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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용목사 //설교준비 스크랩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 - 07년 6월 3일 주일 설교
물댄동산 추천 0 조회 70 07.08.18 14: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 - 07년 6월 3일 주일설교
 
글쓴이 : 김성섭 번호 : 668조회수 : 72007.06.03 15:27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

□ 본문 : 갈라디아서 6장 14절

우리는 붙잡고 사는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여행을 떠나면 저는 참 챙기는 것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자합니다. 그런데 짐을 싸다보면 이것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저 것도 필요할 것 같고, 이렇게 하나 둘 싸다보면 짐이 한 보따리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입지 않은 옷도 있고 한 번도 풀지 않고 그대로 다시 가지고 온 짐들도 있습니다. 짧은 여행인데, 한 번도 써보지 않고 결국은 짐만 되는데, 왜 챙겨야만 마음이 편한지.
일 년에 한두 번은 집안 정리를 합니다. 옷들도 정리합니다. 시작할 때는 안 쓰는 물건들은 모두 버리자, 입지 않는 옷도 모두 정리하자, 그러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막상 버리려고 하면 나중에 꼭 쓸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혹시 모르니까 일단 놔두자 합니다. 옷도 그렇습니다. 일 년 동안 정말 한 번도 안 입었던 옷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주든지, 세컨더리에 팔든지,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버리든지 해야 하는데 아까운 것입니다. 결국은 정리하려고 꺼냈던 옷들을 나중에 입어야지 하면서 다시 옷걸이에 겁니다. 그래서 살수록 짐만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면서 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에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그렇게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는 만큼 버리는 것이 많아야 하는데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붙잡고 있는 것이 있지는 아닌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으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제일 먼저 내려놓아야 할 짐이 죄의 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그 어떤 추하고 더러운 죄도 눈처럼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의 짐을 내려놓으면서 죄책감에 대한 짐도 함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다고 인정해 주셨는데 왜 우리가 죄책감에 붙잡혀 살아야하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걱정 근심의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걱정, 자녀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걱정,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는 걱정거리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걱정 근심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욕심과 쾌락, 헛된 부귀영화에 대한 짐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이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부귀영화가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손에 넣으려고, 남보다 조금 더 가지려고, 남보다 조금 더 높이 오르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았습니다. 쥐고 얻고 차지했지만 늘 무언가에 쫓기며 살았습니다.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면,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보면 시기와 질투, 열등감에 빠져듭니다. 이 모든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짐이 또 있습니다. 고집입니다. 부모님도 남편도 아내도 꺾을 수 없었던 고집, 그러나 사실 그것처럼 우리 인생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는 예수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스스로 담을 쌓게 했던, 우리를 외로움의 웅덩이에 빠뜨렸던,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자신도 병들게 한 그 알량한 자존심도 예수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내세우고 다른 사람을 향해 자신을 자랑하던 교만함, 이 교만함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런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못살 줄 알았는데, 이런 것들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했는데, 이런 것들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따돌림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했던 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쓸데없는 것들을 붙잡고 살았구나, 그 헛된 것을 얻으려고 소중한 인생을 어리석게 살았구나,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으며, 우리가 영원토록 붙잡고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십자가의 은혜에 붙잡혀 살게 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꾸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여전히 짐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책감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기억조차 하지 않는데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잊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자기가 자기를 정죄합니다. 이런 짐을 지고 어떻게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걱정 근심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먹고 사는 걱정, 자녀 걱정, 직장 걱정, 미래에 대한 걱정, 이런 걱정거리를 가득 안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신앙생활 연수만큼 고집이 세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은데 여전히 열등감과 자존심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입니다. 잘못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짐들을 잔뜩 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죄책감, 근심 걱정, 욕심, 고집, 자존심, 교만, 이런 것들을 잔뜩 붙잡고 있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놓고 사니 어떻게 성도의 가장 큰 축복과 능력인 십자가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맞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내려놓은 것이 늘어나야 합니다. 결국에는 우리 손에는 오직 십자가 하나만 남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 신앙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은혜에 붙잡혀 사는 사람의 인생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북한선교사역을 하셨던 최광 선교사님이 쓰신 북한선교의 실화입니다. 최광 선교사님이 하셨던 사역은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모아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이들을 지도자로 세우고, 그리고 지도자로 세움 받은 탈북자들이 다시 다른 탈북자들을 모아 자신이 훈련받았던 그대로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그런 사역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먼저는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아가 남북이 통일 되었을 때에 이들이 북한 복음화의 밀알이요 불씨가 되는 그런 사역이었습니다.
마음 아프게도 최 선교사님의 사역은 내부 밀고자에 의해 중국 공안에게 습격을 받아, 선교사님은 2001년에 중국에서 추방되었고 훈련생들은 북한으로 이송되고, 이로 인하여 선교사님의 북한선교사역은 일단락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변화되어가는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탈북자 훈련생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던 장만식 아바이라는 분이 선생으로 임명받던 날, (모든 훈련을 수료한 후, 다른 탈북자들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책임자로 임명받는 것) 선교사님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런 고백을 합니다.

