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1596년(병신) 1월 1일의 바로 앞에 한 장으로 다섯 줄에 걸쳐 적혀 있는 글이다.) |
2 |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농사일에 부리는 소가 7 마리인데, 보성 림정로(臨廷老) 1 마리, 박사명(朴士明) 1 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정명열(丁鳴悅)은 바로 길다란 서화첩(長帖)을 받아 갔다. 이는 정 경달(丁景達)의 아들이다. 갑사 송한(宋漢). 1월 3일에 배 위에서 이번에는 환도 4 자루, 왜놈칼 2 자루를 만 들었다. 아들 회가 가지고 가던 중에(이 뒤에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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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신년 1월 (1596년 1월) |
1 | 1월 초1일 (무진) 맑다. [양력 1월 29일] |
2 | 밤 한 시쯤에 어머니 앞에 들어가 뵈었다. 저녁나절에 남양 아저씨와 신 사과(五衛의 正6品의 군사직이며 副司直의 다음 벼슬)가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에 어머니께 하직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하도 어지러워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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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월 초2일 (기사) 맑다. [양력 1월 30일] |
4 | 일찍 나가 병기를 점검했다. 이 날은 나라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의 祭祀)이다. 부장(部將) 이계(李繼)가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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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월 초3일 (경오) 맑다. [양력 1월 31일] |
6 | 새벽에 바다로 내려가니 아우 여필과 여러 조카들이 모두 배 위 에 타 있었다. 날이 밝을 무렵에 출항하여 서로 작별하였다. 오정 에 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샛바람이 약간 불었다. 상주포(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앞바다에 이르니 바람이 잤다. 노를 재촉하였더니, 자정에 사량에 이르러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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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1월 4일 (신미) 맑다. [양력 2월 1일] |
8 | 밤 두시쯤에 첫 나발을 불었다. 먼동이 틀 때에 출항하는데 이 여염이 와서 봤다. 진중의 소식을 물으니, 모두 이전대로라고 했 다. 오후 네시쯤에 가랑비가 세차게 뿌렸다. 걸망포(巨望浦)에 이르니, 경상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와 기다렸다. 우 후는 먼저 배 위로 왔으나, 몹시 취하여 인사불성이여서 곧 그 배로 갔다고 했다. 송한련(宋漢連)․송한(宋漢) 등이 말하기를, 청어(靑魚) 천 여 마 리를 잡아다 대강 늘었는데, 내가 나간 동안에 천팔백 여 마리를 잡았다고 했다. 비가 많이 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장수들이 어두울 무렵에 떠났는데, 길이 질어서 자빠진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기효근(奇孝謹)과 김축(金軸)이 휴가를 받아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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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1월 5일 (임신)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2월 2일] |
10 | 먼동이 틀 때에 우후와 방답첨사․사도첨사가 와서 문안했다. 나 는 서둘러 세수하고 방밖으로 나가 그들을 불러들여 지난 일을 물었다. 저녁나절에 첨사 성윤문(成允文)․우후 이정충(李廷忠) ․웅천현감 이운룡(李雲龍)․거제현령 안위(安衛)․안골포만호 우 수(禹壽)․옥포만호 이담(李曇)이 왔다가 캄캄해진 뒤에 돌아갔 다. 이몽상(李夢象)도 경상수사 권준(權俊)의 심부름으로 와서 문안하고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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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월 6일 (계유) 비가 내렸다. [양력 2월 3일] |
12 | 오수(吳壽)는 청어(靑魚) 천삼백열 마리를, 박춘양(朴春陽)은 칠 백여든 일곱 마리를 바쳤는데, 하천수(河天壽)가 받아다가 말렸 다. 황득중(黃得中)은 이백두 두름을 바쳤다. 종일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군량 오백 여 섬을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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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월 7일 (갑술) 맑다. [양력 2월 4일] |
14 | 이른 아침에 이영남(李英男)과 좋아 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權澁)이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에 피해 왔는데,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권준(權俊)․우후 ․사도첨사․방답첨사가 오고 권숙(權澁)도 왔다. 낮 두 시쯤에 견내량의 복병장과 삼천포권관이 달려와서 "투항한 왜놈 다섯 명 이 애산(厓山)에서 왔다고 하므로 안골포만호 우수(禹壽)․공 태원(孔太元)을 뽑아 보냈다. 날씨가 몹시 춥고 하늬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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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1월 8일 (을해) 맑다. [양력 2월 5일] |
16 | 입춘인 데도 날씨가 몹시 추워 마치 한겨울 처럼 매섭다. 아침에 우우후와 방답을 불러 약밥을 같이 먹었다. 일찍 투항한 왜놈 다섯 명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 온 까닭을 물으니, 저희네 장수가 성질이 모질고 일을 또 많이 시키므로 도망하여 와서 투항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가진 크고 작은 칼을 거두어 수루 위에 감추어 뒀다. 그러나 실은 부산에 있던 왜놈이 아니고 가덕도의 심안돈(沈安屯:島津義弘)의 부하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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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1월 9일 (병자) 흐리고, 추워서 살을 에는 것 같다. [양력 2월 6일] |
18 | 오수(吳水)가 청어(靑魚) 삼백예순 마리를 잡은 것을 하천수(河 天壽)가 싣고 갔다. 각처에 공문을 써 나누어 보냈다. 저물 무렵에 경상수사가 와서 방어대책을 논의했다. 하늬바람이 불어 종일 배가 바다로 나가지 못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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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1월 10일 (정축) 맑으나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2월 7일] |
20 |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를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다시 점쳤더니, 임금을 보고 모두들 기뻐하는 것과 같다는 좋은 괘였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우후가 어란포에 서 와서 봤다. 사도첨사도 왔다. 체찰사가 여러가지 물건을 나누어 주도록 세 위장에게 분부하였다. 웅천현감․곡포권관․삼천 포권관․적량만호가 아울러 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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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1월 11일 (무인) 맑다. [양력 2월 8일] |
22 | 하늬바람이 밤새도록 세게 불어 한겨울보다 갑절이나 더 춥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이 와서 봤다. 그 도 수 사의 옳지 못한 일을 낱낱이 말했다. 광양현감이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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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1월 12일 (기묘) 맑으나,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2월 9일] |
24 | 추위가 갑절이나 된다. 밤 두시쯤의 꿈에,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영의정과 같이 한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다가 의관을 다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서로 털어 놓다가 끝내는 가슴에 메인 것까지 쏟아 놓았다. 한참을 지나니 비바람 이 억세게 퍼부었는데도 흩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동 안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도 덤비게 된다면, 임금 이 어디로 가시겠는가 하고 걱정만 되뇌이며 할 말을 알지 못했 다. 일찍 듣건대, 영의정이 담천으로 몸이 몹시 편찮다고 했는데, 나았는지 모르겠다. 글자점을 던져 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 키는 것과 같다고 했고, 또 오늘 중에 길흉이 어떤지를 점쳤더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이 괘는 매우 좋 다. 엊저녁에 종 금을 본영으로 보냈는데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어 염려가 된다. 저녁나절에 나가서 각처의 공문을 처리하여 보 냈다. 낙안이 들어왔다. 웅천현감이 보고한 내용에, "왜적선 열네 척이 와서 거제 금이 포(金伊浦)에 정박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경상수사에게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 보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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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1월 13일 (경진) 맑다. [양력 2월 10일] |
26 | 아침에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하고 배를 타고 견내량으로 갔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체찰사에게 올리는 공문을 내 보냈다. 성균관의 종은, 선비들이 성균관의 학 문을 다시 세운다는 글을 가지고 온 자인데 아뢰고 돌아갔다. 이 날 바람이 자고 날씨가 따사했다. 이 날 저녁에 달빛은 낮과 같고, 바람 한 점 없다. 홀로 앉아 있 으니,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신홍수(申弘壽)를 불러 휘파람을 불게 했다. 밤 열시쯤에 잠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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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1월 14일 (신사)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2월 11일] |
28 | 저녁나절에야 바람이 자며 날씨는 따뜻한 것 같다. 흥양현감이 들어왔다. 정사립(鄭思立)․김대복(金大福)이 들어왔다. 조기(趙 琦)․김숙(金 )도 같이 왔다. 이 날 그 편에 연안옥(延安玉)의 외조모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밤 늦도록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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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1월 15일 (임오) 맑고 따뜻하다. [양력 2월 12일] |
30 | 밤 세시에 망궐례를 행했다. 아침에 낙안․흥양을 불러 같이 일찍 밥을 먹었다. 저녁나절 대청으로 나가 공문을 써 나누 어 보냈다. 이어서 투항해온 왜놈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낙 안과 흥양의 전선․병기․부속물 및 사부와 격군들을 점고하니 낙안의 것이 가장 엉성하다고 했다. 이 날 저녁에 달빛이 몹시 맑으니 풍년이 듦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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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1월 16일 (계미) 맑다. [양력 2월 13일] |
32 | 서리가 눈처럼 내렸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가장 늦게 경상수사․우우후 등이 와서 봤다. 웅천쳔감도 와서 취하여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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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1월 17일 (갑신) 맑다. [양력 2월 14일] |
34 | 방답첨사가 휴가를 받고서 변존서(卞存緖)․조카 분(芬)․김숙(金 ) 등과 같은 배로 나갔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오정에 나가 공무를 봤다. 우후를 불러 활을 쏠 적에 성윤문(成允文)과 변익성 (邊翼星)이 와서 보고느 같이 활을 쏘고서 돌아갔다. 어둘 무렵 강대수(姜大壽) 등이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종 금이(金) 16 일에 본영에 이르렀다."고 했다. 종 경(京)은 돌아와서 말하기를 " 아들 회( )가 오늘 은진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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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1월 18일 (을유) 맑다. [양력 2월 15일] |
36 | 아침부터 저녁까지 군복을 마름질했다. 저녁나절에 곤양군수 (이수일)․사천현감(기직남)이 왔다. 동래현감(정광좌)가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왜놈들이 많이 반역하는 눈치가 보이고, 유격 심유 경(沈惟敬)(沈惟敬)이 행장(小西行長)과 함께 1월 16일에 먼저 일 본으로 갔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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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1월 19일 (병술) 맑다. [양력 2월 16일] |
38 |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사도첨사와 여도만호가 왔다. 우후 ․곤양군수도 왔다. 경상수사가 왔다. 우우후를 불러 왔다. 곤양군수가 술을 차려서 내므로 조용히 이야기했다. 부산에 들 여 넣은 사람 네 명이 와서 전하기를, "심유경(沈惟敬)과 소서행장(小西行長)․ 현소(玄蘇)․ 정성(寺澤正成)․ 소서비(小西飛 :內藤 如安)와 함께 1월 16일 새벽에 바다를 건너갔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양식 서 말을 주어 보냈다. 이 날 저녁에 박자방(朴自邦) 이 서 순찰사가 진에 온다는 말과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러 본영으로 갔다. 오늘 메주를 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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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1월 20일 (정해)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2월 17일] |
40 | 몸이 몹시 피곤하여 낮잠을 반 시간을 잤다. 오후 두시쯤에 메주 쑤는 것을 마치고 굴뚝에 넣었다. 낙안군수가 와서, "둔전에서 거둔 벼를 실어왔다."고 보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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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1월 21일 (무자) 맑다. [양력 2월 18일] |
42 | 아침에 나가 공무를 봤다. 체찰사에게 보낼 순천 공문을 작성했 다. 밥을 먹은 뒤에 미조항첨사 및 흥양현감이 와서 보기에 술을 먹여 보냈다. 미조항첨사는 휴가를 신청했다. 저녁나절에 대 청으로 나가니 사도첨사․여도만호․사천현감․광양현감․곡포권 관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곤양군수도 왔다. 활 열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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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1월 22일 (기축) 맑다. [양력 2월 19일] |
44 | 몹시 춥고 바람도 몹시 험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저녁나절 에 경상우후가 와서 그의 수사(권준)의 경솔한 짓을 전했다. 이 날 밤은 바람이 차고도 매우니 아이들이 들어오기가 고생스러울 것이 걱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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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1월 23일 (경인) 맑다. [양력 2월 20일] |
46 | 작은 형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마음이 몹시 어지럽다. 아침에 헐벗은 군사 열일곱 명에게 옷을 주었다. 또 옷 한 벌을 주었다. 종일 바람이 험했다. 저녁에 가덕에서 나온 김인복(金 仁福)이 와서 현신하므로 적의 정세를 물어 보았다. 밤 열시쯤에 아들 면( )․조카 완(莞) 및 최대성(崔大晟)․신여윤(申汝潤)․박 자방(朴自芳)이 본영에서 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편지 를 받아 보니 기쁘기 그지 없다. 종 경(京)도 왔다. 종 금(金)은 애수(愛壽) 및 금곡에 사는 종 한성(漢城)․공석(孔石) 등과 같이 왔다. 한밤에야 잠들었다. 눈이 두 치나 내렸다. 근래에 없던 일이라고 한다. 이 날 밤 몸이 몹시 불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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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1월 24일 (신묘) 맑다. [양력 2월 21일] |
48 | 된바람이 세게 불어 눈보라를 치며 모래까지 휘날리니 사람이 감 히 걸어 다닐 수가 없고 배도 운항할 수가 없었다. 새벽에 견내 량 복병장이 보고하기를, "어제 왜놈 한 명이 복병한 곳에 와 서 투항하며 들어오기를 빌었다"고 하므로 보내라고 회답했다. 저녁나절에 우우후 및 사도첨사가 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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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1월 25일 (임진) 맑다. [양력 2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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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1월 26일 (계사) 맑으나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양력 2월 23일] |
51 | 나가 공무를 보고 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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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1월 27일 (갑오) 맑고 따사하다. [양력 2월 24일] |
53 |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장흥(배흥립)의 죄를 심의 한 뒤에 흥양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경상우도 순찰사 (서성)가 들어왔다. 그래서 오후 네시쯤에 우수사의 진으로 가서 보고, 한밤에 돌아왔다. 사도의 진무(鎭撫)가 화약을 훔쳤다가 붙잡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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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1월 28일 (을미) 맑다. [양력 2월 25일] |
55 | 늦게 나가 공무를 봤다. 오정 때에 순찰사가 왔다. 활을 쏘고 같이 이야기했다. 순찰사가 나하고 활쏘기를 맞서서 겨루다가 일 곱 푼을 졌는데 섭섭한 빛이 없지 않았다. 혼자 웃었다. 군관 세 사람도 다 졌다. 밤이 든 뒤에 취하여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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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1월 29일 (병신)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2월 26일] |
57 | 일찍 식사를 한 뒤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순찰사와 같이 조용 히 이야기했다. 오후에 활을 쏘았는데, 순찰사가 아홉 푼을 졌다. 김대복(金大福)이 홀로 즐겁게 활을 쏘았다. 피리 소리를 듣다 가 한밤 자정에야 헤어져 진으로 돌아왔다. 저물 무렵에 사도에서 화약 훔친 자가 도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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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1월 30일 (정유) 비오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양력 2월 27일] |
59 | 나가서 공무를 보고 군관이 활을 쏘았다. 천성보만호(윤홍년)․ 여도만호(김인영)․적량만호(고여우)가 와서 보고서 돌아갔다. 이 날 저녁에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이 종 네 명과 준복(俊福) 이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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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신년 2월 (1596년 2월) |
1 | 2월 초1일 (무술)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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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여러 장수들과 함께 활을 쏘았다. 권숙(權澁)이 이곳에 왔다가 취해서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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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2월 초2일 (기해) 맑고 따뜻하다. [양력 2월 29일] |
4 | 울(蔚)과 조기(趙琦)가 같은 배로 나갔다. 우후도 갔다. 저녁에 사 도첨사가 와서 어사의 장계에 따라 파면되었다고 전했다. 그래서 곧 장계를 초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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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2월 초3일 (경자)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1일] |
6 | 혼자 앉아서 자식의 떠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아침에 장계를 수정했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그 편에 적량만 호 고여우(高汝友)가 장담년(張聃年)에게 소송을 당하여 순찰사가 장계를 올려 파면시키려 한다는 글을 보았다. 어둘 무렵 어란만 호가 견내량 복병한 곳에서 보고하기를, "부산의 왜놈 세 명이 성주에서 투항해 온 사람들을 데리고 복병한 곳에 이르러 장사하 겠다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장흥부사에게 전령하여 내일 새 벽에 가서 타일러 보라고 시켰다. 이런 왜적들이 어찌 장사를 하고자 하겠는가. 우리의 허실의 정형(定形)을 엿보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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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2월 초4일 (신축) 맑다. [양력 3월 2일] |
