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친구 금포는 성산별곡(星山別曲) 비문(碑文)을 탐방하고 이어서 우리 일행을 식영정(息影亭)으로 안내하였다. 식영정(息影亭)은 경관이 트인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루에는 성산별곡(星山別曲), 식영정기(息影亭記), 고경명(高敬命) 식영정(息影亭) 20영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가이드는 식영정(息影亭) 이름을 지은 사연과 식영정(息影亭) 20영에 대하여 음미하여 보자고 했다.
식영정(息影亭) 마루에 앉으니 사방이 잘 보였다. 참으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왼쪽은 무등산의 천왕봉부터 산맥이 뻗어내려 광주호의 수문에 와 있었고, 잔잔한 광주호의 푸른 물은 정자의 바로 코밑까지 와 거울 같이 반짝이었다.
이곳은 무등산과 광주호 등 소나무 고목과 배롱나무가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어 한 층 자연환경과 잘 어울려 뛰어난 조화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성산별곡에 나오는 자미탄,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 등 모두가 광주호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기자기한 맛은 없지만 광활해서 시원스러운 맛이 있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경승지라 했다.
이(식영정) 정자를 보면 다음과 같은 김성원(金成遠) 내외가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김성원 : 여보! 임자는 내가 살아가는데 금은보화보다도 더 좋은 보배요. 임자와 같은 보배를 주신 장인 어르신께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좋을까요?‘
임자가 우리 가정의 행복을 창조하게 하여주신 장인 어르신께 무엇으로 보답해 드릴까요?
임자를 볼 때마다 장인 어르신은 하늘같이 고마운 분이시라는 생각을 해요.
장인 어르신께서 담양부사 임기와 동시에 퇴임하시는 날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어떻게 모시는 것이 좋을까요?
나에게 풍류의 멋을 맛보게 가르쳐 주신 장인 어르신께 어떤 일이 좋을까요?
하늘 높이 서석대(瑞石臺)를 집으로 삼아 한가롭게 들랑거리는 구름을 볼 수 있고
사시사철 창계천의 흐르는 물이 자미탄(紫薇灘)과 노자암(鸕鶿巖)에서 즐겁게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고,
은빛모래섬인 방초주(芳草州)의 화려한 꽃들이 품어내는 향긋한 향을 맡을 수 있고,
낚싯대를 담그고 세상사를 다시 돌아보는 조대(釣臺)를 굽어 볼 수 있고,
푸르름이 넘치는 아름드리 송림 사이에 울긋불긋 배롱나무 꽃으로 수를 놓고 부용당 연꽃의 진한 향이 코를 찌르는 언덕에 아담한 정자를 지어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김성원의 아내 : 참으로 좋은 생각이요! 어쩌면 그렇게도 훌륭한 생각을 하셨소! 참으로 고맙소! 정자는 어떻게 지을 생각이시오.
김성원 : 정자는 자연석으로 기단을 약간 높게 쌓고, 그 위에 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세우고, 규모는 단층집으로 앞에서 보았을 때나 옆에서 보았을 때나 모두 2칸이고, 지붕의 모양은 옆에서 보았을 때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이 되게 할 것입니다.
건물의 서까래 등 목재는 선조의 할아버지들처럼 휘어진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친화적인 멋을 살리겠습니다.
봄, 여름, 가을에도 마루에서 무등산 상봉과 주위 경관을 모두 볼 수 있게 가운데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는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깔 생각이오.
김성원의 처 : 당신이 친정아버지 까지 챙겨주시니 참으로 감사하오. 어쩌면 그렇게도 친정아버지의 취향(趣向)을 잘 아시고 가장 좋아할 선물을 드리는 것이오! 친정아버지께서는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김성원 : 임자 부끄럽소. 장인 어르신께서 나에게 임자를 주신 것에 비하면 천분의 일도 안 되는 것이오.
김성원의 처 : 여보!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당신이 고마워서 하늘처럼 느끼고 있는데 또 친정아버지까지 정성으로 보살펴주시니 너무너무 고맙소.
