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신랑과
그의 가족들은 신부의 집을 방문하는데,
약혼선물로 빈랑열매(Areca nuts)와
구장잎(Betel leaves), 차(茶), 케이크, 과일, 와인 등의
별미를 둥근 광택의 박스 안에 넣어
붉은 천으로 덮어서
미혼의 젊은 남자 또는 여자가 운반하게 합니다.
이 날 양가 가족들은 의논하여
결혼식을 올리기에 좋은 날짜를 정합니다.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들은 신랑신부의 행복을 축하해줍니다.
신랑신부는 우선 제단에서 조상에게 결혼승낙을 구한 후에
양가 부모에게 키워주고 보살펴주심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결혼식이 끝나면
손님들은 파티를 즐기며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베트남만의
특별한 결혼식과 약혼식 문화!
베트남에오시면
흔히
길가에서, 결혼 또는 약혼식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길가에 빨간글씨가 붙어있는집
화려한 꽃장식이 있는집을보시면
축하와 축복을 보내주시길 바라며! ^^
1992년 말 한국과 베트남의 국교가 수립된 이래 양국관계는 전체영역에서 발전하였고 1990년대 말에는 양국이 교역순위에서 4번째 국가가 될 정도로 경제협력은 급성장하였다. 정치, 외교, 군사, 과학기술, 교육 부문에서의 협력관계도 괄목할 만한 정도로 나아졌고 최근에는 문화 영역에서 활발한 교류를 보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베트남에서 한류(lan song Han Quoc)이다.
얼마 전 한 인터넷 기사가 베트남 당국이 그 동안 양국 간의 문화교류가 일방적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통상에 제재를 가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보도하였다. 주(駐) 베트남 한국대사관에 사실여부를 확인한 결과, 올해 초 베트남에서 개최된 한류관련 세미나에서 나온 의견에 대한 기자의 추측이 가져온 오보임이 밝혀졌다.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베트남 학에 오랫동안 매진한 필자는 베트남의 문화가 국내에 충분히 소개되지 않고 있음에 동감하며 우리 대중이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직․간접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다.
한 나라의 문화를 한 두 단어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베트남 문화는 서로 다른 문화가 혼합된 가운데 정제(整齊)된 문화이다. 베트남 문화는 세계적인 문화가 충돌하면서 형성된 문화이다. 지리 문화적으로 베트남은 북쪽의 중국 문화와 서남쪽의 인도 문화의 접변 지역에 위치한다. 외부적 영향으로 이 양대 문화는 베트남 민족 문화의 형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의 경우, 서기전 2세기부터 베트남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불교와 유교식 종교와 사회사상을 전하였고 주자가례와 세시풍속 등 각종 생활 관습과 의식주와 관련된 규범을 통해 작은 중국을 만들어냈다. 인도의 경우, 해로를 통해 일찍이 기원을 전후하여 베트남 중부에 자신의 문화를 전래시켰다. 짬 빠(Champa 占城)라는 힌두문명에 기초한 국가는 12세기까지 존립하면서 베트남에 힌두 및 이슬람 사상과 건축물 양식을 남겨주었다.
비록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베트남 문화는 결코 외래문화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았다. 외래문화가 도래하기 전에 베트남에는 이미 자기 문화를 형성하였었다. 선사시대에 해당하는 서기전 700년 전 당시 베트남인은 동 썬(Dong Son)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지녔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베트남인이 만든 청동고(Bronze Drum)는 표면과 옆면에 새겨진 생활상과 부조기술로 볼 때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지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청동고는 당시 오늘날 베트남 전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에서까지 발견되었음을 볼 때 당시 베트남은 인접지역은 물론 동남아시아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 형성 및 발달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인은 중국과 인도 문화라는 거대한 도전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자연 환경적, 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요인은 베트남 문화를 더욱 복잡하고 다양하게 하였다. 베트남은 북단에서 남단까지 약 1,650km 에 달하는 긴 영토를 갖고 있고 기후적으로는 북부 아열대, 남부는 열대 몬순 기후에 해당한다. 국토의 대부분 산악지대로 크고 작은 산봉우리(嶺)가 북부, 중부, 남부로 국토를 나누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동쪽의 산악지대, 평야지대, 서쪽의 해안지대에 주민들이 정착해 삶의 터전을 내렸다.
이 같은 자연 환경적 요인은 각 지역의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친환경적 의식주 문화를 형성토록 하였다. 그 결과, 해발 3,000 미터의 북부 산악 고지대의 차가운 기후에 속에서 사는 주민의 주택과 복장은 남부 해안지대의 무더운 날씨에서 사는 어민과는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54개 소수민족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전통문화를 계승, 보존함에 따라 국가적으로는 다소 분열적이면서도 풍요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언어 계통적으로 보면, 중국․티벳어족에 속하고 인종적으로는 북방의 몽골로이드와 남방의 말레이족이 결합되는데 여기에 자신들의 고유한 민간 신앙, 관혼상제, 가정교육과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은 베트남 문화의 지역별, 인종별, 언어별 차별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산악지대 소수 민족의 화전, 수렵 및 채집 경제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평야지대의 농업 문화는 여전히 대도시 주민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해안지대의 어민들 사이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해양 문화는 베트남 문화가 지닌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습합(習合) 또는 혼용과정을 설명해 준다.
앞서 약간 소개하였지만 베트남은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많은 외침을 받았다. 외부 침략세력이 지배하는 동안 수행했던 각종 동화정책과 식민문화의 파급효과는 베트남 문화의 순수성을 희석시키는 한편, 동서양의 문화적 특성을 내포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초기 부족국가 형성기 때부터 북방에서 유입된 중국 문화가 남쪽에서 올라온 인도 문화 외에도 베트남은 중국 운남(雲南)성 지역에서 존립하였던 난 짜오(Nan Chao) 국의 따이(Tai) 족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문화 전이를 경험해야만 했다. 특히 이들이 베트남, 라오, 시암, 크메르, 미얀마 지역에 내려와 토착민과의 뒤섞이는 과정을 통해 정착한 이후에도 각기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동족간의 교류를 계속 함에 따라 해당국의 문화가 베트남에까지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근현대에 접어들어서는 서양의 문화가 베트남에 전래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미국과의 정치 군사적 갈등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선교사를 통해 일찍이 서양의 종교 사상을 전파하였던 프랑스는 현재 베트남인이 쓰고 있는 문자를 개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중반이후부터는 군사, 행정, 교육, 사회 영역에서 이전까지 베트남인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들여왔다.
특히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던 코친차이나(Cochinchina) 지역, 그 중에서도 사이공(Sai Gon)은 '동양의 파리'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프랑스의 문화가 형식과 내용면에서 압도하였던 곳이다. 이 지역은 다른 서양인에게도 결코 생소하지 않았고 20세기 중반이후부터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면서 물질주의, 쾌락주의, 낭만주의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경제적, 지리적, 자연 환경적 요인에 의해 복잡하게 구성된 베트남 문화의 특성의 의식주 문화에서 베어난다. 사회 내 지배계층 혹은 일부 상류계층이 각종 의례를 포함한 공식적인 행사에 참가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베트남인은 의복은 그들의 기후와 경제 활동을 고려하여 매우 실용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열대지역의 전형적인 농업 사회인 베트남에서 대중은 농사일에 편한 복장을 착용하였다. 18세기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양인의 사진이나 그림 속에 나타나는 베트남 남성은 마치 씨름 선수가 메는 샅바 식으로 국부를 가리는 것으로 의복을 대신하였고 여성의 경우, 아오 뜨 턴(ao tu than)이라고 해서 상의는 비키니 수영복에다 하의는 치마를 두르는 정도였다.
이렇듯 간단하지만 엉성한 복장은 중국의 지배 기간 중 중국관리가 중국인처럼 치마대신에 바지를 착용하라는 명령을 어기면서 지켜온 민족 자존심을 지키고자 그대로 보존하다가 이후 프랑스 식민지배기를 거치면서 서양의 복식을 반영한 전문가가 중국 상해의 복식과 후에 왕실의 복식을 가미하여 오늘날의 아오 자이(ao dai)를 만들어냈다.
베트남, 특히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지역에 살다보면 우리가 쉽게 예상치 못한 베트남인의 복식을 보게 되는데 여름철의 긴 바지 및 긴 소매상의와 겨울철의 가죽잠바와 코트이다. 일 년 내내 섭씨 29도를 유지하는 남부 호 찌 민시(구 사이공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베트남을 무더위의 남국으로 상상했던 외국인에게는 다소 의아스럽지만 그것은 이미 베트남인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랍인이 디시다샤(Dishdasha)나 아바야(abayah)를 착용하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여름철 뙤약볕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찌는 듯 한 열기를 막기 위해 착용한 이 복장은 팔을 모두 가리는 긴 장갑과 진한 선글라스에 손수건으로 만든 삼각 마스크를 착용해야 비로소 한 세트가 된다. 현지에 출장을 가는 우리 바이어에게 베트남 파트너와 비즈니스 미팅에 입고 나갈 복장은 인천공항을 나설 때까지도 신경을 자극하지만 노이 바이(Noi Bay)공항이나 떤 썬 녓(Tan Son Nhat) 공항에 내려 시내도 들어서면서 와이셔츠에 넥타이만 매고 다니는 샐러리맨들을 보면서 곧 안심을 하게 된다.
한국을 방문하는 베트남인의 쇼핑 품목가운데 가족 잠바는 필수항목인데 겨울철에 높은 습도를 나타내는 기후가 북서풍이 불면서 체감온도를 더 떨어뜨리고 오토바이가 주요 교통수단인 이들에게 맞바람이 불어 닥칠 때면 '뼈를 깎는' 추위에 견디기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전통적으로 농업사회인 베트남에서 쌀, 야채,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이 주식을 이루었다. 쌀은 1930년대 이미 베트남은 세계 3대 쌀 수출국에 포함된 이후로 계속해서 대표적인 작물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급격히 줄어든 쌀 생산량은 1990년대에 전 국민의 식량을 위한 자급자족을 이루었고 그 결과 베트남은 현재 태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농업을 주업으로 하다 보니 토지는 농민의 재산 중 가장 비중이 컸는데 농사에 사용한 소 역시 매우 소중히 여겨 봉건시대부터 소를 잡아먹는 행위를 금하는 법률을 따로 제정했던 때문인지 베트남인에게 소고기는 인기가 별로 없다. 반면에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베트남 식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돼지는 전통 사회로부터 촌락의 각종 의례나 집안의 경조사 때 기본 식단에서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었으며 닭고기는 오리와 칠면조 등과 함께 베트남이 인류사가운데 최초로 가금류를 사육한 동남아시아 국가 중 한 나라였던 이후로 대표적인 고기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약 3,200km 이상의 해안선을 지닌 베트남에서 생선은 매우 흔한 음식이다. 게다가 수많은 농업용수를 위해 파놓은 연못에서 양식하는 민물생선까지 합하면 베트남인들은 어렵지 않게 생선을 먹을 수 있었다.
비록 쌀이 풍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베트남인이 아침 식사를 길거리에서 퍼(pho 쌀국수)로 대신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고충과 편리성을 위한 선택이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냉장고가 가정에 보급되었지만 전통적으로 날씨는 무더웠으나 따로 냉장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전통 가정은 부엌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던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시장이나 동네 꽌 안(quan an 館食 간이음식점)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쌀이 풍부함에 따라 퍼이외도 분(bun 粉)이라는 얇은 국수가 분 짜(bun cha)와 분 보 후(bun bo Hue)에 등의 음식에 들어가고, 쏘이(xoi)라는 바나나 잎에 싸서 찐 찰밥과 바인 꾸온(banh cuon)이나 고이 꾸온 (goi cuon)등 쌀로 만든 쌈이 애용된다. 베트남 음식에서 야채는 결코 빠지는 일이 없다.
