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31 오순절 후 여덟 번째 주일
https://cafe.daum.net/znzdkzkepal/1qvN/832 김진성
https://cafe.daum.net/rnjstlgur/9oZ8/117 권시혁
예배로 부름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할지어다. 할렐루야(시106:47-48)
예배 기원
할렐루야! 나의 힘이 되시며 반석과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만세 전부터 저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정하여 주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의롭게 하사 구원하여 주셨사오니 크신 사랑과 온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자녀들을 사랑하여 주옵소서.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주님의 자비하심을 보이시며, 확신이 없는 자에게 주님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심령이 깨끗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깨끗하심을 보여주옵소서.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올려드리오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68장) / 위에 계신 나의 친구(92장) / 이 세상 끝날 까지(447장) 내 평생 소원 이것뿐(450장) / 저 높은 곳을 향하여(491징)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492장)
고백의 기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 저희를 십자가 보혈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에게 아름다운 교회를 허락하여 주시고, 좋은 목자를 만나게 하시며, 신실한 교우들과 더불어 한 소망을 품고 한 분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 소중한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바르게 섬기지 못했고, 이익과 친분을 따라 당을 지어 행동했으며, 주님께서 세우신 목자의 음성을 거역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교우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어 아픔을 주며, 믿음이 연약한 교우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영광의 자리에는 앉으려 하였으나 그에 상응하는 헌신은 감당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교우들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며 정죄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이 모든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0731 염려를 퇴치하는 법. 마6:24-34.
☞ 마음 문을 열고
“염려하지 말라.” 이 말이 듣기는 좋아도 실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인간의 두뇌 구조가 아예 ‘자동 염려’로 짜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뇌는 본래 ‘걱정을 만들어내는 기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뇌의 작동을 멈추지 않는 한 걱정을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고민 치료 전문가 데이비드 카보넬도 우리의 뇌에는 걱정을 끄는 스위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걱정은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체념하고 ‘걱정과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라’라는 말입니다. 걱정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의 일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염려와 친하게 지내라고 합니까, 아니면 염려를 물리치라고 합니까? 예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본문 25절에서 분명하게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예수께서는 두뇌의 구조상 어쩔 수 없으니 염려를 없애려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염려는 아무리 쫓아내어도 달라붙는 모기와 같으니 쫓아내려고 하지 말고, 걱정 모기와 친구처럼 잘 지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셨습니다.
1. 생각의 경중을 가리십시오.
그러면 염려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걱정을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28절에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하여 보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철저하게 배우다’, ‘세심하게 조사하다’, ‘깊이 고려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길은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생각을 깊이 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생각을 깊이 하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생각을 깊이 하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파괴적인 생각,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하지 말고, 건설적인 생각, 해야 할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말고, 반드시 해야 할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걱정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이미 들어와 있는 걱정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을 반드시 하지 말고, 어떤 생각을 반드시 해야 할까요?
먼저, ‘반추’하거나 ‘걱정’하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추란 주로 부정적인 과거를 되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그때 왜 그렇게 이야기했지?’ 이런 식으로 불행한 지난날을 곱씹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일단 반성하고 회개한 후에는 그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곱씹을 필요가 없는 부정적인 언행을 곱씹어 우울해지는 것이 반추입니다.
2016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국 국민의 건강 행태와 정신적 습관의 현황과 정책 대응’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국민 10명 중 9명은 부정적인 정신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 국민 1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90.9%가 인지적 오류, 82.4%가 반추, 70.8%가 걱정 등 부정적 정신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추가 과거 지향적이라면 걱정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지? 교육비는 어떻게 충당하지?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 결혼을 못 하면 어떻게 하지? 취업을 못 하면 어떻게 하지? 등등. 앞당겨 고민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반추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고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대한 파괴적인 생각과 미래에 대한 파괴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파괴적인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창조주를 생각해야 합니다.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 중 한 주인을 섬기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맘몬) 중 어느 쪽을 더 중히 여기십니까?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면, 부자의 경우 땅에 쌓아두기 위해 ‘더, 더, 더!’ 원하는 탐욕에 빠집니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에는 의식주와 세상살이에 관한 걱정에 빠집니다.
그런데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기 때문에 탐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땅에 쌓아둔 재물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면 재물이 부족해도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섬기면 탐욕으로부터도 자유롭고, 걱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25절에 보면 예수께서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목숨이 음식보다 더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더 중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음식보다 목숨, 의복보다 몸이 더 중하다는 생각, 즉 경중 가리기를 하면 걱정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청중에게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을 구분해 생각하라고 이끄십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더 소중한 생명을 주셨다면, 하물며 덜 소중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덜 귀한 새도 돌보신다면, 하물며 더 귀한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음식의 경우 새를 통해(26절), 의복의 경우 백합화를 통해 (28절) 교훈하십니다.
그런데 26절과 28절 사이 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수사의문문은 답이 명백한 질문입니다. 아무도 염려로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키’는 ‘수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키든 수명이든 지향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염려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28~30절에서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백합화는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입히십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도 백합화만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훨씬 더 못한 풀도 입히시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입을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눈으로 경중을 가리는 생각을 하면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창조주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덜 귀한 새와 백합화도 먹이시고 입히시거든 하물며 우리겠습니까?
