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3일 LG의 올드스타 행사 때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이길환 씨의 모습(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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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환 전 LG 코치는 지난 주 전방에서 육군 사병으로 복무 중인 아들 면회를 다녀오려다 그만 두었습니다.
두 달 정도 있으면 제대를 하는 아들이지만 자신의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괜찮을 때 잠깐이라도 아들을 보고 싶은 심정에서, 날씨가 춥기 전에 면회를 하려고 했는데 아직은 자신의 몸 상태가 괜찮고 아들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아 제대를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나이 48살이면 아직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그런 이길환 씨가 지난 11월 중순 서울 아산중앙병원에서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난 11월 20일 야구 선배인 이충순 전 SK 코치를 만나 “지난 달 한국시리즈를 중계하면서 몸이 이상해져 병원에 가 진단을 받았더니 췌장암 말기라고 합니다”고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길환 씨는 원음방송 해설을 이충순씨로부터 올해부터 넘겨받아 중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수술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사가 ‘3개월 시한’이라면서 항암 치료만 권해 수술은 물론 항암치료도 받지 않기로 했다고 본인이 밝혔습니다. 비교적 건강한 몸이었던 이길환 씨가 갑자기 암중에서도 까다롭다는 췌장암에 걸린 것입니다.
11월 23일 저녁에 걸려 온 이길환씨 전화 속의 목소리는 말기암 환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게 싱싱했습니다.
그는 “항암치료는 받지 않으려 합니다. 강원도 평창으로 가 맑은 공기 속에서 편안하게 지내려 합니다. 좋다는 한방치료가 있다고 해 오늘은 그곳을 찾아가는 중입니다”면서 “아직은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통증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해 항생제가 든 진통제를 몇 알 먹고 있습니다. 정말 뜻밖이지만 차분하게 이겨내렵니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지난 9월 3일 이길환씨는 LG구단이 마련한 LG전자 고객 감사의 날 행사에 선배 이광은, 후배 김용수(KBS SKY 해설위원) 김건우(원음방송 해설위원) 등과 함께 추억의 올드스타로 나와 팬들과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저는 이길환 씨와 인연이 조금은 각별합니다. 제가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한국일보-일간스포츠 체육부 기자로 처음 일할 때인 1976년에 이길환은 선린상고 2학년이었습니다. 언더핸드, 잠수함투수면서 힘차게 공을 뿌리는 이길환은 당시 고교 정상급 투수였습니다.
그래서 이길환과 당시 타격이 최고조였던 신일고 박종훈(현 두산 베어스 2군 감독)을 함께 묶어 기사를 자주 썼죠. 또 선린상고는 저의 선친께서 다니신 학교이고 제 동생 둘도 졸업하고 친구들도 많았던 학
교여서 정이 갔습니다.
그런데 이길환에게 우승운은 따르지 않았죠. 이길환이 1학년 때인 1975년에 선린상고는 제 30회 청룡기 결승에 올랐습니다. 이길환은 경북고 성낙수와 맞대결을 벌인 끝에 연장 13회 2-2 무승부를 기록하고 다음 날 재경기에서 경북고가 3-0으로 이겼습니다.
그 때 이길환은 어깨 통증이 심해 진통제에 영양주사를 맞으며 역투해 주위를 놀라게 했죠. 이길환은 이 대회 직전 서울 예선에서 상문고와 경기 때 1-0으로 이기며 퍼펙트게임 대기록을 수립, 혜성같이 야구계에 등장했습니다.
1976년 청룡기대회서도 이길환은 준결승전에 진출했다가 최동원이 던진 경남고와 대결해서 0-1로 패했습니다. 이길환은 방망이도 잘 때려 이 대회서 14타수 6안타(4할2푼9리)로 타격2위에 올라 투타 양면으로 재주가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 때 열린 제 6회 봉황대기대회서도 결승에 올랐다가 부산상고 이윤섭과맞대결해서 0-4로 패해 준우승에 머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연세대에 진학해서는 대학야구를 한양대학과 양분하며 각종 상을 휩쓸었죠.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이길환은 MBC 청룡에 입단해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에 선발투수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본래 청룡의 선발은 이길환보다 선배인 하기룡이 등판하려 했으나 하기룡이 복통을 일으켜 역사적인 순간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시구한 개막전에서 이길환은 삼성의 이만수에게 첫 안타를 내주며 3회에 정순명에게 마운드를 넘겼으나 연장 10회말에 이종도가 끝내기 만루홈런을 때려 팀은 11-7로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1982년 6월 13일 이길환은 OB 베어스를 상대로 5회에 김우열에게 유격수쪽 내야안타 한 개를 허용하면서 프로 최초 1안타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프로출범 첫 해에 이길환은 7승7패, 평균자책점 3.61를 기록했습니다만 83년에는 뛰어난 성적을 올렸습니다.
15승7패, 평균자책점 2.51로 승률 1위, 다승 4위에 오르는 빼어난 성적을 남기고 한국시리즈에도 올라갔습니다. 언더핸드 투수가 몇 안되던 시절 이길환의 공은 매끄럽게 돌아가며 타자를 현혹 시켰습니다.
1990년에 MBC가 LG에 구단을 매각하자 백인천 감독은 이길환을 태평양으로 트레이드 시켰습니다. 태평양에서 이길환은 9게임에 등판해 1승, 방어율 7.54를 기록하고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프로무대에서 개인 통산 153경기에 등판해 44승31패4세이브,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있다 LG로 돌아온 이길환은 코치직을 잠시 맡다가 프런트에서 주로 스카우트를 담당했습니다. 1993년에 이길환은 스카우트로서 연세대 입학이 거의 성사된 신일고 거물 김재현을 한-일고교야구대회가 열린 오키나와까지 쫓아가 마감 시간 직전에 계약서(계약금 9100만 원)에 사인을 받아내는 일화를 남겼습니다.
후배들로부터 신임과 사랑을 받고 선배들에게는 깍듯했던 이길환 씨였습니다. 도하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대표팀의 김재박 감독과 박재홍 등 선수들은 그의 췌장암 소식을 듣고 격려금 300만 원을 전달했습니다.
LG 선수단도 모금에 나서고 다른 구단에서도 위로금을 전달키로 했다니 평소 그의 대인관계가 어떠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운드에서 붙 같은 투혼을 발휘한 이길환 씨가 암과의 싸움에도 이겨내길 기원합니다.
천일평 OSEN 편집인
첫댓글 윗글 사진이 안나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