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영(1)/ 영과 혼과 몸(2-2)
<축복의 통로>
혼 생명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을 때 혼은 영을 순종하는 위치에 머물게 된다. 다른 표현으로, 만일 혼이 영의 통로가 되지 못한다면 혼은 영의 방해의 사슬이 된다. 혼과 영은 어떠한 일에서도 일치될 수 없다.
만일 영이 가장 존귀한 위치에 이르지 못한다면 영과 혼은 항상 싸우게 된다. 혼 생명이 십자가의 죽임의 역사를 거칠 때 영은 해방을 받게 된다. 혼을 중심은 바로 자아이다. 이 자아가 파쇄될 때 영이 해방됨으로 축복의 통로가 된다.
만일 믿는 이가 영과 혼의 일치(혼합)로 인한 해로움을 알지 못하거나, 기꺼이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다면, 결코 그는 영적인 진보를 기대하기 어렵다. 영을 둘러싼 혼이 처리되지 않는 한, 영의 생명은 자유하지 못한다.
이 부분의 이해는 영적 진보에 너무나 중요한 대목이다. ‘혼의 처리’ 곧 영과 혼의 분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또 다른 말씀으로 설명해보자! 하나님의 은혜의 참뜻은 성령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이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에 자기 스스로를 못 박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건은 성령 사건이다. 바로 내 영 안에서의 일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살리신 그 영, 곧 성령이 우리 사람의 영 안에서, 십자가의 죽음의 효능으로 혼과 자아를 파쇄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십자가가 우리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렸다는 사실을 믿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루신 객관적인 사실이며, 우리에게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이 주님이 이루신 객관적인 진실을 주관적으로 체험함이 없이는 십자가의 능력을 이해할 수 없다. 주관적인 체험은 내 영 안의 일이며 성령의 역사이다.
내 욕정과 욕심, 특히 삐뚤어진 우리의 혼, 곧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에 못 박는 데서부터 부활과 기적과 능력이 일어나는 것이다. 십자가를 믿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 믿고, 내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타고난 혼(욕정과 욕심과 자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우리는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남으로써 혼과 자아가 처리된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스스로 하려고 한다면(타고난 혼이 살아 있다면), 내 속의 성령은 일할 기회를 얻을 수가 없다. 혼이 처리된다는 것은 혼(생각, 감정, 의지)의 독립과 그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어, 두꺼운 껍질이 벗겨지면서, 혼이 그리스도로 대치된다는 말이다.
곧 영을 둘러쌓아 막고 있는 독립적이며 고장 난 혼이 십자가와 말씀으로 치유됨으로써, 이제까지 영의 흐름을 방해하던 혼이 변화되어 성령의 길(통로)가 된다는 말이다. 상처투성이의 혼(생각, 감정, 의지)이 처리됨으로써 우리의 영 안에 계신 성령이 밖으로 흐를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이제 혼의 기능이 영의 통제를 받는 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영적인 사역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본적인 교육제도로 만들어진 신학교와 성직자란 참으로 잘못된 제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시로 성령에 의해 세워진 사역자를 그렇게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찬양도 많이 하고 울기도 하지만, 정작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 당신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내가 못 박히는 일은 성령의 사건인 것이다. 성령 세례라는 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성령으로 인한 자기 찔림이 바로 회개이다. 진정한 회개란 성령의 사건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환경과 이기적인 삶으로 인한 상처투성이의 당신의 혼(생각, 감정, 의지)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보게 하는 성령의 거울에 비춰짐으로써, 자기의 일그러진 실상을 보게 되며, 사건의 진상을 깨닫게 됨으로써 변화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의 몸부림들이 ‘아무 것도 아닌 허상’ 이었으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부인을 고백하며 통곡하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사건은 성령 사건이며, 영과 혼의 분리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영 안에서 한 혼으로>
빌 1장 27절은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에 대한 일들 곧 내가 가서 너희를 보든지 떠나 있든지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한마음(한 혼)으로 함께 싸우며”(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한 영 안에서 굳게 서며 한 혼으로 복음의 신앙 안에서 함께 협력하라”고 번역할 수 있다. 굳게 서려면 우리는 한 영 안에 있어야 한다.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함께 힘쓰려면 우리는 곧 한 혼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서 있으려면 한 영 안에 있어야 한다. 복음이 확장되려면 한 사상과 한 생각과 한 의견과 한 관념이 필요하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한 혼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영 안에 있는 것과 한 혼 안에 있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연합된 영>
마지막으로 우리는 생명 주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을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우리의 어느 부분에 들어오시는가? 디모데후서 4장 22절은 “주님께서 네 영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라고 말한다.
이 보다 더 분명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날 예수님은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있는 생명 주는 영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고전15:45).
고전6:17절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오늘 생명 주는 영이요, 우리는 속부분인 사람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영이 서로 만나서 연합되어 한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연합된 영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영이 하나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 영이 성령인지 사람의 영인지 말하기 어렵다.
또한 로마서 8장 4절은 우리에게 영을 따라 행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영인가? 우리가 연합된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이제 성령과 사람의 영이 하나로 연합되었다. 이 우주 가운데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하나되는 지점이 있다. 이제 우리는 다만 연합된 이 놀라운 영을 따라 행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서 생명 주는 영이시다.
우리가 이 생명 주는 영을 알고 체험하고 누리려면 반드시 사람의 영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영이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 사람의 영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요, 우리가 주님과 접촉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만 주님과 하나될 수 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