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天命의 수필사적 위상과 작품세계
1. 시작하는 말 그리고 그는 "시인으로서의 그와, 수필가로서의 그의 수준이 거의 같"을 뿐만 아니라 "후일에 구안자(具眼者)가 있어 우리 현대수필문학사를 쓴다면 우리 현대시사(詩史)에 있어서의 金素月의 위치에 해당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평가를 토대로 본고는 노천명의 수필사적 위상과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해 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2. 1940년대 문단의 시대적 특색 이러한 일련의 작품 활동과 출판 연대로 보아, 노천명의 전성기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40년대 전후 공간은 바로 그 중심축이 되는 시기어서, 노천명의 인간과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1940년대의 문단적 배경부터 조명해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1940년대 전후 공간은 우리 문단사에서 특기할 만한 시대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노천명이 첫 시집을 냈던 1938년경의 정치적 배경을 보면, "이 때는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확대일로에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기치 아래 일제의 수탈이 더욱 강화되면서 전국적으로 병참기지화가 추진되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일본 군국주의 당국자들은 전쟁 초기의 승리에 취해 있었으며, 식민지의 선각자 및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국제정세를 들어 부일(附日) 협력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이 길이 조선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던 때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부응하여 조선 문단에서는 1939년 2월 학예사(學藝社)의 林和, 인문사(人文社)의 崔載瑞, 문장사(文章社)의 李泰俊이 주동하여 황군위문작가단(皇軍慰問作家團)을 구성하는 한편, 같은 해 10월 20일에는 李光洙 . 鄭芝溶 . 金起林 . 李泰俊 . 金素雲을 비롯한 30명이 발기하여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10. 29)를 결성한다. 이 협회의 창립 목적은 이 날 회장으로 추대된 이광수의 취임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에 있"으며, "반도문단(半島文壇)의 새로운 건설은 내선일체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이렇게 문인들의 친일 활동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던 이 시기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패배주의와 허무주의가 팽배했고, 이것은 역설적으로 조선 예술 및 문화의 이상개화(異常開花) 현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현실주의적인 좌절이 예술 및 문화로 기울어지게 했다고도 추론할 수 있는데, 이 무렵에 순문예지인《文章》(1939)이 창간되고, 노천명의 시집《珊瑚林》이 나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1940년대는 1945년을 기점으로 그 전반은 총독정치가 최악에 달해 나약한 지식인들이 지조를 꺾을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시기이고, 그 후반은 해방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선택과 충돌이 극심했던 혼란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8 . 15 해방이 오자 어떠한 사회단체나 정치단체보다도 제일 먼저 간판을 내건 것이 문화단체였다." 1945년 8월 16일, 표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전예술계를 공산당에 예속시키기 위해 林和 . 李泰俊 . 金起林 . 金南天 . 李源朝가 주동하여 한청(韓靑) 빌딩에 문학건설총본부(文學建設總本部)(약칭 文建)라는 간판을 내건다. 이 단체는 비슷한 성격을 가진 음악건설총본부 . 미술건설총본부 . 영화건설총본부와 연합하여 문화건설중앙협의회(서기장 : 林和)라는 연합체를 만든다. 그러나 李箕永과 宋影같이 처음부터 공산주의적 문화 이념을 표면에 내세우기를 주장한 열성분자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전국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약칭 藝盟, 9. 17)을 발족시킨다. 그러나 이 두 단체는 남로당의 통합 지령을 받고, 좌익 문화운동의 통일전선을 확립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후, 문학가동맹(위원장 : 洪明熹, 1945. 12. 26)으로 통합하게 되는데, 이 단체는 다시 1946년 2월에 열린 전국문학가대회를 통하여 조선문학가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승인을 받게 된다. 한편 이들 좌익계에 대항하는 최초의 민족진영 또는 자유진영에서는 1945년 9월 8일 조선문화협회를 발족하게 되는데, 이 단체는 같은 해 9월 18일에 중앙문화협회로 개칭을 했으나, 문학 활동보다는 반탁운동과 李承晩 박사의 정치 활동을 지원하는 일에 더욱 주력을 했다. 