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고향~ 마음의 고향
무릇 사람들은 고향을 그립다고 말한다. 고향이 그리워 몰래 눈물 흘리며 부르는 향수에 길이 막혀서 찾지 못하는 망향의 서러움이나 고향의 푸른 잔디를 가슴 조이며 그리워하는 사형수의 애절한 노래를 들으며 고향을 찾아가지 못하는 고향 잃은 이들의 노래를 부르며 함께 망향의 그리움을 노 래하는 이들도 많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집을 떠난 방랑아가 객지의 아픔을 맛보고 난 뒤 쭈그러진 집일망정 찾아드는 곳이 가족이 있는 오두막 이듯이 아지랑이 이는 저 강 건너 들판이거나 석양넘어 황혼 짙은 산골짝 산마루 시냇물이 흐르는~ 꼭 그림 같은 아름다운 곳이 아 닐찌라도 너무나도 눈에 익은 고향의 따스함인지도 모른다. 향수에는 아픔이 있고 망향에는 서러움이 있다. 지금을 사는 넉넉한 보금자리에서 가슴 쓰리게 고향을 그리거나 향수에 젖어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이 한 맺힌 아픔으로 고향노래 부르는 이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가모가와 언덕의 우리집 고향~ 멋없는 세월을 살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고향이 지금을 사는 이곳이 내 고향인 듯싶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1~2년 다녔든 초등학교가 있는 부모님의 고향이고 중고등학교를 다닌 6년 동안의 사춘기의 중소도시가 고향일 수도 있겠고 천방지축 바쁘게 뛰어 다닌 4년 여의 서울에서의 대학시절과 군 복무시절의 청춘기가 내 젊음의 모든 것을 품어 준 고향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런 고향들 이 가슴 싸할 정도로 그리운 고향일까싶은 생각에 거부감이 도리질을 한다. 해방 직전에 부모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고 할머니가 계신 곳이기도 해서 무심코 이곳이 내 고향이 려니 여기면서 자라다 문득 아버지께 왜 이곳에 돌아왔느냐고 여쭈어 본 적이 있다. "갈 곳이 없어서~" 하시면서 "고향이 좋아서 온 것도 아니야"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고향이 반가워서 온 것도 아니고~ 때가 되면 다시 떠날는지 모른다." 내가 11 살 되던 해 눈 나리는 밤 아버지와 내가 단둘이 1년동안 살던 2층짜리 집을 비운채 열쇠만 채우고 트렁크 하나만 들고 나나오역(七尾驛 ; 일본 이시카와현)발 밤 기차를 타고 오사카에 도착했다. 시도 때도 없이 몰아 치는 미군비행기의 폭격을 피해 폭격 이 뜸한 시내 중심가 깃사텡(喫茶店 : 찻집)과 영화관에서 숨어 있다가 늦은 밤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타기 위해서 시모노세키(下 關)행 급행열차를 탔다. 지금 생각하면 이웃도 모르게 도망친 야반도주(夜半逃走) 바로 그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둑질한 것도 아니었고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으로 분류되어 감시받는 요시찰 신분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나는 하루밤 사이에 어렵사리 일본의 하늘과 다른 조선의 하늘 아래 사는 조선사람으로 달라졌다. 고향이라는 조선의 K읍에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부모형제 외에는 친구도 없었다. 전쟁막바지에 부족된 인력을 채우기 위한 강제징 용 등으로 직업이 없는 장정이 자유스로울 수도 없었다. 번득이는 경찰이나 군 모집계직원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집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감옥살이였다. 일본으로 떠났다가 20여 년만에 돌아온 아버지의 고향 땅이 결코 가슴 설레는 고향 땅이 아니었다. 자유스럽지도 못하고 직업도 없어 할 일 마져 없고 보니 오히려 눈총 맞으면서 자신을 필요로 하던 일본 오사카나 교토가 아버지에게는 안성맞춤의 고향 같았다. 초등학교 4학년인 나는 시골 읍내 셋방에 살면서 매일 같이 괭이나 낫을 들고 학교에 갔다가 산에 올라 송근유(松根油) 송탄유(松炭 油)용 뿌리나 가지를 잘라 모으면서 마초를 베어오고 여린 소나무 껍질을 벗겨 죽을 쑤어 먹을 솔속살을 긁어 왔다. 일본에서 살았으면 전시의 배급일망정 현미밥은 먹었고 보리밥도 모자라 소나무껍질 죽을 먹고 사료용 강냉이 껍질을 끼니로 메우던 거지 같은 세월은 살 지 않았을 것을~하면서 지지리도 고생시키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집안에 갇혀 지내는 아버지의 고향이 고향같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살며 보낸 내 초등학교 시절이 봉선화꽃 피는 고향이 라는 생각이 들 턱도 없었다. 고달픈 왜정이 해방과 더불어 끝나고 미 군정이 풀어 준 미곡 방출로 처음으로 쌀밥을 먹고 골방에 숨어 지내시든 아버지가 해방된 새 하늘을 보며 금융기관이 있는 부산으로 분주하게 나들이 하신다. 해방된 그해 겨울에 조선 땅에 처음으로 우리집이 생겼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가장 좋다는 집, 족히 100평이 넘는 대지에 한옥 30여 평이 우리집이었다. 해방 직전까지도 강냉이밥에 소나무 껍질 벗겨 끓여 먹던 우리가 쌀밥에 기와집에서 살다니~
