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마지막 안배, 그는 현정이었다
1. 나를 용서하라
책의 바다였다.
아니 무공비급의 바다였다.
백평에 달하는 공간을 가득 메운 것은 수천 권에 달하는 무당의 진산절기였다.
태을검보를 비롯하여 장삼봉조사의 친필로 기록된 초기의 무당연감(武當年監)이 꽂혀 있고 무림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각종 무공비급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것은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다.
서고의 중앙에 서 있는 노도장.
그는 무당오자의 사부인 우대(羽隊)도인이었다.
그를 호위하듯 늘어서 있는 육인의 도인들.
삼인을 주시하는 노도장 우대의 눈은 진노로 타오르고 갈꽃 수염은 부르르 떨었다.
"믿을 수가 없구나."
서고에 나직히 울리는 음성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삼십년 심혈을 기울인 너희가 첩자라니,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단 말이냐? 무당문인들을 지도하는 사존의 신분으로서 어찌 이와같은 망령된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대도인의 형형한 안광이 삼인에게 집중됐다.
"자진(自盡)해라."
삼인이 자신들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열살의 소년들에게 파지법(把持法), 발검법(拔劍法), 운용법(運用法)을 자상하게 가르쳐준 사부일진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사부와 조우하다니.
삼인의 동공이 좁혀졌다. 그 눈에 푸르스름한 살기가 떠오르고.
챙!
맑은 검명이 울렸다.
사부의 면전에 검을 겨눈 그들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우대도인의 눈빛도 가늘게 떨었다.
"무당오자. 당신들은 양심도 없군."
낭랑한 호통이 울리면서 젋은 도인이 앞으로 나섰다.
삼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들이 언제 이러한 수모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구파일방 수천명의 문인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이며 천하의 협객으로 추앙받은 자신들. 무당오자가 아닌가.
하지만 무림에서 명망이 혁혁한 그들이건만 젊은 도인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첩자. 입이 있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가장 하류배의 인간이 자신들이었다.
"흥.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그래도 한 조각 양심은 남아 있나?"
제자 뻘 되는 젊은 도인의 비웃음이 비수가 되어 그들의 가슴에 박히고, 그 아픔에 몸이 진저리쳤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아랫사람에게 충을 가르치고 무를 가르치며 예를 가르친단 말인가? 그 동안 당신들의 가르침을 받은 무당문인들에게 무어라 변명할 것인가?"
붉은 빛이 감돌던 삼인의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어났다.
자신들이 첩자인 것은 만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나 이런 어린 도인에게까지 모욕을 당할 수는 없다.
삼인이 일제히 공격의 자세를 취했다.
"현정. 손에 사정을 두시게."
노도인, 무당오자의 사부인 우대도인은 감히 젊은 도인에게 반말을 하지 못했다.
이것으로 보아 젋은 도인이 무당에서 차지하는 신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수있다.
검을 쥔 삼인의 손이 슬쩍 흔들렸다.
"자네가 현정이었나?"
삼인중 제일 우측에 있던 일자, 청풍(靑風)도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풍도인이 허무하게 웃었다.
"후후. 전설처럼 전해 오는 진무전(眞武殿)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다면 죽음치고는 호사스럽지."
마지막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풍도인의 몸은 지면을 박찼다.
순간적으로 현정의 곁으로 접근한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화려한 검무를 추었다.
미간을 찔러오는가 싶으면 목젖을 노리고 목젖을 노리는가 하면 검은 어느세 명치를 찔러왔다.
과연 무당문인들을 가르치는 사존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솜씨였다.
"훌륭한 유운검(流雲劍)이오. 하지만 검의 곡선이 완벽하지가 못하군."
물이 흐르듯 슬쩍 발을 옮겨 청풍의 공격을 피한 현정은 고요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며 검을 뽑았다.
손잡이에 손이 닿았다 싶은 순간 어느새 검은 양미간 사이에 곳추세워져 있었다.
단순하면서도 깨끗한 발검식이었다.
'진무관의 연무(鍊武)는 혹독하고 잔인하다더니 과연 사실이군. 발검식만으로 따진다면 천하제일일 것이다.'
손바닥에 땀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청풍은 제차 공격의 자세를 취했다.
무당오자중 나머지 두명의 도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자의 좌우에 포진한 그들은 매서운 눈으로 현정을 노려봤다.
'진무관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검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삼십년이다. 결코 질 수 없다.'
삼인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청풍이 상대의 미간을 노리고 번개처럼 검을 찔러 가고 이자와 삼자는 현정의 허리와 다리를 노리고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당신같은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말이 필요없지."
현정이 몸을 움직였다.
버들가지처럼 흔들리는 발의 동작을 따라 필생의 힘을 기울인 삼인의 공세가 허무하게 스치고, 손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현정의 검이 춤을 추었다.
챙챙!
검과 검이 부딫히는 충돌음이 수차례 울렸다.
탄력을 받은 삼인이 제빨리 신형을 교차했다.
