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살던 고향은 전라도 함평천지
나의 고향 함평을 떠나 온 지 벌써 47년이 됐다.
오직 농사밖에 모르는 부모님의 곁을 떠나
25살 촌놈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산지 벌써 47년이 된 것이다.
47년이면 고향에서 산 것보다 서울에서 산 날이 배가 더 많지만
그래도 늘 생각나는 곳이 고향이다.
왜일까?
내가 나고 자란 곳이어서 그런지 늘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정경운 동네들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우리 동네 이름은 방죽안이다.
내가 아주 어릴적 그러니까 4~5살쯤 됐을 때 우리 동네 앞에
큰 방죽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때 잘살아 보자며 시작된 농지 정리로
방죽을 메워 논을 만들어 지금은 방 뚝만 남아있다.
아마도 집 앞에 방죽이 있어서 동네 이름을 방죽안이라고 붙인 것 같다.
우리 동네에는 7가구가 살았다.
지금은 세 가구는 사라지고 6가구가 살고 있다.
한 가구는 수산에 살았던 창식이가 자기네 밭에 새롭게 집을 짓고 들어와 살고 있어
여섯 가구가 된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20대 중반까지 살아온 나의 집은
큰 성례누나와 매형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다.
그리고 5분여 거리를 걸어서 올라가면 중앙리 마을이 있고, 아래로 수산마을이 있다.
그리고 위쪽으로 올라가면 교회가 있는 수호리가 있다.
그리고 잔등을 넘어가면 함평읍내이다.
난 잔등을 넘어 함평 초, 중, 고를 다녔다.
지금은 도로를 확장하면서 고개가 많이 낮아졌지만
내가 어릴적 신작로였을 때에는 상당히 높은 잔등이었다.
그리고 잔등 고개를 넘으면 우측으로 큰 바위 사이로 굴이 있었는데
거길 지날 때면 항상 뭐가 나올 것만 같이 밤에는 무서웠다.
아마도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음습한 곳이 된 것 같다.
먼지 풀풀나오는 신작로를 따라 함평읍내까지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잔등을 내려오면 좌측으로 대동네가 있다.
그리고 나의 꿈많은 동심을 키워준 함평농업고등학교가 있다.
지금은 함평학다리고등학교로 바뀌었다.
4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곳이 함평읍이다.
아파트 몇 동 늘어난 것과 들녘에 나비축제로 인한 습지 등을 만든 것 외엔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함평천지란 말이 있다.
함평은 넓은 평야지역이여서 천지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우리 형제는 8남매로 내 위로 큰 형과 누나 둘이 있고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네에서 소문난 잉꼬부부여서
한 번도 두 분이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주 호인으로 소문난 분들이다.
결혼 후 빈손으로 분가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실하게 소작을 하고
읍내 장터에서 쌀전을 하면서 돈을 모아 20여 마지(한 마지기 200평)기 논과 여섯마지기 밭을 일구며 8남매를 키우셨다.
어렵게 8남매를 잘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큰 누나를 빼곤 형제들이 고향을 떠나 나름대로 잘살고 있다.
늘 나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고향생각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