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1)
조선일보
입력 1997.10.2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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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최후의 24시간
⑪권총 안찬 경호실장 ##.
대통령이 궁정동에 도착할 시각이 다가오자 김재규와 김계원은 만찬장인 나동으로 향했다. 윤병서 비서의 기억에 따르면 이때가 저녁 5시40분경이었다. 김재규는 본관을 나서면서 따라 나오는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에게 귀엣말로 "2 차장보가 오늘 손님을 모시고 올 텐데 저녁 7시까지 내가 나오지 못하면 손님들끼리 먼저 식사를 하도록 하게"라고 당부했다. 아담한 2층 양옥 건물 나동 앞에는 정원이 있고 화강암을 깎아서 만든 경계석이 화
단과 마당을 가르고 있었다. 여기에 걸터앉은 김재규 정보부장과 김계원 비서실장은 계속해서 차지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사회 공기가 얼마나 험악한지 실장님도 모르실 것입니다.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우선은 조용해졌지만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김 부장, 대한민국 정부가 그렇게 약한 줄 아시오. 학생들이 비판한다고 오늘 내일 정부가 쓰러질 것 같소.".
"맑은 물에 무엇같은 놈 한 마리가 앉아서 자주 물을 흐려 놓으니 일이 되겠습니까."
"무슨 일만 있으면 각하에게 쪼르르 쫓아가서 고자질을 하니 야단이야. 그러니 각하는 자꾸 강경해지시고….".
"오늘 저놈을 해치워야 일이 올바르게 되지 저놈이 옆에서 각하의 판단을 흐려 놓는 한 잘 되기는 글렀습니다. 저 놈을 오늘 해치울까요, 어떻게 하지요.".
김계원은 이때 김 부장이 또 과격한 불평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 실장의 월권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일 이야기하게 되어 있어"라고 했다. 김재규는 "미지근하게 하면 안 됩니다"고 다짐을 주듯 말했다.
정보부 안전국장 김근수가 10·26사건 뒤에 합수부에서 진술한 내용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1979년 5월 중순 어느날 오전에 신민당 전당대회에 관련된 보고를 부장에게 올리는 정보부 간부회의가 있었다.
김재규는 "차 실장은 ○○○을 어떻게 조종했는지 모르겠어. ○○○이 무슨 보스인가. 이기택만도 못한 머저리 바보다"라고 했다. 이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을 조종하여 김영삼의 총재
당선을 저지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그 책임을 정보부의 무능으로 돌리는데 대한 신경질이었다. 당시 차지철은 경호실에다가 정보처를 신설하여 산하에 사설정보대를 운영하고 여야 양쪽에다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국회의원들을 조직하여 두고는 정보부가 해오던 정치공작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정치공작의 설계를 경호실장이 하고 정보부는 그 심부름을 하는 형편이었다. 정치공작이 실패로 돌아가면 차지철은 책임을 정보부로 돌려 버리곤 했다. 김재규는 수시로 경호실장에게 불려 가서 지시를 받고 오는 형편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정보부 간부들이 다 알고 있어 부장의 권위도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차지철실장이 정치에 신경쓰느라고 본연의 임무인 경호는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오후 5시40분쯤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은 대통령을 모시러 가려고 사무실을 나섰다. 부관 이석우가 떠나는 실장에게 권총을 건네 주었다. 실장은 "갖고 있으라"고 돌려 주는 것이었다. 이석우 부관은 권총을 받아 도시락 상자같이 생긴 권총집에다가 넣었다. 이석우는 그 전에도 차 실장이 궁정동으로 대통령을 수행하러 나설 때는 권총을 건넸으나 매번 차지철은되돌려주기만 하는 것이었다. 오기가 생긴 이 부관은 '그래도 대통령을 모시는 자리인데 경호실장이 권총을 안 차고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계속해서 권총을 권했다. 차 실장이 권총을 차고 가지 않게 된 것은 서너 달 이전부터였다. 이석우는 차 실장이 대통령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오후 5시50분쯤 차지철은 부속실로 올라왔다. 대통령 부속실 이광형 부관은 그때 비로소 저녁 약속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은 집무실을 나서면서 약간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군, 나 경호실장 하고 저녁 먹고 올 테니까 서재 문 잠그고. 어… 그런데 인터폰하니까 근혜 없던데, 근혜 어딨나.".