튕겨져 나온 검도 재차 방향을 틀어 현정의 상중하 일신 혈도를 노리고 쾌속하게 찔러갔다.
그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관전하던 육인의 도인들은 현정의 출신을 알면서도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러나 현정은 최소한 무당오자보다는 강했다.
검이 찔러오는 방향을 일별한 그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혈도를 노린 세 개의 검이 한치까지 근접했을 때였다.
"사문을 배반한 죄는 그 무엇으로도 상쇄할수 없음이니."
하검식을 취한 검을 수직으로 치켜 올리는 현정의 얼굴에는 엄숙한 기운이 흘렀다.
"위로는 장삼봉조사의 영전앞에 그대들의 죄를 고하고 아래로는 삼천 문인의 분노를 대신 함이라."
잘려진 검의 파편이 비상하고 현정의 검이 갈지자를 그렸다.
"무당을 사수하는 진무관의 관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무당문인으로서 그대들의 죄악을 징계한다."
스팟!
맑은 검광이 지난 자리에 혈우(血雨)가 내리고 분해된 육신들이 우박처럼 장서각에 흩뿌려졌다.
무당오자로 영명을 떨치던 삼인.
그 삼인을 이 단 이초 만에 격파한 가공할 신위에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섯도인의 감탄에는 아랑곳없이 현정은 검을 늘어뜨린 채 조금치의 움직임도 없었다.
삼인의 잔재를 바라보는 현정의 고요한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담곽우. 어떠한 이유로 무당을 건드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행동의 대가는 반드시 피로 치러야 될 것이다."
현정의 무시무시한 독백!
똑,똑!
선혈이 검신을 타고 지면에 혈화를 피웠다.
"진무관주의 무공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오인중 한 도인의 칭찬에 현정은 공손하게 답례했다.
"부끄럽습니다. 천하를 위진시키는 무당오로(武當五老)앞에서 어찌 소생의 미비한 잡학을 자랑하겠습니까."
"허허! 젋은 사람이 겸손의 미덕까지 갗추다니. 관주의 무공을 잡학이라 한다면 누가 자신의 무공을 자랑할 수 있으리오."
현정은 겸손히 읍을 취하고 우대도인의 뒷편에 자리했다.
"지금은 서로 상대를 칭찬할 때가 아니다. 이미 담곽우가 검원령을 발동한 이상 전 무림방파에 피의 바람이 불고 있을 터, 우리 무당도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무언가 목에 걸린 듯 탁한 노도장의 음성에 현정을 비롯한 오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년 심혈을 기울인 제자의 죽음을 보면서도 막지 못하는 사부의 심정을 그들은 익히 해아리고도 남았다.
"대사형. 그들이 목숨을 버려서라도 찿고자 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대도인은 오로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단지 추측할 수 있는 건 담곽우가 노리는 비밀문서와 장문인의 갑작스런 폐관은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우대도인의 응답에 무당오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장문인의 폐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 무당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데, 어찌 이번 사건과 연관이 될 수 있지요?"
말을 한 도인은 오로중 사로인 송백(松柏)도인이었다.
잘 다듬어 길게 기른 검은 수염과 부리부리한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정광이 이글거리는 눈.
얼핏보기에도 대단한 기도를 풍기는 도인이었다.
우대도인은 흘끗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바닥에 뒹구는 삼인의 시신으로 돌렸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으되 주변 정황을 살펴보면 이들의 죽음에서 어떠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담곽우가 심어놓은 첩자중 거물이 있다. 그는 무당의 모든 상황을 알 수 있는 신분일 것이고, 그가 검원에 장문인의 폐관을 알려줬겠지."
"장문인의 폐관을 알고있는 사람은?"
오로중 맏이인 일로 송화(松火)는 말끝을 흐렸다.
열 사람 만이 알고 있다.
그들 중 일곱 사람은 이곳에 있고 세 사람은 폐관한 장문인의 명을 듣고 모종의 장소로 출발한 상황이다.
도인들의 낯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설마 우리 일곱 사람 중에서?'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현정을 제외한 여섯 사람은 수십 년 간 한솥밥을 먹으면서 무공을 익히고 서로의 고민을 의논해 온 사형제들이 아닌가.
송백도인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코 관과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송백도인은 암울한 시선으로 일행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탐색(探索)하는 시선 속에 서린 의심이 불똥을 튀기며 허공에서 얽혔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팽팽한 대치 속에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지배했다.
"잠깐, 범인이 꼭 우리들 중에 있다는 가정이 잘 못 되었을 수도 있다."
손을 저으며 앞으로 나선 사람은 일로인 송화도인이었다.
"사제는 이곳에 없는 삼호법(三護法)을 말하고 싶나?"
우대도인의 말에 송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범인이 아닌 것은 내가 보장을 하지."
"무슨 증거로 그분들이 범인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던 삼로 송암(松岩)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우대도인 송일은 천천히 질문을 해온 송암을 향해 몸을 돌렸다.
"궁금한가?"
한마디 물음을 던지고 송암을 향해 다가서는 우대도인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살기가 번뜩였다.
