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공연을 다녀와서 ~~ 김 대희 사도 요한
상해 진쟈샹[金家巷] 성당에서 열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서품 170주년 행사에 다녀왔다(2015.8.14.~16). 행사의 일환으로 우리 울바우합창단이 김대건신부님께 헌정하는 ‘레퀴엠’(Johann Christian Heinrich Rinck 곡) 연주를 맡았기 때문이다. 처음 행사계획이 나왔을 때는 부친의 기일과도 겹치는 데다 비용도 많은 듯하여 별로 내키지를 않았었는데 사람이 부족할까봐 희생하는 셈치고 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많은 은총을 받고 와서 이제는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동안 카톨릭신자로 살아오면서도 성지순례를 다닌 적이 많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은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Rinck의 곡은 1836년 작곡된 것으로 국내에서는 초연되는 곡으로 알고 있다. 어렵기도 하고 참고로 삼을 전례도 없기 때문에 지휘자님만 믿고 따라가며 금년도 정기연주를 목표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던 곡이다. 끝이 안 보이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연습 중간에 이런 행사가 생겨 마음이 조급하고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던 상황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는 방법 말고는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런 자세를 하느님께서는 좋게 보시고 나머지를 채워주신 것 아니었을까.
첫날 공항에 내려 느낀 상해는 서울보다 위도상으로 한참 남쪽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덥지 않고 공기도 상쾌했다. 유일하게 공식일정이 없는 하루라서 방문한 곳이 푸쉬[浦西] 지역의 헝탕[橫塘] 성당이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서품 일주일 후 첫미사를 봉헌하셨다는 곳이다. 화려한 도심이 아닌 허름한 변두리지역에 위치한 그 성당은 첫눈에도 낡고 위태로와 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조만간 헐릴 수도 있다는 것이 현지 안내를 해주신 교우분의 말씀이다. 그런데 그 성당이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허름한 고딕식 종루 아래로 함석지붕과 목조 바닥으로 이루어진 성당 내부는 중국의 전통과 서양식 문화가 어울어진 전형적인 개화풍이었다. 서양식의 외양과는 달리 내부는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목조 회중석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천정과 기둥에는 빨강, 파랑, 분홍 화려한 색상의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특히 회중석 사이사이 기둥에는 성경글귀나 기도문이 금빛 한자로 새겨진 청색 천들이 걸려 있었는데 에어컨이 있을 리 없는 건물의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에 휘날리며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그런데 그중에서 제일 압권은 정면 제대 양 옆에 모신 갓을 쓴 김대건 신부님과 한복 차림의 성모 마리아! 이역만리 타국에서 한복차림 성상이 모셔져 있다니..... 갑자기 뭉클한 느낌이 들며 험난한 시절 어린 나이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와서 신앙의 일념으로 정진하신 김신부님의 행적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서품을 받자마자 고국으로 달려가 양떼를 돌보시다가 일년도 채 못되어 치명하신 그 용기와 사명감에 고개가 숙여졌다. 모두들 같은 느낌이었을까, 한 선배님의 제안으로 즉석에서 아베마리아를 봉헌하기로 하였다. 서양식과 중국식, 한국식 문화가 뒤섞인 채로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170년 만에 신부님이 사랑하시던 양떼의 후손들이 불러드리는 라틴어 성가! 비록 아무도 없는 빈 성당, 복장도 갖추지 못한 즉석 연주였지만 목소리는 맑았고 마음은 하나였다. 노래 도중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동에 젖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둘째날은 연주회(오후 5시)가 있는 날이었다. 김대건신부님이 서품을 받으셨던 푸동[浦東]의 진쟈샹성당은 옛 건물을 헐고 인근에 새로 지은 시설이어서 규모도 크고 깨끗했다. 성당 옆에 붙은 김대건신부님 경당은 우리 공항영접과 안내를 맡은 바로 그 형제님이 직접 설계한 것으로 김대건 신부님이 타고 오셨던 작은 배를 모티브로 한 것이란다. 배를 엎어 놓은 모양의 천정에서부터 뱃머리를 상징하는 앞면 제대, 나침반을 연상시키는 천정의 십자 조명과 바닥의 유선형 도형까지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그 크기가 신부님 일행이 타고 황해를 건너신 배의 실물크기라니 그 작은 배로 바다를 건너시며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셨다는 옛 기록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행사의 기획자이기도 한 그 형제님은 이제는 중국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하였다 한다. 한국에서도 인연이 이어질 것 같다.