그때 근혜는 응접실에서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대통령은 근혜의 방으로 인터폰을 건 모양이었다.
"근혜보고 먼저 밥먹으라고 이야기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던 것들은 위에 올려 놓고."
"예.".
경호실장과 대통령이 현관으로 나가는 동안 이 부관은 밖으로 뒤따라 나와 대통령의 등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히 다녀 오십시오.".
본관 앞에는 비공식 행사때 쓰는 크라운 슈퍼살롱이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본관 당직 책임자 함수용 경호과장이 승용차의 문을 열고 있다가 대통령을 배웅하였다. 차 실장은 대통령 옆자리에 탔다. 정인형 경호처장은 자신의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운전사 옆자리에 앉았다. 정인형 처장은 지도를 항상 준비해 있다가 뒷좌석에 앉은 대통령이 "저 공장은 뭐야"하고 물을 때마다 즉답을 해야 했다. 요사이 그는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써야 할 입장이었으나 대통령 앞에서 불경스럽게 보일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석에선 "이제 나도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안재송 부처장,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
호관은 뒷차에 탔다.
오후 6시5분, 대통령을 태운 슈퍼살롱이 궁정동 나동에 도착했다. 이 슈퍼살롱은 대통령이 사적인 행차를 할 때 쓰는 차였고 운전사도 공용차 운전사 이타관이 아닌 김용태였다. 남효주 사무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오른쪽 뒷문을 열었다. 대통령이 내리자 왼쪽 문으로 차 실장이 내렸다. 대통령은 내리면서 남 사무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효주는 '오늘은 각하께서 별로 기분이 좋으신 편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대통령을 모셔 본 남사무관은 대통령의 표정만 보면 그날 기분을 대충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꼭 "별일 없나"란 말을 하면서 웃음을 보였다.
남 사무관이 대통령 일행을 만찬장인 안방으로 안내했다. 주방으로 돌아오니 정인형, 안재송, 김용태 세 사람이 주방 한가운데에 있는 식탁에 둘러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주방 바깥에서는 김용섭 경호관이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과 함께 그가 원당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 한 통을 뉴 코티나 보닛 위에 올려 놓고 마시고 있었다. 박상범은 속이 거북하여 김용태가 주는 가스명수를 마셨다. 남효주는 요리사에게 안주를 빨리 준비하라고 시킨 뒤에 정인형 처장에게 "그만 들고 나가시지요"라고 했다.
당시 경호 관례에 따르면 청와대 경호원들은 정보부가 관할하는 궁정동 시설에 도착한 뒤에는 대통령 경호를 정보부에 넘기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궁정동에 도착한 청와대 경호원들은 한숨을 돌리고 식사를 하곤 했다. 이곳 궁정동을 관리하는 정보부 직원들 하고는 워낙 얼굴이 익고 친구 사이인 경우도 있어 일단 긴장을 푸는 것이었다.
김계원은 만찬장인 안방에 들어가자 안쪽으로 마주보고 앉게된 대통령에게 "각하, 오늘 행사에 다녀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괜찮습니까"라고 했다. 대통령은 "아, 괜찮아요. 그 큰 공사를 잘 했던데"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삽교천을 다녀온 감상을 설명하면서 "KBS에서는 준공식을 방영하지 않나"라고 했다. 차 실장이 "시간이 되면 틀겠습니다"고 안심시켰다.
[계속]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2)
제1부 최후의 24시간
(12)두여인
조선일보
입력 1997.10.30. 18:36
대통령은 탁자 건너편에 앉은 김재규 부장을 향해서 {부산 마산에 별일 없지}하고 물었다.
{예, 별일 없습니다.}
시바스 리갈을 얼음이 든 물컵에 타서 젖고 있던 김부장이 대답했다.