이 돌연한 그의 행동에 송암을 제외한 오인은 깜짝 놀랐다.
"넌 이미 그러한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히려 나에게 물으면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창로한 음성이 묵직하게 잠서각을 울렸다.
송암의 정면에서 우대도인은 걸음을 멈췄다.
삼척의 공간을 단숨에 뛰어넘어 송암의 동공을 파고드는 눈빛은 철판이라도 뚫을 듯 강렬했다.
"하늘을 속일 수는 없다. 진실을 밝히고 자진해라."
"무슨 뜻입니까? 대사형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군요."
불을 뿜는 우대도인의 눈빛을 태연히 받아넘기는 그를 보며 오인은 심중의 의혹을 떨칠 수 없었다.
무당오로 중 삼로인 송암도인(松岩道人)을 의심한다는 것은 바로 무당전체를 의심하는 것과 같기에.
장문인 송영도인의 사촌이자 천하절경인 무당 칠십이관(七十二觀)을 관장하는, 무당서열 오위의 인물이 아닌가?
또한 온화하면서도 사리분명한 천품을 지녀 무당문인 중 그를 따르는 도인은 절반을 넘었다.
"우대사형. 셋째를 의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슨 오해가 있지 않을까요? 그가 장문인의 사촌동생인 것은 둘째치고 라도 그의 인격으로 보아 첩자일리는 없습니다."
송화도인이 삼제를 옹호하고 나섰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이었다면 나도 사제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심지어 결정적인 단서를 잡은 후에도 그 진의를 의심했을 정도이니까. 허나, 오늘의 결과로 난 사태의 진실을 파악했다."
육인의 시선이 일제히 우대도인 송일에게 고정됐다.
송일은 품안에서 조그만 대롱을 꺼냈다.
그것은 전서구(傳書鳩)에 매다는 통신용의 대롱이었다.
"삼제.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겠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말을 하기 더욱 쉽겠군. 내가 이 물건을 발견한 것은 너의 방이었다. 인정하는가?"
여섯쌍의 날카로운 눈빛이 쏘아지고 송암의 얼굴에 메마른 웃음이 흘렀다.
"우대도인이 나를 의심하는 것이 단지 그것 때문입니까?"
간접적으로 시인을 하면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송암의 목소리였다.
"아니지. 이런 단순한 증거로 어찌 자네를 의심하겠나?"
우대도인은 품안에서 한 장의 조그만 쪽지를 꺼내어 일로인 송화에게 건넸다.
쪽지를 확인하던 송화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다른 사람들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내밀어 쪽지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 장문호법 삼인이 장문인의 비밀지령을 받고 무당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마황동(魔皇洞)입니다.
三老 拜上.
쪽지를 확인한 현정과 사인의 무당오로는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그 멍한 상태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삼제. 네가 첩자였단 말이냐?"
울분에 찬 음성이 송화의 입에서 터졌다.
그러한 사형의 모습을 바라보는 송암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부인하지는 않겠다."
육인이 검을 뽑아 들며 쫙 퍼졌다.
송암은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정세를 살폈다.
오인이 서 있는 자세는 허름해 보여도 그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에 모든 방위를 차단할 수 있는 완벽한 목을 지키고 있었다.
'결국 검원령을 완성하지 못한단 말인가? 결국 형님이 실종된 것을 밝히지도 못하고 형님의 명성에 누만 끼쳤구나.'
송암의 눈빛이 암담하게 변했다.
송영자로 변신하고 있는 놈은 이번 일을 핑계로 송영자의 지지세력을 박살낼 것이다.
송암은 차라리 깨끗하게 죽기로 했다. 이들에게 잡혀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가 암중으로 진기를 심맥으로 보낼때였다.
"더러운 놈."
퍽!
우대도인의 일격이 그의 명치에 작렬했다.
한자 두께의 철판이라도 구멍을 내는 삼갑자에 달하는 공력이 실린 일격이었다.
"윽!"
답답한 신음소리가 울리고 송암의 몸이 일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우대도인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송암의 혈도를 짚어 자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첩자에게 자진은 편한 죽음이다. 네놈에게 처절한 고문을 가해 첩자의 말로가 어떠한지 본보기로 삼겠다. 끌고가라."
"으으! 대사형. 잠시 내 말을……!"
고통에 절은 나약한 음성이 두 사람의 고막에 파고들었다.
"우대도인. 삼제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송화가 제지하고 나서자 우대도인은 송암을 바라보았다.
"대사형. 지금부터 제가 하는말을 명심하십시오. 정의맹은 변질됐습니다. 현재 정의맹을 총괄하는 사람은 장문인이 아닙니다. 장문인이 폐관한 것은 본의가 아닙니다."
"흥. 무슨 헛소리냐? 네놈의 첩자질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작임을 모를 것 같으냐?"
우대도인의 비웃음을 듣는 송암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아닙니다. 지금 정의맹의 사람들은 속고 있습니다. 정의맹을 잠식한 무리들은 혈라와 도악을 이용해 중원무림의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이용하여 일거에 중원을 장악하려는 속셈입니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원주이신 담곽우의 생각이니 고려해 볼 가치가 충분할 것입니다."
