상태로 누워 있지?
---내 목을 가른 것이 무엇이었지?
마치 살아 있는 자신에게 묻는 듯했다.
떨리는 백상의 손이 사제들의 눈을 쓸었다.
꺼칠한 눈썹이 손바닥에 닿자 전율이 일어났다.
삼십 오 년을 동고동락(同苦同樂)한 두 사제의 수급이 싸늘하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기고 손을 떼는 순간 백상의 마음도 죽어 있었다.
---태청검법(太淸劍法)!
곤륜의 진산절기가 백상의 손에서 펼쳐졌다.
혈라의 전신을 파고드는 만(萬) 개의 검날은 만검진천(萬劍震天)의 초식이 극성에 달한 것이고,
연이어 유성처럼 혈라를 향해 쏘아 가는 것은 유성백리탄(流星百里彈)이었다.
검붉은 노을이 물드는 서녘 하늘에 싸늘한 검광(劍光)이 난무했다.
태청검법의 후(後) 삼식(三式)중 이 초였다.
혈라의 눈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이 놈이다.'
천룡사의 백 오십 승인들의 몸에 새겨진 상흔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초식에 당한 것이었다.
하늘을 가득 덮고 밀려오는 만개의 검날이 제자들의 육신을 도륙한 바로 그 초식이다.
도를 쥔 혈라의 손아귀에서 강렬한 힘이 솟구쳤다.
그것은 이백 인의 한(恨)이 뭉친 힘이었다.
서릿발처럼 싸늘한 눈빛이 백상에게 고정되었다.
"네놈이었다. 금수(禽獸)만도 못한 놈."
파천도가 수많은 직선을 그었다.
수백 가닥의 도기가 파생되면서 허공을 가득 메운 검광을 하나씩 부수었다.
그리고는, 원이었다.
다시 허공에 조그마한 원이 생겼다.
그리고 일수유(一須臾)의 짧은 순간, 방원 오장이 급격히 팽창한 도막에 갇혔다.
백상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투명한 빛이 유리를 투과(透過)하듯 도광이 백상의 몸을 관통했다.
백상의 검은 수염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시발점으로 사지육신이 해체(解體)되었다.
자욱한 피보라가 일었다.
곤륜승들은 눈을 의심했다.
"이럴 수가 없다."
곤륜삼성이 누구인가?
중원 구대문파 수천 명의 고수 중 서열 삼십위 안에 드는 인물, 그 가공할 무예로 삼성이라 추앙받던 삼인이었다.
그런 삼성이 이역승의 도 아래 불귀의 혼이 되다니.
그것도 단 일격에!
"초식의 이름은?"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는 혈라를 보고 곤륜장문인 백호대사가 물었다.
"흐흐!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동문서답(東問西答)!
듣기 거북한 음성이 중인의 귀를 파고들고 장문인 백호대사를 노리고 허공을 가르는 파천도가 보였다.
"감히 어디다 칼을 겨누느냐?"
노호를 터뜨리며 장문인을 호위하던 십인의 호법들이 몸을 날렸다.
당연한 것처럼,
피보라가 일었다.
열 명의 호법 중 다섯 명이 몸이 분시 되어 눈밭에 뒹굴었다.
"십 호법, 그분들 마저……."
"악마에게는 무림의 법규가 필요 없다. 모두 힘을 합쳐 놈을 죽이자."
수십 명의 곤륜승이 무기를 뽑아 혈라를 덮쳤다. 혈라 역시 살심이 극도로 치솟은 듯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와 곤륜승과의 일전은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혈화(血花)가 가득 피어났다.
그때,
"멈춰라."
사자후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녔다는 창룡후(蒼龍吼)가 곤륜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2. 대각선사(大覺禪師)!
곤륜승들과 혈라는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난 곳을 쳐다봤다.
탐스러운 백염(白髥)을 허공에 날리면서 한 승인이 곤륜선원에서 산문으로 직격해 날아왔다.
칠십(七十)가량의 나이에 백색가사를 걸친 노승, 그가 사용하는 신법은 중인들을 놀라게 했다.