연주회는 진쟈샹성당의 1층 제대 앞에서 회중석을 바라보는 대형으로 진행했는데 에어컨까지 갖추어져 연주에는 애로사항이 없었다. 현지에서는 방학기간이고 주말이어서 사람동원을 걱정한 모양인데 결과적으로 성당을 꽉 채운 인파로 성황이었다. 단순한 실내 디자인 만큼이나 성당의 울림이 좋아 다소 걱정을 했었는데 관객이 꽉 들어차니까 울림이 적당하게 완화되었던 것 같다. 1부의 레퀴엠은 울림을 의식하여 긴장 속에 절제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였다. 나중에 너무 좋았다는 칭찬을 들었는데 인사치레를 감안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겠지만 몇몇 지루해하는 아이들 빼고는 맨 앞줄의 신부님 두 분을 포함하여 모두가 숨죽여 우리 노래를 경청하는 모습이었던 것을 보면 청중들을 집중하도록 하는 데는 성공하였던 것 같다.
2부는 가곡이어서 청중들에게도 보다 친근하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이국땅에서 듣는 고국의 노래 아닌가! ‘그리운 금강산,’ ‘남촌,’ ‘보리밭’ 등 서정적인 멜로디의 우리가곡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눈에 띄게 달랐다. ‘백만송이 장미’와 ‘무조건’에 이르러서는 같이 박수를 치며 호응이 절정에 달했고 앵콜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앵콜 주문이 안 나오면 어쩌나 하던 걱정은 완전 기우였다. 나중에 우리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2부가 1부만큼 정교하고 차분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청중들의 반응이 좋았다면 그 이상의 성공은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같이 느끼고 호흡하며 즐긴다면 그것이 최고의 작품이고 예술 아닐까? 준비한 앵콜곡과 현지 성가대와 준비한 합동성가로 연주회를 마무리했다. 현지 자매님들이 단원 모두에게 장미꽃 한 송이씩을 안겨주는데 괜히 콧날이 시큰해 졌다. 어째 나이를 먹어가면서 감정이 조절이 잘 안되는 것 같다.
셋째날은 김대건신부님 서품 170주년 기념 공식미사(오전 11시)에 참석하였다. 역시 진쟈샹성당에서 거행되었고 울바우가 미사의 성가를 통째로 맡아서 이번에는 2층 성가대석에서 창미사로 봉헌하였다. 중국인 신자들 미사는 아침 8시 한 대 뿐이라서 한인공동체가 좋은 시간대를 점해서 미사를 드리고 있단다. 상해의 두 한인성당이 합동으로 봉헌하는 미사여서 성당이 꽉 들어찼다. 영성체 특송으로는 전날의 레퀴엠 중 ‘도미네 예수’와 ‘꽘올림 아브라해’를 불렀다. 미사 말미에 신부님께서 울바우에 감사인사를 하시면서 기념패와 선물까지 주셨다. 선물은 김대건신부님의 작은 입상인데 집에 모셔 놓고 기념하기에 그만이다. 중국 당국의 통제로 인해 김신부님의 야외동상(사실은 하얀 옥으로 만든 입상)이 제대로 설치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어서 더욱 간절한 의미를 던져주는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는 2대 최양업 신부님이 서품을 받으셨다는 쉬쟈후이[徐家匯] 성당에도 들렀다. 종루가 두 개 솟은 더 화려한 고딕양식의 건물로 지금 주교좌 성당이다. 관광객들이 비를 맞으며 줄 서 기다리는 중에도 우리가 당당하게 먼저 입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관광객’이 아니라 신자로서 순례중이라는 우리 안내자의 재치있는 설명 덕분이었다. 이미 성당 내부에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대성당이 관광상품이 된다는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귀국 비행기를 타니 한꺼번에 피로가 엄습해 온다. 긴장과 빡빡했던 일정을 감안하면 무리가 아니겠으나 일부 인사들의 경우 둘째날의 성공적 연주에 고무되어서였는지 야간행사를 3차까지 진하게 치렀다는 후문이 있어 그 경우에는 피로가 더욱 심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성 김대건신부님의 훌륭한 업적을 되새기고 현양하는 뜻 깊은 행사에 우리 울바우가 동참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보람이었다. 다른 단원들도 개인적으로 상해를 방문한 경험들이 있었다지만 이렇게 김신부님과 신앙의 행적을 기리는 계기를 갖기는 모두 처음이었다. 서울 뺨치는 고층건물이나 푸동지구의 화려한 야경보다도 허름한 헝탕성당이 더욱 가슴에 와닿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교회로 존재하는 진쟈샹 성당이 애틋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김대건신부님께 바치는 레퀴엠도 더욱 간절하고 엄숙하였다.