송일의 얼굴에 싸늘한 비웃음이 스쳐갔다.
"어쩔 수 없는 첩자의 기질을 타고난 놈이군. 죽는 순간까지도 남을 세뇌(洗腦)하려 하다니. 그러나 너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송암은 안타까운 눈으로 우대도인을 바라보았다.
"할말이 없나보다. 이만 놈을 이송해라."
"휴!"
나직한 탄식이 송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죽음은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첩자라는 길을 선택한 이상 남에게 손가락질 당할 것은 분명한 이치이고 처참한 말로(末路)를 걷게 되리란 것도 충분히 감안한 그였다.
하지만,
수십년간을 믿고 따랐던 우대도인이 이토록 사고방식(思考方式)이 꽉 막힌 줄은 미쳐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나를 믿어주지 않아도 할 말은 없소이다. 오히려 당연하지요. 세상에 어느 누가 첩자의 말을 믿어줄 것이오."
"알면 됐다. 가자."
냉정한 우대도인의 음성을 듣는 송암의 눈에 소리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머지않아 무당의 상청궁이 핏빛으로 물들은 날 당신들은 내 말을…… 내 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대도인은 더 이상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송암의 아혈을 짚었다.
무당오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한차례 몸을 떨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잠서각을 빠져 나왔다.
서녘하늘에 붉은 노을이 타오르고 있었다.
육인은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각자의 거처로 향했다.
그날 밤 야심한 무당의 하늘에 한 마리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비둘기는 힘찬 날개짓으로 이내 까마득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현정은 감회어린 눈으로 야천을 응시했다.
그의 뇌리에 송암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송암. 당신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오. 당신으로 인해 검원과 무당은 일말의 희망이 있소. 부디 극락왕생하시오.'
2. 重疊되는 陰謀
탁자 위에 수북히 쌓인 첩지를 검열하는 감찰관의 손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삼경(三更)을 넘어선지 이미 오래되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손길이 지칠만도 한데 감찰관의 손길은 조금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검원에 입단하고 이곳에서 생활한지 언 십 년.
유상(柳尙)은 이제 이일은 진력이 날 정도로 숙달된 인물이다.
그의 손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동작으로 첩지를 주워 들고 한눈에 내용을 파악한 후 급수별로 구분한다.
검원에서 각 문파에 심어 놓은 첩자는 근 천명에 달한다.
담곽우는 이들에게 하루에 한 번씩 각 문파의 동향을 보고토록 명령했다. 일반적으로 전서구가 날아드는 시간은 해질 무렵부터 삼경이전의 시간까지이다.
정보의 가치는 신속성과 보안유지에 있다.
유상을 비롯한 열 명의 감찰관이 백장의 첩지를 구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반시진(半時辰)이 채 걸리지 않는다.
보통 하루에 날아든 보고서중 초특급의 비밀문서는 몇 장되지 않는다. 나머지의 문서들은 문주의 일상에 관한 보고이거나 각 문파가 새로 뽑은 제자들의 신상명세서 정도이다.
어찌 보면 지루하다 할 수 있는 이일에 종사하는 십인의 사내들이 일의 보람을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년 중 열흘이나 될까.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극비문서를 입수하면 자신이 마치 천하의 비밀을 홀로 알고 있는 듯한 뿌듯함.
바로 이 맛에 십인의 사내들은 십 년을 하루같이 이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유상을 비롯한 십 인의 사내들은 모두 검원의 심장부인 양주에 거주하고 있다.
사사로운 행동도 모두 풍운단의 감시를 받는 이들은 그러나 원주에 대해서 불평불만(不平不滿)을 하지 않는다.
담곽우는 이들에게 남들이 모르는 특혜를 베풀고 있다.
빠르게 첩지를 주워들고 한눈에 훑어본 후 정보의 가치별로 분류하던 유상이 손동작을 멈췄다.
탁,탁.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는 그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떠올라 있고 눈에는 기광이 번뜩였다.
무심한 표정으로 분류작업에 열중하던 구인의 사내들이 일시에 손을 멈추고 유상을 지켜봤다.
초특급 비밀문서를 발견했을 때 유상은 항시 이러한 행동을 했기에 그들의 시선에는 자연스럽게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유상, 한 건 건진 모양이군?"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느물거리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모철(募鐵). 제자리에 멈춰."
유상은 눈에 살기를 띠고 유상은 사내를 노려봤다.
살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에 살기가 번뜩이자 모철이라 불린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이죽거렸다.
"후후. 겁은 우라지게 많은 인간일세. 누가 자네의 첩지를 앗아가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상은 그가 비웃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십 인의 호위무사가 유상의 주위에 겹겹의 호위망을 형성했다.
지하 석문을 나서는 그의 뒤통수에 아홉 사내의 시선이 꽂혔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 유상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는 실내를 벗어났다.