이 협회가 주동하여 1946년 3월 13일, 전국문필가협회를 결성하지만 활동은 역시 미약했고, 여기에서 다시 청년문학가협회가 생겨나게 된다. 문단의 좌우익 투쟁이 극심했던 8 . 15 직후에는 문인들에게서 순수한 문학 활동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론적인 무장 아래 항상 공격적이고 도전적이었던 공산주의문학의 물결을 막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신의 창작적 의욕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자 시분과 위원장이기도 한 金起林은 정치와 시의 적극적인 결합을 주장했는데, 鄭芝溶도 이에 합세하여 이들은 "시의 이념화, 또는 시의 정치도구화 방향에 참여하였고, 그 지향 자체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에 동참한다는 명분으로 합리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한편 순수문학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金東里 . 金光均 . 趙演鉉 . 趙芝薰이 있는데, 조지훈은 <순수시론>을 통하여 "전인간적 공감성에 바탕을 둔 순수한 시정신을 지키는 길만이 시를 지키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金東里는 평론가 金東錫과 격렬하게 순수문학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광복 문단의 첫 과제가 문인의 자기반성"이었다고 한다면,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이 된 직후의 문단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친일 문인들이 사법적인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중에서도 李光洙와 金東煥은 가장 광적인 친일분자로 비판받았고, 崔南善 . 兪鎭午 . 金東仁 . 朱耀翰 . 毛允淑 . 白鐵 . 鄭寅燮 . 柳致眞 . 盧天命도 그들의 친일적 행적이 백일하에 폭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친일파, 즉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처단은 민족적 양심을 내세울 수 있을 만큼 당당하게 수행되진 못했다. 정부 수립 직후의 정치적 세력이 친일분자에 대한 처벌 문제에 미묘하게 간여하면서 여러 가지 충돌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1940년대의 문단은 그 전반기에는 친일이라는 불명예와 오점을 남겼고, 그 후반기에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구호적인 이념의 주장이나 단체적인 활동에 주력한 경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정부 수립이 되자《文章》이 속간(1948. 10)되고《文藝》가 새로 창간(1949. 8)되면서 다시 문인들의 창작 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6 . 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문학인들은 다시 한번 도강파(渡江派)와 잔류파(殘留派)로 갈라지면서, 동료 문인을 부역자(附逆者)로 단죄해야 하는 역사의 아픔을 겪게 된다. 그리고 李泰俊 . 鄭芝溶 . 金東錫 . 吳章煥과 같이 전쟁 이전에 월북하거나, 薛貞植 . 朴泰俊 . 尹泰雄과 같이 전쟁중에 월북한 사람, 李光洙 . 金東煥 . 金晉燮 . 朴英熙와 같이 공산당에 납치되거나, 洪九範 . 金乙允 . 金聖林과 같이 행방불명이 된 문인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은 1940년대 전후 문단의 크나큰 손실로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② 수필문학의 개화기와 수필사적 의의 尹五榮은 현대문과 아울러 수필문학의 발달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누었는데, 제 1기는 학자 . 언론인의 주도 밑에 국한문(國漢文) 혼용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기초를 닦은 시기요, 제 2기는 소설가들에 의해서 언문일체(言文一體)의 현대문이 확립된 시기이며, 제 3기는 문학가들의 문장에 의하여 우리 문장이 정착되기 시작한 시기라고 했다. 그리고 제 4기는 수필문학 태동기(胎動期)로 각자 문학적 문장을 구상하여 개성적인 문체를 세워보려고 노력한 시기로 李箱 . 李孝石 . 朴泰遠을 들었으며, 제 5기는 수필문학 개안기(開眼期)로 의식적으로 수필문학을 표방하고 나선 문인들의 활약이 눈부셨던 시기로, 그 대표적인 작가로는 김진섭 . 이양하 . 이태준 . 김용준 . 노천명을 들 수 있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그 동안 이태준과 김용준은 월북작가라 하여 작품이 공개적으로 소개되지 않아 왔었다. 그러다가 1988년 7월, 월 . 납북 문인들의 작품이 대대적으로 해금되는 조치가 단행되면서부터, 朴演求에 의해《近園隨筆》이 햇빛을 보게 된 후로, 최근에는 李泰俊의 수필집《無序錄》(博文書館, 1941. 9)과 金東錫의 수필집《海邊의 詩》(博文出版社, 1946. 