연대구품(蓮臺九品)!
백장에 달하는 거리를 숨 한 번 쉬지 않고 날아 내리는 노승의 신법, 풍문으로만 들은 소림사의 신공이 아닌가.
곤륜승인들이 의아한 빛을 띠고 승인을 바라보았다.
곤륜장문인 백호대사가 정중히 합장을 했다.
"대각선사(大覺禪師)께서도 나오셨군요. 대사의 심기를 불편케 한 점 죄송합니다."
백호대사의 몇 마디에 장내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대각선사라는 법명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혈라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전설처럼 전해지는 대각선사의 무공에 관해 들은 바가 적지 않았다.
소림사 제일의 신승!
나이 삼십에 소림방장(少林方丈)에 오른 신화적 인물.
소림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를 극치의 경지까지 수련한 불가 제일 고수.
현 검원의 원주인 담곽우조차도 그를 대하면 사부의 예를 갖춘다지 않는가!
그런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아미타불, 소승 대각이 곤륜의 장문을 뵈오이다. 소승의 무례한 행동을 용서하시오."
대각선사의 정중한 예를 받은 백호는 당황했다.
자신이 비록 곤륜의 장문이라 하여도 배분으로 논한다면 사숙이 되는 대각선사다.
어찌 자신이 그를 탓 할 수 있단 말인가!
"선사. 예를 거두십시오. 소승이 불편하외다."
"별 말씀을!"
말을 마친 대각선사는 고요한 눈으로 혈라를 주시하며 백호선사에게 청했다.
"장문인, 이번일은 소승에게 맡겨 주심이 어떠할는지요?"
"!"
"귀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승이 그에게 몇 가지 물을 말이 있기에 부탁 드리는 것입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백호대사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장문인, 그에게 맡겨 보시게."
창노한 음성과 함께 곤륜선원에서 한 노승이 날아올랐다.
곤륜이 자랑하는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의 신룡선무(神龍旋霧).
구름을 희롱하는 용 마냥 허공을 선회하면서 노승은 중인들이 서 있는 산문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순간,
"사조님을 뵙습니다."
곤륜승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용정대선사(龍靜大禪師)!
세수 팔십을 훨씬 넘은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노승이 진물이 흐르는 눈으로 중인들을 쓸어 보았다.
"지금은 예를 취할 때가 아니다. 일어서라."
곤륜승인들이 조심스런 몸가짐으로 몸을 일으켰다.
"장문인. 노납의 말대로 하시게."
물이 흐르듯 잔잔한 용정선사의 음성에 백호장문인은 의아한 시선으로 사부를 바라보았다.
이 일은 엄연히 곤륜의 일이다.
대각선사가 아무리 소림사의 전대방장이라 하여도 이 일만은 그가 관여할 수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곤륜산을 피로 물들인 원흉에겐 그에 합당한 죄과를 치르게 해야 하는 것을 모를 사부가 아닐텐데.
백호가 의아한 마음으로 용정을 바라볼 때 용정선사의 전음이 그의 귀에 울렸다.
"장문인. 더 이상 살겁을 벌이지 마시게. 곤륜은 천룡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네. 헛된 명예욕에 들뜬 곤륜삼성이 벌인 학살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이."
백호대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도 곤륜삼성이 저지른 행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천룡사를 피에 잠기게 한 것은 삼성만은 아니지 않은가?
마음속에 의문이 일었지만 백호대사는 사부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소림사에 폐를 끼치겠습니다."
대각선사는 백호선사를 향해 정중히 합장을 해 예를 표한 후 혈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달탄대사, 처음 뵙습니다."
혈라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서렸다.
불과 일년 전까지 달탄은 자신의 법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과는 동떨어진 호칭이기도 했다.
"달탄은 일 년 전에 죽었다."
대각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대사의 심중을 소승은 알고 있소이다. 천룡사의 이백 승인이 일시에 몰살한 참사를 소승을 비롯한 몇몇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다면 비켜라. 소림이라 해도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용서치 않겠다."