김성원은 아내와 이런 대화 끝에 정자를 지어 장인이신 임억령(林億齡)께 드리고 정자의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다. 그랬더니 임억령(林億齡)은 다음과 같은 식영정기(息影亭記)란 글을 남겼다. 식영정은 안내판에서 본 봐와 같이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75-1번지에 있는데 1560년 서하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을 위하여 지었던 정자로서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석천은 정자의 이름을 장자 제물편에 나오는 식영 곧 '그림자를 끊는다.'는 말로 내걸었다.
*식영정기(息影亭記)
김성원(김군강숙)은 내 사위(친구)다. 金君剛叔吾友也(김군강숙오우야). 그는 푸른 물이 흘러가는 개울 위의 언덕은, 乃於蒼溪之上(내어창계지상), 싱싱한 소나무가 우거졌는데, 寒松之下(한송지하), 그곳에 터를 잡아, 得一麓(득일록), 아담한 정자를 지었다. 構小亭(구소정). 사방 모퉁이에 기둥을 세우니, 柱其隅(주기우), 그 안은 활동할 만한 공간이 생겼다. 空其中(공기중).
지붕은 흰색의 띠 풀 이엉으로 덮었고, 苫以白茅(점이백모), 처마는 훤히 열려 보기에 시원스럽고, 翼以凉簟(익이량점), 먼 곳에서 보면 깃털로 덮은 꽃배 같은데, 望之如羽盖畫舫(망지여우개화방), 나에게 쉴 곳으로 준다는 것이다. 以爲吾休息之所(이위오휴식지소).
그리고 사위가 날 선생님이라 부르며 정자이름을 지어 주라고 하여, 請名於先生(청명어선생), 선생인 나는 말하기를, 先生曰(선생왈), 자네는 자연(自然)과 무(無)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중국 장자(莊子)의 말을 들은 일이 있는가? 汝聞莊氏之言乎(여문장씨지언호)?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周之言曰(주지언왈),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었는데, 昔有畏影者(석유외영자), 이 그림자를 떼어내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달리고 나서 뒤를 돌아보면, 走日下(주일하), 여전히 빨리 뛰면 뛸수록 더 빨리 쫓아오고, 其走愈急(기주유급),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쫓아와서 끝끝내 뒤만 쫓아와서, 而影終不息(이영종불식), 너무도 숨이 막혀 나무그늘 아래로 숨었더니, 及就樹陰下(급취수음하), 그림자는 갑자기 쫓아오지 않았다. 影忽不見(영홀불견).
그림자란 놈은 언제나, 夫影之爲物(부영지위물), 그 주인이 움직인 대로 하나도 빼지 않고 따라서 흉내를 내는데, 一隨人形(일수인형), 주인이 몸을 꾸부리면 꼭 그대로 따라서 꾸부리고, 人俯則俯(인부측부), 주인이 머리를 쳐들고 보면 꼭 그대로 따라서 쳐들고 본다. 人仰則仰(인앙즉앙).
기타 주인의 모든 행동도 따라서, 其他往來行止(기타왕래행지), 그림자란 놈은 꼭 그대로 흉내 낸다. 唯形之爲(유형지위). 그늘진 곳이나 밤에는 없어지고, 然陰與夜則無(연음여야즉무), 밝은 때나 낮이면 생겨나는데, 火與晝則生(화여주즉생),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은신하는 것도, 人之處世(인지처세), 역시 이와 같다. 亦此類也(역차류야).
옛말에, 古語有之曰(고어유지왈), 꿈에 본 환상과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夢幻泡影(몽환포영), 인생의 태어남도 아주 미미한 것이다. 人之生也(인지생야).
사람은 자연이 만들어낸 물건이므로, 受形於造物(수형어조물), 자연이 사람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것이, 造物之弄戱人(조물지롱희인), 어찌 그림자의 주인과 그림자에만 관계되겠는가? 豈止形之使影(기지형지사영)
그림자가 일천 번 바뀐다는 것은, 影之千變(영지천번), 그림자 주인의 바뀜이 일천 번이었다는 현상, 在形之處分(재형지처분), 이와 같이 사람의 생활도 일천 번 바뀌었다면, 人之千變(인지천변), 이것도 자연의 인과응보의 원리와 같은, 亦在造物之處分(역재조물지처분), 것으로 사람은, 爲人者(위인자), 언제나 순리에 따라 근엄하게 움직일 뿐, 當隨造物之使(당수조물지사), 나 자신은, 於吾(어오), 자연에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何與哉(하여재)!
