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침공 1 - 히틀러의 분노와 유고슬라비아 내부의 분열
1940년 10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가 중립국이던 그리스를 침공해 격렬한 저항에 부딫치자 알바니아까지 후퇴하는 압박을 받았다. 이에 히틀러는 추축국의 위신을 세우고 독일 자국의 석유 대부분을 의존하는 루마니아의 유전지대가 영국군의 전략폭격에 노출될 위험성을 막기 위해 동맹국이던 이탈리아에 원군을 파병하기로 했다.
히틀러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이어 다음으로 유고슬라비아에게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군사동맹에 참가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섭정이던 파블 칼라조르제비치는 1941년 3월 25일에 독일의 압력에 굴복했다.
하지만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한 축을 이루던 세르비아인들과 군부에게 큰 불만을 안겨 주었다.
(1차 대전도 슬라브계열의 세르비아 청년이 친독성향의 게르만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를 암살해 게르만계열인 독일이 세르비아에 징벌을 이유로 참전하자 같은 슬라브족의 구원을 하기 위해 러시아가 참전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이 때문에 반감을 가진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된 육군사관들은 3월 27일에 반정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친독 유고정부는 무너지고 섭정 파블 칼라조르제비치를 대신해 친영파인 국왕 페탈 2세가 왕좌에 올랐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히틀러는 격노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징벌할 계획을 세웠다. 새로운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들은 추축국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히틀러의 노여움을 잠재울 순 없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제 1 차 세계대전 후에 설립된 국가여서 병력, 무기와 기재가 턱없이 부족했다.
대포는 노후화되었으며 기계화가 진행되지 않아 대부분의 수송수단은 말이 담당하였다. 대전차, 대공병기는 매우 부족해 자동화기는 소수의 보병에게만 지급되었다. 또 2개의 전차대가 있긴 했지만 110량의 르노 FT 17전차는 이미 구식화되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국산의 IK 3, 독일제, 이탈리아제, 프랑스제, 영국제의 기체를 모두 합쳐 416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신형기체는 한 대도 없었다.
유고슬라비아 육군은 동원에 의해 보병 28개 사단, 기병 3개 사단, 32개의 독립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침공이 개시될 당시에도 부대는 미편성된 상태라 수비대에 배치된 병력은 겨우 11개 사단뿐이었다.
인력동원을 완료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대의 보충률은 70% 정도였다. 독일군이 침입할 당시 유고슬라비아 육군의 숫자는 약 120만 정도였다.
유고슬라비아 육군은 세 개의 군단과 연안수비대로 조직되었다. 제 3 군단은 제 3군과 제 5군으로 편성되어 알바니아 국경지대의 방어를 담당했다. 제 2 군단은 제 1군, 제 2군, 제 6군으로 편성되어 도나우 강에서 드라비아 강에
이르는 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다. 주로 크로아티아 사람들로 구성된 제 1군단은 제 4군과 제 7군으로 편성되어 크로아티아에 배치되었다.
불충분한 전력에 고민하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에게 가장 큰 문제는 세르비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분열이었다. 가장 나쁜 표현으로 나타났던 것은 1941년 4월 10일에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제 4군과 제 7군이 일으킨 반란에 의해 이날 독립을 선포한 크로아티아 정부가 독일군의 자그레브 진주를 환영한다고 발표한 사실이었다.
독일 제 4공군은 7개의 전투단으로 구성되어 헝가리 반도로 보내졌다. 유고슬라비아의 배신행위에 격노한 히틀러는 징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명령을 하달했다. 1941년 4월 6일 오전 7시, 독일공군은 오스트리아와 루마니아의 비행장에서 전투기의 호위하에 300기의 폭격대를 꾸려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 시 폭격을 개시했다.
폭격기의 4분의 1이 융커스 Ju 87이었다. Do 17과 융커스 Ju 88로 구성된 중형폭격기가 도시를 폭격하는 사이 급강하폭격기는 유고슬라비아의 대공병기를 침묵에 잠기게 했다. 최초의 공습은 15분 간격으로 세번씩 이루어져 약 20분간 폭격했다. 이 때문에 베오그라드는 정부건물이 모여있는 중심부가 특히 피해를 크게 입었다.
폭격이 끝나자 약 1,000명의 시민들이 폭격에 희생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군의 각료 대부분은 이미 교외로 피난한 후라 이 폭격은 유고슬라비아 군의 통신과 연락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말았다. 중추부에 타격을 가한 독일공군은 그 여력으로 유고슬라비아의 비행장과 도로, 부대집결지를 집중적으로 파괴하여 독일군 지상부대의 지원을 도왔다.
빈약한 유고슬라비아 공군과 대공화력은 독일군에게 간단히 제압당해 독일군의 급강하폭격기는 건물 옥상높이에서 날아다녔다.
추축국에 의한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1940년 가을에 독일에서 구입한 60대의 Do 17K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기종을 장비한 유일한 항공부대는 두 개의 폭격기 부대로 이루어진 제 3 폭격기 연대였다.
제 63 폭격기부대는 스코피에 교외의 비행장, 제 64 폭격기 부대는 프리슈티나 근교의 비행장에 배치되어 있었다.
전투 중 클라리베오 항공기 생산공장은 3기의 Do 17K를 생산하기도 했다. 이 중 2대는 4월 10일에, 또 한 대는 4월 12일에 유고슬라비아 공군에 배치되었다.
독일공군은 첫 공격에서 26대의 Do 17K를 격파했다. 최종적으로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Do 17K 손실은 49대로 4기만이 공중전에서 잃었고 나머지 45기는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4월 14일과 15일에 걸쳐 남은 Do 17K 7대가 닉시치 비행장으로 날아가 국왕 페탈 2세와 정부요인들을 태우고 그리스로 피난하였다.
4월 15일 오후 4시, 독일 제 4공군 최고사령관이던 알렉산더 레이어 상급대장은 헤르만 괴링에게서 유고슬라비아 항공공격을 줄이고 급강하폭격기의 주력군을 그리스 전선지원에 보내라는 명령을 접수했다.
[페탈 2세