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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조명 ①
장승진
신작시
그 오리나무 외 9편
당신은 새촘하였지요
그 오리나무 지날 때
길은 오솔길
산자락 둘러싸고
마을 멀리 보이는 곳
그곳에 수척해진 마음
지금도 뒤척이지요
춘천 3월
아침 대룡산 봉우리 하얗다
산자락 밑엔 입술 벌린 노랑 동백
눈비 샤워로 볼 발개진 바람이
취했다 초록 숲 통째로 마시고
압상트 압상트* 녹색의 뮤즈
춘천의 3월은 진하고 독해
안개처럼 누구나 보헤미안 되고
고흐처럼 귀 막고 나무 그린다
신연강에 빛나던 하얀 백사장
공지천 윤슬로 돌아와 잔잔하고
노래로 메아리로 아지랑이로
꽃다지 달래 냉이 솟아 나온다
압상트 압상트 녹색의 뮤즈
춘천의 3월은 진하고 독해
비가 눈 되고 눈이 초록 되고
사랑이 꽃 되고 꽃이 술 되고
*‘녹색요정’, 혹은 ‘녹색의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술
생선
가끔은 아내 따라 시장에 가서
생선 사면 그것을 들고 다닌다는 시인*
나는 언제나 혼자 어시장 다닌다
사오면 내가 다 손질하고
요리까지 해서 식탁에 올린다
징그러워 못 만지겠어요
아내는 서울 여자
신혼살림 속초에 차렸을 때
한 마디로 못을 박았다
강원도 산골 남자인 나도
속초 와서 생선과 친해졌지만
눈 뜨고 죽은 모습 끔찍하다고
아직도 만지지 못하는 사람
그래도 허술한 내 요리를
잘 먹어주는 아내가 고맙다
*나태주, 『그날 이후」, 시집 『눈부신 속살』에서
집 전화
휴일 밤늦게 울리는 벨소리
“승진아, 잘 있니~”
반가움에 떨리며 부르던 목소리
태평양 건너오느라 쉰 듯 이어지던
미국 사는 이모님 어눌한 액센트
수화기 놓는 게 아쉬워
끝없이 이어지던 똑같은 안부
“전화 안 오면 죽은 줄 알아라”
이제 더 이상 올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철거하지 못하고 놓아둔 집 전화
“내가 많이 사랑한다”
“식구들한테 사랑 듬뿍 주거라”
귓전에 생생한 그때 그 목소리
이따금 벨 울려 훌쩍 받아보면
물건 사라 보험 들라 생경한 목소리
전쟁으로 어이어이 낯선 곳 내린 뿌리
“사람 사는 곳은 어데나 똑같아”
한 시간씩 얘기해도 끊을 땐 늘 힘들더니
이 세상 인연을 어찌 놓고 가셨는지
집 전화 볼 때마다 떠오르는 흰 머리
“이모님 거기서두 잘 계시지요?”
결국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식탁에 놓인 삶은 달걀
지중해 햇볕 쪼이며 살던 닭의 선물이다
배낭 속에 담겨 멀리도 왔다
식탁 유리판에 넣어진 세계지도
조미료 통에 통조림 캔에
오대양 육대주 표시된 식재료 원산지
참 멀리서 여기까지 날아왔다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기준은
먹을 수 있는 입이 있느냐 없느냐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경계도
사람이 사람일 수 있다는 표시도
먹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 뿐
먹거리엔 국경이 없다
먹지 못해 쳐진 입은 먹먹하다
먹고 살기 위해 치르는 전쟁은 위대하고
먹지 못하게 내모는 전쟁은 치졸하다
세렌디피티 Serendipity
남프랑스 생폴드방스 언덕 위엔
샤갈의 무덤 있다
예술가 마을 좁은 돌담길을
찰칵찰칵 셔터 소리 앞서 가고
돌무늬 아롱진 골목 끝에
죽은 자들의 마을이 있다
자갈돌로 장식된 묘비 돌판 위에
이름만으로 남아있는 그대여
고향 떠나 이 언덕 잠들 때까지
심장을 끌고 다닌 힘은 무엇이었는지
색채와 선들이 춤추며 다가올 때
마음엔 어떤 꽃들 피어났는지
구질구질하고 싶지 않다고
그대 걸어온 길 위에 비 내린다
한 세계를 이룬다는 것
한 생애 오롯이 갈무리 한다는 것
우연의 연속 같은 필연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섭리
새들처럼 지저귀는 아이들에 싸여
날개로 펼쳐진 그리움과 열망은
이야기로 자라 나무들로 둘러서고
샤갈의 마을엔
초록 바람 분다
조드*
울란바토르의 겨울은 매캐하다
영하 40도의 추위 견디기 위해
게르촌에서 뿜어대는 조개탄 연기로
아이들 폐렴으로 숨 막힌다
혹심한 여름 가뭄 이어 닥친 몽골의 겨울 혹한
먹을 풀 찾아 헤치고 다니던 들판이
가축들 허옇게 떼로 얼어 죽은 무덤 되고
밀려날 수밖에 없는 유목민들은
게르 하나 밖에 없는 도시 외곽 빈민 되었다
전사는 화살 한 발에 죽고
부자는 조드 한 번에 망한다**
가축과 야생마를 죽이는 기상 이변이
대대로 초원에서 살아온 유목민들 죽인다
전사들 말 달리던 광활한 대지가
눈 폭풍에 묻혀가며 토하는 신음
눈 더미에 뿔만 솟구친 숫양의 머리가
심장에 매달려 덜컥이고 있다
*몽골에서 심각한 가축 폐사를 유발하는 기상 이변(djud)
**몽골 속담
안토니우스 목욕탕*
목욕탕 가본 지 오래됐다
마음 바쁘고 피곤할 때 여서일까
뜨거운 물속 잠겨 행복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화려하고 멋진 사우나에
벌거벗고 누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중해 주름잡던 카르타고 부수고
그 통곡 위에 지은 승리의 로마 문명
꽃처럼 피어난 욕조에 반쯤 기대앉은
정복자의 미소는 얼마나 기름졌을까
목쉰 전쟁 함성과 세월에 닳은 문명의 기세
돌무더기 뒹구는 언덕 낡은 표지판만
나그네의 눈요기 되고 있는데
사라진 영웅들 식탁위에 반찬으로 올라 있는데
신나지도 않고
마음이 왜 싸해질까
아가가 되고 싶어서
응애응애 울고 싶어서
문명의 꽃술 속에
자궁 같은 공간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들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 후 2세기에 지어진 대형 로마식 공중목욕탕으로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에 지어졌다.