베트남인이 야채를 즐기는 데는 전통적으로 농업을 주로 하면서 집주변에 밭을 가꾸어 쉽게 경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등 지방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면서 이를 중화시키려는 음양학적 배려도 담겨 있었다. 특히 베트남은 수많은 향초를 즐겨 먹는 것으로 유명한 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방기가 많은 음식을 섭취할 때 입맛을 자극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한 삶의 지혜로 보인다.
베트남인들은 농업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면서 식사 예절을 중시하게 되었다. 전통적 습관에다 훗날 서양식 문화가 어느 정도 전래되면서 밥은 개인 그릇에 담기보다는 큰 그릇에서 먹을 만큼 덜어 먹는 문화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윗사람이나 손님에게 먼저 덜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개인 공기와 수저는 먼지를 닦아내기 위해 냅킨으로 닦는데 윗사람과 손님에 대해서는 먼저 닦아서 주는 것도 예절에 속한다.
베트남 쌀은 찰기가 덜 해서 우리처럼 젓가락으로 뜰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식사 예절과는 달리 밥그릇을 입에 대고 젓가락을 사용하여 입에 밀어 넣는 식으로 먹는다. 과거에는 식사 때 소리를 크게 낼수록 부의 상징으로 여겼으나 얼마 전부터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음식을 씹는 소리는 내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양식과 외식 문화도 정착하였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생활화된 외식문화를 위해 다양한 종류의 식당과 음식도 생겨났다. 농촌의 전통 음식과는 달리 새로운 음식은 더욱 다양한 조미료, 향초, 식재료가 사용된다.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과 전채, 주식, 후식의 코스 요리, 코냑과 와인에 대한 이해가 폭 넓게 보급되었다.
의복과 식사 못지않게 베트남의 주택 문화는 자연 및 인문 지리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반영한다. 우선 베트남의 가옥은 지역별, 지형별, 종족별로 다양하다. 산악지역에는 냐 산(nha san)이라는 오두막 혹은 판잣집 형식의 주택이 있는데 대부분은 채집과 수렵을 하고 3세대 이상의 대가족이 집단 주거를 하는 소수 민족의 가옥이다. 이는 열대지역 주민들의 대표적인 형식이기도 한 데 짐승, 해충, 습기를 피하기 위해 높게 세운 기둥위에 지은 집이다.
한편 평야지대에는 지표면위에 지은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사에 필수적인 집단 노동력을 담보하기 위해 하나의 촌락은 경작지 가운데 대나무로 쌓은 울타리 안에 50~100가구가 군집하였고 각 가정은 우리의 전통 농가와 마찬가지로 3~4개의 방에 부엌, 곡간, 창고, 가축우리, 우물 등을 갖고 있다. 한편 도시의 가옥은 좀 더 특이하다. 장사를 목적으로 많은 주민이 밀집한 결과, 각 주택의 전면은 폭이 제한되었고 높이와 길이는 자유로웠다.
1층은 습기로 인해 주거 시설보다는 장사를 위한 좌판을 깔거나 창고로 이용하였고 2층 이상이 주거 공간이었다. 수많은 강가에는 수상 가옥이 지어졌다. 농수로를 따라 세워진 이 가옥들은 산악지대의 오두막과 형식은 유사하였다. 해안의 도서지역에는 해상가옥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주로 어민이었으나 육지로부터 탈출한 범죄자도 있었다. 이들은 조각배에 살림을 차려 어업 활동을 하고 수확물을 해안에서 거래하며 안전한 항구나 섬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편 한 가구에 해당하는 배가 서로 모여 묶어 놓은 해상 촌락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학교와 어민들을 위한 관청 뿐만 아니라 시장도 형성하고 있었다.
열대 몬순 지역에 해당하는 베트남에는 더위를 이기기 위한 건축 양식이 발달했다. 일단 각 층의 높이는 평균 4m 이상이며 1층을 더 높게 짓는 것이 상식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점령 및 주둔을 겪으면서 실링팬과 채광 창문은 서양 건축물의 채취를 나타냈고 겨울에도 실내 벽의 위쪽에 환기를 위한 창 또는 구멍을 열어두는 방식은 습기로 인한 건강 피해를 실감하게 한다.
농촌 및 산악 지역이 대부분 좌식 생활 습관을 지니는 반면에 도시지역은 입식 문화가 보편화되어 침대, 소파, 식탁이 가정마다 구비되어 있다. 요약하면, 베트남의 의식주 문화는 비록 베트남 문화 자체가 역사적, 지정학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자연 환경적 요인에 의해 특징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베트남인의 대인 관계가 갖는 한 특징은 공동체문화와 개인문화가 공존하고, 수직적 질서와 수평적 질서가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베트남 농촌 사회는 수많은 홍수, 가뭄에 시달렸고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거나 둑을 쌓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친족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모내기와 추수 등의 농사일을 차치하고서라도 잇단 외침세력에 맞서 촌락과 국가를 지키는 데에는 집단공동체의 협력을 생사를 결정짓는 중대한 요인이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도 공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베트남의 경우 뭉치면 강하지는 결속력은 어떤 민족에 비해 뒤지지 않는데 이를 환언하면,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개인의 희생과 의무가 사회생활의 최우선적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나 집단노동에 절대적인 공동체를 위한 규범은 일단 난리가 해결되고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면 개인적인 것으로 완전히 모습을 바꾼다. 베트남에서 가부장적 가족 관계는 장자 상속 또는 말자 상속이든지 부모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이 분배되고, 핵가족 중심의 소가족 제도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개인 문화 또한 동등한 수준에서 발달하였다.
동남아시아 만달라 (Mandala) 사회의 특성은 베트남에서도 나타난다. 천년 이상 중국의 오랜 지배를 받았음에도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인은 유교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수직적인 위계질서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선호한다. 조직에서의 상하관계는 인정되지만 최고지도자만을 절대적인 복종과 상의하달은 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대신에 아랫사람을 포용하는 인격, 경륜을 갖춘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는 상하관계가 태생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다 프랑스 식민지배기를 통해 베트남에 유입된 인권 존중, 자유 평등, 민주 사상 등은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보기 드문 개인주의 인격 형성을 가져왔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 대중에게 다가선 공산주의 계급 혁명 의식 또한 수직적 사회질서보다는 수평적 동지 관계가 자리 잡는 데에 탄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인의 직장 문화는 여전히 전형적인 농업사회에서의 대인 관계를 여전히 많이 따르고 있다. 베트남 직원의 근무 태도는 성격이 급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다. 우선 외모 상으로 베트남인은 '멋'을 따진다지만 생머리를 길게 내리워 근무할 때 불편을 겪는 여직원이나 일을 안 한 사람인 체하기 위해 새끼손톱을 구부러질 때까지 기르는 남직원은 비위생적으로 비춰진다.
업무 수행 속도로 보면, 단순한 일도 시간을 지체하여 답답한 인상을 주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럼에도 출퇴근이나 점심시간은 정확히 지켜줄 것을 요구할 때면 같은 회사 직원임을 의심하도록 한다. 업무 수행 방식을 놓고 볼 때, 이들은 부서 간 토의나 협력을 통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대단한 비밀인양 혼자서 이기적으로 붙들고 있다가 결국 시기를 놓쳐 일을 망친다. 업무상 잘못에 대해 지적하거나 시정을 요구하면 자신의 실수를 시인하고 곧바로 시정하는 대신, 자기 행위에 대한 핑계나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급기야는 겸연쩍은 웃음인지 조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애매한 표정까지 짓는다.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조금의 불이익이라도 받을 때는 지체 없이 노동 착취이자 비인격적 대우를 내세워 단체 행동에 들어가려 한다. 이 모든 근무 행태는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과도기에 들어선 베트남이 내포하는 근본적인 한계이자 1986년 이후 전면적인 사회개혁에 착수한 도이 머이 쇄신 정책이 갖는 문제점이다. 그러나 주로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집단공동체 생활 속에서 생겨난 타성이자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인 베트남인의 이러한 소극적인 면은 지난 수 천 년 간 경험하고 발전시켜온 그들의 문화접변력을 놓고 볼 때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베트남 문화는 외래문화와 민족문화, 공동체문화와 개인문화,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복합문화이다. 오랜 시간동안 자기 것과 남의 것,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에서 베트남인은 자신만의 혼합주의와 접변력을 통해 최선을 추구해 온 경험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베트남인의 외국인에 대한 태도는 어떤지 살펴보자. 일본과 미국 등 선진국 사람들에 대하여는 우러러 보지만 편하지 않게 생각하고 좀 조심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중국에 대하여는 높게 평가하지 않으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인에 대하여는 친근하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일부 한국인들의 무례한 행동 때문에 베트남 지식인들은 한국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게 변하고 있으니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해마다 발생하는 베트남 신부 죽이기가 발생하는 것은 한국인 전체에 대한 반한 감정을 부추길 수 있으니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한국 드라마가 베트남 30여개의 TV 채널에 방영됨으로서 베트남인들에게 한류가 깊이 배어들었다. 그래서 의류나 헤어스타일 그리고 악세사리 등은 한국 상품이 가장 인기 있으며 집집마다 한국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은 노사분규가 왜 타국보다 더 많이 일어나는지 문화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국의 문화가 비슷하다고 착각하며 노동자들에게 대하면 실패한다. 베트남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베트남 문화를 더 잘 이해하면 노사분규도 줄일 수 있다.
양국 간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베트남은 열대기후와 강물 지형으로 아주 편리한 생활환경인 반면 한국은 추운 기후와 산악 지형으로 아주 어려운 생활환경이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은 조용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인들은 활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베트남은 음기가 서린 나라이고 한국은 음기와 양기가 함께 서린 나라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인들은 마을 단위의 공동성이 있어 협력을 잘 하지만 한국인들은 가족 단위의 공동성이 있어서 이웃과 협력을 잘 하지 못한다. 베트남인들을 보면 낯선 사람끼리 쉽게 친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인들은 식사 시에 밥을 큰 그릇에 담아 와서 작은 그릇으로 나눠가지며 음식을 서로 집어주고 예전에는 빨대로 함께 술을 먹었다.
아침부터 외식을 하며 식당이 한국보다 훨씬 많다. 집에서는 자기 방이 따로 없고 집집사이에 담이 없이 그냥 이어서 짓는다. 베트남인들은 모임을 좋아하고 대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체면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 앞에서 꾸짖는 것을 삼가야한다. 체면을 너무 중시하다보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을 일삼는다.
베트남 속담에 국왕의 법이 마을의 법만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지역주의가 팽배한 근거가 된다. 그래서 당서기장과 수상 그리고 대통령 등의 권력을 지방에 따라 배분한다. 지방자치제도가 강해서 중앙정부의 지시가 지방정부에 잘 먹히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옛날이야기에 선녀와 결혼하고도 선녀 신부를 버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배신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면이 엿보인다. 그러나 외국회사에 다니는 현지인들을 보면 회사의 일보다 가족의 일을 우선시하는 것을 보더라도 외국인에 대한 충성도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베트남 사람들은 평등사상이 강하다. 그래서 “창고지기가 사장보다 높다”는 말이 있다. 뇌물을 주더라도 위에만 줬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아래 사람도 골고루 줘야 뇌물 주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베트남 사람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는 초기에 해결해야 한다.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원칙대로 한다고 하다가는 몇 배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베트남 사람이 무엇인가 요구할 때는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들이댄다. 외국인이 생각하기에는 불합리하여 동의하지 않는 경우 후일 막대한 손실을 보는 경우가 많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베트남인들은 균형을 중시한다. 베트남인들은 너무 빨리 먹지도 않고 느리게 먹지도 않는다. 너무 많이 먹지도 않고 적게 먹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 먹지도 않고 남게 먹지도 않는다. 비교할 때는 낮은 것과 비교하기 때문에 행복지수가 높다. 베트남인들은 대화 시에 직선적이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하다.
