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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眞/繪畵 스크랩 또 한사람의 천재화가 `이쾌대`
isunamana 추천 0 조회 14 14.01.06 15: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열의 화가  이쾌대(李快大) - 한국 근대미술의 해방고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근대 이후 한국의 화가 중 가장 존경받는 화가는 누구일까? 필자 개인적으로 짚어보니, 박수근이나 이중섭 그리고 김환기 혹은 이인성등이 떠오른다. 그들은 대가로서의 기질과 요건을 두루 갖춘 인물들이다. 특히 박수근이나 이중섭은 화가로서의 삶 외에도 여러가지로 신화적인 요소를 갖춘 인물들이다. 무학(無學)에 가까운 박수근의 학력이나 궁핍함의 대명사가 된 이중섭의 은지화는 때로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가림막이 되어 오히려 화가로서의 작품을 대하는데 선입견이 생기기도 한다. 도상봉의 온화한 그림이나장욱진, 손일봉, 오지호의 작품들도 예외는 아니다. 암울한 시대의 조류는 이렇게 작가를 작가로서만 바라보게 하는 순수함을가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폄훼하거나 도외시 할 이유 역시 없다. 삶으로서의 이야기도 화가나 화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겐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지나치게 편중되어 신화적인 삶 자체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문제다. 왜우리는 박수근의 아름다운 그림을 말하기 이전에 그의 가난했던 삶과 수십 억 원을 호가하는 그의 작품가격이 먼저 회자되어야 하며,행려병자로 쓸쓸히 죽어간 이중섭의 삶에 대한 드라마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박수근의 수채화 작품 [팔레트가 있는 정물. 1962년]. 박수근의 작품은 거친 질감에 단색조 그리고 형상이 단순하게 표현된한국적 소재의 작품들이 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있지만, 때로는 그가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구사하며, 출중한 표현력을지닌 작가였는지 잘 모른다. 위 작품은 잘 알려지지 않은 박수근의 수채화이며, 필자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개성적이면서도 생생한묘사력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읽혀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 근,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보는데 있어 문제점은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고희동(1886~1965) 이래 한국의 서양화는 대체적으로 개화기의 서구문화 유입으로 인한 것 보다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조류로인해 일본의 양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한국 근대 화단에 하나의 조류가 되었으며, 식민 한국에주로 인상주의 화풍에서 표현주의 계열의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며 최소한고전주의부터 미술의 사조를 섭렵할 수 있었던 여유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러한 여유나 여건이 형성되지 못했고 그들의 당시 조류에만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로인해 한국의 서양화는 처음부터 인상주의적인 화풍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오랜 시간동안 한국화단을 지배했으며, 20세기의 서구 모더니즘이 급격하게 유입되기까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이것은 한국화단의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조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순수미술의 다양성은 없는 듯했다.

그러나 시대적인 조류로 인한 한국적 인상주의의 패러다임이 한국근대화단의 진정한 진실일까? 한국화단의 근대를 이렇게 밖에 볼 수밖에없는 큰 이유 중 하나가 한국사회의 이념대립에 희생된 시대적 오류에 그 근원이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 시대의 진실을 제대로 알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03년 필자가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때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대구를 찾는 것을 기념해 열렸던 [북으로 간 작가展]을 본 것은 가히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김기만의 수묵담채화. 고(故) 김기만(1929∼2004)은 정창모, 선우영, 김상직 화백과 함께 북한의 조선화 4대 화가로평가받고 있다. 1만 원 권 지폐의 세종대왕이 그의 손에 의해 그려졌으며, 2002년 별세한 운보 김기창(1913∼2001)화백의 셋째 동생이기도 한 김화백은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가는 바람에 운보와 이별하고, 북한에서 미술활동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한산도전투. 1967], [홍경래농민폭동. 1973], [궐어. 1995] 등 여러 기관에서 작업한 작품과 [금강산],[참새], [초겨울], [달밤의 흰 매화] 등 서정적인 문인화도 수없이 남겼다.