{부산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해서 하는 일인데 괜히들 놀래가지고 야단들이야. 신민당 의원이 나한테 와서 말한 게 있어. 오늘 삽교천에 가 보았지만 국민 대다수는 다 열심히 일하는데 부산 데모만 하더라도 그렇지 식당 뽀이, 똘만이들이 많았잖아. 그 놈들이 어떻게 선별수리란 말을 알겠어. 중앙정보부가 수고 많이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예, 알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김 부장의 얼굴은 어두웠다. 이날 박대통령은 부산사태는 김영삼의 신민당이 조종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선입견을 깔고서 김재규와 정보부의 무능을 질책했다. 이것이 김재규로 하여금 더욱 울화를 치밀게 하였다. 김계원이 군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은 저간의 사정을 잘 설명해준다.
[지난 10월16일 부산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에 관하여 차지철은 각하에게 신민당이 배후조종한 폭동이라고 보고해서 선입견을 갖게 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조사결과 신민당이 아니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 불온단체와 일부 반정부학생들이 가담했다고 보고했으나 각하로부터 거절당하고 오히려 야단을 맞게 되자 김재규는 그 원인이 차지철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눈치채고 분노가 극에 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는 그 전에도 수 없이 김계원에게 이렇게 털어놓곤 했다.
{각하께서 나 보고 무어라고 명령하는 것은 좋지만 지가 뭔데 한 수 더 떠서 이러쿵 저러쿵 나에게 이야기하는지, 짜식….}
대통령은 김재규 부장에게 다시 한번 퉁명스럽게 물었다.
{신민당 공작 어떻게 되었소.}
{다 틀렸습니다. 당직에서 사표 내겠다고 한 친구들이 모두 강경으로 돌아서버렸습니다. 암만 해도 당분간은 정운갑 대행 체제의 출범이 어렵겠습니다.}
이때 차지철 실장이 나섰다.
{그까짓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탱크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
김재규는 [야 이 친구 또 이런 자리에서…. 꼭 마찬가지로구나]하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못마땅한 말투로 얘기를 계속했다.
{설사 일괄 반려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 친구들 괜히 놀라서 야단들이야. 참 답답하단 말이야.}
차지철이 이 말을 받아 {각하, 정말 그렇습니다}고 반주하듯 말했다. 대통령은 {국회의장이 무슨 잘못이 있어…}라고 중얼거렸다. 차실장은 두 여자 때문에 안방과 바깥을 들락날락했다.
신재순과 심수봉이 궁정동 안방 옆 대기실에 도착한 것은 6시15분쯤. 의전과장 박선호가 나갔다 오더니 서약서를 내놓았다.
오늘 듣고 본 것을 바깥에 나가서 발설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는 상투적인 내용으로 인쇄된 문안에 사인만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정인형과 안재송 두 사람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차
실장이 오더니 또 몇 가지를 물었다. 그 다음 박선호가 신양에게 [단독으로 각하를 모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신양은 어제 본 박 과장과 너무 달라진 오늘의 박 과장을 대하고 흠칫했다. 얼굴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심수봉은 대기실에 기다리면서 안재송 부처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사격이 취미였던 심양은 태릉사격장에서 안재송을 만난 적이 있었다.
6시30분쯤 차 실장이 안방에서 나오더니 남효주 사무관에게 {지금 여자 손님이 두 분이 있는데 현관앞에서 대기시키고 내가 들여보내라고 할 때 들여보내라}고 하고는 다시 들어갔다.
식당 관리자 겸 안방 전담 웨이터 남효주는 박선호를 찾아 경호관 대기실로 가보았다. 박선호가 정인형, 안재송, 그리고 두 여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차 실장의 전달사항을 박선호에게 말해주었다. 박 과장은 두 여자를 내보내어주었다. 남 사무관이 안방 입구 쪽에 있는 부속실로 안내하여 기다리도록 했다.
잠시 후 경호실장이 안방에서 나오더니 두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두 여자는 실내화로 갈아신고 핸드백과 기타를 그곳에 놓아둔 채 살며시 들어왔다.
심수봉은 대기실에서 정보부장과 경호실장이 언성을 높여 다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긴장했다. 처음 와 본 신양의 눈에 들어온 방은 한 여섯 평이 되는 온돌방이었다.
한가운데 직사각형의 식탁이 놓여 있었고 뒤쪽으로는 십장생이 그려진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으로 작은 진열장. 두 여자가 들어왔는데도 네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심수봉은 대통령의 왼쪽, 신재순은 그
오른쪽에 앉았다.