계단을 오르는 그의 눈에는 열 개층으로 이루어진 계단이 모두 황금으로 보였다.
'백냥의 상금이라. 여편네가 기뻐하는 것이 눈에 선하군. 재빨리 돈을 건네 준 후 금홍이년을 만나러 가야지. 고년의 야들야들한 손맛을 본지 언젠가?'
계단을 올라서자 저 멀리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삼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유상과 호위무사들은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건물에 들어섰다.
"무슨 기쁜일이 있는 것 같소이다?"
건물을 경비하는 초로의 사내가 아는체를 했다.
유상은 한쪽손을 들어 사내에게 인사를 대신하고 바쁘게 감찰당주의 숙소로 들어갔다.
유상은 조심스런 손길로 가슴에 품고온 첩지를 꺼냈다.
"바로 이것입니다."
희디흰 손이 첩지를 건네 받았다.
"이것을 본 사람은 너 이외에는 없겠지?"
감찰당주 신무(辰茂)의 음성은 빙굴을 휘감고 나온 북풍처럼 냉기가 흘렀다.
"물론입니다."
느긋한 동작으로 첩지를 펼쳐든 신무는 잠시 후 용수철이 튀기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유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신이라고 별수 있소?'
얼음가루가 펄펄 날리던 신무의 눈은 지금 이순간 놀란 토끼눈처럼 동그래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해야할 일을 깨닭은 사람처럼 급하게 문을 열고 나서며 유상에게 명했다.
"나를 따라와라."
어느덧 평상시의 어조를 회복한 신무의 음성을 들으면서 유상은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그가 본 첩지의 내용은 엄청났다.
"대주님. 감찰당주 신무님이 급한 일로 방문했습니다."
단잠을 깨우는 시비의 목소리에 하승관은 짜증이 일었다.
평상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그는 사생활을 침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더구나 오늘은 모처럼의 단잠이기에 유난히 짜증이 났다.
"무슨 일인가 물어 보고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내일 아침에 보자고 전하거라."
맨살에 닿는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벗어나기 싫은 것은 나이 탓일까? 아니면?
문밖에서 몇 차례 대화가 오고갔다.
"건방진 놈. 일개 당주가 웬 말이 저리 많아."
스르릉!
방문을 여는 소리에 하승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연화(蓮花). 겁이 없구나."
하승관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담겨있었다.
"연화가 아니외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음성이 고막을 울리자 그는 서서히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비에게 무슨 일인가를 전하라 했을텐데?"
"감찰당이 하는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하형이 아니시오? 어찌 일개 시비에게 감찰당의 일을 통보한단 말이오?"
신무의 음성에도 자연스럽게 짜증이 묻어났다.
"감찰당과 금의대가 하는일은 구분이 있는 법. 난 무슨일로 그대가 이 야심한 밤에 나를 찿아왔는지 이유를 묻는 것이다."
여전히 반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찿아온 이유를 묻는 하승관.
냉혹한 눈으로 하승관을 쏘아본 신무는 찬바람이 일도록 돌아섰다.
"당신을 찿아온 내가 멍청하군. 실컷 잠이나 자시오."
쾅!
부서져라 문을 닫고 나가는 신무를 뻔히 바라보던 하승관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귀찮은 일에는 대도록 상관하지 않는 것이 몸에 좋지."
마치 누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 하승관은 침상에 몸을 뉘였다.
창문으로 어스름히 들어오는 달빛이 점점 사위어가고 하승관의 침소에는 태고의 정적이 찿아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직히 코고는 소리가 뚝 그쳤다.
"갔느냐?"
하승관의 음성이었다.
"방금 떠났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철저히 제한 삭막한 음성이 천장에서 들려 왔다.
"후후. 분기탱천한 신당주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 허나 항시 행동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법. 일단은 원주를 만나보는 것이 순서이겠군. 준비하도록."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미미한 기운이 일었다.
이불에서 몸을 빼낸 하승관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침상을 한 번 돌아본후 방안에서 사라졌다.
"이 보고서의 신뢰도는?"
"십할(十割)입니다."
신무의 자신에 찬 음성을 들은 담곽우는 침중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매사에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이론상으론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나 신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나 헛점이 있다. 정보를 총괄하는 당주로서 완벽이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는 항시 이면이 있단 사실을 누구보다 잘아는 신당주가 한 말이니 내 믿기로 하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신무의 머리위로 담곽우의 눈길이 고정됐다.
"이만 물러가라."
신무가 조심스런 걸음으로 담곽우의 곁을 물러서다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창가를 바라보던 담곽우가 손을 저었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말이 금의대주와 연관이 있다면 들을 필요가 없네. 그는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니까."
조용한 음성이었지만 거역할 수 없는 거인의 명이었다.
신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원주의 처소에서 물러났다.
모퉁이를 돌아서서 광장을 가로지르던 그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설마 담곽우가 내 신분을 눈치챈 것이 아닐까?'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어 자신의 상상을 부정하던 신무는 등줄기를 훑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도 할 수 있다. 이 평범한 진리를 나는 왜 간과하고 있었을까?'
