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
: 백무산은 한국시의 ‘백비(白碑)’다. 비문의 해독자들은 즐겨 노동해방을 읽고 무위와 노동의 결사를 찾아내기도 하고 우주적 생명의 감각을 탁본하기도 한다. 나로 말하자면 그의 시 속에 드문드문 드러나는 가족사의 추억을 시대의 벽화처럼 그려보고 싶으나 글쎄, 그 모든 문자향 서권기를 후련하게 지워버리는 것이 백비의 언어다.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다해 자신을 잃어버”(「뭔가를 하는 거다」)리는 이 도저한 무의지의 의지가 경이로운 것은 그의 시가 끝끝내 결핍의 감각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핍의 감수성이 소진되었을 때 언어의 무중력이 찾아온다는 걸 흐릿하게 멀어진 옛 성좌들이 숱하게 증명하고 있거니와, 이순을 맞은 시인에게 결핍은 여전히 「기억의 소수자들」과 「세계의 변두리」로 귀환케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 힘이 “뒤에도 옆에도 사방 얼굴을 가진 열두 얼굴 부처님”(「뒷면」)처럼 모두가 ‘앞’이 되는 세계를 ‘인간의 폐허’와 동시에 보여준다. 그 사이의 심연이 지상의 비참과 만날 때 반어를 낳고, 소멸마저 새로운 시작으로 이끄는 우주적 직관과 만날 때 돌올한 역설을 부른다면 어떨까. 소멸의 방식으로 현실을 기억하는 자의 각고 속에 욱신거리는 리얼리스트의 별자리가 외따롭게 빛난다. 누가 이 ‘비(碑)’를 다 읽었다 하는가. 그의 시는 아직 비밀을 간직한 미답의 영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