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이지만 한번 읽기를 권한다. 앞의 글도 마찬가지다.
이 글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영남패권주의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지난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의 영남의 선택에 대해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즉, 왜 영남이 비영남 출신인 이회창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느냐에 대한 부분이다.
[ 왜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했을까..? ]
지금 생각해보면 김영삼은 87년 대통령선거 결과에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자신이 민주화운동의 기수이며, 영남 후보인데 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대선 직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노태우 33%, 김영삼 28%, 김대중 26%가 나왔을 때에도 자신의 승리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은 것 같다. 본래 야권 지지층이 여론조사에 잘 응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령 응하더라도 본심을 잘 밝히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만 공정하게 치루어진다면 자신이 당선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부산-경남에서 자신이 7:3 정도로 우세하고, 대구-경북에서 5:5 정도로만 표를 나눠갖는다면 수도권에서의 우세를 토대로 노태우와 김대중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당시의 전두환 정부가 김영삼 진영과 김대중 진영에 다양한 경로로 침투하여 거짓 여론조사를 흘렸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즉, 3자 혹은 4자 대결에서 모두 양김씨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야권후보 단일화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정권의 명운을 걸고 공작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김영삼이 부산-경남에서 노태우와 5.2 : 4.8 정도로 거의 비슷하게 나눠가졌을 뿐만 아니라 대구-경북에서 2.5 : 7.5로 허망하게 패배한 것이다. 즉, 아무리 노태우가 TK출신 후보라 할지라도 군사쿠데타의 원흉이요, 광주학살의 당사자인 후보에게 그토록 몰표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구-경북에서의 몰표가 노태우의 제6공화국 탄생의 일등공신이었음은 우리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호남에서도 김대중에게 몰표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을 TK의 노태우에 대한 몰표와 동일한 잣대로 바라보아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불과 7년전의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부모형제와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 김대중을 중심으로 단결할 수 밖에 없었음은 역사적 필연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남이 김대중에게 투표하지 않았다고 시비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영남 출신인 김영상에게 그토록 박하게 표를 준 것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다. 한쪽은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요, 광주학살의 원흉이고, 다른 한쪽은 민주화운동의 기수요, 야당을 굳건하게 지켜온 버팀목이었는데...
이때부터 김영삼은 깊은 시름에 잠기게 되었다. 더욱이 곧이어 실시된 총선에서 평민당에게조차 밀려서 제2야당이 되었을 때에 그는 거의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이 누구보다도 강했던 그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김대중은 여소야대 국회의 야권 파트너로 계속해서 국민과 언론의 주목을 받는 현실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 민정당의 김영삼에 대한 달콤한 유혹이 시작된다. 물론, 비슷한 제의를 김대중에게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애드벌룬 성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아무리 김대중이 대통령병에 걸려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형제와 친구가 바로 8년전에 독재자들의 총탄에 맞아 운명을 하였다는 현실을 부정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때에 김영삼이 밤을 새워가면서 고민했던 문제는 영남패권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대구-경북을 비롯한 영남이 노태우에게 충격적인 몰표를 주었음을 누구보다도 실감한 그에게 있어서 영남패권주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놓인 길은 단 두가지. 영남패권주의와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영남패권주의와 정면으로 맞설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이 계속해서 대권후보로 나오는 이상 영남은 노태우에 이어서 누군가를 내세울 것이고 (박태준, 이종찬, 박철언 등 인물이야 많지 않았던가) 그리되면 자신은 영원히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영남패권주의와의 타협 쪽으로 결정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1990년 3당합당 당시에 영남에서는 환호성이 일제히 터진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노무현을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사실상 그 목소리는 미약했다. 왜냐하면 대중적인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김영삼이 여당 간판으로 출마하면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혹 그가 후보가 되지 못하더라도 경선불복의 멍에를 안고 싸울 경우 영남 후보가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정말로 3당합당이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구국을 위한 결단이었다면 그후에 김영삼에 대한 흔들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합당후에 민정계와 공화계는 끊임없이 김영삼을 흔들었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김영삼은 골수 영남패권론자인 김윤환, 김재순 등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것은 3당 합당 결정에 이은 김영삼의 두번째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굴복이었다.
결국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시점에서는 이미 김영삼도 영남패권주의자가 되어있었고, 그 주변이 모두 영남패권주의자로 채워져있었음은 물론이다. 그 증거로 부산 초원복집에서 김기춘 등이 관계기관장들을 모두 모아놓고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좌절될 경우 모두 신안 앞바다에 빠져서 자결하자는 이야기를 하였음이 도청 폭로를 통해 밝혀졌었음에도 여전히 영남은 김영삼에게 몰표를 주었고, 이것이 김영삼 당선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 왜 영남은 이회창을 선택했을까..? ]
이회창의 정계입문 과정은 매우 드라마틱했다. 감사원장을 지내다가 김영삼 정부의 국무총리로 입성했을 당시에 그의 국민적 인기는 가히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도 할 말은 다하고, 원칙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이 매우 신선한 충격을 준 것 같다. 결국, 김영삼과의 갈등으로 그의 총리 재임은 단명으로 끝났고, 그후 김영삼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게 된다.