둘째는 단원간 더 가까워지고 화합하는 계기가 되어서 즐거웠다. 줄반장 ‘알뻥’형제가 빠져서 줄서기가 다소 싱겁기는 했지만 부단장님의 위트와 재치가 내내 우리를 즐겁게 했다. 중국 공안에 걸렸는지 입출국 ‘조장’직분을 박탈당했음에도 부단장님의 변함없는 입담은 살아 있었다. 연주회 후 묘령의 자매님이 하필이면 단장님도 아니고 부단장님께 금일봉을 건네어 감사를 표했다는데 그 자매님의 뜻은 감사히 받으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에 못지 않는 입담으로 좌중을 즐겁게 한 장동린 미카엘 형제가 부단장님의 강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으며 매혹적인 반바지의 뒤태로 시선을 모은 이인상 라파엘 파트장, 은근한 중국어 실력을 과시한 황우상 바오로형제와 이재범 형제, 안에서나 밖에서나 설거지 내조가 몸에 배어 숨기지를 못하는 송충면 가브리엘 형제, 중국에 온 김에 통일후 북한 건설사업 구상에 평소와는 달리 시끄럽던 김좌동 베드로·박래현분도 건축콤비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마침 현지서 생일을 맞아 축하를 받으시더니 금일봉을 쾌척하신 이충언 아오스딩 선배님은 헝탕성당의 즉석 합창을 제안하신 분이어서 관록의 노련함을 느끼게 하였다. 이 밖에도 미모는 물론 음악과 음주, 체력까지 뒷받침된 발군의 실력을 갖춘 모반주자, 평소 얌전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밤이면 저돌적으로 표변하는 남모교수, 또 그것을 뒤에서 사주한다고 알려진 조모교수, 수상한 아침행각으로 중요한 행사날 아침 전체단원의 출발을 지연시킨 김모형제 부부 등도 화제에 오른 단원들이었다. 이 모두 두고두고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또한 이번 행사는 울바우의 이름을 국내외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기에 뿌듯하였다. 뜻밖에도 카톨릭신문 기자가 전 일정을 취재하여 1면에 보도하여 준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상해에도 주보공지며 포스터, 팜플렛으로 이름이 많이 알려졌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수년 전의 흑산도 연주도 해외연주라고 우기는 단원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설에 불과하고 상해연주가 최초의 해외연주임에는 틀림없다. 이를 계기로 우리가 심신에서나 음악적인 면에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어 마지 않는다.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신 지휘자, 반주자께 감사드리고 행사준비에 애쓰신 단장님과 총무님을 비롯한 임원진께도 감사를 드리며 마음 모아 행사를 잘 치른 우리 단원 모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또한 우리를 성심성의껏 맞아 자리를 마련하고 수고해 주신 상해지역 한인성당의 형제자매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해외까지 동행하여 울바우 남정네들을 지켜보며 힘을 실어주신 동반자 자매님들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소중한 역사를 온 몸으로 쓰신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께 경의를 표하며 이를 섭리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상해공연 참관일기 ~~ 장동린 미카엘
2015년 8월14일 금
집합
오늘은 그동안 준비하였던 김대건신부님 서품 170주년 기념 음악회를 위해 상해로 출발하는 날이다. 새벽 5시에 서둘러 기상을 하고 전날 준비해놓은 핸드케리용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아침 8시까지 공항 3번 게이트 앞으로 모이라는 연락을 카톡을 통해서 받았다. 당초 집합시간은 8시 30분이었으나, 30분이 당겨진 것은 아마도 갑작스럽게 결정된 14일 대체휴무 공휴일로 인한 황금연휴로인해, 공항이 복잡할 것을 예상한 지휘부의 갑작스러운 결정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리라 생각되었던 버스는 45분 만에 공항에 도착하여 한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공항터미널 지하에 있는 간이식당에 들러 간단한 요기를 하고 통신사 공항대리점에서 전화기 로밍을 하였다. 