8 | 아침에 장계를 봉하여 사도 사람 진무성(陳武晟)에게 부쳤다. 영의정과 신식(申湜) 두 집에 문안 편지도 부쳤다. 저녁나절에 흥 양현감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여도만호․ 거제현령․당포만호․옥포만호도 왔다. 저녁에 장흥부사가 복병한 곳에서 돌아와 왜놈들이 도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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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2월 초5일 (임인)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양력 3월 3일] |
10 | 사도첨사․장흥부사가 일찍 왔다. 그래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권숙(權澁)이 와서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종이․먹 두 개와 대 검(佩刀)을 주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는 음식을 먹이고, 겸하여 활을 쏘고 풍악을 잡히다 가 취하여 헤어졌다. 웅천현감(이운룡)이 손인갑(孫仁甲)의 애인을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야금을 몇 곡조 들었다. 저녁에 김기실 (金己實)이 순천에서 돌아왔다. 그 편에 안부를 물었더니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우수사의 편지가 왔는데 기한을 늦추자고 하니 우습고도 한탄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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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2월 초6일 (계묘) 흐렸다. [양력 3월 4일] |
12 | 새벽에 자귀쟁이(耳匠木手) 열 명을 거제로 보내어 배를 만드는 일을 시켰다. 이 날 침방에 천장 흙이 떨어진 곳이 있어서 수리 했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은 조도어사의 장계로써 파면되었다 는 기별이 또 이르렀다. 본디의 포구(골사도)로 내어 보냈다. 순천별감 유(兪)와 군관 장응진(張應軫) 등을 처벌하고 곧 수루로 들어갔다. 송한련(宋漢連)이 숭어를 잡아서 왔기에 여도․낙안․ 흥양을 불러 같이 찢어 먹었다. 적량 고여우(高汝友)가 큰 매를 가지고 왔으나 오른쪽 발가락이 다 얼어서 무지러졌으니 어찌하랴! 초저녁에 잠깐 땀이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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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2월 초7일 (갑진) 아침에 흐리다가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5일] |
14 | 몸이 좋지 않다. 저녁나절에 나가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장흥부사․ 우후․ 낙안군수․ 흥양현감을 불러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 물어서야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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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2월 초8일 (을사) 맑다. [양력 3월 6일] |
16 | 이른 아침에 녹도만호가 와서 봤다. 아침에 벚나무 껍질을 마 름질했다. 저녁나절에 손인갑의 애인이 들어와 한참을 있었다. 오 철(吳轍)․현응원을 불러 군사에 대한 일을 물었다. 저녁에 군량 에 대한 장부를 만들었다. 흥양현감이 둔전의 벼 삼백쉰두 섬 을 바쳤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배를 다니게 할 수가 없었다. 류황을 내보내려 했는데 떠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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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2월 초9일 (병오) 맑다. [양력 3월 7일] |
18 |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배가 다니지 못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 사 권준(權俊)이 와서 이야기하고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에 바 람이 잤다. 견내량과 부산의 왜적선 두 척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웅천현감 및우후를 탐색하러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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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2월 10일 (정미) 맑고 따사했다. [양력 3월 8일] |
20 | 이 날 일찌기 박춘양(朴春陽)이 대를 실어 왔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태구생의 죄를 다스렸다. 저녁에 몸소 곳집 짓는 곳을 보았다. 아침에 웅천․우우후가 견내량에서 돌아와 서, 왜놈들이 겁에 질려 두려워하는 모양을 보고했다. 어두울 무 렵 창녕사람이 술을 가져왔다.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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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2월 11일 (무신) 맑다. [양력 3월 9일] |
22 | 아침에 체찰사에게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보성의 계향유사(군 량보급 책임자) 림찬(林瓚)이 소금 쉰 섬을 실어 갔다. 임달영(任 達英)이 논산(論山)에서 돌아왔다. 논산(論山)의 편지와 박종 백(朴宗伯)․김응수(金應綏)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와 우우후가 왔다. 또 낙안군수와 흥양현감을 불러 활을 쏘았다. 막 해떨어질 무렵 영등포만호가 그 소실을 데리고 술을 들고 와서 권했다. 나이 젊은 계집도 왔는데 놔두고 돌아갔다. 땀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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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2월 12일 (기유) 맑다. [양력 3월 10일] |
24 |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 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흥양현감도 같이 쏘 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은 초저녁에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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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2월 13일 (경술) 맑다. [양력 3월 11일] |
26 | 식사를 한 뒤에 공무를 봤다. 강진현감(이극신)이 기일 어긴 죄를 처벌했다. 가리포첨사는 보고하고 늦게 왔으므로 타일러 내보냈 다. 영암군수(박홍장)를 파면시킬 장계를 초잡았다. 저녁에 어란포만호가 돌아갔다. 임달영(任達英)도 돌아갔다. 제주목 사(이경록)에게 청어(靑魚)․대구(大口)․화살대(箭竹)․곶감 (乾柿)․삼색부채를 봉하여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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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2월 14일 (신해) 맑다. [양력 3월 12일] |
28 |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동복 (同福)의 계향유사 김덕린(金德麟)이 와서 인사했다. 경상수사 가 쑥떡과 초 한 쌍을 보내 왔다. 새로 지은 곳집에 지붕을 이 었다. 낙안군수․녹도만호 등을 불러서 떡을 먹었다. 조금 있으 니 강진현감이 와서 인사하므로 위로하고 술을 먹였다. 저녁에 물을 부엌가로 끌여들이는데 물 긷는 수고를 편하게 했다. 이 날 밤 바다의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은데 홀로 높은 수루에 기대어 있으니 마음이 무척 어지럽다. 밤이 깊어서야 잠 자리에 들었다. 흥양의 계향유사 송상문(宋象文)이 와서 쌀과 벼를 합해 일곱 섬 을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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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2월 15일 (임자) [양력 3월 13일] |
30 | 새벽에 망궐례를 하려 했으나, 비가 몹시 내려 마당이 젖었기 때 문에 거행하지 않았다. 어두울 무렵 전라우도의 투항해 온 왜 놈과 경상도의 투항해 온 왜놈이 같이 짜고 도망갈 꾀를 낸다고 들었다. 그래서 전령을 내어 알렸다. 아침에 화살대를 가려내어 큰 살대 백열한 개와 그 다음 대 백쉰 네 개를 옥지(玉只)에게 주었다. 아침에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 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는데, 웅천현감․거제현령․당포 만호․옥포만호․우우후․경상우후가 아울러 와서 보고 돌아갔 다. 순천 둔전에서 거둔 벼를 내가 직접 보는 앞에서 받아들이게 했다. 동복의 계향유사 김덕린(金德麟)․흥양의 계향유사 송상 문(宋象文) 등이 돌아갔다. 저녁에 사슴 한 마리, 노루 두 마리를 사냥하여 왔다. 이 날 밤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아 자려 해도 잠잘 수가 없었 다. 아랫사람들은 밤새도록 술마시고 노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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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2월 16일 (계축) 맑다. [양력 3월 14일] |
32 | 아침에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장흥부사․우우후․가리포첨사가 와서 같이 활을 쏘았다. 군관들은 지난날 승부내기에서 진 편이 한턱 내었는데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이 날 밤은 너무 취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앉았다 누었다 하다가 새벽이 되었다. 봄철 노곤한 기운이 벌써 이렇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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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2월 17일 (갑인) 흐렸다. [양력 3월 15일] |
34 | 나라제삿날(世宗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아들 면( )이 본영으로 갔다. 박춘양(朴春陽)과 오수(吳水)가 조 기 잡는 곳으로 갔다가 어제의 취기가 아직도 심하니 불안했다. 저녁에 흥양현감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저녁 식사를 같이 했 다. 미조항첨사 성윤문(成允文)의 문안 편지가 왔는데, "방금 관 찰사(方伯)의 공문을 받고 진주성(晉城)으로 부임하게 되어 나아 가 인사드리지 못한다. 자기 대신으로 황언실이 되었다"고 했다. 웅천현감의 답장이 왔다. 임금의 유서(諭書)는 아직 받지 못했다 고 했다. 이 날 어두울 무렵에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는다. 아들이 떠나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을 걷잡을 수 가 없다. 아픈 가슴을 말할 수 없다. 봄철 기운이 사람을 괴롭혀 몹시 노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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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2월 18일 (을묘) 맑다. [양력 3월 16일] |
36 |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 나절에 체찰사의 비밀 공문이 세 통 왔다. 그 하나는 제주목에 게 계속하여 후원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등포만호 조계종(趙 繼宗)을 심문하는 일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도 전선(戰 船)을 아직은 독촉하여 모으지 말라는 것이었다. 저녁에 김국(金 國)이 서울에서 들어와서 비밀 공문 두 통과 역서(曆書) 한 건 을 가지고 왔다. 승정원의 기별도 왔다. 황득중(黃得中)은 쇠를 싣고 와서 바쳤다. 절(節)이 술을 가지고 왔다. 땀이 온몸을 적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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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2월 19일 (병진)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17일] |
38 | 아들 면( )이 잘 갔는지 못 갔는지 몰라서 밤새도록 무척 걱정 했다. 이 날 저녁 소문에 낙안의 군량선이 바람에 막혀 사량에 대었다가 바람이 자야 떠날 것이라고 했다. 이 날 새벽에 경상 도의 진(陣)에 남아 있는 투항한 왜놈을 이곳에 있는 왜놈 난에 몬(亂汝文 :南汝文) 등을 시켜 묶어 와서 목을 베게 했다. 경상수 사 권준(權俊)이 왔다. 장흥부사․웅천현감․낙안군수․흥양현감 ․우우후․사천현감 등과 같이 부안에서 온 술을 끝까지 다마셔 없앴다. 황득중(黃得中)이 가져온 총통 만들 쇠를 저울로 달아 서 보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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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2월 20일 (정사) 맑다. [양력 3월 18일] |
40 | 일찌기 조계종(趙繼宗)이 현풍수군 손풍련(孫風連)에게서 소송을 당했으므로 서로 마주하여 공술하려고 여기에 왔다가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적어 나누어 보냈다. 손만세(孫萬世)가 사사로이 입대(入隊)에 관한 공문을 만들었기에 그 죄를 처벌했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낙안군수․녹도만 호가 같이 왔다. 비가 올 것만 같다. 새벽에 기운이 노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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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2월 21일 (무오) [양력 3월 19일] |
42 | 궂은비가 새벽부터 세차게 오더니 저녁나절에야 그쳤다. 그래서 나가지 않고 혼자 앉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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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2월 22일 (기미) 맑고 바람이 없다. [양력 3월 20일] |
44 | 일찌기 식사를 하고 나가 앉아 있으니, 웅천현감․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흥양현감은 몸이 불편하여 먼저 돌아갔다. 우우후․장흥부사․낙안군수․남도포만호․가리포첨사․여도만호 ․녹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았다. 나도 활을 쏘았다. 손현평(孫絃 平)도 와서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이 날 밤 땀을 흘렸다. 봄철 기운이 사람을 노곤하게 한다. 강소작지(姜所作只)가 그물을 가지러 본영으로 갔다. 충청수사가 화살대를 와서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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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2월 23일 (경신) 맑다. [양력 3월 21일] |
46 | 일찍 식사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둔전의 벼를 다시 되어 세 곳간에 백예순일곱 섬을 쌓았다. 없어진 것이 마흔여덟 섬이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고성현감․하동현감․강진현감․회령포 만호가 와서 봤다. 하천수(河天水)․이진(李進)도 왔다. 방답첨사가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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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2월 24일 (신유) 맑다. [양력 3월 22일] |
48 | 일찍 식사를 하고 나가 앉아서, 둔전의 벼를 다시 되는 것을 감 독했다. 우수사가 들어왔다. 오후 네시쯤에 비바람이 세게 일었 다. 둔전의 벼를 다시 된 수량 백일흔 섬을 곳간에 넣었다. 없 어진 것이 서른 섬이다. 낙안군수(선의경)가 갈렸다는 기별이 왔다. 방답첨사․흥양현감이 와서 모였다. 배를 본영으로 보낼려 할 적에 비바람 때문에 그만뒀다. 밤내내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오래도록 노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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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2월 25일 (임술) 비가 오다가 오정 때에 개었다. [양력 3월 23일] |
50 |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나주판관도 왔다. 장흥부사가 와서, "수군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관 찰사가 방해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진(李璡)이 둔전으로 돌아갔다. 춘절(春節)․춘복(春福)․사화(士花)가 본영으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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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2월 26일 (계해) 아침에 맑았는데 저물 무렵에는 비가 왔다. [양력 3월 24일] |
52 |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갔다. 여도만호․흥양현감이 와서 영리들 이 백성을 점점 움켜잡는 폐단을 말했다. 극히 해괴한 일이다. 양 정언(梁廷彦)과 영리 강기경(姜起敬)․이득종(李得宗)․박취(朴就) 등을 중죄로 다스리고 곧 경상․전라수사가 있는 영리를 잡아들 이라고 전령을 내렸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조금있으니, 견내량 복병이 달려와서 보고 하기를, "왜적선 한 척이 견내량을 거쳐 들어와 해평장에 이를 적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다. 둔전에서 거둬들인 벼 이백 서른 섬을 고쳐 일백아흔여덟 섬으로 바로 잡아 서른두 섬이 줄 었다고 했다. 낙안에게 이별 술을 대접해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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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2월 27일 (갑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3월 25일] |
54 | 이 날 녹도만호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흥양현감이 휴가를 받 아 돌아갔다. 둔전에서 거둬들인 벼 이백스무 섬을 고쳐서 바로 잡으니 줄은 것이 여러 섬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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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2월 28일 (을축) 맑다. [양력 3월 26일] |
56 | 일찍 침을 맞았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장흥부사와 체찰사의 군관이 이곳에 이르렀는데, 장흥부사는 종사관이 발행 한 전령으로 자기를 잡아러 온 일 때문에 왔다고 했다. 또 전라도 수군 안에서 우도의 수군이 전라좌․우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성원한다고 했다. 우습다. 조정에서 꾀하는 정책이 이럴 수가 있나! 체찰사가 꾀를 내는 것이 이렇게도 알맹이가 없단 말인가! 나라의 일이 이러하 니 어찌할꼬! 어찌할꼬! 저녁에 거제현령을 불러 와서 일을 물어보고 나서 돌려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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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2월 29일 (병인) 맑다. [양력 3월 27일] |
58 | 아침에 공문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아 있으니, 우수사 및 경상수사․장흥부사․체찰사의 군관이 왔다. 경상우도 순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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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 2월 30일 (정묘) 맑다. [양력 3월 28일] |
60 | 아침에 정사립(鄭思立)으로 하여금 보고문을 써서 체찰사에게 보 냈다. 장흥부사도 체찰사에게 갔다. 해가 뉘엿할 때 우수사가 보 고하는데, "벌써 바람이 따뜻해졌으니 협동작전할 계획이 시급하 여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본도(전라우도)로 가고자 한다"는 것이 었다. 그 마음 가짐이 몹시도 해괴하여 그의 군관 및 도훈도에게 곤장 일흔 대를 때렸다. 저녁에 송희립(宋希立)․노윤발(盧潤發) ․이원룡(李元龍) 등이 들어왔다. 희립은 또 술을 가지고 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 땀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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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병신년 3월 (1596년 3월) |
1 | 3월 초1일 (무진) 맑다. [양력 3월 29일] |
2 |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아침에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해남현감 류형(柳珩)․임치첨사 홍견(洪堅) ․목포만호 방수경(方守慶)에게 기일을 어긴 죄로 처벌했다. 해남현감은 새로 부임해 왔으므로 곤장을 치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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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3월 초2일 (기사) 맑다. [양력 3월 30일] |
4 | 아침에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했다. 보성군수가 들어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몸이 노곤하고 땀이 배니, 이건 병이 날 원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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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3월 3일 (경오) 맑다. [양력 3월 31일] |
6 | 이원룡(李元龍)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반관해(潘觀海) 가 왔다. 정사립(鄭思立) 등을 시켜 장계를 썼다. 이 날은 명절(삼 짇날)이라 방답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 및 남도포만호 등을 불러 술과 떡을 먹였다. 일찌기 송희립(宋希立)을 우수사에게 보 내어 뉘우치는 뜻을 전하니, 은근하게 대답하더라고 했다. 땀이 배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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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3월 4일 (신미) 맑다. [양력 4월 1일] |
8 | 아침에 장계를 봉했다. 느지막이 보성군수 안홍국을 기일을 어긴 죄로 처벌했다. 오정 때에 출항하여 곧바로 소근포 끝으로 돌아 경상우수사가 있는 곳에 이르니, 좌수사 이운룡(李雲龍)도 왔다. 조용히 이야기하고서 그대로 자리도(佐里島:진해시 웅천동) 바다 가운데서 같이 잤다. 덧없이 땀이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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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3월 5일 (임신) 맑다가 구름이 끼었다. [양력 4월 2일] |