신무는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수십 년 간 정보계통에서 일을 한 그는 곧 결론에 도달했다.
'유상이 놈을 죽여야 한다.'
지면을 박찬 그의 몸이 허공에 긴 꼬리를 남겼다.
하승관은 원주의 처소에 들어서다 신무가 몸을 날리는 것을 보곤 기이한 살소를 머금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겠군. 검원령의 발동과 이중첩자의 색출이라!'
"흐흐. 아주 재미있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움켜쥔 손이 머리를 확 재꼈다.
유상의 마른 얼굴이 벌겋게 타오르는 횃불아래 드러났다.
군데군데 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상대방을 째려보는 세모꼴을 이룬 사안(蛇眼)엔 독기가 번들거렸다.
"근래 들어서 모처럼 쓸 만한 물건을 만났어. 사실 요즈음 애들은 너무 약한 면이 있거든."
"크윽!"
칼날같이 세워진 손끝에 목젖을 찔린 유상의 입에서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흘렀다.
"어허 왜 이러나. 천하의 유상이 이 정도 수법에 비명을 지르다니."
이죽거리는 사내의 입가에 섬뜩한 웃음이 흘렀다.
머리칼을 움켜쥔 손이 유상의 고개를 다시 치켜들었다.
"퇫!"
누런 가래침이 모철의 얼굴에 척 늘어 붙었다.
전신을 결박당한 채 무릎을 꿇린 유상이 상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호오. 아직도 팔팔하군."
가래침을 쓱 닦아 낸 모철은 벽으로 다가가 고문도구가 즐비한 선반에서 가느다란 바늘을 집어 왔다.
길이가 세치나되는 대침이 싸늘한 빛을 뿌렸다.
"고문하는 사람이 가장 즐거울 때가 어느 때일까? 바로 너 같은 놈을 만났을 때야. 적당히 질기고 적당히 반발할 줄 알고. 게다가 적당한 독기도 있고,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지."
모철의 손이 턱의 양 가장자리를 잡고 힘을 주자 유상의 입이 벌어졌다.
"사람의 몸중 가장 신경이 예민한 곳이 어딘지 아나?"
모철은 음침한 얼굴에 징그러운 웃음을 지면서 서서히 대침을 유상의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누가 알려줬더라? 자내던가? 눈을 감고 좁쌀을 쉘수 있는 감각을 지닌곳은 혀(舌)밖에 없다고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
모철의 손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예리한 대침이 수십번 혓바닥을 뚫었다.
유상의 눈이 금방이라도 눈 밖으로 튀어나올것처럼 부릅떠졌다.
입안에 가득 고인 선혈이 턱을 타고 줄줄이 흘러내렸다.
"나는 마음이 모질지 못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야.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혓바닥을 잘라 버렸을 텐데. 유상, 그렇지 않나?"
모철을 바라보는 유상의 눈꼬리가 가늘게 째졌다.
예리한 바늘에 수십 번 찔리느니 차라리 혀가 짤리는 게 고통을 덜 느낀다. 놈도 뻔히 아는 사실이다.
"개새끼."
알아듣기 힘든 어조이지만 유상의 입에서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징그럽게 웃던 모철의 얼굴이 굳어졌다.
"개새끼라고? 나 모철이 개새끼란 말이지?"
가느다란 대침이 유상의 전신에 푹푹 파고들었다.
한식경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유상의 몸은 피투성이로 변했다. 마침내 대침이 무릎 연골을 관통하자 끈질기게 버티던 유상은 혼절하고 말았다.
냉랭한 시선으로 축 늘어진 그를 일별한 모철은 똑,똑 소리를 내면서 손마디 관절을 꺾었다.
"흐흐. 이제 슬슬 본론에 들어가 볼까?"
모철은 미리 준비한 물을 유상의 머리에 뒤집어 씌웠다.
"으으!"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정신이 든 유상은 눈앞에 버티고 선 모철을 바라보곤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모든 화의 근원은 여자라 하더니. 유상아. 이 무슨 몰골이란 말이냐!'
금홍이를 만나러 간 것이 실수였다.
년의 사탕발린 소리에 긴장을 늦춘 것이 평생의 화를 부를 줄이야.
유상은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 살 박이 어린 아들의 재롱떠는 모습과 공주처럼 어여쁜 열 두살 딸의 모습이 망막을 스쳤다.
---검원을 배반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
어린 자식들의 머리를 내치는 칼날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죽어도 비밀은 지켜야 한다. 그것만이 내 핏줄을 지킬수 있다.'
"유상. 말해라. 네놈이 본 첩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느물거리던 모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자 한자 끊어 말하는 어투에는 기필코 비밀을 알아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유상은 그의 말을 듣고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차라리 죽자.'
모질게 마음먹은 유상은 아직도 고문의 충격으로 얼얼한 혀를 힘껏 깨물었다.
퍽, 하는 소리가 고막을 진동하고 혀를 깨물던 유상의 입이 맹하니 열렸다.