파천도가 비스듬히 치켜올려졌다.
"그 수법이다."
곤륜승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저 자세에서 도가 원을 그리면 모든 것이 파멸되는 것을 그들은 두 번이나 보았다.
"대각선사, 피해야 합니다."
승인 중 몇 사람이 다급한 음성으로 대각에게 외쳤다.
사삭!
파천도에서 경미한 파공성이 울렸다.
아이의 손바닥만한 도막이 형성되었다.
곤륜삼성을 죽일 때 보다 오히려 작은 원이었다. 장문인을 호위하는 곤륜의 다섯 호법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저 수법을 파할 무공은 없다.'
그들과 달리 대각선사는 담담했다.
파천의 기세로 밀려오는 도막을 주시하던 그가 손을 치켜 들은 때는 도막이 거의 승복에 닿은 순간이었다.
바로 멸천겁(滅天劫)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시점이거니와 대각이 기다리던 시점이기도 했다.
대각선사가 우권을 쳐냈다.
소리도 없는 권경이 쭉 뻗으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가공할 기세로 밀려들던 파천도가 주춤했다.
대각이 다시 일권을 뿜었다.
무영권(無影拳)!
소림무공중 가장 수련하기 힘들다는 무영권이었다.
쾅!
광량한 충돌음이 울리면서 대각의 일권을 맞은 파천도에서 파생된 도막이 우그러들었다.
"과연 무영권이다."
곤륜승들에게서 탄성이 터졌다.
대각선사의 사갑자에 달하는 공력이 주입된 무영권은 대단했다.
내부가 진탕된 혈라의 입으로 선혈이 흘러나왔다.
허나,
불을 토하는 눈이 대각선사를 쏘아보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파천도를 긋자 무영권에 일그러졌던 도막이 분명히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흐흐흐! 각오해라."
쇠를 깎는 듯한 거친 음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파천도가 느릿하게 도막의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이 보였다.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느릿하게 움직이는 도에 실려 있는 공력이 사갑자에 이른다는 사실을, 그것을 아는 사람은 두 사람 뿐 이었다.
대각선사와 용정선사.
"멸혼(滅魂)!"
피를 머금은 혈라의 외침이 울리는 순간,
팟!
파천도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수법으로 도막의 중심부를 찍었다.
대각선사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저것이 어찌 인간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란 말인가!
꽈르르릉!
천지가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 강기의 파편이 대각을 향해 벼락처럼 폭사되었다.
파편 하나 하나에 혈라의 살기가 실려 있었다.
대기가 찢기면서 울부짖는 비명에 중인들이 다급히 귀를 막았다.
대각선사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칠십평생에 이런 가공한 무공을 접하기는 그도 처음이었다.
'무섭다. 과연 중원무림인 중 누가 이러한 수법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감탄만 할 때가 아니다.
혈라의 공격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반야대능력(盤若大能力)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대각선사는 소림무예의 극치라는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을 전력을 다해 쳐내었다.
우르릉!
대기를 울리는 권음과 함께 십삼식으로 이루어진 연환권이 엄밀한 강기의 막을 형성했다.
두 절세의 기공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르---릉!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곤륜승들이 놀라서 다급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넋을 놓고 구경하던 승인 몇 명은 미쳐 몸을 날리기도 전에 강기의 파편에 격타 당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일초식을 주고받은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에서 맹렬히 얽혀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뢰결인(五雷結引)이다."
대각이 연달아 쳐낸 다섯 번의 공격이 혈라의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저, 저럴 수가?"
혈라의 도가 천지양단세로 허공을 그었다.
연이어 펼쳐지던 오뢰결인의 연결고리가 조각조각 끈기는 것이 중인들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이를 악물은 대각선사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보이고 그가 혼신의 힘으로 일권을 쳐내는 것이 보였다.
어스름히 어둠이 밀려오는 하늘이 일시에 암흑(暗黑)으로 변했다.
하늘에는 빈틈이 없었다.