 

 



북한의 미술은 1980년대 후반 전국 대학을 중심으로 강연했던 일련의 문화행사를 통해 이미 접한 바가 있으며, 이후 여러 언론을통해 익히 보아왔지만, 그것은 전란 이후의 북한 미술이었으며, 사회주의적인 이념에 충실한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 북한식으로 소화된그림들이었다. 이미 서구주의에 물든 필자에게 북한미술은 건전한 소재의 생소함이나 테크닉의 화려함 외에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못했고, 이내 북한의 작품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런데 2003년 전시된 [북으로 간 작가展]은 필자가 익히 알고 있는북한미술이 아니었다. 길진섭, 이쾌대, 임군홍, 리팔찬, 김기만 등 월북화가 십여 명의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회를 한 자리에서 볼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행운이었으며, 예상 밖으로 그들의 작품은 필자의 가슴을 울려왔다.(전시는 1940~50년대 한국전쟁 전후의 작품들로 가족들이나 개인 소장가들이보관하고 있는 작품들과 북쪽에서 제작된 작품 가운데 국내에서 보관중인 작품40여점이 출품 되었다.)

북쪽의 응원단으로 왔던 아름다운 북한처녀들 만큼 신선한 충격을 준 그들의 작품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중 단연 가슴 깊이 각인된 것은 이쾌대*1의 작품이었다.

 

 

[군상-4(1948)]. 이쾌대 작.  캔버스에 유채(177x216cm). 한국 근대화가 인상주의 화풍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닌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쾌대의 군상은 흡사 바로크 시대의 대가 루벤스의 작품이나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연상하게 할 만큼 화려하고 힘차게 표현되어져 있다.

 


이쾌대의 작품 중 [군상-4]는 해방을 기원하고 감격해하는 서사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광복의 날을 쟁취하려는(혹은쟁취한) 건강한 육체의 인간 군상이 한 덩어리로 표현되어있다. 이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은 이쾌대의 대표작중 하나로 일컬을 수있으며, 감격적인 시대의 한 풍경을 표현한 한국의 ‘식민적 조형의 해방’으로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해방고지.(1948)]. 이쾌대 작. 캔버스에 유채(220x160). 그의 작품은 철저한 구도법으로 시작되어 모티브 하나하나가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하나의 서사적인 이야기를 이끌어 내고 있다. 그의 작품을 21세기나 되어서야 보며 떠오르는 안타까운점은 우리가 이쾌대라는 화두를 너무 늦게 접했다는 사실이다. 평생 이쾌대의 작품을 소장하다 1980년 유명을 달리한 그의 부인이생전 이쾌대의 작품을 단 한 번도 한국의 사회에 보이지 못했던 것은 시대가 만든 이념의 비극이 20세기가 끝나갈 무렵까지이어져왔다는 이야기이며, 이것 또한 한국 근대 역사의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로 북한 미술의 근본적인 방향이 리얼리즘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하지만 기실, 이쾌대의 작품은 사실주의의 작품이 아니다.

이쾌대는 눈에 보이는 사실주의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주의를 그리는 하나의 낭만주의에 기초를 둔 것인지도모른다. 위험한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자의 시각으론 적어도 이쾌대의 50년대 이전 화풍은 사실주의가 아니라 낭만주의 혹은상징주의라 말하고 싶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근대 화력에 있어 이념에 의해 구분되어진 편협한 패러다임의 단서를 제공한 것에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한국적 인상주의(엄밀히 말해 일본식 인상주의)에소급되어있다는 패러다임은 그 의미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쾌대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의 근대화는 바로크의 화려함과 낭만주의의 폭발적인 감성표현 그리고 상징적인 이야기 구성 등의 영역으로 확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쾌대의 미술사적 의의는 이런 史적인 이유에서만 그의 존재가치가 부각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표현력은 당시 한국 미술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묘사력과 사실적 표현을 기반으로 한다.

 

 

 

 