4)도 그의 손으로 발굴하여 범우사에서 새로 출간케 한 것은 수필문단의 큰 수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태준의《無序錄》은 "어느 수필을 읽어보아도 치밀한 구성에 의해 씌어진 것 같지는 않"으나 "읽고 나면 가슴에 와 닿는 무엇이 있"는데, "바로 그 점이 그의 수필이 갖는 매력"이라 할 수 있으나, 소설과 수필의 장르적 구분이 모호하여 김용준만큼 확고한 수필관이 서 있지 못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김동석의 수필은 "한 편 한 편이 소시민의 '산보 철학'을 투영하고 있어서 오늘날 우리들이 즐겨 쓰고 있는 '생활수필'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의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평론과는 또 다른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매우 흥미를 끈다. 김진섭은 수필전문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개념은 극히 모호했고 문학을 하려는 사람으로서 자기 나라 문장의 소양(素養)이 부족했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생활인의 철학>이라는 글이 대표적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필에는 전연 생활의 모습은 제시되지 않은 채 관념으로만 일관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이양하는 "문장이 맑고 고우며 램의 문장을 목표로" 했기에, 그의 글은 다분히 탐미적이고 서구 지향적인 인상을 풍기나 작품의 수준은 소품에 머문다. 김용준은 "동양적인 고아한 품위와 운치를 주로 하며, 하나의 정서를 표현하려는 경향이 그의 화풍( 風)과 일치했으며" 풍자와 해학 속에는 애수와 비판이 들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양하가 자연을 시적인 상징성으로 의인화했다고 하면, 김용준은 어디까지나 산문정신에 충실하면서 언제나 인간을 주체로 삼은 점이 다르다. 노천명은 "우리 말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작가로서 "향토색 짙은 서정수필을" 썼는데, 그의 문장은 섬세하고 회화적이나 작품세계가 회고조로만 일관하여 그 폭을 스스로 좁힌 점이 아쉽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현대수필의 맥은 이태준 . 김동석 . 김진섭 . 이양하 . 김용준 . 노천명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노천명이 수필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순차적인 맥락으로서나 작품적 수준으로서나 그 당위성을 높이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3. 노천명의 인간과 수필세계 그의 정서는 회고적인 풍물이나 향수를 그릴 때 더욱 빛을 발하는데, 그런 회고적인 서정수필은 참으로 아름다운 분위기를 지닌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주제가 있는 수필이 갖는 무게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회고적 정서가 아름다운 수필들을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望鄕>에서 불태산 뾰죽한 메뿌리들이 둥글게 묻히도록 눈이 와 쌓일나치면 아버지는 친구들과 곧잘 노루 사냥을 떠나셨다. 그래가지고는 그제나 시방이나 몸이 약한 내게 노루 피를 먹이려고 하시는 통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랑에 나가 돈을 달라던 내가 온종일 아버지한텔 나가지 못하고 숨어서 상노애더러 아버지한테 가서 돈을 달래 오라고 울고 매달린 적도 있겠다. 어려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따랐다. 술을 못 하시는 아버지는 늘 사랑에 가 조용히 앉아서 골패를 떼시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겨울밤의 이야기>에서
앞벌 논가에선 개구리들이 소낙비 소리처럼 울어대고, 삼밭에선 오이 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마당 한 구퉁이에 범산넝쿨,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짜루 들어가 한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나, 또한 거기 다만 모깃불로만 쓰히는 이외의 값진 여름밤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름밤의 얘기>에서
金允植은 노천명의 산문이 "감정을 절제한 차디찬 시"와는 다르게 "극단적으로 유치하고, 물컹물컹하고, 정적이고 한마디로 감상적 소녀적"이라 했지만, 그의 수필은 시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절제되고 여과되어 있다. 감정의 절제는, 노천명에게는 문학적인 기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격적인 기질에 의한 듯이 보인다. 李泰俊도《山딸기》발문에서 "盧 여사는 시인이나, 정열이라 해서 쏠려 구가(謳歌)하기보다 넌즛이 사모하는 편이요 비애라 해서 얼른 절망하기보다 조용히 인종(忍從)하는 편"이라고 썼다. 또한 당대의 평단(評壇) 기수였던 崔載瑞도 노천명의 첫 시집《珊瑚林》을 평하면서 "공소(空疎)한 감정의 유희와 허영된 언어의 과장은 발견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은 시에 뿐만 아니라 수필에도 해당된다 할 수 있다. 金珖燮도 "天命은 정서를 범람시키지 않았다. 어디로 샐까봐 둑을 쌓으면서 구멍이 있을까 걱정하며 또 막았다. 이 소극성은 천명의 꿈에 절제를 주었다. 이 절제에서 오는 우아까지도 마치 슬픔의 집에 깔린 연한 비단결 같아서 때로는 그 무늬를 찢고 싶었으나 천명의 자유는 그렇지 못하였다"고 추모했다. 감정이 절제된 글은 오히려 짙은 여운을 남기게 되는데, 다음의 예문에서 방점 친(필자가 침) 부분을 보면 그 고독이 너무도 절절하게 숨겨 있음을 볼 수 있다.