아침에 재벌이던 사람이 저녁이 되면 거지가 될 수도 있고, 朝富而暮貧(조부이모빈), 옛날에는 귀한 대접을 받던 사람이 오늘 경멸하는 대접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은, 昔貴而今賤(석귀이금천), 모두 만물을 만들어낸 자연이, 皆造化兒(개조화아),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고 망치를 휘둘러 만들어낸 일과 같은 것이다. 爐錘中事也(로추중사야).
내 한 몸이 살아온 과거를 살펴보더라도, 以吾一身觀之(이오일신관지), 옛날에는 위엄 있는 관에 큰 띠를 두르고, 昔之峩冠大帶(석지아관대대), 금마옥당인 왕립학술기관을 출입하였는데, 出入金馬玉堂(출입금마옥당), 지금은 대나무 지팡이에 짚신신고, 今之竹杖芒鞋(금지죽장망혜), 푸른 소나무를 벗하여 하루하루를 조용히 거닐면서 보내는 모습은, 逍遙蒼松白石(소요창송백석), 마치 소반에 가득한 맛있는 음식을 다 버리고, 五鼎之棄(오정지기), 표주박 하나에 된장찌개로 만족하고 있는 모습이다. 而一瓢之甘(이일표지감).
조정에서 임금을 섬기는 높은 대신들과 기름지고 살진 음식을 모두 끊고, 皐䕫之絶(고기지절), 사슴과 함께 자연 속에서 지내고 있다. 而麋鹿之(이미록지반).
이것은 모두 자연이 나를 마음대로 갖고 놀고 있지만, 此皆有物弄戱其間(차개유물롱희기간), 나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지내고 있을 뿐, 而吾自不之知也(이오자불지지야), 이런 상황에서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성내고, 화내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노여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有何喜慍於其間哉(유하희온어기간재)!
성원이 말하기를, 剛叔曰(강숙왈), 사람과 그림자의 관계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라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影則固不能自(영즉고불능자), 선생님의 경우는, 爲若先生(위약선생), 움츠리고 펴는 모든 것을 선생님이 선택하였을 뿐, 屈伸由我(굴신유아), 세상이 버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非世之棄(비세지기)?
성인같이 밝은 임금을 만나 정치하기에 아주 좋은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遭聖明之時(조성명지시), 스스로 자기 잘함을 숨기고 자기 흔적을 감추는 것은 스스로 하신 일이지, 潛光晦迹(잠광회적), 인과응보와는 아무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無乃果乎(무내과호)!
선생인 내가 이에 응답하기를, 先生應之曰(선생응지왈), 순리로 흐르면 앞으로 나아가고, 乘流則行(승류즉행), 웅덩이를 만나면 머물러 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得坎則止(득감즉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고, 行止非人所能(행지비인소능), 내가 이 외진 숲 속으로 들어온 것도, 吾之入林天也(오지입림천야), 꼭 한 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非徒息影(비도식영).
내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吾冷然御風(오냉연어풍), 자연과 함께 어울리어, 與造物爲徒(여조물위도),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닐면서, 遊於大荒之野(유어대황지야), 그림자를 없애고 있다고 해도, 滅沒倒影(멸몰도영),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도 않고 손가락질도 하지 않을 것이니, 人不得望而指之(인부득망이지지), 식영(息影)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名以息影(명이식영), 좋지 않겠는가? 不亦可乎(불역가호)?
성원이 말하기를, 剛叔曰(강숙왈), 이제야 비로소 선생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今始知先生之志(금시지선생지지). 청하옵나니 그 말씀을 바탕으로 글을 써주십시오 하므로, 請書其言(청서기언), 그 청에 응하였다. 以爲誌(이위지). 계해 7월 일 하의도인 임억령(林億齡)은 쓰다. 癸亥七月日 荷衣道人(계해칠월일 하의도인). 식영정은 성산에 있다. 息影亭在星山(식영정재성산).
