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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 4장, 5장
아내와 남편, 고난에 경건하게 대응하기, 옥에 있는 영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 양무리를 치라
<아내와 남편>
1~12절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남편들은 가정에서 인도자가 되어야 하며 아내들은 남편의 인도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말씀'(즉, 복음)에 불순종하는 믿지 않는 남편이 있다면 아내는 남편에게 개종하도록 압력을 가하려해선 안됩니다. 그 대신 아내의 경건한 '행실'은 '말로 말미암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증언할 것입니다. '자기 남편', 성경은 결코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가정과 교회에서 남자의 지도적인 지위는 긍정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남자와 여자의 동등함도 긍정합니다(1~2절).
'너희의 단장은....외모로 하지 말고', 여기서 베드로의 가르침은 당대에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 "외모 단장"은 1세기의 초상화와 조각상에서 볼 수 있으며 로마의 상류사회에서는 여자들의 세련된 머리치장과 과시적인 장신구 착용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 여성은 '마음'의 내적인(숨은)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을 특징으로 하는 아내의 경건한 성품입니다. 베드로가 말 그대로 모든 딸은 머리나 모든 금 장신구 착용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똑같은 금지가 옷을 입는 것에도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개인적인 외모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의 물질적인 지나침에 대해 경고합니다(3~4절).
'사라가 아브라함을....순종한 것 같이', 베드로는 사라의 복종을 순종의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그런 순종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와 같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아내는 남편의 방향제시와 인도에 따라야 함을 보여줍니다(6절).
남편들에 대한 베드로의 충고는 압축적인데 이는 아마도 학대받을 가능성이 더 높은 권위 아래 있는 자들(종들과 아내들)에 대해 더 길게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와 남자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라는 동등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둘 다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이 아내들의 경건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남편들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실 것입니다(7절).
베드로는 시 34:12~16을 인용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의 복의 결과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일이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길이며 불순종은 함축적으로 하나님의 징계로 이어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 34편을 계속해서 인용합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그들을 주목하시고 돌보시기 위해)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다양한 필요와 돌봄을 위해) 이는 하나님이 순종하는 신자들을 고난에서 지켜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신자들을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뜻입니다(10~12절)
<고난에 경건하게 대응하기>
13~22절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베드로는 이미 믿음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런 고난은 있음직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요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아무도 궁극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해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상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들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입니다(13~14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에 대한 핵심적 진술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신 것에 대한 한가지 해석은 "육체로는" 이란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달리신 가시적이고 육체적인 영역을 뜻하며 "영으로란" 이란 말은 그리스도가 현재 머물고 계신 보이지 않고 영적인 영역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죽으셨으나 성령을 통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셨다는 것입니다(18절).
<옥에 있는 영들>
이 영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헬라어 단어 '프뉴마'는 단수형이나 복수형에서 문맥에 따라 인간의 영혼이나 천사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다음 세 가지 해석 중에서 처음 두 가지에서 이 나머지 성경 및 정통 기독교 교리와 가장 잘 들어맞습니다. 이 세가지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 번째 해석은 "영들"(헬, '퓨느마신' 복수형)을 노아 시대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인간의 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는 "영으로"(벧전 3:18) "노아의 날"에 노아를 통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들은 불신자들은 "노아의 날....복종하지" 않았고 현재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그들이 옥에있는 영들"). 몇 가지 이유가 이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a) 베드로는 노아를 "의를 전파하는 노아"(벧후 2:5)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전파하는' 자라는 말은 헬라어 '케뤽스', '전파자'를 표현한 말로 이는 벧전 3:19에서 동사 '케뤼쏘', '선포하시니라'에 상응합니다.
(b)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1:11). 따라서 그리스도는 구약의 한 선지자인 노아를 통해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c) 전후 문맥은 그리스도가 박해 받는 소수에 속해 있던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가리키며 하나님은 노아를 구원하셨는데 이는 베드로 시대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는 현재 베드로와 베드로의 신자들을 통해 복음을 박해 받는 소수에게 전파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2) 두 번째 해석에서 영들은 지옥으로 내던져져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어떤 해석자들은 창 6:2~4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노아의 날....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벧전 3:20) 인간 여자들과 동거함으로써 죄를 지은 천사들이라고 말합니다(창 6:1~2).
(b) 신약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영들"(복수형)은 사람들이 아닌 초자연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c) "옥"이라는 단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인간에 대해서는 죽음 이후의 형벌의 장소로 사용되지 않는 반면 사탄(계 20:7)과 다른 타락한 천사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사용합니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가 선포하실 메시지는 거의 확실히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신 뒤에 선포하신 승리의 메세지입니다(벧전 3:18).