신양은 김재규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이날 가장 정확한 목격자가 될 수 있었다. 신양은 네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심각하게 진행되자 긴장을 풀려고 식탁 위에 놓인 안주를
세어보았다.
꿀에 재운 인삼, 도라지 나물, 부침, 생채, 송이구이, 편육, 시바스 리갈 두 병, 선 담배 두 갑. 술상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대통령이 먼저 심수봉을 보고 한 마디 했다.
{이 아가씨는 텔레비에서 많이 본 얼굴이고.}
신재순을 쳐다보면서는 {이 아가씨는 처음이군}이라 하더니 {예쁘게 생겼군. 이름이 뭐지. 나이는?} 하고 물었다.
긴장한 신양이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통령은 심수봉에게 {본이 어디지?} 하고 물었다.
청송심씨인데 고향은 충청도라고 하자
대통령은 {충청도 놈?}하고 웃더니 {작고한 총무처장관과 같군}이라고 했다. 심의환
장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통령은 전날 심 장관의 부인에게 위로 편지를 써 집무실 금고에 넣어놓고 있었다. 10·26사건 후 대통령의 집무실을 정리할 때 발견된 이 서신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인생은 원래 무상한 것이고 회자정리라고 하였으니 한번 왔다가 한번 가는 것은 정한 이치인 줄 알면서도 너무나도 홀연히 떠나시니 애석하고 허전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고인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가신 편지사연을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고인도 이 편지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신이라는 것을 영감적으로 느끼면서 썼으리라는 흔적이 구절구절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읽으면서 단장의 슬픔과 감회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3)
조선일보
입력 1997.10.31. 19:48
## ⑬자리를 빠져나와... ##.
두 여자의 등장으로 술자리의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졌다. 대통령은 빠른속도로 술잔을 비웠다. 시바스 리걸을 주전자에 부어서 마시고 있었다. 양주잔은 주로 대통령과 김계원비서실장 사이에서 오고갔다.
차지철경호실장과 김재규정보부장은 술잔에 입술을 갖다대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신재순양이 보니 김재규가 맞은 편에 앉아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신양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차 실장이 또 한 마디를 거는 것이었다.
"요즘 정보부는 뭘 하는지 모르겠어. 부산사태만 해도 그렇지.".
대통령은 또 시국문제를 꺼냈다. 차 실장이 자극적인 발언으로써 대통령을 부추겨 이 화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오늘 삽교천에 가 보니 공해도 없고 공기는 그렇게 좋은데 신민당은 왜그 모양이오."
"신민당은 주류가 중심이 되어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정운갑을 미는 것은 비주류인데 국민들은 이들을 사쿠라시하니 힘이 없습니다. 주류의 협조가 없이는 정대행체제의 출범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공작하던 현 당직자 백지화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까짓 새끼들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차 실장은 예의 강경한 소리를 되풀이했고 김 부장은 대책 없는 비관론을 되풀이하니 대통령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한편 정승화총장은 오후 5시30분경에 총장실에서 나와 한남동 공관에 가서 사복으로 갈아 입었다. 오후 6시10분경에 공관을 출발했다. 전속부관 이재천소령이 승용차 앞자리에 앉았다. 6시35분쯤 궁정동 정보부 사무실에 도착했다. 정문초소 안에서 경비원이 바깥을 보더니 문을 열어주고 누군가가 나와서 안내를 해주었다.
안내자를 따라서 들어가는데 뒤에 도착한 승용차에서 내린 한 중년신사가 따라왔다. 사복차림의 전속부관 이재천이 그 신사에게 "우리 참모총장이십니다"라고 소개를 했다.
신사는 문전에서 "제2차장보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더니 정총장을 안내하여 1층 대기실로 같이 들어가 앉았다. 이때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대령이 오더니 차장보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부장께서 각하와의 만찬자리에 가시면서 두 분이 먼저 식사를 하시라고 했습니다.".