단 하나의 주먹이 어두워지는 하늘을 가득 채웠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비쩍 마른 대각선사의 주먹이었다.
그것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용화권(龍華拳)이었다.
'진정 무서운 권법이다.'
혈라는 내심 탄복하며 혈해수라도법의 최후초식을 펼쳤다.
자신이 이 무공을 사용하게 될 줄은 옥문관을 넘을 때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하늘을 향해 곧추세워진 도가 기이한 호선을 그리면서 일섬(一閃)도기가 하늘을 갈랐다.
우주홍몽(宇宙紅夢)!
혈해수라도법의 최후초식이었다.
퍼버벅!
"크윽!"
누구에게서 인지 모르지만 격렬한 타격음(打擊音)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중인들은 부릅뜬 눈으로 지면에 착지한 두 사람을 살폈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대각선사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한 곤륜승들은 자신도 모르게 현실을 부정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전 소림 장문인이자 검선 담곽우에 비견되는 대각선사가 어찌 부상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대각이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달탄대사, 당신이 일인으로 중원에 도전한다 했을 때 소승은 그대가 광오하다고 생각했소.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중원인들이 그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소림사의 기승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대각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곤륜의 승인들은 둔중한 충격이 뇌리를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하오. 천하에 오로지 당신만이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소"
"크하하핫!"
한에 사무친 광소가 터져 나왔다.
곤륜승들은 어두운 안색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광소를 터트리는 혈라를 바라보았다.
중원무림의 한 축을 이룬 대각을 격파한 혈라.
이제 누가 저 살인마를 막는단 말인가!
그의 한 맺힌 원한이 스민 파천도에 얼마나 많은 곤륜승과 무림인들이 피를 흘릴 것인가.
"카하하하!"
혈라의 광소는 미친 듯이 곤륜산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건 웃음이 아니었다.
통곡보다도 더한 심적인 고충이 응결된 한이었다.
"흐흐흐! 늦었다."
저벅, 저벅!
비스듬히 비껴 든 파천도에서 섬전처럼 번뜩이는 살기.
묵직한 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곤륜산이 짓이겨졌다.
"멈추시오."
대각의 입에서 나직한 호통이 터졌다.
그러나 대답은 파천도였다.
혈라의 우수가 느릿하게 도를 밀어내었다.
스스슥!
희미하게 떠오르던 만월이 양단 되었다.
"휴!"
누군가의 입에서 절망적인 한숨이 흘렀다.
곤륜승들의 눈에는 도기의 끝 부분에 대각선사가 반으로 잘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선공을 취한 우주홍몽의 위력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대각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미타불, 그대는 본승을 너무 핍박하는군."
대각의 두 손이 합장하듯 모였다.
어깨넓이로 벌린 왼 발을 크게 한 걸음 내딛었다.
몸의 중심을 왼 발에 옮긴 후 대각은 합장한 양손을 정면으로 밀어내었다. 아니, 밀어냈다고 느낀 순간 양손이 엇갈리면서 사방을 휘저었다.
고오오오!
대기가 소용돌이치는 기이한 음향이 울렸다.
회오리치듯 맹렬히 일어난 강기의 막은 하늘을 양단하며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파천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대각선사는 두 걸음을 물러선 체 담담한 시선으로 혈라를 바라보았다.
이역승은 놀란 눈으로 파천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묵강으로 제련(製鍊)한,
그래서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파천도의 도신은 보기 흉하게 이가 빠져 있었다.
"무슨 수법인가?"
"용화이권 대붕권(大鵬拳)이외다."
말을 하는 대각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 역시 대격돌에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달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서장으로 돌아가시오."
대각은 진정한 마음으로 그가 돌아가기를 권고했다.
"소림과 그대 대각선사가 강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혈라가 지면을 차고 날아올랐다.
"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파천도가 야천에 번뜩이며 혈해수라도법을 처음부터 최후초식까지 일순간에 펼쳤다.
그것은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해일이었다.
총 구식으로 이루어진 혈해수라도법이 한꺼번에 펼쳐지자 주변을 휩쓰는 도기에 모든 사물이 파괴되었다.
