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성가 작곡가 최현숙 아가타
눈먼 소녀의 노래는
날개를 달고
“내가 이해받기를 바랐고 내가 위로받기 원했는데 / 못 자국 선명하신 주님 나를 위해 /
십자가 위의 고통 중에도 내 이름 가슴에 안으셨네 / 녹아내릴 듯한 그 눈길 내게 말하시네 / …사랑한다 내가 너를 원한다 / 나는 구원자 예수 너의 사랑이다.”
- 최현숙 작사 ∙ 작곡,
‘구원자 예수 너의 사랑’ 중에서
글∙사진_김은영 경향잡지 기자
간신히 150 센티미터를 넘는 키, 피아노 건반의 한 옥타브에 겨우 닿을 조그만 손, 말마디마다 하하호호 느낌표를 찍는 높은 목소리.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에 기겁하여 손을 내젓다가도 “정 찍으시려면….”하며 체리 빛깔 립크림을 슬그머니 꺼내 바르는 마흔다섯 살 소녀, 최현숙 아가타.
부산에서 태어나 45년을 살았고, 스물한 살에 눈멀었다. 원인은 당뇨 합병증. 열두 살에 소아당뇨 진단을 받은 뒤 끝을 알 수 없는 치료가 시작되었고, 병원에서 만나 같이 치료받던 친구 몇몇은 먼저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나마 휴학 한 번 않고 대학까지 갈 수 있었던 건 ‘최씨고집’ 덕분이었다.
전공은 성악이었다. 고2 때 성악가였던 담임선생님의 음악회에 갔다가 그 목소리에 반해버렸다. 키도 작고 몸도 약하니 차라리 다른 악기를 하라는 선생님의 만류도 최씨고집을 꺾지 못했다. “여아일언중천금!” 을 외치며 기를 쓰고 연습한 끝에 성악과에 합격했다.
“대학 가서는 내 세상이었죠. 다 컸다고 마음대로 생활하다 보니 건강관리에 소홀했어요. 그러다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 쓰러졌죠. 곧 나을 줄 알았는데 나중엔 병원에서 대세까지 받게 되더라고요. 다행히 몸은 회복했지만 실명하게 되었고, 학교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죠.”
아가타 씨가 사는 부산 용호동의 아파트에서 창밖으로 내다본 풍경. 그이에게 바다는 짙푸른 빛 대신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햇살 소리로 다가온다.
1984년 겨울, 그이의 꽃다운 시절은 검은 장막에 갇혀버렸다. 병상에서 일어난 뒤 아가타 씨는 교리를 배워 보례와 견진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와 앞날을 고민하던 중, 대세를 주선해 준 친척 수녀에게서 생활성가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제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 쓰겠다고 혼자 약속하고 혼자 밤새 기도하고요, 혼자 노래하고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마음에 딱 맞는 노래를 만나지 못했어요. 제가 부를 노래는 ‘나 지금 아파요!’ 였지, ‘하느님 찬미합니다!’ 는 아니었거든요.”
1992년, 그이는 틈틈이 만든 노래와 친구들을 모아 ‘늘함께’ 라는 팀을 결성하고 부산시내 성당마다 전화를 돌렸다. “저희는 생활성가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성당도 성가대 있는데요?” “그게 아니라 청년들이 모여서요….” “여기도 청년회 있습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생활성가라는 말 자체가 낯선 시절이었으니.
반면 응원해 준 사람도 있었다. 특히 최원오 빈첸시오 신부(현 주교회의 사무국장)는 “생활성가요? 어떻게 하는 겁니까?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하며 관심을 보여주었고, “조금 힘들다고 그만두지 말고 정말 청년들을 위한 성가를 오래오래 꾸준히 불러주십시오.”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과연 이 말대로, ‘늘함께’ 는 부산교구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며 음반도 두 장이나 냈다.
긴 시간이 흘러 중년에 접어든 멤버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그 사이 아가타 씨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활동을 오래 쉬었고, 지금은 무대에서 노래 한 곡 부르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무리해도 혈당이 떨어져 숨이 차고 온몸이 덜덜 떨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난날의 노래들은 어찌 되었을까?