그리고 남자는 가부를 정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대체로 여자가 책임감이 더 있고 일을 정확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인들은 대체로 결단성 경쟁성이 부족하고 눈에 띄는 것을 피한다. 베트남인들의 무용을 보면 발보다 손을 많이 움직인다. 음악도 부드럽고 정감이 많이 서려있다. 여성 존중사상이 강하여 부인이 재산을 관리하고 남편은 대외적인 역할을 한다.
베트남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불교 인구가 가장 많고 천주교가 15% 정도이다. 기독교는 아주 소수이며 여러 외국종교단체가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까오다이 교는 본부가 떠이닌 성에 있는데 꽤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까오다이 교는 석가모니 예수 공자 노자 심지어 빅토르 위고까지 종합적으로 섬기는 종교이다.
베트남인들은 전쟁을 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전쟁에 참여한다. 그래서 미국을 이긴 세계유일의 국가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분석력이 약하고 과학적이지 않으며 아직까지 미신을 믿는 사람이 많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미신을 믿었듯이 베트남의 현재 국민이 미신을 믿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30년 전의 한국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베트남 문화와 한국 문화의 유사점
1. 동적인 문화보다는 정적인 문화입니다.
베트남 문화도 외향보다 내면을 중시하고 이성보다는 사람의 감정을 소중히 하고 개인보다는 사회와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희생정신이 깃들여 있는 문화입니다.
2. 가문과 체면을 중시합니다.
베트남사람들도 한국 사람처럼 집안, 가문을 중시하며 자기의 품성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서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그들은 특히 처음에 만날 때 그렇습니다.
3. 지연, 혈연을 중시합니다.
베트남도 북부, 중부, 남부의 지역적, 민족적, 역사적인 차이가 뚜렷하여 그로 인한 지연과 혈연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인맥을 통해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점도 바로 한국인과 비슷한 정서를 지녔기 때문이다.
4. 위사람을 존경하는 문화입니다.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예를 중시하고 윗사람을 존경하고 특히 조상을 모시는데 있어서 정성을 다합니다.베트남 인들은 조상숭배 관습을 따르는데 모든 가정에서는 가장 신성한 장소에 조상을 모시는 제단을 차립니다.
베트남인들은 오래 전에 돌아가신 조상들도 그 영혼이 후손 곁에 함께 머문다고 믿는다. 죽은 이와 살아있는 이들 사이에는 여전히 서로 정신적인 교감이 이뤄지고 있으며, 따라서 일상에서 자신들이 즐기며 느끼는 것을 그들의 조상들도 함께 느끼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5. 외세의 침입과 전쟁을 많이 겪은 나라입니다.
베트남은 우리처럼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들과 많은 전쟁으로 수난을 겪었지만 민족과 언어를 잃지 않는 나라입니다.
5. 우리와 비슷한 식습관을 가진 나라입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 주식은 주로 쌀과 국수(퍼, 분)이다.
- 채소는 배추, 무, 상추, 파, 고추 같은 채소를 매우 많이 먹는다. 특히 쌀로 얇게 종이처럼 만들어 말려 놓 은 라이스 페이퍼로 생채소를 싸 먹고 향초를 많이 먹는다.
- 주된 양념은 장류이다. 늑맘(생선을 발효시긴 장), 간장, 소금, 고추, 후추, 깨, 소금, 미원(미소)를 양념으로 사용한다.
6. 한자 문화권이라 한자이름 표현이 가능합니다.
베트남도 우리와 같이 성과 이름은 삼음절로 표현하는데 성별을 구별하기 위해 성과 이름 사이에 남자는 V?n(반)을 뜻함), 여자는 Thi(티)를 사용한다. 남부지방에서는 이름에 Minh(미잉)자나 Hoa(화)를 넣어 더 예쁘게 꾸며 주기도 한다.
베트남 문화와 한국 문화의 차이점
1. 자존심이 강하며 개인주의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베트남은 오랜 세월 끊임없이 자행되어 온 외침을 물리친 역사에 대해 민족적 자부심이 강합니다. 또한 베트남은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우리의 조직적인 문화에 비해 개인주의가 발달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계층적인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며 동료(동무)적인 의식이 강한 편입니다.
2. 하루가 아침 일찍 시작됩니다.
더운 나라이다 보니 하루의 시작이 우리보다 빠르며 4시~6시에 시작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회사의 업무는 주로 8시에 시작하고 4~5시에 끝나는 편입니다. 중간에 점심 먹고 자는 습관이 있습니다.
주로 오전에 일이나 회의를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주로 주 5일 근무를 하며 회사의 입사와 퇴사의 우리보다 자유롭습니다.
3. 아직까지는 배꼽시계를 선호합니다.
베트남인들은 여러가지 환경적인 영향도 있지만 약속시간을 잘 못지키는 편입니다. 보통 약속시간보다 30~1시간 늦게 오는 편입니다.
보통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여성들은 와이셔츠와 넥타이 차림이 많으며 여성들도 시원하고 화려한 캐주얼한 옷을 입는 편입니다.
5. 베트남은 각 지역마다 억양과 말이 다릅니다.
6. 베트남은 파티가 많으며 초대된 손님에게 극진히 대접합니다.
베트남은 결혼식 파티, 생일 파티 등을 친족과 주변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초대된 손님에게 음식을 덜어주거나 술을 따라주는 행동을 하는데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7. 봉사료, 커미션이 중시되는 나라입니다.
병원을 이용하더라도 병원비와 별도로 의사나 간호사에게 일정한 봉사료를 지불하고 주변 사람에게 어떤 일을 부탁할 때도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합니다.
8. 음력을 중시합니다.
베트남의 모든 행사나 파티는 기일을 정해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아직까지 음력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9.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베트남은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는 관계로 각각의 집에는 개인의 운송 수단을 갖추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일부 버스가 운행이 되지만 밤에는 운행하지 않고 정해진 코스만 운행하므로 보통 가정에서는 아이를
학교에 보낼 때, 시장을 갈 때, 일하려 갈 때도 개인 운송 수단이 차나 오토바이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10. 꼼꼼한 계약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구두로 하는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고 잘 인정되지 않으며 계약한 후에도 계약내용을
주 변경하는 경우가 많아 꼼꼼한 계약을 하는 편입니다. 계약한 후에도 중요한 경우는
공증과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1992년 말 한국과 베트남의 국교가 수립된 이래 양국관계는 전체영역에서 발전하였고 1990년대 말에는 양국이 교역순위에서 4번째 국가가 될 정도로 경제협력은 급성장하였다. 정치, 외교, 군사, 과학기술, 교육 부문에서의 협력관계도 괄목할 만한 정도로 나아졌고 최근에는 문화 영역에서 활발한 교류를 보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베트남에서 한류(lan song Han Quoc)이다.
얼마 전 한 인터넷 기사가 베트남 당국이 그 동안 양국 간의 문화교류가 일방적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통상에 제재를 가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보도하였다.
주(駐) 베트남 한국대사관에 사실여부를 확인한 결과, 올해 초 베트남에서 개최된 한류관련 세미나에서 나온 의견에 대한 기자의 추측이 가져온 오보임이 밝혀졌다.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베트남 학에 오랫동안 매진한 필자는 베트남의 문화가 국내에 충분히 소개되지 않고 있음에 동감하며 우리 대중이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직․간접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다.
한 나라의 문화를 한 두 단어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베트남 문화는 서로 다른 문화가 혼합된 가운데 정제(整齊)된 문화이다. 베트남 문화는 세계적인 문화가 충돌하면서 형성된 문화이다.
지리 문화적으로 베트남은 북쪽의 중국 문화와 서남쪽의 인도 문화의 접변 지역에 위치한다. 외부적 영향으로 이 양대 문화는 베트남 민족 문화의 형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의 경우, 서기전 2세기부터 베트남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불교와 유교식 종교와 사회사상을 전하였고 주자가례와 세시풍속 등 각종 생활 관습과 의식주와 관련된 규범을 통해 작은 중국을 만들어냈다.
인도의 경우, 해로를 통해 일찍이 기원을 전후하여 베트남 중부에 자신의 문화를 전래시켰다. 짬 빠(Champa 占城)라는 힌두문명에 기초한 국가는 12세기까지 존립하면서 베트남에 힌두 및 이슬람 사상과 건축물 양식을 남겨주었다.
비록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베트남 문화는 결코 외래문화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았다. 외래문화가 도래하기 전에 베트남에는 이미 자기 문화를 형성하였었다. 선사시대에 해당하는 서기전 700년 전 당시 베트남인은 동 썬(Dong Son)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지녔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베트남인이 만든 청동고(Bronze Drum)는 표면과 옆면에 새겨진 생활상과 부조기술로 볼 때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지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청동고는 당시 오늘날 베트남 전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에서까지 발견되었음을 볼 때 당시 베트남은 인접지역은 물론 동남아시아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 형성 및 발달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인은 중국과 인도 문화라는 거대한 도전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자연 환경적, 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요인은 베트남 문화를 더욱 복잡하고 다양하게 하였다. 베트남은 북단에서 남단까지 약 1,650km 에 달하는 긴 영토를 갖고 있고 기후적으로는 북부 아열대, 남부는 열대 몬순 기후에 해당한다.
국토의 대부분 산악지대로 크고 작은 산봉우리(嶺)가 북부, 중부, 남부로 국토를 나누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동쪽의 산악지대, 평야지대, 서쪽의 해안지대에 주민들이 정착해 삶의 터전을 내렸다. 이 같은 자연 환경적 요인은 각 지역의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친환경적 의식주 문화를 형성토록 하였다.
그 결과, 해발 3,000 미터의 북부 산악 고지대의 차가운 기후에 속에서 사는 주민의 주택과 복장은 남부 해안지대의 무더운 날씨에서 사는 어민과는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54개 소수민족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전통문화를 계승, 보존함에 따라 국가적으로는 다소 분열적이면서도 풍요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언어 계통적으로 보면, 중국․티벳어족에 속하고 인종적으로는 북방의 몽골로이드와 남방의 말레이족이 결합되는데 여기에 자신들의 고유한 민간 신앙, 관혼상제, 가정교육과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은 베트남 문화의 지역별, 인종별, 언어별 차별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산악지대 소수 민족의 화전, 수렵 및 채집 경제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평야지대의 농업 문화는 여전히 대도시 주민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해안지대의 어민들 사이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해양 문화는 베트남 문화가 지닌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습합(習合) 또는 혼용과정을 설명해 준다.
앞서 약간 소개하였지만 베트남은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많은 외침을 받았다. 외부 침략세력이 지배하는 동안 수행했던 각종 동화정책과 식민문화의 파급효과는 베트남 문화의 순수성을 희석시키는 한편, 동서양의 문화적 특성을 내포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초기 부족국가 형성기 때부터 북방에서 유입된 중국 문화가 남쪽에서 올라온 인도 문화 외에도 베트남은 중국 운남(雲南)성 지역에서 존립하였던 난 짜오(Nan Chao) 국의 따이(Tai) 족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문화 전이를 경험해야만 했다.
특히 이들이 베트남, 라오, 시암, 크메르, 미얀마 지역에 내려와 토착민과의 뒤섞이는 과정을 통해 정착한 이후에도 각기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동족간의 교류를 계속 함에 따라 해당국의 문화가 베트남에까지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근현대에 접어들어서는 서양의 문화가 베트남에 전래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미국과의 정치 군사적 갈등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선교사를 통해 일찍이 서양의 종교 사상을 전파하였던 프랑스는 현재 베트남인이 쓰고 있는 문자를 개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중반이후부터는 군사, 행정, 교육, 사회 영역에서 이전까지 베트남인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들여왔다.