양구 땅에 피는 꽃은
산 첩첩 물 겹겹
양구 땅에 피는 꽃은 피보다 더 붉어
산비탈엔 사시사철 꽃새가 우네
일천구백오십일년 유월부터 십이월말까지
도솔산, 대우산, 백석산, 가칠봉
피의 능선에서 단장의 능선에서
펀치볼 분지에서 이름 모를 고지에서
죽거나 실종된 군인들만 이만팔천삼백여명
참혹했던 전투의 함성과 아우성이
넘쳐흐르던 피의 강이
지금도 바람 속에 흙 속에 묻혀
사정없이 꽃대를 밀어 올리네
지옥같던 포성 속 어머니 어머니
My Heart Breaks, Heart Breaks!
간절한 절규도 전설이 되고
아군도 적군도, 유엔의 깃발아래 바다를 건너온
푸른 눈의 군인들도 하늘에 올라
비로 바람으로 때론 폭설로
그 날의 치열함을 전할뿐이네
수호신들의 땅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예사로 보진 말게
그리고 잊지 말게
오늘의 자유엔 피가 묻어있음을
평화의 미소 뒤엔 숭고한 희생의 눈물이 있었음을
신화가 태어난 땅 양구를 지날 때
피보다 더 붉은 꽃을 보거든
영혼이 피었다 생각하게나
바쁜 걸음 멈추고 잠시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해주게나
사하라의 달
낙타를 타고 걸어 들어간
거대한 밤의 입구
무대 열리기 전 푸른 커튼 위에
낡은 브로치처럼 달려 있었지
어둠의 군병들 넘어와 모래 언덕 점령하자
그댄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어
별들이 빛을 잃고 긴 그림자 춤 시작하자
빛나는 검 하나 사막 심장에 꽂힌 듯 했어
밤의 포옹이 어떠했던지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지
비밀스런 속삭임의 운명
낙타가 잠시 멈춰 변명을 준비하기도 전
천둥 같은 북소리
모래언덕 차례로 붉어지며
그대 수은등 되어 서쪽으로 물러나네
어떤 어둠의 권력도
순한 빛에 스러지리
장승진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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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아마 모든 시인이 받아 본 질문이 몇 있을 것이다.
시가 무엇이며 왜 쓰는지?
시가 삶에 보탬이 되는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아직도 어느 시인이 시원한 대답을 했다고 들은 적 없고, 나 자신도 시원하게 대답해 줄 자신 없다. 그러나 적어도 시 쓰며 사는 일을 후회하거나 불행하게 느껴 본 적은 없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이 많은 좋은 사람들과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늘 감사하고 있다.
시는 삶과 어떤 관계일까?
삶은 살아지는 걸까 살아내야 하는 걸까?
녹록지 않은 삶을 우리 모두는 살아내야만 하면서 살다 보니 살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배고픈 허기는 밥으로 해결할 수 있다지만 영혼의 허기는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삶은 끝없는 길 찾기였다고 고백하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 영혼의 구도(求道)는 계속될 수밖에 없고 종교나 철학과는 다른 위로와 공감을 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기에 시는 영혼의 고향으로 가는 통로라고 생각한다. 시 속엔 생의 질곡과 아픔 뿐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담아 녹여낼 수 있다. 벗들과 나눌 수도 있다. 고달픈 자기성찰을 통해 도달하는 목적지는 영혼의 안식과 평강이 아닐까. 글을 쓰는 일은 영혼을 쥐어짜는 고통이지만 동시에 은밀하고 신비한 기쁨의 원천이기에 멈출 수 없는지도 모른다.