"서툰짓 하지마라. 유만이라 했지? 아들놈을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말을 하는 것이 좋을거다."
유상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한 사내가 어린아이를 안고 들어섰다.
유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만을 안고 들어서는 인물도 감찰관의 일인이었다.
아들에게 시선을 옮긴 유상의 얼굴이 일그러들었다.
횃불에 붉은 홍조를 띤 아이의 얼굴은 천상의 소동처럼 귀엽건만 아이의 목에 닿아있는 손에는……!
"지금부터 셋을 새겠다. 그 동안에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너는 잘린 자식의 목을 보게 된다."
"비겁한 놈. 아무리 목적이 중요하다고 해도 말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사내라 할 수 있느냐?"
유상의 절규가 지하석실에 매아리쳤다.
모철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리더니 얄팍한 입술이 열렸다.
"하나."
사내가 비수를 유만의 목에 바짝 갖다 대었다.
유상의 눈빛이 암담하게 젖어들었다.
그의 뇌리는 바쁘게 돌아갔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둘."
모철의 냉혹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어린아이의 자지러진 울음이 그 소리를 덮었다.
유상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아이의 여린 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지고 선홍빛 맑은 선혈이 비수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목을 뒤로 재낀 아들이 서럽게 울어대는 소리가 유상의 고막을 두둘겼다.
보기싫게 일그러지는 유상의 얼굴을 바라보던 모철이 얇은 입술을 실룩였다.
"셋."
칼로 자르듯 단호한 음성이 들림과 동시에 유만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멈췃."
다급한 유상의 외침이 울렸다.
어린아이의 목에 깊숙이 비수를 긋던 사내가 손을 멈추고 모철을 쳐다보았다.
"늦었다. 죽여."
피빛으로 충혈된 눈이 모철에게 고정되었다.
"난 셋을 샌다고 했고 이미 셋을 새었다. 모든 일은 시기가 중요한 것. 이번 일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가련하게 울던 유만의 울음이 뚝 그쳤다.
"네놈이 독한줄은 알았다만 이정도 일 줄이야. 모철. 나 혼자서 죽지는 않겠다."
"과연 그럴까?"
모철이 손뼉을 치자 다른 사내가 들어섰다.
그 사내의 손에 이끌려 들어오는 여자와 어린 소녀를 본 유상의 얼굴이 썩은 돼지간빛으로 변했다.
"자고로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 했다. 유상. 네놈이 얼마나 독한지 오늘 내 눈으로 확인하마. 시작해라."
"여보. 어서 말하세요. 유화마져 죽일수는 없어요."
여인의 절규가 실내의 공기를 갈가리 찢었다.
유상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고민에 잠겼다.
자신이 입을 열지 않으면 놈의 성격으로 보아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사태가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첩지의 비밀을 말해 준다고 자신의 일가를 살려줄 놈들이 아니다.
방법은 없다.
이대로 비밀을 간직하고 죽는 것많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복수다. 놈도 첩자일 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모철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독(毒)은 독(毒)으로 갚는다.'
찌익!
아내의 옷이 타인의 손에 의해 찢기는 소리에 유상은 고개를 들었다.
수치심에 바들바들 떨며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의 뒤에 바짝 달라붙은 유화의 겁먹은 눈빛이 비수처럼 유상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유화야. 미안하구나.'
유상은 굳건한 신념이 담긴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난 십 년 간 고생이 많았소."
여인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지난 십년간 살을 맏대고 살아온 남편이다.
그가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건만, 여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오열이 터져나왔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남편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은 이미 산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으윽."
짧막한 비명과 함께 여인의 교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엄마."
유화가 질겁을 해서 달려들었다.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소녀의 옷을 홍건하게 적셨다.
"저리 꺼져."
모철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채인 유화의 가녀린 몸이 벽에 부딪치며 경련을 일으켰다.
보다 못한 유상이 눈을 감자 모철의 주먹이 명치에 꽂혔다.
"잘 봐 둬라. 이게 네놈이 고집을 부린 결과이니까."
퍼렇게 멍이 든 유상의 눈이 떠졌다.
놈의 말이 아니라도 십 몇 년 살을 맞대고 살아온 아내의 가는 길을 지켜봐 주는 것이 남편의 도리가 아닌가.
피맺힌 눈으로 유상은 아내의 임종을 지켜봤다.
바르르 떠는 손은 무엇을 잡으려는지 허공을 몇번 휘젖고는 맥없이 툭 떨어졌다.
모로 돌아간 여인의 얼굴은 유상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사내의 굵은 눈물이 여인의 콧잔등에 떨어져 핏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흐흐. 이제는 이 꼬마계집만 남았나?"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모녀를 데리고 온 사내가 유화를 끌고왔다.
곱게 피어나던 열두살 소녀 유화의 얼굴은 모철의 모진 발길질에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흐흐. 이 어린 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유상. 너의 의견은 어떠냐?"
어린 소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우악스런 모철의 손이 좌우로 요동을 쳤다.
그 순간 유상은 보았다.