사실 당시 신한국당에는 6룡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다 도토리 키재기 정도의 수준이었고 이로 인해 외부영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회창, 이수성, 이홍구 등 김영삼 정부의 역대 총리들이 대거 입성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민정계는 이한동, 이회창, 이수성 등을 놓고 갈팡질팡하고 있었으며, 민주계 역시 이인제와 이수성 등을 놓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민정계는 이회창 카드를 들고 나왔고, 민주계는 이인제, 이수성 뿐만 아니라 이회창까지도 염두에 두는 가운데 양측의 타협의 산물로 대세가 급속하게 이회창으로 쏠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 결과는 이회창 1위, 이한동 2위, 이인제 3위로 결론났는데 이때부터 이인제의 돌출행동이 시작된다. 경선 직후 불거진 이회창 두아들의 병역비리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이인제는 김영삼과의 독대를 통해 독자후보 출마를 굳히게 되고, 이로인해 이회창과 김영삼은 극도의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사실 당시에 김영삼과 극도의 긴장관계를 형성한 것은 비단 이회창 진영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 정서였다. 이인제의 독자 출마로 김대중이 어부지리를 얻을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상태에서 영남은 이회창 진영으로 급속하게 여론이 쏠리고, 이를 의식한 이회창이 김영삼 인형 화형식을 거행함으로써 영남패권주의에 불을 붙히게 된다. 이것으로 이회창은 영남패권주의에 완전하게 굴복하게 된다.
이회창이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패배한 이후 이회창 진영은 당권-대권 분리에 따라 총재직에 있던 조순을 사실상 축출하고 다시 당권을 손에 쥐게 되며 그 과정에서 하순봉, 김기재, 이상득 등 민정계 인사들을 중용하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좌를 다시 찾게 된다.
사실 이회창이야말로 한때는 매우 개혁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5공초기에 대법원판사였던 이회창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판결을 여러차례 내려서 개혁판사, 소신판사 등의 찬사를 들었던 인물이고, 결국 그러한 판결로 판사직을 내놓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한나라당의 당권을 쥐기 위해서는 영남패권주의에 굴복하는 것이 절대적인 과제였고, 이미 지난 97년 대선에서 영남패권주의의 위력을 실감한 그는 당연히 그러한 수순을 밟아갔던 것이다.
내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김영삼도 이회창도 영남패권주의에 굴복했기 때문에 영남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무현이 부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일 당시에 노무현이 국민회의를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영남패권주의에 영합하는 발언 한마디만 했더라면 아마도 그의 당선은 무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그 길을 부정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지금 노무현이 하고 있는 일은 사실상 영남패권주의와의 타협이다. 나를 비롯한 적지않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영남인임에도 불구 영남패권주의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는 점인데, 그가 영남패권주의와 타협을 한다면 도대체 왜 그를 지지했는지가 우스워진다. 지금 노무현이 겪고 있는 지지층 이탈의 상당부분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왜 이회창은 97년과 02년 연속해서 실패했을까..? ]
지난 87년 선거와 92년 선거에서 강원도와 충청도는 사실상 영남과 동일한 지지패턴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97년에는 DJP 연대로 인해, 그리고 2002년에는 행정수도 이전 문제로 인해 사실상 영남패권주의로부터 이탈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수도권에 있는 젊은 유권자들이 인터넷에서의 소통에 힘입어 하나의 정치세력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97년 선거에서는 이인제 효과, 그리고 2002년 선거에서는 단일화 효과라는 상징적 이벤트가 있었다. 그러나 향후 이러한 정치 이벤트 없이도 사실상 영남 이외의 지역에서 영남패권주의가 득세할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그러므로 결국 영남 스스로가 영남패권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이상 영남의 고립은 계속 심화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하자면 영남패권주의의 지금까지의 희생자는 호남이지만 앞으로의 희생자는 영남 자신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 영남패권주의의 증거들... ]
내가 이러한 글을 쓰는 것에 대해 특히 영남인으로부터 상당한 비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시대소리에 들어와서 이 글을 읽을만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분명 그들은 영남패권주의에 입각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며, 개혁과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포함한 영남인들은 분명하게 참회하고 반성해야 한다. 내가 아래에 제시하는 근거들로 인해...
- 87년 대선 당시에 노태우가 영남에서 얻은 표는 340만, 김영삼이 영남에서 얻은 표는 280만표였다. 그리고 김대중이 얻은 표는 고작 30만표였다.