쿄토의ㅣ 키요미즈 테라(淸水寺)
일본 쿄토(京都) 가모가와(賀茂川) 언덕에 줄지어 선 2층짜리 연립주택에서 살 때 아버지는 요즘 말하는 자유스러운 재택근무직이었다. 그 당시 쿄토는 세계적인 견직산업(絹織産業)의 메카로 명성이 있었고 20세기 초 중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에다 동남아시아 남태평 양 등의 경제불럭 형성으로 최대 최고의 경기를 영유하던 시절의 교토와 오사카의 경제는 호화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견직기술이 남다른 엘리트였다. 스카우트가 과열되면서 오히려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모략과 질시로 설자리도 없을 지 경이 되자 차라리 자유스러운 자영사업처럼 자택 근무로 필요로 하는 회사나 공장으로부터 주문을 받고 일하기 시작했다. 주문자의 견직물 무늬에 맞는 설계였다. 방안지에 연필로 무늬를 설계해 견직기에 설치하는 작업설계였다. 이 부문에서는 이 지역 독 보적인 기술자였다. 낮에는 집에서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주문받은 설계를 하고 밤이면 2층지붕(연립주택) 타고 건너가 이웃들과 하나부 다(화투)를 즐기는 가히 아버지입장에서는 생애 최고의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았다. 1942년 태평양 전쟁 발발과 동시에 환경은 바뀌었다. 비단(실크) 산업은 전쟁과 어울리는 산업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세무당국 의 뒷조사가 시작되었다. 빛 좋던 재택자영사업은 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이시카와현 나나오시(七尾市)로 소개 명령을 받고 소개되었다. 이때부터 세무당국과 야쿠쇼(役所 ; 시당국)로부터 추적조사등 줄곧 쫓기는 고난의 터널을 헤매게 되었다. 나는 학교 다녀와서는 엿을 고고 어머니는 엿장수로 아버지는 신발 고무창갈이등 가장 낮은 곳의 일거리로 끼니를 번듯 일했다. 나는 어머니께 왜 우리가 갑자기 거지 같은 일을 해야 하는지 물었지만 "너희는 알 필요가 없다. 전쟁 끝날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일하지 않으면 영락없는 징용소집 깜인 데다. 세무당국의 끈질긴 소득조사를 감당해야 된다. 일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낭패의 삶이 었다. 2년 후 고향인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항허가를 신청했지만 어머니 누나 그리고 동생은 허가증이 나왔지만 아버지와 나는 거부 되었다. 그 이듬해 아버지와 나는 12월의 눈나리는 밤 2층집 문을 걸어 잠근채 오사카를 거쳐 조선으로 탈출했다. 도망쳐 온 조선의 아버 지 고향이 결코 우리를 반기는 고향이 아니었지만 교토에서의 아버지의 고난의 결실(일본 세무당국의 추적자산)이 해방이 되자 우리의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버지의 땀 밴 감추어 둔 저축이었다. 일본 세무당국이 일본 쿄토에서 자유업으로 벌어 드린 조선인 아버지의 소득을 추적조사하고 세금을 부과 회수코자 하는 무자비한 행패 를 회피하기 위하여 본의 아닌 엿장수를 했고 징용대상인 무직자를 면키 위하여 신발 때움질을 했든 이유를 해방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해방을 맞고 고향 땅에 내집을 장만했지만 아버지가 정착할만한 고향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4년 후에 벌어진 여순사건(통상 여순반란 사건)으로 두 동생을 잃고 마땅한 직업조차 가질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도무지 마음 둘곳도 없는 낯선 고향이었다. 아버지가 지닌 견직 기술을 쏟아 부울만한 사업장도 없었고 고작 면방직계통 대규모 방직공장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감당할 분야가 달랐고 건국후의 좌우 갈 등의 계엄하에서 뜻을 펴 일해 본다는 것은 아예 가능성도 없는 분위기를 못 이겨 결국 인정도 없는 고향을 떠났다. 집과 예금은 여순사건에 잇닿은 6 25 동란으로 풍지 박산이 되고 동란 중에도 아버지 손수 제작한 모직류 방직기를 만들어 대중적인 홈스펀 양복지를 생산했지만 적은 자본금에 영업적 재간이 부족한 아버지는 이마져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 케이한지방(京阪地方) 견직업계를 휘어잡던 20~30대의 기술은 석유섬유의 발달과 인조견 등 대체재의 변천으로 서서히 쿄토의 견직산업의 사향화와 함께 마음의 고향이었던 쿄토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고향 잃은 아버지도 물같이 바람같이 세월 따라 지구 산책을 끝내시고 오직 아버지의 생각을 조금은 안듯한 내 자신도 마음의 고향을 지금을 사는 내 모옥에서 아마도 그랬을 것 같은 아버지의 마음 의 고향을 짐작해 본다. 이순신장군의 마음의 고향이 남해바다이었듯 내 뜻을 펼 수 있던 사나이의 고향이 필경 마음의 고향이라 강변해 보면서 목가적인 마음 의 고향이 사라진 지금이 허허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