(3) 세 번째 견해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지옥에 있는 이들에게 두 번째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셨다는 개념을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른 성격 및 베드로전서의 나머지 내용과 직접적으로 모순되며 따라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근거에 따라 거부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두 가지 해석 중에 하나가 가장 가능성 있는 해석으로 남습니다(19절).
베드로는 방주를 통한 구원과 '세례'를 통한 구원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신자들은 심판의 물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세례는 심판을 통한 구원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기계적인 세례 행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드로는 명백히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라고 말하면서 육체를 물로 씻는 행위는 어느 누구도 깨끗하게 하지 못함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향한'('선한 양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간구를 통해 드러나는 바와 같이 내적인 믿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너희를 구원'한다 입니다.
더 나아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근거하는 한에 있어서만 '구원'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 시각적 표현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에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초기 역사부터 물세례의 올바른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을 보여 왔지만 물세례에는 거듭남이라는 내적 실제의 외적인 표시이며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고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만 받을 수 있다는 점에는(교리적 차이와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동의해 왔습니다(21절).
18~ 22절의 핵심적 진리는 그리스도가 원수들에게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 우편'으로 오르셨고,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므로 모든 '천사들'과 귀신의 '권세들'이 그에게 '복종'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승리하셨음을 알기에 고난 속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22절).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1~11절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그리스도께서....고난을 받으셨으니', 그리스도의 고난은 또다시 신자들을 위한 모범과 영감의 역할을 합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베드로의 요점은 신자들이 기꺼이 고난 받으려 할 때 그들의 삶 속에서 죄의 근본 뿌리가 절단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는 않겠지만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견뎌낼 때 자신의 삶의 목표가 자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임을 보여주게 됩니다(1~2절).
'음란과....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불신자들의 삶은 1세기부터 21세기까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은 그런 행위에 동참하지 않으므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비방을 받더라도 그런 행위에 동참해선 안 됩니다(3~4절) 불신자들에게는 최종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실대로 고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할 것입니다(5절).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어떤 이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거부 된 이들에게 죽음 이후에 두 번째 기회를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견해는 나머지 성경 전체에 거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신자들의 인내 및 "산자와 죽은 자"에 대한 임박한 심판과 관련된 인접 문맥에 모순되므로 지지할 수 없습니다. 인접 문맥을 감안할 때 "죽은 자들"이란 살아 있을 때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그 이후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5절의 "죽은"의 의미와 잘 어울립니다. 신자들은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겠지만 이제 그들은 육체로는 살아(즉, 그들은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죽은 신자들은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서' 삽니다(즉, 그들은 현재 하늘에서 살며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부활 때도 살게 될 것입니다). (6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이는 베드로 가 몇 주 또는 몇 달 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을 기대하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서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과 오순절의 성령 강림에서 절정에 이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에 모든 주요 사건들이 이미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느 때 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재림은 베드로의 시대에도 "가까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임박한 종말의 도래는 예수님의 재림만 기다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들은 기도에 전념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의 유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7절).
타인을 향한 지속적인 사랑은 그 사람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곳에서 사람들은 죄를 자주 눈감아주고 금방 용서합니다. 그리스- 로마 밑 유대 문헌에서 모두 매우 높이 평가하는 손님 '대접하기'에는 여관이 위험하고 불쾌한 곳이 될 수도 있었던 시대에는 매우 절실했습니다(8~9절).
모든 신자는 최소한 하나님에게 한 가지 영적인 은사는 받았으므로 이 은사들을 감추어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처럼 신실하게 사용해야 합니다(10절). '누가 말하려면....누가 봉사하려면', 베드로는 영적인 은사들을 일반적으로 말하는 은사와 봉사하는 은사로 구분합니다. 이들은 자신만의 생각을 제기하지 말고 신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11절).
결말이 가까워지면서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고난을 당할 때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은 고난 중에 주저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베드로는 지도자들과 회증 전체에 대해 그들이 최후의 상급의 확실함을 알고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라는 권면으로 편지를 끝맺습니다.
<고난 속에서의 인내>
12~19절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말은 편지의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표시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반적인 것이지 놀라운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즐거워하라'는 부르심이며 그런 기쁨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찾아올 기쁨의 전주곡입니다(12~13절).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치욕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영광의 영', 특별히 강력하게 신자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현재 신자 위에 계신 분은 예수님 위에 임하셨던 바로 그 성령이십니다((14절).
신약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신자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사용합니다. 이 말은 안디옥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아그립바는 이 단어를 바울과의 대화에서 사용했습니다(행 26:28). 이 단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오명 대신 영광을 돌리시도록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16절).