“어떤 때는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문 하나님이 너무 고맙수다. 나 같은 놈도 살려주려고 이렇게 먼 중국에까지 고생고생 오게 했으니 말이우. 그래서 나는 맨날 혼자 있을 때면 하나님 생각하면서 운다우. 아, 글쎄, 내 같은 놈이 뭐이라구 글쎄, 자기 아들을 그 고생시키고도 마지막에는 그렇게 끔찍하게 죽여 버린다우?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이 너무 고맙수다. 선교사님, 나 이제 더 바라는 거 없수다. 내가 이만큼 산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구원까지 해주셨으니, 나 이젠 죽을 때까지 북한 선교만 할 거외다.” (최광, 내래 죽어도 좋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pp.254-255)

저는 장만식 아바이라는 분의 고백을 들으면서 그분 안에 용솟음치는 구원의 감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김 목사, 너에게도 이런 구원의 감격이 있니?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눈물 흘리며 주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드리겠습니다, 내 생명까지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고백했던 그 감격이 지금도 살아있니?”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왜 지금 나에게는 그 구원의 감격이 없을까? 장만식 아바이가 흘렸던 그 감격의 눈물이 왜 말라버렸는가?

그러면서 바울의 고백이 생각났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가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가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만 붙잡고 살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처음 예수님을 믿고 장만식 형제처럼 구원의 감격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분들을 볼 때 무엇을 느낍니다. 혹시 ‘나도 옛날에는 그랬어.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봐라. 그러면 당신도 나처럼 될 거야.’ 이렇게 반응하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애통하지 못하고, 첫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을 아직 신앙생활이 뭔지 몰라서 그렇다는 듯이 생각한다면, 십자가의 은혜가 정말 내 안에 있나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국제제자훈련원에서는 각 교회를 방문해서 컨설팅을 해 줍니다. 어떻게 해야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또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컨설팅입니다. 이런 사역을 담당하시는 목사님께서 안타까움을 토로했는데, 가장 힘든 교회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어떤 것을 제안하면 대답하는 것이 항상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 우리 다 해 봤어요. 그런데 새삼스럽게 다시 그걸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은 사람들도 똑같이 반응합니다. “목사님,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전에 다 했어요. 좀 뜨거워지다 말건데 그냥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게 낫습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안타까운 신앙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4:16)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면 이런 미지근한 신앙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미지근한 신앙인을 통해 역사하셨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런 미지근한 신앙은 하나님의 역사에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이 되었습니까?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렸습니까?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붙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려주셨다는 감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감격이 없는데, 영원한 천국백성 되었다는 감격이 없는데, 어떻게 뜨겁게 예수를 믿겠습니까?

2.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삽니다.

최광 선교사님이 훈련시킨 순교 선생이 다시 탈북자들을 모아 훈련시켜 그들을 선생으로 임명하는 날, 새롭게 선생으로 임명받는 한 형제가 감격하여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고마우신 분임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린 정말 찌꺼기 같은 인생들이었슴다. 그런데 이젠 아님다! 이제는 북한 선교의 첫 장막을 여는 사람들임다. 이게 다 누기 때문임까? 우리 하나님 때문이 아님까? 우리가 저 쓸데없는 김정일이를 위해서두 총폭탄이 되겠다구 날뛰구 다녔는데, 이제 하나님을 위해 못할 것이 뭠까? 아까울 게 뭐 있슴까? 우리 다 함께 한 번 해 봅시다. 북한 선교해 봅시다!” (위의 책, pp. 298-299)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살라고 해도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앞에서 장만식 형제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했는데, 장만식 형제가 선생으로 있는 훈련소가 중국 공안에게 발각되어 전원 북한으로 송환되게 되었습니다. 탈북자가 북한으로 송환될 경우에 받는 벌이 엄하기에 장만식 형제는 훈련생들을 탈출시키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녁 시간, 공안 2명이 장만식 형제와 훈련생들을 공안국 앞마당 담장에 한 줄로 나란히 세워 놓고 지키고 있을 때 장 형제가 다른 훈련생들에게 “내가 저쪽 담장 쪽으로 도망치면서 여기 있는 공안 애들을 유인할 테니, 너희들은 그 사이에 저쪽 낮은 담장 쪽으로 해서 도망들 가야 한다. 알았지?”