모임시간에 맞추어 8시 5분전에 3번 출구로 향하였으나, 울바우 단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모두들 조금씩 늦는가보다 생각을 하였으나, 문득 모임장소가 “탑승출구” 앞이 아니라 “출입출구” 앞 이라는 생각이 들자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탑승 출구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위치한 출입문 3번 게이트에 도착하였을 때 많은 단원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문득 수속 창구번호를 모임장소로 정하였으면 착오가 없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공항 출발 / 푸동공항 도착
거의 정확한 시간에 인원점검이 끝나자, 출국수속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단체비자를 발급받았던 관계로 팀 별로 항공권수속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나를 포함한 5명의 조장은 장연상 총무님을 따라 대한항공 수속창구에서 절차를 밟은 후에 항공권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단원분들의 개인사정에 따라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Front seat, 출입이 잦은 사람은 Aisle seat로 배정받았다. 항공권 배부 후 세관 대를 통과하는 검문이 이루어졌다. 매번 탑승을 위해 이 관문을 통과할 때 마다 느끼는 기분 나쁜 통과의례의 긴장감은 잘못없는 사람이 마치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곳을 지나 면세점에 진입한 나는 비로소 화려한 쇼윈도에 매료된 자본주의의 화려함을 느낀다. 하지만 보여지는 것과 소유하는 것에 대한 갈등으로 생성된 복잡한 수학공식이 또 나를 혼란하게 만든다.
우리가 탑승하게 될 항공편은 대한항공 KE897으로 인천공항을 11;30분에 출발하여 12:25분에 푸동공항 도착 예정이었다. 최종적으로 여권과 탑승권 검사를 마치고 항공기에 탑승하였다. 1시간 25분의 짧은 비행시간임에도 우리는 소고기가 듬뿍든 기내식으로 식사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한 요기 만 한 탓인지 시장기가 느껴져 식사를 맛있게 할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알파치노 주연의 “데니콜린스”라는 영화를 한 편 보았다. 그가 출연하였던 ‘대부’ 영화를 가슴조이며 본지가 벌써 30여년이 되었으니, 영화 속의 그도 내가 보낸 딱 그 만큼의 시간을 지나 나이는 들어 보였으나 여전히 멋진 모습이었다. 비행을 마치고 푸동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팀은 단체(입국)비자를 받았던 관계로 조별로 줄을 서서 입국절차를 밟는 번거로움을 걸쳐 출구로 나오자, 현지 성당에서 마중 나온 최부득형제님이 우리를 맞으신다. 간단한 상견례 후에 준비된 관광버스에 올라 헝탕성당으로 성지순례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헝탕 성당
공항으로부터 약 2시간 가량의 시간을 걸려 헝탕성당에 도착하였다.
성당으로 가는 버스의 차창을 통해 상해 도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마중 나온 최부득 바오로형제께서 김대건신부님이 계셨던 상해에서의 발자취와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셨다. 헝탕성당은 김대건 신부님이 첫 미사를 드렸던 성당으로 내비게이션에도 안 나오는 외진 곳이라 만약 자유여행을 왔으면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横塘圣堂 : 上海市松江泗泾镇沪松工路2188号 021)57617079
성당내부로 들어서자 범상치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공들여 찾아간 성당은 성당내부 천정에 노출된 철골은 김대건 신부님 미사집전 당시의 모습과 동일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제대위에 설치된 만장에 적힌 한자의 의미를 각자의 이해에 맞게 해석을 하며 숙연한 성당 내부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많은 단원들이 성당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나도 오랜만에 여행으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모아 진심어린 기도를 드렸다.