모철의 손놀림에 흔들리며 공포에 절어있던 유화의 눈빛이 녹색으로 변하는 것을.
모친의 시신과 동생의 시신을 바라보는 망가진 유화의 얼굴에 가득히 피어오르는 진득한 살기를.
그리고 째진 눈자위를 타고 흐르는 붉디 붉은 피를.
'유화야, 살아다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퍽!
연달아 지면을 들이받은 유상의 머리가 터지면서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악마의 취미에 심취해 있던 모철이 손을 쓰려 했을 때는 이미 유상의 혼은 지상을 떠난 후였다.
"생긴 것 만큼이나 지독한 놈이군."
"정보를 알아내기 이전에 놈이 자진을 해서 큰일입니다."
"걱정할 것 없다. 첩지의 내용은 이미 알고있으니까. 내가 원한 것은 이놈이 아는 사실과 대조를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사내들은 존경하는 눈으로 모철을 바라보다 손에 든 유화를 가르켰다.
"이 계집은 어찌하지요?"
모철은 잔혹한 눈으로 유화를 쳐다보고는 벌레를 본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죽여버려."
여지껏 잠잠히 있던 유화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열두살 소녀의 웃음이 아니었다.
수십년 한을 지니고 살아온 여인이 일시에 분노를 폭발시키는 듯한 섬뜩함이 베어있었다.
모철을 제외한 두 명의 사내는 한 서린 웃음에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유화가 웃음을 멈췄다.
어린 소녀는 삼인을 노려보며 한 맺힌 음성으로 절규를 토해냈다.
"엄마, 아빠를 죽인 놈들. 나는 죽어서도 원귀가 되어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짝!
모철이 뺨을 갈겼다. 홱 돌아간 얼굴을 바로잡은 유화가 잡아먹을 듯이 모철을 노려봤다.
"죽이는 것은 잠시 보류다. 이년의 기억을 제거시켜서 홍방에 팔아넘겨. 용모가 못생겼다고 거절하면 그냥 줘버려. 대신 주인들에게 단단히 일러라. 책임지고 이년에게 저녁마다 나이만큼의 사내를 붙이라고. 알았나?"
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처소 지하에 마련된 비밀장소를 벗어나 밖으로 나온 모철은 심호흡을 한 후 어디론가 몸을 날렸다.
곧이어 나온 두 사내는 각기 자루 하나씩을 걸머지고 있었다.
그들도 빠른 걸음으로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이것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중원이다."
조용한 음성이 어둠 속에서 들려 왔다.
훤칠한 키에 걸치고 있는 백의가 북풍에 펄럭였다.
담곽우의 양옆에는 얼굴이 망가진 담자성과 남궁유혁이 서 있었다.
"날 잔인하다 생각하느냐?"
담자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유상은 조직의 일원으로서 범해서는 안될 계율을 어겼습니다. 초특급의 첩지를 취급한 자는 칠일간 외출을 금하는 것을 알면서도 일개 기루의 여자를 만나기 위해 본원의 계율을 어긴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맞다. 오늘 네가 한 말을 명심해라."
"그런데, 첩지를 건낸자는 어찌합니까?"
"그대로 둬라."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담곽우는 시선을 아들에게 고정시켰다.
"아들아, 단체의 우두머리는 바늘침상에서도 숙면을 취할 정도는 되야 한다. 눈앞에 닥친 위기보다는 먼 앞날을 생각해서 역으로 이용할 줄 아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아직은 아버님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제가 확실히 느낀 것은 죽일 상대는 확실히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쓸데없는 자비심은 화로 돌아옵니다."
남궁유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혹시 차도살인을?'
그는 의심스런 눈으로 담곽우 부자를 쳐다봤다.
담곽우는 남궁유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맞다."
남궁유혁은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첩지의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특급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한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담자성의 말에 남궁유혁은 고개를 돌렸다.
불과 두달전만 하여도 개미한마리 죽이는 것도 꺼리던 담자성이었다.
가족은 물론 수하에게 경어를 사용하고 수하들을 보살피는 따스한 심정과 모든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성품으로 검원의 자랑이었던 담자성이다.
그러한 그가 거리낌없이 살인을 이야기하고 있다.
'혈라에게 당한 패배의 고통이 그렇게 심했단 말인가?'
남궁유혁은 문득 금천린이 생각났다.
수백 번의 실전을 거치면서 훈장처럼 각인 된 검상.
남들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징그럽다 느꼈을지 모르나 남궁유혁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금천린의 인생역정을 나타낸 것 같아 그 얼굴을 대할 때마다 부럽기조차 했었다.
그러나 담자성이 주는 흉터는 느낌이 달랐다.
마치 흉신악살을 대하는 것처럼 섬뜩했다. 몇 년을 함께 지낸 정든 얼굴이 사라져서는 분명 아니다.
남궁유혁은 한켠에 비켜서서 두 부자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밤하늘을 응시하던 남궁유혁은 사람이 다가서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조용한 눈길로 담곽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황동을 찿아가라."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