특히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던 코친차이나(Cochinchina) 지역, 그 중에서도 사이공(Sai Gon)은 '동양의 파리'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프랑스의 문화가 형식과 내용면에서 압도하였던 곳이다. 이 지역은 다른 서양인에게도 결코 생소하지 않았고 20세기 중반이후부터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면서 물질주의, 쾌락주의, 낭만주의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경제적, 지리적, 자연 환경적 요인에 의해 복잡하게 구성된 베트남 문화의 특성의 의식주 문화에서 베어난다. 사회 내 지배계층 혹은 일부 상류계층이 각종 의례를 포함한 공식적인 행사에 참가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베트남인은 의복은 그들의 기후와 경제 활동을 고려하여 매우 실용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열대지역의 전형적인 농업 사회인 베트남에서 대중은 농사일에 편한 복장을 착용하였다. 18세기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양인의 사진이나 그림 속에 나타나는 베트남 남성은 마치 씨름 선수가 메는 샅바 식으로 국부를 가리는 것으로 의복을 대신하였고 여성의 경우, 아오 뜨 턴(ao tu than)이라고 해서 상의는 비키니 수영복에다 하의는 치마를 두르는 정도였다.
이렇듯 간단하지만 엉성한 복장은 중국의 지배 기간 중 중국관리가 중국인처럼 치마대신에 바지를 착용하라는 명령을 어기면서 지켜온 민족 자존심을 지키고자 그대로 보존하다가 이후 프랑스 식민지배기를 거치면서 서양의 복식을 반영한 전문가가 중국 상해의 복식과 후에 왕실의 복식을 가미하여 오늘날의 아오 자이(ao dai)를 만들어냈다.
베트남, 특히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지역에 살다보면 우리가 쉽게 예상치 못한 베트남인의 복식을 보게 되는데 여름철의 긴 바지 및 긴 소매상의와 겨울철의 가죽잠바와 코트이다. 일 년 내내 섭씨 29도를 유지하는 남부 호 찌 민시(구 사이공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베트남을 무더위의 남국으로 상상했던 외국인에게는 다소 의아스럽지만 그것은 이미 베트남인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랍인이 디시다샤(Dishdasha)나 아바야(abayah)를 착용하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여름철 뙤약볕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찌는 듯 한 열기를 막기 위해 착용한 이 복장은 팔을 모두 가리는 긴 장갑과 진한 선글라스에 손수건으로 만든 삼각 마스크를 착용해야 비로소 한 세트가 된다. 현지에 출장을 가는 우리 바이어에게 베트남 파트너와 비즈니스 미팅에 입고 나갈 복장은 인천공항을 나설 때까지도 신경을 자극하지만 노이 바이(Noi Bay)공항이나 떤 썬 ??(Tan Son Nhat) 공항에 내려 시내도 들어서면서 와이셔츠에 넥타이만 매고 다니는 샐러리맨들을 보면서 곧 안심을 하게 된다.
한국을 방문하는 베트남인의 쇼핑 품목가운데 가족 잠바는 필수항목인데 겨울철에 높은 습도를 나타내는 기후가 북서풍이 불면서 체감온도를 더 떨어뜨리고 오토바이가 주요 교통수단인 이들에게 맞바람이 불어 닥칠 때면 '뼈를 깎는' 추위에 견디기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전통적으로 농업사회인 베트남에서 쌀, 야채,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이 주식을 이루었다. 쌀은 1930년대 이미 베트남은 세계 3대 쌀 수출국에 포함된 이후로 계속해서 대표적인 작물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급격히 줄어든 쌀 생산량은 1990년대에 전 국민의 식량을 위한 자급자족을 이루었고 그 결과 베트남은 현재 태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농업을 주업으로 하다 보니 토지는 농민의 재산 중 가장 비중이 컸는데 농사에 사용한 소 역시 매우 소중히 여겨 봉건시대부터 소를 잡아먹는 행위를 금하는 법률을 따로 제정했던 때문인지 베트남인에게 소고기는 인기가 별로 없다. 반면에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베트남 식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돼지는 전통 사회로부터 촌락의 각종 의례나 집안의 경조사 때 기본 식단에서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었으며 닭고기는 오리와 칠면조 등과 함께 베트남이 인류사가운데 최초로 가금류를 사육한 동남아시아 국가 중 한 나라였던 이후로 대표적인 고기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약 3,200km 이상의 해안선을 지닌 베트남에서 생선은 매우 흔한 음식이다. 게다가 수많은 농업용수를 위해 파놓은 연못에서 양식하는 민물생선까지 합하면 베트남인들은 어렵지 않게 생선을 먹을 수 있었다.
비록 쌀이 풍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베트남인이 아침 식사를 길거리에서 퍼(pho 쌀국수)로 대신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고충과 편리성을 위한 선택이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냉장고가 가정에 보급되었지만 전통적으로 날씨는 무더웠으나 따로 냉장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전통 가정은 부엌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던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시장이나 동네 ?? 안(quan an 館食 간이음식점)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쌀이 풍부함에 따라 퍼이외도 분(bun 粉)이라는 얇은 국수가 분 짜(bun cha)와 분 보 후(bun bo Hue)에 등의 음식에 들어가고, 쏘이(xoi)라는 바나나 잎에 싸서 찐 찰밥과 바인 꾸온(banh cuon)이나 고이 꾸온 (goi cuon)등 쌀로 만든 쌈이 애용된다. 베트남 음식에서 야채는 결코 빠지는 일이 없다.
베트남인이 야채를 즐기는 데는 전통적으로 농업을 주로 하면서 집주변에 밭을 가꾸어 쉽게 경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등 지방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면서 이를 중화시키려는 음양학적 배려도 담겨 있었다. 특히 베트남은 수많은 향초를 즐겨 먹는 것으로 유명한 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방기가 많은 음식을 섭취할 때 입맛을 자극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한 삶의 지혜로 보인다.
베트남인들은 농업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면서 식사 예절을 중시하게 되었다. 전통적 습관에다 훗날 서양식 문화가 어느 정도 전래되면서 밥은 개인 그릇에 담기보다는 큰 그릇에서 먹을 만큼 덜어 먹는 문화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윗사람이나 손님에게 먼저 덜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개인 공기와 수저는 먼지를 닦아내기 위해 냅킨으로 닦는데 윗사람과 손님에 대해서는 먼저 닦아서 주는 것도 예절에 속한다.
베트남 쌀은 찰기가 덜 해서 우리처럼 젓가락으로 뜰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식사 예절과는 달리 밥그릇을 입에 대고 젓가락을 사용하여 입에 밀어 넣는 식으로 먹는다. 과거에는 식사 때 소리를 크게 낼수록 부의 상징으로 여겼으나 얼마 전부터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음식을 씹는 소리는 내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양식과 외식 문화도 정착하였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생활화된 외식문화를 위해 다양한 종류의 식당과 음식도 생겨났다. 농촌의 전통 음식과는 달리 새로운 음식은 더욱 다양한 조미료, 향초, 식재료가 사용된다.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과 전채, 주식, 후식의 코스 요리, 코냑과 와인에 대한 이해가 폭 넓게 보급되었다.
의복과 식사 못지않게 베트남의 주택 문화는 자연 및 인문 지리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반영한다. 우선 베트남의 가옥은 지역별, 지형별, 종족별로 다양하다. 산악지역에는 냐 산(nha san)이라는 오두막 혹은 판잣집 형식의 주택이 있는데 대부분은 채집과 수렵을 하고 3세대 이상의 대가족이 집단 주거를 하는 소수 민족의 가옥이다.
이는 열대지역 주민들의 대표적인 형식이기도 한 데 짐승, 해충, 습기를 피하기 위해 높게 세운 기둥위에 지은 집이다. 한편 평야지대에는 지표면위에 지은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사에 필수적인 집단 노동력을 담보하기 위해 하나의 촌락은 경작지 가운데 대나무로 쌓은 울타리 안에 50~100가구가 군집하였고 각 가정은 우리의 전통 농가와 마찬가지로 3~4개의 방에 부엌, 곡간, 창고, 가축우리, 우물 등을 갖고 있다.
한편 도시의 가옥은 좀 더 특이하다. 장사를 목적으로 많은 주민이 밀집한 결과, 각 주택의 전면은 폭이 제한되었고 높이와 길이는 자유로웠다. 1층은 습기로 인해 주거 시설보다는 장사를 위한 좌판을 깔거나 창고로 이용하였고 2층 이상이 주거 공간이었다. 수많은 강가에는 수상 가옥이 지어졌다.
농수로를 따라 세워진 이 가옥들은 산악지대의 오두막과 형식은 유사하였다. 해안의 도서지역에는 해상가옥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주로 어민이었으나 육지로부터 탈출한 범죄자도 있었다. 이들은 조각배에 살림을 차려 어업 활동을 하고 수확물을 해안에서 거래하며 안전한 항구나 섬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편 한 가구에 해당하는 배가 서로 모여 묶어 놓은 해상 촌락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학교와 어민들을 위한 관청 뿐만 아니라 시장도 형성하고 있었다.
열대 몬순 지역에 해당하는 베트남에는 더위를 이기기 위한 건축 양식이 발달했다. 일단 각 층의 높이는 평균 4m 이상이며 1층을 더 높게 짓는 것이 상식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점령 및 주둔을 겪으면서 실링팬과 채광 창문은 서양 건축물의 채취를 나타냈고 겨울에도 실내 벽의 위쪽에 환기를 위한 창 또는 구멍을 열어두는 방식은 습기로 인한 건강 피해를 실감하게 한다.
농촌 및 산악 지역이 대부분 좌식 생활 습관을 지니는 반면에 도시지역은 입식 문화가 보편화되어 침대, 소파, 식탁이 가정마다 구비되어 있다. 요약하면, 베트남의 의식주 문화는 비록 베트남 문화 자체가 역사적, 지정학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자연 환경적 요인에 의해 특징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베트남인의 대인 관계가 갖는 한 특징은 공동체문화와 개인문화가 공존하고, 수직적 질서와 수평적 질서가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베트남 농촌 사회는 수많은 홍수, 가뭄에 시달렸고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거나 둑을 쌓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친족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모내기와 추수 등의 농사일을 차치하고서라도 잇단 외침세력에 맞서 촌락과 국가를 지키는 데에는 집단공동체의 협력을 생사를 결정짓는 중대한 요인이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도 공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베트남의 경우 뭉치면 강하지는 결속력은 어떤 민족에 비해 뒤지지 않는데 이를 환언하면,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개인의 희생과 의무가 사회생활의 최우선적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나 집단노동에 절대적인 공동체를 위한 규범은 일단 난리가 해결되고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면 개인적인 것으로 완전히 모습을 바꾼다. 베트남에서 가부장적 가족 관계는 장자 상속 또는 말자 상속이든지 부모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이 분배되고, 핵가족 중심의 소가족 제도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개인 문화 또한 동등한 수준에서 발달하였다.
동남아시아 만달라 (Mandala) 사회의 특성은 베트남에서도 나타난다. 천년 이상 중국의 오랜 지배를 받았음에도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인은 유교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수직적인 위계질서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선호한다. 조직에서의 상하관계는 인정되지만 최고지도자만을 절대적인 복종과 상의하달은 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대신에 아랫사람을 포용하는 인격, 경륜을 갖춘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는 상하관계가 태생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다 프랑스 식민지배기를 통해 베트남에 유입된 인권 존중, 자유 평등, 민주 사상 등은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보기 드문 개인주의 인격 형성을 가져왔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 대중에게 다가선 공산주의 계급 혁명 의식 또한 수직적 사회질서보다는 수평적 동지 관계가 자리 잡는 데에 탄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인의 직장 문화는 여전히 전형적인 농업사회에서의 대인 관계를 여전히 많이 따르고 있다. 베트남 직원의 근무 태도는 성격이 급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다. 우선 외모 상으로 베트남인은 '멋'을 따진다지만 생머리를 길게 내리워 근무할 때 불편을 겪는 여직원이나 일을 안 한 사람인 체하기 위해 새끼손톱을 구부러질 때까지 기르는 남직원은 비위생적으로 비춰진다.