구약에서 '하나님의 집'은 성전을 가리키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 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은 에스겔 9장1~6절과 말라기 3장1~4절에 암시하며 거기서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연단시키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심판은 벌하는 것이 아니라 정결케 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고난은 그들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정결하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분명 훨씬 더 혹독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70인역에서 잠원 11장 31절을 인용함으로써 이점을 뒷받침합니다. '겨우 구원을 받으면', 이는 의인이 단지 간신히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겨우"(헬, '몰리스', '어렵게')는 의인이 고난 가운데 구원을 받음을 뜻합니다. 의인의 구원은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17~18절).
이 구절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는다는 베드로전서의 메세지를 요약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주권적인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또한 자비로우시고 미쁘신 분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실 때 그렇게 하셨듯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그런 신뢰는 '선을 행하는' 가운데 드러납니다(19절).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
1~11절을 볼께요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가장 흔한 신약의 용어는 '장로들'입니다. 장로들은 소아시아 북부의 교회들을 포함한 모든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이 직분이 신약 교회의 전형적인 지도자의 형태였음을 보여줍니다. 사도인 베드로도 같은 장로이자 그리스도의 사역,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의 권위 있는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배드로는 종종 자신이 편지를 보내는 이들에게 고난이 '영광'에 선행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1절).
장로들에게는 '양 무리를' 칠(헬, '포이마이노', '양을 돌보다', '목자 역할을 하다') 책임이 맡겨집니다. 영어의 동사와 명사 'pastor' ('목회하다, 목사')는 이 헬라어 단어('포이마이노')에서 유래했습니다(라틴어 '파스토르'는 '목자'를 뜻합니다). 장로들에게는 또한 감독하는(헬, '에피스코페오'를 번역한 말) 일도 맡겨집니다. 이 '감독하는'이라는 말은 명사 '감독'(헬, '에피스코포스')의 동사 형태이며 감독은 장로로 섬기는 이들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입니다(참조 행 20:28). '양 무리를 치다', '감독하다'라는 말은 장로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즉, 그들은 양 무리를 먹이고 보살펴야 하지만) 장로라는 호칭은 그 직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장로들에게 그 맡겨진 책임을 그들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 세 가지 권면을 합니다. (1) 장로들은 교회를 '억지로' 의무감에서 목양하는 대신 기쁜 마음으로 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함으로 목양해야 합니다. (2) 장로들은 탐욕으로나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헬, '아이스크로 케르도스', '부정직한 이득을 좋아하며 탐욕스럽게')가 아니라 '기꺼이' 일해야 합니다) (3) 장로들은 회중에게 '본'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주장하는 '자세'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선 안 됩니다(2~3절).
'목자장'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신실하게 섬긴 모든 목자에게 영광으로 상 주실것입니다(4절).
'젊은 자들'은 회중 가운데 젊은 지체들을 의미할 것이며 이들은 고집이 쎄고 지도자들에게 반대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다',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따라서 '서로 겸손'하게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후회 베푸신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잠언 3장34절을 인용합니다(5절).
'겸손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섭리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능하신 손으로" (예컨대 출애굽기 3장 19절, 32장 11절, 신명기 4장 34절) 애굽에서 구출하신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난 당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수치의 날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든 마지막 날에든 하나님은 '때가 되면' 자기 백성을 높이실 것입니다(6절).
'근신하라 깨어라',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그들의 큰 원수이자 대적인 마귀의 공격에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드로는 사탄의 파괴적인 위협을 묘사하기 위해 생동감 있는 사자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사탄은 신자들이 고난과 박해로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속아서 죄에 빠질 것을 바라면서 '두루다니며 삼킬자'를 찾습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삼키려 위협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8절).
'그를 대적하라',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고난이 끝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높이실 것임을 압니다. 소아시아 북부의 신자들이 경험한 고난은 그들에게만 독특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은 모든 곳의 신자들('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이 처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용기를 가져도 됩니다. "세상에 있는"이란 말이 베드로 시대에 전 제국에 걸친 기독교를 박해하는 착령이 있었음을 암시하지는 않지만 어느 시대에든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만 고난중에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9절).
'잠깐',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시작해서(참조, 행 1:6~11) 말세에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기간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보내는 시간은 현저히 짧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고난이 아무리 길거나 극심하더라도 그 고난은 영원한 기쁨에 비하면 짧을 것입니다. 네 개의 동사('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마침내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잃어버린 것들을 무엇이든 회복시켜주실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고난이 먼저 오겠지만 그 뒤에는 '영원한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은혜'로 효력있게 부르신 하나님은 그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능력으로 그들을 강건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다스리시므로 신자들은 두려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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