눈이 내리는 성스러운 밤을 위해 모든 것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꽃 한 송이 없는 방안에 내가 그림자같이 들어옴이 상장(喪章)처럼 슬프구나. 창 밖에선 여전히 눈이 싸르르 싸르르 내리고 있다. 저 적막한 거리 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욱들이 흰 눈으로 덮여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누웠다. 회색과 분홍빛으로 된 천정을 격(隔)해 놓고 나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 -<雪夜散策>에서
노천명을 일러 고독의 시인이라 한다. 그 고독은 어쩌면 그의 성격과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이양하의 고독이 인형에로 치닫듯" 노천명의 고독을 "풍물(風物)의 방향에로 치닫"게 했는지도 모른다. 노천명의 수필에서 소재가 되는 것들은 지극히 작고 생활적이다. 그의 글에는 관념적인 소재가 없다. 목련 . 나비 . 소녀 . 친구 . 닭 . 집 . 눈〔 雪〕 . 산나물 . 참외 . 캘린더와 같이 체험 속에서 아주 구체적인 것들을 소재로 택한다. 그는 그 소재들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사물에 대한 정서를 자연스런 문장으로 또 꾸밈없이 그려 보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수필에는 주제가 무거운 글이 없다. 가벼워 자칫 신변잡기로 떨어질 수 있는 글들을 그는 아름다운 서정으로 문학성을 부여한다. 노천명의 수필 문장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구성의 작위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金晉燮처럼 한자와 생경한 언어, 비틀어진 문장과 현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말하듯 자연스러운 언문일치법(言文一致法)으로 꾸밈이 없는 소박한 어휘들을 즐겨 씀으로써 그의 문장에는 거치적거리는 옹이가 없다. 서정수필을 받쳐주는 문장으로는 이런 자연스러운 문장이 효과적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또한 그의 수필 문장은 섬세하고 회화적이다. 그래서 그의 수필을 읽고 있으면 마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시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예문을 들어본다.
뒤는 산이 둘려 있고 앞엔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여기서 윤선을 타면 진남포로 평양으로 간다고 했다. 해변에는 갈-밭〔蘆〕이 있어 사람의 키보다 더 큰 갈대들이 우거지고, 그 우엔 낭떠러지 험한 절벽이 깎은 듯이 서 있다. 아래는 퍼어런 물이 있는데 여름이면 이 곳 큰애기들은 갈-밭을 헤치고 이 물을 찾아와 멱을 감는다. 물속에서 헤염을 치고 놀다가는 산으로 기어 올라간다. 절벽을 극다듬어 올라가노라면 부엉이 집을 보게 되고, 산개나리꽃을 꺾게 된다. 산개나리를 한아름 꺾어 안고는 산 말랑에가 올라서서 멀리 수평선에서 아물거리는 감빛 돛폭을 보며 훗날 크면은 저 배를 타고 대처(大處)로 공부를 간다고 적은 소녀는 꿈이 많았다. -<鄕土有情記>에서
김장이 들어오고 보면 흔히들 거들어주러 집내에서들 모이겠다. 할머니, 아주머니 심지어는 동서들까지 모여들어 파, 마눌, 생강, 미나리, 청각, 낙지, 밤, 배, 실백, 표고며 느타리 이러이러한 양념감들이 벌어진 마당에선 바야흐로 아낙네들의 솜씨가 경쟁에 오르는 판이다. 행주치마들을 회동그렇게 둘른 뒤에 도마를 앞앞히 닥아놓고 속감 무채를 쓰는데 여기서부터 노마님과 젊은 마님, 작은댁 아씨와 큰댁 아씨의 솜씨는 드러나 은근히 시샘이 시작된다. 숭덩숭덩 굵게 써는 것만 흉잡힐 것이 아니라 이로 씹어논 것 같은 것도 솜씨 축에 못 들고 보니 알맞추 한결같이 썰어내기란 실상 명장(名匠) 아니고는 못 해내는 법이다.