“참 고마워요. 저는 나름대로 굉장히 힘든 시간을 주님과 함께 보냈는데, 노래는 노래대로 자기가 알아서 활동하고 다니더라고요!” 부산에서 울려 퍼지던 ‘구원자 예수 너의 사랑’, ‘풀잎에 햇살이 춤추네’, ‘어머니’ 등의 노래는 대구로 충청도로 서울로, 태평양 건너 미국 한인교회로 훨훨 날아갔다. 노래 주인이 그저 집에서 손끝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며 지내는 사이, 낯모르는 젊은이들은 그 노래들로 찬양율동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 가운데 개신교 신자들에게까지 애창곡이 된 ‘구원자 예수 너의 사랑’은 아가타 씨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노래다. 숨쉬기조차 힘들고 기도 중에 듣고 본 주님 말씀도 다 가짜 같고 ‘이래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고통스럽던 시절, 어느 순간 “사랑한다.”는 한 마디가 그이를 흔들어놓았다. 멜로디가 떠오르는 대로 부르면서 울고, 잊어버리기 전에 녹음하면서 울고,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울고 또 울던 그 노래가 이제는 듣는 사람을 울린다.
“청년 성서연수에서 배웠는데…, 이 노래만 들으면 마냥 훌쩍거리던 그때가 기억나요.” “어찌 들으면 세련되지 못하고 촌스러운 느낌이지만 노래의 전달력은 대단하다. 너무 가슴 찡하다….” “십자가의 주님께서 부족하고 작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고, 먼저 찾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냥 온 맘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노래의 재료는 책꽂이에 가득한 점자성경과 기타 하나뿐. 시력을 잃은 뒤 건반을 헛짚는 일이 잦아지면서 건반 대신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그이의 작품에는 자연을 노래한 것이 유달리 많다. “크시고 위대하신 하느님, 이 꽃잎 속에도 숨어 웃으시고 / 하느님 섬세한 사랑은 빗방울 속에도 바람에도 계시네” ( ‘풀잎에 햇살이 춤추네’ ). “머리칼에 장난치는 가는 실바람/ 눈부시어라 저 하늘의 태양은” ( ‘다시 보는 세상’ ).
“실명하고 느낀 게요, 먼지, 때, 쓰레기더미에도 제각기 다른 색이 있더군요! 전에는 지저분하고 더럽던 모든 게 지금 생각하면 가슴 저리도록 그리워요.” “햇살의 소리 들어보셨어요? 눈 감고요, 가만히 있어보세요. 그러면 ‘따닥 탁 탁’도 아니고, 공기의 움직임? 어떤 소리가 느껴져요. 숲에 햇살이 내려앉고 나는 분자가 되어 바람과 섞이는 느낌!”
이에 화답하듯, 얼마 전 이연학 요나 신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그이에게 노랫말을 선물했다. “내 숨 쉬고 움직이는 이 한 순간, 이 한순간을 둘러싼 이 산과 숲 / 이 바람, 햇빛, 사람들, 사람들 사이에서 걷는 일 / 때로 힘에 겨워도 고통마저 아름답다고 말하라….”
사실 아가타 씨의 일상은 불편과 고통의 연속이다. 머릿속에서 샘솟는 노래를 얼른 적지 못해 답답하고, 남들이 잘못 받아쓴 악보가 돌아다녀도 뒤늦게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끼니마다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아야 하고, 인도자 없이는 집 밖에 멀리 다니지도 못한다. 그래도 그이는 제 십자가를 그냥 껴안고, 때로는 잊고, 이따금 감사하며 산다.
“불완전한 나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못 믿어도 그분은 변함없이 나를 믿으신다.”는 것 하나만 믿으며, 아가타 씨는 오늘도 아름다운 노래를 빚는다.
첫댓글 그래도 감사하며 ' 불완전한 나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못 믿어도 그분은 변함없이 나를 믿으신다.' 그래서 더욱 삶이 감사합니다.
아... 저 분이셨군요.. 알고 들으니 더욱 감동이 큽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