가이드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식영정(息影亭)이란 공직에서 물러난 육신인 임억령(林億齡) 자신이 그림자로 쉬는 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식영정(息影亭)은 식영정기에서 본 봐와 같이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憶齡)에게 증여한 것이었다. 이 말은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행장(行狀)에 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경신공 36세 축 서하당우 창평지 성산 위종노계)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임억령에게 정자가 생기자 시문(詩文)을 좋아하던 선비들이 모여들게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496~1568),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1525~1597), 제봉(齊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 네 사람을 ‘식영정(息影亭) 사선(四仙)’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성산(星山)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 20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다. 다음은 식영정에 편액되어 걸려있는 고경명(高敬命) 식영정 20영(息影亭二十詠)이다.
아주 고요하고 아늑한 산골에서 신선이 놀고 있는 모습은 마치 은은한 옥으로 만든 단지 속에서 노는 것 같네. 여기를 선유동이라고 이름 지으신 분은 누구시지요? 임억령이란 바로 그 노인이올시다.
필자의 친구 금포는 이상과 같이 제봉 고경명의 식영정 20영에 대하여 안내하였다. 식영정이 왜 경승지인지를 설명해 주는 참으로 멋있는 한시들이었다. 고경명은 당시 중국사신단을 맞이하는 접반사의 일원이 되어 한시를 주고받는 실력을 갖춘 선비로 작품마다 특이한 한문을 사용하여 중국사신도 감탄했다고 했다. 석천 임억령은 담양부사(1560)를 물러난 뒤 김성원이 있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등과 자주 시회(詩會)를 열었다. 식영정 20영도 이때의 시회 시제이며, 운은 둘째 줄 끝 글자와 넷째 줄 끝 글자라 했다. 고경명과 임억령이 쓴 서석한운(瑞石閑雲)에서 찾아보면 알 수 있었다.
무척 마음이 편안하고 한가롭구나! 서석산 마루에 걸쳐 있는 저 구름 잠깐 두둥실 날더니 어느새 사라져 숨어 버니네. 만사 제쳐놓고 구름처럼 날아다니며 춤추는 자 누구일까? 아! 보고 또 보아도 싫지 않구나!
임억령, 고경명의 시제는 다 같이 瑞石閑雲(서석한운) 이고 운은 둘째 줄의 끝 자 斂(염)과 넷째 줄의 끝 자 厭(염)이었다. 이곳 식영정은 조선 시대 문사들의 출입이 잦았던 열린 공간으로 여기에 출입한 인물은 이황ㆍ이이 등을 비롯하여 김인후ㆍ기대승ㆍ백광훈ㆍ송익필 등 대부분이 당대의 명사들이라고 했다. 식영정과 관련된 시문으로는 석천의 식영정이십영 원운과 정철ㆍ고경명ㆍ송순ㆍ김성원 등이 이에 차운한 총 백수의 식영정 제영과 송강의 성산별곡을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을 수 있다고 했다. 필자의 친구 금포는 임억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안내하였다.
*임억령(林億齡1496∼1568)
임억령(林億齡)은 전남 해남군 동문 관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선산(善山)이고, 이름대신 부르는 자(字)는 큰 나무라는 대수(大樹)이고, 고상하고 멋이 있는 이름인 호(號)는 흐르는 넷 물속에 있는 깨끗한 돌인 석천(石川)이다. 20세에 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은 진사가 되었고, 29세에 과거시험인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과 같은 홍문관내의 부교리, 지금의 검찰인 사헌부지평, 임금이 정치를 잘 못하였을 때 시정을 권하는 사간, 임금의 명령 초안을 만드는 전한, 세자의 선생님인 세자시강원설서 등 여러 직위에 임명되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백령(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뒤 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서 은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1552년 왕의 출납을 맡은 동부승지, 오늘날의 국방부차관인 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오늘날의 지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오늘날의 광역시장)가 되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문장(文章)과 시가(詩歌)인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당시의 현인들이 존경하였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祭享: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