"피하시오."
대각이 한 소리 일갈을 떨침과 동시에 그도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연대구품(蓮臺九品)의 절정신법을 운기하며 삼장을 솟구친 그는 벼락같이 팔권(八拳)을 펼쳤다.
용화권이다.
우르릉!
천둥치는 굉음을 울리면서 대각이 펼친 팔권이 맹렬한 기운을 담고 파천도와 또다시 충돌했다.
쾅! 콰광!
두 절세의 기공이 충돌하면서 월동형(月棟形)으로 지어진 산문이 일시에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크윽!
답답한 비명성을 흘리면서 대각이 가슴을 움켜쥐고 지면에 착지했다.
똑,똑!
가슴에서 흐르는 피가 노승의 손을 타고 지면에 점점이 떨어졌다.
혈라는 냉혹한 눈으로 그러한 대각을 노려보다가 곤륜승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가슴에 흐르는 피를 지혈한 대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달탄대사.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돌아가시오. 만일 이번에도 소승의 경고를 무시한다면 소승도 최선을 다 할 것이오."
혈라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나를 가로막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미타불. 피의 고리는 한 사람이 양보하면 끊기기 마련이오. 소승이 원하는 것은 이것뿐이오."
"곤륜삼성이 해친 이백 명의 승인 중 백 이십 명이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불승이었다. 소림은 참을 수 있는가?"
대각은 대답하지 못했다.
혈라는 냉기가 서린 눈으로 대각을 노려보더니 한 발 앞으로 전진했다.
"비켜라. 내가 옥문관을 넘어온 이상 늦었다."
"아미타불. 달탄대사. 불존의 자비를 생각하시길."
대각의 충고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혈라가 발을 수평으로 쭉 뻗었다.
말을 하는 동안 공격해 올 줄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대각선사, 그가 다급히 발을 놀리며 일장을 벗어났지만 귀신처럼 달라붙은 혈라의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퍽!
대각선사가 붕 떠오르더니 일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암습을 하다니 비겁하다."
분노에 찬 곤륜승들의 외침, 용정대선사가 손을 들어 곤륜승들을 제지하였다.
3. 생자만이 아름답다
곤륜승들은 기대를 품은 눈으로 용정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들이 믿을 사람은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러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정대선사는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혈라를 보고만 있었다.
"사부님, 제가 나서겠습니다."
보다 못한 백호대사가 앞으로 나섰다.
수수깡처럼 마른 용정대선사의 손이 백호의 팔을 잡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꾸짖는 듯한 눈빛이었다.
"장문인, 대각선사가 패했다고 보시오?"
이 무슨 소린가?
눈앞에 분명히 드러난 사실을 보면서도 그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대각선사가 이겼다는 말씀이십니까?"
중인들도 의아한 시선으로 용정대선사를 바라보았다.
"이긴 사람은 없소이다. 그들은 양패구상했소."
크윽!
그들을 향해 다가서던 혈라가 돌연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용정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입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그는 대각선사가 펼친 용화권에 극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외다. 천하에서 이 권법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소이다."
"용화권이 그토록 대단한지요?"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오. 그러나 이 권법을 창안한 사람이 누구인줄을 안다면 장문인은 소승의 말을 믿을 것이외다."
백호대사는 물론 모든 중인들이 궁금한 얼굴로 용정대선사를 바라보았다.
"용화권은 소림사 무술의 개파조사인 달마대사(達魔大師)가 말년에 창안한 무공이외다. 현재까지 그보다 뛰어난 무림인이 없으니 용화권이 천하제일인 것은 당연하지요."
중인들은 그제야 용정대선사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났다.
"용화권이 천하제일이라면 대각선사가 부상을 당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백호대사의 질문은 모든 사람이 궁금하게 여기는 핵심사항이었다.
희미한 웃음이 주름살로 뒤덮인 용정대선사의 얼굴에 떠올랐다.
"장문인, 운룡대팔식을 완전히 익힌 제자가 본문에 단 한 명이라도 있소이까?"