2. 믿음의 생각을 하십시오
예수께서는 30절 끝에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염려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과 염려는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강하면 염려가 적고, 믿음이 약하면 염려가 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시고, 우리 삶의 주인이시라는 믿음이 강하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심리 치료는 걱정을 쫓아내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늘 ‘하늘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를 의지할 때 걱정이 사라집니다. 예수께서는 ‘심리 치료’를 뛰어넘는 ‘믿음 치료’를 제시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 치료’입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 성실하게 일한 후에 잠자리에 누워 있어도 잠을 자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하고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나쁜 일이 마치 일어난 것처럼 가상적인 상황을 만들어 머릿속에서 자꾸 생각하면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놓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낄 때마다 우리가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걱정은 우리가 문제와 나누는 대화라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 34:19),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제거하시지 않고 그대로 두시는 이유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성화에 필요한 작업을 하시기 때문입니다(참조, 롬 5:3-5).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인내의 근육을 키우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인내하면 고난의 테스트를 통과하고 합격한 인격(연단)이 생깁니다. 우리의 인격이 고난의 테스트를 통해 합격할 때 어떤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품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실제적인 희망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고난 → 인내 → 인격 → 소망’이라는 사랑의 작품을 만드시기 위해 때로 우리에게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믿음으로 염려와 불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의 틀’을 끊임없이 채워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최우선에 두십시오.
염려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염려’라는 불신앙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창조주 ‘하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 일을 최우선으로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의식주의 모든 일도 잘 풀리게 해 주십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만왕의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최우선을 두고 모든 다른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다른 일도 잘 풀리게 해 주십니다.
또한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는 천국을 최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최우선에 두고 해야 합니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추구하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선한 통치에 대한 기대와 함께 평화와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삶의 모든 일에 대해 염려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미 우리 삶의 위대한 측면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나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 해결과 사회적 지위 확보가 위대한 삶을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고 영원한 삶을 희망하는 등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위대한 삶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의 목적을 놓치면 놓치는 만큼 세상의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 중심의 위대한 삶의 목적을 붙잡으면 붙잡는 만큼 세상의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예수께서는 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예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의식주와 세상살이 문제로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세상 걱정으로 에너지를 낭비해서 천국을 확장할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삶의 모든 분야에서 ‘하늘 아버지’의 의로운 통치를 받게 하심으로 세상살이의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천국 확장에 뛰어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당연히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져서 염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걱정, 근심, 염려로부터 쉼을 주려고 부르십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께로 나아가서 천국 왕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 순간 배우고 순종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고난 중에도 걱정, 근심, 염려부터의 쉼을 주십니다.
4. 염려를 가불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신 후에 34절에서 마지막으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시고 천국 왕이시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최선으로 받으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접속사입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내일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하지 말고 현재의 일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R. C. 스프로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해결책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를 믿고 천국 왕의 통치를 받는다고 해도 ‘괴로움’(trouble)은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괴로움’에 올바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괴로움’은 고통에 대해 고민하는 괴로움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고통 그 자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라고 하셨습니다(요 16:33). 우리가 고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친히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 주 예수께서 고통의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고통의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고통 중에도 걱정 근심에 빠지지 않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로 이기게 하시되 고난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고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이 희망을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롬 5:3-5).
더 넓게 보면, 예수 재림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현세이고 그 이후는 내세입니다. 현세의 특징은 고난이고, 내세의 특징은 영광입니다. 우리는 현세의 고난과 가히 비교할 수 없는 내세의 영광을 보장받고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롬 8:18), 현세의 고난에 대해서 바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현세의 고난에 대처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본문 34절 말씀대로 내일의 고난을 가불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필요할 때 월급을 가불할 수는 있지만, 내일의 고난을 미리 앞당겨 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봉급은 가불해도 고난은 가불하지 마십시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34절).
내일의 고통은 내일 가서 겪으면 됩니다. 고난에 관한 한 하루 단위로 살면 됩니다. 아무리 힘든 일도 하루는 견딜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와 늘 함께하시기 때문에 고통에 관한 한 하루 단위로 살면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은혜로 잘 지나왔다’라고 고백하면 됩니다. 미국 대사 드와이트 모로와 그의 아내가 영국 러그비에 갔을 때 겪은 일입니다.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매고 있을 때 모로는 자신의 삶에 중요한 원리로 들어갈 만한 하나의 사건을 만났습니다.
모로는 지나가는 한 소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줄 수 있겠니?”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식품점에서 우회전해서 가시다가 두 번째 거리에서 좌회전하세요. 그러면 사거리가 나옵니다. 거기 가서 또 물어보세요.”
모로의 전기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이 대답이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는 상징이 됐다.
첫째, 인간 지성의 능력에 관한 현실적 회의주의.
둘째, 조금씩 가면 반드시 된다는 객관적 교훈.
셋째, 끝이 불확실할 때 올바른 방향으로 조금씩만 가면 된다는 비유.
☞ 맺음말
걱정, 근심, 염려는 모기 같아서 쫓아내면 이내 다시 달라붙습니다. 그래도 염려와 친하게 지내겠다는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려 해도 염려는 정신 에너지를 갉아먹어 풍성한 인생을 망치는 원수기 때문입니다.
미국 남침례교의 저명한 목회자 찰스 스탠리는 “미지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여러분 앞과 옆에 예수의 발자국을 발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예수께서는 왕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동행함으로써 염려에서 벗어나 활기차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