몇 시나 되었는지 '양양' 가는 막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눈을 들어보니, 밤이 저윽히 깊어 치맛자락엔 밤이슬이 촉촉히 내렸고, 앞 뫼뿌리 기슭에는 고기잡이 불이 도깨비불 모양 이따금 껌벅거린다. -<松田抄>에서
-<香山紀行>에서
-<바다는 사뭇 남빛>에서
노천명은 문장 속에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그도 '스추렌지어 . 푸로그람 . 하우 투 리브 . 푸로페서 . 앰비슌 . 뷰-로 . 와일드 로우즈 . 써스펙트 . 까이드뿍' 같은 외국말을 사용하여 서정문에 티를 만들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가 쓴 많은 토속어는 글에 아름다움과 감칠맛을 더해주었다. "알겼는 소리", "빗발이 걷자", "산말랑으로", "비 덛는 소리", "오련한 물색", "장미의 화원으로만 배돌고", "집주름을 데리구 집만 톺으려 다니시면", "색떡 한밥 소래에", "두 손을 마주 겯고 서서", "목선(木船)이 돛대가 휘여지도록 바람을 배고"와 같은 표현들은 그의 회고적 수필에 윤기를 더해주는 언어들이다. 노천명은 섬세한 표현과 회화적인 문장으로 향토색 짙은 서정을 아름답게 그려낸 수필가다. 그러나 그의 수필이 대체로 회고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고, 또 그의 수필이 회고적 정서에 기울 때 더욱 문학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의 수필에서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현실성의 부족은 어쩌면 그의 비타협적이면서도 폐쇄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고, 그것은 또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그를 친일과 부역이라는 물결에 휩싸이게 한 원인(遠因)이 되었으리라는 개연성도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다.
② 친일과 부역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나라 위해 전장(戰場)에 나감이 소원이리니/이 영광의 날/나도 사나이였더면 나도 사나이였더면/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하고 노래한, 징병제 실시의 감격을 읊은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每日新報, 43. 8), 학도병의 출진을 고무 . 권유한 <出征하는 동생에게>(每新, 43. 11. 10), 싱가포르 거리에 조국(일본)의 깃발이 물결치는 감격을 그린 <싱가포울 陷落>(每新, 42. 2. 19)을 비롯하여 <노래하자 이 날을>(春秋, 42. 3), <勝戰의 날>(朝光, 42. 3), <鎭魂歌>(每新, 42. 2. 28), <婦人勤勞隊>(每新, 42. 3. 4), <흰 비둘기를 날려라>(每新, 42. 12. 8). <神翼>(每新, 44. 12. 6), <千人針>(春秋, 44. 10), <滿洲文學代表 吳瑛 女史에게>(春秋, 42. 12), <女人鍊成>(國民文學, 43. 6) 들이 있고, 수필로는 <時局과 銷夏法>(每新, 41. 7. 8), <나의 新生活計劃>(每新, 42. 2. 3), <職業女性과 趣味>(新時代, 43. 3) 들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젊은이들의 무운(武運)을 간절한 모성으로 기원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이렇게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열렬히 붓으로 지원했던 노천명은 8 . 15 광복이 되자 다음과 같은 시를 또다시 발표한다.