10 |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 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 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 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해․면․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한대 (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의 계집종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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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3월 6일 (계유)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4월 3일] |
12 | 새벽에 한대(漢代)를 불러 까닭을 물었다. 아침에 몸이 불편했 다. 식사를 한 뒤에 하동현감(신진)․고성현령(조응도)․함평현감 (손경지)․해남현감(류형)이 아뢰고 돌아갔다. 남도포만호(강응표) 도 돌아갔는데, 기일을 5월 10일로 정했다. 우우후와 강진현감(이 극신)에게는 8일이 지난 뒤에 나가도록 일렀다. 함평현감(손경지)․남해현감(박대남)․다경포만호(윤승남) 등이 칼을 썼다. 땀이 이토록 흘렀다. 사슴 세 마리를 사냥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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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3월 7일 (갑술) 맑다. [양력 4월 4일] |
14 | 새벽에 땀이 흘렀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가리포첨사 ․여도만호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머리카락을 오랫동안 빗었다. 녹도만호가 노루 두마리를 (사냥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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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3월 8일 (을해) 맑다. [양력 4월 5일] |
16 | 아침에 안골포만호(우수)․가리포첨사(이응표)가 각각으로 큰 사슴 한 마리씩을 보내 왔다. 가리포첨사도 보내 왔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아 있으니, 우수사․ 경상수사․ 좌수사․ 가리포첨사․ 방답첨사․ 평산포만호․ 여도만호․ 우우후․ 경상우후․강진 현감 등이 와서 같이 종일 몹시 취하여서 헤어졌다. 저녁에 비가 잠시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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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3월 9일 (병자)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6일] |
18 |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 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 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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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3월 10일 (정축)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7일] |
20 | 아침에 다시 좌수사를 청했더니 와서 작별의 술잔을 나누니 온종 일 무척 취하여 나가지 못했다. 덧없이 땀이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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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3월 11일 (무인) 흐렸다. [양력 4월 8일] |
22 | 해․회․완(莞) 및 수원(壽元)은 계집종 세 사람과 더불어 나갔다. 이 날 저녁에 방답첨사(張麟)가 성낼 일도 아닌데 공연히 성을 내어 상선(上船)의 물긷는 기전자(田子)에게 곤장 을 쳤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곧 군관과 이방(吏房)을 불러 군관에게는 스무 대, 이방(吏房)에게는 쉰 대를 매로 볼기쳤다. 저녁나절에 구 천성보만호가 하직하고 돌아가고, 새 천성보만호는 체찰사의 공문으로 병사에게 잡혀 갔다. 나주판관도 왔기에 술을 먹여서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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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3월 12일 (기묘) 맑다. [양력 4월 9일] |
24 | 아침 밥을 먹은 뒤에 몸이 노곤하여 잠깐 잠을 잤더니 처음으로 피로가 가신 듯하다. 경상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여도 만호․금갑도만호․나주판관도 왔다. 군관들이 술을 내었다. 저녁에 소국진(蘇國秦)이 체찰사에게서 돌아왔는데, 그 회답에 우도의 수군을 합하여 본도로 보내라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고 하 였다. 우습다. 그 편에 들으니 원흉(원균)은 곤장 마흔 대를, 장흥 부사는 스무 대를 맞았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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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3월 13일 (경진)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10일] |
26 | 저녁에 견내량 복병이 달려와 아뢰기를, "왜적선이 연이어 나 오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여도만호․금갑도만호 등을 뽑아 보냈다. 봄비가 오는 가운데 몸이 노곤하여 누워서 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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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3월 14일 (신사) 궂은비가 걷히지 않는다. [양력 4월 11일] |
28 | 새벽에 삼도에서 급한 보고가 왔는데, "견내량 근처의 거제땅 세 포(사등면 성포리)에 왜적선 다섯 척과 고성땅에 다섯 척이 정박 하여 뭍에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삼도의 여러 장수들에게 배 다 섯 척을 더 뽑아 보내도록 전령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 고 각 처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아침에 군량 회계하는 것을 마쳤다. 방답첨사․녹도만호가 와서 봤다. 체찰사에게 공문을 보낼려고 서류를 만들었다. 봄철 노곤함이 이에 이르니 밤새도 록 땀이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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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3월 15일 (임오) 맑다. [양력 4월 12일] |
30 |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가리포첨사․방답첨사․녹도만호가 와 서 참례했는데, 우수사와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함께 술에 취하여 가면서 덕(德)과 아랫방에서 수군거렸다고 했다. 이 날 저물 무렵 바다에 달빛이 어슴푸레 밝았다. 몸이 노곤하여 축 갈아 앉는다. 밤새도록 식 은 땀이 흘렀다. 한밤에 비가 몹시 왔다. 낮에는 노곤하여 머리를 빗었는데 덧없이 땀이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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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3월 16일 (계미) 비가 퍼붓듯이 내리며 종일 그치지 않았다. [양력 4월 13일] |
32 | 오전 여덟 시쯤에 시마바람이 세게 불어 지붕이 뒤집힌 곳이 많고 문과 창이 깨지고 창호지도 찢어져 비가 방안으로 새어 들어 와서 사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오정 때에야 바람이 잤다. 저녁에 군관을 불러 와서 술을 먹였다. 한밤 한 시쯤에 비가 잠깐 그쳤다. 흐르는 땀이 어제와 마찬가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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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3월 17일 (갑신) 종일 가랑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양력 4월 14일] |
34 | 저녁나절에 나주판관이 와서 봤다. 그래서 취하게 하여 보냈다. 어둘 무렵에 박자방(朴自邦)이 들어왔다. 이 날 밤에 식은 땀이 등에까지 흘러 두겹 옷이 흠뻑 다 젖고, 자는 이부자리도 젖었다. 몸이 불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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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3월 18일 (을유) 맑다. [양력 4월 15일] |
36 | 샛바람이 종일 불고 날씨는 몹시 싸늘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솟장을 처리해 주었다. 방답첨사․금갑도만호․회령포만 호․옥포만호 등이 와서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이날 밤 바다의 달빛이 어슴푸레 비치고 밤기운이 몹시 차다. 자려해도 잠을 이룰 수 없어 앉았다 누었다 하기도 불편하고 다시 몸이 불편 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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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3월 19일 (병술) 맑다. [양력 4월 16일] |
38 |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도 싸늘했다. 아침에 새로 만든 가야금에 줄을 매었다. 저녁나절에 보성군수가 부침하는 것을 살펴볼 일로 휴가를 받았다. 김혼(金渾)이 같은 배로 나갔다. 종 경(京)도 같이 돌아갔다. 정량(丁良)은 볼일이 있어 여기 왔다 가 돌아갔다. 저녁에 가리포첨사․나주반자가 와서 봤다. 술을 취 하도록 먹여서 보냈다. 어두울 무렵부터 바람이 몹시 사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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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3월 20일 (정해) 종일 바람불고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17일] |
40 | 바람이 사납게 불고 비가 와서 종일 나가지 않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바람막이를 두 개를 만들어서 걸었다. 밤새도록 비가 왔다. 땀이 옷과 이불을 적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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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3월 21일 (무자) 종일 큰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18일] |
42 | 초저녁에 도와리를 만나 구토를 한 시간이나 했는데, 자정이 되 니 조금 가라앉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앉았다 누웠다 하 며 괜스레 일을 저지르는 것 같아 한스럽기 그지없다. 이 날은 너무 심심해서 군관 송희립(宋希立)․김대복(金大福)․오철(吳 轍) 등을 불러 종정도(從政圖)를 내기했다. 바람막이 세 개를 만들어 걸었는데, 이언량(李彦良)과 김응겸(金應謙)이 감독했다. 한 밤이 지나서 비가 잠깐 그쳤다. 밤 세시에 이지러진 달빛이 비치어 방 밖으로 나가 거닐었다. 그래도 몸은 몹시 노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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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3월 22일 (기축) 맑다. [양력 4월 19일] |
44 | 아침에 종 금이(今)를 시켜서 머리를 빗게 했다. 저녁나절에 우수사는 경상수사와 같이 와서 보므로 술을 먹여 보냈다. 그 편에 들으니 작은 고래가 섬위로 떠밀려와서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박자방(朴自邦)을 보냈다. 이 날 어두울 무렵에 땀이 예사롭지 않게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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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3월 23일 (경인) 맑다. [양력 4월 20일] |
46 | 새벽에 정사립(鄭思立)이 와서 물고기 기름을 많이 짜서 가져 왔다고 했다. 새벽 세시에 몸이 불편하여 금이(今)를 불러 머리를 긁게 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각 곳의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조방장 김완(金浣) 및 충청수 군의 배 여덟 척이 들어오고 우후도 왔다. 종 금이(今)가 편지를 가져 왔는데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초저녁이 지나 영등포만호가 그의 어린 계집을 데리고 술을 가져 왔다고 했다. 나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 밤 열시쯤이 지나서 되돌아갔다. 이 날에 비로소 미역을 땄다. 한밤에 잠이 들었다. 땀이 흘러 옷을 적셨다. 그래서 옷을 갈아 입고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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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3월 24일 (신묘) 맑다. [양력 4월 21일] |
48 | 아침에 미역을 따러 나갔다. 헌 활집은 베로 만든 게 여덟 장, 솜 으로 만든 게 두 장인데, 활집 한 장은 고쳐서 만들려고 감을 내어 주었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아서, 마량첨사 김응황 (金應潢)․파지도권관 송세응(宋世應)․결성현감 손안국(孫安 國) 등을 처벌했다. 저녁나절에 우후가 가져온 술을 방답첨사․평 산포만호․여도만호․녹도만호․목포만호 등과 같이 마셨다. 나주판관 어운급(魚雲伋)에게는 4월 15일로 기한으로 휴가를 주었다. 몸이 몹시 노곤하여 흐르는 땀이 예사롭지 않다. 이 날도 비가 올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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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3월 25일 (임진)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22일] |
50 | 종일 퍼부어 잠시도 비가 끊이지 않았다. 수루에 기대어 저녁 까지 보내니 마음이 언짢았다. 머리를 한참동안 빗었다. 낮에 땀이 옷을 적셨다. 밤에는 두겹 옷이 젖고 방 구들막까지 젖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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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3월 26일 (계사) 맑고 마파람이 불었다. [양력 4월 23일] |
52 |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조방장 및 방답첨사․녹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체찰사의 전령 이 왔는데, "전일(12일)에 우도의 수군을 돌려 보내라고 한 것은 회계(回啓)를 잘못 본 탓이다."고 하였다. 우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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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3월 27일 (갑오) 맑다. 마파람이 불었다. [양력 4월 24일] |
54 | 저녁나절에 나가 활을 쏘았다. 우후․방답첨사도 왔다. 충청도 마량첨사․ 임치첨사․ 결성현감․ 파지도권관이 함께 왔다. 술을 먹여서 보냈다. 저녁에 신 사과와 아우 여필이 들어왔다. 그 편에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고 다행하기 이를 데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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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3월 28일 (을미) 궂은비가 몹시 내리며 종일 개지 않았다. [양력 4월 25일] |
56 | 나가 앉아서 공문을 만들어 나누어 보냈다. 충청도 뱃사람들이 다시 울짱을 설치하여 방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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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3월 29일 (병신)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양력 4월 26일] |
58 | 저녁나절에 부찰사(한효순)의 통지문이 먼저 이곳에 왔는데, 성주에서 진으로 온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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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병신년 4월 (1596년 4월) |
1 | 4월 초1일 (정유)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4월 27일] |
2 | 신사과와 함께 이야기했다. 종일 비가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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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4월 초2일 (무술)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4월 28일] |
4 | 저물녘에 경상수사가 부찰사를 마중하는 일로 나갔다. 신사과는 같은 배로 갔다. 이 날 밤 몸이 몹시 불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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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4월 초3일 (기해) 맑고 마파람에 종일 불었다. [양력 4월 29일] |
6 | 어제 저녁에 견내량 복병이 긴급보고한 내용에, "왜놈 네 명이 부산에서 장사하며 이익을 늘리려 나왔다가 바람에 표류되었다." 고 했다. 그래서 새벽에 녹도만호 송여종(宋汝宗)을 보내어 그렇게 된 까닭을 묻고 빼내오려고 보냈는데 그 정형(情跡)을 살펴 보니, 정탐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목을 베었다. 우수사에게 가 볼려고 하다가 몸이 불편하여 못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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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4월 초4일 (경자) 흐렸다. [양력 4월 30일] |
8 | 아침에 오철(吳轍)이 나갔다. 종 금이(金伊)도 같이 갔다. 아침에 체찰사의 공문에 도장을 찍어 벽에 붙였다. 여러 장수가 표신을 고쳤다. 우수사에게 가 보고는 취하여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충청도의 군대에 울짱(木柵)을 쳤다. 초저녁이 지나서 저녁밥을 먹었다. 속이 덥고 땀이 났다. 밤 열시쯤에 잠깐 비가 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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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4월 초5일 (신축) 맑다. [양력 5월 1일] |
10 | 부찰사(한효순)가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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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4월 초6일 (임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5월 2일] |
12 | 부찰사가 활쏘기를 시험했다. 저녁에 나는 우수사 등과 들어가 앉아서 군사들에게 같이 마주하여 음식을 먹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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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4월 7일 (계묘) 맑다. [양력 5월 3일] |
14 | 부찰사가 나가 앉아서 상을 나누어 주었다. 새벽에 부산 사 람이 들어왔는데, "명나라 사신(이종성)이 달아났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부찰사가 입봉(立峯)에 올라갔다. 점심을 먹은 뒤에 두 수사와 더불어 같이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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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4월 8일 (갑진)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5월 4일] |
16 | 저녁나절에 들어가 마주 앉아 부찰사와 같이 마주하여 술을 마 시니 몹시 취하였다. 초파일이라 등불을 켜 달고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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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4월 9일 (을사) 맑다. [양력 5월 5일] |
18 | 이른 아침에 부찰사가 나갔다. 그래서 배를 타고 포구로 나 가 같이 배에서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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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4월 10일 (병오) 맑다. [양력 5월 6일] |
20 | 아침에 들으니 암행어사가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수사 이 하 포구로 나가 암행어사를 기다렸다. 조붕(趙鵬)이 와서 봤다. 그 모습을 보니 학질을 오래 앓아 주린 모습이 무척 야위었다. 참으로 딱했다. 저녁나절에 암행어사가 들어 와서 같이 내려가 앉아서이야기했 다. 촛불을 밝혀주고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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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4월 11일 (정미) 맑다. [양력 5월 7일] |
22 | 아침을 먹고 어사와 같이 마주하여 조용히 이야기했다. 저녁나 절에 장병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활 열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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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4월 12일 (무신) 맑다. [양력 5월 8일] |
24 |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어사가 밥을 지어 군사들에게 먹이게 한 뒤에 활 열 순을 쏘고 종일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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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4월 13일 (기유) 맑다. [양력 5월 9일] |
26 | 아침을 먹고 어사와 함께 마주해 있다가 느지막이 포구로 나갔더니, 마파람이 세게 불어 출항하지 못했다. 선인암(仙仁岩)으로 가서 종일 이야기하고 저물어질 때 서로 헤어졌다. 저물어서야 거망포(巨網初)에 이르렀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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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4월 14일 (경술) 흐렸다가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5월 10일] |
