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호 음악감독 미국 신시내티대학 비올라 전공 음악 학사 및 석사, 서울 심포니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역임, 구리시 교향악단 음악감독 역임, 현 아산사회복지재단 음악 감독 재직 등 신종호(57) 씨의 경력은 화려하다.
하지만 이 같은 화려한 삶의 뒷편에는 소아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진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신 감독의 피나는 노력과 함께 여러 귀인(貴人)들과의 인연이 있었다.
“인생의 전환점에 섰을 때마다 소중한 분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곳이란 사실을 직접 체득한 셈이죠”
할머니 등에 업혀 등하교
소아마비라는 병이 사회에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1957년, 당시 2살이었던 그는 심각한 고열에 시달렸다고 한다.
“집안 어른들에 따르면 아장아장 잘 걷던 아이가 열이 심하게 나서 병원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 열이 단순한 감기로 인한 것인 줄 알았지만 이후 다리를 쓸 수 없었어요. 병을 고치려고 용하다는 곳은 다 찾아가 침을 맞는 등 갖가지 치료를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장애로 인해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은 고통과 더불어 힘들었던 내용뿐이라고 한다. 지금처럼 휠체어도 없던 시절이어서 서울의 일반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할머니 등에 업혀 등하교를 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용변을 마음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죠. 아무리 급해도 참고 또 참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지금도 장시간 비행기를 타더라도 소변을 참는 것에 어려움은 없어요”
그가 4학년이 되던 해, 보살펴 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더 이상 일반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됐다. 집안 생활을 책임지셨던 어머니는 그의 등하교를 도와주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숙사 시설을 구비하고 있는 대전의 특수학교인 성세재활학교로 전학하게 된다.
“재활학교는 사회의 축소판”
▲ 신 감독은 성세재활학교에서의 생활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회의 일면을 경험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세재활학교 생활 초기에 어머니가 가끔 그를 찾아오시면 ‘도저히 못 살겠다’며 같이 죽자는 말을 내뱉곤 했다. 때문에 어머니는 그를 보러 와 먼 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돌아가시기도 했다.
“특수학교에서 몇 년이 지나니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됐습니다. 특히 저는 그때까지도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 줄 몰랐어요. 일반 학교에서는 장애 학생이 저 혼자였기 때문에 다른 장애인들을 처음 만나게 된 셈이죠”
다른 사람들이 성인이 돼 군대를 다녀오지만 그는 성세재활학교라는 군대를 갔다 왔다고 말한다. 단체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과 체험들을 통해 그 곳 역시 하나의 사회임을 깨닫게 됐다고.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 작은 학교 안에도 서열이 있고 드러나지 않는 경쟁이 있었습니다. 또 비슷한 사람들끼리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그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이 겸비돼야 한다는 인식이 뚜렷하게 생겨났죠”
강민재 선생 지도 아래 바이올린 배워
그러던 중 외부의 낯선 인물과의 만남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게 된다. 성세재활학교가 온천으로 유명한 유성 근처에 있었던 것도 운명이었을까. 서울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강민재 선생이 목욕을 하기 위해 유성을 방문했다가 우연찮게 재활학교 근처를 지나치게 됐다고 한다.
“당시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 분하고 저희들이 만날 수도 없고 서로 연결될 끈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신의 은혜라고 해야 할까요. 재활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목발을 짚거나 기어다니면서 노는 모습을 보셨다고 합니다”
당시 강 선생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가 저 아이들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없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특별하고 체계적인 예체능교육이 없던 학교 상황에서 강 선생은 바이올린을 가르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고가의 악기 구입은 학교에서 지원을 해줌으로써 신 감독은 처음으로 ‘음악’이라는 세상을 접하게 됐다.
“처음에는 지원을 하지 않았는데 다른 학생들이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며 관심을 갖게 됐고 뒤이어 바이올린을 같이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선생님이 정말 열심히 가르쳐 주셨고 학생들 중 몇 사람이 나름 음악적인 재능을 갖추게 됐어요”
교환학생으로 1년간 일본에 체류
▲ 신 감독의 가족 사진 바이올린을 배우며 음악에 몰입했지만 점차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왔다. 중학교 과정까지 마치면서 이제 사회에 나가 스스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바이올린이 좋았지만 음악으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당시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장애인들이 하는 일은 도장을 파거나 시계 수리, 구두 수선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그 때 또 다른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재활학교 이사장은 일본을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 일본 큐슈 뱃부에 있는 ‘태양의 집’이라는 일본 최대 사회복지시설과 연계해 교환학생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태양의 집은 일종의 사회적 기업으로서 소니나 미스비시 혼다 같은 일본 유수의 대기업들이 장애인들에게 맞는 설비를 갖추고 장애인들을 고용하는 곳이었다.
