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크기는 절망의 깊이에서 찾아야 합니다. 절망의 깊은 바다 그 맨 밑바닥에 인생의 본질, 깨달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나 석가모니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그 바닥에 닿았던 사람이고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입니다. 그러니,제아무리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도 저 두 사람,예수와 석가모니에게서 위로를 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학생이 어제 치른 시험지를 받아보았더니 점수가 20점이었습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꾸중들을 일을 생각하니 낙심천만이었습니다. 이 때, 바로 옆 자기 짝꿍이 백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싱글벙글하고 있다면 그 20점짜리 아이가, 그 백 점짜리 친구에게서 위로를 받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 앞에서 빵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우거지상을 하고 앉아있는 친구에게서 위로를 받는 겁니다. 이건 오래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디에 필요해서 20만 원을 은행에서 찾아다가 봉투에 넣어 책상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볼 일 때문에 밖엘 잠깐 나갔다 들어왔습니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고,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들어와서 보니 20만 원이 봉투째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놀러왔다가 가져간 것 같았습니다.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뭘 하겠습니까. 증거도 없이 말인들 한 마디 붙여볼 수 있겠습니까? 다 소용없는 짓이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자주 놀러가는 가까운 이웃집엘 갔습니다. 내가 20만 원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뭔가 위로의 말을 한두 마디 해줄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위로를 받고 싶어서 그 집엘 갔던 겁니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서니 그 집 식구들의 표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농사지은 것을 내다 팔고 들어오는 길에 75만 원이 든 봉투를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모든 식구가 손전등을 들고 나가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고 하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돈 20만 원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그들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집을 나서면서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구나, 하며 위로를 받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괴로운 사람은 자기보다 더 괴로운 사람에게, 외로운 사람은 자기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베토벤에게서 위로를 받지 못할 사람도 얼마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본 후 나는 베토벤에게서 커다란 위로를 받습니다. 그의 삶을 알고 난 후에 듣는 음악은 그래서 그의 삶을 알기 전에 듣던 것과는 백팔십도 다른 것입니다.
역사를, 그리고 역사적 인물들을 성적 시각에서 보지 않고는 완전히 알았다고 볼 수도 없고,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성적 시각으로 역사와 인물들을 읽을 때 다른 건 그만두고라도 우선 재미있고 흥미진진합니다. 여기서, 성적시각이라고 하는 것은 3류 잡지에서 나오는 스캔들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역사와 인물을 읽는 자기 자신이 성욕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체험이나 경험이 없이는 그 사람이 시인이건 철학자건, 성직자이건 역사학자이건 간에 우선 그러한 성적사관(性的史觀)을 집어 들어볼 수조차 없습니다.
홀아비 심정 과부가 안다지 않습니까? 베토벤은 평생 성욕과 싸우다 간 사람입니다. 단순하게 독신으로만 산 사람이 아니라 성욕과 정면으로 맞서서 피가 튀는 싸움을 평생 펼쳐 나간 사람입니다. 그 싸움의 고통에 비하면 귓병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둑을 높이 쌓아 올려 물을 가둔 뒤 어떤 장치를 통해 흘려내리면 전기가 생산 되듯 성욕도 그렇게 절제 했을 때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로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베토벤이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어느 책에서 읽고 알았는지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나의 이 글을 읽은 후 베토벤의 편지와 일기, 그리고 그의 초상화를 다시 한 번 꼼꼼히 들여다보세요. 이전과는 다른 어떤 느낌이 피부에 와 닿을 겁니다.