업무 수행 속도로 보면, 단순한 일도 시간을 지체하여 답답한 인상을 주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럼에도 출퇴근이나 점심시간은 정확히 지켜줄 것을 요구할 때면 같은 회사 직원임을 의심하도록 한다. 업무 수행 방식을 놓고 볼 때, 이들은 부서 간 토의나 협력을 통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대단한 비밀인양 혼자서 이기적으로 붙들고 있다가 결국 시기를 놓쳐 일을 망친다.
업무상 잘못에 대해 지적하거나 시정을 요구하면 자신의 실수를 시인하고 곧바로 시정하는 대신, 자기 행위에 대한 핑계나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급기야는 겸연쩍은 웃음인지 조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애매한 표정까지 짓는다.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조금의 불이익이라도 받을 때는 지체 없이 노동 착취이자 비인격적 대우를 내세워 단체 행동에 들어가려 한다.
이 모든 근무 행태는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과도기에 들어선 베트남이 내포하는 근본적인 한계이자 1986년 이후 전면적인 사회개혁에 착수한 도이 머이 쇄신 정책이 갖는 문제점이다. 그러나 주로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집단공동체 생활 속에서 생겨난 타성이자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인 베트남인의 이러한 소극적인 면은 지난 수 천 년 간 경험하고 발전시켜온 그들의 문화접변력을 놓고 볼 때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베트남 문화는 외래문화와 민족문화, 공동체문화와 개인문화,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복합문화이다. 오랜 시간동안 자기 것과 남의 것,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에서 베트남인은 자신만의 혼합주의와 접변력을 통해 최선을 추구해 온 경험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 업무의 잘못등으로 지적을 받을시에는 웃으며 얼버무리던가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건성으로 듣는다.
문화의 이해.
베트남인은 돈주는 사람외의 말은 대체로 무시합니다. 주인과 주인이 아닌사람을 정확히 구분합니다.
한국의 회사문화-사장 이사 부장 과장 차장 대리 무급 선임자 다 신입에게는 고참이고 지시자이며 감독자입니다.
베트남의 경우 사장 그리고 이외의 사람들 이렇게 두부류로 나뉩니다.
먼저 들어 온 고참직원 혹은 한국식으로 대리 과장 매니저 이리 나누어져 있어도 월급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혼을 내거나 해야할 이유 없습니다.
들을 이유도 없고요 당연히 안듣습니다. 한국회사에서 대리나 과장이 이야기 해도 무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이게 존중이야 라고 말하지만 존중 아닙니다.
무시하는 행위이지요. 동료나 직장내 평직원들끼리나 할 때 하는 행위입니다.
사장이나 작업반장 등 직업이나 월급에 위해를 가 할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말하는데 팔장끼고 못 듣습니다.
<대처>
첫째- 사장님이 상급자들에게 힘을 싫어주어야 합니다.
적당한 재량권을 주어서 월급을 조정할 수 있게 해 준다던가, 공식적인 석상에서 자주 중간 관리지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든가 직원 평가에 대한 조언을 듣습니다.
중간 관리자의 가오를 세워주면 좀 나아집니다.
"애들 그러면 안 나온다. 괴롭히지 마라" 그러면 그회사는 알쫍니다.
특히 중간 관리다가 베트남인일 경우 더 더욱 권한을 주고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베트남인 중간 관리자는 직원들 편에 서게 됩니다
상당히 힘들업집니다.
둘째- 사유서 (시말서)를 반드시 쓰게 합니다.
중간 관리자가 받아서 사장에게 보고 하게 합니다
사유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곳은 사회주의 국가라 노동자가 잘못을 해도 해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중에 합법적으로 노동자를 해고 하기 위한 근거도 되고 합당한 증거 자료도 됩니다.
사유서를 쓰고 서명 하게 함은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기에 피식 피식 웃으며 팔짱끼고 유야무야 넘어가지 못합니다.
사장에게 직접 보고 되고, 추후 연봉 협상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반드시 주지 시켜두면 함부로 장난치지 못합니다.
2. 무책임의 극치
잘못한바를 인정하지 않거나 5분도 안가 들통날 거짓말을 한다. 끊임없는 핑계와 변명.
베트남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은 변상이나 기타 비용이 발생하거나 급여의 삭감등 불이익으로 다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관리자의 책임도 사실 동반합니다.
관리자가 현지어로 날카롭고 조리있게 이야기 할수 있다면 변명이나 발뺌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베트남인은 일단 베트남어를 못하면 상대를 무시하고 우습게 보는경향이 있습니다.
오랜 외침과 수탈의 역사도 그것에 일조를 합니다.
베트남인들을 가만히 보면, 지나친 피해 의식과 더불어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존심이라는 형태로 포장되어 발산되는 것입니다.
일례로, 베트남 회사에서는 변명이나 발뺌같은 현상이 별로 없습니다
유독 외국인들 특히 현지어를 못하는 외국인들 회사에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대처>
사실 별다른 방법 없습니다.
잘못을 지적할시에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현지어로 이야기 할수 없다면,
확실한 물증을 들이밀어야만 효과가 있습니다.
어설프게 디밀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당하게 되어 위신 떨어지고 후에는 더 우습게 봅니다.
그렇다고 절대로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둘러 베트남인을 무시하는 행동은 오히려 반발심만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나마 할수 있는 것이 회사내에 업무일지를 만듭니다.
매일 있었던 특이 사항을 기록합니다.
심증은 가되 물증은 없는 직원의 잘못도 기록합니다. 급여 인상이나 재계약 시 꺼내어 추긍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서로 기억 못하는 부분이 많은데다가, 급여 혹은 재계약이라는 칼자루가
확실히 이쪽에 있다는 걸 상호 인지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아무 소리 못합니다 .현장에서 되지도 않는 말로 혼내고 화내 봐야 혈압만 오르고,
직원들은 돌아서 나갈때 픽 하고 웃으며 나갑니다. 효과 전혀 없으니 화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화를 참는것을 배우는것이 베트남 생활에서 생존할수 있는 첫걸음입니다.
3 시간관념/ 무관심/부활신공 /복합업무
베트남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 열대지방사람들이 시간의 관념이 희박합니다.
급할 것 없는 이들의 태도는 아마도 좋은 기후로 부터 기인했다고 추측합니다.
절대로 얼어 죽을리 없는 기후 풍부한 열매와 곡식 절대로 급할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소유한것이 없어도 죽지 않을 만큼 먹을것이 있다,면 땀흘려 일해야 할 이유 중 하나는 사라지는 것이겠지요.
베트남의 산업이 조금 더 발전하고 소유하는 것이 많아지기 시작한다면 자연스레 사라질 문화입니다.
나머지 무관심 부활신공 복합업무 문제는 상급자를 무시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위들입니다.
타인의 업무에 무관심 한이유는 일을 하거나 않하거나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짤리지 않을 정도라면 반항합니다
그게 일신의 편리를 도모하는 일이니까 이들의 정서도 잘 들어 맞습니다.
지각 조퇴, 돌아가셨던 어머니가 다시 살아 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여기서는 흔한 거짓말입니다.
단 외국인들에게만 입니다.
베트남 회사에서는 이런일이 드뭅니다.
첫째 -베트남 직원들과 사장 혹은 관리자와의 언어소통 문제인데, 서로 완벽하게 언어 소통이 되지 않아도
관리자들은 직원들의 편의를 봐줍니다.
특히 부모상인데 한국인의 정서로써 관자가 이걸 막는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베트남인들입니다. 영악하게 이걸 이용하는 것이지요.
한국회사와 베트남 회사의 업무 진행방식의 차이도 있습니다.
자율 경쟁시스템의 한국회사는 근무하는 시간보다 처리되는 업무의 양을 중시합니다.
며칠 빼 먹어도 내업무를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며칠 빼먹은 뒤에는 밤을 새서라도 자기 업무를 마무리합니다.
자연 야근/ 특근/일요근무도 서슴치 않게 됩니다-무한경쟁 시스템.
베트남에서는 업무는 분할되어 할당제입니다. 자신의 업무 할당만 채우면 끝나는 일이지요.
자신이 나오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업무를 처리해 줍니다.
늦게 나오거나 일찍 퇴근 하거나, 혹은 하루를 온전히 제껴도 급여가 삭감되지만 않는다면 그야말로 땡잡는날입니다.
업무의 효율적인 진행을 중시하고 시간적인 문제는 부차적인 한국 시스템은 그야 말로 쉬운 먹잇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스템을 바꾸어야 합니다.
복합업무역시 상사를 무시하기에 생기는 일입니다.
엉성하지 않은 베트남 회사에서는 물론, 한국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효율적으로 처리합니다.
그나마 분업이 되어 있는 부분은 베트남인들끼리 서로를 못 믿기에,
방지차원에서 상호를 감시하도록 되어 있는 시스템들입니다. 껌 씹으며 계단을 못 오른다는 이야기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결론은 완멱한 언어와 소통입니다. 언어는 완벽치 않더라도, 소통만이라도 완벽하게 한다면 일의 효율은 극대화 될 것입니다.
대안
1 시간 관념 – 베트남에도 이제 시간관념이 바귀고 있기에 시간 관념이 없는 직원은 일찌감치 바이바이 하셔야 합니다.
2 무관심. – 일단 베트남식의 업무는 경리에게 청소 시키거나 통역에게 커피를 타지 않게 하는것이 기본적인 문화입니다.
열받어도 이해하셔야 합니다.
다만 부득이 하게 업무를 시켰을 경우,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나 포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즉각적이면서도 물질적인 것이 효과적입니다.
예를들면 경리에게 부둑이 하게 청소를 시킵니다. 팁으로 약간의 돈을 건넵니다.
오늘 네일도 아닌데 청소하느라 힘들었지. 택시타고가라. 하고 약간의 돈을 건네줍니다.
통역에게 커피를 타게 했습니다. 약간의 돈으로 포상을 합니다.
덕분에 오늘 협상결과가 아주 좋았어 ...라든가 하는 칭찬과 더불어 좋은 결과에 대한 답으로 약간의 팁을 건넵니다.
"친구들과 커피한잔 하라 덕분에 협상이 잘 되었다"는 입에 발린 칭찬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만가지 예가 있겠지만 각자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시고요
(어머니를 잃어 슬프겠지만 빠진 만큼 반드시 급여에서 공제합니다.
교통사고나서 아프겠지만 늦은 시간만큼 반드시 급여에서 공제합니다.
5분 지각하면 시급 계산해서 급여공제 합니다.
타임레코더 사다 놓고 찍습니다. 지각 조퇴...심지어는 부모상에도 안 가려 합니다.
복합업무
역시 소통이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베트남인의 경우 어눌하고 부정확한 발음의 상급자가 하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지 않습니다.
무시하는겁니다. 3가지 업무지시를 받고 한 개만 처리하고 나서, 니가 하나만 시켰어 그러면서 우깁니다.
말을 잘못하는 관리자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말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니 습관을 살짝 바꾸시면 됩니다.
단순 업무/복명 복창과 더불어 서로 메모를 합니다.
직원들에게 손바닥만한 수첩을 사주고 업무를 적게 합니다.
물론 관리자도 같이 적습니다 메모하는 습관과 더불어 아주 중요합니다.
적고 복창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슈퍼거서 담배 하나사고 B 사에 서류 전달해주고 돌아오다가 접착제 하나 사와라. ..