“5명의 교환학생에 선발돼 1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며 일본 사람들과 똑같이 출퇴근을 했습니다. 한국에 태양의 집과 같은 시설을 설립했을 때 다른 장애인들을 가르치며 공장장의 역할을 수행할 인재를 키우기 위함이었어요. 여러 작업장을 두루 다니며 전반적인 시스템을 익히다보니 1년이란 시간은 금방 지났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정작 국내의 열악한 환경 안에서 그 기술들을 써먹을 방법조차 없다는 현실 앞에 좌절하게 된다.
현악 4중주단 ‘베네스다’ 결성…본격적인 음악 활동
▲ 베네스다 팀원들과의 연주회 모습. 현재 3명의 팀원들도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그는 ‘정식으로 음악을 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가슴에서 움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재활학교서부터 바이올린을 함께 배우던 2명의 친구들과 대전의 모 대학교 오케스트라 청강생 모집에 지원했고 실력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귀인을 만나게 된다. 이전에 바이올린을 가르쳤던 강민재 선생의 대학 후배였던 고영일 선생이 그 대학 강사로 오게 됐는데 이들의 음악을 듣고 현악 4중주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제가 비올라로 전향하고 첼로 연주자 1명을 추가로 선발했습니다. 히브리말로 ‘은총의 샘’을 뜻하는 ‘베네스다’라는 팀명을 짓고 현악 4중주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됐죠. 예술이라는 것은 조기교육이 필요한데 저희는 늦게 시작한 만큼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연습 하나에 몰두했어요”
1976년 대전 가톨릭문화회관에서 첫 연주회를 시작으로 그들의 존재는 음악계에 서서히 알려지게 됐다. 특히 서울에서 개최된 베네스다 초청 연주회 자리에 참석했던 소아마비 협회 소속 정립회관의 황연대 관장이 그들의 음악을 듣고 ‘서울로 올라오라’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서울로 상경하면서 서울대 음대 교수님들과 금난새, 김남윤, 신동옥 등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지도를 받게 됐어요. 음악 실력이 향상이 됐지만 음대를 나오지 못한 저희는 곧 한계에 부딪혔죠”
“신시내티 음대를 졸업하신 신동옥 교수님이 ‘세계 최고의 현악 4중주단이 거기에 있다’며 추천서를 써 줄테니 테이프 오디션을 보라는 뜻밖의 제안을 하셨어요”
고입·대입 검정고시 1년만에 마치고 미국 유학
▲ 신 감독의 삶은 사람들과의 특별한 인연이 밑바탕돼 왔다. 유학을 가기 위해서 베네스다 단원들은 중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재활학교의 정규 과정은 초등학교에 제한돼 있었고 그 이후 교육은 학원 형태로 이뤄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열정 앞에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1년 만에 모두 통과하게 된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학비는 신시내티 대학에서 지원해 주기로 했지만 단원들 모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탓에 생활비 마련이 막막했던 것이다. 이 순간에 신 감독은 다시 귀인의 도움을 받게 된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베네스다 고별 연주회를 하게 됐습니다. 마침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시고 당시 아산병원의 이사로 계셨던 장정자 선생님이 저희 연주에 감동을 받으시고 유학 기간 생활비를 지원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 귀인들의 도움으로 신 감독은 1982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6년간 학사와 석사 과정을 거치며 음악인으로서 성숙해 갔다. 특히 우리나라와 다른 장애인에 대한 인식에 많은 것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신시내티 대학 오케스트라가 카네기홀에서 연주를 하게 된 적이 있어요. 한국에서의 차별을 많이 경험했던 저희들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죠. 그러자 당시 지휘자가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고 말해 함께 연주하게 됐습니다”
“받은 만큼 어려운 아이들에게 돌려주겠다”
유학을 마치고 1988년도에 귀국한 그는 고등학교 음악선생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서울 심포니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을 역임하고 1998년도에 구리시의 신생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맡게 된다.
“5년 정도 구리시 교향악단을 이끌면서 느낀 바가 큽니다. 처음에는 제가 교향악단을 이끄는 데 단원들이 많은 도움을 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가더군요. 조직의 대표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교향악단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들이 잘 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식이라고 생각해요. 비장애인 분들도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합니다.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할 것 없이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신 감독은 10년째 아산교향악단에서 음악감독을 역임하고 있다. 현재 그는 10년째 아산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어려운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위해 한 달에 1~2회 정도 ‘사랑의 로비음악회’를 연 것이 벌써 100회를 넘어 섰다. 약이나 주사로 치유되지 않는 정식적인 상처를 음악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제가 여러 선생님들에게 받았던 도움을 다시 다른 아이들에게 되돌려 주고 싶어요. 지적 장애인이나 소외 지역 아이들,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무료로 레슨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가 받은 것들을 죽을 때까지 다 베풀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장애자라는 사실이 핸디캡보다는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주어진 처지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감회를 밝힌다.
고비 때마다 귀인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신 감독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런 인연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데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제가 치열하게 살아온 것은 남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인동초’의 삶을 살아가고 있죠. ‘과거’를 통해 배우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의 비전과 꿈을 위해 나아갈 뿐입니다”
출 처 : http://www.sky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