이 충언 선배님의 즉석제안으로 성당 안에서 우리 합창단의 단가 “아베마리아”를 부를 때, 울컥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불안한 정국의 고향을 떠나 타국 땅에서 드리는 한국의 첫 신부님에 첫미사의 감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역사적인 성당이 주변의 개발로인해 곧 자취를 감출 예정이라고하니 참으로 가슴아픈 현실이었다. 성당 보존이 어렵다면 이전이라도 추진되어야한다는 가톨릭교회의 의지가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와이탄 야경
헝탕성당에서 숙소인 신동원 호텔로 돌아온 후, 체크인을 시작하였다. 숙소는 상해 코리아타운 중심가에 위치한 Business Hotel 이었다.한 방에 두명씩 배정된 방은 Twin Room 이었으며, 나는 강현백단원과 함께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방 배정 후에 호텔 주위의 한국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고, 곧바로 와이탄 야경을 보기위해 버스로 이동하였다. 시내 중심가를 관통하는 샛강 둔덕 전망대에서 바라본 상해의 야경은, 네오싸인과 수은등 불빛으로 치장된 고층건물에서 밝혀지는 오색 찬란하고 현란한 불빛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가이드를 자청한 현지 성당의 최부득형제님의 말에 의하면 상하이 야경은 홍콩의 야경을 보고 만든 것이긴 하지만, 규모면에서 홍콩의 야경을 능가한다고 한다. 밤의 화려함은 가끔 사람들의 피로를 잊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밤하늘에 비쳐진 오색빛의 향연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정경들이 사진으로 기억되어 기록에 남게 될것이다. 홍보부장을 대신한 이우신형제님의 수고로 멋진 단체사진을 찍었다. 야경 관광 후,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여행 첫 날의 고단했던 하루를 마감하였다.
2015년 8월15일
아침 산책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새벽녘에 눈이 떠졌다. 옆 침대에 동료가 자고 있어 불을 켜지 못하고 누워 있다가 밖에 나가 호텔 주변을 둘러보기로 마음먹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는 인기척이 일자 누워있던 강현백형제님도 같이 따라 나섰다. 새벽을 가르는 상해의 공기가 특별이 상쾌하지 못했던 것은 2.300만명이라는 워낙 많은 도시인구가 한정된 도시 공간에 밀집해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로를 청소하는 청소부아저씨의 빠른 손놀림 자락 끝에 매달린 대나무 빗자루가 새로운 모습으로 비쳐졌다. 길 건너 만두집 두 곳이 문을 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곳은 찐만두를, 다른 한곳은 부친만두를 파는 곳이었다. 많은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곳 사람들은 아마도 아침식사를 만두로 해결하는 것 같았다. 강 하구의 퇴적물이 쌓여 이루어진 도시이기 때문일까? 주변에 수로가 잘 형성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풍성한 수확을 이루는 비옥한 농토였으리라 짐직해 본다. 중국을 소개하는 사진과 그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물가의 버드나무가 하늘거리는 수로 주변의 풍경들이 이곳이 중국임을 실감케 하였다. 약 1시간 가량 주변을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상해 한인 푸서성당 교육관으로 버스로 이동하였다.
