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종고는 북송의 선주 영국현(宣州寧國縣, 지금의 안휘성 선성현)출신으로, 성은 해씨이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얼마 안 있어 가세가 기울었는데, 10살 때는 화재가 나서 집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16세에 혜제선사 문하에 출가하여, 17세에 경덕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또 20~21세의 때에 동산미선사 등에게서 조동종의 종지를 배웠으나 실망하여 떠나고 만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묵조선을 비판하는 계기가 된다.
‘간화선’ 확립…‘공안 참구’ 수행법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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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부터 담당문준에 참학하였으나 담당이 병이 들자 이를 떠나, 37세 때에 원오극근을 뵈었다. 원오를 뵌 지 42일 만에 오도한 대혜에게, 원오는 〈임제정종기〉를 저술하여 법을 부촉하였다.
그러나, 53세 때에 금(金)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주전파인 장구성과의 친분이 알려지자, 강화파인 진회의 모함을 사서 형주에 유배되기에 이른다(神臂弓事件). 17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복승한 것은 68세(1156년) 때였다. 75세에 시적하자, 효종은 보각(普覺)의 시호를 내렸다. 사법제자는 육왕준박.개선도겸.설봉온문 등 모두 110인을 넘는다고 한다.
사진설명 :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은 중국 송대에 대혜종고스님이 확립한 선법이다. 사진은 의정부 회룡선원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저술로는 대혜시적 후 60권광록이 존재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고, 이것을 정리해서 1171과 1172년에 대장경에 입장된 것이 30권본 〈대혜보각선사어록〉이다. 이것은 동시대인의 입장(入藏)으로서는 최초여서 대혜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30권본 〈대혜보각선사어록〉의 권25~30에 해당하는 대혜서(大慧書, 일명 서장)는 한국선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4권본 〈대혜보각선사보설〉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데, 주장이 명확하여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필자의 박사논문의 번역인 ‘한국간화선의 원류’(8월말 간행예정)에서, 원문의 일부를 싣고 있다. 이외에도 일종의 설화집인 〈종문무고〉와 〈잡독해〉, 공안집인 〈정법안장〉 등이 있다.
# 사상
1) 간화선의 확립
대혜의 사상적 특징은 우선 ‘간화선의 확립’이다. 간화선은 당대에 발생하여 송대의 대혜에 이르러서 확립, 유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혜를 ‘간화선의 확립자’라고 규정할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① 공안화(公案化)의 완결
화두란 이전에 행해진 일상의 선문답 중에서 ‘참구의 모범(즉, 관청의 판례인 公案)’이 될 만한 것을 추출한 것이다. ‘일상적인 선문답’에서 ‘화두’로 변하는 과정을 우리는 ‘공안화’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안화의 과정에는 종종 선문답에 대한 해석의 변화가 수반된다. 대혜가 가장 중시한 무자공안을 예로 들면, 원래 조주(778~897)가 행했던 문답은 “어떤 승이 물었다, ‘개에게는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없다’ ‘위로는 제불에 이르기까지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는 것입니까?’ ‘개에게는 업식성이 있기 때문이다’”가 원래의 형태이다. 이 문답은 수.당 이래의 불성논쟁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며, 승의 질문은 ‘내가 혹시 윤회해서 개로 태어나더라도, 다시 수행해서 성불할 수 있을까?’라는 윤회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 여기서 조주의 무는 분명 ‘없다’의 의미이다. 그런데, 대혜에 이르러서 무자공안은 “승이 묻기를 ‘개에게는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무’.”로 끝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때의 무는 ‘있다, 없다’의 무가 아니다.
② 하나의 공안을 참구
대혜가 무자공안을 중시하고는 있지만, 무자공안이 다른 공안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은 없다. 그러나 대혜에 이르러서 ‘하나의 공안’만을 참구하는 것이 확립되었다. 청대에 전이암(錢伊庵)이 저술한 〈종범〉 ‘철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진여원방선사가 낭야에게 참학하여 오로지 백수자화(柏樹子話)를 참구하였다. 대혜종고에 이르러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때부터 선에서는 하나의 화두를 참구함으로서 입문을 삼지 않음이 없었다’(만속장경 114책, 575下)
2) 묵조선비판
‘묵조선(默照禪)’이란 명칭은 굉지정각의 〈묵조명〉에서 유래하는 말이지만, ‘묵묵히 자신의 타고난 불성을 관조하는 선’이라 해석해도 될 것이다. 주로 조동종에서 행하는 선인 묵조선을 대혜는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고 극력 비판하였다.