수첩에 1. 무어 툭라(담배 구매) 2 항베 콩티 베 (B사에 배달) 3 무어 반 케오(접착제 구매) 이렇게 적는걸 확인 하고 보내면 됩니다.
베트남에서는 소통이 안 되기에 한 번에 많은 일을 말로 시키면 단번에 오류가 납니다.
천천히 돌아가는 마음으로 하나식 처리하시면 하나씩 천천히 풀려나갑니다.
한국사 람 빨리빨리. 척척 알아서 좋아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거 꿈꾸시면 일찍 돌아가십니다.
베트남의 국민성도 문제지만 소통이 없으면 결과도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소통하려 하지 않는 관리자입니다.
마지막으로 불결함...
문화의 이해. 베트남은 아직까지 아시아의 최빈국 중 하나입니다.
문화나 문명보다는 배고픔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날씨는 무덥고 상하수도 시설은 열악합니다. 땀 냄새에 아직 청결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참고 견디셔야 합니다.
대안 없습니다 ...6개월에 한번식 꼭 구충제 드시고
집안, 사무실이라도 깨끗하게 청소하고 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결론
베트남은 우리와는 아주 다른 정서를 가진 나라입니다.
한국인으로써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분명 많습니다. 많은 외국인들도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오래 사시면 한국인 으로써 가졌던 장점들을 많이 잃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환경에 따라 적응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베트남인들이 한국인을 우습게 알고 무시하는 데에는 일견 한국인들이 만들어 낸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국인의 잘못을 보자면
1 소통의 중요함을 망각합니다.
베트남에서의 주요 언어는 베트남어입니다 무시하시면 안됩니다.
언어는 그 문화를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첫 걸음 일 뿐더러, 언어를 통해 소통을 이루고
소통을 통해 생산이 가능해지고 이익이 창출됩니다
사장은 앞으로 돌격하며 외치고 달려가는데 직원들은 "재 뭐래는거니?" 하며 먼 산 쳐다 보는 데에는 한국어로 외치기때문입니다.
사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에 갔었던 사람들이라면 현지어를 열심히 배우려 노력할입니다,
나중에 써 먹을수도 있겠고, 세계적으로 통용하는 인구나 면적이 많을수록 중요 언어가 되겠지요.
베트남어는 그것에 기준으로 본다면 사실 별 가치가 없는 언어가 됩니다.
베트남을 벗어나면 쓸모가 없는 언어인데다가, 언어학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언어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러 이유로 베트남어를 등한시 하시는데, 일단 기본적으로 베트남 직원을 부리신다면
베트남어로 잘못을 지적하시고 화내실 수 있어야 합니다.
2 원칙을 세우고 서로 다름을 인정할것.
반드시 상벌이 명확하여야 하고 잘못을 했으면 1년이 지난 뒤에라도 추궁을 해야 합니다.
회사에서 원칙을 세우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 기록입니다.
노동계약서/출퇴근 기록부/업무일지/사유서/ 시말서/업무지시서/작업보고서
온정주의에 빠져, 업무 시간에 딴짓 하는데 봐 주지 마시길 바랍니다.
전에 어느 회사는 점심 업무 이후 시간에 사무실에서 고대기 말고 화장해도 관리자가 아무소리 안하고 오히려 같이 놀아주더이다.
한국아니라, 전세계 어디 심지어는 베트남에도 그런회사는 없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베트남인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행위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그들을 망치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칙 중에 원칙입니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회사는 노동력의 댓가로 임금을 지불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원칙조차도 무시해버리면 베트남에서 살아남는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업무시간에는 업무를 엄정하게 효율이 높은 직원게는 반드시 포상을 ...그것이 회사가 살고 모든 직원이 사는길입니다.
베트남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원칙과 규정을 만들어 진행하시면 처음에는 더딘듯 하지만 곧 무리 없이 풀려 갈겁니다.
베트남인들은 이미 통제에 잘 길들여진 민족입니다. 주어진 책무를 이루는데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인은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민족입니다. 그 한국인의 기준을 베트남에서 적용하시면 안됩니다.
스스로 창의적인 무엇인가를 해 내기보다는 주어진 책무에 책임을 다 하는데 적합한 민족성이라는것입니다.
밭갈기에 적합한소를 소 싸움에 내 보내서는 안 되는일.
원칙을 엄정하게 준수하되 다름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3. 온정주의를 버리십시오.
결국 2번과 겹치는 이야기지만 원칙을 세우면 해결될문제입니다.
얼마전 제가 구인구직 게시판에 한국회사에 취업을 원하는 베트남인들에게 충고겸해서 몇자 끄적거렸습니다.
일부러 적당한 난이도의 단어와 인터넷 용어 방언등을 섞어서 쓰되,
그래도 한국에서 12세 정도면 이해수 있겠구나 싶은 정도의 문장으로 구성했습니다.
몇몇 한국 분들이 한국인으로써 부끄러워 하시더군요.
사과도 대신하시고 그 정도도 이해 못하는 통역이 보통 대졸자이 봉급 10배가까운 액수를 받습니다.
이게 맞는 일일까요?
그 통역들이 한국을 좀더 이해하려 애쓰고 노력한다면 회사는 아마 더 발전 할수 있겠지요
당연히 통역의 봉급도 더 올라 갈 것이고,
한국에서도 직원들 뽑으실 때 그러셨습니까들? 더 엄정하셔야 될 줄로 아뢰옵니다.
한국인으로 정말 부끄러운게 뭔지 아십니까?
한국사람 잘난 체 해도 뭐 일해 논거 보니 똑 같네 하는 소리입니다.
남의 잘못은 작은 것도 크게 보는 사람들 입니다.
여기 살며 베트남인들에게 많이 듣는이야기.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화를 잘 내? 툭 하면 신경질이야~"
-늬들이 일잘하면 화 안낸다.
저녁 다섯시에 친구가 결혼해서 점심먹구 사무실에서 고대좀 하고 화장좀 했어..뭐 그정도를 가지고 화를내냐 한국넘들은..
-퇴근 시간은 여섯시다 개념은 냉장고에 넣어놓구 왔냐? 한국서는 그러면 재떨이 날라간다.
한국 사람들은 왜 직원들한테 그렇게 고압적이야~
-나 한국서 사장 할때는 우리직원들은 일잘못하면 맞았다 늬들도 맞아볼래~
한국사람들은 왜 매날 가라오케가고 여자타령해 한국에서는 맨날 굶나보지?~
-가면 베트남사람들은 아침 10부터 여자끼고 술먹고 놀더라. 그리고 손바닥이 혼자 소리내냐? 빙신...
거기 한국 빌딩 물샌대...답변 못했습니다. ..거짓말 일수도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일 까 봐 답변 못했습니다.
얼마 전 아는 베트남 사람이 텔레비젼을 사야 하는데 뭘 사면 좋겠냐고 전화를 했더군요.
당연히 엘지나 삼성으로 사라했습니다.
47인치 (두둥~ 이그 돈두 많지...) 입에 침이 마를 새없이 자랑입니다.
시야각이 넓어 옆에서 봐도 선명하고 어저고 저쩌고…테레비젼 산김에 친척들 불러모아 놓고 파티를 하는데
한사람이 왜 소니를 안 샀냐고 하더군요. (순간 싸아 해지는 분위기) 코에 바람넣고 반격 준비 하는데
이 베트남 주인 썩소를 날리며, 이미 엘지 삼성이 소니를 추월한지 오래다 시뱅아 넌 신문도 안보고 사냐~
그리고 소니는 중국꺼다. 이건 한국꺼고 상대가 되냐? 피식…
엘지 삼성의 관리자들도 그랬을까요?
직원이 늦게 와도 흥.
업무시간에 노닥거리고 놀아도 같이 어울려 관리자들까지 엉켜서 노세노세 했을까요?
세계 일등제품을 남드는 우리나라 기업들 철저한 관리와 노력이 스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고압적이어도 일등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자랑스럽군요.
직원들 충분히 존중해주고 대우해 줘도 물새는 빌딩을 만드는 회사 부끄럽구요.
그리고 베트남에대해 좀 안좋은 글이 올라오면 꼭 물타시는 분들 계시는데...
한국70-80년대 ? 여기와 달랐습니다. 여기서 직원 임금체불하고 가라오케 골프장 다니는 사람있겠지요.. 한국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기치는 사람들 ..분명 있습니다.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 너무 순진하게 보시는데. ..
베트남 사람들 임금 못 받고 맹하게 기다리지 않습니다 한국인들과는 다른 정서의 한 부분이지요.
한국인으로써 뭔 대우 해 달래는 사람? 저는 못 보았습니다.
투자는 열라하면서 거주증하나 못 받는데 뭔대우...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장이 직원들 한테 하는걸 보고 대우 받는다고 한다면 베트남회사에 가 보시길 권합니다.
거드름 거만함이 어떤건지 확실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월남 사람 게으르다, 무식하다 탓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망하는건 내회사요... 까 먹는것도 내자본입니다. 소통의 중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 16세기 말 포르투갈, 스페인 선교사들이 전파하기 시작한 카톨릭교는 베트남 왕조 제도권으로부터 고립된 자들, 벽지 및 오지의 빈곤한 자들을 중심으로 신분평등, 천국약속 등을 통해 급속히 확산됨. 나아가 카톨릭 선교사들은 베트남 봉건영주들의 정치, 군사 자문관 역할도 하였다. 이중 파리 소재 해외선교단에서 파견된 피뇨 드 비헨느 신부(1741~99)는 당시 베트남 남부 봉건영주였던 응우옌푹아인이 권력을 쟁취하도록 지원했고, 그의 아들 카잉이 루이 16세를 알현하도록 주선. 응우옌푹아인은 1802년 지아롱이라는 이름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응우옌 왕조를 세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응우옌 왕조는 카톨릭을 베트남 문화를 위협하는 이단으로 간주, 선교를 금지시키고 박해를 가함. 2대 왕 민망, 3대왕 티에우찌, 4대왕 뜨득은 프랑스에 대해 적대적 정책을 취하면서 카톨릭 포교를 금하는 칙령을 발표. 이에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인 1858년 베트남내 카톨릭 보호라는 명목으로 베트남에 무력개입하였는데, 프랑스군은 프랑스, 스페인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베트남에 진군. 1858년 다낭을 점령하고, 1865년 사이공을 점령. 이때 벌써 40만명에 이르는 카톨릭 신도와 민란, 왕위계승으로 인한 왕가 내분 드응로 응우옌 왕조는 1884년 프랑스와 보호령 조약에 서명하게 됨.
베트남을 보호령으로 한 프랑스는 1887년 북부의 통킨, 중부의 안남, 남부의 코친차이나를 합쳐서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성. 1862년부터 1945년까지 약 80년간 계속된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 정책은 베트남을 착취하는 것이지 알제리에서처럼 프랑스인의 정착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1930년경까지는 베트남 왕조의 권위를 약화시켰으나, 1920년대말부터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 공산주의 부상을 막기 위해 베트남 왕조의 미화를 시도. 프랑스 식민당국은 베트남 어린이들에게 베트남 역사를 교육시키는 데 관대했다. 베트남 어린이들은 베트남의 잔다르크인 쭝 자매, 1000년의 중국지배를 종식시킨 응오꾸옌 장군, 몽골의 세차례 침략을 격퇴시킨 쩐홍다오 장군, 중국 명나라를 격퇴시킨 레러이 장군 등 중국과 싸운 베트남 영웅들에 대해 배웠다.
프랑스식민 당국은 베트남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반감을 세뇌시켜 프랑스는 베트남을 중국의 압제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교육시킴. 그러나 중국에 저항한 전쟁을 치른 영웅들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존경심은 베트남인들 마음에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1789년 프랑스 혁명사상도 베트남의 민족주의를 부채질했다. 프랑스 식민시대 판보이저우, 판쭈찐 등 개혁성향의 유교학자들을 중심으로 반봉건, 민주주의를 표방한 개혁운동이 일어남. 판쭈찐은 교육확산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당시로서는 과격한 접근을 제시하기도 함.