28 | 아침을 먹고 나가 앉아서 홍주판관(朴崙)․당진만호(趙孝悅)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에게 곤장 마흔 대를 쳤다. 당진포만호도 같은 벌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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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4월 15일 (신해) 맑다. [양력 5월 11일] |
30 | 단오절의 진상품을 봉해서 곽언수(郭彦守)에게 받아다 내보냈다. 영의정(류성룡)․영부사 정탁(鄭琢)․판서 김명원(金命元)․ 지사 윤자신(尹自新)․조사척․신식(申湜)․남이공(南以恭)에게 편지를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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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4월 16일 (임자) 맑다. [양력 5월 12일] |
32 | 아침을 먹고나서 나가 앉아서, 난에몬 등을 불러다가 불지른 왜 놈 세 놈이 누구누구인지를 물어본 뒤에 붙들어다가 죽여버렸다. 우수사․경상수사도 같이 앉아서 아우 여필이 가져온 술로 취 했다. 가리포첨사․방답첨사가 같이 마셨는데,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이 날 밤 바다에는 달빛이 차겁게 비치고 잔 물결 한 점 일지 않았다. 다시 땀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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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4월 17일 (계축) 맑다. [양력 5월 13일] |
34 | 아침밥을 먹고 나서 아우 여필 및 아들 면( )이 종을 데리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각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이 날 저녁에 울(蔚)이 안위(安衛)에게 가서 보고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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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4월 18일 (갑인) 맑다. [양력 5월 14일] |
36 | 식사하기 전에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 및 솟장을 처리해 주었다. 체찰사에게 갈 공문을 내보냈다. 저녁나절에 충청우후․경상우후․방답첨사․조방장 김완(金浣)과 더불어 활 스무 순을 쏘았다. 마도(馬島)의 군관이 복병한 곳에서 투항해 온 왜놈 한 명 을 잡아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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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4월 19일 (을묘) 맑다. [양력 5월 15일] |
38 | 습열(濕熱: 습기로 일어나는 열)로 침 스무 여 곳을 맞았다. 몸 에 번열(煩熱: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함)이 나는 것 같아 종일 방 에서 나가지 않았다. 어두울 무렵 영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종 목년(木年)과 금화(今花)․풍진(風振) 등이 와서 인사했다. 이 날 아침에 난에몬(南汝文) 편에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 었다. 뛸 것 처럼 기쁘지만 믿을 수는 없다. 이 말은 진작부터 퍼졌었지만 아직은 확실한 기별이 온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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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4월 20일 (병진) 맑다. [양력 5월 16일] |
40 | 경상수사가 와서 내일 만나자고 청했다. 활 열 순을 쏘고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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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4월 21일 (정사) 맑다. [양력 5월 17일] |
42 | 아침밥을 먹은 뒤에 경상도의 진으로 가는 길에 우수사의 진에 들러 같이 갔다. 경상수사를 맞아 주며 종일 활을 쏘았다. 잔뜩 취해서 돌아왔다. 조방장 신호(申浩)는 병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영인(?永人)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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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4월 22일 (무오) 맑다. [양력 5월 18일] |
44 |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나가 앉아 있으니, 부산 허낸만(許乃隱萬) 이 보낸 편지(告目)에 이르기를, 명나라 사신(이종성)이 달아 나고 부사(副使:楊方亨)는 여전히 왜놈의 진영에 있는데, 4월 초8일에 달아난 까닭을 상부에 아뢰었다고 했다. 김 조방장이 와 서 아뢰기를, 노천기(盧天紀)가 술을 먹고 주책없이 굴다가 본영 진무 황인수(黃仁壽)․성복(成卜) 등에게서 욕을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곤장 서른 대를 때렸다. 활 열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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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4월 23일 (기미)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5월 19일] |
46 | 아침에 첨지 김경록(金景祿)이 들어왔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앉아 같이 술을 마셨다. 저녁나절에 군사들 중에서 힘센 자 들을 뽑아 씨름을 시켰더니, 성복(成卜)이란 자가 판을 독차지 하였다. 그래서 상으로 쌀 말을 주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 마량첨사(金應潢)․ 당진만호(趙孝悅)․ 홍주판관(朴崙)․ 결성현감(孫安國)․ 파지도권관(宋世應)․ 옥포만호(李曇) 등과 같이 쏘았다. 한밤에 영인(永人)이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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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4월 24일 (경신) 맑다. [양력 5월 20일] |
48 | 식사를 한 뒤에 목욕을 하고 나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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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4월 25일 (신유) 맑다. [양력 5월 21일] |
50 |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일찌기 목욕하러 들어갔다가 한참 있었다. 저녁에 우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또 목욕탕에 들어갔 는데 물이 너무 뜨거워 오래 있지 못하고 도로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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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4월 26일 (임술) 맑다. [양력 5월 22일] |
52 | 아침에 체찰사의 군관이 경상도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밥을 먹 은 뒤에 목욕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체찰사의 군관 오(吳)도왔다. 김양간(金良看)이 소를 싣고 올 일로 본영으로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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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4월 27일 (계해) 맑다. [양력 5월 23일] |
54 | 저녁에 한 번 목욕했다. 체찰사의 공문 회답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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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4월 28일 (갑자) 맑다. [양력 5월 24일] |
56 | 아침․저녁으로 두 번 목욕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봤다. 경상수사는 뜸뜨느라고 오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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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4월 29일 (을축) 맑다. [양력 5월 25일] |
58 | 저녁에 한 번 목욕했다. 투항해온 왜놈 사고에몬(沙古汝文)을 난에몬(南汝文)에게 시켜 목을 베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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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 4월 30일 (병인) 맑다. [양력 5월 26일] |
60 | 저녁에 한번 목욕했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가 봐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부산의 허낸만(許乃隱萬)의 편지 (告目)가 왔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군사를 철수할 뜻이 있 는 것 같다. 김경록(金景祿)이 돌아갔다. 어머니께서 무사하다는 편지가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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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병신년 5월 (1596년 5월) |
1 | 5월 초1일 (정묘)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5월 27일] |
2 |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한 번 목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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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5월 2일 (무진) 맑다. [양력 5월 28일] |
4 | 일찍 목욕하고 진으로 돌아왔다. 총통 두 자루를 부어 만들었다. 조방장 김완(金浣) 및 조계종(趙繼宗)이 와서 봤다. 우수사가 김인복(金仁福)의 목을 베어 효시했다. 이 날은 공무를 보지 않았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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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5월 3일 (기사) 맑다. [양력 5월 29일] |
6 | 가뭄이 너무 심하다. 근심되고 괴로운 맘을 어찌 다 말하랴!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우후가 와서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저물어서 들어왔다. 총통 두 자루를 녹여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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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5월 4일 (경오) 맑다. [양력 5월 30일] |
8 | 이 날은 어머니 생신인데 헌수하는 술 한 잔도 올려 드리지 못하여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나가지 않았다. 오후에 우수사가 사무보는 집에서 불이 나서 다 탔다. 이 날 저녁에 문충공(文村 公)이 부요(富饒)에서 왔다. 조종(趙琮)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조 정(趙玎)이 4월 초하루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슬프고도 애달프다. 우후가 앞산마루에서 여귀(제사 못받은 귀신)에게 제사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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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5월 5일 (신미) 맑다. [양력 5월 31일] |
10 | 이 날 새벽에 여귀에게 제사를 지냈다. 일찌기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앉아 있고, 회령포만호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여러 장수 들이 와서 모였다. 그대로 들어가 앉아서 위로하고 술을 네 순 배를 돌렸다. 경상수사가 술이 거나하게 취했으므로 씨름을 시켰더니, 낙안군수 림계형(林季亨)이 으뜸이다.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마시고 뛰놀게 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한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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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5월 6일 (임신) 아침에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큰 비가 왔다. [양력 6월 1일] |
12 | 농민의 소망을 흡족하게 채워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말 할 수 없다. 비가 오기 전에 활 대여섯 순을 쏘았다. 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땅거미질 무렵 총통 만들 때에 쓰는 숯을 쌓아두는 창고에 불이 일어나 홀랑 다 타버렸다. 이는 감독관(監 官) 놈들이 삼가지 않은 탓이다. 새로 받아들인 숯에 묵은 불이 있는지 살피지 않아 이런 재난을 보게 된 것이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울(蔚)과 김대복(金大福)이 같은 배로 나갔다. 비가 엄청 나게 쏟아져 잘 갔는지 못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앉아서 걱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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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5월 7일 (계유)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6월 2일] |
14 | 이 날 걱정한 것은 울(蔚)이 가다가 잘 도착했는지 아닌지 였다. 앉아서 밤새도록 걱정하고 있을 적에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가 나기에 열고서 물어보니, 이영남(李英男)이 들어왔다. 불러 들여 조용히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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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5월 8일 (갑술) 맑다. [양력 6얼 3일] |
16 | 아침에 이영남(李英男)과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봤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두 번이나 구토했다. 이 날 영산 이중(李中)의 무덤을 파낸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조카 완(莞)이 들어왔다. 김효성 (金孝誠)도 왔다. 비인현감(신경징)이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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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5월 9일 (을해) 맑다. [양력 6월 4일] |
18 | 몸이 몹시 불편하다. 이영남과 함께 서관(西關: 황해도와 평안도) 의 일을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비가 뿌리더니 새벽까지 왔다. 부안 전선에서 불이 났으나, 심하게 타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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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5월 10일 (병자) 맑다. [양력 6월 5일] |
20 | 나라제삿날(太宗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몸도 불편하여 종일 끙끙 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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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5월 11일 (정축) 맑다. [양력 6월 6일] |
22 | 새벽에 앉아서 이정(李正)과 함께 이야기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비인현감 신경징(申景澄)에게 기일을 어긴 죄 로 곤장 스무 대를 쳤다. 또 순천 격군과 감관 조명(趙銘)의 죄 를 곤장쳤다. 몸이 불편하여 일찍 들어와 끙끙 앓았다. 거제현령 ․영등포만호는 이영남(李英男)과 같이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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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5월 12일 (무인) 맑다. [양력 6월 7일] |
24 | 이영남(李英男)이 돌아갔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김해 부사(白士霖)의 긴급보고가 왔는데 "부산에서 왜놈에게 붙었던 김필동(金弼同)의 편지(告目)도 온 것에도 풍신수길이 비록 정 사(正使)는 없다지만 부사(副使)가 그대로 있으니, 곧 화친하고 군사를 철수하려고 한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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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5월 13일 (기묘) 맑다. [양력 6월 8일] |
26 | 부산의 허낸만(許乃隱萬)의 편지(告目)가 왔는데, 가등청정이란 놈이 벌써 초10일에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고, 각 진의 왜놈들도 장차 철수해 갈 것이요, 부산의 왜놈은 명나라 사신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 가려고 아직 그대로 머물고 있다고 했다. 이 날 활 아홉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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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5월 14일 (경진) 맑다. [양력 6월 9일] |
28 | 김해부사 김사림(白士霖)의 긴급 보고 내용에도 허낸만(許乃隱 萬)의 편지(告目)와 같다. 그래서 순천부사에게 통보하여 그 로 하여금 차례로 통보하게 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결성현감 손안국(孫安國)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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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5월 15일 (신사) 맑다. [양력 6월 10일] |
30 |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우수사는 오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서 앉아 있다가 들으니 한산도 뒷산 마루로 달려 올라 가 다섯 섬과 대마도를 바라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말을 타고 올라가서 이를 보니 과연 다섯 섬과 대마도가 보였다. 저녁나절에 작은 개울가로 돌아왔다. 조방장․ 거제현령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진으로 돌아왔다. 어두워서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서 잤다. 밤바다에 달은 밝고 바람 한 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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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5월 16일 (임오) 맑다. [양력 6월 11일] |
32 |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의 형제가 물고기를 잡아 왔다. 충청우후 (원유남)․ 홍주판관(박륜)․ 비인현감(신경징)․파지도권관(송세응) 등이 왔다. 우수사(이억기)도 와서 보고 돌아갔다. 이날 밤 비가 많이 올 것 같더니 한밤에 비가 왔다. 이 날 밤 정화수(井花 水)를 마시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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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5월 17일 (계미)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12일] |
34 | 농사에 아주 흡족하다. 점을 쳐보니, 풍년이 들것 같다. 저녁나 절에 영등만호 조계종(趙繼宗)이 들어와 봤다. 혼자 읊조리며 수루에 기대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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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5월 18일 (갑신) 비가 잠깐 개긴 했으나, 바다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양력 6월 13일] |
36 | 체찰사의 공문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나가 앉았다가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 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그러나 진지를 전보다 줄어들었다고 하니 걱정되어 눈물이 난다. 봄철 누비옷을 가지고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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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5월 19일 (을유) 맑다. [양력 6월 14일] |
38 | 방답첨사(장린)가 모친상(母喪)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우후를 가 장(假將)으로 정하여 보냈다. 활을 열 순을 쏘았다. 땀이 온 몸을 적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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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5월 20일 (병술) 맑고 바람도 없다. [양력 6월 15일] |
40 | 대청 앞에 기둥을 세웠다. 자녁나절에 나가니 웅천현감 김충민 (金忠敏)이 와서 봤다. 양식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벼 두 휘(스무 말)을 체지(영수증)로 써 주었다. 사도첨사가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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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5월 21일 (정해) 맑다. [양력 6월 16일] |
42 | 나가 앉았다가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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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5월 22일 (무자) 맑다. [양력 6월 17일] |
44 |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좌우후 이몽구(李夢龜)․홍주판관 박륜(朴崙)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홍우(洪祐)가 장계를 가지고 감사(監司)에게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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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5월 23일 (기축)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6월 18일] |
