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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시기 소위 출신으로 글 재미있게 쓰기로 유명한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조선인으로 장군까지 올랐던 홍사익 중장에 대한 책을 썼다.
최근 들어 태평양 전쟁 시기 남방지역에서 포로 감시원을 했던 조선인들의 책을 연달아 읽었는데(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https://blog.naver.com/milcamp/222876761798, 전범이 된 조선청년 - https://blog.naver.com/milcamp/222879396428) 이번에는 아예 남방지역 포로수용소의 총책임자 홍사익의 책을 읽게 되었다.
연합군 포로들은 엄청난 학대를 받았는데 전쟁이 끝나고 포로 학대한 사람들을 전범 재판으로 처벌한다. 그런데 일본은 3400명의 조선인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데려왔고, 그 결과 많은 조선인들이 유죄를 받았으며 그중 일부는 처형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포로수용소의 총책임자 홍사익 역시 처형 당한 것이다.
홍사익 일제시대 조선인으로서 중장까지 올라갔다는 점에서 그의 이름은 이미 전설이다. 간단하게 그의 약력을 소개하자면 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 조선의 무관학교 생도들을 일본 유년학교-육군사관학교로 유학 시켰는데, 홍사익은 이 과정 속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중장까지 달은 것이다. 반면 무관학교 출신 동기들인 신태영, 류승렬, 이응준 등은 중좌 또는 대좌까지 달았고 해방 후 국군의 아버지가 된다.
그런데 무관학교 생도들은 일본 유학시절 조선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장 학교를 때려치고 귀국하자며 야단이 났다. 그러나 상의 끝에 일단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경험을 익히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는 날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약속한다. 이것이 바로 '아오야마 묘지의 맹세'이다.
그리고 이들은 무사히 졸업 후 일본군 장교가 되었으며 1919년 3.1운동 소식이 들려 오자 지청천은 약속대로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가가 된다. 그런데 홍사익은?
하지만 홍사익이 약속을 어기고 부귀영화만 누렸다고 비난하기도 어려운 게, 독립운동에 투신한 지청천의 가족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었으며, 독립운동가에게 권총까지 제공하며 직접적으로 도운 일도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자고 하면 그건 또 반대이다.
이에 대해 이 책에서 아주 좋은 결론을 낸 게 있는데, 홍사익은 자신을 '영국군에 근무하는 아일랜드 사람'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800년의 영국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는 민족 관념은 뚜렷하면서도 한때 영국군 내 무려 1/3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수가 복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열심할수록 다른 아일랜드인에게 더 많은 자유와 권리가 부여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홍사익 역시 그러했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근무해야 다른 조선인들이 욕먹지 않고 당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홍사익은 탈출 권유에 만약 자신이 도망간다면 남아있는 일본 군내 조선인들은 어떻게 하냐며 거절한 바가 있다.
포로수용소 그럼 다시 남방 지역의 포로수용소 예기로 돌아가자.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초반 대패로 수많은 미군 포로들이 있었다. 이들을 관리하는 일본군 병력을 아끼기 위해 조선인 포로감시원 3400명이 투입되었고, 1944년에 남방총군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 총괄 관리책임자로 홍사익이 오게 된다.
그렇다고 홍사익이 딱히 포로들을 직접적으로 학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지금까지 해오던 데로 유지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리고 평소 처럼 일본군이 하던 일이 포로 학대였다.
제네바 협정을 준수한다고 자칭하고 있던 피고는 사실은 미국 군인이 육군이든 해군이든 전시 포로가 되었을 때 모든 권리는 박탈되었고, 더 이상 생존할 권리조차 없다고
믿고 있었다는 결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그의 지휘하에 있던 전 조직에 침투되고, 동시에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그 직접적인 결과로 2,000명 이상의 미국 청년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음을 강요당하고, 약 1만 명의 미국인이 영구히 불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그는 그 한쪽 손조차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58~159페이지. 전범재판 중 검찰관 베어드 중령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 살펴봐야 할 측면이 있는데, 일단 저자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그의 저서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https://blog.naver.com/milcamp/220926168531)>에서 일본군이 딱히 포로 학대를 하는 게 아니라, 평상시 일본군 대하듯이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가 있다. 이는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고도의 일본군 비판론자라 일종의 돌려까기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의 주장은 당시 일본의 상황 아래 '미국의 생활 수준 및 미군의 급여 수준'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포로가 후대를 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으나, 일본 육군의 수준을 기준으로 한다면 "의식적으로 포로를 냉대했다.", "고의로 학대했다."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전범 법정에서는 좁은 선박을 통한 미군 포로 수송을 비판하는데 '변소는 갑판에, 음료수 없음, 침대 없음, 누울 자리가 부족해서 일부는 서 있거나 앉아 있어야 함, 환기 시설은 해치뿐'이었다며 학대라고 한다. 이에 홍 중장은 "일본군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수송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완전군장이고 포로는 그렇지 않았으므로, 자세히 본다면 일본 병사 쪽이 포로보다 훨씬 (좁고) 크게 불편했다."라고 답했다. 정말로 다른 일본군 책을 읽어보면 일본군들 자신도 포로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는 막장 상황이었고, 그걸 당연시 여겼다.
(미군 포로와 일본군의 식량은) 전반적으로 말해서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카바나투안이라든가 다바오의 수용소 등은 포로들이 자기 손으로 농원을 만들고
가축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포로 쪽이 일본 군인보다 더 잘 먹은 곳도 있었다."