나아가, 1927년에 초등학교 교사인 응우옌타이혹이 베트남 국민당을 창당했고, 1930년 응우옌아이꿕의 지도아래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됨. 호찌민은 판보이쩌우, 판쭈찐의 사상을 계승발전 시키는 한편 반식민, 반봉건과 무력투쟁, 사회 및 지식층 개혁을 내세우면서 베트남 국민해방을 세계혁명과 연계하여 국제적 지지도 얻어냄. 호찌민의 공산당은 1945년 8월 혁명을 주도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 외부문화의 선별적 수용 : 베트남은 중국, 인도 및 동남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중국문화가 압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음. 베트남은 정치에서는 중국을 배척했지만 문화면에서는 중국에 매료되고 답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베트남의 관습, 전통, 신앙에 맞는 것만 선별적으로 수용하였다. 프랑스의 식민지 문화는 건축과 음식에 많이 자취를 남김. 종교 면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음. 여기에 조상숭배, 힌두 전통 및 가톨릭의 영향이 더해짐. 유교의 영향으로 장유유서의 위계질서가 확실하고 가부장제의 사회. 가족과 형제애가 최고의 가치이며 교육을 중시
- 자연을 정복하기보다는 순응하며 :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쌀을 주식으로 함. 그러나 베트남의 자연환경은 온화화기도 하고 때로는 거칠기도 하다. 이런 환경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베트남의 독특한 문화적 전통을 형성. 자연을 정복하기보다는 순응하며 살았다. 이렇게 수천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 의식, 적응, 탄력성 등이 전통으로 발전. 벼 경작은 관개, 댐 및 운하건설 등 집단적 대처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공동체 인식이 발전하여 촌락이 생기고 상부상조, 조상숭배 및 영웅숭배 사상이 전통으로 자리잡음
- 원리는 밖에서 오고 정서는 안에서 온다 : 베트남에서 촌락은 고도의 자치를 누렸으며, 베트남이 역사의 시련을 극복하고 정체성을 보존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있어서 버팀목 역할을 함. 이런 촌락문화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서로를 정으로 대함. 백개의 설명보다도 약간의 정서가 더 가치있다. 원리는 밖에서 오고 정서는 안에서 온다. 등의 속담은 베트남인들에게 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줌. 띤깜은 베트남의 가치 중 하나다.
- 부드럽고 탄력성 있는 물이 바위를 부식시킨다 : 베트남인들의 강한 의지와 신속한 적응력은 거친 자연여건에서 생성된 것. 강한 바람은 강한 의지로만 막을 수 있다. 조롱박에서 살 때는 둥글게 되고 긴 관에서 살 때는 길게 되어라. 등의 속담은 이를 말해준다. 베트남인들의 전통 특히 공동체 의식은 자연환경의 공동대응여건에서 생성되고 발전해왔다. 베트남의 전통에서 촌락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촌락을 다스리는 정부도 거대하고 강압적이기보다는 극단을 피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추구. 베트남인들의 특성은 가끔 물에 비유되는데, 물은 부드럽고 탄력성이 있으면서도 바위를 부식시키기도 하고 거대한 힘이 있어서 뚝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베트남 사람들의 행동은 단호하면서도 매우 탄력적인 측면을 띄고 있다.
- 안팎으로 평화를 유지하라 : 베트남의 전통에서 또 하나의 현상은 안팎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는 것. 베트남은 54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해안선이 3200킬로에 이르고 서쪽으로 산악지대, 동쪽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다. 이처럼 취약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조직화되고 통합된 대응이 필요했으며, 나라사랑, 조상숭배, 외부침략 거부, 생사초월 투쟁 등의 특성이 형성됨
- 빈랑 나무 잎과 열매를 씹으면 혈액순환이 활발해지고 눈이 빛나며 혈색이 좋아지며 입술이 더 붉어짐. 전통 의학에서는 빈랑 나무가 살균기능이 있고 악취를 제거해주고, 충치와 류머티즘을 예방하며 위통을 완화시켜주며, 고약으로도 쓰이고 여드름을 없앤다. 빈랑 나무는 마리화나나 대마초와 유사하며, 제단에 올려놓는 제물 중 하나. 베트남에서는 손님이 오면 빈랑나무와 차를 대접. 빈랑나무를 씹는 것은 대화의 시작을 의미. 빈랑나무는 윗사람에게 줄 때는 존경을 뜻하고 결혼식이나 장례식 참석자에게 줄 때는 감사를 의미. 빈랑나무 씹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이는 것을 의미. 부모는 딸아이에게 낯선 사람이 주는 빈랑나무를 절대 받아서 씹으면 안된다고 조언한다. 빈랑나무는 약혼식이나 결혼식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 과거에는 신랑은 신부가족에게 200~300개 빈랑 나무잎과 열매를 주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요즘 빈랑나무를 씹는 사람은 없지만 이 관습은 베트남의 문화예식으로 남아 있다.
- 1911년 호찌민은 사이공으로 내려가 프랑스 상선 라미랄 라투시-트레빌호의 요리사로 취직하여 해외라 나갔다. 그는 스페인, 포르투갈, 알제리, 튀니지, 콩고, 다호메이, 세네갈, 영국, 미국 등을 여행하면서 요리사, 정원사, 청소부, 가축 사육사, 호텔 웨이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 1913년 미국에서 살았는데, 뉴욕의 브루클리에서 흑인 근로자들과 살기도 했고, 보스턴에서는 보스턴 파커하우스 호텔에서 일하면서 크림파이와 롤을 만들었따.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서구의 자유사상, 자본주의의 폐해, 노동자 농민 계급의 억압을 보았다. 1917년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호찌민은 파리의 가장 가난한 지역의 하나인 17구에 거주하며 사진관 점원, 중국 고가구 거래상을 위해 그림을 그리며 베트남 국민운동을 시작. 이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호찌미은 낙관과 금욕생활을 신조로 삼았다.
- 베트남어는 표기만 달랐지 아직도 한자어휘가 많이 남아 있음. 중국 한나라 시대 베트남에 한자가 전파된 것으로 알려짐. 그 이후 중국의 중원에서 한민족이 아닌 이민족들이 힘을 차지하자 중국 한인들이 남으로 밀려났다. 이들을 객가인이라 부르고 이들을 통해 중국 문화가 남쪽으로 전해졌다는 말이 의관남도이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중국에서도 한자의 발음이 변했으나 한국, 베트남에서 한자의 원음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왔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한자 발음이 변해 우리가 알아듣기가 어려운데, 한국과 베트남은 한자발음이 비슷하여 잘만 들으면 한자어휘는 상당부분 알아들을 수 있다.
- 베트남 사람들은 자연과 전쟁에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해왔다. 적응성과 유연성이 힘이다. 조롱박에서 살 때는 둥글게 되고 튜브속에서 살 때는 길게 되라는 베트남 속담이 베트남인의 적응능력과 유연성을 보여줌. 베트남의 중국과의 관계를 보면 한편으로는 저항과 투쟁을 하면서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문화적으로는 중국문화에 매료되어 이를 배우고 따라하려고 했다. 호찌민이 미국, 영국, 프랑스의 혁명을 연구한 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혁명노선으로 채택했듯이 베트남은 개방과정에서 정치체제에서는 중국을 모방하고 경제발전에서는 한국, 일본 등의 개발경험을 답습하는 유연성을 보여준다.
베트남 정부는 미국 거주 과거 월남 정부의 인사도 이들을 반정부인사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의 해외교민으로 포용하여 이들이 베트남에 투자하는 경우 베트남 국민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고 있음. 이런 모습들은 베트남이 장점으로 갖고 있는 지속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것.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격멸시킨 베트남의 영웅 오응우옌지압 장구은 디엔비엔푸 전쟁에서 '신속타격, 신속진군' 전술 하나에만 매달리지 말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것을 주장. 이것이 지속적 유연성이다.
- 베트남 사람은 체면을 중시. 공동체 의식이 강한 베트남 사람들은 체면손상은 치명적인 것으로 생각함. 서양 사람들은 타협을 합의에 이르는 중요 과정으로 보는 데 반해 베트남 사람들은 타협은 자기의 취약을 드러내는 일로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보고 있다. 다만 타협은 상대를 패배시키는 대전략의 일환으로만 이용. 호찌민의 원칙있는 타협은 그런 의미로 해석됨. 한편, 베트남인들은 자기체면도 중시하지만 상대의 체면도 중시함. 베트남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이겨놓고도 먼저 찾아가서 화해를 요청했는데 이는 상대의 체면을 배려한 예이다.
- 베트남 사람들은 동성간이든 이성간이든 만날 때 대개 악수를 함. 좀 친한 사이가 되면 포옹하거나 볼 키스를 한다. 포옹이나 볼 키스는 친근감의 표현이다. 아시아 국민 중에서 유럽식 인사방법을 가장 빈번히 보여주고 있다. 포옹은 레닌주의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하고 프랑스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오래 산 호찌민의 포옹인사 방법을 베트남 국민들이 따른 것 같다.
베트남 사람들은 눈을 마주보며 대화한다. 대개 동양사람들은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면 불손한 것으로 오해받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진지한 태도로 듣는 표시로 눈을 마주보며 대화. 베트남 사람들은 대화시 손이나 머리 움직임이 적다. 조용하게 말하고 목소리를 여간해서는 높이지 않는다. 베트남 속담에 상대의 영혼에 이르려면 부드럽게 말하라고 한다.
- 유교 및 불교의 영향으로 위계질서와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깊게 자리잡음. 염화시중의 미소가 통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정중하고 간접적이며 분쟁을 피하길 원한다. 이견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을 싫어한다. 문제가 생기면 직접 대면하여 해결하려하기 보다는 중개인을 내세운다. 시를 사랑하는 베트남인들은 논리와 이성보다는 완곡하고 모호한 표현을 선호. 정확성의 법률적 접근보다는 윤리적 도덕적 접근을 선호.
- 베트남은 정치 우선 사회다. 정치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 베트남의 통치이념인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이념을 원치으로 하면서 시장경제는 하나의 전략으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1986년 개혁, 개방으로 국민의 의식주 개선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만 아직도 경제나 사회문제가 별도의 영역을 갖는 것은 아니고 정치가 경제와 사회를 이끌고 있다. 정치는 말이고 경제, 사회는 마차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비유된다
- 베트남 사람들은 아니요를 말하지 않는다. 베트남 사람이 알았다고 말한 것을 동의한 것으로 오해한다. 베트남의 알았습니다는 앞으로 생각해보겠다는 정도의 뜻이지 전혀 동의한 것은 아니다.
- 베트남은 컨센서스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로 보인다. 유교와 레닌주의 영향으로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정책 결정은 촌락문화와 레닌주의의 영향으로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고 반대하지 않는 컨센서스로 이루어짐. 베트남에서 최종 정책결정도 당서기장,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 조국전선 주석 등 집단 지도체제에 의해 컨센서스로 결정됨. 물론 군사, 안보, 주권, 외교 등 주요 문제는 최고 리더십에 의해 결정되지만 대개는 최고 리더십에 상정되기 전에 이미 각 부서의 중간층 이해당사자간에 충분히 검토되기 때문에 정책 결정의 방향과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중간층에서 형성됨. 이런 컨센서스 관행 때문에 베트남에서 의사결정이 늦는 경우가 허다함. 성미 급한 한국인들에게 지연은 지옥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의사결정 절차를 이해하면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80%는 기다리고 20%는 실행하라.