대혜가 묵조선을 비판하는 이유는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좌선을 통해서 타고난 본각을 관조하여 무념으로 되려고 할 뿐이어서 마치 생명이 없는 토목와석(土木瓦石)과 같다’고 대혜는 비난한다. 그래서 묵조선을 ‘돌로 풀을 눌러놓은 것과 같다’고 한다. 돌로 풀을 눌러놓았을 때는 풀이 누워있지만 돌을 치우면 풀은 다시 일어나듯이, 묵조선은 억지로 번뇌를 억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선을 행할 때에는 번뇌가 없지만, 선을 행하지 않을 때는 다시 번뇌가 일어난다. 따라서 공안을 참구해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 영향
대혜 이후 간화선은 수행의 방법으로서 정착되었고, 종파로서도 임제종양기파가 선림을 석권하기에 이른다. 또, 무자공안은 〈무문관〉(1229년 刊)에 이르러서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심지어는 도가에서도 간화선을 수행법의 하나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선수행에 있어서의 간화선을 통한 방법론적 완성은 ‘선의 완결’을 의미함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활발발함을 잃게 하여 ‘선의 종언(終焉)’을 예고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대혜 이후에는 선과 정토사상의 결합, 삼교일치 등 제종융합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다.
# 인적 배경
대혜는 법계상으로는 임제종 양기파 4세에 해당되며, 원오극근에게서 법을 부촉 받았다. 일찍이 담당문준과 장상영 등에게서 원오에 참학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왠지 주저하고 있던 대혜는 37세 때에 원오를 우연히 뵙고 ‘이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록 대혜가 원오에게서 사법하였다고 하더라도 양자 사이에는 가풍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우선, 대혜가 일찍부터 원오에 참학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주저했던 것은, 평소 원오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만장경 제31투, 399c), 또 원오가 ‘여하시제불출신처(如何是諸佛出身處)’의 공안을 모든 수행자들에게 일률적으로 참구하게 하는 것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상게서, 399d), 나아가 원오가 노파심절(老婆心切)하여 쉽게 대어를 내리는 것에도 불만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만장경제31투, 440a).
또 대혜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거사인 장상영(1043~1121)이 있다. 진정극문의 탑명을 부탁하기 위해 장상영을 만난 대혜는 서로 의기투합한다. 특히 대혜의 사상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화엄경〉 〈능엄경〉 이해에 있어서 장상영은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장상영은 일찍이 〈능엄경〉을 주석한 〈주청정해안경(注淸淨海眼經)〉을 저술했는데(현존하지 않는다), 이 〈주청정해안경〉을 대혜는 대단히 칭찬하고 있다.
특히 〈주청정해안경〉에서 장상영이 팔성취(如是我聞 一時佛在)의 ‘불(佛)’을 ‘시각합본지위불(始覺合本之謂佛)’로 해석한 것을 계승하고 있다. 즉, 이것은 ‘시각(始覺)을 통해서 본각(本覺)으로 나아간 것이 불(佛)’이라는 의미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각(覺, 깨달음)의 체험이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이 간화선강조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즉, 간화선에서는 불각의 자각위에서 시각을 통해 각의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반해 묵조선에서는 본각을 중시한다.
# 사상적 배경
대혜의 사상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경전은 〈화엄경〉이다. 우선, 대혜의 깨달음의 과정에 있어서도 〈화엄경〉의 영향이 큼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혜는 유구무구여등의수(有句無句如藤倚樹)의 공안을 깨달아 원오의 인가를 받았지만, ‘아직 대자재를 얻지 못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만장경 제31투, 421a~b). 이때가 그의 37세 때이다. 그런데, 대혜는 40세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후에 호구(虎丘)에 이르러 〈화엄경〉을 보니 ‘보살이 제8부동지에 주하여....’ 여기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적멸이 현전하여, 대자재를 얻을 수 있었다”라고(상게서 421b).
나아가 〈화엄경〉 중에서도 대혜는 ‘입법계품’을 특히 중시한다. 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의식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한 걸음을 나아가 보십시오. 만약 이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면,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의 털구멍 속에서 수많은 불국의 무수한 세계를 지나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대정신수대장경 권47, 903a)’.
여기에서 ‘심의식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일보를 전진한다’는 것은 ‘화두참구를 통해 의식이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돈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는 간화선의 깨달음의 순간을 선재동자가 일보를 내디뎌서 무수한 세계를 지나간 것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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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영 식
부산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