277페이지. 전범재판 중 홍사익의 답변
심지어 홍사익은 포로가 더 잘 먹은 곳도 있다는 답변만 늘어놓는다. 궤변 같으면서도 일본군 같은 아사리판이라면 포로 보다 보급 상태가 열악한 부대도 있을 법 하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원대 소속이 아니라면 지독하게 냉대한다는 점도 있다. 포병 같은 경우는 원래 배속이 되니 예외지만, 해상 침몰로 임시 배속된 경우라면 냉대한다. 포로들 역시 '포로이기 때문에' 학대하기보다는 원래 일본의 전통적 문화와 실정이 그러하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
그리고 앞서 언급한 <전범이 된 조선인 청년>에서 나오는 내용과 이 책을 같이 읽어봐야 답이 나온다. 그 책에서는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부산에서 훈련받을 때 '살아서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하지 말라'라는 전진훈을 외우게 만들었다고 한다. 군사 교육 위주와 서로의 뺨을 강하게 후려치는 훈련 외에는 포로감시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교육받은 바가 없다. 즉 포로감시원들은 전진훈에 입각하여 연합군 포로들은 살아서 잡혔으니 수치를 당해도 되는 것들로 생각했으며, 포로들을 대할 때 배운 데로 그들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이학래씨가 전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때 자신의 포로 수용소장이 '모든 것은 내 책임이고 포로 감시원들은 죄가 없다.'라는 말 한마디를 해주길 원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원망한다. 그렇다면 모든 포로수용소의 책임자인 홍사익은 전범 재판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홍사익 역시 자기 책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제네바 조약은 비준하지 않았지만, 조약의 조항은 될 수 있는 대로 존중하라고 했다!'는 식의 애매한 태도만 취하고 말았다. 연합군 포로 수용선의 열악한 상황을 문제로 지적하니, 홍사익은 선장에게 포로들을 잘 살펴봐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즉, 자신은 할 만큼 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쓰면 홍사익은 책임 회피형에 완전 쓰레기 같지만, 결정적인 반증이 하나 있다. 전쟁 막판에 홍사익은 포로들을 미군에게 넘겨주라고 각 포로 수용소에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일본군의 평소 정신 상태를 생각해 볼 때 포로들을 전부 죽이라고 명령을 해도 무리가 아니지만 오히려 홍사익은 살려서 미군에게 넘겨주라고 명령을 내렸다. "츠지 마사노부"라는 인간쓰레기가 있는데, 그는 1942년에 이미 필리핀 내 모든 미군 포로를 죽이라고 명령을 위조해서 보낸 적이 있다. 일본군의 상태가 이러한데 홍사익은 오히려 포로를 살리게 만든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이다. 다만 실제로 원활하게 포로들이 인계되지는 않았다. 그냥 포로수용소 근처까지 미군들이 밀어 닥치면 경비대가 빤쓰런 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인계되었다.
결론 홍사익의 삶을 보면 매우 양면적이다. 일본군에 복무하는 한편, 자신이 파멸될 위험 부담을 안고 독립군 가족들을 돌봐주는 모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철저한 친일파 하고는 또 다른 면이다. 남방 지역의 병참감으로 있을 때도 언제나 자애로운 모습으로 많은 부하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전황이 불리해지자 포로들을 미군 측에 넘겨주라고 명령을 내리는 등 선의에 찬 행동도 많았다. 그리고 홍사익이라는 개인 하나가 뭘 어떻게 한다고 해도 일본의 포로수용소 시스템 자체를 결코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사익이 죄가 없다면 자동으로 그 아래에 있는 포로수용소장, 포로감시원들도 무죄란 말인가? 일본 본토 내 포로 수용소를 다룬 <언브로큰>, 인도네시아 내 포로 수용소를 다룬 <레일웨이 맨(https://blog.naver.com/milcamp/222431834797)>을 보면 연합군 포로들은 출소 후에도 엄청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결국 자신을 학대한 자를 찾아내 죽여야지만 이 고통이 끝난다고 생각해 일본으로 들어가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들이 찾는 자는 겨우 군조(중사)와 통역인 이었다. 그럼 그들을 지휘하는 포로수용소장에게는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그리고 필리핀 내 모든 포로수용소의 총책임자 홍사익은?
결국 홍사익도 비극적인 시대의 희생양으로 볼 여지도 있으나, 남방군 병참감으로서 지휘 책임은 결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군 원로들의 회고록을 보면 만약 그가 살아 있으면 국군 창설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 '인과응보'란 없다는 나쁜 선례만 남게 된다. 즉 홍사익은 뿌린 대로 거둔 것이라 하겠다.
3줄 요약
일본군들은 포로를 학대한다는 의식조차 없었고, 평상시 자신들끼리 학대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하였다.
홍사익은 자신을 영국군에 복무하는 아일랜드인 정도로 생각했고, 묵묵히 자기 일만 했는데 그게 포로 학대의 수괴짓이었다.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은 전범재판에서 포로 수용소장이 '자기 책임'이라는 말 한마디 해주길 원했다. 그리고 그 모든 포로수용소의 책임자가 홍사익이다.
[출처] 홍사익 중장의 처형 - 야마모토 시치헤이|작성자 메르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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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https://youtu.be/5aSLNMKqY0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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