- 흥정단계에 들어가면 상대가 먼저 발언하게 한다. 베트남에서 협상할 때는 손님이 먼저 말하라고 하고, 외국에 나가서 협상할 때는 주인이 먼저 말하라고 한다. 흥정단계에서 지연전술이 이용되곤 한다. 문제해결의 대안제시보다는 자기 입장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월남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파리협상에서 월맹의 레드토는 협상상대인 키신저에게 거의 3년간 똑같은 입장을 반복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마지막 단계에서 의미있는 양보를 한다. 가끔 합의한 후에도 다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사례도 있다.
- 월남전 종식을 협상한 키신저와 레득토는 협상 스타일에서 서로 닮은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협상의 진행방식. 키신저도 레득토도 모두 협상의 틀이 되는 원칙을 정한 후 세부사항을 협상하는 연역적 접근을 택한 것으로 분석됨. 레득토는 먼저 협상의 원칙이 될 미군의 일방적 철수, 티에우 축출, 월남 내 월맹군 잔류, 월남 내에 월맹이 승인하는 연립정부 수립 등을 협상의 원칙으로 3년간 계속 반복해서 주장. 원칙문제에 대해 합의가 없는 한 세부사항은 별 진전이 없었다. 물론 72년 2월 미국과 중국 수교, 같은 해 5월 미국과 소련간 데탕트 등 국제정세가 월맹에게 불리하게 전개된 것도 영향을 주었지만, 월맹은 미군의 일방적 철수, 월맹군의 월남 내 잔류 묵인 등이 합의되자 티에우 축출 등을 철회하면서 미국과 합의에 동의. 키신저는 협상의 어느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는 가운데 세부사항을 제시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할 정도로 협상의 틀이 되는 기본원칙을 먼저 합의한 후 세부사항을 협상하는 방법을 선호했음. 그렇다고 키신저가 세부사항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키신저는 "디자인에서처럼 외교에서도 신은 세부사항에 있다"라고 말했다. 키신저는 아랍-이스라엘 협상 시에는 그들간 불신의 벽이 원체 높았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가는 귀납적 접근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양측이 상대의 원칙을 수용하고 양보를 통해 일거에 타결하는 중국식 접근을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음
(2) 체면의 고려. 전통적 공동체 생활에서 형성된 체면유지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의 체면유지도 중시했지만 상대의 체면도 중시했다. 과거 중국과 싸워 이긴 후 먼저 찾아가 화해를 요청한 것이 그 사례. 레득토는 키신저가 건설적 모호성을 통해 월맹과 월남간 군사 분계선, 월남 주권, 월남 내 연립정부, 월맹에 대한 보상 등 문제를 해결해나가는데 정면 거부하지 않았다. 레득토는 키신저가 직설적인 사람이 다루기에 제일 어렵게 여긴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 같다. 키신저는 협상 당사자들에게 항상 체면을 세울 수 있게 여지를 주어야 한다고 강조. 키신저가 적용한 건설적 모호성은 그런 접근의 대표적 사례다. 키신저는 협상 당사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는 "외교란 분명한 것을 모호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직설적인 사람이 다루기 제일 힘들다고 말했다.
- 호찌민 시는 베트남 제일 도시.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는 월남의 수도였음. 86년 도이머이 정책으로 개방을 추진하 이후 가장 번성하고 있는 도시. 호찌민 시 지역은 원래 습지대였고 캄보디아 지배하에 있었음. 캄보디아 왕국이 타이와의 전쟁으로 약해져서 이 지역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지고, 베트남인들의 이주가 급증하자 서서히 베트남화되어감. 토착민들은 사이곤으로 불렀다. 1859년 프랑스에 의하여 정복 이후, 프랑스령 코친차이나의 수도가 된 사이곤은 식민지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도 수많은 전통 서양식 건축양식을 반영한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는 사이곤이 동아시아의 진주, 또는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1954년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비엣민에게 패배하여 베트남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러나 프랑스는 남부 베트남은 퇴임했던 바오다이 황제를 다시 추대하였고, 50년에 바오다이 황제는 사이공을 남부베트남의 수도로 삼음. 베트남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도, 사이공은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이끌던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여 이 도시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통치를 받게 됨. 이를 미국에서는 사이공 함락이라고 부르나,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해방이라 부름. 통일된 후인 76년 7월부터 호찌민 주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호찌민 시로 변경됨. 호찌민 시의 인구는 700만이 넘는 베트남 내 도시로 경제수준도 베트남 전체 평균을 두배 이상 넘는다. 09년 베트남 국민의 1인당 GDP가 1052불이었는데, 호찌민 시의 1인당 GDP는 2534불이었다. 호찌민 시는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 거주 우리 동포들도 대부분 호찌민과 인근 성에서 거주하고 있다. 호찌민 시 내 쩌런 지역은 베트남내 최대 화교거주지역이다.
-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처럼 음식을 밥상에 한꺼번에 올려 놓음. 밥, 끓여서 간장에 절인 메꽃, 소금에 절인 가지, 데친 채소, 신맛이 나는 생선 수프 등을 올려놓음. 생선으로 만든 액젓인 느억맘은 빼놓을 수 없는 밥상 반찬이다. 밥통은 어머니나 큰 딸 옆에 놓는데, 다른 사람의 밥그릇이 비면 여기에 덜어주는 역할을 함. 밥상이 차려지면 가장 어린 사람이 식사하십시오 하고 어른들을 밥상으로 모셔온다.
식사는 가족 단합의 상징이다. 식사하고 있는 데 방문객이 나타나면 밥그릇과 젓가락을 갖다 놓으면서 식사를 권한다. 베트남 말에 친구하고는 어떤 음식이든 함께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개 아침은 6시에 먹고 점심은 정오에, 저녁 6시 또는 6시반에 저녁을 하고 이내 집으로 돌아간다. 식사때 맛있는 밥 한그릇과 국 한그릇을 먹는데 만족한다. 저녁식사를 간단히 하고 소식을 해서인지 베트남에 90세 이상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식사는 매우 검소하다. 고기는 드물게 먹고 단백질은 생선, 새우, 홍합, 콩으로 보충하며, 쌀 대신 고구마, 옥수수, 타피오카 등을 주식으로 먹기도 한다.
- 베트남의 국민음식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탄 퍼, 쌀국수는 불어로 불을 뜻하는 feu를 베트남 식으로 발음한 것. 프랑스식 pot au feu(쇠고기 수프)에 베트남 쌀국수를 접목시킨 음식으로, 18세기 하노이 주변에서 알려지기 시작. 베트남 사람들은 주로 채식을 해왔는데 13세기 몽골침략으로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농사를 돕는 동물로만 알려졌던 소를 먹기 시작. 이후 프랑스 식민지배가 남쪽으로 뻗어가면서 퍼 역시 남쪽 지방으로 전파됨. 북부 베트남의 퍼는 맑은 쇠고기 국물과 향초를 사용하고, 남부의 퍼는 쇠고기 힘줄이나 닭고기 등을 더 사용함. 프랑스에서는 퍼를 똥낀누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통킨만의 음식이란 뜻으로 예나 지금이나 베트남의 대표적 음식임을 알 수 있다.
- 퍼는 북부 베트남 특히 하노이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다. 그래서 하노이 수프라고도 불린다. 하노이 사람들은 남부의 퍼는 퍼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하노이의 특산음식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남딘에서 시작되었다. 25년 번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처음 개점했다고 한다. 하노이 퍼 요리사는 대부분이 남딘 성의 번쿠 촌락 출신이다. 하노이 퍼 식당의 80%는 이 촌락 출신들이 소유하고 있다. 퍼는 쌀국수, 가늘게 썬 쇠고기, 양파, 향초, 양념이 주 원료임. 퍼 요리방법은 소뼈를 5시간 이상 가마솥에 넣고 펄펄 끓여 국물을 내고 적당량의 가느다란 쌀국수를 큰 그릇에 넣고 그 위에 이미 끓여 놓은 쇠고기나 닭고기, 얇게 썬 양파, 파 등을 함께 넣음. 이를 퍼 육수와 섞는데, 육수는 고기, 골이 들어 있는 정강이뼈, 말린 새우 등을 넣고 펄펄 끓인 다음 생강, 느억맘으로 맛을 낸다. 먹을 때 레몬주스, 식초, 얇게 썬 빨간 고추, 후추가루 등을 추가해 먹기도 함. 퍼 국물은 맑고 맛있어야 하며, 고기는 질겨서는 안된다.
- 분차(bun cha) : 북베트남에서 생긴 음식으로 주로 점심 메뉴. 양념된 돼지고기를 불에 구워 각종 야채, 신선한 향초, 쌀국수와 함께 새콤한 맛이 나는 수프인 느억참(느억맘에 식초 등을 넣어 희석한 소스)에 담가 먹는다. 분차 냄새를 한번 맡으면 이내 침이 흐른다. 입맛 없는 사람에게도 분차는 큰 기쁨이라 한다. 토란 비슷한 손하 잎줄기를 벗겨 같이 먹기도 하는데 그 맛이 독특하여 신이 이 목적으로만 손하를 만들었다고 하는 말도 있다.
- 느억맘 : 약 3200킬로의 해안선을 두고 있는 베트남의 대표적 조미료. 말린 생선을 주 원료로 함. 요리할 때 쓰이기도 하고, 음식의 간을 맞추는 소스로 사용됨. 베트남 음식점의 테이블마다 그릇에 느억맘 소스가 담겨 있음. 보통 얇게 썬 고추를 띄워 얼얼한 맛을 내기도 하고 고수나 향초를 넣기도 함. 발효식품 느억맘은 한국의 젓갈과 비슷. 생선을 발효시켜 만든 소스로 영양가가 있고 베트남 요리에서 소금대신 사용됨. 판띠에트, 푹꿕 섬에서 생산되는 느억맘이 가장 맛이 좋다고 함. 한번 맛을 들이면 모든 음식에 이 느억맘을 찾게 됨. 베트남 사람들은 느억맘을 베트남의 영혼이라 말함. 식초, 레몬, 설탕을 넣어 물로 희석해 사용하기도 한다.
- 넴잔 : 다진 고기 튀김인 이 요리는 언뜻 중국식 춘권과 비슷하지만, 얇은 쌀 종이피를 사용하므로 더욱 바삭함. 퍼와 함께 베트남 대표 요리
- 자가 : 하노이 도안 가족이 100년전 처음 발명했다는 요리로, 엄청난 인기 덕에 이 가족의 음식점이 있는 길을 짜까거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함. 짜까는 민물생선을 딜풀을 얹은 기름판에 직접 튀겨먹는 북베트남 요리. 땅콩과 고추를 띄운 느억맘에 찍어 먹음
- 비아호이 : 생맥주로 대개 카페의 길거리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마시며 현지인을 부담없이 만나기에 가장 좋은 음료. 한잔에 우리 돈으로 400원 정도. 흥이 나면 건배를 제의하곤 하는데, 우리의 위하여 대신에"하나, 둘, 셋, 듭시다!'(mot, hai, ba, yo!)라고 함
- 베트남 사람들은 사무실에서나 집에서나 손님이 오면 제일먼저 차를 대접. 베트남 차 중 타이응우옌성에서 나는 차가 제일 맛있다고 함. 그래서 베트남 말에 여자는 뚜엔꽝 여자가 제일 예쁘고, 타는 타이응우옌차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 다랏 차 : 베트남 차를 이야기할 때 다랏 차를 빼놓을 수 없다. 해발 1550미터의 고원지대의 선선한 기후 덕에 국화과 차의 주요 생산지로 떠오른 다랏의 특산품. 프랑스 식민지 시절 들여온 국화과 식물을 차로 만들어서 대량 생산하는 곳은 세계에서 다랏이 유일함. 03년에는 이 국화과 차를 미국 특허로 공개했다. 이 차는 간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