[봄처녀. 1940년대 말]. 이쾌대 작. 캔버스에 유화. 이 작품은 이쾌대의 작품 중 그의 이념적 사상이나 소재를 떠나 가장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입상으로 그려졌지만 배경의 표현이나 명암처리 등을 보았을 때 모나리자의 구도를 연상케 하며,묘사력이나 색감처리에 있어 자연주의나 인상주의적인
필법으로 완벽하게 마감되어있다. 당시 이 정도의 데생력을 보인 화가는 일본을포함해서도 아마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을 것이다. 인물의 표정은 많은 이야기를 담은 듯 보이며, 당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칭송받았던 김은호(친일 화가로 운보 김기창의 스승)가 극사실로 그린 관념적 인물화에 비추어 보아도 손색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것과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담백하고 소박한 그러나 내강의 온유함을 표현해낸 그야말로 시대를 가르는 조선 여인의 표상을 보는 듯하다.이런 그의 작품을 다시 대하며 느끼는 슬픈 감정은 여러 가지로 교차한다. 왜곡된 인간들이 만든 이념이라는 썩어문드러진 이유때문에 뛰어난 표현력과 화려한 감성을 동반한 한국 근대 화단의 천재 이쾌대를 반세기동안 묵혀놓을 수밖에 없었던 전과처럼 그나마잠시 조명하였다가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또 다시 반복되는 신자본주의 시대의 이념과 조류에 묻히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우려를 생각하면 말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쾌대의 사실적인 표현력(사실주의가 아니라)은 작품 [봄 처녀]를 통해서도 익히 알 수 있다.모나리자의 구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필자의 추측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묘법이 르네상스의 화풍에서 고전주의와자연주의 그리고 인상주의를 두루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유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쾌대의 표현방법이 이러한 사실적인 영역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그가 표현하는 이 사실적인 묘사와 깊이 있는 공간감은군상을 비롯한 역동적인 몇 몇 그림들을 통해 절대적인 양식인양 보여 졌지만 그의 화풍이 비단 그것만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부녀도. 1941]. 이쾌대 작 캔버스위에 유화. 이 작품은 1940 년경에 그려진 [부인도]처럼  인물의 묘사에 있어 외형선을선명하게 그려 넣어 표현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한국화에서 볼 수 있는 선이기도 하며, 인상주의 이후 야수주의 작가들이 즐겨사용했던 방법이다. 물론 이쾌대의 [부녀도]는 전자에 더 가깝지만, 배경의 원색적인 색상구사나 평면적인 표현법은 당대의 한국적인상주의의 화풍을 넘어서는 양식으로 말할 수 있다. 특히 색상배치는 이전의 그의 화풍에서도 잘 볼 수 없었던 구성을 보여준다.마티스의 원색구성을 연상케 하는 배경의 노란색과 초록색 그리고 붉은색의 대비는 한 화면에서 구사하기 힘든 색상의 조화이다.1940년대에 그려진 일련의 작품들이 이렇게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눈여겨 볼만한 요소이며, 이쾌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다양한 시각의 견지가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쾌대가 40년대에 그린 드로잉 작품들. [마부(왼쪽)]와 [한민이]. [마부]는 거친 선을 활용한 매우 개성적인 드로잉이다.마부와 말의 표정이 고단한 인간상과 순박한 동물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작품 [한민이]는 [마부]와는 달리 부드러운선으로 잠자는 아이의 따뜻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배경에 적어놓은 몇몇의 이름들은 당시 이쾌대가 고민했던 화가로서의 일상을상상하게 한다. 작품에 적힌 피카소, 브라크, 루소 같은 거장의 이름들은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나란히 그려진 아이의평온한 모습을 통해 필자는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작업과 가족 사이에서 번민했던 작가의 모습이 필자의 삶과 오버랩이되어서였을까? 아이의 얼굴 주변에 적힌 유럽 화가들의 이름들을 통홰 그가 고민했던 조류들에 대한 호기심을 읽을 수 있다.놀랍게도 적힌 화가의 이름들은 당시 세계로 퍼져나간 가장 신조류의 작가들이다.

 

[부녀도]나 그의 드로잉들은 그의 화풍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읽게 하며, 실험적 표현의 필치들이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시대가 허락하는 범주를 넘어선 그의 화풍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지적 호기심의 영역과 그가 추구했던 예술론의 본질이 어느 한 곳에 머무르고 있지 않는 것은 이쾌대를 읽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가 될것이다. 그리고 그런 텍스트의 다각적인 이해와 분석은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기도 하다. 분명 이쾌대의 이런 다양한 화풍과 정열적인화력은 다시 한 번 평가되고 분석되어야 할 것이며, 그의 지성이 이룬 한국 근대 예술계의 업적 또한 재분석하고 정립되어야 할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 이런 이쾌대의 조형관과 다양한 화풍의 당위성 혹은 정열적이었던 그의 열정을 이해하게 된다면,그때는 이쾌대의 삶에 대한 진정성을 읽어보자고. 언젠가 그의 또 다른 전시회에서 보았던 아내를 향한 그의 뜨거운 연서*2가생각이 난다. 지금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 필자의 기억에 가물가물 하지만 그의 글을 통해 그가 얼마나 삶에 대한 진정성과 순수함을지닌 작가였는지 가슴깊이 느낀바 있다.  그러고 보니 이쾌대에 대한 이런 저런 화풍과 역사적 의미를 말하면서도 결국엔 그의 삶이보여준 그 진정성이 바탕이 되었기에 이런 애정을 담은 필자의 의도가 담겨지는 것 아니겠는가?  