임이 오시던 날/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읍니다//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그도 저도 아니오이다/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문 닫고 죽죽 울었읍니다 ―시, <임 오시던 날>
이 시를 대하면, 그는 왜 침묵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인다. 재빠른 변신보다 침묵하는 양심이 때로는 값진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편 문학인의 사명, 즉 붓 한 자루의 사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제 총독정치가 최악에 달했던 1940년대 전반기에서 이 땅의 많은 문인들은 '살아 남기 위해'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서도 李陸史 . 尹東柱 . 金珖燮 같은 이들은 지조를 꺾지 않았기에 일제의 혹심한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이들은 어떻게 '살아 남기 위해'서라는 그 절대적인 지상명제를 외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문학자(文學者)의 모럴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결부"되는 것이며, "문학은 삶의 한 방식이지, 삶의 수단은 아니"라는 진정한 문학인으로서 그 자세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땅의 지식인들이 일제 말엽에 친일을 한 것은, 흔히 소박한 의미로 합리화되기 쉬운 이유, 즉 '살아 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허영과 명예심이 수반되는 선민의식과 유치하기 그지없는 영웅심리에 빠져,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양심은 물론 민족정신에 입각한 역사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욱 타당한 이유가 될 것이다. 노천명은 <새해의 포부>라는 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문인의 사명을 밝히고 있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제자리에서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며 저 할 바를 다하는 것 이상의 국가나 민족에게 이바지하는 길은 없을 줄 안다. 나는 문인으로서나 할 바를 다해야만 되겠다. 쓰고 싶다고 쓰고, 마음이 안 내킨다고 태만해서는 안 되겠다. 신이 나에게 돈도 쥐어주시지 않고 권리도 쥐어주지 않고, 안락한 가정도 내게 허락하지 않고 오직 붓 한 자루를 쥐어주신 데는 거기 엄숙한 사명과 포부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새해의 포부>에서
이 글을 쓴 1957년은 바로 노천명이 세상을 뜬 해이기도 하다. 세상을 뜨는 바로 그 해에, 그가 자신을 돌아보며 작가의 사명의식에 대해 생각해본 것은 의미 있는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문인으로서 가졌던 사명의식, 신이 그에게 부여했을 소명의식에 비추어볼 때, 그는 과연 붓 한 자루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을까. 노천명에게 친일의 시대는 지나가고, 또다시 이 여인에게는 6 . 25라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그는 남한이 공산치하에 있을 때, 서울을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해 林和가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을 한다. 소설적인 기법을 빌어 쓴 <誤算이었다>라는 수필 속에는 그 단체에 가입하게 된 동기가 상세히 밝혀져 있다.
나는 혼자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고 또 이렇게 죽는 것은 무서웠다. 밤중에 총을 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드는 것을 겪고 또 새벽 한 시에 가택수색을 당하고 낮에도 수차에 걸쳐 보위부 정보원들이 무시로 와서 불쾌하게 집을 뒤지고 간 뒤로는 대문만 흔들면 그저 가슴에서 방망이질을 하는 것이 싫었다.(......) 나는 죽어도 아는 사람들이 많은 데 가서 죽고 싶었다. 그 뿐 아니라 잡혀가는 경우에도 내가 잡혀간 줄이라도 동지들이 알면 내 맘이 든든할 것 같다. 그래서 아무 능력이 없는 어린 계집아이와 마주 앉아 불안 속에 묻혀 있기보다는 대한민국의 문인들이 많이 나와 있는 문학가동맹엘 나가서 앉아 있는 동안이 내게는 가장 마음이 든든한 시간이었다. -<誤算이었다>에서
그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그야말로 '살아 남기 위해' 문학가동맹에 가입을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와 가까운 많은 문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협력을 하면 괜찮으리라는 예상―좌익 사람들 중에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구원을 받으리라는 기대―모든 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고 그는 자기의 실책을 후회하였다. 어쨌든 이 사실로 해서, 그는 9 . 28 수복 후 부역자처벌특별법에 의해 20년의 실형을 언도받게 된다. 이 때 그는 자기의 억울함을 수필로보다 시로 많이 써냈는데, 그 옥중시들 속에는 전에 보였던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이미 가시고, 메마른 가슴으로 토해내는 분노와 초조함만이 보인다.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샛빨가니 뒤집어쓰고/감옥에까지 들어왔다/어처구니 없어라 이는 꿈일 게다/진정 꿈일 게다