김정섭차장보는 정승화 총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부장님이 대통령 각하의 저녁 부름을 받아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총장님을 모시고 있으면 끝나는 대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정승화 총장은 기분이 나빴다. 돌아갈까 하다가 전에도 있었던 비슷한 일이 생각났다. 지난 봄인데 김재규가 3군 참모총장들을 저녁에 어느 음식점으로 초대해놓고서 불참하였다. 갑자기 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때도 김학호정보부 감찰실장이 대신 와서 접대를 하다가 김재규가 늦게 합류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나동 안방.
김계원은 왼쪽 자리에 앉은 김재규 부장이 너무 몰리는 것이 안타까웠다. 분위기를 바꾸어보려고 이렇게 말했다.
"김 부장이 칵테일도 잘합니다. 그런데 김 부장 칵테일은 어떻게 하는 거요."
"술 한 잔에 물 두잔을 부으면 됩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김부장에게 위로의 뜻으로 술을 권했더니 큰 잔에다가 양주를 희석시키지도 않고 그냥 부어서 돌려주는 것이었다. 김재규가 암살준비를 위해서 만찬장을 뜬 시각은 지금까지의 수사발표에선 저녁 7시 직후로 되어 있었다.
이번에 기자가 관련 수사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저녁 6시40분경임이 확실해졌다.
김재규가 두번째 자리를 뜨고 나서 상당히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아마도 10∼15분간 이석) 김계원 비서실장은 불안해졌다.
그는 '각하를 모시고 하는 행사인데 주인이 되는 사람이 자리를 비워 송구스럽고 그 전에 정치문제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때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혹시하는 생각이 나서 불안해졌다'(합수부진술서).
그 사이 김재규는 슬그머니 안방을 나와 마당을 지나서 쪽문을 통해 한 50m 떨어진 본관으로 갔다. 식당으로도 쓰이는 1층 회의실 문을 여니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2차장보가 환담하고 있었다. 상의 양복차림의 김재규는 좀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정 총장, 정말 미안합니다. 계엄사태하에서 정보부가 여러 가지로 판단한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좀 나누려고 했는데 대통령 각하께서 갑자기 만찬에 부르시니 안갈수도 없고...금방 끝내고 올테니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시오.".
김재규는 억지기가 있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이 사람, 국내담당차장보는 저보다 나라 안이 돌아가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빨리 끝내고 오겠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기다려주십시오. 김영삼이도 내가 다 손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제 말을 안들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정 총장과 김정섭 차장보를 모시는 책임을 지고 있던 윤병서비서는 김재규가 이 두 사람과 한 5∼10분쯤 이야기하다가 나왔다고 기억했다.
김재규는 회의실을 나와서 2층으로 올라갔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 그는 엄청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차 실장을 쏘아버릴까. 그런데 차 하나 쏘아서 근본 문제 해결은 안 되지 않는가. 한다면 각하를 제거해야지 하고 거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김재규가 범행 이틀 뒤인 10월28일에 작성한 자필진술서의 이대목은 당시 살의의 발전경로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범행 직후에 썼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그 뒤 여유가 생겨서 자신의 행동을 과장, 미화, 합리화하기 전 비교적 순수한 상황 아래에서 작성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 진술서 그대로 그의 살의를 격발시킨 것은 이날 밤 차 실장의 오만방자한 언동이었다.
대통령과 저녁을 같이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육군참모총장을 별실로 초대할 때부터 김재규는 살의의 불씨를 지펴가고 있었으나 확정된 의지는 아니었다.
이날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다른 모습을 보였더라면 김재규의 생각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분위기는 두 사람이마치 짜고 그러는듯이 김재규 부장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울컥해버린 김재규는 문제의 차지철을 죽이려고 하는데 대통령이 걸림돌이 되었다.
'더구나 대통령은 저 오만방자한 차지철을 편애해왔고 이 날도 합세하다시피하여 나를 몰아세우지 않는가'하는 생각. 바야흐로 존경이 증오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계속]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4)
조선일보
입력 1997.11.01. 18:50
## ⑭"각하까집니까" ##.
'박정희까지 쏘자'는 결론에 도달한 김재규에게는 옆집에 초대해둔 정승화총장의 존재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김재규는 화장실에서 나오자 책장 선반 책 뒤에 감추어 두었던 32구경의 작은 독일제 호신용 권총을 꺼내 바지 오른쪽 호주머니속의 유달리 크게 만든 라이터용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동의 관리책임자인 남효주는 대통령 일행이 식사중인 안방에 음식을 들고 들어갔다가 부장이 보이지 않자 신경이 쓰였다. 방을 나오자마자 현관으로 가 보았다. 부장의 신발이 없었다. 주방으로 돌아오니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이 보였다.