상해한인성당(푸서)교육관 /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우리가 안내된 곳은 상해한인성당 교육관이었다. 이곳은 현지에서는 쿼바디스 영화 속의 비밀집회 장소처럼 느껴지는 조심스러운 곳이었으나,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드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성모승천 대축일을 우리나라 광복절에 맞추어 제정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모승천대축일은 교회의 전례대로 8월15일이였고, 그 날에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의 광복도 성모님이 이루신 많은 기적 중하나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이곳에도 성모님을 기리는 또하나에 기적이 일어나 자유로운 신앙생활의 풍토가 자리잡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진자샹(금가항)성당 / 공연
교육관 주변의 한인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차량으로 진자샹성당으로 이동하였다. 포동 진자샹성당은 上海浦东新区紫槐路80号 (金家巷天主堂)에 위치하고 있었다. 잠시 후 5시에 있을 우리의 첫 해외공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이동하는 차 속에서 단체로 묵주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는 이번 성지순례에 함께한 송충면단원의 자매께서 선창을하여 주었다. 송충면단원의 자매님은 자제분을 사제로 키워낸 사제의 어머니이시다. 170여년전의 서품식의 그날의 김대건 신부님께서도 가장 먼저 고국에계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계셨으리라.... 묵주의 기도 5단을 드리며, 그동안 해외여행으로 들떠있던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 3시경 도착한 진쟈샹 성당은 화강암으로 지어진 돔형식의의 고전미가 두드러진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교육관 대기실에서 자리를 잡고 파트별 자리배치 및 리허설을 가졌다. 4시경 연합성가를 위해 현지 성가단원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번 발표는 우리 남성 합창단이 여성단원들과함께 노래한 유일한 공연으로 기억되어 질것이다.
오후5시 공연시간이 임박하였으나,푸서성당에서 출발한 버스가 교통체증으로 도착을 하지 않아 공연 시작시간이 10분가량 늦어졌고, 곧이어 신부님 말씀과 사회자멘트에 이어 우리의 역사적인 첫 해외공연이 시작되었다.
제1부 아베마리아 레퀴엠
제2부 피아노 독주(현지교우)
제3부 공연 가곡/가요/연합성가
아베마리아를 부르며 시작된 음악 속에서 느껴지는 강한 긴장감을 동반한 레퀴엠의 의미가 우리의 소리를 통해 진한 감동으로 관객 속으로 전해지기를 기원하였다. 그동안 소리를 음악으로 만드느라 수고하였던 지휘자님, 반주자님 및 모든 파트의 단원분들의 마음이 실린 우리의 합창은 진자샹 성당에서 김대건신부님의 고귀한 발자취를 기리고 있었다.
신부님,상해 행사추진위원과 석식
이번 김대건신부님 170주년 기념행사는 김동현 요셉 신부님이 계신 상해한인성당과 예진광 이레네오신부님이 계신 상해포동 한인성당이 힘을 모아 계획한 행사이었다.
저녁 시간 성당근처의 식당에서 신부님들과 행사추진위가 함께하는 만찬회 및 뒤풀이를 가졌다. 현지성당의 사목위원분들과 함께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시는 숨은 노고에 감사함을 느끼며, 그분들과 함께하는 일치의 시간이 되었다. 몇 순배의 술이 돌고 흥이 오르자 단원들의 앉은 자리에서 원탁 별로 합창소리가 울려 나오기 시작하였다. 오빠생각, 고향에 봄, 꽃반지끼고,사랑해 당신을... 등 예전에 우리가 젊었을 때 화음을 맞추어 부르던 추억 어린 노래들이 식당 안에서 큰소리로 경쟁적으로 불렸다. 문득 공중도덕을 준수해야 하는 고급 식당에서 “이렇게 노래를 불러도 되나?” 하는 걱정이 앞섰으나, 식당 종사자 혹은 손님 어느 누구도 우리의 행동을 만류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이곳은 대륙의 피가 흐르는 중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간이 넘는 만찬과 여흥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갖던 중, 호텔 로비로 모이라는 전화연락을 받았다. 1차 축하연의 아쉬움 때문인지 약 절반 정도의 단원들이 위수지역을 벗어나 호텔근처의 맥주 집에서 2차 여흥을 보내고 거의 12시가 다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공연으로 긴장되고 피곤한 하루 이었음에도 전혀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게 좋아하는 일을 잘해 낼 수 있는 재능까지 주셨으면 더욱 좋았으련만…….
2015년 8월16일 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서품 170주년 기념미사 참석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진쟈성성당 미사 참석을 위해 출발하였다. 어제 공연을 잘 마친 탓에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차창에 펼쳐지는 상해의 고층건물들의 사이를 두 번째 가는 길 이어서인지 낯설지 않은 거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도시와 새롭게 탄생되는 건물들이 서로 상충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의 한 가운데를 지나며 170년 전의 이 도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 도시 어딘가의 스쳐 지나쳤을 젊은 사제의 외로웠을 뒷모습이 그려졌다.