46 | 충청우후 등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아침에 미조항첨사 장의현(張義賢)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장흥으로 부임했다. 춘절 (春節)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 날 밤 열시쯤에 땀이 예사롭지 않게 흘렀다. 이 날 저녁 새 수루의 지붕을 다 잇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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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5월 24일 (경인) 아침에 찌푸린 걸 보니 비가 많이 올 것 같다. [양력 6월 19일] |
48 | 나라제삿날(文宗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저녁에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부산 허낸만(許乃隱萬)의 편지(告目)가 들어왔다. 좌도의 각 진의 왜놈들이 몽땅 철수하고, 다만 부산에만 머물러 있다고 했다. 명나라 수석 사신이 갈려서 새로 정해진 사람이 온다는 기별이 22일 부사에게 왔다고 한다. 허낸만(許乃隱萬)은 술쌀 열 말, 소금 열 말을 주고서 맘껏 정보를 잘 탐지하라고 했다. 어두워서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퍼부었다. 박옥(朴玉)․ 옥지(玉只)․무재(武才) 등이 화살대 백쉰 개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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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5월 25일 (신묘)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0일] |
50 | 홀로 다락 위에 앉아 있으니, 온 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우리나 라 역사를 읽어 보니 개탄할 생각이 많이 난다. 무재(武才) 등에 게 흰 굽으로 활을 바룬 것이 천 개, 흰 굽 그대로 인 것 팔백일 흔 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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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5월 26일 (임진) 짙은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양력 6월 21일] |
52 |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안장 있다가 충청우후 및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쏠 적에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활 열 순 을 쏘았다. 이 날 어두울 무렵 날씨가 찌는 듯했다. 땀이 줄줄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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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5월 27일 (계사) 가랑비 종일 그치지 않았다. [양력 6월 22일] |
54 | 충청우후․좌우후가 이곳에 와서 종정도를 내기했다. 이 날 어두 울 무렵에도 찌는 듯하여 답답했다. 땀이 온 몸을 적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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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5월 28일 (갑오)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양력 6월 23일] |
56 | 전라감사(홍세공)가 파면되어 갈렸다고 한 말을 들었다. 가등청정 (加藤淸正)이 부산으로 도로 왔다고 한다. 모두 믿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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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5월 29일 (을미) 궂은비가 저녁 내 내렸다. [양력 6월 24일] |
58 | 장모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고성현령․거제현령이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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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 5월 30일 (병신) 흐렸다. [양력 6월 25일] |
60 | 곽언수(郭彦守)가 들어왔다. 영의정(류성룡) 및 상장군․우참찬 판부사정탁․지사 윤자신(尹自新)․ 조사척․ 신식(申湜)․ 남이공(南以恭)의 편지가 왔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에게 가서 보고 종일 무척 즐기다가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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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병신년 6월 (1596년 6월) |
1 | 6월 초1일 (정유) 종일 궂은비 내렸다. [양력 6월 26일] |
2 | 저녁나절에 충청우후(원유남) 및 본영우후(이몽구)․(홍주판관)박륜(朴崙)․ (비인현감)신경징(申景澄)을 불러 와서 술 마시며 이야기했다. 윤련(尹連)이 자기 포구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도양장의 콩 씨앗이 모자라거든 김덕록(金德祿)에게서 콩 씨앗을 가져 가라고 체지(영수증)을 써 주었다. 남해현령이 도임장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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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6월 초2일 (무술) 비가 그치지 않았다. [양력 6월 27일] |
4 | 아침에 우후가 방답첨사에게 갔다. 비인현감 신경징(申景澄)이 나갔다. 이 날 아랫도리 속옷을 벗겨서 아래에다 넣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활 열 순을 쏘았다. 편지를 써서 본영으로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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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6월 초3일 (기해) 흐렸다. [양력 6월 28일] |
6 | 아침에 제포만호 성천유(成天裕)가 교서에 숙배했다. 김량간(金良 看)이 농사짓는 소를 싣고 나갔다. 새벽 꿈에 어린 아이가 태어난 지 겨우 대여섯 달인데 몸소 안았다가 도로 내려 놓았다. 금갑 도만호가 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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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6월 4일 (경자) 맑다. [양력 6월 29일] |
8 |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았는데, 가리포첨사․임치첨사․목포만호․남도포만호․충청우후 및 홍주판관 등이 왔다. 활 일곱 순을 쏘았다. 우수사가 와서 다시 과녁을 그리고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술에 취하여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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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6월 5일 (신축) 흐렸다. [양력 6월 30일] |
10 | 아침에 박옥(朴玉)․무재(武才)․옥지(玉只)) 등이 연습용 화살 백쉰 개를 만들어 바쳤다. 나가 앉았다가 활 열 순을 쏘았다. 경상우도 감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져 왔는데, 감사는 혼사가 있어 서울로 올라 갔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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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6월 6일 (임인) 맑다. [양력 7월 1일] |
12 | 사도(四道)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여 활을 쏘고 술과 음식을 먹였다. 또 활쏘기 내기를 하여 승부를 가리고서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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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6월 7일 (계묘)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7월 2일] |
14 | 저녁나절에 나가 충청우후 등과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이 날 왜놈의 조총값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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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6월 8일 (갑진) 맑다. [양력 7월 3일] |
16 | 일찍 나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남도포만호의 본포 첩이 허씨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강짜 싸움을 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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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6월 9일 (을사) 맑다. [양력 7월 4일] |
18 | 일찍 나가 충청우후․당진만호․여도만호․녹도만호 등이 활 을 쏠 때에 경상수사가 와서 같이 활 스무 순을 쏘았다. 경상 수사가 잘 맞혔다. 이 날 일찌기 종 금이(金伊)가 본영으로 갔다. 옥지(玉只)도 갔다.이 날 어두울 무렵 몹시 열이 나고 땀이 예사롭지않게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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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6월 초10일 (병오) 비가 종일 쏟아지듯이 내렸다. [양력 7월 5일] |
20 | 오정 때에 부산에서 편지가 와서 바치는데, 평의지(平義智)가 초9일에 대마도로 들어갔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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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6월 11일 (정미)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양력 7월 6일] |
22 | 활 열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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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6월 12일 (무신) 맑다. [양력 7월 7일] |
24 | 심한 더위가 찌는 것 같다. 충청우후 등을 불러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남해현감의 편지가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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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6월 13일 (기유) 맑으며, 몹시 더웠다. [<양력 7월 8일] |
26 | 경상수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가 잘 맞혔는데 김대복(金大福)이 으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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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6월 14일 (경술) 맑다. [양력 7월 9일] |
28 | 일찍 나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아침에 아들 회와 이수원 (李壽元)이 같이 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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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6월 15일 (신해) 맑다. [양력 7월 10일] |
30 |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우수사․가리포첨사․나주판관 등은 배 탈이 났는지 병으로 말미를 청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충청우후․우후․조방장 김완(金浣) 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이 날 일찌기 부산 허낸만(許乃隱萬)이 와서 왜놈의 정보를 전하기에 군량을 주어서 돌려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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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6월 16일 (임자) 맑다. [양력 7월 11일] |
32 |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나가 앉았다가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에 김붕만(金鵬萬)․ 배승련(裵承鍊) 등이 자리를 사가지고 진에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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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6월 17일 (계축) 맑다. [양력 7월 12일] |
34 |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활 열다섯 순을 쏘고 헤어졌다. 수 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충청수사는 그 아버지의 제삿날이라 아뢰고 거망포(巨網浦: 걸망포)로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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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6월 18일 (갑인) 맑다. [양력 7월 13일] |
36 | 저녁나절에 나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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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6월 19일 (을묘) 맑다. [양력 7월 14일] |
38 | 체찰사에게 공문을 써 보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이설(李渫)에게서 황정록(黃廷祿)의 형편없는 말과 발포 보리밭에서 스무여섯 섬이 났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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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6월 20일 (병진) 맑다. [양력 7월 15일] |
40 | 어제 아침 곡포권관 장후완(蔣後琓)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평산 포만호에게 진작 진에 도착하지 않은 까닭을 문책할 적에, 기 일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50여 일이나 물리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그 해괴하기 짝이 없어 곤장 서른 대를 쳤다. 바로 이 날 오정에 남해현령이 들어와서 숙배한 뒤에 이야기하고 서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왔다. 열다섯 순을 쏘고 안으로 들 어가 남해현감 박대남(朴大男)와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 서야 헤어졌다. 임달영(任達英)도 왔는데, 소를 무역한 발기(견적 서)와 제주목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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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6월 21일 (정사) [양력 7월 16일] |
42 | 내일이 제삿날이므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침에 남해현령을 불러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서 남해현령은 경상수사에게 갔다가 저녁에 되돌아와서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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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6월 22일 (무오) 맑다. [양력 7월 17일] |
44 | 할머니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남해현령과 종일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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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6월 23일 (기미) 밤 두시쯤부터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18일] |
46 | 남해현령과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남해현령은 경상수사에게 갔다.조 방장 및 충청우후․ 여도만호․ 사도첨사 등을 불러 술과 고기를 먹였다. 곤양군수 이극일(李克一)도 와서 봤다. 저녁에 남해현감이 경상수사에게서 왔다.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다. 하동현감도 왔는데 본현으로 도로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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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6월 24일 (경신) 초복이다. 맑다. [양력 7월 19일] |
48 | 아침에 나가 충청우후와 함께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 도 와서 같이 쏘았다. 남해현감은 자기 고을로 돌아갔다. 투항 해 온 왜놈 야에몬(也汝文) 등이 그의 또래 신시로(信是老: 信 次郞)를 죽이자고 청했다. 그래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남원의 김 굉이 군량을 축낸 데 대해 증빙자료를 얻으러 여기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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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6월 25일 (신유) 맑다. [양력 7월 20일] |
50 | 일찍 나가서 서류를 처리해 보내고서 조방장 및 충청우후․임치첨사․ 목포만호․ 마량첨사․ 녹도만호․ 당포만호․회령포만호 ․파지도권관 등이 왔다. 철전(鐵箭) 다섯 순, 편전(片箭) 세 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남원의 김굉이 아뢰고 돌아갔다. 이 날 어두울 무렵에 몹시 더워 땀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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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6월 26일 (임술) 바람이 세게 불고 잠시 비왔다. [양력 7월 21일] |
52 |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철전(鐵箭) 및 편전(片箭)을 각 다섯 순씩 쏘았다. 왜놈 난에몬(亂汝文) 등이 말하는 자귀쟁이(耳匠木 手)의 아내에게 곤장을 쳤다. 이 날 낮에 망아지 두 필에 떨어진 편자 네 개를 갈아 박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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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6월 27일 (계해) 맑다. [양력 7월 22일] |
54 | 나가 앉았다가, 조방장 김완(金浣)․충청우후․가리포첨사․당진 포만호․안골포만호 등과 함께 철전(鐵箭) 다섯 순, 편전(片 箭) 세 순, 활 일곱 순을 쏘았다. 이 날 저녁에 송술(宋述)을 가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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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6월 28일 (갑자) 맑다. [양력 7월 23일] |
56 | 명종의 나라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침에 고성현령 이 달려 와서 보고하기를, "순찰사의 행차가 어제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러니 오늘은 응당 소비포에 이를 것이다. 수원(壽元)이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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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6월 29일 (을축)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는 개었다. [양력 7월 24일] |
58 | 주선(周旋)이 받아갔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공무를 본 뒤에 조방장․충청우후․나주통판과 함께 철전(鐵箭)․편전(片箭)․ 활(帿)을 아울러 열여덟 순을 쏘았다. 무더위가 찌는 듯하다. 초저녁에 땀이 줄줄 흘렀다. 남해현감의 편지가 왔다. 야에몬(也汝文)은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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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병신년 7월 (1596년 7월) |
1 | 7월 초1일 (병인) 맑다. [양력 7월 25일] |
2 | 인종의 나라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우순찰사(서 성)가 진에 이르렀으나, 이 날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의 군관 라굉이 그의 장수의 말을 전하러 이곳에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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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7월 초2일 (정묘) 맑다. [양력 7월 26일] |
4 | 아침밥을 일찍 먹은 뒤에 경상순찰사영의 진으로 가서 순찰사와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새 정자로 올라가 앉 았다. 편을 갈라 활을 쏘았는데, 경상순찰사 편이 진 것이 백예 순두 점(劃)이다. 종일 몹시 즐거웠다. 등잔불을 밝히고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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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7월 초3일 (무진) 맑다. [양력 7월 27일] |
6 | 아침밥을 일찍 먹은 뒤에 순찰사와 도사(都事)가 이 영에 와서 활을 쏘았다. 순찰사 편이 또 진 것이 아흔여섯 점이다. 밤이 깊 어서야 돌아갔다. 아침에 체찰사의 공문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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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7월 4일 (기사) 맑다. [양력 7월 28일] |
8 | 아침밥을 일찍 먹은 뒤에 경상도 영으로 가서 순찰사와 서로 만 나 이야기했다. 조금 있다가 배로 내려가 같이 타고 포구로 나가 니, 여러 배들이 밖으로 줄지어 있었다. 종일 이야기하고 선암(仙 巖) 앞바다에 이르러 닻을 걷고 출항하여 나뉘어 가면서 바라 보며 서로 읍했다. 그 길로 우수사․경상수사와 함께 같은 배로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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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7월 5일 (경오) 맑다. [양력 7월 29일] |
10 | 저녁나절에 나가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와서 같이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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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7월 6일 (신미) 맑다. [양력 7월 30일] |