"과장님이 어디에 계신가."
"저 뒤 어디에 있을 것입니다.".
남효주는 경호원 대기실로 가 보았다.
의전과장 박선호를 발견하고는 "부장이 나가신 지 오래되었는데요"라고 일러주었다.
박선호는 항상 갖고 다니는 손전등을 비추면서 구관쪽으로 건너 갔다. 구관과 본관 사이 쪽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장민순경비원에게물어보니 부장은 5분 전에 쪽문을 지나 본관으로 갔다고 했다.
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은 본관1층에 있는 부속실에서 오전에 하던 여권서류정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박 대령은 김재규가 정승화 총장을 만난 뒤 2층으로 올라가서 권총
을 꺼내 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내려올 때까지도 서류정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본관정문에서 인터폰으로 "부장이 나가십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현관 문밖으로 나가서 부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김재규는 본관을 나오더니 박흥주 대령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않고 구관 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박선호는 본관 현관을 걸어내려오는 김재규 박흥주 두 사람을 만나자 프래시를 비추면서 부장 곁을 따라갔다.
박흥주는 뒤에 처졌다.
구관으로 통하는 쪽문에 거의 다 가더니 김재규는 돌아서서 박 대령을 향해서 이리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세 사람은 구관으로 들어가서 잔디밭에 들어 섰다. 김재규가 말했다.
"둘 다 이리 와.".
어두운 가을밤 찬 공기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되었다. 박흥주가 보니 김 부장은 '주기가 어리고 긴장된 표정'이었다. 김재규는 상의를 들어올리고 오쪽 바지 호주머니를 툭툭 치면서 흥분된 말투로 말했다. 박선호가 보니 호주머니가 불룩했다. 박 대령의 시야에는 호주머니에 있는 권총이 살짝 들어왔다.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잘못 되면 자네들과 나는 죽는 거야.오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군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 너희들 각오는 다 되어 있겠지."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박선호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박흥주의 표정을 슬쩍 보았다. 박흥주는 '느닷없는 이야기에 입만 벌리고 듣는 수밖에 없었다'(합수부 진술서)면서도 "예"하고 대답했다.
침통한 표정이었다. 김재규는 본관쪽을 가리키면서 "이미 총장, 차장보도 와 있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박선호가 입을 김 부장의 귀에다 대듯이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각하까집니까.".
김재규는 고개를 끄떡하면서 "응" 했다.
박선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오늘 저녁은 좋지 않습니다. 경호원이 일곱 명이나 됩니다. 다음에 하지요."
"안돼. 오늘 처치하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되어서 안돼. 똑똑한 놈 세 명만 골라 나를 지원해. 다 해치워.".
박선호가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자 김 부장은 다시 밀어붙였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박선호는 엉겁결에 "예,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군검찰 진술조서).
"좋습니다. 그러시면 30분의 여유를 주십시오."
"안돼. 너무 늦어.".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로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알았어.".
김재규는 박흥주 대령을 향해서 느닷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라고 중얼거리더니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쳤다. 그리고는 두 말 없이 나동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박선호는 프래시를 비추면서 부장을 따라서 나동 현관까지 수행하였다.
이들의 수작하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던 본관정문초소근무자 이말윤에 따르면 이 세 사람들이 붙어 서서 대화한 시간은 1분쯤이었다고 한
다. 이 짧은 시간에 무슨 진지한 논의가 있을 수 없었다. 김 부장의 일방적인, 저돌적인 선전포고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엄청난 계획을 던져놓고는 그냥 만찬장으로 들어가버렸다.
이 계획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열쇠는 이제 김재규의 손을 떠나 두 박씨 손에 넘어온 셈이었다.
나중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관 앞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박흥주는 당시의 기분을 이런 줄거리로 설명했다.