교향곡을 아홉 개 이상 써서 9번이라는 번호가 붙어 있는 교향곡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교향곡 9번’이라고 했을 땐 베토벤의 합창을 떠올리게 되는 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주제는 “성과의 전투”입니다. 성욕과의 치열한 전투를 그렇게 생생하게 그렇게 극적으로 표현해 낸 작품을 나는 음악뿐 아니라 어느 글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교향곡 9번 합창은 결심과 맹세, 그리고 성을 향한 선전포고로 시작해서 그것이 끝없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달려가 부딪히기를 계속 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적을 쓰러뜨리고 이겨보는 적이 없습니다. 번번이 나가 떨어져서 피투성이이고 낙심,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전의 상실, 한숨, 고통, 절망이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옷깃여미며 신의 제단 앞에 경건히 무릎 꿇는 눈물의 기도가 있습니다. 결국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렇게 해도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아울러 깨닫습니다. 체념. 하지만 그 때의 체념은 곧 숭고한 결단으로 맺어졌고 그래서 다시 일어납니다. 이제가지의 패배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패의 연속이었을망정 이제까지의 싸움을 통해서 그는 상대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정신에도 근육과 힘이 붙었습니다. 진정한 승부는 이제부터입니다. 목숨을 건 총 공세가 시작됩니다. 더 이상 나가떨어지지도 않고, 피투성이가 되지도 않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도저히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대등한 싸움! 자신도 놀랍니다. 아득하게만 보였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해볼 만 하구나! 자신이 생기고 용기가 폭발합니다. 최후의 일격을 가해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마지막 총 공세에 나서면서 4악장이 끝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가 성욕과의 싸움, 그 싸움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음표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게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기 때문에 합창은 서정적 아름다움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욕과 싸워나갈 때의 맹세와 고통, 절망과 환희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곡을 들어도 내용을 알 수가 없고, 감동도 덜 하게 마련입니다. 교향곡 9번은 그가 성욕과의 싸움이 가장 치열할 때, 그리고 그 싸움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시기에 씌어졌고 그래서 이 장쾌하고도 위대한 곡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교향곡 9번을 수도 없이 들었고, 교향곡 9번을 들으면서 용기를 얻어 싸우며 나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베토벤은 자기 자신이 결혼에는 적합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고, 그렇게 되면 불행에 빠져 허덕이게 되고 따라서 작곡에 큰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토벤을 놓고 그가 결혼을 못한 것이지, 안한 게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은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그렇다고 쳐도, 그가 연애와 자위행위에 대해 보여준 그의 노력과 투쟁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가 여성들을 사모하고 또 여러 여성에게 연모의 정이 듬뿍 담긴 구애의 편지를 쓴 것도 사실이지만 그 편지를 쓰면서도 그의 속 본심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 여자가 나의 프러포즈에 덜컥 승낙하고 나오면 어쩌나.” 이것이 베토벤의 본심이고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프러포즈의 대상은 늘 실현이 불가능한 여성들이 주였습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곡예와도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는 여자를 두려워했고, 경계의 눈을 한 시도 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그런 삶이 그의 노력만 가지고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신이 그를, 베토벤을 사랑해주셨던 겁니다. 그를 자신의 도구로 쓰기 위해 신은 여성들로부터 베토벤을 특별한 방법으로 지켜주신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의 그런 가호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베토벤이라 해도 여성의 마력에서 그렇게까지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여성들이 반발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신이 자신의 도구로 쓰기 위해 남자로부터, 남성의 마력으로부터 어느 여성을 지켜주실 수도 있으니까요.
사람의 힘과 노력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꼭 필요 합니다. “못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꼭 지켜 주옵소서!” 하는. 서러운 이야기지만, 베토벤도 언젠가는 잊혀질 것입니다. 시간 앞에 남는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그가 흠모해 마지않던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그 외에 지금 우리가 위대하다고 기리는 모든 이들이 인류의 기억에서 쉬이, 쉬이 잊혀져 가겠지만 베토벤은 가장 나중까지 남아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우리의 앞길을 오래오래 비춰 줄 것입니다. 내가 베토벤보다 나중에 태어나서 그를 알고,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내 생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오늘도 베토벤이 그립습니다.
2008 년 강봄 양홍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