"!"
"대각선사가 승리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외다."
백호대사는 사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운룡대팔식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것처럼 대각선사도 용화권을 극성의 경지까지는 익히지 못했다는 말이리라.
대저,
각 파의 비전절기는 그 문파를 대표한다.
수련하기가 힘이 드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일반 문인들은 평생동안 일견(一見)하기도 어렵다.
중인들이 두 사람의 말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흐흐흐!"
나직한 괴소와 함께 혈라가 용정대선사의 앞으로 다가왔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곤륜의 명성은 모두 허명이었군!"
쇠를 깎는 듯한 듣기 거북한 음성에 곤륜승인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들은 당장 혈라를 덮칠 듯 했다.
"서툰 행동은 삼가라."
창노한 용정대선사의 음성이 그들을 막았다.
곤륜승들은 마음속의 화를 삭이며 공격자세를 풀었다.
용정대선사는 진물이 흐르는 눈으로 혈라를 주시하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달탄, 어떻하면 그대의 한이 풀리겠나?"
마치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대선사의 음성에는 상대에 대한 안쓰러움까지 담겨 있었다.
"서장의 활불로 칭송 받던 불승이 이름을 혈라로 바꿀 정도면 당신이 지닌 한이 얼마나 깊은 줄 알 수 있네. 하지만 모든 일은 윤회라 하질 않는가? 자네가 벌이는 살겁은 언젠가 다시 그대에게 돌아가네. 마음을 돌리게."
용정대선사의 간곡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혈라는 파천도를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너희들의 목을 쳐서 이 도가 닳아 없어지면 내 돌아서마."
용정대선사의 얼굴에 한조각 웃음이 서렸다.
"혈라, 본인이 힘이 없어서 자네를 회유하려 한다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말과 함께 용정대선사의 몸이 번뜩였다.
현란하게 십팔방위(十八方位)를 짚으면서 일시에 혈라의 전신을 에워싸는 저 신법을 사람들은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이라 불렀다.
그리고,
땅! 소리와 함께 파천도의 도신을 때리는 지력은 홍예지였고,
혈라의 손을 벗어난 파천도를 가루로 만드는 용정대선사의 손에 실린 공력은 천기일종(天氣一宗)이라는 곤륜의 독보적인 내공심법이었다.
"본인이 원하는 것은 무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천룡사와 본파가 얽힌 이일을 해결하는 것이외다."
용정대선사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곤륜승들은 일제히 감탄이 어린 시선으로 자신들의 사조를 바라보았다.
혈라도 용정대선사의 일초를 보고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설 수는 없다.
"죽느냐, 죽이느냐! 내가 아는 방법은 이 한 가지뿐이다."
"그대는 진정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군. 자네가 원한다면 별 수 없지."
용정대선사는 혈라를 일별한 후 시선을 돌렸다.
"장문인, 그에게 도를 가져다주거라."
말을 마친 용정대선사는 진물이 흐르는 눈으로 어두움이 자리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천(冬天)에는 어느덧 별들이 하나 둘 빛나고 있었다.
영겁(永劫)의 세월을 달려온 별빛이 용정대선사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인생은 짧네. 선행을 행하기도 부족한 시간이지. 백년도 못사는 세월에 무얼 그리 한을 남기고 분노에 몸을 떠는가?"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노승이 나직이 말하는 독백이 승인과 혈라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혈라의 눈에 순간적으로 기광이 번뜩였다.
그 또한 불도에 정진하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한 세월이 사십 년이었다.
용정이 무슨 뜻으로 이와 같은 말을 하는지 알고도 남았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자신을 믿고 몸을 의탁한 이백의 혼령을 지키지 못한 이 자괴감을 어찌한단 말인가.
무슨 낮으로, 죽어 간 그들의 원한을 가슴에 담고 불경을 외우며 남들 앞에서 불도(佛道)를 설파한단 말인가!