12 | 일찍 나가 각 처의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저물 무렵 에 거제현령․웅천현감․삼천포권관이 와서 봤다. 이곤변(李鯤 變)의 편지도 왔다. 그 사연 속에는 입석(立石)의 잘못을 많이 말했다. 우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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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7월 7일 (임신) 맑다. [양력 7월 31일] |
14 | 경상우수사 및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아울러 와서 잠깐 활 세 쾌(貫)를 쏘았다. 종일 비는 오지 않았다. 활장이 지이(智伊)․ 춘복(春卜)이 저녁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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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7월 8일 (계유) 맑다. [양력 8월 1일] |
16 | 충청우후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체찰사의 비밀 표험(標驗?) 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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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7월 9일 (갑술) 맑다. [양력 8월 2일] |
18 | 아침에 체찰사에게 갈 여러 공문에 관인을 찍어서 이전(李田)이 받아 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이곳에 와서 통신사가 탈 배에 풍석(風席: 돛만드는 돗자리)이 마련하기 어렵다고 여러번 말했다. 빌려 쓰고자 하는 뜻이 그 말하는 속에 보였다. 박자방 (朴自邦)을 물을 끌어들일 대나무와 서울가는 사람이 요구하는 부채만들 대나무를 얻어 올 일로 남해로 보냈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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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7월 10일 (을해) 맑다. [양력 8월 3일] |
20 | 새벽 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 보니, 멀리 활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삭을 차서 부누는 것은 갓은 머리 위에 있는데 발길에 차 보이는 것으로서 이는 적의 괴수를 모조 리 잡아 없앨 징조라 하겠다. 저녁나절에 체찰사의 전령에, "첨지 황신이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정사(正使)가 되고, 권황 이부사(副使)가 되어 가까운 시일에 바다를 건너 갈 것이니, 타고 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부산에다 대어 놓아라."고 했다. 경상우후가 여기 와서 흰 무늬 돗자리 백쉰 닢을 빌려 갔다. 충청우후․ 사량만호․ 지세포만호․ 옥포만호․ 홍주판관․전 적도만호 고여우(高汝友) 등이 와서 봤다. 경상수사가 달려와서 보고 하기를, "춘원도(통영시 광도면)의 왜선 한 척이 도착하여 정박하 였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을 뽑아 보내어 샅샅이 찾아내라고 전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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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7월 11일 (병자) 맑다. [양력 8월 4일] |
22 | 아침에 체찰사에게 행정선(通文船) 일로 공문을 써 관인을 찍 어보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바다를 건너 갈 격군과 뒤 따라 갈 것을 의논했다. 바다를 건너갈 양식이 스무세 섬인데, 새로 찧으니 스무한 섬이라 두 섬 한 말이 줄었다. 나가 앉았다가 몸소 활 세 쾌를 쏘는 것을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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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7월 12일 (정축) 새벽에 비가 잠시 뿌리다가 곧 그치고 무지개 가 한참이나 서 있었다. [양력 8월 5일] |
24 | 저녁나절에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이와서 뜸 열다섯 번을 빌려 갔다. 부산으로 실어 보낼 군량 흰쌀 스무 섬․중쌀(中米) 마흔 섬을 차사원 변익성(邊翼星)과 수사(水使)의 군관 정존극(鄭存極) 이 받아갔다. 조방장이 오고, 충청우후도 와서 활을 쏘았다.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남치온(南致溫)도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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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7월 13일 (무인) 맑다. [양력 8월 6일] |
26 | 명나라 사신을 따라 갈 우리나라 사신들이 탈 배 세 척을 정비하 여 낮 열 시쯤에 떠나 보냈다. 저녁나절에 활 열세 순을 쏘았 다. 어두울 무렵 항복해온 왜놈들이 광대놀이를 차렸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만, 붙좇은 왜놈 들이 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못하게 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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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7월 14일 (기묘) 새벽에 비가 뿌렸다. [양력 8월 7일] |
28 | 이 날도 벌써 보름날이다. 저녁에 고성현령 조응도(趙凝道)가 와서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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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7월 15일 (경진) 새벽에 비가 뿌렸다. [양력 8월 8일] |
30 | 망궐례를 행하지 못했다. 저녁나절에 활짝 개었다. 경상수사․ 전라우수사가 함께 모여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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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7월 16일 (신사) 새벽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8월 9일] |
32 | 북쪽에 툇마루 세 칸을 만들었다. 이 날 충청도 홍주 격군으로 신평에 사는 사삿집 종 엇복(於叱卜)이 도망가다 붙잡혔으므로 목베어 내다 걸었다. 하동현감․사천현감이 왔다. 저녁나절에 활 세 쾌를 쏘았다. 이 날 어두울 무렵 바닷달이 너무도 밝아서 혼자 수루 위에 기대었다. 밤 열 시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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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7월 17일 (임오) 새벽에 비가 뿌렸다가 곧 그쳤다. [양력 8월 10일] |
34 |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둑들이 일어나서 홍산현감 윤영현(尹英賢) 이 잡히고, 서천군수 박진국(朴振國)도 잡혀갔다고 한다. 바깥 도 둑도 없애지 못한 이 마당에 나라 안의 도둑들이 이러하니, 참으 로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다. 남치온(南致溫) 및 고성현령․사천 현감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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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7월 18일 (계미) 맑다. [양력 8월 11일] |
36 | 각 곳에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보냈다. 충청우후 및 홍주 반자가 충청도 도둑들의 일을 듣고 와서 아뢰었다. 저녁에 투항 해 온 왜놈 레나기(戀隱己)․야이(汝耳)․야몬(汝文) 등이 난야몬 (南汝文)을 해치려고 흉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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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7월 19일 (갑신) 맑으나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8월 12일] |
38 | 난야몬(南汝文)이 레나기(戀隱己)․야이(汝耳)․야몬(汝文) 등을 목베었다. 우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 및 충청우후(원유남)․다경포만호 윤승남(尹承男)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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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7월 20일 (을유) 맑다. [양력 8월 13일] |
40 |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 안하시다니 기쁘고 다행이다. 그 편에 충청도 토적(이몽학)이 이 시발(李時發)(巡按御史)의 포수에게 총맞아 즉사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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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7월 21일 (병술) 맑다. [양력 8월 14일] |
42 |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거제현령․나주판관․홍주판관과 옥포만호․웅천현감․당진포만호가 왔다. 옥포에는 배 만드는데 쓸 양식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체찰사에 관계된 군량 스무 말을 주고, 웅천․당진포에는 배 만들 쇠 열다섯 근을 함께 주었다. 이 날 아들 회가 방자 수(壽)에게 곤장쳤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을 붙들어다가 뜰 아래에서 잘 타일렀다. 밤 열 시쯤에 땀이 줄 줄 흘렀다. 통신사가 청하는 표범 가죽을 가지고 올려고 배를 본영으로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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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7월 22일 (정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8월 15일] |
44 | 종일 나가지 않았다. 홀로 수루 위에 앉아 있었다. 종 효대(孝代) ․팽수(彭壽)가 나가서 흥양의 군량선을 탔다. 저녁에 순천 관 리의 통지문(文狀)에, "충청도 도둑들이 홍산에서 일어난 것을 곧 죽였다고 하는데, 홍주 등 세 고을이 포위를 당했다가 간신히 면했다"고 했다. 참으로 한심타. 한밤에 비가 많이 왔다. 낙안의 교대할 배가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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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7월 23일 (무자) 큰 비가 내렸다. [양력 8월 16일] |
46 | 오전 열 시쯤에 맑았다가 이따금 쏟아졌다. 저녁나절에 홍주판 관 박륜(朴崙)이 휴가를 얻어서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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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7월 24일 (기축) 맑다. [양력 8월 17일] |
48 | 현덕왕후(顯德王后:文宗의 王后 權氏의 祭祀) 나라제삿날이다. 이 날 우물을 고쳐 파는데로 갔다. 경상수사도 왔다. 거제현령․ 금갑도만호․다경포만호가 뒤따라 왔다. 샘줄기가 깊이 들어가 있고 물의 근원도 길다. 점심을 먹은 뒤에 돌아와 활 세 쾌(貫) 를 쏘았다. 어두울 무렵 곽언수(郭彦守)가 표범가죽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날 밤 마음이 답답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인기척은 고요하여 앉 았다 누웠다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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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7월 25일 (경인) 맑다. [양력 8월 18일] |
50 | 아침에 공리(工吏)가 사냥한 것을 헤아리니 뿔이 열 개라 창고에 넣게 했다. 표범 가죽 및 꽃돗자리를 통신사에게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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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7월 26일 (신묘) 맑다. [양력 8월 19일] |
52 | 이전(李筌)이 체찰사에게서 와서 표험(標驗) 세 벌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경상수사에게 보내고, 하나는 전라우수사에게 보냈다. 의금부의 나장이 윤승남(尹承男)(다경포만호)을 잡아 갈 일로 내려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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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7월 27일 (임진) 맑다. [양력 8월 20일] |
54 | 저녁나절에 활터로 달려가서 길 닦는 일을 녹도만호에게 일러 주 었다. 종 경(京)이 아팠다. 다경포만호 윤승남(尹承男)이 잡혀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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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7월 28일 (계사) 맑다. [양력 8월 21일] |
56 | 종 무학(武鶴)․무화(武花)․박수매(朴壽每)․우롬금(于老音金) 등 이 스무엿새 날에 여기 왔다가 오늘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충청우후와 더불어 활 세 쾌를 같이 쏘았다. 철전 서른여섯 푼, 편전 예순 푼, 보통 화살 스무여섯 푼 모두 백스무 세 푼(계산 착오인 듯. 합이 백스무둘임)이었다. 종 경이 많이 앓 았다고 한다.무척 걱정이 된다. 고향 아산으로 한가위 제물을 보낼 때에 홍․윤․이 등 네 군데에 편지를 부쳤다. 밤 열시쯤에 꿈속에서까지 땀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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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7월 29일 (갑오) 맑다. [양력 8월 22일] |
58 | 경상수사 및 우후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도 아울러 와서 활 세 쾌를 쏘았는데, 내가 쏘던 활은 고자가 들떠서 곧 수리하라 고 하였다. 체찰사에게서 과거보는 자리를 설치한다는 공문이 와 닿았다. 저녁에 점장이의 집을 맡아 지키던 아이가 세간을 몽땅 훔쳐 달아나버렸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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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 7월 30일 (을미) 맑다. [양력 8월 23일] |
60 | 새벽에 갈몰(葛沒)이 들어왔다. 밤 꿈에 영의정과 같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아침에 이진(李珍)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춘화(春花) 등도 돌아갔다. 김대인(金大仁)은 담제( 祭)를 지낸다고 휴가를 받아갔다. 저녁나절에 조방장이 와서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임금의 분부가 두 통이 내려 오고 싸움에 쓸 말과 면의 말도 들어왔다. 지이(智伊)와 무재(武才)가 함께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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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병신년 8월 (1596년 8월) |
1 | 8월 초1일 (병신) 맑다. [양력 8월 24일] |
2 |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충청우후․금갑도만호․목포만호․사도 첨사․녹도만호가 와서 참례했다. 저녁나절에 파지도권관 송세응(宋世應)이 돌아갔다. 오후에 활터로 가서 말을 달리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부산에 갔던 곽언수(郭彦守)가 돌아와서 통신사의 회답 편지를 전했다. 어두울 무렵 비올 징후가 많았다. 그래서비오기 전에 장만할 것들을 시켜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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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8월 초2일 (정유) 아침에 비가 몹시 왔다. [양력 8월 25일] |
4 | 지이(智伊) 등에게 새로 만든 활을 폈다가 굽혔다가 하게 했다. 저녁나절에 광풍이 세게 일어 빗줄기는 삼대 같아서 대청 마루에 걸어 둔 바람막이가 날라가 방 마루 바람막이에 부딪쳐 한꺼번에 두 바람막이가 깨어져 조가조각 나버렸다. 아까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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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8월 초3일 (무술) 맑다가 이따금 비가 뿌렸다. [양력 8월 26일] |
6 | 지이(智伊)에게 새로 만든 활을 펴게 했다. 조방장․충청우후가 와서 보기에 그대로 나가 활을 쏘았다. 아들들이 육냥궁(六兩弓)을 쏘았다. 이 날 저녁나절에 송희립(宋希立)과 아들들이 이름이 적힌 황득중(黃得中)․김응겸(金應謙)의 통행을 허락하는 증명서를 써서 주게 했다. 초저녁에 비가 오다가 밤 두 시쯤에야 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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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8월 초4일 (기해) 맑다. [양력 8월 27일] |
8 |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들 회․면․조카 완(莞) 등이 아내의 생일술을 올리려고 나갔다. 정선도 나갔다. 정사립(鄭思立)이 휴가를 받아서 갔다. 저녁나절에 수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보느라고 술잔이 시어지는 줄도 몰랐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활 두어 순을 쏘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활 쏘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몸은 얼어 터지는듯 떨려 곧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냈다. 저물 무렵 경상수사가 와서 문병하고 갔다. 밤에는 낮보다 갑절이나 아팠다. 끙끙 앓으며 밤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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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8월 초5일 (경자) 맑다. [양력 8월 28일] |
10 | 몸이 불편하여 나가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의득(李義得) 가리 포첨사가 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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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8월 초6일 (신축)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8월 29일] |
12 | 아침에 조방장 김완(金浣)․충청우후․경상우후 등이 문병을 왔 다. 당포만호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다고 와서 알렸다. 경 상수사 및 우수사 등이 와서 봤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들어왔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밤에 비가 많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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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8월 초7일 (임인)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8월 30일] |
14 |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서울에 편지를 썼다. 이 날 밤 땀이 위․아래 두 옷을 적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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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8월 초8일 (계묘)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8월 31일] |
16 | 박담동(朴淡同)이 서울로 올라가는데 혼수를 승지 서성(徐 )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강희로(姜熙老)가 이곳에 와서 남해현령의 병이 차즘 나아진다고 했다. 그와 함께 밤이 되도록 이야기했다. 중 의능(宜能)이 날삼(生麻) 백스무 근을 가져와서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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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8월 9일 (갑진)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9월 1일] |
18 | 아침에 중 수인(守仁)에게서 날삼(生麻) 삼백서른 근을 받아들였다. 하동현감이 종이를 다시 두드려 만든다고 도련지 스무 권, 주 지 서른두 권, 장지 서른한 권을 김응겸(金應謙)․ 곽언수(郭彦守) 등에게 주어 보냈다. 마량첨사 김응황(金應璜)이 직무평가에서 하등급(居下)을 맞고 나갔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밤 열 시쯤 되니 땀이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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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8월 초10일 (을사) 맑다. [양력 9월 2일] |
20 | 아침에 충청우후가 문병을 왔다가 그대로 조방장과 함께 같이 아 침식사를 했다.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에게 날삼(生麻) 마흔 근을 그물을 만들도록 주어서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한참동안 이나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저녁나절에 두 조방장 및 충청우 후를 불러다가 상화(床花)를 만는데 이를 같이 했다. 저녁에 체 찰사에게 보낼 공문에 관인을 찍었다. 어두워지니 달빛은 비단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갈래여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 열 시쯤에 방에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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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8월 11일 (병오) 맑으나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9월 3일] |
22 | 아침에 체찰사에게 갈 여러 공문에 관인을 찍어 내보냈다. 조 방장 배흥립(裵興立)과 함께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 저녁나절에 그와 같이 활터(射場)에 가서 말달리는 것을 구경하고서 저 물 무렵에 영으로 돌아왔다. 초저녁에 거제현령이 달려와서 보 고한 내용에, "왜적서 한 척이 등산(登山: 마산시 합포구 진동 면)에서 송미포(松未浦: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로 들어온다."고 했다. 밤 열 시쯤에 또 보고하기를, "아자포(阿自浦)로 옮겨 대었 다."고 했다. 배를 정하여내어 보낼 즈음에 또 보고하여 말하기를, "견내량을 넘어갔다."고 했다. 그래서 복병장이 찾아서 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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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8월 12일 (정미) 맑다. [양력 9월 4일] |