성가대석은 이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님 서품 170주년 미사의 성가전례를 우리합창단이 맡아서 하는 것 또한 커다란 기쁨이었다. 마음을 모아 노래하는 우리의 성가가 신자들과 함께하는 이 미사의 의미를 전달하는 뜻 깊은 여운으로 오래도록 남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미사 후 성당에서 준비한 식사를 전체 교우들과 함께하는 축제의 시간을 가졌다.
기자와의 만남
아침 호텔 식당에서 가톨릭신문 박지순 시몬 기자분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였다. 그는 우리의 상해공연을 시작 때부터 줄곧 취재해 온 기자 분이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깊은 신앙심과 상당한 음악지식을 가진 신앙인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침 옆자리에 반주자님과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대화 중에 지난밤 공연에서 “금강산 곡” 반주 속에 가려진 반주자만의 독특한 반주기법까지 찿아 낼 정도의 음악적 감각이 있는 분이었다. 취재를 혼자 하게 되어 외롭지 않았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너무나 감동적이 이 취재 길에서 많은 은총을 받았노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그가 취재 길에 방문하였던 서가회 성당은 감동적인 성지라고 추천하여 주었다. 장연상 총무께 공항으로 가는 도중 이곳을 들리는 것을 제안 드렸고, 현지의 안내를 이진귀 닐로 께서 흔쾌히 수락 하시여 서가회 성당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가회 성당
성당은 시내 중심가 홍교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래된 성당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인 적벽돌축조 성당의 모습으로 성당 본체 양쪽에 두 개의 종탑이 있었다. 이곳은 최양업 신부님께서 서품 받은 성당이기도 하다. 신부님에 대해 인터넷에서 알아보았다. 최양업신부님께서는 한국인 신부로서는 김대건신부에 이어 두 번째이시다. 1836년 15살 때 모방신부님에 의해 신학생 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유학 가셨다. 1949년 28살 때 김대건신부님보다 4년늦게 사제서품을 받았는데 서품식을 바로 이곳 상해 서가회 성당에서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에게서 받으셨다.서가회성당 바로 옆에는 주교관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이 성당은 주교좌 성당이었다.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할 당시 최양업 신부님은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선교회에 계셨다. 이때 순교사실을 라틴어로 자세히 적었고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아 병오박해와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오래된 역사의 현장을 뒤돌아 본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자연스럽게 당대의 그 상황으로 회귀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던 아련한 기운이 연민으로 느껴졌다. 회색빛 하늘에서 안개비가 내리던 순례의 마지막 날에 김대건 신부님을 뵈러 왔다가 최양업 신부님까지 뵙고 가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홍교공항 / 출국절차 / 김포공항 / 도착 후 해산.
출국을 위해 홍교 공항에 도착하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공항에서 서울로 출발하는 항공기는 모두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것 같았다. 저녁 9시15분에 도착예정이었던 서울 시간을 감안하면 인천공항보다는 김포공항 도착이 귀갓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시 단체비자에 명기된 순번대로 줄서기로 출국절차를 마친 후, 대한한공 KE2816 편에 올라 9시간 30경에 김포 공항에 도착하였다. 출국장을 빠져 나온 발걸음들이 다시 빨라진 것을 보면, 역시 서울은 몸과 마음이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인 것 같았다. 출국게이트를 나온 단장께서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가벼운 박수로 해단식을 가름하였다. 2박3일의 고단하고 바쁜 일정이었으나, 다른 해외여행과 다른 아련한 느낌의 기억들이 마음 속에 강하게 각인되는 이유는 이번 성지 방문길이 가졌던 우리들의 가슴 아린 “순례의합창”이 김대건신부님과 함께하였기 때문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행사 준비에 가려 놓칠뻔한 김대건 신부님의 영성을 다시금 생각케하는 훌륭한 후기를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멋진 음악회를 만들어 주신 울바우 교우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