잠시 후, 감시가 조금 소홀해진 틈을 타 장 형제는 높은 담장 쪽으로 달려가서 담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공안들이 장 형제 쪽으로 달려가자 다른 형제들은 그 때를 이용해 일시에 낮은 담장 쪽으로 달려가 담을 넘었습니다. 장 형제의 희생으로 모든 훈련생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제일 마지막으로 담장을 넘은 훈련생이 목격한 것은, 두 공안이 총탁으로 사정없이 장 형제를 내리치는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삽니다. 예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장만식 형제처럼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 자신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십자가만을 붙잡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할 때 에베소 교인들이 그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곳에서 붙잡힐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고 혈안인데, 바울이 그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것은 생명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은 울면서 바울을 만류합니다. 그때 바울이 말합니다.
맞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면 나는 그곳에서 결박을 당할 것이고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20:24)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삽니다.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로마로 이송되고 그곳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7-8)
바울은 이 고백대로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우리들 중에 장만식 형제처럼, 바울처럼 순교의 길을 걸어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극적인 죽음을 선택해야 할 상황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진리는 장만식 형제나 바울이나 우리에게나 동일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잘 살기위해,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의미 있는 인생을 위해,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누리기 위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죽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에 붙잡히면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 보다 더 큰 영광과 기쁨과 보람이 없습니다. 그 영광과 기쁨과 보람이 너무나 커서 죽음조차도 막아설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이토록 놀라운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이토록 대단한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삽니다.

우리 중에 순교의 길을 걸어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우리는 순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듣고 삽니다. 그래서 성경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세상 기준에 맞추어서 자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한 마디로 희생입니다. 사랑은 자연스러운데 희생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합니다. 생소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왜 내가 희생해야해? 왜 내가 손해봐야해?’ 하는지 모릅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관계에서 조차도 희생하기를 꺼려합니다. 아내를 사랑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예, 라고 대답하면서도 아내를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흔드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낳은 자녀가 여러분 얼굴에 침을 뱉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배신감과 모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 앞에서 알몸이 되시어 침 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셨습니다. 그게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신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희생의 삶을 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2-15)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희생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희생하고 있는 것만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많은 성도들의 크고 작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서, 할 일이 많아서, 피곤해서,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희생을 꺼려합니다.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이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한 형제는 토요일 저녁에 여러분이 신고 있는 실내화를 알콜로 닦습니다. 그 형제는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닙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른 아침에 출근해서 늦은 밤에 퇴근하는 형제입니다. 여러분이 이용하는 화장실을 위해 매 주 토요일마다 깨끗이 청소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거의 밤을 새다시피 일하면서도 주일 식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는 손길들이 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바쁘다고 교회를 빠져나갈 때 기쁨으로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앉아서 예배드리는 테이블, 교회 바닥, 제가 서 있는 강단, 꽃꽂이, 교회 앞에 놓여 진 화단, 이 모두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희생하는 손길들이 없으면 한주도 유지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시간이 많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건강해서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를 구원해주신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희생을 통해 교회는 세워지고, 이런 희생을 통해 복음은 전파되고, 이런 희생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희생을 말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곧 희생이며 희생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용서가 어렵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곧 용서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로 인하여 날마다 감격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감격,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감격,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감격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혹시 한 때 반짝 했다가 잊혀져버린 유행가처럼 그렇게 잊혀져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커서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형제자매를,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희생의 핵심인 용서를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 앞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찬을 받습니다. 한 손으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찢기신 몸을, 다른 한 손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흘리신 피를 붙잡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붙잡으면 더 이상 세상 것을 붙잡을 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더 이상 붙잡고 있을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더 이상 미련을 두고 있을 세상 헛된 부귀영화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은 손으로는 우리의 고집도 자존심도 교만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했던 바울처럼 우리도 십자가만을 붙잡고 삽시다.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며, 그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삶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서로 사랑하며 희생하며 용서하며 삽시다. 이 시간의 성찬을 통해 십자가의 은혜가 회복될 줄 믿습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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