24 | 샛바람이 세게 불어 동쪽으로 가는 배는 도저히 오갈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안부를 알지를 못했으니, 몹시도 답답하 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땀이 두겹 옷을 적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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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8월 13일 (무신) 맑다가 흐리며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9월 5일] |
26 | 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 날 밤 땀이 흘러 등을 적시었다. 아침에 우(禹)씨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사지낼 물건을 약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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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8월 14일 (기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9월 6일] |
28 | 샛바람이 계속 불어 벼가 상했다고 한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과 충청우후와 같이 이야기를 중지시켰는데 땀나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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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8월 15일 (경술) 새벽에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7일] |
30 | 망궐례를 못했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경상수사 및 두 조방 장과 충청우후․ 경상우후․ 가리포첨사․ 평산포만호 등 열아홉 명의 여러 장수들이 모여서 이야기했다. 비가 종일 그치지 않았다. 초저녁이 지나니 마파람이 불면서 비가 많이 왔다. 밤 두 시 쯤까지 세 번이나 땀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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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8월 16일 (신해) 잠깐 맑다가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9월 8일] |
32 | 강희로(姜熙老)가 남해로 돌아갔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누워 끙끙 앓았다. 저녁에 체찰사가 진주성(晉城)에 왔다는 공문이 왔다. 다시 비 갠 뒤의 달빛이 너무 밝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 열 시쯤에 누워서 가랑비가 또 내리다가 잠시후에 그치는 걸 봤다. 땀이 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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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8월 17일 (임자) 맑고 흐림이 서로 섞여서 개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했다. [양력 9월 9일] |
34 |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거제현령이 아울러 와서 봤다. 이 날 샛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체찰사 앞으로 사람을 찾으러 내 보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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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8월 18일 (계축) 비가 오락가락 했다. [양력 9월 10일] |
36 | 한밤 자정에 죄인에게 특사를 내리는 조칙문을 가지고 온 차사원 구례현감(이원춘)이 들어왔다. 땀을 흘리는게 예삿 일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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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8월 19일 (갑인) 흐리다가 맑다가 했다. [양력 9월 11일] |
38 | 새벽에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죄인에게 특사내리는 조 칙문에 숙배하고 그대로 그들과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구례현 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송의련(宋義連)이 본영에서 아들 울(蔚)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다 행이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과 금갑도만호가 이곳에 와서 이야 기했다. 초저녁부터 한밤까지 땀에 젖었다. 어두울 무렵 자귀쟁이 (耳匠) 옥지(玉只)가 재목에 치어서 중상을 입었다고 보고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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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8월 20일 (을묘) 샛바람이 세게 불다. [양력 9월 12일] |
40 | 새벽에 전선(戰船)을 만들 재목을 끌어내리는 일로 우도군사 삼 백 명, 경상도군사 백 명, 충청도군사 삼백 명, 전라좌도군사 삼 백아흔 명을 송희립(宋希立)이 거느리고 갔다. 늦은 아침에 조카 봉․해와 아들 회․면․조카 완(莞)과 최대성(崔 大晟)․윤덕종(尹德種)․정선 등이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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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8월 21일 (병진) 맑다. [양력 9월 13일] |
42 |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가서 아들들에게 화살 쏘는 연습 과 말달리며 활을 쏘는 것을 시켰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조 방장 김완(金浣)과 충청우후가 아울러 왔다. 같이 점심을 먹고 저물어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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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8월 22일 (정사) 맑다. [양력 9월 14일] |
44 | 외조모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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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8월 23일 (무오) 맑다. [양력 9월 15일] |
46 | 활터에 가 보았다.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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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8월 24일 (기미) 맑다. [양력 9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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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8월 25일 (경신) 맑다. [양력 9월 17일] |
49 |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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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8월 26일 (신유) 맑다. [양력 9월 18일] |
51 | 새벽에 출항하여 사천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충청우후와 함께 종일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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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8월 27일 (임술) 맑다. [양력 9월 19일] |
53 | 일찍 길을 떠나 사천현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그대로 진주성(晉城)으로 가서 체찰사(이원익)를 뵙고 종일 의논했다. 저물 무렵에 진주목사(나정언)의 처소로 돌아와서 잤다. 김응서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이 날 어두울 무렵 이용제(李用濟) 가 들어왔는데, 역적 도당의 편지를 지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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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8월 28일 (계해) 맑다. [양력 9월 20일] |
55 | 이른 아침에 체찰사 앞으로 가서 종일 여쭙고 의논하여 결정하 고, 초저녁이 지나서 진주목사의 처소로 돌아왔다. 진주목사와 함 께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청생(靑生)도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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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8월 29일 (갑자) 맑다. [양력 9월 21일] |
57 | 일찍 떠나 사천현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은 뒤에 그대로 가서 선 소리(사천시 용남면 선진리)에 이르렀다. 고성현령(조응도)도 왔 다. 삼천포권관과 이곤변(李鯤變)이 술을 가지고 뒤따라 도착했 다. 밤들도록 같이 이야기하고 구라량(仇羅梁)에서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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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병신년 閏8월 (1596년 윤8월) |
1 | 윤8월 초1일 (을축) 맑다. [양력 9월 22일] |
2 | 일식(日蝕)을 했다. 이른 아침에 비망(飛望) 밑에 이르러 이곤변 (李鯤變) 등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서로 헤어졌다. 저물어 서 진중에 이르니, 우수사․경상수사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수사와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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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윤8월 2일 (병인) 맑다. [양력 9월 23일] |
4 | 여러 장수들이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우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경상수사와 함께 활터 정자 마루로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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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윤8월 3일 (정묘) 맑다. [양력 9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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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윤8월 4일 (무진)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25일] |
7 | 이 날 밤 열 시쯤에 땀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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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윤8월 5일 (기사) 맑다. [양력 9월 26일] |
9 | 활터 마루에 가서 아이들(아들들을 말함)이 말달리고 활쏘는 것 을 구경했다. 하천수(河天壽)가 체찰사 앞으로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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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윤8월 6일 (경오) 맑다. [양력 9월 27일] |
11 | 아침밥을 먹은 뒤에 경상수사 및 우수사와 함께 활터 마루로 가서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저물어서 돌아왔다. 이 날 밤 잠시 땀을 흘렸다. 방답첨사가 진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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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윤8월 7일 (신미) 맑다. [양력 9월 28일] |
13 | 아침에 아산의 종놈 상시(向是)가 들어왔다. 가을보리는 소출이 마흔석 섬이고, 봄보리는 서른다섯 섬이며, 물고기로 바꾼 쌀은 모두 열두 섬 네 말인데, 또 일곱 섬 열 말이 나고, 또 네 섬이 났다고 했다. 이 날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솟장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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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윤8월 8일 (임신) 맑다. [양력 9월 29일] |
15 | 식사를 한 뒤에 활터 마루로 가서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했다. 광양현감․고성현령이 시험관으로서 들어왔다. 하천수(河天 壽)가 진주에서 왔다. 수하에 부리는 병졸 림정로(林廷老)가 휴가를 받아 나갔다. 이 날 밤 땀을 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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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윤8월 9일 (계유) 맑다. [양력 9월 30일] |
17 | 아침에 광양현감이 교서(敎書)에 숙배했다. 조카 봉( )․아들 회 ( ) 및 김대복(金大福)이 교지(官敎)에 숙배하고서 그대로 이 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밤에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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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윤8월 10일 (갑술) 맑다. [양력 10월 1일] |
19 | 이 날 새벽에 과거 초시(初試)를 보였다. 저녁나절에 면( )이 쏜 것은 모두 쉰다섯 보이고, 봉()이 쏜 것은 모두 서른다섯 보이고, 해( )가 쏜 것은 모두 서른 보이고, 회( )가 쏜 것은 모두 서른다섯 보이고, 완(莞)이 쏜 것은 스무다섯 보라고 했다. 진무 성(陳武晟)이 쏜 것은 모두 쉰다섯 보여서 합격하였다. 어두울 무렵 우수사․경상수사․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같이 와서 밤 열 시쯤에 헤어져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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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윤8월 11일 (을해) 맑다. [양력 10월 2일] |
21 | 체찰사를 기다릴 일로 출항하여 당포에 이르니, 초저녁에 체찰사 에게 문안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14일에 떠난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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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윤8월 12일 (병자) 맑다. [양력 10월 3일] |
23 |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열 시쯤에 어머니 앞에 이르니, 흰머리 카락이 에부수수하신데, 나를 보고는 놀라 일어나셨다. 기력은 숨 이 곧 끊어질 듯하여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 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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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윤8월 13일 (정축) 맑다. [양력 10월 4일] |
25 | 아침 식사를 곁에서 모시고 드시게 하니 대단히 기뻐하시는 빛이다. 저녁나절에 하직인사를 여쭙고 본영으로 왔다. 오후 여섯 시 쯤 작은 배를 타고 밤새도록 노를 바삐 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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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윤8월 14일 (무인) 맑다. [양력 10월 5일] |
27 | 새벽에 두치(豆恥: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니, 체찰사와 부찰사가 어제 벌써 도착하여 잤다고 한다. 뒤미처 점검하는 곳으로 가서 소촌찰방을 만나고 일찍 광양현에 이르렀다. 지나온 지역이 한결 같이 쑥대밭이 다 되어 그 참상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임시로나마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 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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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윤8월 15일 (기묘) 맑다. [양력 10월 6일] |
29 | 일찍 떠나 순천에 이르니 체찰사 일행이 순천부 청사에 들어갔다 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정사준(鄭思竣)의 집에서 묵었다. 순찰사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아들들이 참시관이 되었다고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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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윤8월 16일 (경진) 맑다. [양력 10월 7일] |
31 | 이 날은 그대로 거기서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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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윤8월 17일 (신사) 맑다. [양력 10월 8일] |
33 | 저녁나절에 낙안으로 향하여 그 군에 이르니 이호문(李好問) ․이지남(李智男) 등이 와서 보고 고치기가 어려운 폐단이 오로지 수군에 있다고 진술했다. 종사관 김용(金涌)가 서울로 올라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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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윤8월 18일 (임오) 맑다. [양력 10월 9일] |
35 | 일찍 떠나 양강역(陽江驛)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나서 산성(고 흥군 남양면 대곡리)으로 올라가 멀리 바라보며 각 포구와 여러 섬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그 길로 흥양(고흥읍)으로 향했 다. 저물 무렵에 흥양현에 이르러 향소청(鄕所廳)에서 잤다. 어두 워서 이지화(李知和)가 제 물건을 뽐내려고 거문고를 가지고 왔다. 영(英)도 와서보고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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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윤8월 19일 (계미) 맑다. [양력 10월 10일] |
37 | 떠나서 녹도(고흥군 도양면 녹도)로 가는 길에 도양(도덕면 도덕리)의 둔전을 살펴 보았다. 체찰사는 매우 기뻐하는 빛이 많았다. 녹도에서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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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윤8월 20일 (갑신) 맑다. [양력 10월 11일] |
39 | 일찍 떠나 배를 타고 체찰사와 부찰사와 함께 같이 앉아 종일 군사 일을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그 길로 장흥부에 이르렀다. 나는 관청의 동헌에서 잤다. 김응남(金應男)이 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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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윤8월 21일 (을유) 맑다. [양력 10월 12일] |
41 | 그대로 머물러 자는데 정경달(丁景達)이 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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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윤8월 22일 (병술) 맑다. [양력 10월 13일] |
43 | 저녁나절에 병영(해남군 병영면 성남리 병영)에 몸을 던져 원균과 서로 만나 보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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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윤8월 23일 (정해) 맑다. [양력 10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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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윤8월 24일 (무자) [양력 10월 15일] |
46 | 나는 부찰사(한효순)와 같이 가리포(완도군 완도읍 군내리)로 갔 더니, 우우후 이정충(李廷忠)도 먼저 와 있었다. 남쪽 망대(남망봉 해발 150m)로 같이 올라가니, 좌우에는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한 도(一道)의 요충지이 다. 그러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진(해 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겨 합치기로 했다. 병영에 이르러서는 원균의 흉한 행동을 적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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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윤8월 25일 (기축) [양력 10월 16일] |
48 | 일찍 떠나 이진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곧 해남으로 갔다. 도중에 김경록(金景祿)이 술을 차고 와서 봤다. 어느 결에 날이 저물어 횃불을 밝히고 가니, 밤 열 시께에야 해남현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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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윤8월 26일 (경인) 맑다. [양력 10월 17일] |
50 | 일찍 떠나 우수영(해남군 문내면)에 이르렀다. 나는 곧 태평정(太平亭)에서 자고서 우후와 함께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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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윤8월 27일 (신묘) 맑다. [양력 10월 18일] |
52 | 체찰사가 진도에서 영(우수영)으로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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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윤8월 28일 (임진)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10월 19일] |