- 90년 3당 합당 당시에 호남이 아닌 영남 지식인들의 반대와 반발은 매우 미미했다. 그렇기에 노무현과 통추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당시의 어떠한 제도권 언론도, 어떠한 유력한 영남 지식인들도 이에 대해 항거하는 사람은 없었다.
- 92년 초원복집 사건에서 김기춘 등 영남패권주의자들이 노골적인 호남비하 및 지역감정 유발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 영남인들은 김영삼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주어 대통령에 당선시킨다.
- 97년 이회창 두 아들의 병역비리, 세풍사건, 안풍사건 등으로 그의 후보 자격이 크게 문제시되었음에도 불구 영남은 이회창에게 사실상의 몰표를 몰아준다. 특히, 대구-경북에서 그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 2001년 여수가 국제 해양 엑스포 유치에 실패했는데 애시당초 국가 차원의 홍보나 지원도 미약했을 뿐만 아니라 유치 실패 이후 급속도로 잊혀져갔다. 이에 비해 부산 아시안 게임의 경우 북한응원단 입성 및 남북 합동 응원 등으로 연일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최근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에 대한 책임이 무주 및 김대중 정부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2014년 무주의 유치권 확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평창의 재도전에 대해서만 연일 이슈화하고 있다.
- 2003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서 최병렬이 선출된데 이어 홍사덕이 원내총무, 정책위의장에 이강두가 선출되는 등 전원 영남 출신으로 채워졌음에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전혀 없다. 만일 민주당이 한화갑-김옥두-김원기로 당 3역을 선출했더라면 아마도 엄청난 언론의 화살을 맞았을 것이다.
-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 일부 부처에서 명백한 영남 편중 인사가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언론과 영남 지식인들의 문제 제기가 없거나 매우 미약했음. 김대중 정부가 끊임없는 호남편중 인사 시비에 시달렸던 것과 상당히 대조적임.
-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영남패권주의의 증거는 지금 이 시간에도 박근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이 아무런 반성이나 참회없이 버젓이 세상을 활보하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경우 수천억의 비자금을 챙기고 이를 국고에 환수시키지도 않았음에도 그냥 흐지브지하게 넘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서 그야말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 나도 영남패권론자였다... ]
나의 부모님은 두 분다 강원도 출신이며, 가친은 공직 생활을 30년 넘게 하셨다. 그런데 비록 출신지역이 영남이 아니어도 가친은 공직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남패권주의에 편입되셨으며, 내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시절에 "전라도 친구들은 믿을 수가 없고, 더욱이 데모를 많이 하는 친구들이니 그들과는 친하게 어울리지 말아라. 너가 잘못된 길로 물들까 염려된다"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 자신도 호남출신 친구들을 매우 경계하면서 부담스러워했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1980년 5월에 나는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언론통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국내와는 달리 나는 일본과 독일 언론의 생생한 보도를 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가친은 "저런 몹쓸 놈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저거 김일성이 사주받은 빨갱이들이야..."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중학생으로 이에 대해 어떠한 가치판단도 할 수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내가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까지는 실로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나는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후보를 양보하지 않는 것에 대해 통탄해마지 않았다. 노태우-김영삼 대결에서는 영남의 표가 갈리고, 호남에서는 김영삼 몰표가 나올테니 김영삼 필승구도인 반면, 노태우-김대중 구도가 되면 영남에서 노태우에게 몰표가 나올테니 김대중 필패구도라고 생각하며... 그러면서도 정작 왜 영남이 노태우-김대중의 대결에서 노태우에게 몰표를 주는지에 대해서는 문제시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과거를 후회하며 살아간다. 1987년에 내 부모님과 내 친척 어른들이 노태우를 찍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역사가 후퇴하는 것에 나도 공범이 되어버렸다. 비록 내가 대구-경북에 살지는 않았지만 내 주변에서 노태우에 대한 몰표가 나온 것이 지금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노태우를 찍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아직도 후회와 반성을 하지 않고 여전히 김대중과 호남을 비난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나는 지금도 영남패권주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로 힘겹고 어두운 나의 현실이다...
[ 없다고 하며 외면할 것이 아니라 함께 극복해야 한다 ]
만일 영남패권주의가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한가지만 묻고싶다. 이제 최병렬 체제하에서 한나라당은 지도부가 완벽한 영남인사로 짜여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구기득권 세력을 대변한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총선에서 영남이 한나라당에 몰표를 줄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영남패권주의가 아닌 다른 어떤 말로 설명할 것인가..?
나 스스로도 영남패권주의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믿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년 총선에서의 영남의 선택에 대해 희망을 가지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남패권주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과거의 잘못된 투표행태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해야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왜 영남이 노태우를 지지했고, 김영삼을 지지했는지에 대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인정해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영남패권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는 호남이 아니라 영남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정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