내가 저승엘 왔나 보다/아무래도 여기가 저승인가 보다/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끊어져/아-무도 나를 찾아주는 이 없구나/그들은 확실히 딴 세상에 산다
잘 드는 匕首로 가슴속 샅샅이 헤쳐 보아도/내 마음 조국을 잊어본 일 정녕 없거늘/어인 일로 나 이제 기맥힌 패를 달고/여기까지 흘러왔느냐
노천명은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형무소로 이감되어, 전에 누하동 집에서 같이 산 적이 있는 金珖燮에게 "51년 3월 2일까지 나를 구해 달라"는 당당한 편지를 보낸다. 그래서 金珖燮(당시 대통령 공보비서관)은 李軒求(당시 공보처장), 金尙鎔(당시 코리아 타임스 사장), 崔貞熙와 함께 진정서를 작성하여 노천명의 구출운동에 나선다. 그 결과 그는 마침내 51년 4월 4일, 영어의 생활에서 풀려난다. 일제시대에 친일적인 작품을 많이 써낸 것과는 달리, 사상문제에서는 글 속에 이데올로기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던 점도 감안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후 노천명은 주위의 냉대를 의식하면서, 불안하고 초조하고 회의에 가득하여 "별도 이제 내 친구는 못 되고/풀 한 포기 나지 못한 허허벌판에서/전투기의 공중선회적 현기증"(시, <독백>에서)을 느끼면서, "가로수도 죽은 듯 공포에 서 있는 오후/가까운 이 하나 볼 수 없는 슬픈 거리여/모든 기관이 정지한 죽은 거리여!/개새끼가 물어간대두 돌아볼 친구 하나 없다"(시, <회상>에서)와 같은 우울한 시를 쓰게 된다. 이 때 이 생래적으로 고독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더욱더 자신을 고독 속에 가두어놓는 일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사뭇 곱기만 한데/파라솔을 접듯이/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이 人波 속에서 고독이/곧 얼음 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어쩐 까닭이뇨/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파라솔을 접듯이/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趙芝薰은 노천명의 시에 대해 "그의 생래적인 단순한 성격과 고독벽은 현실에의 적응을 몰랐고, 따라서 현실의 탁류를 버티어낼 마음의 여유를 지니지 못하였었다. 다만 가느다란 백금선(白金線) 같은 격정의 꿈만으로 운명의 물굽이에 휩싸이고 말았던 것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 말은 한편, 노천명이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많은 과오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성격의 취약성을 대변해주는 말로도 원용될 수 있을 것 같다.
4. 끝맺는 말 "대처럼 꺾어는질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시, <自畵像>)은 세상과 타협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대인관계에서도 많은 애로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성격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괴롭히면서, 어딘가에 도피처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는 항상 '먼 것'에 대한 동경을 버릴 수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의 수필에는 어떤 무거운 주제보다 작은 세계를 그리는 서정이 있고, 밖으로 드러내버리기보다는 안으로 삭히는 절제가 있다. 이 절제는 때로 드러내는 것보다 더욱 짙은 고독을 표현하기도 하고, 통곡보다 더 큰 소리로 아픔을 전하기도 한다. 노천명에게는, 한 인간으로서는 친일과 부역이라는 과오가 있었고, 한 여성으로서는 불행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평생을 독신으로 살 수밖에 없는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한 문학인으로서는 섬세한 감성으로 절제의 아름다움을 구축한 외로운 시인이었다. 그러면서 한편 이태준 . 김동석 . 김진섭 . 이양하 . 김용준과 같은 반열(班列)로서 현대수필문학사에 확고하게 한 위상을 차지하는 수필가이기도 한 것이다. (1994)
<참고 문헌> 徐基源. <序>. 林鍾國.《親日文學論》.
● 필자 소개 : 이정림(李正林)
계간『에세이 21』 발행인 겸 편집인
수필집 『당신은 타인이어라』(1986, 범우사) 평론집 『한국수필평론』(1998, 범우사) 이론서 『인생의 재발견-수필 쓰기』(2007. 랜덤하우스코리아) ▶이메일∥ sanyoungjae@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