혈라는 자신에게 도를 가져다주는 곤륜승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곤륜승은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 자체로 공포에 절어서 몸을 떨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에 대한 애착(愛着)이었다.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죽은 다음에는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선인이건 악인이건 석가세존 이외에는 사람의 생을 멸하여선 아니 된다.
제자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했을 때 혈라는 두 가지 문제로 고민했다.
승인의 본분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제자들의 원수를 갚는 악마가 될 것인가.
결국 그는 달탄을 버리고 혈라라는 새 이름을 택한 것이다.
도를 움켜쥐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용정은 잔잔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은 혈라가 대결을 택한 것을 알았다.
"이번의 대결로 그대와 곤륜의 모든 은원관계를 종결(終結)짖도록 하세."
"!"
곤륜승들은 야천을 가르는 혈라의 도를 보면서도 이제는 놀라지 않았다.
장문인 백호대사 또한 느긋한 시선으로 사부가 펼칠 무공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긴장을 풀었다.
그가 아는 한 사부의 무공은 천하제일이기에.
"안돼!"
대각선사의 외침이 울리고 나서야 백호대사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몸을 날렸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곤륜승이 가져다준 도가 사부의 가슴을 길게 가르고 지나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용정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곤륜승인들이 일제히 지면을 박찼다.
"멈춰라."
허탈하기까지 한 창노한 음성이 그들의 귀에 울리는 순간 승인들은 다시 지면에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울분에 찬 눈으로 용정대선사를 바라보았다.
벡호대사가 다급히 사부의 곁으로 다가섰다.
"어느 누구도 그를 공격하지 마라. 삼성이 저지른 죄악은 우리 대에서 마감해야 한다."
차분한 용정의 말에 백호대사는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삼성은 단지 그들의 부친을 해하고 천룡사에 은거한 원수들의 목을 쳤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무림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가 아닙니까?"
절규하듯 외치는 백호대사의 음성이 곤륜산에 메아리쳤다.
"쿨룩. 장문인. 말을 삼가시게. 삼성은 원래가 잔인한 일면이 많았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자질을 탐해 제자로 맞아들인 내 잘못이 크네. 이제라도 그들의 잘못을 죽음으로 사죄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의 홍복(洪福)일세."
말을 마친 용정은 혈라를 바라보았다.
"달탄, 내 마지막 부탁이네. 원한을 풀게."
혈라의 얼굴이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했다.
살기가 그득한 얼굴에서 사람을 이해하는 얼굴로,
그리고 다시 악마의 얼굴로.
하지만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한을 삭이려 애쓰는 용정대선사의 숭고한 죽음 앞에 혈라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이 앞으로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 또한 곤륜을 건드리지 않겠소."
혈라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돌아서는 것을 보며 용정대선사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던 생기가 소멸되는 것을 느꼈다.
용정대선사는 대각선사와 백호대사를 가까이 오라 했다.
"혈라가 아니라 해도 나는 오늘 죽었을 것이네. 내게 주어진 천수(天壽)가 오늘까지니까. 허니 내 원수를 갚으려는 어리석은 행동은 절대 하지 말게. 그리고 장문인 내가 한말을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곤륜은 오늘로 봉문을 하겠습니다."
백호장문인의 말을 들은 용정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용정은 알고 있었다.
무림에 서서히 태동하는 피바람을. 그것이 혈라로 인해 시작된다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곤륜이 피의 겁을 피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는 대각선사를 바라보았다.
대각선사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정이 눈을 감았다.
곤륜승들의 숨죽인 오열이 곤륜산을 맴돌았다.
도악은 오늘에야 혈라의 가슴에 맺힌 한을 알았다.
그 깊은 한을 가슴에 담고 살아온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신의 제자가 되주지. 하지만!'
혈라는 힐끗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누군가의 기척을 느낀 듯 그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흘렀다.
'만리무영보(萬里無影步). 네놈이 옥문관에서부터 날 쫓는 것을 알고 있다. 허나 네놈은 진정한 혈해수라도법의 마지막 초식은 보지 못할 것이다. 나도 최후의 일초는 남겨 두어야 하니까.'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