[부장이 "오늘 해치운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부장과 박선호 과장 사이의 대화 내용과 그 뒤에 계속되는 말을 듣고보니 대통령 각하와 경호실장은 자기가 살해할테니 경호관들은 박선호와 제가 처치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김 부장의 말을 듣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어져서 제 사무실로 오면서도,부장은 "민주주의를 위해서"하면서 각오가 서서 들어갔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골똘히 했습니다. 저는 이미 호신용 25구경 베리타 권총을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었으나 너무 작아 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관 주차장에 가서 부장 차에 두고 내렸던 저의 휴대용 가방을 열고 독일제 9연발 권총을 꺼내어 일곱 발을 장전한 다음 왼쪽 허리에 찼습니다. 이 총은 1978년4월1일 수행비서관으로 부임하면서 정보부에서 지급받은 것이었지만 너무 무거워서 차고 다니지 않고 항상 가방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1층 부속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육군총장과 정보부 2차장보도 와 있다. 준비도 다 되어 있다고 한다. 부장은 한국에서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분이다. 부장은 나도 모르게 이미 모든 준비와 계획을 다 해놓고 있다가 오늘 기회를 포착하게 되자 갑자기 명령하는 것이아닌가.
한편으로는 저의 마음 한 구석에 언제 그런 준비를 했을까 하는 의심도 생겼으며 착잡한 심경이었습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갔습니다. 내가 김 부장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는 것인데…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정동 본관 1층 부속실에서 생각에 잠긴 박흥주 대령이 초조해 보였던 모양인지 옆에 있던 윤병서 비서가 물었다.
"과장님 왜 담배만 피우세요?"
"아무것도 아냐.".
[계속]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5)
1부 최후의 24시간
해병대 .
조선일보
입력 1997.11.0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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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최후의 24시간
해병대 ##.
김재규 정보부장은 암살준비 지시를 내릴 때 주로 의전과장 박선호와 이야기했다. 궁정동내에서 경비 병력을 관장하고 있는 것이 박선호였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경호원들을 자신의 지휘하에 움직이는 병력속에 집어넣어놓고 있었던 박선호가 그 시간에는 실질적인 경호실장이었다. 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은 이날 밤의 두 주역 김재규와 박선호가 짜놓은 상황 속에서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역할을 했다.
박 대령의 변호인 태윤기가 1심법정에서 "피고인은 군인 신분이라 단심으로 형이 확정이 되는데 마지막으로 빠진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라고 했더니 박흥주는 이렇게 말했다.
"이 건과 관련해서는 사전 계획을 몰랐습니다. 갑자기 말을 꺼내 그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상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마땅한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박선호도 김재규가 만찬장으로 돌아가고 난 뒤 고민에 빠졌다. 그도 '총장이 와 있고 2차장보가 안 올 시간에 와 있으니 국내외 사정이 긴박하구나.부장이 총을 차고 나와서 각오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내가 거부를 하면 성공이건 실패이건 살아남지를 못하겠구나. 부장이 육군총장과 함께 유혈 쿠데타를 하는구나'하는 판단에 도달했다. 박선호가 보기에는 부장이 단독으로라도 할 것 같았다. 부장이 각하도 포함된다고 했지만 차지철 경호실장만 사살하고 각하는 납치 정도 하겠지하는 생각도 해보았다.경호원들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데는 제미니차로 총만 싣고오면 2분도 안걸리는데 처음에는 한시간을 요구할까 하다가 30분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박선호는 항소심에서 "그때 왜 부장님을 쏘거나 밀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저 보고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저는 그런 배신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라고도 했다.김재규는 법정에서 "명령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무조건 복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시간을 두지않고 강하게 명령했던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이날 박선호가 취한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와 김재규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다. 이때 나이가 45세이던 박선호는 대구의 대륜중학교 학생시절에 체육교사 김재규를 알게 되었다.