 

   

[탁자위의 정물. 1943] 이쾌대 작. 캔버스위에 유화. 이쾌대의 감수성은 군상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상징주의나 낭만주의에머무르지 않고 이렇듯 소박하고 따듯한 인상주의의 색감 또한 풍부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의 성향이 알려진 것처럼 휴전 이후 북한을선택했다는 것만으로 사회주의적인 리얼리즘의 작가로만 인식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가 이러한 색감을 구사하는 감수성 짙은화풍을 보인다는 것은 다양한 그의 미적 성향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해방 후 이쾌대는 조선조형예술동맹 및조선미술동맹에 간부로 가담했지만 1947년 연초 혹은 그 직전에 평양에 가서 공산당 정국의 동향과 작가들에게 오로지 혁명적과제만 제작할 것을 강요하는 실상을 목격한 후 1947년 잡지 『신천지』 2월호에 <북조선미술계 보고>란 제목의 글을통해 비판적인 내용을 실은 바 있다. 이후 그는 좌익 노선의 조선미술동맹에서 이탈하여 그동안 무소속이던 김인승, 남관 등이참가한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949년까지 네 차례의 회원작품전을 열었다. 이 단체는 철저히정치색을 배제하였으며, 함께 참여한 작가들의 이력에서 이쾌대의 또 다른 측면의 자유분방한 창조적 욕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걸인. 1948] 이쾌대 작. 캔버스위에 유화. 이 작품의 제목이 걸인이라고 하여 과연 혼란기의 시대적 상황을 그려낸리얼리즘일까? 판단컨대, 이쾌대의 시각은 리얼리즘 그 자체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고 보아진다. 행색이 걸인인 것만은 분명하지만걸인이 응시하는 시선을 통해 해방 이후 좌우로 분열된 시대의 소외된 모든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걸인이 걸인 그 자체만이 아닌 이 작품은 이쾌대의 상징적인 사실주의라 말할 수 있다.

 

 


이쾌대는 경상북도 칠곡(漆谷)에서 출생하였으며, 휘문고보에서 장발(張勃)의 지도를 받아 재학 중 제11회조선미술전람회전(1932)에 입선하였다. 졸업한 뒤 1939년 유학길에 올라도쿄제국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한 후, 재학 중 일제치하에서 고통 받는 민족의 현실을 상징적으로표현한 [운명]이 공모전에 입선되기도 했다. 1941년 도쿄에서 이중섭(李仲燮)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여 모더니즘미술활동을 전개했으며, 여러 차례 회원전을 가졌다. 광복 후 좌익미술단체에 참여하는 한편 김인승(金仁承), 남관(南寬) 등과정치색이 배제된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여 4회의 회원전을 열기도 했다. 그중 제3회전에 출품한 [조난]은 정체불명의 군용기에무고한 어민들이 무차별 살상당한 독도(獨島)에서의 사건을 그린 그림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화풍은 서구적 지성과 방법론을토대로 하면서도 향토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했고, 인민군 측 종군화가로 전선에 참가하던 중 포로가 되어 부산과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휴전 직후 남북 포로교환 때에 북한을 택해 갔다.  그 밖의 작품에 [자화상],[군상(群像,1944∼48)] 시리즈 등이 있다.

 

자화상

"오래간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9월 20일 서울을 떠난 후 5, 6일 동안 줄창 걷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부산100수용소 제3실에 있습니다. 신병을 앓는 당신은 몇 배나 여위지 않았소, 안타깝기 한량없소이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은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맘은 지금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같습니다." (인용 - 김진송, 『이쾌대』

 

 

 

 

 부인도

 

 

 

 

 

 

 

 

 

 

 봉선화

 

 

 

왼쪽에서 두번째 화가가  이쾌대화가이고 그 옆이 이중섭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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