54 | 바로 고쳐 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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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윤8월 29일 (계사)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10월 20일] |
56 | 이른 아침에 남여역(男女驛:해남군 황산면 남리리)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해남현에 이르렀다. 소국진(蘇國秦)을 본영(전라좌수영)으로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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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병신년 9월 (1596년 9월) |
1 | 9월 초1일 (갑오) 비가 뿌렸다. [양력 10월 21일] |
2 |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일찍 떠나 석제원(강진군 성전면 성전리)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영암에 이르러 향사당(鄕舍 堂)에서 잤다. 정랑 조팽년(趙彭年)이 와서 봤다. 최숙남(崔淑男) 도 와서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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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9월 초2일 (을미) 맑다. [양력 10월 22일] |
4 | 영암에서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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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9월 3일 (병신) 맑다. [양력 10월 23일] |
6 | 아침에 떠나 나주의 신원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나주판관을 불러다가 고을의 일들을 물었다. 저물 무렵에 나주에 이르렀다. 별관의 종 억만(億萬)이 와서 신원(新院)에서 알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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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9월 4일 (정유) 맑다. [양력 10월 24일] |
8 | 나주에서 머물렀다. 어두울 무렵 목사(李福男)가 술을 가지고 와서 권했다. 일추(一秋)도 술잔을 가져 왔다. 이 날 아침에 체찰사와 함께 문묘에 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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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9월 5일 (무술) 맑다. [양력 10월 25일] |
10 | 나주에서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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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9월 6일 (기해) 맑다. [양력 10월 26일] |
12 | 먼저 무안의 일로 가겠다고 체찰사에게 보고하고 일을 떠났다. 고막원(古莫院: 나주시 다시면 고막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나주감목관 나덕준(羅德駿)이 뒤쫓아와서 서로 만났다. 이야기 하는 중에 강개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오랬동안 이야기하다가 저물어서 무안에 이르러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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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9월 7일 (경자) 맑다. [양력 10월 27일] |
14 | 감목관 나덕준(羅駿) 및 무안현감(남언상) 함께 민폐에 관한 이야 기했다. 한참 있다가 정대청(鄭大淸)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 서 그를 청하여 앉아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떠나 다경포(무안군 운남면 성내리)에 이르러, 영광군수와 함께 밤 열 시쯤이나 되게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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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9월 8일 (신축) 맑다. [양력 10월 28일] |
16 | 나라제삿날(世祖의 祭祀)인데도 오늘 새벽에 조반(早飯)에 고기를 올려 놓았다. 그래서 나는 먹지도 않고 도로 내놓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서 감목관에 이르니 감목관과 영광군수는 같이 있었다. 국화 떨기 가운데로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저물어서 동산원(東山院: 무안군 현경면 옹산원;瓮山院) 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해제면 임수리)에 이르니, 이공헌(李公獻)의 딸 여덟 살짜리 아이와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水卿)이 같이 와서 알현했다. 이공헌(李公獻)을 곰곰히 생각하니 참혹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수경(水卿)은 곧 이염(李琰)의 집에서 내다 버렸는데, (이공헌이) 얻어다가 기른 아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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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9월 9일 (임인) 맑다. [양력 10월 29일] |
18 | 일찍 일어나서 임치첨사 홍견(洪堅)을 불러 방비책을 물었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뒷성(後城)으로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고 동산원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뒤에 함평현에 이르렀다. 도중 에 한여경(韓汝璟)을 만났으나, 말위에서는 만나 보기가 어려우므로 타일러서 함평으로 들어갔다. 함평현감은 경차관을 마중하 러 나갔다고 했다. 김억창(金億昌)도 같이 함평에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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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9월 10일 (계묘) 맑다. [양력 10월 30일] |
20 | 몸도 노곤하고 말도 힘들 것 같아서 함평에 머물러 잤다. 아침 식사를하기 전에 무안의 정대청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고을 유생도 많이 들어와 폐단된 일을 진술했다. 저녁에 도사(都事)가 들어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밤 열 시쯤에 헤어져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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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9월 11일 (갑진) 맑다. [양력 10월 31일] |
22 |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영광으로 갔다. 도중에 신경덕(辛慶德)을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 영광에 이르니, 영광군수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들어와 같이 이야기했다. 이 때 산월(山月)도 와서 보고 술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누명을 벗길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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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9월 12일 (을사) 바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11월 1일] |
24 |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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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9월 13일 (병오) 맑다. [양력 11월 2일] |
26 | 이중익(李仲翼) 및 이광축(李光軸)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이중익(李仲翼)이 말을 많이 하다가 막히어서 급하게 되니 옷을 벗고서 그에게 관여하며 종일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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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9월 14일 (정미) 맑다. [양력 11월 3일] |
28 |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번 관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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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9월 15일 (무신) 맑다. [양력 11월 4일] |
30 |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번 관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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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9월 16일 (기유) 맑다. [양력 11월 5일] |
32 | 체찰사 일행이 고창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장성에 이르러서야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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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9월 17일 (경술) 맑다. [양력 11월 6일] |
34 | 체찰사와 부찰사는 입암산성(立巖山城: 정주시 입암면 임암산 해발 655m)으로 가고, 나는 혼자 진원현(장성군 진원면 석전리 진원)에 이르러 진원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종사관도 왔다. 저물어서 관청 안으로 들어가니 두 조카딸이 나와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못보았던 감회를 풀고 도로 작은 정자로 나가 진원현감 및 여러 조카들과 밤들도록 같이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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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9월 18일 (신해)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11월 7일] |
36 | 식사를 한 뒤에 광주에 이르러 광주목사(최철견)와 이야기했다. 비가 많이 오더니, 한밤에는 달빛이 대낮 같았다. 밤 두 시쯤에 비바람이 세게 일었다. 영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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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9월 19일 (임자)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11월 8일] |
38 |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봉( )․해( )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오후에 능성현령(李繼令)이 들어와서 곳 간을 봉하고 광주목사를 체찰사가 파면시켰다고 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가 와서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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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9월 20일 (계축)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11월 9일] |
40 | 아침에 각가지 사무보는 색리들의 죄를 논란했다. 저녁나절에 광주목사를 보고 길을 떠나려 할 즈음에 명나라 사람 두 명이 이 야기 하자고 청하므로 술을 먹였다. 길을 떠났으나 종일 비가 내려 멀리 갈 수가 없어 화순에 이르러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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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9월 21일 (갑인) 개다가 비오다가 했다. [양력 11월 10일] |
42 | 일찍 능성(화순군 능주면)에 이르러 최경루(最景樓)에 올라가 연주산(連珠山)을 바라보았다. 이 고을 원이 술을 청했다. 그래서 잠깐 취하고서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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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9월 22일 (을묘) 맑다. [양력 11월 11일] |
44 | 아침에 각가지의 죄를 논란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이양원(화순군 이양면 이양리)에 이르니,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먼저 와 있었다. 내가 가는 것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청하므로 그와 함께 이야 기했다. 저물어서 보성군에 이르니 몸이 몹시 고단하여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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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9월 23일 (병진) 맑다. [양력 11월 12일] |
46 | 머물렀다. 나라제삿날(太祖의 神懿王后 韓氏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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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9월 24일 (정사) 맑다. [양력 11월 13일] |
48 | 일찍 떠나 병사 선거이(宣居怡)의 집에 이르니, 선거이의 병이 매 우 중태였다. 염려된다. 저물어서 낙안에 이르러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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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9월 25일 (무오) 맑다. [양력 11월 14일] |
50 | 색리 및 선중립(宣仲立)의 죄를 논란했다. 순천에 이르러 순천 부사와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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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9월 26일 (기미) 맑다. [양력 11월 15일] |
52 | 일이 있어 더 머물렀다. 저녁에 순천부의 사람들이 소고기와 술을 차려 놓고 나오기를 청했다. 굳이 사양했으나 부사(府使)의 간청으로 잠깐 나가 마시고서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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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9월 27일 (경신) 맑다. [양력 11월 16일] |
54 | 일찍 떠나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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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9월 28일 (신유) 맑다. [양력 11월 17일] |
56 | 남양 아저씨의 생신이라 본영으로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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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9월 29일 (임술) 맑다. [양력 11월 18일] |
58 |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으로 나가 공문에 관인을 찍었다. 종일 앉아서 사무를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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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 9월 30일 (계해) 맑다. [양력 11월 19일] |
60 | 옷 담아 둔 농을 꺼 내어 둘은 곰내로 보내고, 하나만 본영(여수) 에 남겨 두었다. 저녁에 선유사(宣諭使)의 군관 신탁(申省)이 와서 군사들을 위하여 위로연을 베풀 날짜를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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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병신년 10월 (1596년 10월) |
1 | 10월 초1일 (갑자) 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불다. [양력 11월 20일] |
2 |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고 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신 사과(司果)가 임시로 살고있는 집에 들어가서 몹시 취하여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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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0월 초2일 (을축)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1월 21일] |
4 | 배를 다니게 할 수가 없었다. 청어 잡은 배가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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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0월 3일 (병인) 맑다. [양력 11월 22일] |
6 | 배를 돌려 어머니를 모시고 일행과 더불어 배를 타고 본영(여 수)으로 돌아와 종일토록 즐거이 뫼시었다. 이 날도 다 갔는데, 흥양현감이 술을 가지고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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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10월 4일 (정묘) 맑다. [양력 11월 23일] |
8 | 식사를 한 뒤에 객사 동헌에 앉았다가 일어나 종일 공무를 봤다. 저녁에 남해현령이 오면서 그 첩을 데리고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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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10월 5일 (무진) 흐렸다. [양력 11월 24일] |
10 | 남양 아저씨 집안에 제사라 일찍 부르기에 갔다가 왔다. 남해 현령과 함께 이야기했다. 비 올 징조가 많다. 순천부사는 석보창 (여천시 석창)에서 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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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0월 6일 (기사) 바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11월 25일] |
12 | 이 날은 잔치를 차리지 못하고 이튿날로 물리었다. 저녁나절에 흥양현감․순천부사가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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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0월 7일 (경오) 맑고 따사했다. [양력 11월 26일] |
14 | 일찍 수연을 베풀고 종일토록 즐기니 참으로 다행이다. 남해현감 은 그 선대의 제삿날이어서 먼저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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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10월 8일 (신미) 맑다. [양력 11월 27일] |
16 | 어머니께서 몸이 편안하시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순천부사와 작별의 잔을 나누고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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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10월 9일 (임신) 맑다. [양력 11월 28일] |
18 | 공문을 처리해 보냈다. 종일 어머니를 모셨다. 내일 진중(한산도?)으로 들어갈 일로 어머니께서는 많이 서운한 빛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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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10월 10일 (계유) 맑다. [양력 11월 29일] |
20 | 어머니께 절하고 하직했다. 한밤 한 시쯤에 뒷방으로 갔다가 밤 두 시쯤에 수루의 방으로 돌아왔다. 정오에 아뢰고 나갔다. 오후 두 시쯤에 배를 타고 바람따라 돛을 달고 항해하면서 밤새도록 노를 재촉하여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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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10월 11일 (갑술) 맑다. [양력 1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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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 1596년(병신) 10월 11일 뒷 장에 7장에 걸쳐 나와 있는 자료이다.) |
23 | 10월 초9일 진무성(陳武晟)이 청어 4300 두름을 싣고 왔다. 1596년(병신) 9월 29일 을미(임진년 기간에 9월 29일의 간지가 을미인 날이 없음)에 대를 베어서 다시 계산하니 91부가 창고안에 들어 있었다. 1596년(병신) 5월 23일에 상품의 큰 대 30개, 다음 대 60개, 중치 대 60개 모두 150개를 박옥․옥지․무재 등이 받아다 만들어 바쳤 다. 계납할 물건 안에 기름 먹인 종이 비옷 100자, 기름 먹인 종이 20자, 만장할 종이 100자, 보통 종이 15권, 흰종이 2권. 1596년(병신) 3월 초6일에는 육냥궁(六兩弓) 6장에서 뽕나무로 만 든 활 6장에서 1장은 울궁(蔚弓)이고 세궁(細弓)이 2장이다. 1596년(병신) 9월(日은 月의 오기인 듯) 30일(日이 없음) 온전한 것 안에서 공히 109이고 쓸만한 것이 50으로 모두 3통 29이다. 2월 26일 큰대, 중치 대로 상품이 57개이다. 고기를 잡아서 양식을 대는 데, 임달영(任達英)은 제주의 농사짓는 소를, 송한련(宋漢連) ․갑사 송한(宋漢)․ 송성(宋晟)․ 이종호(李宗浩)․ 황득중(黃得中)․ 오수(吳壽)․ 박춘양(朴春陽)․ 류세충(柳世忠)․ 강소작지(姜所作只)․ 강구지(姜仇之)에게 아울러 포상하였다. 계향유사로 곡식바치는 참봉(종9품) 조응복(曺應福)․벼슬하지 않은 선비 하응문(河應文)․ 류기룡(柳起龍)이 같이 힘을 썼고, 정(正) 김덕린(金德麟), 대구훈 정 김계신(金繼信), 창신도 감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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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1월 기록에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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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월 기록에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