박선호는 1953년에 해병학교 16기로 들어가 소위로 임관한 뒤부터 파월 청룡부대 대대장, 해병서울보안부대장, 해병사령부 인사처장을 거쳤다. 1973년 10월 10일에 해병대가 해군에 흡수되어 통합될때 예편했다. 박선호는 스승이기도 한 김재규가 3군단장으로 있을 때 중학동기들과 함께 가서 인사를 나누는등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병대에서 전역한 다음해인 1974년 4월 그는 당시 정보부차장이던 김재규의 도움으로 정보부 총무과장으로 취직했다. 김재규가 건설부장관으로 나간뒤에는 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과장으로 옮겼다. 기자는 당시 부산에서 발행되고 있던 국제신문의 사회부기자였다. 1976년 1월1일자 사회면 머릿 기사로 '포항에서 유징이 발견되었다'는 요지의 기사를 썼다가 박선호 과장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정보부가 포항에서 석유시추를 하고있었는데 유징 발견 사실은 보도금지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그때 기자의 기억에 남게 된 박선호는 '날렵한 몸집을 가진 부드러운 신사'였다. 소위 기관원으로서의 건방진 태도를 느낄 수 없었다. 아마도 기자가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박선호는 그해 초에 부산지부 정보과장직에서 면직되었다. 당시 부산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석진강 검사가 대대적인 밀수 수사를 지휘하고있었다. 밀수세력을 비호해온 정보부 직원들도 다수 조사를 받았다. 이 검찰수사팀의 동향을 알아보려고 박선호가 도청을 시켰는데 이것이 정보부의 내부 감찰에 걸려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박선호는 군대와 정보부의 엄격한 상명하복 관계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김재규와는 의리와 인정에 의해서도 운명적으로 엮여있었다. 박선호는 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과장직에서 면직된이후 한 1년 실직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김재규의 도움을 받는다. 김재규는 그때 정보부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건설부장관 출신인 김 부장은 박선호를 현대건설의사우디 주베일 항만 건설현장 안전차장으로 취직시켜주었다. 1977년 4월의 일이었다.
한 여덟 달 근무하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온 그는 중앙상사라는 유류 수입상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해 8월초 김 부장의 의전과장으로 있던 김인영이 회사로 찾아왔다. 그는 "부장님께서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 하신다"며 회사의 경영상황을 물어보고 돌아갔다. 8월7일 정보부장비서실장 김갑수장군이 "좀 와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정보부에 와서 다시 근무해볼 생각은 없는가."
"무슨 보직인데요."
"아직은 모르겠는데 부장이 알아서 해주실 거야.".
박선호는 자신의 회사가 그렇게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라 정보부
근무 제의를 승낙했다. 김갑수 실장은 그 자리에서 박선호를 부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김재규 부장은 박 과장에게 의전과장 자리를 제의한 뒤 "오늘부터 근무를 시작하라"고 했다. 그날로 김인영 과장과 인수인계를 했다. 이렇게 하여 박선호는 이 역사적 사건에 말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박선호는 군 검찰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 부장은 본인의 은사이고 직업도 알선해주시고 본인을 알아주고 아껴주어 고마운 생각을 항상 하여왔습니다.삼국지 대망 같은 책을 많이 읽어라, 검소하게 생활하라, 우쭐거리는 행동은 삼가라는 등 좋은 말씀을 하여 왔기에 평소부터 존경해왔습니다.".
박선호는 이날 김재규를 보좌하여 전광석화 같은 암살작전을 펴는데 있어서 해병대의 기질을 충분히 발휘한다. 이날 작전의 성공여부는 이 사나이의 행동여하에 달려 있었다. 그는 최초의 순간적인 주저와 번민을 즉시 극복하고 과단성 있게 행동을 개시한다. 박선호는 김재규의 암살지령을 들은 뒤 골목길 건너편의 가동이라 불리는 신관 2층 자신의 사무실로 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동원인원 선발을 생각한 바 우선 떠오르는 인물이 이기주였습니다. 그 본인 밑에서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인물로서 해병대 출신인데 무엇을 시켜도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본인이 의전과장으로 부임한 이후 경비직에서 관리직으로 보직을 변경시켜주어 본인의 은
혜를 입은 자였습니다.(합수부1차진술서)].
그는 가동 1층 경비원 대기실을 거쳐 2층 사무실로 올라가면서 경
비원 관리책임자인 이기주를 불러올렸다.
"권총 하나 갖고 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