시의 질료는 결국 우리네 삶이다. 삶의 여러 행위 가운데 나는 특히 독서와 여행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독서는 마음으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라고 믿는 까닭이다. 전인미답의 낯선 길을 찾아가는 삶처럼 독서나 여행을 통해 나는 나를 낯선 환경에 던져 넣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길 즐긴다. ‘유쾌한 지구별 여행자’로 살기로 마음 정하고 떠나기 위해 설레는 순간이 행복하다. 만나게 될 자연과 사람들이 표지를 열어 읽어야 할 책으로 다가와 호기심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만남과 교류를 통해 상대의 닫힌 빗장을 열고 안에서 만나게 되는 영혼의 얼굴들을 시에서 그려보고 싶다.
그림, 글, 그리움은 같은 어원이라는 어떤 학자의 주장은 시인들에겐 참말인 것 같다. 생각을 긁어서 쓰면 글이 되고, 형상을 긁어 그리면 그림이 되고, 마음을 긁어모으면 그리움이 된다. 시인들은 말로 그림을 그리고 글로 그림을 그리고, 그리움을 말과 그림으로 옮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이 셋은 서로 친족관계에 있는 말이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몹시 독특하다. 사랑하는 무엇이 사라질 때 비로소 그리움이 시작된다. ‘없음’을 알지만 간절하게 ‘있음’을 희망한다면 그게 바로 그리운 거다. 부재와 바람, 불가능과 가능, 허전함과 달콤함 사이에 바로 그리움이 있다. 이 그리움이 바로 시의 원천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지구별에 살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신기해하는 것이 둘 있는데 그것은 나무와 바람이다. 나무는 땅에 뿌리박고 하늘 향해 오르는 운명을 지닌 존재로 끝없이 움직이고 이동하는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겨울나무가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단풍 드는 모습은 한없이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우리말의 ‘바람’은 참 여러 뜻을 지닌다. 공기의 움직임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일시적 유행이나 더불어 일어나는 기세를 의미하기도 하고 소망과 희망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불다, 일다, 가지다, 오르다, 피다 등 여러 동사를 거느리고 자유로움, 부드러움, 강함, 속삭임, 간절함, 태연함, 늙지 않음, 하늘로 오름 등의 여러 속성을 보여준다. 하여 나무와 바람은 내가 닮고 싶은 존재이기도 하다.
우주 만물 중에 무엇을 볼 것인가? 시소(seesaw) 타기처럼 솟구치고 내려오며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전후좌우 동서고금을 아울러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싶다. 시련은 길고 기쁨은 짧은 인생과 정의는 멀고 불의가 사방에 있는 현실을 딛고 하루하루 성장하는 나무처럼 살 수 있을까? 삶의 위로를 주는 감동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은 영화 「소울(soul)」에서처럼 지상의 껍질 벗고 건너간 세상에서도 내 영혼이 활기차게 배움을 추구하는 열망을 지닐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지상에 짓는 바람의 집’ 한 채가 내가 쓰는 시가 되길 바라며 산다. ‘강물처럼’이란 나의 닉네임 따라 ‘말랑말랑’, ‘훨훨’이란 좌우명 되뇌며 믿음 속에 맡기고 흘러가고 싶다.
*나민애(문학평론가), 동아일보 2022년 7월 2일 자에서 인용.
장승진 문학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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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이력
강원 홍천 두촌 출생
영어교육학 및 영문학 공부
중고등학교 영어교사, 외국어교육담당 장학사
중고등학교 교감, 도교육청 국제교육 담당 장학관
강원녹색환경지원센터 행정협의회 위원 및 강원대 초빙교수
홍천여고 교장을 거쳐 춘천여고 교장으로 정년퇴임
❙등단 및 시집
《심상※(1991.12) 신인상, 《시문학》(1992.2) 우수작품상으로 등단
제1시집 「한계령 정상까지 난 바다를 끌고 갈 수 없다」(1997), 도서출판 천우
제2시집 「환한 사람」(2017), 시와 소금
제3시집 「빈 교실」(2019)-교육테마시집, 소금북
제4시집 「천상의 화원」(2021), 달아실
제5시집 「인간 멸종」(2023)-환경시집, 도서출판 북인
전자시집 「그 겨울 상사화」(2021), 디지북스 작은시집 67
「미세플라스틱 커피 한 잔」(2022), 디지북스 작은시집 104
❙수상 및 표창
제20회 세계문학상 시 부문 대상
제20회 푸른시학상
제16회 춘천예술상 공로상
교육부장관상,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교육공로상
스승의 날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 홍조근정 훈장
❙문학 및 문화예술 활동
설악문우회 「갈뫼」, 「수향시낭송회」, 「A4」, 「들불문학」 회원
한국민족예술총연합회 강원지회 초대 문학위원장 역임
(사)한국문인협회 춘천지부회장(제13-14대), 강원지회 부회장 역임
현 삼악시동인회, 디카시춘천문학동인회 회장, 강원기독문인회 부회장
현 (사)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춘천지부 감사
국제PEN한국본부 강원지역위원회, 심상시인회, 한국시문학문인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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